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탑 주연의 “포화속으로”라는 영화포스터와 6.25 남침전쟁 당시 불암산에 은거하며 유격전을 펼쳤던 육사생도들과 사병들의 ‘불암산 호랑이 은거 제1동굴’ 사진 [사진제공=김희철]
20일 시진핑이 평양 방문했지만, 69년전인 ‘50년 겨울엔 중공군이 한반도 침범
‘6·25남침전쟁’시 유격전 펼친 '불암산호랑이', 최후의 한 명까지 목숨던져
가수 진미령의 친부 고(故) 김동석 대령은 '물쥐대장', 북한군 후방 교란
대한민국 지킨 '숨은 영웅들' 기려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9년전인 1950년 겨울, 중공군이 한반도를 침공하여 ‘흥남철수’, ‘1.4후퇴’ 등 동족상잔의 비극은 더욱 심화되었다. 20일에는 미·중 무역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의 최고지도자로는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 이후 14년 만에 북한 국빈 방문했다.
이번 시진핑 주석의 방북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이후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태인 상황에서 이뤄져, 북미대화 재개의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됐다.
중공군이 추가 침공까지 한 ‘6·25 남침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었던 대한민국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절약과 근면으로 오늘날의 경제 10대 강국으로 발전을 이뤄냈다.
(사)월드피스 자유연합 이사장 안재철은 오랜 시간 연구하여 6·25남침전쟁 때 대한민국을 도운 나라가 67개국임을 밝혀내고 2010년 9월 3일 영국 기네스북 본사로부터 기네스북 등재 인증서를 받았다. “이기록은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일연합군으로 지원한 세계기록”이고 앞으로도 이 기록은 깨질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국가적 절명 위기에서 구해준 해외지원국에 대한 감사와 보은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보이지 않는 희생을 통해 나라를 지켜낸 숨겨졌던 애국자분들에게도 감사하고 기억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명확히 부여되어 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된 지 하루 뒤인 ‘50년 6월 29일 수원에 모인 200여명의 학생들은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소총1정과 실탄만을 지급받아 국군혼성부대에 수십명씩 편입시켜 한강 방어선에 투입됐다.
7월말에는 대구에서 87명의 학생들이 자진입대하여 김석원 장군 휘하의 부대로 편성되어 포항에서 북한군의 4차례 파상공격을 막아내는 전과를 올렸고 이 전투는 60년 뒤에 가수 겸 배우인 탑 주연의 “포화속으로”라는 영화로 재연되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이 최소 2만여명이며 전사자도 7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육군본부가 2004년 펴낸 “학도의용군” 책자에 따르면 전쟁 중 전투참전과 치안활동, 가두선전에 참가한 학생들을 27만5200명으로 집계됐지만, 중앙학도호국단은 전투참가 학생 2만7700여명 중 전사자 1394명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문교부 통계에는 학도의용군 5만여명중 7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기록 부실로 학도병들은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다되어도 전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학도의용군도 군인이라고도 할 수 없었던 “불암산 호랑이”라는 전설같은 역사도 있었다.
6월25일 새벽 북한의 불법남침이 개시되었을 때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는 생도1기(10기)와 2기(종합1·2기)가 13대1의 경쟁을 거쳐 1949년7월15일 생도 제 1기 338명으로 입교했었고, 생도 2기는 4년제 정규과정을 목표로 28대1의 경쟁을 거쳐 1950년 6월 1일 334명이 정식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있었다.
전쟁발발 당일 제1기생 262명은 임관을 20일 남겨놓고 있었다. 북한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육사와 보병학교 교도대대가 문산 축선에 투입됐다. 뒤이어 오후1시 쯤 사관생도들을 포천축선으로 투입하라는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이 하달됐다.
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생도대대를 편성하고 오후 8시쯤 징발된 차량을 이용해 포천시 내촌면의 303고지(부평리)에 배치했다. 생도대대의 우측에는 전투경찰대대가 배치됐다. 생도대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물리쳤지만 전황 악화에 따라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생도대대는 태릉으로 철수해 포천에서 철수해온 제9연대의 잔여병력과 함께 불암산 일대에 배치됐다. 27일 밤이 깊어지면서 전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학교장은 생도들이 적진에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고 철수를 명령했다.
대부분의 생도는 28일 아침 망우리고개를 거쳐 광나루 방향으로 철수해 한강을 건넜다. 그 시기에 철수명령을 받지 못했거나 받았다 하더라도 서울을 쉽사리 적에게 내줄 수 없다는 사명 의식에 불타는 사관생도들이 있었다.
제1기생 김동원 생도는 후방으로 철수하여 몸을 숨겨 살아나가는 방법 대신 목숨을 걸고 불암산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감행하기로 하고 동료 생도들의 뜻을 모았다. 강원기·김봉교·박금천·박인기·이장관·조영달·전희택·홍명집·한효준 등 제1기생 10명과 제9연대 김만석 중사 등 부사관 2명, 병사 5명 등 총 20명의 대원이 모였다.
전 대원의 투표로 최초 유격활동을 제안했던 김동원 생도를 유격대장으로 선출했다. 조영달 생도를 제1조장, 박인기 생도를 제2조장, 김만석 중사를 제3조장으로 각각 선출했다. 암호명은 ‘불암산호랑이’로 했다.
불암산 석천암의 김한구 주지스님의 안내로 인근에 산재한 3개의 자연동굴을 은거지로 활용하기로 했다. 준비를 갖춘 유격대의 정보책으로 임명된 홍명집 생도는 믿을 만한 주민과 접촉해 북한군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공격할 목표를 선정했다.
불암산호랑이의 첫 번째 공격은 7월 11일 새벽 퇴계원에 있는 북한군 보급소 기습이었다. 이 작전에서 유격대는 보급품을 불태우고 3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김봉교·박인기 생도와 제2기생 1명 등 3명이 희생되고, 한효준 생도가 부상했다.
두 번째 공격은 7월 31일 새벽 창동역 부근에 있는 북한군 수송부대와 보안소 기습이었다. 대원들은 수류탄과 화염병을 사용해 보급차량과 사무실 등을 습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퇴각 도중 김만석 중사가 전사했다.
8월 15일 밤에 이뤄진 세 번째 공격의 대상은 생도들의 모교였던 육사였다. 당시 북한군은 육사를 의용군 훈련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유격대는 의용군으로 끌려온 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대담한 공격을 시행해 북한군 50여 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유격대장 김동원 생도 등 6명이 희생되었다.
유격대의 마지막 전투는 북으로 끌려가는 마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9월 21일 밤 진접읍 내곡리에서 적의 수송대를 기습한 것이었다. 그때 1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주민을 구출했으나, 6월 29일부터 9월 21일까지 불암산을 중심으로 80일 동안 활약했던 유격대원 전원이 계급과 군번도 없이 9.28수복을 앞두고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쓰러진 유격대원 중에서 강원기 생도가 다음날 구사일생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구출돼 군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부상 후유증으로 ‘51년 7월 10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강원기 생도의 생존 시 증언으로 ‘불암산호랑이 유격대’의 활약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석천암 김한구 주지 스님의 손자 김만홍 씨도 당시 유격대에 식사와 물을 제공했다는 사실 등을 증언했다.
그러나 불암산 유격대에 대한 정부차원의 선양사업과 무공훈장수여는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 기회에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학도병 2만7700여명과 고립무원(孤立無援) 구천에 떠돌고 계신 ‘불암산호랑이’를 포함한 7000여명의 고귀한 영혼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거국적이고 최우선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 지난 2009년 사망한 김동석 대령이 생전에 친딸인 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는 모습과 그 무수한 공적으로 한국군 사상 가장 많이 받았다는 훈장과 기념패들. [사진제공=진미령, 김희철]
휴전선 동쪽이 고성까지 올라간 이유, 김동석의 ‘HID36지구대’ 활약 덕분
가수 진미령의 부친인 김동석은 한국군 사상 최다 훈장 수여자
미국에서 출판된 “My Father's War"의 저자 황성씨는 6·25남침전쟁 당시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tachment)36지구대원이었던 황하용씨의 아들이다.
이 책에서 작가의 아버지가 활동했던 동해 영흥만은 남북첩보전의 최대 격전 지역이었고 북한인민군은 영흥만 도서에 있는 첩보부대를 타격하기 위해 하루에 300여발씩 밤낮으로 포격을 가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지휘소가 있는 여도에 포격이 집중되었다고 말했다.
황하용씨는 “당시에는 전쟁이 끝나면 영웅이 된다. 부대에 들어가면 입을 것, 먹을 것, 잘 곳을 제공해준다. 고향에 돌려보내준다, 가족을 찾아주겠다”는 말에 HID의 부대원이 된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 부대의 지휘관인 김동석 대령은 전쟁을 전후해서 160번이나 낙하산을 타고 북에 침투했었다. 그는 북한지역 첩보활동을 위해 인민군 경력이 있거나 영흥만을 거쳐 내려오는 피난민 중에 판단이 빠른 자 등 똑똑해 보이는 북한 출신들을 HID로 차출하여 편성하였다. 황하용씨도 이들 중 한명이었다.
HID36지구대 첩보부대원들은 야간에 은밀히 북한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게릴라, 기습, 암살, 첩보, 납치, 주요시설 폭파 등 각종 임무를 수행했다. 밤이면 물에서 올라와 첩보활동을 펼치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36지구대 첩보원들의 활동방식 때문에 북한 인민군들은 이들을 ‘물쥐’라고 불렀고 김동석 대령은 ‘물쥐 대장’이 되었다.
백범 김구선생의 경호원을 역임했던 김동석 대령은 육사 8기로 ‘6·25남침전쟁’이 터졌을 때 중위로 중대장이었으나 전쟁기간 중 박성철이 지휘한 북한군 15사단을 낙동강전선 안강-기계전투에서 궤멸시켜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명예를 안기는 등 두 차례나 특진해 소령을 달고 육군첩보부대 HID36지구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앞서 조선 애국의용대 대장을 지내던 1945년 해방직후에는 일본 관동군 소속이었던 박정희 중위가 소련군에게 체포됐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밖에 무수한 공적으로 한국군사상 가장 많은 37개 훈장을 받았고 주한 미군으로부터 전쟁영웅 칭호를 받은 김동석 대령은 정전 직후인 1954년 2월 적진에 잠입하여 강원도 통천부근에서 매복 중, 인민군 17사단장 이영희를 납치해 귀순시킨 뒤, 일본의 미군기지로 보내 정보를 캐내도록 하는 전과도 올렸던 참군인 이었다.
목숨을 걸고 국가를 지킨 전쟁영웅을 대하는 미국과 한국정부의 태도는 극과 극이다. 미국은 끝까지 찾아내 업적을 기리지만 한국은 그 평가와 업적발굴에 인색하다.
양양의 호국사찰 '영혈사'의 HID호국영령 천도제가 유일한 위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설악산 기슭인 양양에 위치한 호국사찰 ‘영혈사’에서 조국을 위해 산화한 HID36지구대의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호국영령 천도제를 봉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국군정보사령부내의 박물관에 김동석 대령의 유품을 모아 전시하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는 소식에 약간의 위안을 갖기도 한다.
그동안 북파공작활동에 얽힌 비밀들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어왔던 김동석 대령은 작고 전인 2005년에 자신의 회고록을 발간했는데, “적진에 들어가지도 적 지휘관을 암살하지도 않았던 가짜 HID들이 설쳐, 진짜 HID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회고록 “This man"의 출판 동기를 밝히기도 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북한 목선이 삼척항으로 진입하는 CCTV 영상과 정박 지점 모습. [사진제공=연합뉴스]
정부 관련부처의 대응 및 처리 과정에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점 대두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북한 목선 삼척항 진입 사건과 관련, 정부 관련부처의 대응 및 처리 과정에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아 의문점이 대두된다.
은폐 및 축소 의혹을 받고 있는 군 일각에선 “군의 발표는 청와대와 조율된 내용인데 군으로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건 억울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또 청와대가 사실을 알면서도 군의 은폐 및 축소를 방치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 정부가 3가지 의문점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첫째, 해경으로부터 이미 구체적인 보고를 받아 사실을 알았음에도 합참이 다른 내용으로 발표한 이유이다. ① 합참은 17일 언론 브리핑 시 왜 해경 보고와 다르게 발표했나?
합참은 15일 3차례에 걸쳐 청와대와 함께 해경의 상황 보고를 받았다. 삼척항 방파제에 미상의 어선(4명 승선)이 들어왔고, 선원이 북한에서 왔다고 진술했다는 내용이다. 또 해당 어선은 10일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다가 13일 오후 기관 수리 후 15일 자력으로 삼척항에 입항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럼에도 합참은 17일 언론 브리핑 시 북한 어선이 기동하지 않고 떠 내려와 식별하지 못했고, 삼척항 인근에서 발견됐다고 말했다. 또 청와대 해명 과정에서 해경이 15일 보도자료를 발표한 사실을 군 당국이 알지 못한 상태임이 밝혀졌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설사 해경의 보도자료 발표를 몰랐다 해도 이미 15일 해경 상황 보고를 통해 북한 목선의 삼척항 정박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합참이 왜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17일 언론 브리핑을 했느냐이다. 또 해경 보고서에 “목선 GPS(위치추적장치) 보유”로 기술됐음에도 브리핑 당시 GPS 장착 여부를 묻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한 것도 의문이고, 이후 삼척항 정박을 언론에 밝히지 않은 이유를 묻자 “발견지점과 이동경로를 심문 중이어서”라고 답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② 군 당국의 언론 브리핑 자리에 왜 청와대 행정관이 참석했나? 둘째, 청와대 국가안보실 행정관이 군 당국의 언론 브리핑 자리에 ‘이례적으로’ 참석한 이유이다. 17일 언론 브리핑 당시 현역 군인 신분인 청와대 행정관이 사복을 입고 브리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고 알려졌다. 통상적인 국방부 언론 브리핑에는 당일 발표 사안과 관계된 부서의 책임자와 실무자 등이 참석한다. 청와대가 관심을 갖는 사안일 경우 브리핑 결과를 국방부 해당 부서에서 청와대 국가안보실로 보고한다. 따라서 청와대 행정관이 직접 브리핑룸에 앉아서 지켜보는 경우는 전례가 거의 없다. 혹시 청와대가 사전 조율을 위해 국방부로 행정관을 보냈고, 조율이 끝난 후 자연스럽게 언론 발표를 보기 위해 참석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또 브리핑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이나 상황이 발생하면 청와대가 곧바로 대응할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지 여러 가지 의문이 든다. 이와 관련,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21일 기자들과 만나 "해당 행정관이 그 자리에서 국방부 관계자들과 어떤 협의나 조율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③ 통일부는 북한 선원 4명 중 2명을 왜 서둘러 북한으로 송환했나? 셋째, 1차 합동신문 결과 밝혀진 귀순 의사에 따라 북한으로 돌아가길 희망한 2명을 서둘러 돌려보낸 사유이다. 정부는 북한 선원 4명 중 2명을 ‘자유 의사에 따라’ 지난 18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정부 소식통은 “국정원·군·경찰의 1차 합동신문이 끝난 뒤 통일부가 바로 이들을 인수했다”고 말했다. 귀순 의도를 갖고 8일 간 항해하며 어렵게 한국에 와서 ‘서울에 사는 이모에게 연락하겠다’고 휴대전화까지 빌려달라던 선원 중 일부가 북한행 의사를 밝혔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통일부는 18일 “선장 동의를 얻어 북한 어선을 폐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19일 추가 브리핑에서 “북한 어선은 폐기하지 않고 동해 해군 1함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선박 폐기 여부 발표도 이처럼 다른데, 귀순 의사가 과연 맞을지 의문이 들어 돌려보낸 사유가 주목된다. 군 관계자는 “군이 경계작전에 실패한 건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은폐 및 축소 논란의 책임을 군이 모두 지는 건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했다. 또 다른 군 관계자도 “마치 군이 17일 브리핑 내용을 알아서 만든 것처럼 하는데 우리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다”며 “군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 20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개최된 ‘제6회 방산기술보호 국제 컨퍼런스’에서 왕정홍 방위사업청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한경 기자]
방위사업청, 미·영·불 등 60여 개국 참여한 ‘방산기술보호 국제 콘퍼런스’ 개최
한·미 상호 정책공유 및 이해 증진 위한 ‘방산교역 아웃리치 세미나’도 열어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방위사업청은 20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효과적인 방산기술보호와 수출통제’라는 주제로 '제6회 방산기술보호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방위사업청은 2014년부터 방산기술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선진국의 정책과 관리 방법을 벤치마킹하고,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전문가들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 매년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콘퍼런스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60여 개국 정부기관과 바세나르체제(WA), 무기거래조약(ATT), NATO 사이버안보협력센터(NATO CCDCOE), 프랑스 국제전략연구소(IRIS) 등 주요 국제기구 및 연구기관과 국내의 방산기술보호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방산기술 동향을 살펴보고, 이를 보호하고 통제하기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행사는 ‘4차 산업혁명 기술융합 시대의 기술보호와 국제공조의 중요성’을 강조한 왕정홍 방위사업청장의 개회사에 이어서 안규백 국회 국방위원장, 이태호 외교부 차관, 미하엘 라이터러 주한 EU대사의 축사로 시작됐다. 이어 필립 그리피스 바세나르체제 사무총장과 하이디 그랜트 미국 국방부 방산기술보호본부 본부장의 기조연설이 있었다. 필립 그리피스 사무총장은 “바세나르체제 42개 회원국이 방산기술보호와 수출 통제를 위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으며, 한국의 콘퍼런스는 전 세계가 소통하는 기술보호 협력의 장(場)이 되고 있다”며 “한국이 기술보호 분야도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이디 그랜트 본부장은 “한국이 방산기술 보호 분야에서 역내 리더로 성장하기까지 과정을 직접 보고 싶어서 이번 콘퍼런스에 참석했다”며 “한국이 국회와 국방부 주도하에 방산기술보호체계를 갖춘 것이 다른 국가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하이디 본부장은 “방산기술보호를 위한 여정에 지도, 이동수단, 연료가 필요하다”고 비유하면서 “현 세계 상황을 정확히 보여줄 지도와 주요 기술 차단을 위한 법안, 기관, 정책 등의 이동수단 그리고 국제적 파트너십, 참여, 교류 같은 연료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본 세션에서는 국제 수출통제 정책과 발전 방향, 방산기술보호 제도 및 시스템 발전 방안,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방산기술보호 패러다임 전환을 주제로 15건의 발표가 진행됐다. 고려대 국제대학원 박성훈 교수,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손승우 교수,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임종인 교수가 각 세션의 좌장을 맡아 첨단 방산기술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 기술적인 방법론에 대한 심도 있는 발표와 토론을 유도했다. 이번 콘퍼런스는 과거에 비해 더욱 짜임새 있는 구성과 발표자들의 알찬 내용으로 참석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 발표자의 심도 있는 내용에 비해 외국 발표자들의 일부 내용이 너무 개괄적이란 의견도 제기됐다. 방위사업청 김종출 국방기술보호국장은 “60여 개국 500여 명이 참가한 이번 콘퍼런스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방산기술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국가들 간 기술보호 협력 관계를 형성해 방산수출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행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콘퍼런스 개최 현장에는 방산업체를 대상으로 ‘방산기술보호 수출입 상담 컨설팅’ 부스도 마련됐다. 또한 방사청은 이번 콘퍼런스와 연계해 19일 상호 정책 공유 및 이해 증진을 위한 ‘한·미 방산교역 아웃리치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기술보호와 절충교역 지원 활동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 방탄조끼와 우의를 입고 DMZ 안개바다 속에서 계곡과 능선을 누비는 모습[사진제공=김희철]
DMZ안개바다의 孤島, 마도로스 GP장의 꿈은 DMZ가 아닌 압록강 국경수비대장..
‘내 생명 조국을 위해…’,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정신자세로 “화랑대에서 동작동까지…….”
정성어린 국군장병 위문 손편지가 전방을 지키는 힘이 되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유난히 밝은 달빛아래 비치는 희미한 산등선과 계곡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찾기 위한 투쟁을 밤새도록 하면 눈은 올빼미가 되고 귀는 토끼귀가 된다.
이곳 저곳 기웃대면서 피곤에 지친 소대원들을 격려하고 졸고 있는 병사들을 깨우다 보면 어느덧 동녘은 훤하게 밝기 시작하고, 골짜기 골짜기에서 서서히 안개가 피어 오른다.
샘 솟 듯 피어나던 안개는 하나 둘 씩 모여 시내물이 되어 흐르고, 다시 모여 강이 되고, 점점 안개바다가 되어버린다. 보이던 산등선과 계곡은 안개바다에 잠기고 우뚝 솟은 GP만이 돗단배가 되며 마도로스 GP장은 홀로 외로운 항해를 떠난다.
저 멀리서 파문을 일으키며 몰려오는 안개 파도를 헤치고 낚싯줄울 길게 드리우고 월척(간첩/공비)을 찾아 잡는 고깃배 …., 필자는 그 외로운 어선의 선장이 되어 안개바다 속을 계속 항해했었다.
얼마후에는 이 배(GP)에서 하선하여 잠수복으로 갈아입고 DMZ지뢰밭을 누비며 직접 수색과 매복작전을 통해 월척(간첩/공비)사냥에 나서게 된다. 관측하고 보고 만하는 마도로스에서 大漁(간첩)를 찾아 직접 잡는 마도로스 어부(작전소대)로 교대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GP를 인계하고 DMZ수색/매복작전을 담당하는 소대로 임무를 교대할 때를 앞두고 840m거리의 적 민경초소를 볼 때는 갑자기 내 눈에 살기를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도 가까운 거리의 적 민경초소에 몰래 뛰어가서 몇 놈의 목이라도 따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의(戰意)가 불타던 생도시절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지뢰밭과 마주 보는 적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을 코 앞에 둔 DMZ안개바다는 너무도 평화롭다. 生과 死의 교차로에 서있는 군인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타성에 젖은 것인가?
그래도 필자가 근무한 GP는 사단에서 적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VIP코스였다. 적을 관측하고 심리전을 전개하며, 상급 기관 및 외국 손님까지 방문하는 곳이라 바쁘게 근무하다 보니 어느덧 교대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교대를 얼마 앞두고 대대교육관 김중위에게서 전화가 왔다. 참모 중대장들과 심의를 했는데 필자가 지휘한 소대가 최우수GP소대로 선정되어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대대 본부에서는 위생병이 군생활에 회의를 품고 자살하는 사고가 있었다. 또 휴가 병사는 집에서 놀러갔다가 뱀에 물려 인접사단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도 발생하여 부대원들의 사기가 침체일로에 놓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대대장이 방문한다는 전달이 왔다. 당시의 전기사정은 좋지 않았다. 수시로 전기가 끊어져 급수도 직접 물지게로 운반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날도 전기가 끊어져 대대장 방문 대비 보고서도 어쩔 수 없이 석유 호야등 밑에서 급하게 작성했다.
GP내무반에까지 들어오신 대대장은 소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최우수 GP소대 표창’을 수여해 주셨다. 표창장을 받아 든 소대원들은 자신들이 前 소대장을 상급부대에 청원하여 보직해임시킨 장본인이란 것을 잊어버린 채 사기는 하늘을 찌르며 천정의 유리를 깼다.
그런데 필자는 표창장을 받아 들고도 배가 고팠다. 필자가 생도시절 “화랑대에서 동작동(현충원)까지...”를 외치며 견위수명(見危授命) 하는 자세로 지키고 싶은 곳은 남북으로 분단된 반쪽짜리 국경선이 아니라 진정한 한민족의 국경선인 ‘압록강 국경수비대’에서 군인으로 국경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의 꿈은 ‘압록강 국경수비대장’이었으나 현실은 DMZ 한 가운데 외롭게 떠있는 섬 중에 하나인 GP장이었다. 제한된 인원들과 동거동락하면서 근 6개월 가까이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을 하면 따분하고 지루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답답함을 해소시켜주고 힘을 불어 넣어주는 것들이 존재했다. 간혹 사단 심리전부대에서 심리 요원인 여군하사들이 GP를 방문해 적 민경초소에서 잘 보이는 관측대에서 노래도 하고 병사들과 춤을 추며 심리전을 전개할 때는 GP 축제의 날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라 부모형제나 친구들의 손편지가 사기고양에 큰 도움이 되였다. 여자 친구의 편지나 선물이 오면 본인 뿐만 아니라 타 전우들도 모두 들뜨는 분위기 였다. 특히 정성어린 어머니의 편지를 전 소대원들에게 낭독할 때에는 눈물이 글썽해지는 소대원들도 있었다.
소대장은 국가를 위하기에 앞서 동거동락하는 소대원들을 보며 그들을 위해 위험한 임무도 마다하지 않는다. 소대원들은 학생들을 포함한 국민들의 장병 위문 손편지와 선물 보따리를 받을 때 외로운 고도에서 혼자만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응원해주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임무를 다한다.
최전방에서 근무를 하다가 후방으로 재 배치 받은 동료 장교들까지도 전방 생활에 대한 애틋함과 추억에 전방 동료에게 격려와 위문을 했었다. 국민들의 위문편지처럼 장병들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군인들은 존재한다.
▲ 태릉 화랑대 대강당 입구에 있는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는 기념비와 일기장[사진제공=김희철]
지금도 최전방 155마일 휴전선의 DMZ 안개바다와 푸른 하늘과 바다에서 우리의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피끓는 젊음을 불사르고 있는 많은 참군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국민들의 사랑과 응원을 받는 그들의 꿈은 아마도 ‘압록강 국경수비대’ 처럼 통일된 미래의 조국 영토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을 것이다.
생도시절, 태릉 화랑대 대강당 입구에 있던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는 기념비 앞에서 청운(靑雲)의 꿈을 키우며 “화랑대에서 동작동(현충원)까지…”를 한없이 외쳤었다. 이 한 목숨을 국가를 위해 바치겠다는 각오를 잊지 않고 실천하는 참군인이 많아 질수록 우리나라는 더욱 번영하는 강국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2016년 3월 24일 거제 옥포조선소에서 열린 인도네시아 수출 잠수함(1번함) 진수식에서 리아미잘드 리아꾸두 인도네시아 국방장관, 방위사업청 정우성 단장, 대우조선 정성립 사장 등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대우조선해양]
대한민국은 40여년 만에 전차, 장갑차, 자주포, 미사일은 물론 함정, 잠수함, 고등훈련기까지 거의 모든 무기체계를 생산하는 신흥 방산강국이 됐다. 뉴스투데이는 한국의 방산제품 중에서 세계로 수출되거나 수출 가능성이 높은 명품을 선정하여 소개하는 ‘수출 방산 명품’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2011년 1차 사업 3척(1조 2000억 원)과 이번 2차 사업 3척(1조1600억 원) 수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 잠수함 수출국 반열에 올라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지난 4월 12일 대우조선해양은 인도네시아로부터 1400톤급 잠수함 3척을 수주했다. 총 계약 규모가 10억2천만 달러(1조1천600억 원)에 달하며, 지난 2011년 인도네시아에 1400톤급 잠수함 3척의 수출 계약을 최초로 체결한데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수주다. 대우조선해양은 2004년 인도네시아 잠수함 창정비 사업 수출을 시작으로 2011년 당시 세계적인 잠수함 건조 강국인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을 제치고 약 11억 달러(1조 2000억 원) 규모인 인도네시아 잠수함 도입 1차 사업의 계약을 따냈다. 국산 중형승용차 7만 3000여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 액수로서 역대 방위산업 수출 단일계약 중 최대 금액이었다. 인도네시아 수출 성사로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잠수함 기술을 다른 나라에서 전수받아 자국의 잠수함을 건조한 후 수출까지 하는 최초의 나라가 됐다. 독일로부터 기술을 배워 잠수함을 만들었던 한국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 잠수함 수출국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2011년 계약한 1차 사업의 잠수함 3척은 2017년 '나가파사(NAGAPASA) 함'으로 명명된 1번 함에 이어 2018년 2번 함까지 국내에서 건조돼 인도네시아로 인도됐다. 3번 함은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지역 PT. PAL 조선소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공동으로 건조해 이번 2차 사업 계약식 날 진수됐다. 이번 2차 사업 계약은 수출 침체로 고심하는 국내 방산업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고, 선박 건조 중 가장 고난도인 잠수함 건조기술을 해외에서 확실히 인정받은 '쾌거'란 평가다. 이로 인해 한국은 잠수함 수출국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게 됐고, 왕정홍 방위사업청장은 계약식에 참석해 “한국 정부도 원활한 사업 추진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대우조선해양이 인도네시아에 수출하는 1400톤급 잠수함은 1988년 말 독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1200톤급(장보고급) 잠수함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기술연구 개발 끝에 독자 개발한 국내 최초의 수출형 잠수함이다. 1400톤급 잠수함은 길이 61m로 40명의 승조원을 태우고 중간기항 없이 1만 해리(1만8천520㎞)를 항해할 수 있다. 부산항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항까지 왕복할 수 있는 거리이다. 향후 30년 이상 운용될 이 잠수함들은 인도네시아 해상 안보와 영해수호 활동 및 연합해군 작전 등을 수행하게 된다. 방사청 관계자는 "이번 2차 사업 계약으로 동남아 잠수함 시장을 개척하는데 한국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고, 방산업계 관계자는 "수출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잠수함을 건조해 판매한 경험이 있는지가 최우선적인 평가 항목"이라면서 "고압의 심해를 운항하는 잠수함 건조기술은 고난도의 최첨단 선박 건조기술의 총합체"라고 강조했다.
한국군, 장보고급인 1200톤급과 손원일급인 1800톤급 각각 9척씩 보유 중대형 잠수함인 3000톤급도 확보, 작년 9월 도산안창호함(1번함) 진수 한국군 최초의 잠수함은 장보고급으로 분류되는 1200톤급 잠수함이다. 독일 209급 잠수함을 도입한 것인데, 1987년 1차로 3척이 주문됐다. 1번함은 독일 호발츠베르케-도이체(HDW) 조선소에서 건조됐으며, 2번함은 대우조선해양이 독일에서 갖고 온 부품을 옥포대우조선소에서 조립해 건조했다. 3번함부터는 부품에서 건조까지 모든 제조 과정이 국내에서 이뤄졌다. 1989년 10월에 2차로 3척이 주문됐고, 1994년에 3차로 3척이 추가 주문돼 모두 9척이 건조됐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건조기술을 기반으로 기존 장보고급을 개량한 1400톤급 잠수함이 만들어졌다. 1993년 1번함인 장보고함이 최초로 취역했고, 2000년 이억기함을 마지막으로 총 9척이 취역해 임무를 수행 중이다.
▲ 지난해 9월 14일 3000톤급 도산안창호함 진수식이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열렸다. [사진제공=대우조선해양]
두 번째 잠수함은 손원일급으로 분류되는 1800톤급이다. 독일 214급 잠수함을 도입한 것으로 수중에서 외부 공기의 흡입 없이 공기를 발생시켜 추진하는 ‘공기불요추진체계(AIPS)’를 갖춰 2주간 수중작전이 가능하다. 1차로 건조하는 3척은 2000년 현대중공업이 계약을 따냈고, 이후 6척은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이 교대로 1척씩 건조했다. 2007년 1번함인 손원일함이 취역했고, 2018년 신돌석함이 끝으로 취역했다. 해군은 214급에 더해 중대형 잠수함인 3000톤급 잠수함까지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대우조선해양은 독자적인 잠수함 설계 및 건조 역량을 증명했다. 지난해 9월 진수한 ‘도산안창호함’은 기존 214급과 비교해 약 2배 정도 커졌으며, 공기불요추진체계에 고성능 연료전지를 적용해 수중 잠항기간도 늘었다. 3000톤급 잠수함은 2020년 취역 예정이며, 연안 방어를 넘어 전방위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한국은 209급이 처음 취역한 1993년 당시 세계에서 43번째로 잠수함 보유국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동안 끊임없는 기술 개량과 노하우 축적으로 이제는 잠수함을 건조해 수출하는 5번째 나라가 됐다. 잠수함 기술 도입국에서 잠수함을 만들어 수출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 지난해 9월26일 중국 베이징 PT엑스포의 ‘화웨이’ 전시관에서, 한 직원이 랩톱 컴퓨터로 5G 무선 기술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과기부, ‘5G보안 기술자문협의회’ 통해 “화웨이 보안상 결함 없다”고 결론
문제 핵심인 ‘백도어’ 검증 여부 언급 없어...‘국민 기만행위’에 불과
전문가들 기자와 만나 "화웨이가 '소스 코드' 주기 전엔 확인 불가능" 주장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미국과 중국 간 기술 냉전을 초래한 화웨이 5G 통신장비의 ‘백도어’ 설치 유무는 장비를 사용하는 기업 혹은 국가가 확인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예상된다. 익명을 요구한 복수의 네트워크 전문가들은 지난 16일 기자와 만나 “화웨이 장비의 백도어 유무는 화웨이가 소프트웨어의 소스코드를 제공해야만 확인이 가능하다”면서 “하지만 어떤 글로벌 통신장비 회사도 개발기술을 담은 소스코드를 제공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화웨이 백도어 문제를 검증하겠다며 지난해 10월부터 8개월 동안 ‘5G보안 기술자문협의회’를 구성·운영해 온 것은 ‘국민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백도어’란 사용자 인증 등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응용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시스템 보안이 제거된 비밀 통로로서 통상 서비스 유지·보수의 편의를 위해 개발자가 만들어 사용한다. 지난달 27일 일부 언론은 “정부가 보안 전문가들과 함께 5G 통신장비에 대해 8개월간의 점검을 마친 결과 화웨이 장비에 보안상 특별한 결함은 없는 것으로 사실상 결론이 났다”고 보도했다. 5G보안 기술자문협의회는 5G 네트워크에 대한 국민들의 보안 우려를 해소하자는 취지로 정부가 주도해 산·학·연 보안전문가,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이동통신 3사, 한국인터넷진흥원, 과기정통부 등 20명 내외로 구성됐다. 궁극적인 목적은 화웨이 장비의 백도어 유무 검증이었고, 대다수 국민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협의회를 구성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협의회에서는 8개월 동안 화웨이를 포함해 삼성전자, 노키아, 에릭슨 등 통신사들이 사용하는 모든 5G 장비의 보안 기능을 점검했다. 협의회 참석자, "기술 표준에 맞는지 여부만 점검...보안문제 드러나기 어려워" 협의회에 참석한 정부 측 한 관계자는 “다른 통신장비 업체에는 없고 화웨이에서만 발견된 보안상 결함은 없었다”며 “반대로 화웨이 장비에는 문제가 없지만 다른 업체 장비에서 발견된 보안상 결함은 있었다”고 밝혔다. 기술적인 점검을 맡은 학계측 관계자는 “통신사와 통신장비 업체에 보안요소 점검 항목을 요청해 이를 기술 표준에 맞는지 점검하는 방식이어서 그 이상으로 장비 하나하나를 다 뜯어보는 것은 쉽지 않다”며 “장비 자체에 보안 문제가 있으려면 실질적으로 누군가 공격을 가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에 보안 문제가 드러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협의회에 참석한 관계자들의 표현을 보면, 점검할 대상에게 자신들이 점검 받을 항목을 요청해서 기술 표준에 맞는지 확인하는 수준의 보안 점검을 했다는 얘기다. 즉 원래 목적이었던 통신장비의 백도어 유무를 검증하는 활동은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옥연 교수 컨퍼런스서, "백도어 제조사외 확인 불가능, CC인증으로 검출 안돼" 해커 출신 보안 전문가 "백도어 찾기보다 백도어 이용 공격 포착 기술 개발 필요" 이와 관련, 지난 13일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주최한 ‘2019 국방보안 콘퍼런스’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옥연 국민대 정보보안암호수학과 교수는 “4G, 5G 모두 핵심 네트워크 장비의 백도어 (설치) 문제는 제조사 외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며 “정상적인 보안 기능 시험 성격이 강한 CC(국제공통평가 기준) 인증으로는 백도어 검출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통신사에서 백도어 검출이 불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국가의 핵심통신망에 대한 합법적 잠입도 가능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미국이 우려하는 것도 이런 부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말했다. 개발과정에서 만든 백도어가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으면 인증되지 않은 사용자에 의해 시스템 기능이 무단으로 사용되는 등 컴퓨터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 또 개발자나 제조사가 다른 의도로 백도어를 만들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한 해커 출신 보안 전문가는 “최초 장비 공급 시에는 백도어를 설치하지 않았다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과정에서 백도어를 집어넣을 수도 있다 “면서 “백도어를 찾으려는 노력보다 백도어를 이용한 공격이 시작될 때 포착하는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대부분 전문가들, " 백도어 검증이 제조사외 불가능한 것은 상식의 영역" 정부, 중국 의식해 협의회 결과 발표없이 정리하며 시장에 맡기는 분위기
대다수 보안 전문가와 네트워크 전문가들은 통신장비의 백도어 설치 여부는 개발자나 제조사외에는 확인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주관한 협의회에서는 그런 전문가들을 모아 8개월 동안 점검한 결과 보안상 결함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면죄부를 줬다. 그러면서 5G보안 기술자문협의회는 이 같은 결론에 대해 공식적인 발표를 하지 않고 내부 보고로 조용히 끝내는 분위기다. 정부가 어떤 방향을 정하기보다는 통신 시장의 해석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화웨이 통신장비의 백도어 설치 유무를 검증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는데, 백도어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고 보안상 결함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슬그머니 정리하는 모양새다. 이런 정부를 국민들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 목함지뢰 3발 폭발, 수색 중인 부사관 2명에게 중상 입힌 DMZ 지뢰도발 현장 [방송화면 캡처]2015년 북한군이 불법매설한 목함지뢰 밟은 우리 부사관 2명 중상
6·25전쟁 이후 지뢰매설 추정치, DMZ 남측 127만말 북측 80만발
2001년부터 민간인 지뢰사고는 40건, 군 사고는 26건이 발생, 휴전 후 4000명 피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대한민국은 6.25전쟁 이후 수십년 동안 '지뢰 잔혹사'를 겪어왔다. 그 가슴 아픈 역사를 정면돌파해온 숨은 어벤저스들을 소개한다.
2015년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불법으로 침범해 서부전선 DMZ 철책 통문에 의도적으로 매설한 목함지뢰에 의해 DMZ수색작전 중 우리 부사관 2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軍은 북한의 도발에 의해 피해도 입지만 기존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면서도 많은 인명 손실을 겪는다. 최근 국제 민간기구 ‘국제지뢰금지운동’(ICBL)도 DMZ의 경우 1㎡당 2.3개꼴의 지뢰가 매설돼, 세계 최고 수준의 지뢰 밀도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DMZ 전 지역은 6·25전쟁 이후 출입이 통제된 미확인 지대로 지뢰 매설량을 추정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것이 국방부의 공식 입장이다. 하지만 한국지뢰제거연구소는 각종 군 자료를 토대로 남측에는 127만말, 북측에는 80만발, 합계 약 200만발의 지뢰가 묻힌 것으로 추정했다. 또 남한 지역에만 DMZ에 52만발, 민통선 이북에 74만발, 민통선 이남에 1만발이 설치된 것으로 봤다.
문제는 전체 지뢰지대 중 미확인지대가 94.8%나 된다는 것이다. 특히 DMZ 내부의 경우 기확인지대가 2.7%뿐으로 사실상 모든 지역이 미확인지대다. 철책선 순찰로 옆에는 ‘들어가면 죽는다’, ‘미확인지뢰지대’ 등의 경고판이 곳곳에 있다.
국방부는 대인지뢰 90만발로는 M2, M3, M14, M16A1 등을, 대전차지뢰는 M6, M7, M15 등을 DMZ에 묻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부분이 6·25전쟁부터 1980년대까지 묻은 냉전의 산물이다. 약 40만발 묻힌 발목지뢰로 불리는 ‘M14’는 플라스틱 재질로 무게가 9.4g에 불과해 폭우가 오면 유실되곤 한다. 밟으면 발목을 앗아 간다. M16A1은 밟으면 공중으로 도약해 폭발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
DMZ수색작전 중 우리 부사관 2명에게 중상을 입힌 북한의 대표 지뢰인 ‘목함지뢰’는 폭약의 파괴력이 M14의 7배다. 나무 상자에 TNT폭약을 넣었기 때문에 홍수가 나면 물에 떠서 유실되곤 한다. 2001년부터 2016년까지 민간인 지뢰사고는 40건, 군 사고는 26건이 발생했다. 휴전 후부터 따지면 4000명이 넘게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 전방지피와 지뢰제거 공병팀의 시범모습[사진제공=국방부]
1982년 GP장 시절 인근부대 지뢰제거 중 폭발로 간부 순직 및 병사 실명
1987년 지뢰제거에 솔선수범(率先垂範) 하다 순직한 故 강병식 대령
1982년부터 필자가 근무했던 승리부대는 GP현대화 및 추진철책 공사 위해 많은 부대가 DMZ에 투입됐다. GP장근무를 하면서도 GP현대화공사장 확장과 진입로 개척을 위해 주변 지뢰 제거작업을 했다.
어느날 인접 GP에서 유승한 중위(학군19기)와 한황진 중위(육사37기)가 진입로 개척을 위해 불도저까지 동원하여 지뢰 제거 및 도로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유중위는 안전을 책임지는 선탑자로서 불도저에 타서 운전병을 통제하였고, 한중위는 소대원들을 데리고 주변 경계를 하였다.
불도저의 삽날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순간 ‘꽝’하는 소리와 함께 대전차 지뢰가 터져 삽날1/3이 파편이 되어 흩어졌고 도져는 부서진 삽날을 들어 올린채 지뢰지대로 점점 더 들어갔다. 지뢰폭발로 흩어진 파편은 운전병의 양눈을 파고들었고 선탑자 유중위와 한중이도 온몸에 파편이 박혔다.
다행이 모두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치명상은 아니였지만 안면이 피범벅이 되었다. 선탑자 유중위는 양눈에서 피가 흐르는 운전병 대신 불도저를 급정거 시키고, 상급부대에 사고 보고를 했다.
아찔한 순간이 었다. 사전 지뢰탐지를 했지만 깊히 밖혀 있던 지뢰를 찾지 못한 탓에 사고가 발생했고 의무후송을 간 운전병은 실명하고 두명의 중위는 얼굴이 곰보가 되어 있었다.
필자가 GP장을 마치고 DMZ추진철책 설치를 위한 지뢰지대 개척 작업시에는 소대원들 모두 머리카락과 손톱을 깍아 유서와 함께 편지봉투에 넣어 소대에 보관하고 DMZ로 투입했었다.
인접 사단에서 중대장 근무를 하던 이충원 육사동기는 지뢰제거 작전시 지뢰폭발로 중상을 입어 장기간 입원치료를 받았고, 훗날 유신사무관으로 나가 통일부에 근무하기도 했는데 그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 전방 민통선 이북에서 지뢰제거중인 국군장병 모습[사진제공=국방부]
1987년 필자가 사단작전장교 근무시절 당시의 전초(GP담당)대대장 고(故) 강병식대령(육사31기)은 GP주변 지뢰제거 임무를 부여받고 맨 선두에 서서 지뢰제거를 하다가 M16A1 대인지뢰 폭발로 두다리가 절단되어 순직했다. 바로 뒤에 있던 중대장과 소대장도 부상을 당해 후송되어 간신히 회복되었으나 트라우마 때문에 군생활을 다하지 못하고 조기 전역했다.
지휘관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맨 앞에서 “나를 따르라(Follow me..!)”하는 솔선수범(率先垂範)을 보이는 위치이다. 강 대령은 대대장으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지뢰제거의 선두를 맡길 수도 있었는데 너무도 부하들을 사랑한 나머지 모범을 보였고, 안중근 장군의 유묵처럼 ‘견위수명(見危授命, 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친다)’을 실천하다 순직했다.
필자가 DMZ추진철책 설치를 위한 지뢰지대 개척 작업 임무를 수행하다가 상급부대 명령에 의해 대대본부 작전항공장교 보직을 받고 소대장직을 인계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 그 소대의 선임하사도 지뢰폭발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군인들의 위국헌신(爲國獻身)하는 자세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국민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국가를 위해 임무를 완수하는 군인들과 운명을 달리한 순직자들에게 감사하고 추모하며 보답을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순직한 이들을 최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 그러나 현 대통령은 지난 11월 ‘연평도 포격도발8주기 추모식’과 이번 3월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또한 현충일 천안함-연평해전 유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해놓고 김정은 사진 테이블에 올려놓아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 씨 등 가족들을 울먹이게 만들었다.
▲ 2019년 ‘518민주화운동기념식’에서 문대통령이 기념사하는 모습[동영상캡쳐]
하지만 문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기념식’에 참석하여 장시간의 기념사까지 하였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음의 공포 속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을 국가통수권자가 간과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문대통령은 국군의날 기념식 및 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근간은 도발을 용납하지 않는 군사력과 안보태세"이고 "이기는 군대가 돼야 한다"면서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해서 강조했다.
대통령의 기념사처럼 “국가다운 국가, 싸워 이기는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나라를 위해 생사의 기로에서 주저함 없이 임무를 수행하다 희생한 전몰장병들과 그 가족들을 최우선으로 끝까지 책임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정부의 배려와는 무관하게,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현재 이 시각에도 견위수명(見危授命)하는 우리의 자랑스런 국군장병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지난 4일 국회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개최된 ‘방위산업 혁신 세미나’에서 서우덕 고려대 교수(앞줄 오른쪽에서 다섯 째) 등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실용안보포럼]
안규백 국방위원장 주최 세미나에서 ‘한국 방위산업의 경쟁구조 개선방안’ 발표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한국의 방위산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무한 경쟁을 지양하고 제한적 경쟁체제(과점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정부가 주관하던 대다수 체계개발을 업체가 모두 주관하고, 개발과 생산 단계마다 업체 선정 시 경쟁하기보다 앞 단계를 수행한 업체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지난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된 안규백 국방위원장 주최 ‘방위산업 혁신 세미나’에서 서우덕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가 ‘한국 방위산업의 경쟁구조 개선방안’이란 주제로 발표한 이런 내용들이 방위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 점차 주목을 받고 있다. 서 교수는 “한국 방위산업은 시장경제 원리를 무리하게 도입한 결과, 기술이 아닌 가격 경쟁만 남아서 방위산업 생태계의 안정성이 악화됐고, 체계 단위로 일괄 계약하는 방식은 대기업 중심으로 중소·협력업체들을 사적 계열화시켜 중소기업 입지가 약화됐다”고 지적했다. 또 “특정 업체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경쟁관계를 조성하는 사업 형태가 만들어지는데다, 탐색개발-체계개발-생산 단계마다 제로베이스 경쟁을 시켜 업체는 자기 것이란 확신이 없어 투자를 기피하며 단편적 비용 절감에만 집착할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경쟁력 가지려면 무한 ‘가격’ 경쟁 지양하고 제한적 ‘기술’ 경쟁으로 전환해야” 서 교수는 “정부(ADD)가 주관하는 연구개발이 지속됨에 따라 업체의 체계 설계 및 문제해결 능력이 길러지지 않아 수출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고, 방위사업 인력도 2006년 방사청 창설 당시 731명이 122개 사업을 관리했으나 2017년에는 710명이 215개 사업을 관리하는 등 인력 부족으로 부실 관리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개방경쟁-보호육성의 균형적 방위산업 정책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즉 시장경제 체제는 방위산업 특성에 맞지 않으니 무한 ‘가격’ 경쟁은 지양하되 전적인 보호육성도 타당성이 없으므로 “제한적 ‘기술’ 경쟁체제 또는 과점체제가 현실적으로 적절한 방위산업 구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기업은 이미 과점체제가 정착된 상태이므로 중소·협력업체 품목에서 제한적 경쟁구조를 도입하면 된다”고 말했다. 즉 무분별한 진입이나 대기업의 잠식 등을 감안하여 품목별로 제한 경쟁이 가능한 2∼3개 업체를 지정하되, 기술력 있는 신규업체의 진입은 유연하게 만드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다. “개발과 생산 연속성 보장한 업체 선정과 모든 체계개발 업체 주관” 주장도
다음으로 그는 “개발과 생산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업체 선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당 경쟁과 중복 투자를 방지하고 사업의 주인의식을 제고하려면 “탐색개발-체계개발-생산 단계마다 앞 단계를 수행한 업체가 선정되는 원칙을 정하되, 기술·품질·비용 측면에서 통제가 곤란하거나 중대 하자가 발생하는 등 특별한 경우만 제한된 경쟁 방식을 적용”하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그는 “전략무기를 포함한 모든 체계개발은 업체가 주관함으로써 업체의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업체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현실이 될 수 있지만 “국방과학연구소(ADD)는 핵심기술 개발에만 전념하고, 업체가 모든 체계개발을 담당하는 방위산업구조로 과감히 전환해야 방위산업의 경쟁력이 생긴다”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외에도 서 교수는 “정부 산하에 방위사업 전문 사업관리단 창설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현 방위사업청 사업관리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업을 전문적·집중적으로 관리하려면 더 많은 정부 자원을 할당 받고 사업관리 인력 확대의 융통성을 가져야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고민에서 나온 의견이기에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 호주 수출을 추진 중인 ‘AS21 레드백 장갑차’의 기반인 K21보병전투장갑차. [사진제공=한화디펜스]
대한민국은 40여년 만에 전차, 장갑차, 자주포, 미사일은 물론 함정, 잠수함, 고등훈련기까지 거의 모든 무기체계를 생산하는 신흥 방산강국이 됐다. 뉴스투데이는 한국의 방산제품 중에서 세계로 수출되거나 수출 가능성이 높은 명품을 선정하여 소개하는 ‘수출 방산 명품’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K21 업그레이드한 ‘AS21 레드백 장갑차’ 개발해 치열한 수주전 나서
라인메탈 디펜스의 링스, BAE시스템즈의 CV90, GD의 에이젝스와 경합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한화디펜스의 K21 보병전투장갑차(IFV)가 방산수출 시장과 미래 디지털 전장 환경에서 끝없이 진화하는 명품무기로 주목되고 있다. 한화디펜스는 호주 육군의 ‘미래형 보병전투장갑차 도입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호주 지형에 특화된 ‘AS21 레드백 장갑차’를 개발하고, 현지에서 치열한 수주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23일에는 호주 정부와 현지 협력사 간의 신뢰를 높이고 지지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빅토리아주 정부시설에서 첫 사업설명회도 진행했다. 호주군 창군 이래 최대 규모의 무기획득 사업으로 전투차량 외 계열차량 8종이 포함돼 총 400대를 구매할 계획이며, 예산 규모만 약 5조원(46억 달러)에 달한다. 호주 육군은 오는 9월까지 2개 업체를 선정하고, 1년 동안 시험평가를 거쳐 2021년 10∼12월 최종사업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현재 한화디펜스의 AS21은 독일 라인메탈 디펜스의 링스(Lynx), 영국 BAE시스템즈의 CV90, 미국 제너럴다이나믹스의 에이젝스(Ajax)와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경쟁 상대들이 미 육군에 수출을 타진 중인 링스나, 고출력 신형엔진 등을 장착한 CV90, 자동탐색·추적·탐지기능 등이 강화된 에이젝스 등이어서 결과는 낙관하기 어렵다. 한화디펜스 관계자는 지난달 26일 “레드백은 호주에서 서식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독을 가진 거미인 ‘redback spider’에서 따온 이름”이라면서 “레드백은 사막이 많은 호주 지형에서 완벽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설계됐고, 한국군에서 검증된 K21 보병전투장갑차를 기반으로 방호력, 화력성능 등을 높인 미래형 궤도 장갑차”라고 말했다. 그는 또 “30㎜ 기관포, 대전차미사일에 각종 탐지·추적 센서, 방어시스템 등 다양한 첨단전투시스템을 갖췄으며, 특히 호주 광학기술기업인 ‘일렉트로 옵틱 시스템스(EOS)’의 최첨단 센서와 기술이 집약된 T-2000 포탑이 장착된다”고 강조했다. 즉 AS21은 호주 지형과 미래 전장 환경에 맞게 K21을 업그레이드한 장갑차란 얘기다.
K21, 디지털화된 4세대 전투장갑차로 방어력, 화력, 기동력 뛰어나 한화디펜스는 AS21의 기반인 K21도 “미래 디지털 전장 환경에서 입체 고속 기동전 수행을 위해 화력, 생존성, 기동성을 대폭 증강시킨 미래형 보병전투 장갑차(IFV)”라고 설명하면서 “40mm 주포 탑재로 더욱 안전한 병력 수송과 전투 임무를 수행하며, 동급 전투 장갑차 중 유일하게 자체 수상 운행이 가능하다”고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다. 내부가 디지털화된 4세대 IFV인 K21은 방어력, 화력, 기동력이 뛰어나다. 러시아제 152mm 자주포탄 파편은 물론 1km에서 50mm를 관통하는 날개분리철갑탄까지 막을 수 있는데다, 40mm 중기관포를 선택했고 사정거리 2500m급의 대전차미사일이 2발 장착돼 있다. 기존의 알루미늄 장갑재보다 30% 경량화 됐음에도 740마력의 엔진을 장착했고, 수중에서도 시속 7km의 속도를 낼 수 있다. K21은 1999년부터 2007년 개발 완료 때까지 총 910억 원의 개발비가 들었다. 2009년 11월부터 2013년 4월까지 두 차례 양산을 통해 240여 대를 생산했으며, 이후 2016년까지 3차 양산을 통해 160여 대를 생산했다. 20기계화사단을 필두로 수도기계화사단과 이어 11기계화사단에 배치됐으며, 가격은 대당 4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미국이 브래들리 장갑차의 업그레이드 계획을 취소하고 신형 IFV 도입을 검토 중이며, 인도도 BMP-1, 2 장갑차 교체사업을 개발에서 구매로 변경하는 등 주요 국가의 IFV 교체 시기가 도래하면서 K21 같은 우수한 성능의 궤도형 장갑차 시장이 급성장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K-21 차체에 CMI 디펜스사의 포탑 탑재한 ‘경전차’ 수출용으로 제작 또한, 한화디펜스는 2016년 벨기에 CMI 디펜스사와 750만유로(약99억 원) 규모의 포탑 구조물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K-21 장갑차 차체에 CMI 디펜스사의 105㎜ 포탑을 탑재한 ‘K21 XC8 105mm 경(輕)전차’를 제작해 해외 전시회에 참여하며 선보였다. 한 때 포사격성능시험에서 포신 폭발사고가 발생하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록히드마틴과 함께 미국 경전차 도입 경쟁에 참여한다는 소식도 나오는 등 수출 준비는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현우 한화디펜스 대표는 2016년 당시 “세계 방산시장에서 중형 전차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면서 전술적으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경전차에 대한 수요가 중동, 남미, 동남아 등지에서 많다”며 “기존 K21 장갑차에 해외에서 기술력을 이미 인정받은 CMI 디펜스사 포탑을 탑재한 신형 경전차를 만들어 수출할 계획”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K21, 또 다른 업그레이드 모델인 육군의 차세대 전투차량(NGCV) 구상 한편, 육군은 2030년대 배치를 목표로 차세대 전투차량(NGCV) 사업을 시작하려고 구상 중이다. 육군이 NGCV를 생각한 배경엔 병력과 부대의 수가 줄어드는 반면 1개 부대가 지켜야 할 지역은 더 넓어지는 미래 전투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 육군의 NGCV에 영감을 불어 넣어 준 전투차량이 바로 한화디펜스가 호주에 수출하려는 AS21 레드백 장갑차이다. 군 소식통은 “공통 플랫폼을 기반으로 경(輕)전차, 보병전투장갑차(IFV) 등 다양한 목적의 전투차량을 파생형으로 만들 예정”이라며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상당 수준에 이른다면 경전차를 완전 무인차량으로 만드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화디펜스에게 K21을 기반으로 또 다른 업그레이드 모델의 전투차량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패트릭 섀너핸 미국방장관 대행과 정경두 국방장관이 열병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 [사진제공=국방부]
北, 외세추종의 종착점은 파멸이라며 ‘민족공조’ 강조
한미, ‘불변의 한미동맹’을 아시아 평화의 중심축 역설
문 대통령의 '두 바퀴 평화론'의 미래 주목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지난 3일 ‘한·미 국방장관회담’이 끝나자 북한은 5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통해서 “남한 당국이 남북관계 개선에 있어 미국 등 외세 눈치를 보고 있다”고 비난하며 “외세추종은 민족의 이익을 해치는 길이고, 그의 종착점은 파멸이기 때문에 온갖 화난의 근원인 ‘외세의존병’을 털어버리고 ‘민족공조’에 나설 것”이라며 거듭 압박했다.
대남 선전매체 ‘메아리’도 남북 간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이유가 "말로만 '남북선언들을 이행할 확고한 의지가 있다'고 떠들고 실지 행동에서는 그 누구의 눈치만 보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남조선 당국의 우유부단한 태도"라고 주장했다.
▲ 평양 시내 모습과 노동신문[사진제공=연합뉴스]
다른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최근 한국군이 진행한 을지태극연습에 대해 "명백히 우리 겨레와 국제사회의 평화 염원에 찬물을 끼얹고 조선반도 정세 긴장을 몰아오는 무분별하고 위험천만한 도발 행위"라고 비난했다.
올해 북한은 각종 매체를 통해 남한 당국에 민족공조를 촉구하고 있으며, 계속된 압박에도 한미 국방장관회담 등에서 남측이 “대북제재 이행 등 한미공조를 지속”하자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분석된다.
▲ 6월 2일 싱가포르, ‘18차 아시아 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 참석을 계기로 ‘제12차 한미일 국방장관회의를 개최’하여 정경두, 패트릭 섀너핸 국방장관, 이와야 타케시 일본 방위대신이 북한정세, 지역안보, 3국 안보협력 등에 대해 논의 하였다. [사진제공=국방부]
한편, 방한을 마치고 4일 일본에 도착한 패트릭 섀너핸 미국 국방장관 대행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만났다. NHK방송 보도에 따르면 섀너핸 대행은 이 자리에서 북한이 지난달 미사일을 발사한 것을 바탕으로 ‘아시아 안보회의’에서 북한 비핵화를 위한 일본을 포함한 관계국들의 대응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결의를 완전하게 이행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미국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의 해결을 계속해서 지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섀너핸 대행와 아베 총리는 미국과 일본이 함께 추진하는 '인도ㆍ태평양 구상’의 실현을 위해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섀너핸 대행은 "미·일 동맹은 전에 없을 정도로 굳건하다"며 " 앞으로도 미·일 동맹의 억지력과 대처력을 강화하고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을 반드시 실현시키겠다"고 말했다.
美 강경한 기류인 ‘先 비핵화, 後 제재완화'에 文 '두 바퀴 평화론' 멈짓멈짓
방한한 패트릭 섀너핸 미 국방장관 대행은 3일 오후 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비핵화 방안과 관련해 온도 차를 보였다. 섀너핸 대행은 '先 비핵화, 後 제재완화'라는 기존 미국의 입장을 고수했다. 문 대통령은 대북제재 유지 속에서도 그와는 별도로 이산가족 상봉과 식량지원 등 인도적 지원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 접견자리에서 "대화를 통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구축을 위해서는 한미동맹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굳건한 한미동맹을 통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서면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고 대변인은 또 "문 대통령과 섀너핸 대행은 비핵화 목표 달성에 의미있는 진전이 있을 때까지 대북제재가 유지돼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앞서 북한의 비난 방송 압박에 따라 대북제재 완화 움직임을 보이던 청와대가 남북관계 발전이 북미관계 개선이라는 선순환 관계로 이어진다는 기존 문 대통령의 '두 바퀴 평화론'을 재확인 하면서 미국의 강경한 기류에 보조를 맞췄다는 분석이다.
▲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박한기 합참의장이 패트릭 섀너핸 미국 국방부 장관 대행과 3일 오전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방부]
“미래연합사령관의 한국군 합참의장 겸직과 한미연합사를 국방부 영내로 이전하는 검토안” 포기
한미연합사의 평택 이전은 미군이 자동개입하는 ‘인계철선’무력화 등 유사시 수도권 방어에 부정적 영향
대통령 접견 전인 3일 오전에 진행된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한미연합군사령부를 경기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하기로 합의한 것은 기존의 ‘서울 용산 국방부 부지 내 이전’ 방침을 뒤집었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국방부는 한·미 연합작전 수행에 필요한 의사소통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한미연합사를 국방부 영내로 이전하는 방안을 지난해까지 강력히 추진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새로 부임한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이 금년 1월 국방부 내 건물들을 둘러본 뒤 캠프 험프리스 이전 방안을 국방부에 강도 높게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이날 회담 후 “한미연합사 작전 효율성과 연합방위태세를 높일 것이라는 데 공감했다”고 평택 이전 배경을 설명했다. 한미연합사의 국방부 영내 이전이 작전 효율성과 연합방위태세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국방부 영내 이전이 졸속으로 추진됐다는 논란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군 관계자는 “한미연합사 미국 측 참모들은 주한미군사령부와 유엔군사령부 참모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데 국방부 영내에 사령부를 두면 미국 측 인원들은 근무지가 서울과 평택으로 나뉘는 문제가 있다”며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주한미군 사정에 밝은 군 소식통은 “국방부 영내로 이전하면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지하벙커와 지휘통제자동화시스템(C4I) 등을 설치해야 하는 문제가 있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며 “미군의 핵심 보안시설이 한국 측에 노출될 위험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담당할 미래연합군사령부의 수장을 정하는 것은 한·미 군 당국이 오래 전부터 고심했던 대목이다. 전작권이 한국군에 전환되면 지휘체계는 한국군 대장이 연합군사령관을 맡고 미군 대장인 주한미군사령관(현재의 한미연합사령관)이 부사령관을 맡는 미래연합사 체제로 바뀐다.
당초 한·미 국방부는 미래연합사령관을 한국군 합참의장이 겸직하는 방안을 검토하여 19-1차 동맹연습시에는 적용하여 훈련했고 ’19-2차 동맹연습’에서도 적용하여 추진하려 했으나, 합참의장의 임무가 과중해질 수 있다는 미국 측의 우려를 반영, 합참의장과 별도 직위로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군 관계자는 “합참의장은 평시에 통합방위사령관과 전시에는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을 보좌하며 계엄사령관 역할을 수행하고 전시 군사외교도 진행해야 하는 등 업무가 매우 많은 직위”라며 “전작권까지 수행하는 것은 어렵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말했다. 미래연합사 체제로 바뀌면 현재의 한미연합사 부사령관(한국군 대장) 직위는 없어지는데, 이때 남게 되는 대장 자리 1석을 미래연합군사령관에게 배정하게 된다.
또한 일각에서는 한미연합사의 캠프 험프리스 이전이 유사시 수도권 방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군이 서울에 존재함으로써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무력시위 효과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미군이 있어야 북한 공격 시 미군이 자동개입하는 ‘인계철선’이 평택 이전 시엔 서울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평시에는 서울의 국방부·합참과 차량으로 1시간30여분 떨어진 캠프 험프리스의 한·미연합사 간에 유기적인 의사소통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국방부 관계자는 “합참이나 국방부와 연계하는 것은 C4I로 대체할 수 있다.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지휘 통솔에 공백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국방 당국이 서울 용산 미군기지 반환에 따라 한미연합군사령부(연합사)를 경기 평택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하기로 하면서 용산공원 조성사업도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 지난 4월1일 (현지시간) 미 국방부 본청에서 미국 국방부 장관 대행과 회담하는 정경두 장관(워싱턴=연합뉴스)
전작권 전환의 첫 번째 조건인 한국군 핵심군사능력을 확보해도 전환은 불투명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한국군의 필수대응능력’과 ‘한반도 및 지역 안보환경’이 관건
지난 4월1일(현지시간) 미 국방부 청사(펜타곤)에서 열린 패트릭 섀너핸 미국 국방부 장관 대행과의 회담에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모두발언을 통해 "최근에는 전작권 전환의 첫 번째 조건인 한국군 핵심군사능력에 대한 한미 공동평가를 위해 매월 박한기 한국 합참의장과 로버트 에이브럼스 장군(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특별상설군사위원회를 개최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한국군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박 의장과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3월 처음으로 ‘특별상설군사위원회’를 열고 앞으로 매달 이 위원회를 통해 전작권 전환 이후 연합작전을 주도할 한국군의 핵심군사능력을 평가하기로 했다.
군의 한 소식통은 "기존 상설군사위원회(PMC)는 반기(6개월)에 한 차례 열렸지만, SPMC는 PMC가 열리는 달과, 전구(戰區)급 한미 연합 연습이 실시되는 달을 제외하고 매달 열릴 것"이라며 "한국군의 연합작전 주도 능력 등을 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는 2014년 제46차 안보협의회의(SCM)에서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 원칙에 합의하면서 ▲ 한미연합방위를 주도할 수 있는 한국군의 핵심군사능력 확보 ▲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우리 군의 초기 필수대응능력 구비 ▲ 전작권 전환에 부합하는 한반도 및 지역 안보환경 등 3가지를 전작권 전환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중 한미 군 당국이 가장 중시하는 조건은 '한미연합방위를 주도할 수 있는 한국군의 핵심군사능력'이다. 한 단계의 검증이 1년을 초과할 수 있기 때문에 검증 이전평가(Pre-IOC)생략한 가운데 한미는 우선 올해 8~9월로 예상되는 전구급 한미 연합 지휘소훈련(19-2차 동맹연습)을 통해 한국군 주도의 연합작전 수행능력을 평가하는 최초작전운용능력(IOC) 검증을 실시하기로 했다.
최초작전운용능력(IOC)에 이어 2020년에 완전운용능력(FOC) 검증과 2021년에 완전임무수행능력(FMC)까지 마치면 문재인 정부 임기 마지막 해인 2022년에 전작권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합참작전을 주도하는 한국군의 핵심군사능력 이외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한국군의 필수대응능력과 한반도 및 지역 안보환경도 전작권 전환조건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단계별 검증 절차를 마쳤다고 반드시 전작권 전환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 두 조건은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과 연계돼 있다. 따라서 문 대통령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 및 북미 간의 외교적 노력이 결실을 봐야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며 임기내 전작권 전환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섀너핸 대행의 방한이 남긴 잔해(殘骸),우리 검토안이 백지화?
우리의 전작권전환을 위한 준비중 미래연합사령관을 한국군 합참의장이 겸직하는 방안과 한미연합사를 국방부 영내로 이전하는 안은 이번 섀너핸 대행의 방한으로 인해 모두 백지화로 결정됐다.
이런 상태에서 국방부 발표대로 연합사 작전 효율성과 연합방위태세를 높이기 위해 한미연합사가 평택으로 이전하면 주한미군의 핵심 기능은 모두 캠프 험프리스에 집중된다. 그렇지만 미군이 서울에 존재함으로써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무력시위 효과가 사라져 북한 공격 시 미군이 자동개입하는 ‘인계철선’의 역할이 무력화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됐다.
하지만 한반도의 안정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지를 감추는 군과 정부의 노력은 정말로 눈물나게 만든다. 국방부 장관이나 합참의장은 직속 상관인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시에 복종해야한다. 허나 그속에서도 튼튼한 안보테세 유지를 위해 머리를 짜내며 애를 쓰고 있지만 일부 軍 선배들로부터 많은 질타를 듣고 있다.
게다가 섀너핸 대행의 “한미동맹에 대한 철통 같은 믿음을 갖고, 튼튼한 한미연합방위태세의 유지하는 것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외교 공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라는 언급에 우리 대통령도 장관도 의장도 그대로 수용해야하는 우리의 정치/외교적인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위기(危機)는 또다른 기회(機會)이다”
섀너핸 대행의 방한의 잔해는 씁슬한 미소를 짓게하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바꿔야 한다. 상하 좌우 옆에서 들려오는 불편한 외침 속에서도 위기(危機)를 호기(好機)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있는 우리 軍 현역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지난 1일 정약용문화교육원 정기총회가 끝나고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김종두 상임이사(앞줄 왼쪽에서 다섯 째). [사진제공=김종두 이사]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김종두 이사, “효교육에 특화된 명품 부사관학과 키워 졸업생 90% 임관”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2009년 33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김종두 상임이사는 육군에서 충·효·예 교육을 담당하던 시절 강사로 초빙돼 인연을 맺은 홍우준(洪禹俊) 경민학원 이사장의 요청으로 의정부시에 위치한 경민대학에 부사관학과인 ‘효충사관과’를 만들게 된다. 홍 이사장은 약관 21세 때 공산당이 싫어 부모와 가족을 북한 땅에 남겨두고 단신 월남하여 수많은 곡절 끝에 경민학원을 설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런 연유로 그는 부모 사랑(孝)과 나라 사랑(忠)에 기초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철학을 갖게 됐고, 자신이 설립한 경민대학교에 ‘효’와 ‘충’을 가르치는 학과를 만들 생각을 했다. 홍 이사장은 그 학과를 만들어 이끌 적임자로 일찍이 김 이사를 점찍어 두고 있었고, 이런 그의 바램은 김 이사의 전역으로 현실화 됐다. 당시 김 이사와 논의하던 그는 효심과 애국심으로 무장한 교육자 양성의 의미로 ‘사(師)’자를, 공직자 양성의 의미로 ‘관(官)’자를 넣은 ‘효충사관과(孝忠師官科)’로 학과 명칭을 정했다. 홍 이사장은 김 이사에게 어떻게 하면 학생을 모집해서 그런 인재를 육성해 낼 수 있는지를 물었고, 김 이사는 “군 초급간부를 양성하는 부사관학과로 특성화하면 군대와 나라에 모두 도움이 되는 명품학과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 이사는 5년 동안 효충사관과를 맡아 학과장으로 재직했다.
▲ 효충사관과 학생들이 제복 착복식을 실시한 후 김종두 학과장(앞줄 맨 왼쪽) 및 학교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김종두 이사]
김 이사는 부사관이 병영에서 초급 ‘지휘자·교육자·관리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 착안해 인근의 65사단과 업무협약을 맺고, 현장 실습을 통한 부하 상담 및 관리 요령 등을 가르쳤다. 또 인근의 사회복지시설에서 토요일마다 장애인 목욕 및 식사, 산책 등을 돕는 봉사활동을 함께 하면서 인성 함양에도 주력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그동안 효충사관과 졸업생들은 90% 이상이 육·해·공군의 부사관(군 공무원)으로 임관했고, 이 가운데 매년 3∼6명씩 3사관학교에 합격해 장교로 임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전통이 이어진다면 효충사관과 출신 영관장교가 나올 날도 멀지 않았다.
경민대와 성산효대학원에서 ‘효행교육지도사’ 5000명 배출 앞장서
김 이사는 학과장으로 재직하던 2011년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권인 ‘효패러다임의 현대적 해석’을 저술했고, 이어 2012년 2권인 ‘새로운 패러다임의 효 교육’과 3권인 ‘효와 소통의 현대적 리더십’ 등을 출간했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준비했던 내용들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효학 개론 성격으로 집필한 ‘효패러다임의 현대적 해석’은 3판 째 출간했다.
▲ 김종두 교수가 발간한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 2, 3권. [사진제공=인터파크]
이후 김 이사는 은사인 최성규(崔聖奎) 총장의 요청으로 경민대에서 성산효대학원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5년간 기획처장 및 효학과 교수를 맡아 강의하면서 효를 학문으로 특성화하는데 주력했다. 또 효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통해 대중의 인식을 전환하고, 인성교육·리더십·사회복지 등 인접 학문과 융합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기존에 출간한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 2, 3권을 인성교육과 융합해 기본서 시리즈 4권인 ‘인성교육의 이해와 실제’를 2018년 출간했다. 한편, 김 이사는 경민대 재직 시절에는 경민대학 총장 명의로, 성산효대학원 재직 시절에는 성산효대학원 총장 명의로 각 지방별 ‘효행교육지도사 자격과정’ 강의를 통해 5000여명의 효지도사 배출에 앞장섰는데, 이렇게 양성된 지도사들은 지역별 초·중·고등학교에서 효를 가르치는 활동을 하고 있다.
▲ 김종두 교수(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지난해 12월 제5기 효행교육지도사 수료식 후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김종두 이사]
인생 2막 성공 비결, “군대 업무 잘하면서 제2의 영역 미리 개척해야” 또한 그는 육군대학 교관시절에 다녔던 서당의 훈장 선생님이신 박성기(朴聖琪) 한학자와 육군의 충·효·예 교육을 함께 담당했던 민병돈(閔炳敦) 전 육사교장, 그리고 박사학위 과정의 은사이신 최성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총장 등 3분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금년 3월 그는 성산효대학원대학교를 떠나 2007년부터 이사로 활동해오던 정약용문화교육원(남양주시 소재)의 상임이사로 부임했고,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위치한 남양주에서 ‘정약용 선생 바로 알리기’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수도권의 많은 사람들이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강진까지 가지 않아도 ‘효에 기초한 애국·애민정신’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교육 사업도 기획하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가 2012년 정약용 선생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으므로 남양주시 마재 마을에 살았던 정약용 선생을 세계적 인물로 알리기 위해 ‘아름다운 마재 마을 가꾸기’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전역을 앞둔 후배들은 그에게 묻는다. 인생 2막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냐고. 그럴 때마다 그가 해주는 말은 “군대 밖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그 분야를 공부해 전문성을 쌓으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라”고 주문한다. 그는 “군대 업무를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제2의 영역도 미리 개척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고 말했다.
▲ 미스트롯에서 맹활약한 가수 송가인 및 홍자[동영상 캡처]
‘미스트롯’의 최고 시청률은 송가인과 홍자간 '선의경쟁'의 힘
참군인 동기인 고(故) 한황진 중령과의 애틋한 경쟁 생각나게 해
고(故) 이현부 중장과 한 중령 헬기사고로 함께 순직해
6월 호국보훈의 달 맞아 대의를 위한 희생의 길 다짐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근 급부상한 연애인이 미스트롯 우승자인 ‘송가인’이다. 치열한 예선전에서 기존가수인 ‘숙행’과 ‘김양’ 등의 오랜 연애인 경험을 활용한 경쟁이 경연을 재미있게 만들었고, 절대 극한의 절정은 준결승전에서 ‘홍자’와 ‘송가인’의 맞대결 경쟁(競爭)을 유도하여 극적인 긴장과 희열을 느끼게 만들었다.
필자가 GP장 근무시에도 당시의 전성수 대대장은 GP장의 선의경쟁(善意競爭)을 유도하여 자발적인 노력으로 부대발전에 기여하게 했었다.
겨울이 다되어 연말 우수부대 선발 시기가 되었다. 어느날 야간 경계작전을 마치고 아침 마도로스(GP장) 지휘보고까지 끝냈다. 소대원들의 취침상태와 오전 경계근무자를 배치를 확인한 후 오침에 들어가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방금 지휘보고를 드렸던 대대장이었다. “김중위 오늘도 수고했어 자네들 때문에 내가 발을 주~욱 벗고 잘 수 있네…”하면서 “우측 중대의 한황진 중위(육사 37기, 동기)는 GP의 경계진지에 보조 장비를 설치해 경계효과를 높이고 있던데 한번 참고해서 잘해봐...”라고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대대장의 말이 귓전을 맴돌아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침상에서 나왔다. 바로 우측 중대의 한중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야, 어떻게 했길래 대대장이 극찬을 하며 너에게 배우라고 하냐?”
한중위는 껄껄걸 웃으면서 “웃기지 마라, 대대장님이 어제 자기 GP에 들어 오셔서는 좌측의 김희철이는 ‘이런거 저런거’ 등 색다르게 운용하여 GP원들의 사기도 높이고 경계 효과도 극대화 시킨다며 너에게 전화해서 알아보라”고 하더라
대대장의 치열한 선의경쟁(善意競爭) 유도에 우리 둘은 걸려든 것이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전화를 통하며 한중위와의 우정은 더욱 돈독 해졌다.
당시 우측의 선봉 GP장이었던 고(故) 한황진 중령은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하고, 럭비부 주장까지 할 정도로 실력과 리더십이 뛰어난 군인이었다.
▲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한황진 중령 묘비[사진제공=김희철]
필자가 태풍부대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던 꼭 27년 전, 1992년 2월 14일에 경북 선산 일대 야산에서 군용헬기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평소 존경하던 7군단장 고(故) 이현부 중장과 사랑하는 동기생 한황진 중령을 떠나보낸 날이다.
이들은 전술토의 참가를 위해 헬기를 타고 이동 중 경북 선산 일대 야산에서 헬기가 추락해 탑승한 이현부 군단장 등 7명(작전참모 대령 허정봉, 군수참모 대령 이원일, 감찰참모 대령 노영건, 비서실장 소령 한황진, 전속부관 중위 서상권, 헬기승무원 상병 조규상)이 동시에 순직했다.
故 이현부 장군은 육사 졸업시 학업성적과 리더십이 가장 우수한 생도가 받는 대표화랑상을 수상했고, 군사전술과 작전지휘 능력과 리더십을 포함한 인품이 탁월하다는 정평을 얻어 군단장직책에도 동기생 중에 가장 빨리 보직됐으나, 그만 취임 두 달 만에 사고를 당했다. 이들의 죽음은 당시 그들을 군생활의 멘토로 삼고 있던 필자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한 “추락 당시 수행원 모두가 이 장군을 끝까지 보호하려 장군을 감싸고 있었다”라는 사고수습자가 전해준 증언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숙연케 했다. 이 장군과 한 중령의 사망소식에 많은 장병의 조문이 있었으며, 전역한 병사들까지도 수많은 애도를 표해왔다.
‘시졸여애자고 가여지구사(視卒如愛子故 可與之俱死)’, 즉 “장수가 병사들을 사랑하는 아들 돌보듯 한다면 가히 생사를 같이할 수 있다”는 손자병법 지형편을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들은 죽어서도 함께 했다. 대전 현충원의 묘비 번호를 1048번부터 1052번까지 나란히 부여 받고 안장되었고, 사랑하는 동기생 故 한 중령은 새로운 군번인 묘비번호 ‘1-203-1051번’을 부여 받았다.
故 이현부 장군과 한황진 중령은 국가를 위해 순국했다. 이들은 군에서 선후배들의 존경과 신뢰를 한없이 받았고 모범적 근무를 통해 군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기에 이들의 순국은 남을 위한 희생이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조국을 더욱 뜨겁게 사랑했던 삶은 오늘날까지 많은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필자는 대대장의 각별한 사랑을 나누어 받았던 한중령과 추억이 많았다. 임관해서 최초 임지인 승리부대의 전입 동기였고 가장 늦게까지 오랫동안 같이 근무한 전우이기도 했다.
한중령은 동기들 중에 너무도 뛰어나 수경사 육사교수부 등 주요부서에서 차출되었지만 자신마저 야전을 떠나 생활여건이 좋은 곳으로 가면 누가 전방을 지키냐며 야전을 고수했던 참군인 이었다.
필자는 매년 2월14일이 되면 대전 현충원을 찾아 군생활을 하면서 한중령이 못한 것을 내가 대신해서 군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었다. 이러한 선의경쟁(善意競爭) 파트너가 있어 좀더 최선을 다할 수 있었고 그 덕에 능력도 부족한 필자가 장성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생각도 해본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면서, 선의경쟁의 파트너로 나를 책찍질하게 만든 故 한황진중령을 비롯한 옛 전우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책무를 다하는 수많은 군인들처럼 대의를 위한 희생의 길을 다시 한번 더 조용히 다짐해 본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세계 최초로 개발된 국산무기이지만 결함이 발생해 사업 중단까지 거론되는 K11 복합형 소총. 특히 한국방위산업을 육성해야할 방사청이 사업중단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사진제공=S&T모티브]
방사청 관료주의, 1100여억 원 투자된 K11 복합형 소총 사업 백지화?
“결함 보완해 사업 성공시키려는 ‘방산 애국주의’ 필요” 주장 제기돼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세계 최초로 개발된 국산무기인 K11 복합형 소총에 대해 방위사업청(이하 방사청)이 일부 결함을 이유로 ‘사업 중단’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져 국방과학연구소와 일부 방산 관계자 및 방산 전문가들 사이에서 파란이 일고 있다. 방위산업을 육성하려면 국내 연구개발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함을 보완해서 사업을 성공시키려는 ‘방산 애국주의’가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책임만 모면하려는 방사청의 관료주의로 인해 한국 방위산업의 역량이 후퇴될 위험에 놓였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9일 국회 국방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방부와 방사청을 통해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방사청은 지난 4월 2일 합참, 육군, 국방과학연구소 등과 함께 실시한 K11 복합형소총 향후 사업추진 방안 검토 실무회의에서 관계기관에 ‘사업 중단’이 타당하다고 건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일부 기관의 반대로 해당 실무회의는 “향후 사업추진 방안은 기관별 의견으로 합의 도출이 제한돼 실시 예정인 감사원 감사 결과와 연계하여 최종 사업관리분과위원회에서 결정 필요”라는 내용으로 의결됐다고 전해진다. K11은 5.56mm 소총탄과 20mm 공중폭발탄을 병행 사격할 수 있는 복합형 소총으로 국방과학연구소가 주관해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했다. 엄폐물 뒤에 숨어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K201유탄발사기(K2 소총에 장착)를 대체할 용도로 관심을 끌었고, 10여 개국에서 관심을 보여 수출 전망도 밝은 무기였다. K-11 개발에는 185억 원이 투입돼 2008년 개발이 완료됐으며, 2010년 5월부터 1차 양산에 들어가 2013년 12월까지 914정이 육군 부대에 배치됐다. 그러나 총기폭발사고와 몇몇 결함들이 발생해 현재 창고에 보관 중이며, 결함 개선 과정에도 이런 저런 잡음이 발생해 추가 양산이 중단된 상태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개선이 이루어져 관련 업체들은 거의 보완이 완료됐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양산 중단이 장기화되면서 방사청의 사업 담당자들이 바뀐 데다, 개발 업체가 보완된 내용을 확인하거나 의견 수렴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 중단을 건의한 것으로 보여 그 배경에 의혹이 일고 있다.
MBC, “리튬전지 폭발 위험 새로 발견돼” vs. “새로운 사실 아냐” 반박
게다가, 최근 MBC는 K11을 50회 이상 사격할 경우 리튬전지의 내부 압력 증가로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결함이 지난달 발견됐다면서 배터리 폭발 위험이 새로이 제기된 결함인 것으로 보도해 사업 중단 건의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뉴스투데이가 관련 전문가를 통해 확인한 결과, 전지의 폭발 가능성은 사격통제장치 균열 개선 방안을 찾기 위해 과거에 모의충격시험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 나타난 결함으로 최근에 새롭게 밝혀진 결함은 아니라고 했다. 한편, 또 다른 매체는 방사청이 작성한 실무회의 보고서를 인용해 사격통제장치 균열 문제는 현재 개선 여부 입증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여서 K11의 핵심부품인 사격통제장치 운용 제한 시 K11은 무용지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정홍용 전 국방과학연구소장은 “피크 소재 자체가 미세균열을 100% 없앨 수 없는 기술적 한계를 갖고 있다”면서 “알루미늄·마그네슘 등 다른 소재로 바꾸던지 피크 소재의 내구도 기준을 정해 시험평가한 후 검증되면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방산 전문가들, “결함 발생 질타보다는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즉 정부가 K11 개발을 추진하면서 사격통제장치 케이스 제작용 소재 선택과 소재가 충격에 견디는 내구도 기준을 정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인데, 사격통제장치를 개발한 업체의 기술력이 문제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K11의 양산이 중단된 상태에서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서 방사청의 담당자들이 대부분 바뀌어 진행과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데다, 실제 개선된 내용을 잘 모르면서 일부 언론이 무분별하게 보도해 부정적으로 알려진 부분도 많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국가 예산이 투입됐고 여러모로 개선도 이루어져 정부가 개발업체를 믿고 밀어주면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이란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정치권이나 일부 언론이 문제 위주로 부각해 사업 관계자는 책임 논란에 휩싸이게 되고 개발업체는 경영 위기를 맞게 되며 급기야 해당 사업이 중단될 상황까지 조성되고 있다. 방산 전문가들은 “방위산업은 안보를 지키기 위해 나라가 돈을 들여서라도 육성해야 하는 특수한 분야”라며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결함 발생을 질타하며 사업 중단을 외치기보다 국익을 생각하며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포병단장(연대장) 이·취임식을 거행한 후 열린 다과회에서 어머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어머니를 이·취임식 행사장 가운데 모신 신임 단장의 모습에서 장병들은 효를 몸소 실천하는 지휘관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진제공=김종두 상임이사]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육군참모총장 지시로 ‘효’교육하던 김종두 중령, 경민학원 이사장이 주목
전역 후 홍우준 이사장 요청으로 경민대 ‘효충사관과’ 만들고 학과장 맡아
김종두 이사, 본지와의 인터뷰서 "군 복무시절에도 부모님에 대한 효도가 나의 기쁨"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김종두 정약용 문화교육원 상임이사(65세)는 ‘효(孝)’를 화두로 평생을 살아온 군인이자 학자이다. 그는 영관장교 시절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충·효·예 교육을 담당했고, 이 때 강사로 초빙됐던 홍우준(洪禹俊) 경민학원 이사장의 주목을 받게 된다. 홍 이사장은 교육사업가이자 정치인이었는데, 당시 김 이사가 ‘효’에 대해 강의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언젠가 자신이 설립한 경민대학교에 이와 관련된 학과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김 이사는 전역하자마자 홍 이사장의 요청으로 경민대학교에 효충사관과를 만들고 학과장을 맡아 효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그는 1976년 3사관학교를 졸업(13기)하고 소위로 임관한 후 2009년 대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군 복무 중에도 ‘효’를 생활화했다. 특히 중대장·대대장·연대장 등 지휘관 근무 시 효에 바탕을 둔 장병 인성교육으로 단 한 건의 사고도 없는 단합된 부대를 육성했다. 김 이사는 뉴스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서당을 2년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효’를 배우게 됐다”면서 “이런 배움이 사관생도 시절 그리운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장교로 임관한 이후 부하 장병들이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않도록 안내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참모장교 근무 중 석사학위 받고 ‘효’서적 처음 출간해 진중문고 채택 효교육 전문가로 알려져 육본 충·효·예 교육담당관 직책 맡고 강의해
향학열이 강했던 그는 1993년부터 대구에 위치한 제2군사령부 및 50사단에서 참모장교로 근무하는 동안 영남대 행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1996년 ‘군장병의 효심과 복무 자세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육군 교육사 리더십 교육장교로 근무하게 되면서 틈틈이 모은 자료를 토대로 ‘孝, 자녀들아 부모를 사랑하자!’라는 책을 처음 출간했다. 이 책이 장병들에게 배포되는 국방부의 ‘진중문고’로 채택되면서 김 이사는 ‘군대 효교육 전문가’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육군대학의 리더십 교관으로도 근무하게 됐다. 1998년 김동신 육군참모총장은 부임하자마자 “장교 중에서 충·효 교육 전문가를 찾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성균관 유도회로부터 “군대에서 충·효 교육을 강화하면 좋겠다”는 건의를 받고, 마침 부임 신고를 하는 김 총장에게 ‘충·효 교육 강화’를 주문함에 따라 김 총장이 그런 지시를 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추천된 김 이사는 ‘육군본부 충·효·예 교육담당관’ 직책을 수행하게 됐다. 육군이 충·효 교육을 강화한다는 소식을 들은 ‘충·효 국민운동본부’는 육군에 충·효·예 교육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1999년부터 2002년까지 3년 간 매주 1개기 35명씩 충·효·예 워크숍을 3박 4일간 실시했다. 첫 해는 충·효 국민운동본부에서, 다음 2년간은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이 진행됐다. 중대장부터 연대장까지의 지휘관과 정훈참모 등 장교 25명과 부사관 10명으로 구성된 각 기의 교육은 육사 교장을 역임한 민병돈 예비역 장군이 ‘충·예’ 교육을, 김 이사가 ‘효’ 교육을 담당했다. 이 교육을 받은 간부들이 야전 부대교육에 적용한 결과 자살 및 안전사고가 30% 가까이 줄어드는 효과를 거뒀다고 2003년 4월 17일자 국방일보는 보도했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가치관이 ‘인생 2막’ 펼치는 토대로 작용 김 이사는 충·효·예 워크숍을 담당하던 첫 해인 1999년 군 내부 교육용으로 ‘충·효·예 기본교재’를 집필하여 육군 예산으로 발간했다. 그의 두 번째 책인 셈이다. 이 해에 그는 세 번째 책인 ‘충효예의 리더십’을 출간했고, 3년간 진행된 워크숍이 끝난 이후 2003년 네 번째 책인 ‘엄마, 나 군대 갈래요’를 출간했다. 김 이사는 충·효·예 교육담당관을 하면서 대령으로 진급했고, 연대장 근무를 마친 후 2003년 국방대학교 리더십교수 겸 리더십 센터장에 보직돼 3년간 ‘정약용의 목민 리더십’을 강의했다. 이 시기에 그는 성산효대학원대학교에서 ‘군대 효 교육을 통한 장병 인성 함양과 리더십 역량 강화에 관한 연구’로 한국에서 최초로 ‘효’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효’ 인성교육에도 앞장섰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한국효운동단체 총연합회’ 사무총장을 맡아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효행장려법)’의 제정을 이끌었고, 한국 효문화진흥원 설립에도 깊이 관여했다. 김 이사가 개척한 ‘인생 2막’은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가치관을 토대로 구축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하편에 계속)
▲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한국의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 [사진제공=연합뉴스]
중요한 의사결정과 사업추진 전담해 박정희 전 대통령 ‘오 국보’로 불러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과 연계하려는 대통령 의중 정확히 이해하고 보좌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한국의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기틀을 마련해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오 국보(國寶)’로 불렸던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이 지난달 30일 오전 7시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오원철 제2경제수석비서관은 엔지니어 출신 테크노크라트의 효시로, 박정희 전 대통령 옆에서 9년간 경제수석으로서 1960∼1970년대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담당하며 정책 보좌를 했다.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을 맡아 창원을 비롯해 울산, 온산, 구미, 여수 등 전국 6개 산업기지 조성을 직접 지휘했고, 이를 계기로 창원시 1호 명예시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업무수행 능력이 탁월해서 박 전 대통령이 생전에 그를 ‘오 국보’라고 부를 만큼 아끼고 중용했다. 1974년 한국군 전투력 증강계획인 ‘율곡사업’을 집행할 때 최종 단계에서 박 전 대통령의 결재를 받는 임무도 오 수석이 전담했다. 병기개발 기본 방침, 방위산업 육성, 공업단지 조성, 기능인력 양성, 각종 무기 국산화 사업 등 우리나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사업추진에서 오 수석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안이 없었다. 오 수석은 1928년 황해도 풍천 태생으로 1951년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했고, 1957년 공군 소령으로 전역했다. 시발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의 공장장을 지내다가 1961년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박 전 대통령과 연을 맺었고, 상공부 과장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공업 제1국장을 거쳐 상공부 차관보로 근무하다가 1971년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고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을 역임했다.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과 연계해 육성하려는 박 전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이해하고 보좌해 ‘율곡수석’으로 통하기도 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 지시로 '원자 핵연료 개발계획'이라는 비밀 계획도 수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오일쇼크' 때 중동 진출을 기획했다. 행정수도 이전도 맡아서 추진했지만 박 전 대통령 서거와 함께 미완으로 끝났다. 1980년 신군부의 쿠데타로 전두환 정부가 들어선 후 국방과학연구소 축소 등 방위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권력형 축재 혐의로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전두환 정부의 감시와 통제로 10여 년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90년대 들어서야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 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고문 등을 지냈다. 그는 이 때 7권짜리 대작 '한국형 경제건설'과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등의 책을 펴내고 박정희 일대기를 정리했다. 2009년엔 서거 30주년을 맞아 영문 자서전 '더 코리아 스토리'를 출간하는 등 저술활동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