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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5) 유격훈련간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과 신부된 정훈장교…
- 간부들의 일년 365일 중 퇴근 날은 약 150일, 힘들고 어려운 근무 여건…심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신감을 배양하는 유격훈련의 의미…잔인한 4월에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은 결국 심장마비 훈련병을 데리고 떠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GOP연대였지만 필자가 소속된 예비대대는 후방의 훼바(FEBA)부대와 동일하게 교육훈련 및 근무 일정이 진행된다. 대략 분기별로 3~4주 종합훈련, 독단훈련, 반기별로 4주 진지공사, 연중 통상 1회 정도인 중대 및 대대전술시험, 공지합동훈련, 연대전투단훈련, 전투지휘검열, 유격 및 특공훈련 등의 야외 활동과 당직근무를 포함하면 중대장급 이하의 초급장교가 일년 365일 중 퇴근할 수 있는 날은 약 150일도 안된다. 이런 일상은 간부들이 퇴근도 못하는GOP투입 부대와 별반 차이 없는 마찬가지로 부대원들과 24시간 생활하여 사명감 넘치는 초급장교들의 힘들고 어려운 근무 여건이다. 부대교대 후 꽃피는 4월이되자 어김없이 중대는 첫 3주 종합전술훈련을 하게 됐다. 개인훈련은 평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대전투부터 시작했다. 분대장들의 지휘 능력과 분대원들의 전투기술을 숙달한 뒤 다시 소대와 중대전술훈련으로 종합전술훈련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주에는 5개월전에 중대장 근무를 시작했던 대성산 대대에 있는 유격장으로 이동했다. 통상 전투 및 전술훈련시 중화기 중대는 소대별로 각 소총중대를 직접 지원한다. 그 개념으로 유격조도 12중대의 1개 소대가 필자의 중대에 배속되어 편성됐다. 1일차는 체력단련훈련으로 PT체조는 15개 동작(높이뛰기-굽혀닿기-쪼그려 뻐치기 -엉덩이 올리기-구부리기-발 벌려 뛰기-옆구리운동-온몸 비틀기-뒤로 젖히기-쪼그려 돌기-팔 들어 다리닿기-몸통 비틀기-쪼그려 뛰기-팔동작 몸통 받쳐 -노젖기)으로 이루어져 반복하여 숙달하며 피튀기는 단련을 했다. 2일차부터는 가장 먼저 첫날 숙달한 PT훈련으로 뭉친 근육과 몸을 푼 후, 기초-복합-산악 장애물코스순으로 각 중대별로 조편성하어 훈련에 임했다. 그런데 4일차 되던 날 산악 장애물코스 중 ‘수직드롭코스’가 있었다. 인간이 공포심을 가장 느끼게 한다는 약 10m 높이를 사다리 타고 올라가 위의 좌상단의 사진처럼 폭이 약 4m에 깊이 3m의 물웅덩이로 뛰어내려 대담성과 자신감을 키우는 훈련이었다. 훈련전에 웅덩이의 물을 만져보니 4월의 봄 날씨 이었지만 대성산 북향의 물을 받은 탓으로 몹시 차가웠다. 마침 현장에 연대에서 감독관도 나와 있었고 필자는 고민을 하다가 차갑다는 이유로 코스를 생략하면 심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신감을 배양하는 유격훈련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좀더 강한 PT로 체온을 올린 후 입수하기로 판단했다. 그래도 왠지 걱정이 됐다. 그때 ‘수직드롭코스’코스를 담당한 선임하사관이 몸소 시범을 보이며 뛰어 내려 입수했고 이어서 소대장도 뒤이어 뛰어 내렸다. 그래도 중대원들의 긴장하는 눈초리가 남아있어 필자도 사다리로 올라가 뛰어내리며 시범을 보였는데 역시 수온이 몹시 차가웠다. 중대장까지 시범을 보이자 중대원들은 한 명씩 훈련에 임했다. 훈련이 끝나고 대기하던 중대원들은 물 속에서 허부적대는 일부 요원들을 바라보면서 깔깔대고 웃기까지도 했었다. 필자 중대원들의 훈련이 모두 끝나고 배속된 12중대 지원소대의 차례가 되었다. 마지막 몇 명만 남아있어 그 코스훈련이 끝나가는 무렵 지원소대의 지공열 상병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하강 준비를 끝내고 교관의 ‘뛰어’ 구령소리에 멈짓 하다가 물로 뛰어내렸다. 지상병은 입수 후 바로 물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물 밖으로 나와야 하는 데 그는 다시 물 밑으로 들어갔다. 순간 선임하사 교관이 바로 물로 뛰어 들었으나 못 찾고 나오자 옆의 병사들이 그를 구하러 뛰어들었다. 필자는 폭이 약 4m에 깊이 3m의 물웅덩이지만 마구잡이로 뛰어들어서는 모두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모두 나오라고 하고 수영 잘하는 요원들을 4방면에서 입수하게 했고 곧 그를 건져 내왔다. 옆에서 대기하던 군의관은 바로 심폐소생술을 했다. 군의관은 구토물이 있는 지상병의 입가를 손으로 쓰윽 문질러 딱아내고 바로 입을 맞추어 인공호흡하고 이어 흉부 압박을 번갈아 반복해서 약 40분 정도 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하지만 잔인한 4월에 불쑥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은 결국 심장마비를 일으킨 지공열 상병을 데리고 떠났다. 전출을 앞두고 옆에서 함께했던 대대 정훈장교 김종오 중위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 했다. 순직자의 직속 상관인 12중대장 박성규 대위는 故 지공열 상병의 장례를 치루는 과정에서 부모들에게 엄청 시달렸다고 했다. 비록 필자 중대의 소속은 아니지만 필자의 눈앞에서 훈련중에 운명을 달리한 故 지공열 상병에 대한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평소에 군인답지 않게 소극적이고 무관심하게만 여겼던 군의관의 순간적인 응급조치를 보면서 프로는 프로이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최선을 다한 그의 노력에 감사했다. 하지만 의욕에 찼던 중대종합훈련은 그렇게 막을 내리며 엉망이 되었다. 연대의 감독관이 그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본 덕택에 상급부대에서는 먼저 시범을 보이는 등의 조치를 한 필자를 그 사고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으로 경고조치 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뚜렷한 사명감과 성직자 삶의 각오로 힘들고 어려운 초급장교 생활을 견디어 옆에서 축복과 기원 해주는 분들 때문에 공직에서 찾아오는 불청객들을 이겨내… 어느덧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명동 성당에서 의아하게도 신부님 복장을 하고 있는 김종오 정훈장교를 너무도 반갑게 우연히 만났다. 그는 정훈 장교로 의무 복무를 마치고 신학교로 들어가 교육과 수련을 받고 신부가 되어 예수성심전교수도회 소속으로 해외 봉사 사목을 하다가 귀국해서 성모 병원 등에서 병원 사목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 다시 중대장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엄하기도 했지만 병사들을 지극히 사랑하며 아꼈다. 그 당시 국회의원 부재자 투표시에도 못 마땅한 표정으로 관망했고, 그때 유격장에 불쑥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 사건시에도 옆에서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지금은 남태평양 오지(奧地)인 피지에서 피부색이 다른 착한 이들을 위해 사목 및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인생에는 많은 불청객들이 불쑥 불쑥 찾아온다. 필자가 37년의 군생활과 이후 3년간 준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배신, 직무수행에 대한 오해, 교통사고 등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만나도 이렇게 살아 남은 이유는 필자의 옆에서 축복과 기원을 해주는 좋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종오 신부는 뚜렷한 사명감과 성직자로서 살겠다는 각오로 힘들고 어려운 초급장교 생활을 견디어 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생각을 실천하여 지금은 보람차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덕분에 필자도 故 지공열 순직자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동안의 공직 생활에서도 불쑥 찾아오는 어떤 불청객들과 싸워 이길 수 있었다. 김종오 신부와 지금도 보이지는 않지만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보내주시는 분들 덕택에 지금의 내가 있어 단지 그들께 감사할 뿐이다. 또한 훈련 중 아깝게 순직한 故 지공열 상병의 영전에 다시 한번 더 명복을 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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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5) 유격훈련간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과 신부된 정훈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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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4)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 발견
- ‘생자필멸(生者必滅),거자필반(去者必返),회자정리(會者定離)’는 세상사의 진리 사단 구원투수로 칭찬받았지만 전출간 친구의 빈자리는 허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재자 투표가 끝나고 정상적인 부대운용으로 돌아오자 사단에서는 GOP교대 준비 지시가 하달되었고 연대는 GOP투입전 교육을 시작했다. 필자가 속한 대대는 예비로 지원임무가 하달되었고, 신원조회가 통과된 일부 간부 및 병사들은 GOP투입부대의 인원보충을 위해 전출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접 10중대장으로 근무하던 동기 고(故) 한황진 대위([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35) ‘호국보훈의 길에도 통하는 미스트롯을 키운 힘’ 참조)는 GOP투입 대대로 떠났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산 사람은 반드시 죽고), 거자필반(去者必返, 떠나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며),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정한 이치이다)라는 명언처럼 “모든 것이 무상함을 뜻한다”는 법화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부재자 투표로 늦어진 GOP투입준비 때문에 공식적인 환송회식도 못하고 그를 아쉽게 떠나 보내야 했다. 승리부대 전입동기로 2년전 GP장 시절부터 정도 많이 들었는데…, 적과 대치하는 GOP중대에서 건강하게 근무 잘하고 기회가 되면 침투하는 간첩을 잡아 영웅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가 떠난 지 일주일이 되자 다른 대대는 GOP투입 준비에 바쁘게 보내고 있었지만 필자가 속한 대대도 전투준비 및 부대관리에 대한 사단 감찰검열이 있어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도 새롭게 보강된 대대작전장교 지동수 소령(전 사단교육장교)이 치밀하고 깐깐하게 준비했고, 대대장의 명확한 지도가 있어 수감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찰참모가 검열결과 강평시 구원투수로 부임해 나름의 역할을 한 작전장교와 보직 해임된 중대에서 몸부림을 쳤던 필자를 칭찬해주어서 보람을 느꼈으나, 왠지 GOP투입부대로 전출 가버린 인접 중대장 동기생의 빈자리가 너무도 허전했다. ‘상호 현상태보존' 원칙을 안지킨 막사는 폐허 수준 문제병사 전입 많아 180명으로 늘어난 중대원 관리에 난감 드디어 GOP부대 교대가 이루어졌다. 중대는 대성산 전방에 위치해 유격장을 담당했던 부대에서 예비임무인 적근산 후사면의 좁고 깊은 골짜기 지역으로 이동했다. 부대교대는 많은 에피소드를 낳는다. 상급 부대에서는 부대교대 원칙인 ‘상호 현상태 보존 후 인원만 이동’을 강조했다. 이것은 노후 된 막사 생활을 위해 시설을 보강하고 소소하게 설치했던 편의시설과 부착물들을 그대로 남겨놓아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방지하자는 지침이었다. 그러나 교대전에 지휘관들은 사전 협조회의에서 이 원칙을 준수하기로 상호 약속하지만 부대원들은 새롭게 이전한 부대에서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모두 떼어갔다. 따라서 상호교대 후에 지휘관들은 교대전 좋은 관계에서 교대후에는 서로 불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시에도 부대 이동후 인수한 막사에 들어서니 거의 폐허 수준이었다. 이른 봄의 문턱에서 기온은 약간 올라 낮 양지녁에는 따사하지만 밤이 되면 전방 골짜기의 삭풍은 막사안에서도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중대원들은 1~2년 뒤에 또 이동할 막사이지만 내 집으로 생각하고 정리를 시작했다. 마치 신축 건물에 입주한 것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보강해야 했다. 전방의 봄은 오히려 겨울보다 더 춥다. 그래서 창문에 바람 막는 문풍지도 붙이고 당시 유일한 보온 수단이었던 페치카도 보수하는 등 분주하게 편의시설을 보강했다. 그러던 중 부대원이 하나 둘 씩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GOP투입은 하였지만 추후 신원조회가 불분명하거나 사고뭉치로 판단된 병사들이 GOP에 적응을 못하고 예비인 필자의 중대로 전입오기 때문이었다. 지난 사단의 감찰검열 이후 연대에서는 부적격이나 GOP근무에 회의를 품은 병사들까지 타 중대도 있는데 모두 필자의 중대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소대장과 선임하사관들은 전입 면담부터 이러한 문제사병 관리에 짜증을 내고 있었고, 연대에서 중대장인 필자를 믿고 맡기는 것도 좋지만 이런 전입자를 포함한 중대원이 180명까지 늘어나자 시설도 부족하고 신상 등의 부대관리에도 부담감이 늘어나 난감할 지경이었다. 폭우로 전방 GOP철책 150m가 전도되어 경계에 취약점 발생 GOP근무 '부적격 병사'가 맹활약해 공사기간 단축에 기여 부적격 병사는 '구르는 재주' 가진 굼벵이 어느덧 여름이 되어 폭우가 일주일 동안 쏟아지자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퇴근 후 관사에서 모처럼의 휴일을 즐기던 일요일 밤에 군용 전화벨이 힘차게 울렸다. 중대 막사는 관사에서 약 3분 거리로 인접해 있어 전화가 뜸했는데 그것도 밤에 걸려온 전화라 급박한 위급상황이 발생했는지 걱정이 되었다. “나 연대장인데, 9중대장 지금 쉬고 있지?”하며 연대장이 대대장도 아닌 중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동안의 폭우로 전방 GOP철책이 대규모로 전도되어 다음날 아침에 중대원들을 인솔하여 GOP 철책복구를 위해 투입하라는 지시였다. 필자는 연대장 통화가 끝나고 바로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대장도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소대장들을 비상소집 시키고 중대로 들어갔다. GOP 철책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원이었다. 중대원의 3분의 1이 새로이 전입 온 GOP 근무 부적격자로 실제 투입가능한 인원을 선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보안부대 담당관은 부적격자들을 모두 제외한 인원들만 투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어쩔 수 없이 투입지역에서 근무하다 전입 온 병사와 면담을 했다. 보안부대 담당관의 이야기처럼 그가 변심해서 월북이라도 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하지만 이 병사를 제외하고 투입할 때에는 그는 중대원들에게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도 그 병사는 자신을 꼭 데리고 가달라고 건의했다. 그 지형도 잘 알고 있으며 동기들도 많이 있어 이번 공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간청했다. 소대장들도 그 병사가 중대 전입 후 생활을 잘했다며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했다. 결국 “중대장이 직접 관리하면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면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보안부대 담당관을 강력히 설득하여 투입인원에 포함시켰다. 밤새 공사도구를 점검하여 부족분은 연대에 건의하고 GOP 지역에서는 3인조 행동을 하는 원칙준수를 위해 조편성도 마쳤다. 잠시 눈을 붙인 후 아침에 연대에서 지원 나온 트럭을 타고 출발했다. 공사지역에 도착에서 숙영준비부터 했다. 마침 그 지역은 필자가 DMZ 에서GP 장으로 근무했던 곳으로 작전시 늘 다니던 익숙한 지형이었다. 그곳은 위의 좌측 사진 같이 경사진 곳으로 GOP 철책 150미터 정도가 폭우에 쓸려 내려가 흔적도 없었고, GOP중대에서 경계병을 촘촘히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숙영지 편성 중에 공사용 철책들이 도착했다. 현장지도 나온 연대장은 “최대한 빨리 철책을 설치하는데, 2주내에 완료하라”고 강조했다. 아마도 전도된 GOP철책 지역으로 간첩이 침투하거나 변심한 인원들이 월북하기에 용이하다는 취약점이 있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 같다. 중대원을 2개 팀으로 편성해서 양쪽에서 동시에 시작하기로 했고 철책설치조, 시멘트비빔조, 운반조, 기타 지원조로 편성했다. 물론 GOP중대의 경계병 외에 일단 유사시를 대비하여 실탄을 휴대한 상태로 자체 경계조도 배치했다. 쏜 화살처럼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고 있었다. 소대장은 공사기간 단축을 위해 야간 작업을 건의했다. 보안부대 담당관이 "야간 작업은 병력관리에 특히 위험하다"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주간작업만 하는 것은 연대장의 조기 공사완료 지침을 해소하기에는 안일한 조치 같아 야간 작업을 감행했다. 곳곳에 횃불을 만들어 대낮같이 밝힌 상태에서 중대원들은 참으로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고 필자는 중대원들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처럼 GOP근무 부적격자로 낙인찍혀 중대에 전입왔던 그 병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근무했던 GOP 소대에서 근무용 간식인 라면과 빵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도구 등을 확보해 중대원들에게 나눠주며 그 누구보다도 동분서주 바쁘게 뛰어다녀 중대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처음에 연대장이 2주로 공사 기간을 한정했던 것 보다 4일을 단축시킨 10일 만에 완료되었다. “남아(男兒)는 자신을 믿고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말처럼 굼벵이(?)까지 포함된 중대원들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정확히 129m, 43칸의 철책설치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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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4)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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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20) 인본주의와 인류애의 표상이 된 흥남철수와 ‘메러디스 빅토리’호(하)
- ▲ 좌측 흥남항에서 피난민 1만4,005명을 승선시켜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록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갑판을 가득 메운 북한주민들과 당시의 ‘레너드 라루’선장 모습, 우측 1954년 카톨릭 수도자가 되어 바오로 수도원에서 평생을 헌신한 ‘마리너스 라루’수사 [자료제공=생명의 항해] 군인 10만과 피란민 10만을 구한 성공적인 ‘흥남철수작전’은 X-mas 선물 라루 선장의 상선 ‘메러디스빅토리’호 14,004명을 태워 기네스북에 등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부두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400여톤의 다이너마이트와 227톤의 폭탄, 200드럼의 휘발유를 미해군 수중폭파팀과 공병이 폭파 폐기시키고, 마운트 맥켄리호에 승선해 지휘를 하던 10군단장 알몬드 및 도일 소장도 24일 16시32분에 흥남항을 출발함으로써 유엔군 10만여명과 35만톤 군수물자 철수시킨 ‘흥남철수작전’은 성공리에 완료되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흥남항에 남아있던 군인들과 9만 8천여명의 피란민을 실어 부산 및 거제도 장승포로 철수시켰던 197척의 선박 중 하나는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였다. 이 선박은 선적했던 무기를 모두 내리고 피란민 1만4천여명을 승선시켰고, ‘생명의 항해’ 저자인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의 노력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2004년 9월에 등재되었다. 미쳤어! 도저히 불가능한 14,000여명을 태워 미친 서커스 어릿광대 놀이 나흘간의 항해도중 태어난 5명 아이의 이름은 ‘김치1~김치5’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37살된 ‘레너드 라루’선장이 지휘하는 비무장 상선으로 미해군 용선계약에 따라 미국 해운 회사 ‘무어 맥코맥 선사’소속으로 90상륙지원단에 배속되어 인천상륙작전도 참전했다. 1950년 8월16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항 14일간 태평양을 항해한 뒤 요코하마 항에서 미 7사단 32연대 소속 병력(절반 정도가 새로이 모병된 한국인 카투사로 구성)들과 탱크와 탄약을 실었다. 이 선박은 인천상륙작전중인 9월 17일 22척의 호위선 중에서 인천에 가장 먼저 들어간 상선이다. 이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원들이 대부분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바 있는 역전의 해군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인천상륙작전 지원임무를 마치고 일본으로 복귀하는 도중에 백기를 달고 있는 나룻배 한 척을 나포했다. 그 배에는 강제 징집된 것으로 보이는 14명의 북한군인이 타고 있었고 자신들을 감시하던 중공군들을 구금한 후 공해상으로 도망치는 길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들은 인천상륙작전 개시 이래 최초의 포로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한명이 머리와 팔이 칼에 베인 상처가 있어 러니 사무장은 응급치료제로 정성껏 치료해주었고, 그들을 요코하마 항에서 미 해군에 인계하였다. 그후 일본과 한국의 항구 사이를 수차례에 걸쳐 왕복 운항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장진호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유엔군 사령부로부터 50갤런 드럼통에 담긴 항공유 1만톤을 흥남 연포비행장에 주둔해 있는 미 해병 1항공대의 전투비행단에 수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배는 12월 11일 흥남항에 도착했는데 중공군의 총공세로 17일 연포비행장을 폐쇄할 예정이어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해 하역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부산에서 항공유를 내리던 중인 12월 19일, 아직 하역하지 못한 항공유 300톤이 배에 남아 있지만 철수작전을 돕도록 즉시 흥남항으로 되돌아 오라는 긴급 호출을 받았다. 이 날 다시 출발하여 20일 19시경에 기뢰가 부설된 해역을 뚫고 흥남 외항에 도착하였다. 그 때는 이미 미 해병 1사단과 한국군 1군단 병사들은 철수하였고 미 7사단 병력들도 흥남부두에 집결하여 승선을 완료한 채 출항을 기다리고 있으며, ‘통제선-3’까지 축소된 방어선을 전담하는 미 3사단만이 남아서 철수를 엄호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22일 새벽, 기계화부대 상륙정이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대기하고 있는 외항 46번 계류장에 다가와서 1,000명의 군인에게 공급할 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을 가지고 가자 라루 선장과 선원들은 전투부대원들을 태워서 곧 출항할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던 중 명령에 의해 오히려 위험한 내항 3번 선착장으로 입항했다. 폐허가 된 흥남 시가의 눈 덮힌 언덕배기로 포탄들이 비오 듯 쏟아지고 북한주민들은 마지막 남은 퇴로인 바닷가로 허둥대며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전투에 지치고 면도도 못한 덥수룩한 차림의 미 10군단 부참모장 맥카프리 중령 등 5명이 승선하였다. 그들은 라루 선장에게 “대부분의 선박과 유엔군은 이미 흥남을 떠났고 공산군이 포위망을 빠르게 좁혀오고 있습니다. 이 배가 마지막까지 흥남에 남아있는 배들 중 하나입니다”라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 배는 단순한 화물선으로 다른 승객을 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선장님께 피란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 없으며, 선장님이 예정대로 얼마간의 군인들만 태우고 빨리 흥남항을 빠져나가시겠다면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라며 “하지만 선장님이 자원하여 피란민 중 다만 얼마만이라도 태우고 나갈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마지막 철수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선장님 도와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라루 선장은 전혀 망설이지도 않았고 누구와 상의하지도 않은 채 너무 쉽고도 간단하게 “알겠습니다. 우리가 저들을 구출하겠습니다”하고는 “몇 명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많이 데리고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라루 선장의 명령이 하달되자 선원들은 피란민들이 탈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다리 등을 급하게 만들어 설치했다. 22일 21시30분부터 피란민들의 승선이 시작됐다. 이들 북한 주민들의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4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등에서는 끊임없이 함포 사격을 가했고 발사한 포탄들은 포성을 울리며 배 위를 지나갔다. 또한 포탄의 진동으로 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일반 화물 운반용으로 제조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선원이 머무르는 12인용 선실밖에 없었고 선원들은 48명 이었다. 배 한쪽에 3층으로된 화물선창이 있는데 아래쪽 선창에 피란민을 수용한 다음, 숨 쉴 공간만 남겨놓고 선창을 칸막이로 막고 그 위에 또 태웠다. 또 제일 아래쪽 선창 꼭대기와 갑판 사이에 선창을 임시로 만들어 그 곳에도 사람들을 짐 부리듯 싣고 승강구의 뒤끝은 출입과 환기를 위해 그대로 놔두었다. 갑판 아래의 공간이란 공간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뒤늦게 들어온 사람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처럼 내내 서있어야 했다. 선창을 채우자 갑판 사이도 채우고 주 갑판과 보트 계류장까지도 모자라 삭구(배에서 쓰는 밧줄 종류)에 매달리기까지 했다. 새벽녁이 밝아오자 피란민 승선을 감독하던 2등 항해사 알버트가 탄식을 하며 외쳤다. “미쳤어, 마치 손바닥만한 한 차에 12명의 거인이 들어가는 서커스 어릿광대 놀이만 같아…” 이때 라루 선장이 총 몇 명이나 배에 탔나고 물었다. “아래쪽 선창에 1만명을 태우곤 세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라면서 1등 항해사 사바스티오는 싱긋 웃었다. 평시에는 1,200명 정도까지는 승선이 가능했는데,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14,000명을 쑤셔놓듯 태웠다. 하지만 사무장 로버트 러니 상급선원은 “이 배는 이들에게 제공할 먹을 거리는 물론 물이나 화장실도 없고, 의사나 통역할 사람도 없으며, 기온은 영하인데 화물창에는 난방도 안되고 전기시설도 없고, 더군다나 갑판에 있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사람들은 바닷바람과 얼음같이 찬 물보라 속에서 어떻게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까?”하며 걱정을 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북한 피란민을 싣고 바다로 나가기 직전에 한 대의 짚차가 선착장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한 명의 미 육군 중위가 뛰어내리며 황급히 라루 선장에게 “범죄 수사대에서 방금 공산주의자 몇 명이 피란민으로 위장하고 탔다는 정보를 입수해 한국군 헌병 17명과 함께 승선해서 같이 가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급하게 말했다. 실제로는 몇 명이 아니라 많은 숫자의 간첩들이 탔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남한으로 내려가 설사 유엔군 작전을 방해하더라도 더 많은 선량한 피란민을 구출하려면 누가 간첩인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대로 모두 태우고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상황에서 피란민들을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엔군의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생명의 항해’를 계속 진행하는 것 뿐이었다. 피란민 승선이 완료되자 138미터의 갑판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찼으며 배 2번 창고 아래에 있는 폭발성이 강한 300톤의 항공유와 14,000명의 피란민 이 두가지 화물을 실은 채, 드디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3일 오후 2시54분에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화물 대신 사람들을 태우고 눈보라 치고 삭풍이 불어대는 동해바다에서 28시간 820km의 ‘생명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다음날 새벽이 되었을 때,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온통 얼어붙은 송장이 되어 갑판을 뒤덮을까 걱정했는데 피란민들은 모질게도 질긴 생명줄을 붙들고 있었다. 오히려 항해 도중 5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승무원들은 ‘김치1’에서 ‘김치5’까지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또 먹을 것을 찾아 젊은이 몇 명이 선원실로 험악한 기세로 뛰어들기도 했고, 유언비어가 난무하여 폭동의 조짐도 있었으며 그 와중에 헌병으로 위장한 중공군을 체포해 강금하기도 했다. 드디어 24일 13시21분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선장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 올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부산은 이미 유엔군과 백만명 이상의 피란민들로 북적이고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으니 남서쪽 80km 더 가서 거제도에서 하선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라루 선장은 체력적 한계에 도달한 피란민들을 위해 10번 계류장에 정착하고 유엔군의도움을 받아 부상자들은 부산항에 내려 치료를 받고 음식과 물, 담요 등을 배에 실어 나누어 주었다. 24일 자정에 시작된 피란민들의 식사는 다음날인 25일 아침 7시가 다되어야 겨우 끝났다. 1950년 한반도의 크리스마스는 정말로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날이었고, 선상에서 라루 선장은 인생에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 좌측, 1950년 12월 26일 아침 거제도에서 안도감에 화색이 돌며 하선하는 북한 피난민들과 우측, 2001년 여름 미국 뉴튼에 있는 바오로 수도원에서 투병중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던 ‘마리너스 라루’수사와 수도원 인수를 위해 방문한 왜관 수도원의 김구인 원장신부 [자료제공=생명의 항해] 한국 사람들에 의한 뉴튼 수도원의 부흥은 ‘마리너스’수사와 선원들의 선행에 대한 보은 그날 12시42분에 마침내 거제도에 도착했지만 항구가 작아 공해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26일 아침에 지원받은 미군 8,500톤급 상륙정 2척에 7,000명씩 태워 하선시켰다. 떠나는 피란민들은 즐겁게 손을 흔들며 깊은 감사의 눈길을 보냈고, ‘메러디스 빅토리’호 48명의 선원들은 원래 군인들만 태워 왔으면 이렇게 위험하지 않았겠지만 목숨을 담보로 수행한 무모한 생명구출항해에서 끝없는 보람과 만족 및 자부심을 느꼈다. 그렇지만 라루 선장은 자신의 무모한 결정의 결과에 기뻐할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피란민들을 떠나 보내고 텅빈 선창을 돌아보다가 러시아제 기관총이며 자동 권총과 탄약통, 수류탄 더미들이 반짝거리며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또다른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친절한 피란민들이 감사의 표시로 남겨 놓았거나 마음이 변한 적군들이 전향의 징표로 남겨 놓은 선물이었다. 그후 라루 선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 20년을 보냈던 바다 생활을 접고 1954년 수도자의길로 들어섰는데, 베니딕트 회 바오로 수도원에서 ‘마리너스’라는 수사로 근 50년 헌신했다. 그는 “흥남에서 14,000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사건이 저의 결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수도 생활에 헌신하려는 사람 수가 감소하자 뉴저지 뉴튼의 약 70만평 광활한 대지에 자리잡은 바오로 수도원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베네딕트 수도회 슈뢰더 대수도원장이 140명의 수도자가 있는 왜관 수도원의 원장인 김구인 신부에게 도와줄 수 있는지 질의를 하였다. 왜관 수도원은 ‘마리너스’수사가 헌신했던 바오로 수도원을 회생시키기로 결정을 하자 이틀 후인 2001년 10월 14일 투병중이던 ‘마리너스’ 수사는 87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마리너스’수사가 선종한지 2개월 후, 한국인 수도자들이 도착하여 수도원 복구작업에 돌입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인 카톨릭 신자들은 뉴튼에 찾아와 일을 도왔다. 2004년 1월, 뉴욕 타임즈 특집기사에서 골드블렛 기자는 “한국 사람들에 의한 수도원의 부흥은 50년전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던 ‘마리너스’수사와 선원들의 선행에 대한 보은으로 보인다”라고 소개했다. ‘마리너스’수사가 된 라루 선장은 1950년 겨울 흥남항과 거제도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한 가지를 분명히 알고 결심하며 실천했고, 이것은 인본주의와 인류애의 표상이 되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Whatsoever you do to the least of these, you do unto Me)!”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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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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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20) 인본주의와 인류애의 표상이 된 흥남철수와 ‘메러디스 빅토리’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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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3) 정치적 중립 고민속에서 체험한 '기쁨', 겨울아이와 선거혁명
-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배워왔던 필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지시… 부대별로 민정당 지지도 확인해 해당 지휘관의 지휘능력 평가에 반영 민병돈 장군의 정치적 중립, 수년 후 반전되는 재평가 받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2014년 내부 고발자들이 모였던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를 만든 이지문씨는 1992년 백마부대에서 중위로 복무하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의 군대 내 부정 선거를 폭로했다. 당시 부재자투표 때 민주자유당 후보를 찍으라고 상관이 병사들에게 요구한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씨는 이후 군에서 징계를 받고 파면됐으나 소송을 제기해 파면은 취소됐고 중위로 전역했다. 하지만 군입대 전 삼성그룹에 채용되기로 한 일은 취소됐다. 1996년부터는 민주당 소속 서울시의원을 지냈고, 이후에는 공익제보자 모임, 호루라기재단 등에서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요즈음 군부대에서는 이지문 중위가 군생활을 할 때처럼 부정선거를 전혀 생각조차 못하며 철저하게 공정한 선거가 이뤄지고 있다. 몇 년 전 군장성 출신이 모 지역구 선거에 나와 당선했는데 지역별 선거결과를 분석하면서 부대 및 군 관사지역의 지지도가 오히려 낮았다며 안타까워한 것이 그 증거이기도 했다. 필자가 중대장을 시작한지 한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군부대는 동계가 되면 각 제대별로 간부교육을 한다. 1985년 1월 사단 간부교육 중에 교육받던 지휘관들에게 갑자기 자대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선후배를 만나 부대지휘의 정보를 교환하고 회포도 풀 수 있었던 교육이 조기에 종료되어 아쉽지만 자대로 복귀했다. 복귀하자 마자 연대장이 전체 지휘관 회의를 직접 소집했다. 갑자기 간부교육 중 복귀 지시가 하달됐고 또 연대장이 회의를 소집하자 지휘관들은 특별한 사건이 있는가 의아해했다. 당시는 제 5공화국으로 다음달인 2월12일, 제 12대 국회의원 276명을 뽑는 선거가 있어 마을마다 선거운동 분위기에 요란하게 들떠 있었다. 연대장은 평소와 달리 웃는 얼굴로 차를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직 대통령이 나라 사랑하는 지도력을 발휘한 결실로 경제가 급성장하고 ’88 올림픽’도 유치했다며 정부의 시책을 홍보하면서 좌익 및 진보세력들에 의한 정치적 혼란 상황을 언급했다. 이러한 난국에 우리 군인들도 동참하여 나라가 바로 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행동으로 정부를 도와야 한다며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당황했던 것은 연대장이 부대별로 지지도를 확인해서 해당 지휘관의 지휘능력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말이었다. 그의 곁에 있던 보안사령부에서 파견된 보안반장은 부재자 투표용지를 보이며 각개 병사들이 투표한 것을 모두 확인하겠다고 말한 것은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배워왔던 필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회의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해서 대대장실에 중대장들은 다시 모였다. 대대장도 연대장의 지시에 난감한 표정으로 “각 부대별로 평가를 한다니 중대장들은 조심하되 적극적으로 임해…..”라고 말을 더듬으며 대대를 담당하는 보안부대 중사의 표정을 살폈다. 중대 행정반으로 돌아와서 소대장을 집합시켰다. 필자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몰랐지만 연대장과 똑같이 정부시책을 홍보하고 이 부재자 투표 결과가 대대장 평가까지 좌우하게 된다는 언급을 하며 소대장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이후 전 중대원을 집합시켜 정부시책을 홍보하면서 좌익 및 진보세력들에 의한 정치적 혼란 상황을 언급했다. 이러한 난국에 국회의원 선거에서 올바르게 잘 판단해서 투표를 잘하자고 당부했다. 행정반에 투표소가 설치되고 각 개인의 투표용지가 도착했다. 그러면 필자는 중대장실에 해당 병사를 불러 차를 한잔 주면서 어디를 찍을 것인가를 확인 후 투표소로 보냈다. 필자는 지시사항을 시행하면서도 이것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군인의 역할은 아닌데 하는 죄책감을 느꼈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소대 군종병을 맡고 있는 전진호 일병이 중대장실에 들어와 차를 한잔 마시면서 절대 집권당을 찍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고 무소속에 목사님 출신이 있어 그 분을 찍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표출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전일병과 이야기를 하면서 초라해지는 내모습을 느꼈고 소신있게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는 전 일병(현재 서울 성북동 00교회목사)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선임 소대장 김중위가 중대장실로 들어왔다. “중대장님 지금 뭐하세요..? 군인은 명(命)에 살고 명(命)에 죽는 것인데…”하며 “지금부터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중대장님은 나가세요..”라며 필자를 밀어내고 전 중대원 면담을 자처했다. 김중위는 중대에서 1년 넘게 근무하여 필자보다 중대 병사들을 더 많이 알고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내키지 않았던 암울한 수렁에서 나를 건져주었다. 이와 관련해서 특전사령관과 육사교장을 역임하였던 민병돈 장군(육사15기, 하나회)이 당시 인접 제 20사단장으로 근무를 하였는데, 그 부대도 필자가 겪은 상황에 처해있을 때 사단장이 나서서 참군인의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민장군은 상부로부터 선거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당시 예하 여단장들에게 정부시책을 홍보하되 투표과정에서 일체의 선거법 위반행위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를 믿고 따르면 모든 책임은 사단장이 지겠다고 했다. 결국 투표 결과 다른 부대보다 여당 지지율이 떨어졌고 통상 20사단장을 마치면 영전하던 당시의 사례에서 벗어나 준장 보직인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좌천되었고 사단보안부대장도 한직으로 밀려났다. 이후 1987년 6.29선언이 있었고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민장군의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처신은 반전되는 재평가를 받아 오히려 중장으로 진급해 특전사령관으로 임명 되었다. 물론 당시의 사단보안부대장과 사단장 지시를 수명한 여단장들도 한직에서 요직으로 발탁되었다. 그 밖에도 이런 참군인이 여러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훗날 민장군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필자도 그때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중대는 선임 소대장 김중위의 도움으로 절대적인 지지율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타 부대와 비슷한 결과로 평가되어 대대장에게 면은 세웠다. 통신장교가 꺼낸 '아내의 생일선물'은 이종용의 '겨울 아이' 그해 겨울에 태어난 '겨울아이'는 바로 12대 국회의원 선거혁명 잡초는 밟아도 또 밟아도 다시 살아나, 철저한 감시필요 중대 소대장은 학군장교인 김태정 중위, 우광호 소위와 학사장교인 변상훈 소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대장 부임 후 엄동설한 속에서도 치루었던 지휘관 교대 FTX(작계시행훈련)와 애끓는 고민을 하며 난감했던 부재자투표가 끝나고 격려차원에서 육단리 셋방으로 저녁초대를 했다. 1월말 눈 내리는 대성산 기슭 육단리의 조그마하고 비좁은 단칸방 셋집에 소대장들과 통신장교인 현준(김중위 동기)이 들어가니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끼워 앉아야 했다. 그동안 훈련과 임무수행 중의 애피소드 회상으로 한 층 분위기가 고조되었지만 3시간 넘게 올라간 눈 덮힌 대성산 진지에서 혹한을 견디며 사고없이 부대를 지휘했던 것과 이번 투표에 있었던 소대장들의 노고에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내가 저녁상을 내오자 자리는 더 좁아졌다. 소주 한잔을 기우려는 순간 늦게 온 통신장교가 “잠깐..”하며 기다리라고 했다. 부시럭 거리며 벗어 놓은 옷사이에서 케익을 꺼내왔다. 아내와 필자는 당황했다. 촛불을 켜고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당시 유행했던 가수 이종용의 ‘겨울아이’가 흘러 나왔다. 신혼인 아내는 소대장들이 준비한 자신의 생일 케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필자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소대장들이 기억을 하고 기습적으로 우리 부부를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참으로 간단하고 작은 것에 쉽게 감동을 받는다. 그때 군인 가족의 애환 속에서 아내는 작은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그해 겨울에 태어난 겨울아이가 또 있었다. 바로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로 말 그대로 선거혁명 이었다. 그렇게도 치밀하게 정권이 개입했지만 집권당인 민정당은 35.2% 득표로 148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창당한지 200일도 채 안되는 신민당이 29.3%득표에 67석으로 제 1야당이 되었고, 야당 역할을 잘 못했던 기존의 민한당은 35석을 확보했으나 곧 해체되어 통합된 신민당이 103석으로 증가하여 국민들의 민의가 확실하게 반영될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는 집권당의 불신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선거혁명 이었고 이것은 바로 이어진 6.29선언과 제5공화국 종말을 앞당기는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부정선거와 부패 등은 잡초와 같은 존재이다. 이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시에도 이지문 중위의 폭로로 일부이지만 집권당 정부의 선거 개입이 또 드러났다. 현재도 장담할 수 없다. 이제는 과거처럼 군에서의 일방적인 선거개입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고도로 지능화된 일반사회가 더 문제이다. 필자도 경험 했지만 유도식 여론조사와 언론의 편파 방송으로 민의를 호도하고 있는 일부 상황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필자가 중대장 시절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시 그렇게도 집요하게 개입하며 부정한 투표를 유도했던 결과가 오히려 선거혁명을 이뤄낸 것처럼 국민들이 올바르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또한 지금도 맹활약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지문씨의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호루라기재단 등처럼 시민사회에서 공정하고 정확한 두 눈을 크게 뜨고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 잡초는 밟아도 또 밟아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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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3) 정치적 중립 고민속에서 체험한 '기쁨', 겨울아이와 선거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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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9) 인본주의와 인류애의 표상이 된 흥남철수와 ‘메러디스 빅토리’호(상)
- 흥남에 미 3/7사단과 국군 수도사단/해병1연대, 방어선 구축하고 적과 대치 중공군은 북한군을 앞세우고 연합전선을 펼치며 대규모 공세 북한 피난민들은 흥남항 주변으로 몰려들어, 유엔군 철수 조차도 지연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한국전에서 전세를 뒤엎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주력부대인 미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은 영하 30도인 극한지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패 참패를 겪었다. 장진호 전투의 주력부대들이 흥남 집결지로 철수완료한 12월 11일, 맥아더 유엔사령관은 흥남항 인근의 연포비행장에서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수립한 ‘흥남철수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전투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미 해병 1사단과 7사단 31연대전투단, 영국 해병 41코만도가 가장 먼저인 15일 흥남항을 떠났다. 한편 중공군은 9병단의 20, 27군 예하 5개 사단 규모로 함흥 북쪽에서 공격했다. 북쪽은 동·서쪽 평야지대에 비해 산악지대여서 유엔군의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피해 숨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평야지대인 함흥 동쪽은 북한 인민군들이 맡아 돌파하고자 간헐적으로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를 막아내고 철수작전을 보장하기위한 흥남 교두보 선에는 위의 상황도와 같이 미 3, 7사단과 국군 수도사단, 해병1연대(-)가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엄호를 받으며 연포비행장에서는 12월 14일부터 항공기를 이용하여 부상자 228명과 기타 인원 3,891명, 탄약 772.2톤과 차량 439톤을 포함한 약 2,100톤의 화물을 17일까지 393회 걸친 출격으로 수송하였다. 흥남항 주변의 해상에는 소련군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 해전사상 가장 많은 기뢰가 설치되어 있었다. 최종적으로 흥남항의 모든 군수물자와 항구를 폭파시켰던 제 90상륙지원단의 소해전단에서 흥남항 남·북부 양쪽 16km해협을 이용하여 선박 출입이 가능하도록 기뢰제거 작업을 하였고, 이곳에 함포지원사격이 가능하도록 순양함과 구축함을 근접 배치하여 적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의 한반도 침략 규모가 대규모임에 따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사력을 대규모로 증강하고자 ‘동원령’도 발표했다. 대국민 연설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서 한반도와 세계를 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으며 국방예산도 전쟁발발전의 135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까지 증액 시켰다. 특별하게도 이날 중공군은 함흥 북쪽에서 북한 인민군들을 앞세우고 연합전선을 펼치며 대규모 공세를 가해왔다. 유엔군의 방어가 철저하자 중공군의 피해를 줄이고자 북한 인민군이 앞장서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 3사단과 24시간 연속된 함포지원사격과 공군 전폭기에 의해 중공·북한군의 연합공격은 무위로 끝났다. 하지만 그날 미 10군단 지휘부를 함흥에서 흥남으로 이동하고 방어선을 ‘통제선-1’로 축소했다. 이것은 유엔군의 철수가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된 결과였다. 동시에 북한의 피란민들은 흥남항 주변으로 대규모 몰려들어 유엔군 철수 조차도 지연시키기 시작했다. ‘통제선-1’로 축소따라 ‘연포비행장’ 폐쇄, 유일한 탈출로는 흥남항 이승만대통령 지시 받은 함흥시 대표,“유엔군이 북한주민을 구출해줘라”요청 인류애 돋보인 흥남철수작전 최종철수시간은 X-mas 전날인 12월 24일 11시 12월 17일 새벽 흥남항 북측 해변을 방어했던 국군 수도사단은 미해군 상륙선(LST)에 탑승해 묵호항으로 출항했다. 태백산맥 줄기에서 준동하는 북한 패잔병들을 진압하기 위해 상륙장소를 부산이 아닌 묵호항으로 바꾼 것이었다. 이어 방어선을 ‘통제선-1’로 축소됨에 따라 그동안 철수작전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연포비행장’이 폐쇄되었다. 이제 군인이건 피란민이건 흥남항을 탈출할 방법은 바다를 통해 동해로 가는 길밖에 없었다. 당시 흥남부두에는 군인뿐만 아니라 피란민 10만명이 몰려 있었다. 흥남이 고향이며 고문이자 통역을 맡았던 현봉학 박사(전쟁 후 버지니아 의대 병리학교수, 미국·한국 임상병리학회 회원, 한국 보건부장관 고문, 미 의학회 편집위원 등을 역임, 한미양국 의학계에 큰 공헌을 하여 미국 병리학의 최대 공로상인 '이스라엘 데이비슨 상’을 받음)는 알몬드 장군에게 피란민의 수송을 건의했으나 “군인들과 장비를 철수하는 것이 우선이라 피란민을 태울 여력은 없다”며 이를 거절당했다. 다급해진 현봉학박사는 미 10군단 참모부장 겸 탑재참모였던 미 해병 포니 대령을 찾아가 “피란민을 구해 달라”고 읍소했다. 포니 대령은 현봉학 박사의 간절한 부탁에 못이겨 함정탑재의 기술적 대안을 제시하며 상관인 알몬드 소장을 설득하여 피란민 10만명을 무사히 구하게 되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생명의 항해’ 저자인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은 “당시 유엔군 측의 자료 조사를 통해 미 10군단 지휘부는 인본주의와 인류애적인 차원에서 고민하여 처음부터 가능한 한 최대한의 피란민 수송하기 위한 방법을 마련했던 역사적인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특히 피란민을 구해 달라는 공식적인 요청은 함흥시 대표 이우춘(부시장), 모화복(남구청장), 김일성(함남 청년회 의장, 동명이인) 3명이 12월12일 미 3사단장을 방문해서 “유엔군이 북한주민을 구출해주거나, 자기들을 떠나지 말고 지켜달라”고 하며 이승만대통령이 “피난민 수송을 해줄 것을 유엔군을 방문해서 부탁하라”는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함흥시 주민 대표자들의 공식적인 요청을 받은 10군단은 이에 응했고 이는 안 이사장의 조사노력에 따라 미 10군단장이 발송한 보고자료인 ‘극동군 사령부 수신메세지(무선) 12월14일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12월18일에 흥남방어선은 ’통제선-2’로 축소되었고 다음날에는 10군단 지휘본부가 90상륙지원단의 기함인 마운트 맥킨리 호로 이동하였다. 그때부터 흥남철수작전의 공식적인 지휘권은 90상륙지원단장 제임스 도일 해군제독에게 인계되었고 미 7사단은 21일 부산으로 출항하였다. 이로써 미 3사단 병력만이 흥남부두에 남아있는 산더미 같은 군수물자와 구출을 애원하는 피란민을 관리 및 통제하고 있었고 곧 흥남항의 외곽 ‘통제선-3’으로 방어선을 축소하였다. 중공군은 19일에 이어 북한군 2개 사단을 선두로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지상화력과 함포,항공지원으로 저지당했다. 또한 장진호전투에서 전력상 손실을 입은 데다 더 이상의 보급 지원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통제선 전면에서 포격으로 응사하는 소극적인 도발을 할 뿐이었다. 12월 22~23일, 주로 포병부대 등의 중장비와 중화기, 탄약 등 군수물자들을 선적하였고 이제 흥남항을 지키던 미 3사단이 배에 승선하기 전에 부두에 남아 있는 피란민을 총괄 지원하는 일이 10군단 참모부와 90상륙지원단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 되었다. 미 10군단 참모부장 겸 탑재참모였던 미 해병 포니 대령 등 참모진은 인도주의적 사명감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군함과 화물선, 미 해군용선계약 관계에 있던 빅토리급 상선 메러디스, 헌터, 모르맥문 호 3척과 미 해군 상륙선(LST) 2척에 마지막 남은 피란민을 수송하기로 했다. 이때 공산군의 산발적인 공격으로 피란민들이 배를 타는 동안 후방을 방어하던 미 3사단 병사들의 희생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미 3사단은 24일 11시부터 7개지점에서 상류장갑차(LVT)에 승선하기 시작했다. 모든 병사들이 철수 완료하였지만 보급품을 수송할 선박이 부족하여 흥남항에 남아있는 400여톤의 다이너마이트와 227톤의 폭탄, 200드럼의 휘발유는 미해군 수중폭파팀과 공병에 의해 폭파 폐기시켰다. 그후 마운트 맥켄리호에 승선해있던 10군단장 알몬드소장과 제임스 도일 소장은 16시32분에 흥남항에서 출발함으로써 유엔군 10만 5천명과 35만톤의 군수물자, 1만7,500대의 차량이 안전하게 철수하는 흥남철수작전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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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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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9) 인본주의와 인류애의 표상이 된 흥남철수와 ‘메러디스 빅토리’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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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 한미혼성 31연대전투단의 처절한 장진호전투
- 처절한 장진호전투의 한국군 유해, 미북 정상회담 결과로 미국 송환 후 한국으로 봉환 X-mas 이전 통일을 장담했던 맥아더의 미 10군단, 장진호에서 치욕스런 혈전 [시큐리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미군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018년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미국으로 송환된 55개 유해 상자에 대한 유전자 검사가 완료됐다며, "55개 상자에 총 250여명의 유해가 담겼는데, 그 가운데 80여명은 미국인이 아니며 한국군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한국전쟁 기간에 북한에서 실종된 미군 숫자가 5,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제70주년 국군의 날인 2018년 10월1일 오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문재인 대통령 주관으로 정경두 국방부장관, 육·해·공군참모총장,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 한국전 참전용사를 포함해 60여 명이 참석해 북한지역에서 발굴된 6·25남침전쟁 국군전사자 유해 봉환식이 열렸다. 이들 유해는 지난 1996년~2005년까지 약 10년간 북미 양국이 함경남도 장진, 평안북도 운산, 평안남도 개천 등에서 발굴한 유해 중 하와이에 있는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 한미 공동감식결과에 따라 국군전사자로 판명된 64구다. 봉환식에서 문 대통령은 모든 유해에 참전기장을 일일이 수여했다. 이후 묵념 및 헌화, 조총발사 등의 의식 행사와 함께 추모공연이 이어졌다. 한국전에 미 3사단에 배속된 카투사로 장진호 전투에 참여했던 정일권(86)씨는 봉환 행사에 참석해 "68년 전에 장진호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가 이제라도 조국의 품에서 편히 쉴 수 있어 다행"이라며 "하루빨리 북한지역에서의 유해발굴이 진행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국군전사자 유해는 봉환식 3일전인 9월 28일(현지시간) 서주석 국방부차관이 미국 하와이에 위치한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으로부터 직접 인수받아 우리 공군 특별수송기를 이용해 국내로 송환됐다. 한반도의 끝인 혜산진에 돌입했던 미 7사단, 10배의 적과 피비린내 나는 혈전 미 제 7사단(사단장 소장 바)은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하여 320km에 달하는 산악지대를 혹한과 강설을 무릅쓰면서 집요한 적의 저항 속에서 악전고투 끝에 11월 21일 만주가 보이는 한반도의 북쪽끝인 혜산진에([김희철의 전쟁사](15) “미 7사단의 압록강 기념촬영은 맥아더 추락과 더 많은 피를 불러와” 참조) 진출하였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통일을 장담했던 맥아더의 미군 지휘관 10군단장 알몬드, 7사단장 바 장군과 17연대장 파월 대령은 11월 21일, 승리에 도취되어 압록강 혜산진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이어 동경의 맥아더 원수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전날 미 제 7사단 예하연대가 혜산진을 점령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 원수는 다음날인 11월 22일 아몬드 소장에게 "네드여! 축하합니다. 진심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리고 바 소장에게도 미 제 7사단이 정곡을 찔렀다(The 7th Division hit the jackpot.)고 전해주시오"라는 축전을 보내 왔다. 그러나 그때 이미 중공군 제 9병단의 20, 26, 27군 10개 사단이 미 10군단의 관할지역인 북동부 전선 산악지역을 은밀하게 침투하여 장진호까지 포위를 시도하고 있었다. 한편 11월 25~26일, 중공군 제 13병단 예하 18개 사단의 막대한 병력이 미 8군이 주도하는 유엔군의 북서부 전선을 공격하여 우익 방어선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에 27일 장진호 서측 축선 미 해병 1사단(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5연대로 미 8군을 포위하고 있는 중공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무평리로 진격하자 마자 엄청난 중공군의 압박으로 돈좌되었고 곧이어 그날 밤 아래 ‘장진호전투 대치 상황도’와 같이 중공군 10개 사단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다. 또한 하갈우리와 고토리에 있던 미 해병 1사단 지휘부와 해병 1연대도 중공군 58, 60, 76, 77사단에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그때서야 미 10군단은 자신들이 중공군이 쳐 놓은 덫에 걸려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행이도 중공군은 하갈우리에 있던 미 해병 1사단 지휘부를 28일부터, 고토리에 있던 미 해병 1연대를 29일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여, 미 해병 1사단 지휘부와 해병 1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할 시간이 있어 기습으로 극심한 피해를 본 장진호 서안의 미 해병 5, 7연대와 동안의 31연대전투단에 비해 피해는 적었다. 또한 중공군 89사단이 미 해병 5연대를 공격할 수 있는 유담리에 있다가 더큰 포위를 위해 함흥으로 가는 남쪽 사창리를 공격하였으나 미 3사단 7연대에 의해 저지 당한 것이 미 해병 1사단과 7사단 31연대전투단의 퇴로를 열어준 격이 되었다. 특히 미해병 5연대가 치명적인 피해를 보면서도 중공군이 방어선을 뚫지 못하도록 했으며 이로써 중공군은 다른 사단과 협조된 작전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 결국 하갈우리의 해병 1사단 지휘본부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중공군의 작전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한미 혼성 31연대전투단, 12:2 및 21:2의 피비린내 나는 악전고투 혈전 미 해병 5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장진호 우측을 담당한 7사단 31연대 3대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32연대 2대대와 같이 연대전투단을 편성하여 방어 배치하였고, 27일 22:00시부터 중공군 80, 81사단 12개 대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때 한미 혼성 31연대전투단 2,652명중 한국인 병사 카투사 875명도 포함되었고 이들은 숱한 희생을 겪으면서 죽음의 전투현장에서 대한민국을 지켰다. 27일 밤 영하 30도 기온속에서 중공군 80, 81사단은 호적을 불고 징도 쳐대고 고함을 지르며 31연대전투단 2개 대대를 향해 공격해 왔다. 3대대장 라일리 중령과 포병 대대장 엠브리 중령이 부상을 당했지만 동이 트자 중공군은 공격을 중단하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유엔 공군 전폭기와 해군 함재기, 해병 전폭기의 위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낮에는 숨어버리고 또다시 28일 밤이 되자 중공군과 피비린내 나는 교전을 다시 시작했고 장진호는 피로 물들고 있었다. 두번째날 극한 상황에서도 부하들을 독려하며 장진호 동안을 지켜냈던 맥린 연대장은 부상을 당한 채 중공군의 포로가 되자, 선임인 32연대 2대대장 돈 페이스중령이 전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29일 밤이 되자 중공군은 90사단 1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21개 대대 병력이 미 31연대전투단 2개 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공격하였지만 유엔군은 계속적인 공중지원을 통해 탄약 등을 보급받아 우월한 화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낙하기술이 부족하여 보급품 다수가 중공군 주둔지역에 떨어져 회수과정에서 적군과의 교전으로 많은 희생도 있었다. 장진호 동안에 고립되어 숱한 희생을 치루어 괴멸 위기에 놓인 31연대 전투단장 돈 페이스중령은 하갈우리에 위치한 미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 해병 1사단도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취사병과 기술병까지 소총수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31연대전투단 지원을 위한 병력 분산은 어려웠다. 결국 7사단 31연대 전투단장 돈 페이스중령과 병사들은 이제 자력으로 포위망을 뚫기로 하고 유엔군 전폭기가 적을 강타하는 시간에 맞추어 포위망을 돌파할 계획을 부대원들에게 하달했다. 수백명에 달하는 부상병들만 차량에 탑승시키고 모든 차량과 장비들은 파괴하였다. 12월 1일 대대진지를 출발하려는 순간 어이없게도 오폭사고가 발생했다. 선두부대가 진지를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중공군의 집중사격이 개시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근접지원하던 유엔군 항공기가 돌연 미 31연대 전투단 선두부대 상공에 기총소사와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장갑차가 화염에 휩싸이고 수명의 병사가 희생되었다. 돈 페이스중령은 가까스로 부대를 수습하고 B중대를 선두로 계속 남으로 전진하였다. 이와중에 돈 페이스중령은 수류탄 파편을 맞아 전사했다. 지휘관이 전사하자 지휘체제가 무너졌고 병사들은 소단위로 흩어져 개별적 탈출을 시도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걷거나 부상당한 몸을 겨우 끌면서 얼어붙은 장진호를 건너 하갈우리에 있는 미해병 1사단 지휘본부에 도착했다. 12월 2일 새벽까지 장진호 동안에 배치되어 있던 미 7사단 31연대전투단 병사 중 1,932명이 죽거나 중공군의 포로가 되고 생존자 670명만이 하갈우리로 복귀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도 지난 28일 중공군의 대규모 침략공격으로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미 8군은 이미 한반도 북서쪽에서 철수를 시작했으며 미 10군단도 크리스마스 이전에 통일하려는 최초의 북진 계획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미 10군단장 알몬드장군도 이미 30일 하갈우리에 위치한 미 해병 1사단 지휘본부에서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 지역으로 철수시키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따라서 미 해병 1사단장에게 철수에 지장을 주는 모든 장비를 파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상태였다. 장진호 포위망 돌파는 남쪽으로의 공격작전?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의 전략적 승리 장진호 서측 유담리에서 강추위로 인한 심각한 동상피해 속에서도 중공군 59, 79, 90사단의 공격을 막아내던 미 해병 5, 7연대도 12월 1일 하갈우리를 향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비행장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부상지의 이송과 보급품의 보급이 이루어졌다. 끊어진 교량과 중공군의 공격으로 돌파가 쉽지는 않았지만, 미 해병 5, 7연대는 12월 4일에야 포위망을 빠져나와 사단 지휘부가 있는 하갈우리에 도착해 예하부대 건제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이때 종군기자 히긴스가 미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에게 “후퇴입니까?"하고 물었는데, 스미스 장군은 "후퇴라니요? 천만에요, 우리는 다른 방향인 남쪽으로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우선 12월 1~5일까지 부상자 4,300명을 항공기로 수송했다. 드디어 6일, 미 해병 1사단의 주력과 영국 해병 41코만도 등 1만여명과 이를 따라 나선 북한 피난민 1,500명이 하갈우리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중공군은 미군의 철수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하였지만, 유엔 공군 전폭기와 해군 함재기, 해병 전폭기 등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12월 7일 고토리에 도착했다. 미 3사단 방어지원팀인 ‘테스크 포스 독’이 후위를 쫓아오는 중공군을 저지하는 덕택에 12월 9일 황토령 일대를 가까스로 점령함에 따라 공중투하된 M2답교(8개 경간)로 설치한 교량을 확보하여 진흥리로 철수하였다. 허나 미 10군단 소속 포병장교로 미 3사단 52수송대에 파견되어 철수를 지휘하던 존 페이지 중령이 함흥의 10군단 지휘부로 돌아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철수현장에서 직접 지원하다 교전중 장렬히 전사했다. 존 페이지 중령의 철저한 준비로 장진호 주변에 있던 모든 유엔군 병사들은 이 엄청난 피해를 최소화시키며 다른 방향인 남쪽으로 공격하여 12월 11일 21시에야 흥남일대로 철수를 완료하였다. 그는 전사한 후 7년이 지난 1957년에 그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공로가 밝혀져 미국 최고 명예훈장이 추서되었다. 이러한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이 전쟁 국면의 전환시켜 본격적인 공세 돌입하여 37도선까지 유엔군을 전면 철수시킨 중공군사령관 팽덕회의 전략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엔군 측은 3만명 중 사상자는 약 8,700명이지만, 투입된 중공군 6만7천명 중 사상자는 4만 8천명이에 달하는 처절한 대가를 치룬 중공군의 승리였다. 양쪽의 피해 규모를 볼 때는 압도적 병력 열세에도 온갖 고난을 이겨내 마침내 ‘선택받은 소수(chosen few)’가 된 미 해병 및 7사단 그리고 한국인 병사 카투사 875명 영웅들의 전술적 승리이기도 한 전투였다. 한편 그때까지 무적을 자랑하던 미 해병대는 과달카날 전역이래로 장진호 전투에서 전멸 위기에까지 몰렸다. 이 패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 베트남 전쟁이 있기 전까지 미군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패 참패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북서부 미 8군과 장진호 10군단의 참패는 미국이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된 장진호전투는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동계전투'로 분류되기도 했다. 또한, 중국 입장에서는 당시 세계 최강의 가장 정예화된 미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준, 가히 중국사에 남을 ‘항미원조(抗米援朝)’의 대승이었다. 특히 중공군이 장진호 부근에서 미 해병1사단을 은밀하게 포위공격하여 미 해병대는 대부분의 물자를 버리고 몸만 빼내서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중공군이 노획한 미군의 무기, 탄약, 차량, 식량 등 군수물자는 이후의 전쟁에서 중공군에 의해 요긴하게 사용되었다고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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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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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 한미혼성 31연대전투단의 처절한 장진호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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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2) 전방오지 산짐승과 눈싸움 그리고 셋방살이 오강의 추억…
- 고등군사반(OAC) 과정 수료 후 이사도 못한 채, 한달 가까이 영내 근무 별빛에 반사된 산짐승의 눈빛 보다 사람의 인광이 더 강해 옛날 혼수였던 ‘오강’, 전방 오지에서는 필수 생활용품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유난히도 삭풍이 몰아치며 추웠던 1984년 겨울 날씨 속에 필자는 전임자 해임 덕분에 보병학교 고등군사반(OAC) 과정을 끝내고도 이사를 못한 채, 한달 가까이 퇴근도 못하고 급하게 취임한 중대장실에서 지냈다. 기혼자에게 관사는 제공되지만 비어있는 관사가 없어서 보다 못한 장모님이 최전방 오지 육단리 도로가 셋방을 구해 아내의 이사를 도와 주셨다. 물론 필자는 이사 당일 나가보지도 못했다. 그때 백운계곡을 지나 광덕산 카라멜고개를 넘어 사창리를 거쳐 실내고개와 수피령을 지나왔는데 이사짐 트럭 차장 밖으로 보이는 아슬아슬한 계곡에 가슴을 졸이며 펑펑 우셨다고 했다. 군인 가족의 애환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부대 임무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일과를 끝내고 자정이 다되어 퇴근하려고 하니 당직사령이 2시간 가까이 걷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퇴근차를 내주어 민간인통제초소까지 태워주었다. 민통초소에서도 육단리 셋방까지는 약 5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태워준 운전병에게 조심해서 복귀하라 당부하고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미 자정이 넘어 인적은 끊어진 상태였다. 육단리 셋방은 전에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가게를 하던 집이라 문을 열면 차들이 다녔고 화장실(재래식 변소)을 갈려면 차도로 나와 주인집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야했다. 아내가 그립고도 안타까운 마음에 발길을 재촉했다. 육단리에 갈려면 하오재길 두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등 뒤에 보이던 민통초소 불빛이 사라지고 겨울 삭풍과 함께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고 하늘의 별빛이 비포장도로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첫번째 고개를 올라가는데 갑자기 고개 언덕에서 두줄기 라이트가 비추었다. “이 시간에 차들은 모두 끊어졌는데 무슨 차가 올까?’하며 계속 올라갔다. 순간 갑자기 서치라이트 불빛이 사라졌다. 50미터, 40미터 점점 최초 불빛 장소로 다가가는데 라이트는 없었다. 점점 긴장감에 휩싸이며 등에 식은 땀이 베었다. 그때 또 두줄기 라이트가 필자를 비추었다. 잠깐 멈출려는 순간 라이트가 움찔했다. 산짐승 이었다. 덩치로 보면 송아지 만했고 새까맣게 보이는 것이 사나운 맹수임에는 틀림없었고 도로 한복판에 비스듬이 앉아, 별빛보다 더 밝은 라이트를 내게 보내며 쏘아보고 있었다. 마침 내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 옆에도 제설작업을 해서 깨끗하여 몽둥이로 쓸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멈칫하다가 필자도 눈에 힘을 주었다. 산짐승과 눈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보속을 유지하며 그 산짐승 정면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15미터, 10미터…… 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5미터즈음 다가가자 그 산짐승이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도로 옆으로 내려갔다. 등에는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산짐승이 있던 자리를 통과해 고개를 넘을 때까지 긴장을 늦을 수는 없었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지 귀에 촉각을 세우고 두번째 고개를 넘자 육단리 마을 불빛이 보였다. 마을 불빛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 겨울 모진 바람과 추위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온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고, 눈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아프기 까지 했다. ‘별빛에 반사된 산짐승의 눈빛 보다 사람의 인광이 더 세구나’하는 것을 깨달으며 차도와 붙어있는 셋방의 문을 두드리니 아내가 잠결에 나오며 반가워 했다.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잠깐만 따라와”하며 문을 닫고 나왔다. 주인집 대문을 열고 화장실로 가면서 나보고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용변이 마려웠는데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방에 들어오자 머리맡 베게 옆에 가위가 놓여있었다. “이게 뭐야?”하고 묻자 웃으며 슬그머니 치웠다. 잠을 자는 셋방의 방문을 열면 바로 도로이기 때문에 만약을 위해 가위를 곁에 놓고 자고 있었다. “아무리 퇴근이 늦어 한시간을 자더라도 집에 꼭 들어와야 겠구나”하는 다짐을 하면서도 왠지 가슴이 뭉클하게 저리어 왔다. 다음주 절친이자 인접 중대장인 한황진 대위가 집들이를 오면서 고맙게도 ‘오강’을 사가지고 왔다. 아내는 창피한 것도 잊은 채 너무도 좋아했다. 전방 오지에서 ‘오강’은 필수 생활용품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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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2) 전방오지 산짐승과 눈싸움 그리고 셋방살이 오강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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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1) 분노로 떨리는 손끝에서 떨어지는 낙담의 담뱃재…
- 해임통지도 못 받았던 전임 중대장은 결혼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84년 12월 18일 유난히도 살을 애는 듯한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 날씨 속에서 전임자 없는 중대장 취임식을 했다. 왠지 출발부터 썩 개운하지 않았다. 마치 소대장 시절에도 갑자기 대대장이 호출하여 명을 받고 지휘문제로 전 소대장이 해임된 GP장으로 급하게 취임했던 기억([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 (30) GOP부대의 ‘노루’ 트라우마와 GP의 '배신자들' 참조)이 떠올랐다. 필자는 문제가 있는 부대, 전 지휘자가 해임된 부대 위주로만 취임하는 전담 지휘관이 된 기분이었다. 취임식 후 며칠이 지났을 때, 부임한지 6개월 밖에 안되었지만 해임통지도 못 받았던 전임 중대장은 결혼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필자보다 임관이 5년 빠른 삼사출신 군선배였다. 그는 휴가전에 자신이 근무하던 자리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중대를 지휘하는 필자를 보면서 얼마나 당황했을까? 필자의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아무런 말도 없이 중대 행정반 난로 옆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상기된 얼굴로 분노에 떨면서 한 모금 빨고는 부들부들 떠는 손이 내려올 때에 맞추어 낙담에 찬 담뱃재도 힘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대대 본부에서 전임자를 호출했다. 그는 타대대 참모장교로 보직이 결정되었고 그렇게 쓸쓸하게 떠났다. ■ 영하 28도의 혹한 속에 지휘관 교대 FTX 실시 필자가 부임한 중대는 대성산 서측 방어진지를 담당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대대에서 새로 부임한 작전장교가 중대장 교체 후 FTX (작전계획 시행훈련) 계획을 수립했다. 하필이면 훈련 일정이 그해 가장 추운 날씨로 기온이 영하28도까지 내려가는 기간 이었다. 전 중대장이 보직 해임된 중대라 간부 및 병사들도 사기는 침체되어 있었지만 혹한을 고려하여 조정해 달라는 말조차도 못할 정도였다. 필자도 갓 취임한 직후이라 부여된 훈련임무를 그대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주둔지에서 비상경보가 발령되고 중대원들은 완전군장을 꾸리며 생활관을 정리한 후 연병장에 집합했다. 그 와중에 동작이 느리고 요령을 피우는 병사들을 소대장은 심하게 혼을 내고있었다. ■ 병사를 친자식처럼 아끼는 행보관, ‘이런 부대에 왜 사고가?’하는 의구심 마침 중대 인사계(행정보급관) 박무열 원사는 그 모습을 보며 병사를 감싸고 있었고 인사계보다 어리지만 상관 장교인 소대장은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소대장님, 때리지 마세요…! 아직 잘 모르고, 서툴러서 그래요….. 이해해 주세요…..”하는 박 행보관의 모습에서 병사들을 자식같이 아끼는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모시던 직속상관인 중대장이 보직 해임되는 안타까움도 있었겠지만 부대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잘 하고 있었고, 사위가 타부대에 근무하는 대위였다고 했다. ‘시졸여애자 고 가여지구사(視卒如愛子 故 可與之俱死)’의 의미인 “장수가 병사들을 사랑하는 아들 돌보듯 한다면 가히 생사를 같이할 수 있다”는 손자병법 지형편을 확인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병사를 친자식 같이 아끼는 행보관의 모습에서 ‘이런 부대가 왜 사고가 많았지..?’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촉각을 다투는 시간이라 동계군장 상태만 확인하고 진지로 출발시켰다. ■ FTX 훈련 중 심야의 대대장 현장 방문, 고생해놓고도 당혹 진지 투입로는 그동안 계속된 제설작업으로 눈은 치워져 있었지만 북향이라 빙판이었다. 3시간 가까이 군장을 맨 상태에서 제설도구를 추가로 휴대하고 대성산 진지로 올라갔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였지만 등과 이마에는 땀이 흘렀고 진지에 도착하니 쌓인 눈이 교통호를 메워 허벅지까지 빠지는 상태라 바로 제설작업을 했다. 필자는 통신병과 함께 각 소대진지를 둘러보았다. 눈이 많이 쌓인 곳은 키를 넘어 터널을 만들어 통과했고 각 소대진지를 다니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대장들의 작전계획 설명을 간단히 보고받고는 중대원들의 야영준비가 걱정되어 분침호와 산병호(콘크리트로 만든 진지) 안의 정리 상태위주로 확인했다. 중대 OP로 돌아오니 행보관이 도착해 있었다. 5/4톤 통차를 타고 빙판 투입로로 저녁을 추진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게도 교통사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었지만 그때는 병사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다. 등에는 순찰로 땀이 흥건했지만 손과 발은 얼어 있었다. 특히 눈속을 헤메이다 보니 젖은 전투화는 완전히 얼어 있었다. 신발은 벗어 발을 말리며 식은 국으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얼어붙은 밥알도 맛은 있었다. 행보관이 복귀하고 야간 전투 준비를 했다. 야간에는 추진조를 운용하기 때문에 소규모 병사들이 분리되어 배치된다. 필자는 다시 통신병을 데리고 야간진지를 확인하기 위해 중대 OP방커를 나왔다. 몇시간이 흘렀다. 야간진지 확인을 위한 산악 이동간 발의 열로 얼었던 젖은 군화는 다시 녹았고 등에는 또 땀이 흘렀다. 하지만 얼굴과 장갑낀 손에 부딪히는 대성산 삭풍은 코밑에 고드름을 만들었고 손은 꽁꽁 얼었다. 순찰 및 확인을 마치고 다시 중대 OP 벙커로 돌아오자 피로가 엄습했다. 그때 통신병이 옆 소대 전화기가 불통이라고 보고했다. 각소대의 인원장비 이상유무를 확인하고 취침에 들려다가 걱정이 앞섰다. 책임감이 강한 통신병은 단선이 난 것 같다며 전선과 전화기를 들고 확인하러 출발했다. 필자는 너무도 피곤하여 침낭속에 몸을 담았다. 그 때 중대 OP 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왔다. 호롱불 속에 비춘 모습을 보니 대대장(예비역 소장 양치규, 육사29기)이었다. 그는 엄동설한 속에 작계시행 FTX중인 중대가 걱정되어 직접 현장확인을 온 것이었다. 침낭 속에 잠시 몸을 담았던 필자와 통신병은 급하게 옷을 추리며 일어났고 대대장은 한심한 듯 바라만 보았다. “9중대장, 인원 장비는 이상 없나..?”라고 질문하며 추위 속에 병력관리 잘하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하지만 대대장은 "지휘관은 마지막 까지 부하들을 확인해야한다..."는 무언의 교훈을 주는 여운을 남겼다. 아찔한 순간이었고 통신병 진희선 병장(현 서울시 부시장)은 “대대장님 화 나신 것은 아닌가요?”하며 걱정을 하였다. 이미 각 소대진지를 모두 확인하고 필자의 위치로 복귀해 쉬는 중이었지만, 제대로 훈련상황 보고도 못 드렸고 이완된 모습을 보였기에 필자도 첫 훈련에 실망을 드린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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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1) 분노로 떨리는 손끝에서 떨어지는 낙담의 담뱃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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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의 분수령, 제2차공세시 청천강전투:
- 중공군 제 2차공세시 청천강 전투는 미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긴 어이없는 한방 청천강 전투에서 전력 보존했다면, 현재의 남북군사분계선은 청천강이나 대동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중공군 제1차 공세후 재정비를 마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1950년 11월 24일 한국군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덕천과 영원을 공격하여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11월 8일까지의 중공군 제1차 공세시 비호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후 개천으로 이동했던 국군 7사단과 인접 8사단은 이번 중공군 제2차 공세로 완전히 궤멸되었다.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연대장 1명이 전사하였으며, 전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을 정도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당시 한국군 2군단장 유재흥장군은 자신의 예하사단인 7사단과 8사단의 궤멸사실을 덕천을 방어하던 6사단이 중공군과 교전하기 전까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한국군 2군단이 붕괴되고 청천강 방어선의 우측이 무너지자 미 8군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11월 25일에 한국군 6사단이 지키던 덕천이 중공군에게 떨어졌고, 이날부터 미군 선두의 중대, 대대는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서 좌우 협격을 받았고 얼마 후 미 9군단은 잠복한 중공군에 사방으로 포위되어 집중공격을 받았다. 이미 11월 25일에 미 9군단과 한국군 2군단 등의 병력은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미군 및 연합군에 평양까지 후퇴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때 중공군 38사단은 이미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터키군 여단이 미군의 퇴로확보에 나섰지만, 11월 26일부터 중공군은 대공세로 밀고 내려와 미군과 한국군은 물론이고 터키여단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날 밤에는 미 25사단이 중공 39군의 침습을 받았으며, 영국군 27여단 역시 인해전술을 펼친 중공군에 의해 삼면으로 포위되어 도륙을 당했다. 11월 27일에도 미 9군단은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혼전에 빠져 분란과 후퇴를 면치 못하였다. 11월 28일에 이르러서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전황의 급변과 중공 정예부대의 대거침략을 워싱턴에 보고하였고, 새로운 전국의 돌발을 대내외에 성명으로 발표하였다. 11월 28일 당시 미 9군단은 한국군 2군단을 엄호하면서 퇴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중공군의 선두는 삼소리 일대에 침습하여 있었고, 중공군 주력은 덕천-영원선을 탈취하고서 덕천 남쪽 3.2km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한편 터키여단은 전날 와원 7km 동쪽에서 밤을 맞이했는데, 중공군의 박격포와 기관총 등의 중장비 포함 집중 화력에 의한 기습을 받아 많은 터키군 병사가 전사하였거나 실종되었으며 통신차량도 적에게 피탈되었다. 11월 29일 아침부터 유엔군은 청천강 남안으로의 철수작전을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공군과 도처에서 격돌한 끝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어쨌든 이날 일몰 무렵에는 대체로 유엔군 주력이 청천강을 건너 양덕-성천-순천-숙천을 연하는 선을 확보하였고 고수진지를 점령하였다. 11월 30일에는 미 9군단 주력이 신안주 비행장에서 철수하였고, 신안주-숙천-평양을 잇는 경의간선에는 미 1군단 주력의 남하 대열이 길을 메웠다. ▲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들과 순직한 워커 미8군사령관 후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리지웨이 장군[국방부/육사]중공군 제2차공세시 유엔군의 참패, 이동정보와 병력 규모 오판이 원인 유엔군이 중공군을 얕잡아보고 이동정보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이었다. 사실 유엔군의 자신감은 제공권의 장악에 근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 6개 군단급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에 포진할 때까지 유엔군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중공군이 대공세를 펼치는 와중에도 중공군 규모를 수 개 사단으로 오판하거나 정규군이 참전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추정을 놓고 논란을 거듭하는 등 정보 오판을 수정하는 과정이 너무 느렸다. 이는 중공군이 흰색 설상 위장복으로 유엔군의 항공 정찰에 완벽하게 대비한 데 기인했는데, 실제로 당시 중공군은 미군의 항공 정찰을 방해하기 위해 주로 야간에만 산길을 타고 미군 후방으로 포위하는 침투식 이동을 실시했다. 해가 뜨기 전에 행군을 마치고 주간에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철저한 행군 군기와 숙영 군기로 항공 정찰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미 5공군 소속 전투기와 폭격기,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폭기는 청천강 전투 과정에서 지상군의 작전에 큰 도움을 주고, 철수 작전에도 아군 피해를 줄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이들 항공전력이 전투의 승패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 이유로 복잡한 한국의 산악지형은 단순히 화력으로 커버하기에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산악지형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적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체계가 있어야 하지만,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감시체계는 그 정도 수준이 되지 못했다. 앞으로 유사시에도 현 군인들은 이것을 참고해야한다. 패배의 원인으로 미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장인 윌로비 육군소장의 무능과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중장의 책임을 거론하는 견해도 있다. 6.25 전쟁에 대한 미 육군의 공식 전쟁사 중의 하나인 ‘한국전쟁의 서부 전선’(원제 Disaster in Korea)에서도 워커 장군의 평양 방어전 포기 등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11월 25일 중공군 2차 공세로 위기가 조성된 것은 사실이나, 평양이나 그 주변에서 병력을 수습해 유엔군이 방어전을 펼칠 여지는 있었음에도 너무도 쉽게 평양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미 8군과 10군단의 지휘가 분리되고 양 부대가 단일 전선을 형성하지 않은 점 등이 청천강 비극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혹은 워싱턴의 지휘부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대표로 하는 극동군사령부의 불화를 실패의 원인으로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맥아더 원수의 명성과 경력에 눌려 상급부서에서 위기 회피에 필요한 적절한 통제를 하지 못했고 그것이 참화로 연결됐다는 해석이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미국에서 출간되는 저서에서는 미묘한 증언도 나오고 있다. 크리스마스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미군 안팎에서 “지금 상황에서 공세를 재개하다가는 위기를 맞을 것”이란 경고가 여러 경로로 나왔음을 보여주는 증언이 대표적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미군의 주력인 8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특히 미군 2사단의 병력 손실은 8천 명에 달했고, 사단 자체가 붕괴해버렸다. 처참한 피해와 졸전(?)으로 미군 수뇌부는 미2사단의 해체(!) 방안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이 정도의 참패는 미국이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때의 승리로 기세를 올린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에서 미 해병1사단을 포위공격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미 해병대는 대부분의 물자를 버리고 몸만 빼내서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중공군이 노획한 미군의 무기 탄약 차량 식량 등 군수물자는 이후의 전쟁에서 중공군에 의해 요긴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청천강 전투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린 후 계속 패주하던 미군은 1950년 12월 23일경 임진강, 한탄강에서 겨우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만약 미 8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패하지 않고 전력을 보존했다면, 현재의 남북군사분계선은 청천강이나 대동강을 연하는 선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 격렬한 반대로 한반도 철군 결정을 뒤집어 한편 같은 날인 12월 23일. 8군 사령관 워커가 전방의 시찰과 함께 아들 샘 워커에게 훈장을 수여해주기 위해 지프를 타고 이동하던 중 양주 도봉리 인근에서 국군 트럭과 충돌해 사망하였다(당시 트럭 운전병은 사형당할 뻔했다). 그리고 26일에 워커의 뒤를 이어 새로운 사령관으로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다. 게다가 임진강-한탄강 전선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결국 연합군은 1951년 1.4 후퇴를 결정하면서 서울을 다시 포기하고 평택-원주-삼척선까지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임 매튜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신속히 미군의 전열을 수습하고 2월 11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2월공세’시 지평리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켜 반격하지 않았다면 미군은 아예 한반도 전체를 포기하고 철군 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중공군 제 2차공세시 청천강 전투는 미군에게 실로 어이없고도 심각한 피해를 안긴 한방이었다 할 수 있다. 실제로 그 당시에 미 육군과 합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서 철군 승낙까지 얻어냈었다. 그러나 리지웨이 사령관은 그에 대해 맹렬히 반대하며 죽어라 싸웠기에 철군 결정이 뒤집힐 수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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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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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의 분수령, 제2차공세시 청천강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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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오리무중인 푸틴의 러시아는 뜨거운 감자인가?
- ▲ 한국국방외교협회가 13일 육군회관에서 주최한 ‘ 2019년 글로벌 군사안보 환경평가와 2020년 전망’ 세미나시 푸틴의 “러시아는 내 주먹만 믿는다”는 뜻의 구호와 하이브리드 전쟁 관련 발표 자료 [자료제공=한국국방외교협회] 수교 30주년을 맞이하는 2020년을 “한·러 상호교류의 해”로 선포 소련시절 향수 부추겨 동북아시아 강대국 위상을 추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우리나라는 1990년 9월30일 러시아와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2020년은 한·러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18년 6월22일 문재인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수교 30주년을 맞이하는 2020년을 '한·러 상호교류의 해'로 선포하고, 양국 국민간 상호 이해 증진 및 인적 교류 확대를 위해 다양한 수교 기념 행사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그 중 하나로 ‘무형문화재 제84-1호 고성농요’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연단체로 초청받아 내년 7월 중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2020년 한·러 수교 30주년 기념 ‘제18회 소리의 세계’ 국제행사에 참가할 예정이다. 구소련은 1948년 10월12일 수교한 이래 6·25 남침전쟁시 혈맹으로 북한을 지도 및 지원했고, 중공군 참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수교 70년이 지나가는 현재 북한은 멀어져가는 러시아를 붙잡기 위해 북·러 친선 협조관계를 확대 발전시키겠다고 당과 정부는 몸부림 치고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의 아베는 2019년 11월 5일 유엔에서 한국 때문에 러시아 및 북한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한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잠재적 위협이되는 러시아와 관련해, 지난 13일 한국국방외교협회가 주최한 ‘2019년 글로벌 군사안보 환경평가와 2020 전망’ 학술세미나에서 국방대 김영준교수가 ‘러시아의 안보군사 전략변화 및 군사혁신 동향’을 주제로 발표했다. 김교수는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는 내 주먹만 믿는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고 말했다며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전통적인 군사력 보다는 여론전, 사이버전, 심리전 등을 강화하는 러시아처럼 우리도 하이브리드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푸틴은 히틀러의 침공을 막아내고 승리한 2차 세계대전의 승전일인 ‘빅토리아 데이(전승기념일, 5.9)’에 당시 10대 용사로 선정된 자신의 부친 사진을 직접 들고 시민들과 같이 행진하며 눈물을 보이고 스탈린 생가 복원 사업 등으로 독일 나치에 승리했던 강대국 향수를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정치공학이 가능한 것은 1941~45년 나치의 침공으로 총 2,000만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즉 전국민의 가족 중에 1명은 사망, 1명은 불구, 1명은 화상, 1명은 강간당했다는 것이다. 푸틴은 이런 뼈아픈 역사를 활용, 국민들을 응집시키고 개헌 지지선을 확보하여 장기 집권하고 있다. 또한 푸틴 반대 세력의 준동에 대해서는 미국의 사주를 받은 세력으로 규정하고 과감히 처단하면서 “과거의 소련보다 더 큰 유라시아 연방을 만든 후에 퇴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다. 이러한 여론전과 심리전은 러시아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크림반도에서도 합병 주민투표권한 법적 논쟁, 우크라이나 국경 대규모 군사훈련, 지역 긴장조성 및 민간 군사 기업 활동으로 표출되었다. 또 시리아, 터어키 등 주변국에 까지 확대하여 하이브리드 전쟁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유럽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칼리닌그라드 지역에 핵투발이 가능한 이스칸데르 미사일을 배치하여 440마일 사거리에 있는 유럽국가들을 긴장시키게 만들었다. 이것은 발사할 가능성이 9:1 밖에 안되지만 감언이설과 여론전 및 심리전을 통해 5:5상황으로 만들어 국가간 문제발생시 유리한 협상고지를 점령하는 방법으로 합리화시켜 푸틴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인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국방개혁은 통합성과 합동성을 위주로 추진하며, 북극에 방공부대를 10개소나 추가 설치하는 등 군사기지를 증강하여 인접 노르웨이 국가들이 군사훈련으로 대비토록 만드는 등 고도의 심리전으로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다. 허나 러시아 내부에서는 1년 의무복무 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했으나 최근 모집이 안되어 미충원되는 곤경에 빠져 대안을 강구 중이다. 김박사는 이러한 러시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분석했다. 현재 극동지역에서의 러시아 전략적 위상이 취약하고, 역사적으로 극동지역에서는 제한전쟁만 수행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조없이 소련의 참전이 불가능했다는 점과 유럽 우선주의인 전략, 전통적으로 미 해군에 대한 러시아 해군의 열세 등을 고려시 동북아시아에서는 전통적인 군사전략 보다는 최소위험 최대효과의 안보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관망했다. 한편 러시아는 1904년 러일전쟁, 1917~1922년 러시아 내전, 1931년 만주사태 등을 고려시 일본과의 전쟁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고 말했다. 먼저 두려움과 불안감을 갖는 콤플렉스 요인으로 2014년과 ‘18년에 'VOSTOK훈련'을 했지만 극동지역의 취약한 군사력, 수도 모스크바와 장거리 떨어진 지형적 특성, 청년들은 모두 모스크바로 떠나고 중국 및 북한노동자들의 이민에 의존해야 하는 인구감소 등이 있다. 또한 러일전쟁시 아시아 국가에게 최초로 패배한 서구 열강이라는 모욕감과 몽골 침략기의 트라우마가 있지만, 서구 유럽 문명을 숭배하는 인종주의와 소련시절 강대국 위상에 대한 향수로 동북아시아 강대국 위상을 추구하고 있다. 김박사는 끝으로 2020년은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를 맺은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며, 이를 계기로 러시아를 협력과 위협이 되는 국가로 인식하고 융통성있게 대처하는데, 군사적 측면에서 심리전과 여론전 등 하이브리드 하이브리드 전략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으며 러시아의 사례를 볼때 모병제로의 전환은 신중하게 추진해야한다고 참석자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었다. ▲ KIMA에서 주최한 ‘한반도 안보정새 평가 및 전망’ 2019정책세미나에서 발표한 중국·러시아 군용기 KADIZ 및 영공 침범사례 및 현황 [자료제공=KIMA] NATO 동진, MD구축, 중동 문제 등 국제사회 주도권 경쟁에서 갈등과 불신 러시아의 ‘9-브릿지 프로젝트’를 통한 협력사업 추진 필요 적극적인 경제·문화 교류협력을 통해 중·일, 북한 '견제 카드'로 활용해야 그런데 러시아 군용기가 2014년부터우리측 항공식별구역(KADIZ)을 93회나 침범했다. 금년 7월23일에는 중국·러시아 군용기가 연합훈련으로 KADIZ를 침범한 것 뿐만아니라 러시아 군용기(A-50)는 울릉도·독도 영공을 두번씩이나 침범해 비상 출격한 우리 KF-16전투기가 차단비행 및 경고 사격까지 했다. 이때 일본 F-15전투기도 JADIZ내에서 20대나 출격해 대기했다고 한다. 우리 공군은 경고사격만 했지만, 만약 일본은 자국 영공에 타국 전투기가 진입시 격추시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헷갈리는 상황 속에서 러시아 문제에 밝은 한 안보전문가는 러시아 외교에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에 대해서는 핵군축, 국제테러에는 협력하지만 NATO의 동진과MD구축, 중동 문제 등 국제사회 주도권 경쟁에서 갈등과 불신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 대해서 SCO, BRICS에서의 협력 등을 통해 대미 견제를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하나 에너지, 무역, 투자 등 경협 증진을 통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심화시켜 상호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미일동맹 강화 및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 경계하면서 북방영토 문제를 카드로 활용하여 일본의 극동 시베리아 투자 유치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러시아와 북한 관계를 레버리지로 활용하면서 한반도 안정과 평화, 한반도 비핵화를 기조로 한국과의 경제관계 증진 및 남북러 3각 경제협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남북관계 발전을 환영하고 남북관계 지원자 역할을 자임함과 동시에 한반도 문제해결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것이 예상된다고 언급했다. 그는 한국이 1884년 제정러시아 시대 ’조·러 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조선과 최초 공식적인 접촉이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미·러, 미·중, 러·북 관계에 따라 한·러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서방의 러시아 제재로 인해 한·러 관계 및 경제협력에도 영향이 있기 때문에 과거 우리의 문제 등에 따라 상호 이해가 매우 중요하며, 특히 청소년과 대학생 대상 교류 프로그램을 발굴하는 등 실질적인 협력관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 2013년 7월 러시아내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창설한 것처럼 향후에도 한·러 포럼 및 한·러 대화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 즉 러시아의 관심 분야인 ‘신동방 정책 부응 및 극동개발’에 적극적인 참여하기 위해 9-브릿지(조선, 항만, 북극항로, 가스, 철도, 전력, 일자리, 농업, 수산 등 9개분야의 신북방경제협력 프로젝트)를 통한 협력사업 추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방대 김영준교수와 러시아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러시아는 소련시절 강대국 위상을 되찾기 위해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전세계적으로 미국 못지 않은 ‘러시아 우선(Russia First)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러시아를 뜨거운 감자처럼 뱉지도 삼키지 못한 채 고민하는 입장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북한과는 과거의 혈맹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거리간격이 생겼다고 분석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러시아 수교 30주년'을 계기로 보다 적극적으로 경제와 문화 교류협력을 통해 러시아를 활용할 때, 인접 중·일 국가나 북한에게 유리한 입지를 점령할 수 있는 '견제카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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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오리무중인 푸틴의 러시아는 뜨거운 감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