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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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나와, ‘다나와 LIVE쇼핑’ 론칭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다나와는 라이브 커머스 업체와 대형 쇼핑몰의 라이브 방송을 한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다나와 LIVE쇼핑’ 서비스를 오픈했다고 28일 밝혔다. 다나와 LIVE쇼핑에서는 현대홈쇼핑, 홈앤쇼핑, 신세계TV쇼핑을 비롯해 5월 입점 예정인 쿠팡까지 10곳이 넘는 라이브 방송 정보 및 상품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 패션, 뷰티, 푸드, 키즈, 라이프, 스포츠·레저 등 카테고리별로 관심 있는 방송만 선택해 시청할 수 있다. LIVE 쇼핑 캘린더는 과거 방송과 라이브 예정 방송에 대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제공한다. 원하는 품목, 방송, 카테고리별로 방송을 검색할 수 있으며 알림 설정을 하면 방송 시작 시 알림을 받을 수 있다. 다나와는 “라이브 방송에 소비자가 쉽고 편하게 찾아볼 수 있는 소비자 친화적 사용 환경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다나와 LIVE쇼핑 서비스를 다나와 내 주요 서비스, 동영상 공유 플랫폼을 비롯해 O2O 비대면 서비스까지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 사이버보안
    • 종합
    2021-04-28
  • [숨은 중국 알기 (2)] 중국을 움직이는 원천인 공산당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우리는 중국이 우리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미국과 다르듯이, 그 이상으로 한국과 중국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의 한 가운데 중국 공산당이 있다. 중국에서 공산당은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 군사, 사회 및 개인생활 등 삶의 모든 분야를 지배한다. 따라서 공산당을 제대로 이해해야 오늘날의 중국은 물론이고 미래의 중국까지 그려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시각은 마오쩌둥 시대의 공산당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오늘날의 중국 공산당은 핵과 항공모함을 보유한 인민해방군 만큼이나 현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놓쳐서는 안 되는 중국의 실체이다. 창당에서 오늘날까지 격동의 100년을 이어온 중국 공산당을 현재의 관점에서 몇 가지 특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비교적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긍정적인 측면 위주로 언급하겠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문제와 중국이 직면한 과제는 다음에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첫째, 중국 공산당은 중국 민중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공산당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늘날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으로 중국이 성장한 것은 공산당의 영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 당시 학생들의 요구는 ‘공산당 물러가라’가 아니고 ‘공산당 개혁하라’였다. 이런 개혁의 목소리도 현재는 크게 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산당이 나름대로 여론을 수렴해 개혁 중이고, 공산당의 사회 통제력이 강하게 작동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억제하고 있는데다, 현실적으로 공산당을 대체할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 봐도 ‘공산당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신중국은 없다’고 말한다. 중국인들은 정치적 자유보다 풍요와 안정을 우선시하며 공산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청년 공산당원은 엘리트로서 향후 중국을 이끌어갈 예비 지도자다. 현재 중국에서 공산당원은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은 약 90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젊은 청년들은 공산당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출세의 기회를 바라면서 공산당 가입을 지원하고 있다. 정식 당원이 되려면 기존 공산당원 2명의 추천을 받아 예비당원으로 등록한 후, 몇 년간 관찰기간을 거쳐 당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당원이 되면 진학, 취업, 승진 등 혜택이 있고, 당의 어느 누구 또는 어느 기관에라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정책을 건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무가 더 많다고 한다. 당비를 내야하고 자신이 속한 당 지부를 비롯한 각급 당 조직에서 주관하는 주간 및 월간 학습과 교육에 참여해야 하며, 부패와 비리혐의로 고발 또는 기소되면 당원은 일반인과 달리 사법당국의 조사에 앞서 ‘공산당기율위원회’의 엄격한 조사를 먼저 받아야 한다. 따라서 공산당원은 항상 공산당 규율의 틀 속에서 모범적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엘리트이며, 향후 중국을 이끌어갈 예비 지도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범생 엘리트 청년당원들이 초심을 잃고 왜 기존의 부패사슬에 엮이게 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이권과 지위를 탐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싶다. 셋째, 공산당 조직은 사회 곳곳에 결성되어 어디에나 존재한다. 중국 공산당은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 군대도 작전지휘 계통과 공산당 계통으로 이원화 되어 있다. 중국군 부대의 정치위원이 방한했을 때, 우리에게는 정치위원을 상대할 직책이 없어 고심한 적도 있었다. 기업에도 공산당 조직이 있어 공산당 계통으로 하달되는 지시나 방침을 전파하고 한편으로는 애로사항이나 발전방안 등을 건의한다. 넷째, 공산당은 스스로 부패를 척결하는 자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공산당은 스스로 부패를 척결하고 여론을 수렴하여 민심에 다가간다. 그리고 국내외 시대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부응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 2가지만 소개하겠다. 우선 2011년 중동의 재스민 혁명 등 민주화 운동이 확산될 때, 중국 공산당은 위기를 느꼈다. 이들은 이 때에 프랑스 혁명사를 집중 연구했다고 한다. 이른바 집단학습 방법을 통해 지도부 전체가 전문가 강의를 듣고 토론하고 독서도 하면서 혁명을 유발한 빈부 격차와 부정부패 문제, 자유와 인권 문제에 대해서 중국 국내의 현상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한 마음 한 생각 한 목소리인 것이다.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문제에 대한 해결과정에서 정쟁의 소지가 크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 다음 사례는 장쩌민 주석이 2000년에 주창한 ‘3개 대표론’이다. 주요내용은 공산당이 자본가 및 기업가를 당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정책 전환이다. 노동자, 농민이 주축인 공산당이 개혁개방으로 급성장한 자본가와 기업가들을 공산당원으로 끌어 들여 함께 가겠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이념 계급정당에서 실용 국민정당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 공산당은 중산층이 증대하면 체제에 위협이 된다는 기존의 관념을 극복한 것이다. 공산당은 '꼰대 정당'이 아니며, 야당과 언론의 비판이 없더라고 자체적으로 변신하고 발전할 수 있는 만년 집권당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앞서 이야기한 내용을 정리해보자. 첫째, 우리의 기억 속에 공산당이라면 북한을 연상한다.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되어 냉혹하며 혁명만 외치는 집단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 공산당과 공산당원은 사회 모범생이자 엘리트이고 청년 공산당원은 향후 중국을 이끌어갈 예비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마오쩌둥 등 혁명 지도자들을 존경하지만 사고방식은 혁명시절에 멈추어 있지 않다. 둘째,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공산당 체제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공산당 부정부패를 비판하지만 공산당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선거과정을 거쳐 정권이 교체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모순을 지적한다. 중국이 서방과 같은 양당정치 제도와 선거 과정을 거친다면 중국은 분열되고 혼란이 일어나 편안한 날이 없을 거라고 한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4-28
  • [김희철의 전쟁사(63)]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 남침전쟁이 지루한 고지전이 계속되면서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는 ‘승리’보다는 ‘패하지 않는 전쟁’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밴플리트와 사관학교 동기인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이나 콜린스 육군참모총장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수뇌부 대부분이 한국에서의 전쟁을 모양새 있게 마무리하는 데 급급했다. 밴플리트는 그런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대상이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였다. 그런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했기에 곧 분위기를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그에게는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 밴플리트는 승리 위해 싸웠던 군인이자 한미 관계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그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아이젠하워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국군 전력증강에 관한 브리핑을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선거전에서 ‘전쟁 끝내기’를 공약했고,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소련과 동유럽 및 중국 등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전략 구도를 구상했던 워싱턴 미군 수뇌부의 심경에도 변화가 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1953년 1월 현역에서 은퇴하여 그해 2월 한국을 떠나는 밴플리트의 심정이 편할 리 없었다. 순천폭격 비행 중에 실종되어 사랑하는 외아들 지미 대위를 잃었던 전선으로부터 이제 떠나야 하는 아비의 심정도 있었을 것이고, 군인으로써 못내 이루지 못한 전선에서의 온전한 승리가 아쉽다는 정한도 배어 있는 듯했다. 그런 그는 당시의 고별 기자회견에서 1951년 10월과 11월 벌인 공세의 좌절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 공세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은퇴 후 미국에 도착한 밴플리트는 각종 환영행사 등에 참석하면서도 아이젠하워 등 요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 전선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며 끝까지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그는 맥아더와 같은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의 ‘사려 깊은 외교적 시야’를 우습게 본 사람이었다. 공산주의자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전쟁을 벌였다면 상대의 수도까지 진격해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장군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정가에서는 밴플리트를 의심하고 있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그의 그런 언행을 두고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한다”고 발언했고, 이 말을 전해들은 밴플리트는 “도대체 그가 왜 그런 발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이라며 아쉬워했다. 한편 밴플리트가 고향인 플로리다에 막 정착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에서 국무부 차관에 올랐던 월터 스미스가 플로리다 목장의 밴플리트를 찾아와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 북진까지 주장하며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하고 있다. 이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장군께서 주한 미 대사를 맡아주면 좋겠다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말했다”는 취지로 주한 미 대사를 맡아 주기를 제안했다. 밴플리트는 즉석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이 대통령이 당신들의 말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정전 자체에 반대하는 내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월터 스미스는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도 장군의 의견이라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설득했다. 군인의 순수한 입장으로 ‘한국 전선에서의 승리’를 주장했던 밴플리트는 확고했다. 그는 “결코 안되는 일이다. 당신은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사표를 내야 할 것”이라며 제안을 일축했다. 완고한 밴플리트의 입장을 전해들은 아이젠하워는 결국 대사 임명 계획을 철회했다. ■ 저돌적인 ‘직진 스타일’ 군인 성격의 밴플리트는 ‘의리의 사나이 돌쇠’ 제2차 세계대전과 그리스 반군 게릴라 소탕 작전에서 성공적 임무수행에 이어 한국 전선에서 이름을 높였던 밴플리트는 고향 플로리다의 유명인사 대접을 받으며 목장과 관련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때 플로리다의 많은 유지들에게서 “주지사 선거에 나가라. 당신 정도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정치 입문 권유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냥 당신들이 나가라. 나는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퉁명스럽게 되받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밴플리트는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계속 키웠다. 한국과 미국의 최고 교류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발족과 발전을 주도했다. 아울러 한국의 전후 지원 문제를 두고 미 행정부의 자문역을 맡아 활동하는가 하면 실제 집행과정을 감독하기 위한 순회대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퇴임 뒤에도 한국을 자주 방문했다. 그의 후임 미 8군사령관인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사실 그 점이 매우 거북했다고 한다. 전임자가 자신의 임지에 자주 나타나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00마일로 차를 모는 ‘직진 스타일’ 군인 성격의 밴플리트는 그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자신의 열정 그대로 한국을 돕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오직 승리만을 위해 뛰었던 미국의 장군이었다. 공산주의 위협에 직면했던 대한민국에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우의가 아주 깊을 수 밖에 없었다. 훗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망명객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밴플리트는 주저 없이 이 대통령의 곁으로 달려갔고, 그의 유해를 직접 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의리의 사나이 돌쇠’이기도 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2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6)] 육군대학,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전후방 각지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 중에 평정, 지휘추천, 시험 등을 종합한 성적순으로 정규, 단기, 통신과정으로 구분되어 입교한다. 또한 중령 진급자는 대대장반, 대령 진급자는 연대장반 교육을 받는 등 모든 영관장교들의 보수교육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당시 ‘정규 45기과정’으로 입교한 동료들은 세련되며 매너도 좋아 도무지 흠 잡을 곳이 없는 우수한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군생활 동안에 시간 및 장소를 불문하고 가장 소중하며 또 오래간다. “화향백리(花香百里)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주향천리(酒香千里) 술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라며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옛 시가 절실하게 공감되는 이유이다. 필자가 초급 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의 승리부대에서 7번(36년 9개월의 군생활 동안에 총 24번 이사)째 이사를 하며 육군대학으로 내려올 때 전출신고를 받은 사단장 최권영 소장(육사19기)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격려금을 주었다. 그러나 이 격려금은 필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위 사진의 ‘승리부대 동문 주소록’에서와 같이 육군대학 교육을 마치고 승리부대로 부임하는 학생장교들을 포함한 승리부대 동문 장교들에게 애대심(愛隊心)을 고취시키기 위한 격려회식을 하라는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28
  • [김희철의 전쟁사(62)]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많은 미군이 이 땅에 왔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70여 년 전 연인원으로 따지면 150만 명이 넘을 것이다. 지휘관도 아주 많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해 워커, 리지웨이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찬란하게 떠올랐던 기라성 같은 장군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한국군 육성에 가장 공을 들이고 한국에 대한 정이 남달랐던 사람은 단연코 밴플리트였고 이는 이승만 대통령과 부자(父子) 이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미 장성들이 전쟁 전후에 한국에 머물렀지만 그가 보인 한국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각별하다. 밴플리트는 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뒤에도 한국과 미국의 관계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세상을 떠났다. ■ 밴플리트는 자신의 사재부터 털었고 휘하의 각 지휘관들 돈을 모아 육사 도서관 건립 지금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는 밴플리트의 동상이 서 있다. 원래 동상이 섰던 육사 도서관 옆에서 구석진 자리로 옮겨지긴 했으나,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그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들어섰다는 사실은 뜻깊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밴플리트는 한국군 현대화의 가장 절실한 과제를 능력 있는 ‘초급 장교의 육성’이라고 본 인물이다. 그래서 벌인 일이 육군사관학교 설립이다. 전쟁 중에 벌어지는 전투에 관한 지원은 미 8군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 설립은 권유할 수 있을 뿐이지, 지원을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설립과 발전에 골몰했다. 하루 빨리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만들어 유능한 장교들을 길러내야 한국군이 발전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1952년 들어서면서 그는 결국 일을 벌인다. 미 8군의 건설 자재를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짓던 서울 태릉의 연병장으로 옮기도록 했다. 자재들이 곧 산더미처럼 쌓였다. 밴플리트의 열정은 그러나 곧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미 의회에서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짓는데 왜 미 8군의 건설 자재를 사용하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미 8군의 한국군 지원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에 합당한 지적이었다. 그는 부득불 그 엄청난 양의 건설 자재들을 다시 원위치로 옮겨야 했다. 그는 위대한 군인이기는 했으나 행정에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쯤되면 웬만한 장성이라면 아마 민망함과 무안함 때문에 같은 일에 다시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달랐다. 밴플리트는 자신의 사재부터 털었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앞장서서 돈을 내놓고 휘하의 각 지휘관들에게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위해 도서관을 지어야 하니 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기부해라”고 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 마침내 육사내에 빨간 벽돌의 도서관을 지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27
  • 상륙공격헬기 '마린온 무장형' 추진하고 대형 수송기 국외 구매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군 당국은 해병대 상륙공격헬기를 논란 끝에 국내 연구개발인 '마린온 무장형'으로 확보하고 공군의 대형 수송기는 국외에서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또 북한의 탄도탄 위협에 대응하고자 패트리엇(PAC)-3 미사일을 미국에서 확보하고, PAC-2 발사대를 일부 PAC-3 발사대로 개량해 성능과 사거리가 우수한 PAC-3 운용 능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방위사업청은 26일 서욱 국방부 장관 주재로 제135회 방위사업추진위원회(이하 방추위)를 열어 ▲ 상륙공격헬기 사업추진기본전략 ▲ 대형수송기 2차 사업추진기본전략 ▲ 패트리엇 성능개량 2차 사업추진기본전략 ▲ 장보고-Ⅲ 배치(Batch)-Ⅱ 후속함 건조계획 ▲ 군위성통신체계-Ⅱ 양산계획 ▲ 백두체계 능력보강 2차 체계개발기본계획 ▲ 공지통신무전기(SATURN) 성능개량 사업추진기본전략 등을 심의·의결했다. 해병대 상륙공격헬기 사업은 국외 구매 검토 등 논란 끝에 결국 현재 사용하는 상륙기동 헬기 '마린온'에 무장을 달아 상륙공격헬기로 개조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내년부터 2031년까지 총사업비 1조6000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방사청은 "군 작전요구 성능의 충족성과 상륙기동헬기(마린온)와의 호환성을 고려한 운영 유지의 효율성, 향후 유·무인복합체계(MUM-T) 구축 등의 체계 확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공군의 '대형수송기 2차 사업'은 기종을 국외에서 구매하기로 결정하고, 내년부터 2026년까지 총사업비 4800억원을 들여 4대를 확보할 것으로 알려졌다. 방사청은 "국외 구매로 사업을 추진하되, 국내 방산업체 육성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국내 업체가 부품 제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컨소시엄 구성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포함했다"고 설명했다. '패트리엇 성능개량 2차 사업'은 내년부터 2027년까지 총사업비 7700억원을 투입해 PAC-3를 미국에서 FMS(대외군사판매) 방식으로 확보하고, 국외 상업구매를 통해 공군이 보유한 PAC-2 발사대의 일부 수량을 PAC-3 발사대로 성능을 개량하기로 했다. 또 3600t급 잠수함인 '장보고-Ⅲ 배치(Batch)-Ⅱ 사업'과 관련해서는 1번 함과 같이 2·3번 함도 국내에서 건조하며, 오는 2029년까지 총사업비 3조4000여억 원이 투입된다. 방사청은 "국내 최초 독자 설계 및 건조 중인 장보고-Ⅲ 배치-I보다 향상된 능력을 갖춘 후속함을 국내 건조로 확보할 것"이라며 "수중작전 지속 능력과 표적 탐색, 무장 능력이 향상된 잠수함을 확보해 잠재적 위협에 대한 감시·억제 능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방사청은 최초 군 독자 통신위성인 '아나시스 2호'와 연계해 운용할 지상 통신단말기를 국내 기술로 양산하기로 정하고 오는 2025년까지 총사업비 8800억원을 투입한다. 북한지역의 신호정보를 수집하는 '백두체계 능력보강 2차 사업'과 관련해서도 성능이 향상된 체계를 순수 국내업체 기술로 개발해 현 백두체계를 대체하기로 했다. 오는 2026년까지 8700억원이 투입된다. 항공기를 비롯해 지상·함정 전력이 운용 중인 공지(空地)통신 무전기는 국내 연구개발과 함께 국외 구매로 확보할 계획이다. 내년부터 2028년까지 총사업비 1조9000억원이 투입된다.
    • 방위산업
    • 국내방산
    2021-04-27
  • 국방부·병무청, ‘2021년 공공데이터 활용 경진대회’ 개최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국방부와 병무청은 내달 3일부터 7월 2일까지 '2021년 국방 공공데이터 활용 경진대회'를 개최한다고 26일 밝혔다. 국방 공공데이터를 활용한 창의적 아이디어와 민간 시장에 출시 가능한 사업 모델을 발굴하기 위해 실시하는 이번 경진대회의 공모 분야는 아이디어 기획과 서비스 개발(모바일 앱, 웹 서비스 등) 등 2개 부문이다. 이번 대회는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국방부는 심사를 통해 부문별 최우수(1팀), 우수(1팀), 장려(2팀) 수상작을 선정하여 국방부장관상, 병무청장상을 수여할 예정이다. 또한, 부문별 최우수 수상자에게는 행정안전부가 주최하는 ‘제9회 범정부 공공데이터 활용 창업경진대회’ 본선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한다. 국방 공공데이터 활용 경진대회는 국방 공공데이터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이해도와 관심을 높이고 데이터 기반 창업 촉진 및 혁신성장에 기여하고자 ‘17년부터 개최해왔다. 올해부터는 병무청과 공동으로 개최하여 대회 규모를 확대했으며, 자세한 내용은 국방부와 병무청 홈페이지, 국방 공공데이터 홈페이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외교안보정책
    • 국방
    2021-04-2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5)] 최전방 격오지였던 동토의 왕국에서 따뜻한 남쪽나라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진해로 내려와서는 비교되는 사관학교 졸업성적 때문에 비좁고 낡으면서도 제일 높은 층의 육군대학 아파트를 배당받게 되자 아내는 연예 및 신혼시절에 느꼈던 필자에 대한 화려한 기대감이 허상이 되는 것 같은 생각에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쉬운 감정을 숨기며 때마침 태어난 큰아들을 업은 채 불편한 몸으로 묵묵히 짐정리를 함께했다. 필자가 1년동안 교육받은 육군대학 정규45기는 약 160명의 학생장교들로 구성됐고 그중에 사관학교 동기생은 88명이었다. 정규과정에 입교한 자들이라도 다시 성적과 투쟁을 해야 했다. 최종 수료시 교육인원 중 1/3수준의 상층 성적을 얻지 못하면 차기 진급 심사에서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실정에 따라 160명중에 적어도 53명 안에 포함되는 성적을 얻어야 향후 진로에 유리해진다. 이것을 알고 있는 장인이 현 진급에 안주하지 말고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주마가편(走馬加鞭)식의 독려도 했었다. 하지만 사관학교 성적이 필자보다 우수한 동기들이 80여명이나 되었다. 또한 우수한 선배 및 동료인 학생장교들이 즐비하고 사관학교 졸업 성적만 고려할 때 상층 성적을 얻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한편 당해년도 봄에 입교한 앞의 기수에는 주로 1년 선배들이 많았고 마침 사관학교의 같은 중대 출신별로 후배들을 위한 후견인이 정해져 있었다. 필자 담당 후견인은 생도시절에 같은 중대에서 함께 생활했던1년 선배인 이문보 소령(육사36기)이었다. 그는 앞서 공부하면서 꼭 필요했던 참고 자료와 공부 요령 등을 전수해 주었다. 마치 4년전에 고등군사반(OAC) 과정에서 선배들이 시험 준비했던 자료(일명 '고추가루')들을 확보하는 전쟁을 치루었던 상황이 재현되는 것 같았다. 육군대학 총장에게 입교 신고를 할 때 동기생들 뿐만 아니라 타출신 장교들의 눈빛도 보통이 아니었다. 정규과정에 선발된 우수한 장교들 답게 모두들 필자보다 똑똑하고 탁월해 보였다. 학급 조편성이 끝난 뒤에 그동안 준비했던 소양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준비 자료인 고추가루를 전해준 선배들의 조언은 소양시험 성적이 과정 끝까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주일 즈음 지난 뒤에 소양시험 성적표를 받았는데 실망이었다. 전체 평균보다는 높았지만 1/3선에는 미달되는 것 같았다. 육군대학 정규과정에 입교한 기쁨보다 소양시험 성적에 실망한 필자는 끝없는 '경쟁사회'에 대한 비애와 회의감까지 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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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26
  • [김희철의 전쟁사(61)]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밴플리트 장군이 1951년 4월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부터 대한민국의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령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존경했다는 숨겨진 일화가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라는 책에 공개돼 감동을 더하고 있다. 그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으로 6·25 남침전쟁 중인 1951년 7월31일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했다. 1653년 조선에 표류해 13년을 이 땅에서 머물렀던 하멜과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이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네덜란드인이다. 밴플리트는 장교 생활 초기에 이름 때문에 손해를 봤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미 참모총장과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마셜이 기억하는 미군 지휘관 중에 밴플리트 장군과 이름이 흡사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마셜이 기억하는 자는 술주정뱅이로 미군에서 소문이 자자해 마셜의 귀에도 그 이름이 들어갔다. 이 동명이인 때문에 밴플리트는 장군 진급에 여러 번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밴플리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와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다.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명성을 얻은 뒤 후에 각각 미국 대통령과 5성 장군(원수)의 자리에 올랐으나 밴플리트는 마셜의 오해 덕택에 그들보다 훨씬 뒤처졌다. 그러나 군인, 전쟁터의 지휘관으로 지닌 자질과 역량은 그 둘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적과 싸우려는 투지는 그들을 오히려 넘어선다는 평가가 많다. 밴플리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술주정뱅이로 오해 받은 것을 일소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해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8개월 만에 부사단장과 사단장을 거쳐 군단장까지 고속 승진한 인물이다. 또한 1~2차 세계대전을 거쳐 6.25남침전쟁까지의 프랑스 유타 비치 상륙작전, 벌지전투, 그리스 반군 게릴라 소탕 작전 등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각종 전투에서 수차례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6·25 남침전쟁 중에 3군단의 치욕스런 ‘현리전투’의 패배를 겪고, 정전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한국군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서라면 각 부대들이 전선에서 계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따라 ‘야전훈련사령부(FTC)’를 창설하여 운용했다. ‘야전훈련사령부(FTC)’가 운용된 양양에서는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1952년 6월을 기해 수도사단을 제외한 9개 한국군 사단들이 훈련을 수료했으며, 밴플리트는 야전훈련사령부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 임무를 중지 하고 이들을 각 군단으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가칠봉전투’ 승리는 물론, 영웅적인 ‘백마고지 전투’나 ‘베티고지’의 혈전 등은 ‘야전훈련사령부(FTC)’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의 높은 전투력으로 이룩해낸 승전이었다. 특히 한국군은 중공군에게 힘없이 밀리던 ‘51년 초와는 달리 ‘52년부터 UN군 전선 주축을 담당하며 중공군의 맹렬한 파도 같은 공격에도 끄떡없는 단단한 방벽처럼 버티었다. 이에 따라 미군 수뇌부는 변화된 한국군에 대해 높게 평가를 했고, 이들이 현대 기계화 전장에 대한 인식도 늘려가고 있었으며, 그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계획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한국군의 재건에서 부터 우리의 육군이 오늘날의 현대화한 군대로 성장한 것은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과 그가 만든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 시작되었으며 밴플리트 장군은 궁극적으로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닌 성과를 올렸다. 또한 그는 다른 미군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데 있어 매우 단호했다. 1951년 말, 대한민국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던 공산 빨치산들을 일거에 토벌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밤의 인민 공화국'으로 불리던 그 지역의 치안을 회복하고 후방지역을 조기에 안정시킨 성과를 내기도 했다. ■ 밴플리트, ‘강철같은 사나이’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북진정책 뜻을 같이해… 6.25남침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미군 장성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그들을 자식처럼 대하며 각별히 챙겼다. 특히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과 부자(父子) 이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추운 겨울 날씨에 밴플리트가 있는 전선을 방문했다. 이른 아침 지프를 타야 할 때 밴플리트가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자, 이 대통령은 미소로 답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밴플리트는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밝은 얼굴과 외투 밖으로 보이는 백발은 마치 검은 구름 위에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빛났다”라고 회고했다. 밴플리트는 "2년간인 재임 기간 동안에 이승만 대통령은 얼어붙은 전방과 훈련 지역을 수시로 시찰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였다"며 "그런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서양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부르는지도 이해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워싱턴의 휴전정책으로 북진작전에 제한이 가해져 사실상 군사적 승리가 가로막히자, 북진작전'이란 같은 뜻을 갖고 있었던 밴플리트와 이승만 대통령 두 사람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려고 하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두 사람은 전쟁을 보는 눈도 같아서 전쟁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에게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있었다. 거기에다 밴플리트는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겼다. 밴플리트 장군은 전쟁 중 워싱턴과 서울 간에 전쟁의 해법을 놓고 의견이 대립할 때면,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을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의 위대한 애국자, 강력한 지도자, 강철 같은 사나이, 그리고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며 존경하고 흠모했다. 그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은 밴플리트 장군의 작전에 그대로 투영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빼앗기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런 마음을 밴플리트가 알고, 그가 부임한 이후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적에게 점령되지 않도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26
  • [숨은 중국 알기 (1)] 시리즈를 시작하며, “당신이 아는 중국은 틀렸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에 대한 글을 쓰기는 쉽다. 소재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가하기는 어렵다. 방금 평가한 내용과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가 처음 중국에 갔을 때 경험담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출입문 개폐 버튼 위를 덮은 비닐과 코팅이 벗겨져 있었다. 성질 급한 중국 주민이 엘리베이터 문을 급하게 열거나 닫으려고 계속 눌러댄 흔적이었다. 여기서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전에 생각하고 있던 중국인이란 여유가 있고 대륙 기질의 ‘만만디(慢慢的)’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베이징 아파트에서 접한 중국인은 우리보다도 더 성질이 급했다. 계속 이런 식의 일을 겪으면서 중국에 대한 나의 선입관이 깨지고 그 후에 다른 체험을 통해 터득해서 정리한 개념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기를 반복했다. 이에 대해 필자와 대화를 나눈 한 중국 고위관료는 “중국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중국은 세계 그 자체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다양하다는 의미이다. 중국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는 어느 기자는 “용의 등에 앉아서 양파를 벗기는 기간이었다”라고 소회를 말했다. 벗기고 벗겨도 그들의 속마음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을 바라보는 서방세계의 시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everything you know about china is wrong”(당신이 중국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틀린 것이다)라는 미국 뉴스위크지 2009년 언론 보도도 있었다. 서방의 인식체계로는 도저히 중국을 읽을 수 없는 모양이다. 백영서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에 대한 해결책이라면서 “누진 다초점 안경을 끼고 중국을 보라”고 권했다. 그의 권고에 따라 ‘천(千)의 얼굴’을 가진 중국, 화나면 오히려 웃는 중국인들의 특성을 감안하면서 앞으로 중국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다. 이 시리즈는 크게 4개 분야로 구분되는데, ① 개괄부분으로 공산당과 중국인의 내면, ② 공산당과 홍군, 팔로군 시기, ③ 국공내전과 6.25 전쟁시기의 인민해방군, ④ 시진핑 시대, 중국과 미국의 대결 무대 등이다. 내 이야기가 다른 중국 전문가들과 비교해 다르거나 틀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만약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어느 누군가 시정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맞는다고 동감해 준다면 ’중국 제대로 알기‘에 일조를 했다는 보람으로 여기겠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 경희대 중국학연구소 연구위원,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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