• 최종편집 2024-04-19(금)

전체기사보기

  • [숨은 중국 알기 (17)] 작은 거인 덩샤오핑, 마오쩌둥 시대 수습하고 새 시대 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은 산이고 덩샤오핑은 길이다”라고 말한다. 즉 청조 말기부터 시작된 약 100여 년의 혼란을 끝내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의 공적을 우뚝 솟은 산에 비유한 것이다. 반면 덩샤오핑은 경제적으로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켰고 정치적으로 마오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실용성을 평가하여 사통팔달로 통하는 길로 묘사했다.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어떠한 모습일까? 아마도 마오쩌둥의 시대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당시 강경 친마오의 4인방들은 영구혁명을 내세워 마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 과잉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킨 인물이 덩샤오핑인 것이다. 오늘은 덩샤오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주로 개인적인 특이 이력과 마오쩌둥과 차별되는 사항들이다. 덩은 1904년 쓰촨성(四川省)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덩원밍(鄧文明)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였고, 서구식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18년 14세 어린 아들 덩샤오핑을 시골 고향에서 4일 걸려야 도착하는 대도시 충칭(重慶)의 학교로 보냈고, 이어서 16세인 1920년 프랑스로 유학 보냈다. 반면 마오쩌둥은 1893년 후난성(湖南省)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아들이 고향에서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오는 부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베이징으로 상경했다. 마오는 관습과 기존체제에 반항적이고 주관이 강한 모습이었다. 덩의 프랑스 유학은 순탄하지 않았다.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해 제대로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다. 파리의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고, 같은 유학생 저우언라이 밑에서 적광(赤光)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 저우언라이와 인연의 시작이었다. 중국 유학생들이 귀국할 때 덩은 1926년 소련으로 옮겨 중산대학에 다녔다. 당시 소련 공산당은 아시아 공산 혁명을 위해 동방대학을, 중국의 혁명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중산대학을 세웠다. 1927년 귀국한 덩샤오핑은 그 해 8월 7일 우한(武漢)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비상대책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처음 만나게 된다. 마오는 정식 참석자였고 덩은 회의록 작성자에 불과했다. 덩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과 장정을 함께 하며 국공내전에 참여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중국 서남부 산악지대 해방을 담당한 제2야전군의 정치위원과 지방행정 책임자를 겸직하면서 능력을 발휘했고 1950년 10월 티베트 점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적으로 마오쩌둥에게 발탁돼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했다. 그 후 군사 지휘관보다는 정치위원과 공산주의 이론가로서 활동했다. 그러면 필자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덩샤오핑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다. 첫째 국내정치를 안정시켰다. 덩샤오핑은 문화혁명 때 주자파로 몰려 시골 트랙터 공장에 4년간 유폐됐고 자신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은 홍위병의 핍박으로 불구가 됐다. 그러나 덩은 마오와 문화혁명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보복을 최소화했다. 한풀이와 보복의 차원을 넘어 통합과 발전의 관점에서 중국을 새롭게 출발시킨 것이다. 마오 시대를 “공이 7이고 과가 3이다”라고 정리하고 더 이상 소모적인 과거사 논쟁에 휩싸이지 않게 했다. 무엇보다 인적청산 대신 제도를 개선해 나갔다. 1인 절대권력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구조를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고, 권력투쟁의 원천인 권력의 승계도 지금의 지도부가 합의에 의해 차차기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제도화했다. 이런 제도에 의해 탄생한 지도부가 바로 후진타오와 시진핑이었다. 둘째, 마오는 자신의 이상과 이념에 중국을 꿰맞추려한 이상주의자였다. 반면 덩은 “고양이가 검은 색이든 흰색이든 관계없다.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현실주의자였다. 이념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개혁개방(경제개혁, 대외개방)을 추진하면서 덩샤오핑의 신념은 확고했다. “가난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다”, “먹을 것을 가진 자가 결국 모든 것을 갖는다“라며 경제적 현실을 이념보다 중시했다. 실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국 사회는 평등이라는 공산주의 교조적인 사상에서 벗어나 경쟁과 효율의 개념을 도입해 고속 발전하기 시작했다. 선부론(先富論)도 나왔다. 능력 있고 노력한 자가 먼저 부자가 되고 그 이익을 공유하며 이를 토대로 여러 명의 부자가 탄생하는 개념이다. 자본주의 개념을 받아들인 중국 경제체제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억눌려져 있던 중국인의 부자 마인드를 깨워 인민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돈을 벌게 했다. 셋째,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시대 흐름에 적응했다. 마오쩌둥은 제3차 세계대전을 염두에 두고 소련 및 미국과 전쟁을 준비하는 ‘전쟁불가피론’자였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전쟁가피론’을 주장하며 국방비를 줄여 경제발전에 전념했다. 1979년 미국과 국교수립을 하면서 향후 100년간 맞서지 말 것을 주문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충분히 실력을 갖춘 후 나서라는 의미다. 중국은 이런 자세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고속 발전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한국과 수교를 결심했다.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한국을 냉전의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한국과 수교한다면 얻게 될 국가이익으로 ① 경제적 협력이 가능하고, ⓶ 대만을 고립시킬 수 있으며, ③ 1989년 6.4 천안문 사태로 서방으로부터 고립당한 상황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았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흰 고양이였다. 문제는 침입자를 경고하고 완충해주는 검은 고양이인 ‘북한을 어떻게 설득하고 달래는가’였다. 덩샤오핑은 북한에 최대한 정성을 기울였다. 군사원조를 통해 북한의 안보불안감을 달랬고, 경제원조로 신뢰를 보였다. 그리고 지도급 인사들이 방문하여 김일성에게 직접 한중수교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계속된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북한의 실망감을 해소시키지는 못했지만 북한에게 할 바를 다했다. 중국은 한국과 수교함으로써 한국과 북한에 모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변모하여 한반도에서 전략적 우월을 점하게 됐다, 넷째, 바다를 주목하고 해군력 증강을 강조했다. 덩샤오핑은 바다를 지키고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항공모함 보유를 결심했다. 이를 실현시켜준 인물이 류화칭(刘华清)이었다 류화칭은 국공내전 시절 제2야전군 정치위원이던 덩샤오핑 휘하에 있었으며 1989년에는 덩샤오핑에 의해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발탁됐다. 류화칭은 “중국이 항모를 만들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항공모함 확보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결국 류화칭은 덩샤오핑의 항공모함의 꿈을 실현하였다. 중국의 항모 명칭이 미국처럼 역대 대통령이나 해군제독이었다면 아마 1번함은 덩샤오핑함, 2번함은 류화칭함이 되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93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사망 직후 각막과 장기 일부는 해부학 연구용으로 기증됐으며, 그의 유해는 바다에 뿌려졌다. 중국인들은 남중국해가 덩샤오핑의 묘소라고 한다. 150㎝가 조금 넘는 작은 체구이지만 묘소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이렇게 시대를 열어간 덩샤오핑에게도 과오는 있다. 첫째, 개혁개방에 뒤따르는 부정부패 문제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쥐를 잘 잡았던 고양이가 이제는 주인집 부엌에 있는 생선에 손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보와 권력을 쥐고 있는 혁명원로 자녀들과 친척들의 재산 축적 문제는 중국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덩샤오핑의 아들과 딸, 사위들도 홍콩을 중심으로 각종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데, 이들에게 돈벌이는 땅 집고 헤엄치기다. 둘째, 1989년 6.4 천안문 사태 시 이를 유혈 진압했다. 희생자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의 과오에 대해서 대체로 말을 하지 않는다. 부정부패 문제는 경제가 고속 발전하는 과정에서 어느 나라든 발생하는 보편적 문제라는 것이고, 천안문 사태 유혈진압도 국가의 질서를 위해 불가피했다는 생각이다. 덩샤오핑의 과오를 생각하니 “살아있는 동안 비난받지 않은 사람은 죽은 후에 비난받을 것이다”란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필자는 후세에 덩샤오핑의 공적과 과오가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하다. 필자가 감히 먼저 평가해 본다면 그의 공적은 8이요 과오는 2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8-0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7)] 육군대학 현지실습의 기대와 보람③
    직업군인으로서의 삶은 보람과 고난의 길입니다.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들도 직업으로서의 군인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 청춘들을 위해 '직업군인 사용설명서'를 작성합니다. 필자가 지난 1974년부터 썼던 17권의 일기장에 담았던 사적인 기록을 최대한 가감없이 전달합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장으로 전역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필자의 경험을 통해 직업군인의 현실과 이상을 발견하길 기원합니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두산 백과사전에 사단(division, 師團)이란 “군단보다 작고 여단 및 연대보다 큰 군대 조직상의 편성 단위로 육군의 전투병과와 근무병과로 구성된 기본적인 제병협동 부대이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 독립해서 전술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소의 단위 부대이다”라고 정의 되어 있다. 전형적인 사단은 보병사단과 기계화사단이며, 그 밖에 부대의 성격과 특수임무에 따라 향토사단, 동원사단, 공수·산악사단 등도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전략미사일 부대로 구성한 포병사단도 두고 있다. 사단은 1∼2만 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며 장군에 의하여 지휘된다. 이와 같은 사단은 프랑스혁명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창안된 제도이며, 나폴레옹 1세에 의하여 개량되고, 19세기 말에 유럽 제국에서 채택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보편화된 단위부대이다.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사단장 조성태 장군(육사 20기, 제35대 국방장관 역임)에게 현지실습 신고를 마치자 사단사령부 기밀실에서 사단의 부대 현황 및 작전계획 설명을 들었다. 당시 브리핑 내용은 향토사단으로써 전선을 형성하는 정상적인 방어라기보다는 중요시설을 방호하기 위해 책임 지역별로 방어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고, 정상적인 방어작전을 할 수 있는 부대도 훈련단이란 명칭으로 예비군 훈련에만 치중하는 모습이었다. 작전계획 설명을 듣고 필자가 느끼기에도 적의 정상적인 공격을 방어하는 작전계획이라기 보다는 적의 침투부대가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것을 대비하는 대침투 작전계획 위주의 수준 정도이었다. 따라서 기동전과 도시방어 작전을 학습한 학생장교들의 무수한 질문이 쏟아졌고, 반면에 브리핑을 하던 작전장교와 배석한 작전참모 및 작전보좌관은 이미 작전계획 발전에 대한 복안이 세워져 있는 듯 개의치 않고 친절하게 답을 해주며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물론 사단 작전참모나 보좌관은 이미 육대를 졸업한 선배였고, 그런 자신감은 육군대학 현지실습의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학생장교들의 연구과정에서 가장 최신의 교리가 어떻게 변했고 적용할 가치가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육군대학 현지실습조는 거의 완전한 사단 참모부 편성을 해놓은 상태였다. 조에서 가장 선임장교가 사단장 역할을 맡았고 각 주특기별로 인사, 정보, 작전, 군수, 동원참모 등으로 편성을 했다. 기타 병과 장교들은 해당 분야의 보좌관을 맡아 작전계획 발전을 연구했다. 필자는 육대교육 수료후 차후 보직이 수방사 작전장교로 예정되어있기 때문에 운이 좋게도 지닌 능력에 비해 과분하게 작전계획 연구를 총괄하는 작전참모직을 맡았다. 이때 함께 실습을 지도하는 육대교관은 연구과정과 발표를 지켜보면서 각 학생장교들을 평가를 병행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8-04
  • 지란지교시큐리티, 광주은행 악성코드 대응(CDR) 솔루션 구축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지란지교시큐리티는 3일 광주은행에 첨부파일 악성코드 대응(CDR) 솔루션 `새니톡스(SaniTox)`를 구축 완료했다. 정상 문서로 위장해 기존 보안 솔루션을 우회·회피하는 문서형 랜섬웨어 및 악성코드 공격 사례가 잇따르면서 `안전한 문서는 없다`라는 제로트러스트 관점의 CDR 기술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 광주은행은 문서형 랜섬웨어, 첨부파일 악성코드 등 고도화되는 보안 위협에 선제 예방을 목적으로 지란지교시큐리티의 CDR 솔루션 ‘새니톡스’를 도입했다. 새니톡스는 다수의 채널로 유입되는 모든 문서의 잠재 위협요소(매크로, 액티브 콘텐츠, OLE 객체 등)를 사전에 제거하는 무해화를 거쳐 안전한 문서로 만드는 첨부파일 악성코드 대응 솔루션이다. 빠른 무해화 처리 속도와 고도의 문서 구조 분석을 바탕으로 무해화된 파일의 원본성을 보장한다. 이상준 지란지교시큐리티 신기술융합부 이사는 “높아지는 CDR 수요에 적극 대응하고 금융권 시장 확대를 위한 공격적인 영업마케팅을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사이버보안
    • 종합
    2021-08-03
  • 포티넷-엔텔스, 5G 엣지컴퓨팅 보안 ‘맞손’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포티넷코리아와 엔텔스는 2일 5G MEC(Multi-access Edge Computing) 기반 보안 솔루션에 대한 전략적 사업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5세대(G) 통신 MEC는 5G 통신의 초저지연 특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이다. 빠른 응답시간을 요구하는 애플리케이션 데이터를 지연 없이 송수신하며 데이터보안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사는 이날 협약에 따라 △MEC 기반 보안솔루션 및 보안컨설팅 사업 공동 추진 △보안 패러다임 변화 대응 강화 △MEC 및 보안 기술제휴 △MEC 기반 보안 공동 마케팅 등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번 협약을 통해 엔텔스는 포티넷의 보안솔루션을 서비스형 보안(SECaaS) 형태로 활용한다. 네트워크 보안은 물론, 강화된 개인정보 및 데이터 보안 환경을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또 MEC 플랫폼을 통해 제공하는 특화된 엣지 서비스 라인업을 한층 견고하게 하고 MEC를 사용하는 기업 고객이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초저지연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포티넷과 함께 적극적인 보안 시장 공략에 공동 대응할 계획이다. 포티넷은 5G MEC 플랫폼에 포티넷 보안서비스를 결합해 점차 정교해지고 있는 보안 위협을 해결하고, 보다 탄력적인 네트워크를 위해 탁월한 가시성과 관리 기능을 제공함으로써 기업들이 더욱 안전하게 혁신을 구현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엔텔스 최영래 대표는 “MEC 환경에서 고객들이 보다 신뢰하고 사용할 수 있는 융복합 디지털보안 경험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원균 포티넷코리아 대표는 “5G MEC 시장의 성장과 네트워크 인프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해나가겠다”고 전했다.
    • 사이버보안
    • 종합
    2021-08-03
  • [김희철의 전쟁사(114)]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 체결’ ①'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옛날이나 지금이나 병법의 기본은 속전속결(速戰速決)로 빠르게 싸우고 빠르게 끝내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작전편’에 ‘병귀승 불귀구 구즉둔병좌예 졸속 미도교지구(兵貴勝 不貴久 久則鈍兵挫銳 拙速 未睹巧之久)’란 구절이 나온다. 이는 “전쟁할 때 신속하게 이기는 것이 중요하며 오래 싸우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전쟁이 길어지면 창끝이 무뎌지고 전투 의지는 약해진다. 준비가 조금 부족해도 신속하게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뜻으로 속전속결(速戰速決)을 강조한 말이다. ■ 용문산 전투 압승에 이어 신속히 반격하자 중공군은 휴전회담 제의 1951년 5월21일 ‘용문산 대첩’에서 압승한 국군 6사단은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60여 km를 진격했다. 38선을 재돌파한 국군 6사단과 해병 1연대, 학도병들은 그때 마침 `화천댐을 확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중공군 3개 사단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였다. 변변한 전력시설이 없던 당시, 북한군의 수중에 있던 화천댐은 반드시 탈환해야 할 지상 목표였으며 북한군으로서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패퇴하던 중공군은 화천(대붕)호에 이르렀을 때 호수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화천발전소 탈환전'이라 이름 붙여진 파로호 전투를 3일간 밤낮없이 치렀다. 그 결과 위의 사진처럼 중공군 3만여명을 '물 반 고기 반'이던 화천호에 `물 반 시체 반'으로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둬 북진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대승의 현장이었던 ‘화천(대붕)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 휘호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사창리 전투와 현리 전투’로 사기가 최악으로 떨어졌던 국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발점이 되었다. 닷새간의 전투 결과 국군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이에 비해 중공군은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어 3개 사단이 궤멸되었다. 이 숫자는 공격에 나섰던 중공군 63군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였다. 또한 용문산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퇴각하는 중공군을 쫓아 30일까지 반격작전을 전개한 국군과 UN군은 파로호 전투 등에서 대승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중공군은 10만 병력과 주요 장비들을 거의 상실하자 결국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8-03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3)] 향로봉·노전평 전투 지역 지나며 전사자 부인 사연에 가슴이 먹먹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8일, 종주를 시작한지 10일째다. 오늘은 원통리에 위치한 을지회관을 출발하여 한계리, 남교리를 거쳐 용대리의 설악산림 수련관까지 약 28㎞를 걸었다. 인제군 북면은 면사무소가 있는 원통리의 ‘원통’이란 이름이 더 유명하다. 북면은 동해안으로 접근하는 관문으로 진부령을 넘으면 고성군, 미시령을 넘으면 속초시, 한계령을 넘으면 양양군과 연결된다. 인제에는 향로봉, 서화계곡, 노전평 지구, 백담사, 만해 마을 등이 있다. 5시경에 컵라면과 어제 정전택님이 가져온 햇반, 김, 몇 가지 반찬을 곁들여 아침식사를 하고 6시경 숙소를 출발했다. 조금 걷다 보니 원통리 표지석이 보였다. 표지석에는 ‘원산으로 가는 통로’라는 의미로 원통이 정해졌고, 조선시대에 원통역(驛)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당시에는 대체로 30리마다 역(驛)을 운용했다. 역은 말을 이용해 국가 교통 및 통신 기능을 수행했던 곳이나, 근대적인 통신 제도와 교통수단의 출현으로 1896년에 사라졌다. 하천을 따라 백담사 입구 마을까지 약 5시간 정도 걸었다. 걷는 동안 정자문, 12선녀탕 계곡 입구, 용대초등학교, 백담사 입구를 지나 용대삼거리까지 걸었다. 용대리 지역은 상당히 넓어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고생도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냇가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해 친구들과 어울리는 분들에게 매운탕과 소주도 몇 잔 대접받았다. 여기저기에 군락을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설화초(설악초)도 보였다. 식물에 관해 박식한 한 단원이 “이 꽃은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고 잎 색깔도 눈꽃처럼 하얗게 변해 설화초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설화초의 꽃말은 ‘환영과 축복’인데,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의미로 심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담사 입구 마을에서 깔끔한 중국집을 찾아 짜장면을 먹은 후 공기 좋은 휴양림 콘도에서 묵는다는 즐거움에 부지런히 걸어서 용대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안내 데스크에서 예약된 방을 찾았다. 그런데 안내 데스크 근무자는 예약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고 했다. 예약했다던 지인의 이름도 없어서 순간 아주 당황스러웠다. 오늘 묵는 숙소가 예약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사전 답사를 하면서 숙소를 정하고 예약 했는데, 10일째 숙소는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남아있는 거리와 일자를 고려하니 용대리가 적절했다. 그러나 마땅한 숙소를 발견할 수 없어 고민하다가 휴양림에 숙박시설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산림청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지인은 예약이 가능한지 알아보겠다고 했고, 며칠 후 수련관이 예약됐다는 연락과 함께 전화번호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용대리 지역의 숙소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예약자 명부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해 보니 예약된 숙소는 지금 우리가 있는 진부령 근처가 아니라 미시령 근처라고 했다. 이곳 사정을 잘 모르는 필자가 용대리라는 말만 듣고 이곳에 비슷한 시설이 2군데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예약된 숙소는 10㎞ 이상 떨어져 있었고, 대중교통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시령 근처 수련관을 관리하는 분께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을 드렸더니 고맙게도 차를 몰고 와주셨다. 덕분에 편하게 미시령 옛길 관광도 하며 오후 5시경 숙소인 설악산림 수련관에 도착했다. 콘도 형태로 시설을 갖춘 깔끔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오늘 걸은 인제군 일대는 6·25전쟁 시 향로봉 전투와 노전평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향로봉 전투는 맹호부대가 1951년 3월 7일부터 그해 7월 9일까지 중공군과 벌인 전투다. 중공군은 중동부지역의 요충인 인제를 확보하기 위해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를 증원하여 설악산과 향로봉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그러나 맹호부대는 이를 격퇴하고 설악산 및 향로봉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서화 계곡의 노전평 부근에서는 1951년 8월 초순부터 1953년 7월 휴전 성립 직전까지 장기간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시 8사단은 인제 서화리 축선과 인접한 고지군을 차지하기 위해 요충지인 노전평을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8사단은 승리했지만 전사 90명, 부상 536명, 실종 17명 등 피해도 컸다.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한 90명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측되는 전사자의 아내가 말한 사연이 문득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지난 2017년 10월 24일 뉴스1은 ‘66년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오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8월 8사단 10연대 소속으로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한 김창헌 일병(1924년생)의 부인 황용녀(94)씨 자택을 방문해 전사자 신분확인 통지서와 유해 수습 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 그리고 발굴된 인식표와 도장 등 유품을 전했다. 고인은 노전평 전투 중 적의 총탄을 맞은 것으로 추정되며 28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부인 황씨는 “남편이 자원입대 했을 때 임신 중이었고 남편도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며 “남편은 태중의 아이를 남자로 생각해 ‘김인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전쟁터로 떠났다”고 했다. 남편이 떠나고 10일 후 딸이 태어나자 황씨는 “남편이 소중하게 지어준 아이 이름을 바꿀 수 없어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따리 장사와 노점상을 하며 홀로 딸을 키웠는데, 이제라도 남편의 유해를 찾아 만나볼 수 있어 너무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흘렸다.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남기고 산화한 젊은이, 60여년을 홀로 살며 딸을 키워 할머니가 된 여인, 남편의 얼굴이 아닌 유해를 만나는 것으로라도 감격스러워하는 여인, 딸 바보였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함은 물론 아버지 얼굴조차 모르는 딸…. 그 삶이 어떠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6·25전쟁 시 한국군 사망자(실종자 포함)는 60만 9천여명이라고 한다. 이 분들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후손들에게 자유 대한민국을 남겨주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우리는 이분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유족들에게 보답도 해야 한다. 하지만 천안함 전사자를 포함해 국토방위 임무를 수행하다 순국한 분들을 대하는 일부 위정자들의 모습과 태도에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가 느껴진다. 숙소에 도착한 후 그동안 많이 가벼워진 배낭의 짐을 풀고 땀 냄새가 진동하는 옷부터 빨았다. 관리하는 분이 짤순이를 돌려 빨래의 물기를 빼 주셔서 저녁 햇볕에도 잘 말랐다. 숙소에서 가까운 봉평 메밀 막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점 건물은 노부부의 큰아들이 부모님을 위해 특별히 설계했다는데, 민박도 받는 방 내부는 깔끔했고 노래방기기도 있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주인과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늘 숙소 변경 문제로 많이 당황했던 것을 생각하며 내일 묵을 숙소에 전화를 걸어 예약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집을 떠나온 지 열흘이 지났고, 이제 종주 일정은 2일 남았다. 한 방에서 넷이 묵었지만, 설악산의 맑은 공기를 느끼며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8-03
  • NHN, 2030년 ‘글로벌 톱티어 테크 기업 성장’… 8주년 비전 발표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NHN이 2일 창립 8주년을 맞아 ‘2030년 글로벌 톱티어 테크 기업으로의 도약’을 위한 비전을 선언했다. NHN은 10년 내 일본·중국·동남아 등 아시아 시장과 북미·유럽 지역 법인설립 및 활발한 투자를 통해 확보한 글로벌 거점과 NHN의 IT 기술 경쟁력을 발판 삼아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테크 기업이 되겠다는 목표다. NHN은 클라우드와 AI, 데이터, 협업 솔루션을 중심으로 국내 경쟁력 강화 및 글로벌 확장을 주도하기로 했다. 지난해 역대 최대 매출을 달성한 NHN Cloud는 2022년 클라우드 전문기업으로 분사하고 글로벌 매출을 증진시키며 IPO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공공 및 엔터프라이즈 시장을 집중 공략하고, 글로벌 서비스 확장을 목표로 2022년 동남아 리전 구축을 시작한다. 또한 일본과 북미 현지에서 영향력 있는 MSP로 활약 중인 NHN Techorus(테코러스·일본), Cloudnexa(클라우드넥사·북미)와 시너지를 도모하며, 2030년 국내 톱 CSP(Cloud Service Provider)이자 글로벌 톱 MSP(Managed Service Provider)로 자리잡겠다는 전략이다. AI사업은 R&D를 뛰어 넘어 ‘실전’의 가치에 집중한다. 중소기업들의 AI접근성을 높인 AI플랫폼 출시를 필두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AI 클라우드 캠 사업 확대, 국내 최고 자연어 처리 기술(NLP) 전문기업 NHN다이퀘스트와의 공조를 도모한다. 이를 토대로 10년 내 글로벌 경쟁력을 지닌 AI 전문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목표다. DATA사업은 데이터통합플랫폼 Dighty(다이티)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 중인 국내 유일 데이터기술 전문기업 NHN DATA의 기술 역량과 유럽 데이터솔루션 기업 뉴딥(NewDeep)의 글로벌 네트워크 역량을 결합한다. 뉴딥은 지난해 초 NHN과 글로벌 IT기업 Bango가 합작해 유럽 현지에 설립한 기업으로, ‘Audiens’라는 CDP(Customer Data Platform)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DATA 사업은 2030년까지 글로벌 톱티어 데이터 테크 기업의 위상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7월말 독립법인으로 출범한 NHN Dooray!(두레이)는 공공 협업툴 시장 공략 및 유연한 외부 플랫폼 연동 전략을 통해 장기적으로 협업솔루션을 넘어 글로벌 통합 SaaS(Software-as-a-Service)기업으로 성장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정우진 NHN 대표는 “NHN이 만들어낸 지난 8년의 역사가 도전과 열정의 기록이자 동료들과의 협동 정신이 빚어낸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도약기는 새로운 동력으로 회사의 성장을 이끌어가고자 한다”며 “매년 창립기념 시즌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선정된 프로젝트를 사내벤처로 육성해 창의적인 기업문화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 사이버보안
    • 종합
    2021-08-02
  • 사이벨리움, 프로스트 앤 설리번 선정 ‘자동차 보안 및 위험 평가’ 분야 ‘2021 올해의 기업’ 수상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이스라엘의 자동차 사이버 보안 위험 평가 분야 선도 기업인 사이벨리움이 자동차 보안 및 위험 평가 분야에서 혁신성과 성장성을 인정받아, 미국의 시장 조사 및 컨설팅 전문 기관인 ‘프로스트 앤 설리번(Frost & Sullivan)’으로부터 ‘2021 올해의 기업(Company of the Year)’으로 선정되었다. 프로스트 앤 설리번은 최근 세계 자동차 소프트웨어 시장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유럽 자동차 보안 및 위험 평가 분야에서 ‘2021 올해의 기업’으로 사이벨리움을 선정했다. 프로스트 앤 설리번은 엄격한 평가 기준으로 최종 수상 기업을 선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이벨리움은 자동차 보안 및 위험 평가 분야에서 모범 사례의 우수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뛰어난 요구 사항 해결 능력, 고객 서비스 경험 구축, 브랜드 자산 가치 등에서 탁월한 역량을 인정 받았다. 프로스트 앤 설리번의 산업 분석가인 도로시 에이미는 “자동차 산업 분야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자동차의 안전과 보안 강화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시기에 사이벨리움이 세계적 수준의 자동차 보안 및 위험 평가 솔루션을 출시하였다.”라고 말했다. 또한“사이벨리움의 사이버 디지털 트윈 플랫폼은 자동차 제조업체가 자동차의 구성 요소에 대한 잠재적인 사이버 위협을 지속적으로 탐지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는 자동차 제조업체에게 안정적인 대규모 보안 제품 및 관리를 위한 인프라를 제공하는 자동차 보안의 혁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전했다. 커넥티트 카와 관련된 소프트웨어 취약점은 사용자의 개인정보 유출은 물론이고 사고로 인한 생명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자동차 사이버 보안을 강화하여 각종 보안 위협을 사전에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프트웨어 취약점 외에도 모바일 앱 취약점, 백엔드 서버 해킹, 자동차 시스템 해킹 등의 다양한 위험이 커넥티드 카의 보안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은 자동차 OEM의 브랜드 평판을 손상시키고 고객의 신뢰와 안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슬라바 브론프만 사이벨리움 CEO는“커넥티트 카의 보급이 확대되고 각종 보안 표준 및 규정이 증가하면서 자동차 사이버 보안을 위한 전문적인 보안 도구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사이벨리움은 자동차 보안을 위한 혁신적인 기술과 모범 사례를 지속적으로 구축할 계획이다.” 라고 말했다.
    • 사이버보안
    • 종합
    2021-08-02
  • 썬더코어-후오비 에코체인, 크로스체인 브릿지 출시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썬더코어(TT체인)와 후오비 에코체인(HECO)이 크로스체인 브릿지 분야 협력을 위해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썬더코어는 탈중앙화된 거래 프로토콜을 통해 Ethereum, 바이낸스 스마트체인(BSC) 등 주류 자산과의 브릿지를 지원하며, 사용자는 각 체인에서 해당 자산을 보다 쉽게 전송 및 교환할 수 있다. HECO는 고효율적이고 탈중앙화된 퍼블릭 블록체인으로, 고성능 거래를 지원하는 기반에서 스마트 계약의 호환성을 실현했다. HECO의 네이티브 자산은 HT이며, 이더리움 가상머신(EVM)과 호환되고, HPOS 합의 메커니즘을 채택했다. HECO는 후오비 오픈 플랫폼에서 출시된 첫 제품으로, DEX, 대출, 오라클, 게임, NFT 등 분야에서 풍부한 응용을 갖고 있다. 크로스체인 브릿지 기능 실현 후, 후오비 글로벌은 HECO에서 TT 입출금도 개시할 예정이며, TT와 HT, HUSD 등 크로스체인 자산과의 교환이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 사이버보안
    • 종합
    2021-08-02
  • 한-싱가포르 국방전략대화…국방교류협력 더욱 강화키로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한국과 싱가포르 국방부는 2일 서울에서 제6차 국방전략대화를 개최해 국방교류 협력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고 국방부가 밝혔다. 김만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과 테오엥디(Teo Eng Dih) 싱가포르 국방부 정책차관보가 양국 수석대표로 참석, 양국 간 상호 관심사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 양국은 회의에서 앞으로 국방기술 협력과 인도주의적 지원 및 재난구호, 사이버안보 등의 분야에서도 교류 협력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계기로 2년 전 체결한 화생방 정보 분야 양해각서(MOU)를 토대로 국방기술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또한, 인도적 지원 및 재난구호 분야에서도 양국 간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초국가적인 사이버안보 위협에 대응할 수 있도록 양국이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등 긴밀한 파트너십을 구축해 나가기로 했다. 국방부는 "이번 국방전략대화는 8년 만의 대면 회의"라며 "앞으로도 이를 연례적으로 개최해 양국 간 국방협력 발전 방안을 지속해서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 외교안보정책
    • 국방
    2021-08-0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