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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서울대·한국무인이동체연구조합과 드론봇 발전 위한 업무협약 체결
-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육군과 서울대학교, 한국무인이동체연구조합이 드론봇 및 지능형 무인이동체 발전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육군교육사령부(교육사) 드론봇전투발전센터는 지난 9일 서울대학교 지능형 무인이동체 연구센터, 한국무인이동체연구조합과 컨소시엄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을 계기로 3개 기관은 2027년까지 약 300억 원의 예산을 투자해 육군참모총장배 드론봇챌린지대회 개최, 무인이동체 혁신 인재 양성 사업과 연계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에 힘을 모을 예정이다. 또한 지능형 무인이동체 공동연구 및 학술교류, 무인이동체 인재 양성, 드론봇 산업 발전을 위한 행사 개최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협력도 강화할 방침이다. 이날 협약식에는 교육사 서정원(군무이사관) 드론봇전투발전센터장, 서울대학교 김규홍 지능형 무인이동체 연구센터장, 한국무인이동체연구조합 최명진 이사장 등 각 기관의 주요 관계관이 참석했다. 서 드론봇전투발전센터장은 “교육사는 지능형 무인이동체 분야를 선도하는 양 기관과 긴밀히 협력하여 드론봇전투체계 조기 전력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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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서울대·한국무인이동체연구조합과 드론봇 발전 위한 업무협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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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86)]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장렬하게 순직한 솔선수범의 표상 고(故) 강병식 대령(중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뢰사고 발생 당시 인접 사단에서 GOP철책대대장을 했던 장광일 예비역 중장(육사31기, 전 국방부 정책실장)은 2020년 12월 “고(故) 강병식 동기의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수상을 기리며”라는 기고문을 국방일보에 게재했다. 그는 기고문을 통해 “1988년 5월4일 오전에 춘천병원에서 신검을 받았는데 강병식 중령을 포함한 많은 동기생이 대대장직을 수행하다 모처럼 만나 점심을 함께 했다”고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지만 책임감 투철한 강병식 중령은 부하들의 GP 지뢰매설 작업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신검이 끝나자 마자 혼자 부대로 복귀한 후 바로 지뢰매설 현장으로 갔다. 그 현장에서 강풍으로 경계보조물이 전도돼 지뢰가 터지는 순간 부하들에게 ‘엎드려!’라는 명령을 내리고 본인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했다. 살신성인의 희생정신과 참군인의 진면목이 아니었다면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라며 그날 저녁에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눈물을 닦았다고 했다. 이어 장 장군은 故 강병식 동기가 뒤늦게라도 이번의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수상 등으로 재평가를 받을 수 있게 돼 다행이고 가슴이 벅차다는 내용의 감회를 기고했다. 한편 해당부대인 15사단에서는 故 강 대령이 주로 활동했던 승암고개에 추모공원과 동상을 헌정했으며, 우수 대대장에게 ‘강병식 상’을 수여하여 숭고한 뜻을 기리고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또한 사고 이듬해 故 강 대령의 모교인 이리고등학교는 교문 옆에 ‘故 강병식 대령 추념비’를 세워 감수성 많은 고등학생들의 국가관과 사생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더불어 4년간 국가관과 사생관을 길렀고, 아직도 그의 숨결이 남아 있는 육사 화랑대의 어딘가에도 그 순결하고 고귀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강병식 정신을 이어갈 기념물을 건립하기 위해 육사, 총동창회 그리고 31동기회가 공감대를 갖고 대안을 찾고있다. ■ 동생인 강병옥 예비역 대령, “형의 투철했던 희생정신, 잊지 말아줬으면…” 故 강 대령의 동생이자 당시 20사단에서 포대장(대위)직을 수행하던 강병옥 대령은 “큰형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이미 형은 싸늘하게 식은 상태였습니다. 형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용감했던 형을 군인인 내 손으로 수습해 보내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직접 염을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염을 마치고 나오니 군의관이 ‘형님의 유품입니다’라며 작은 수첩을 건넸는데 형의 심장 바로 옆, 상의 주머니에 있었던 수첩이었다. 가슴은 쓰렸지만 수첩을 받으며, “형을 보낸 마지막 순간에 울지는 않았지만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고, 형이 못다 한 임무는 내가 이어 받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또한 형의 순직이 군 생활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후에도 큰형이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15사단과 故 강병식 대령 가족들의 특별한 인연이 계속된 것은 마치 운명의 장난 같았다. 동생 강 대령은 지난 2006년 15사단 포병연대장으로 취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인 강인한 씨는 2006년 15사단이 속한 2군단 포병여단에서 군 생활을 했다. 둘째 형인 강병용의 아들 강경래는 백부의 이름을 딴 강병식 대대를 나와 조교 생활을 했고, 심지어 故 강병식 대령의 큰아들인 강준혁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15사단에서 군사기본교육을 받았다. 동생 강 대령은 “큰형이 가족들에게 자신이 지켰던 ‘화천 축선’을 대신 지키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라며 “故 강 대령의 영혼이 지켜줘서인지, 가족들은 모두 동부전선을 잘 지켜내고 당당히 전역했다”고 말했다. 그는 15사단 포병연대장 시절, 비포장도로였던 ‘강병식로’를 오르내리며 큰형에 대한 추억을 다시 떠올리곤 했다며 “사단 장병들이 ‘강병식로’를 통해 나라와 부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형의 희생정신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이 매우 뜻 깊고 감사하다”고 강조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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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86)]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장렬하게 순직한 솔선수범의 표상 고(故) 강병식 대령(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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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2)] 기록상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한민국 국군이 창군된 1948년부터 우리 군은 큰 위기를 맞았다. 육군 내 좌익으로 활동하던 강태무, 표무원이 예하 2대대 병력 전체를 이끌고 월북했고, 해군에서도 암약하던 좌익이 동해에서 함정 4척을 동반해 월북한 일도 있었다. 또 9척을 유인 납북시키려다 발각되어 실패하고 저지하는 정장을 살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렇게 뒤숭숭하던 1949년 8월10일 인천항에 정박한 미 군사고문 단장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가 납북된 사실이 밝혀졌다. 6일 뒤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될 예정이던 관함식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이 대담한 선제 도발을 한 것이다. ■ 육·공군 보다 먼저 창설된 해군의 ‘몽금포작전’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 대책회의에서 동해에서는 태극기를 단 함정이, 서해에서는 성조기를 단 보트가 납북된 것에 대해 개탄하며 이응준 육군참모총장과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질책했다. 국가의 정체성과 존립성 마져 흔들리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손 해군참모총장은 북한에 강력한 충격을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침 첩보부대는 북으로 끌려간 보트가 몽금포항에 계류된 사실을 밝혀냈다. 손 총장은 정보감 함명수 소령(해사 1기, 7대 해군총장)을 특공대장으로 하는 20명의 해병대 상륙대원들과 함정 5척으로 구성된 해군전단에게 보트 탈환 및 응징보복작전을 지시했고 전의에 불탄 이들은 전날 밤에 은밀히 인천항을 빠져나왔다. 드디어 8월 17일 새벽 여명 속에 몽금포 해변 윤곽이 들어나자, 특공대원들은 고무보트에 올라 항구로 돌진했다. 예상외의 기습에 놀란 북한군은 해안초소와 부두에 정박한 함정에서 사격을 가함으로서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이 때 적탄이 특공대장 함소령의 양쪽 허벅지를 관통했고, 뭍 근처까지 도달한 고무보트 중 4척은 기관 고장으로 멈췄다. 자칫 전멸될 위기였다. 이것을 목격한 공정식 소령(해사 1기, 6대 해병대사령관)이 통영(JMS-302)함을 지휘해 적진 속에서 포로가 될 상황에 처한 함소령과 상륙대원들을 구출한 후, 37미리 포로 북한 함정 4척을 대파 격침시켰다. 승조원들은 육박전을 벌여 북한군 120명을 사살하고 5명(장교1, 병4명)을 생포한 뒤 35톤급 제 18호 경비정까지 나포해 남하했다. 비록 목표했던 보트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예상외의 큰 전과를 거두게 됐다. ‘몽금포작전’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우리 국민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단호하게 응징한 작전으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당시 우리 해군 전체 병력은 3000명으로 15분의 1인 200명이 출전했고, 특공대원을 포함한 참전자 중 1명만 부상을 입었다. ■ 70여년 전, 대북 응징보복작전을 성공적 시행한 선배들의 혁혁한 전통을 계승한 강군되길 하지만 이 작전 후 군은 곤욕을 치렀다. 미국이 무초 대사를 통해 ‘해군의 38선 월북작전’에 항의했고, 김일성은 “6.25남침전쟁 발원은 몽금포 작전”이라며 선전과 선동전을 폈다. 이 주장에 중국과 소련이 가세하며 북침설이 나돌았으나, 1990년대 초 러시아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북침설은 존립 근거를 잃었다. 그런데도 우리 군은 ‘몽금포 작전’을 인정하는데 60년 이상 허비하다가, 전 합참의장인 최윤희 제독이 2012년 6월 해군참모총장 재직 시 해군본부에서 발행한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이란 책에서 공식 기록으로 등재돼 구전되어 오던 이 혁혁한 전공이 빛을 보게 되었다. 작금의 미사일 발사 등 북의 군사적 위협이 가중되는 가운데 우리 군은 성군기 문란, 하극상, 갑질 논란 등의 문제로 신뢰가 떨어지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근본 임무를 망각하지 말고, 내외부로부터 있을 불순한 세력에 의한 테러나 북한의 무력 도발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이미 70여년 전에 도발 원점과 지원세력을 과감히 타격하는 대북 응징보복작전을 성공적으로 시행한 선배들의 혁혁한 전통을 이어받아 강군으로 거듭날 수 있고, 국민들에게는 신뢰의 카타르시스를 되찾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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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2)] 기록상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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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건영 前 합참 전력기획부장, 국방기술품질원 제24대 원장 취임
-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허건영 前 합참 전력기획부장(예비역 육군소장, 육사 44기)이 8일 국방기술품질원 제24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허건영 신임 원장은 취임사에서 "국방기술품질원은 새로운 도전과 기회에 직면해 있다"며 "국방과학기술과 방위산업의 발전 속도를 반영한 미래 비전을 설계하고 마스터플랜을 마련하여 국방기술기획과 품질관리 분야의 선도자 역할을 수행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허 신임 원장은 경남 거제 출신으로 마산중앙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항공병과로 임관했다. 군 복무 중 한미연합사 지식정보처장·지휘통제실장, 합참 화력항공전력과장, 육군항공작전사령관, 합참 전력기획부장 등을 지냈으며 올해 초 전역했다. 허 원장은 헬기 조종사로 육군항공작전사령관을 거친 후 임기제 진급자가 통상 전역하던 관례와는 달리 합참 전력기획부장에 보직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날 취임식은 코로나19로 인해 부·센터장 등 최소 인원의 주요직위자들만 참석하고, 전 직원들은 영상을 통해 시청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방기술품질원은 국방기술기획, 군수품 품질관리 등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어 국내 방위산업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기관이며, 원장의 임기는 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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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건영 前 합참 전력기획부장, 국방기술품질원 제24대 원장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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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언스, 이스라엘에 네트워크 접근 제어 솔루션 공급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지니언스는 이스라엘 종합건설사 'AZ 마케팅'에 네트워크 접근 제어 솔루션(NAC) '지니안 NAC'를 공급했다고 8일 밝혔다. 지니언스 관계자는 "AZ 마케팅은 NAC 솔루션을 도입함에 있어 제품의 구조, 기능, UI 등을 면밀히 검토했다. 지니언스를 포함해 글로벌 상위권 업체의 제품을 꼼꼼히 살폈다"며 "특히 구축형·매니지드 서비스·클라우드 등 고객의 환경에 적합한 서비스 포트폴리오 제공, 제품의 손쉬운 설치와 유지보수, 고객 중심의 UI, IT·OT에 특화된 단말 식별 및 탐지 부분에서 지니언스가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수주 의미를 설명했다. 지니언스의 NAC 솔루션 '지니안 NAC'는 단말의 가시성 확보를 통해 위협에 대응하고 내부 네트워크의 보안관리를 완성할 수 있는 제품이다. 어떤 네트워크 환경에서도 구조 변경 없이 작동되는 네트워크 센서로 연결된 모든 기기들의 정보를 자동으로 탐지, 식별, 분류한다. 네트워크 접근계층에서 연결된 모든 기기들을 실시간 모니터하며, 보안취약 및 사이버위협에 노출된 기기들을 적시적소에 관리 할 수 있다. 이 차세대 기능은 제로 트러스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기반이 될 수 있다. 김계연 지니언스 CTO·미국법인장은 "사이버 보안 산업 자체가 국가 기반산업인 이스라엘에 지니언스의 차세대 NAC기술과 차별화된 구독 서비스를 강점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며 "미국·유럽·중동에 이어 이스라엘까지 레퍼런스를 확충해 나감에 있어 제품의 투명성과 손쉬운 서비스 접근성에서 고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차세대 NAC의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지니안 NAC가 글로벌 표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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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언스, 이스라엘에 네트워크 접근 제어 솔루션 공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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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콘, 고객 맞춤형 마이데이터 상품으로 시장 선점 가속화 나서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비즈니스 데이터 제공 전문 기업 쿠콘이 마이데이터 인프라 구축 어려움을 해소할 고객 맞춤형 상품으로 마이데이터 시장 선점에 나선다고 8일 밝혔다. 마이데이터 시행으로 마이데이터 수집 시스템, 개인 신용정보 전송 시스템 구축이 필요해지면서 관련 기업·기관은 마이데이터 시스템 구축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 이외에도 API 개발, 운영, 관리 등 마이데이터 산업에서 많은 어려움이 잇따르고 있다. 이에 쿠콘은 마이데이터 산업 관련 기업의 어려움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상품을 선보인다. 쿠콘은 금융 시스템과 오픈 API, 관련 법규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기업들이 마이데이터 인프라를 쉽게 구축하고,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쿠콘은 마이데이터 관련 기업·기관별로 요구하는 인프라가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금융기관, 데이터 보유 기관, 마이데이터 사업 미인가 기관, 마이데이터 사업자를 대상으로 맞춤형 마이데이터 상품을 제공한다. 쿠콘 상품은 △금융 기관이 핀테크 서비스와 연계해 금융 상품 판매 채널을 확대할 수 있는 ‘마이데이터 F-Info’ △데이터 보유 기관이 개인신용정보 전송 요구권에 대응할 수 있는 오픈 API 플랫폼 ‘마이데이터 Open Box’ △쿠콘과 제휴해 마이데이터 서비스를 도입·운영할 수 있는 자산관리 서비스 ‘마이데이터 Plug-In’ △마이데이터 사업자가 450여 데이터 보유 기관을 한 번에 연결하고 통합 운영 관리할 수 있는 ‘마이데이터 All-in-One’ 총 네 가지다. 마이데이터 관련 기업이 쿠콘의 마이데이터 상품을 도입하면 시스템 개발 및 구축 비용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쿠콘이 제공하는 3000만건의 빅데이터도 활용할 수 있어 서비스 고도화가 쉽다. 올 1월 금융위원회를 통해 마이데이터 사업자로 선정된 쿠콘은 국내 최대 API 플랫폼 ‘쿠콘닷넷’에 200여 종의 API를 제공하고 있다. 금융·공공·의료·물류·유통·통신 등 국내 500여 개 기관과 해외 40여 개국, 2000여 개 기관의 데이터를 수집·연결한다. 한편, 쿠콘은 국내 모든 금융 기관과 전용선으로 데이터를 직접 연결하고, 자체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해 해외 데이터까지 제공하는 국내 유일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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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콘, 고객 맞춤형 마이데이터 상품으로 시장 선점 가속화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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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카막 네트워크-페이코인 공동 발전 위한 MOU 체결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토카막 네트워크의 톤(TON)과 다날핀테크의 페이코인(PCI)을 맞교환해 페이코인 앱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토카막 네트워크는 지난 7일 블록체인 기반 결제 플랫폼 다날핀테크와 공동 발전을 위한 전략적 업무 협약(MOU)를 체결했다고 8일 밝혔다. 온디맨드 레이어 2 플랫폼 토카막 네트워크는 이더리움과 같은 수준의 탈중앙성과 안전성을 보장하면서 높은 수준의 확장성을 제공하는 블록체인 구축 플랫폼이다. 특히 디앱 니즈에 맞춘 플라즈마 EVM, zk롤업 등 여러 레이어 2 솔루션을 통해 손쉽게 맞춤 블록체인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함께 최근에는 탈중앙 의사결정 기구인 토카막 다오 베타를 출시하기도 했다. 다날핀테크는 국내 7만개 이상의 온·오프라인 제휴점에서 가상자산인 페이코인(PCI)으로 결제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최근 사용자 수 130만 명을 돌파했으며 유니온페이와 제휴를 통해 한국, 중국 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 유니온페이 가맹점에서 결제할 수 있는 ‘다날-유니온페이 모바일 선불카드’를 출시한 바 있다. 앞으로 비트코인, 페이코인 등을 비롯한 가상자산을 결제, 금융, 여행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가상자산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 업무 협약은 토카막 네트워크의 톤과 페이코인을 맞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다. 이를 통해 톤 보유자는 앞으로 페이코인 앱 내 맞교환을 통해 결제 및 토카막 스테이킹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이와 함께 다날핀테크는 토카막 네트워크의 스테이킹 파트너로 참여해 토카막 네트워크의 검증에 참여할 예정이다. 정순형 토카막 네트워크 파운더는 “실생활과 밀접한 실물 경제와 광범위한 제휴점을 보유한 페이코인의 인프라와 맞물려 톤의 범용성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용택 다날핀테크 대표는 “이번 제휴를 통해 페이코인은 결제를 뛰어넘어 가상자산 기반의 금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 페이코인과 토카막 네트워크가 연동되면 양 사 생태계가 확대되고 페이코인과 톤 서비스 영역도 다양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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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카막 네트워크-페이코인 공동 발전 위한 MOU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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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케시 연구행정통합시스템 rERP, 대학교 산학협력단 연구 환경 혁신 지원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웹케시가 4개 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연구행정통합시스템(이하 rERP) 구축을 완료했다. 웹케시가 제공하는 rERP(연구행정통합시스템)는 연구 관리에서 △회계 △인사 급여 △자산 관리 △연구 성과 △지식 재산권까지 산학협력단의 전체 연구 행정 업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통합한 서비스다. 현재 전국 70여곳 산학협력단과 20여곳 대학병원이 웹케시 rERP를 이용하고 있으며, 가입 기관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 국립한경대학교, 건양대학교, 서경대학교, 동명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웹케시 rERP 구축을 완료했다. rERP는 시스템에서 전자영수증의 확인 및 전자 결재, 증빙 첨부 등 모든 연구비 처리 업무를 전자화해 종이 없는 연구 환경 구축을 지원한다. 이는 연구비 처리 절차를 간소화해 2021년부터 시행된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하 혁신법)의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혁신법은 부처별로 다르게 적용했던 연구 개발 관리 규정을 체계화해 연구자의 행정 부담을 줄이고 연구에만 전념할 환경을 조성하자는 취지로 시행됐다. 또 rERP는 혁신법 제정에 따라 변경된 규정을 적용해 전담 기관 연계 서비스를 지원한다. 변화하는 환경에 발맞춰 지출결의서 및 증빙 내역을 전담 기관 시스템에 이중 등록할 필요 없이 rERP에서 한번에 처리할 수 있으며, 학생 인건비 통합 관리 계정 연계도 가능하다. 강원주 웹케시 대표는 “rERP는 행정 부담은 낮추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최근 연구 환경 변화를 고려해 적극적으로 대응할 계획”이라며 “웹케시는 더 많은 대학교가 rERP를 통해 연구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확장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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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케시 연구행정통합시스템 rERP, 대학교 산학협력단 연구 환경 혁신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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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1)] 기록상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명박 정부는 연평도 포격도발 발생 12일째 되는 2010년 12월4일 토요일임에도 국방부장관 이취임식을 강행했다. 신임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취임사에서 “앞으로 북한군이 도발할 시 우리 군은 그 원점 뿐만 아니라 지원과 지휘세력까지도 완전 타격하는 철저한 응징보복을 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히며, 예하 부대에는 “현장에서 선조치 후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도발원점 타격을 지시한 결단력이 돋보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미 6ㆍ25남침전쟁 발발전인 1949년 8월17일 우리 해군에 의해 기록상 유일하게 도발원점과 지원세력을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몽금포작전’이 과감하게 시행되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이 2012년 당시 해군총장 최윤희 제독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 국군의 모체가 된 미 군정 조선경비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여 광복이 되자 정치 지도자들과 군사 경력이 있는 청·장년은 되찾은 나라의 주권과 국민을 지키는 군대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귀환이 늦어지면서 8월30일 좌익 세력이 먼저 ‘조선국군준비대’를 조직했고, 국내에 들어와 있던 광복군 계열도 10월29일 ‘대한국군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해 11월 미 군정에 등록된 군사 단체는 무려 30개에 이르렀다. 사설 군사 단체들이 난립하면서 소란이 빚어지자 미 군정은 좌우익의 모든 군사 단체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또한 경찰력만으로 치안과 질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미 군정 헌병사령관 시크 준장은 직접 군대의 창설을 서둘렀다. 이에 따라 1945년 11월13일 미 군정 내에 국방사령부(뒤에 통위부로 명칭을 바꿈)가 출범했다. 국방사령부는 38도선 경비와 해상 경비 업무를 담당했다. 그런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안을 협의하기로 하자 미 군정은 정식 군대 대신 병력 규모 2만5000명의 치안군(조선경비대)을 창설하기로 방침을 바꾸고 각 도에 1개 연대씩 경찰예비대를 편성하는 '뱀부 계획(Bamboo Plan)'을 수립했다. 현재 육군사관학교가 자리 잡은 태릉에서 1946년 1월 15일 조선경비대 1연대 A중대가 창설됐다. 이어 2연대(대전), 3연대(이리), 4연대(광주), 5연대(부산), 6연대(대구), 7연대(청주), 8연대(춘천), 9연대(제주)가 편성됐다. 이에 미 군정은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통위부장에 임시정부 군사부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을 상해까지 가서 모셔왔으며, 광복군의 구조와 계급·명칭 등을 수용하려고 했다. ■ 해군 원조인 손원일 제독의 ‘해방병단(海防兵團)’과 국군 창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육군 못지않게 해군의 역할도 중요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 고(故) 손원일 제독(1909~1980)은 1945년 8월 ‘조국광복에 즈음하여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동지를 구함’이라는 모집광고를 냈다. 결국 육군보다 먼저 장병 200여 명을 모아 11월11일11시에 서울 관훈동 표훈전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 결단식을 열었고 이날은 해군 창설기념일이 되었다. ‘해방병단’의 설립은 1894년 7월15일 조선수군이 폐지된 지 51년 4개월 만에 우리 바다를 스스로 지키는 해군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창립 날짜가 11(十一)월 11(十一)일인 이유는 선비 사(士)가 두 번 겹치는 형태로 해군의 신사도 정신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손 제독은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1946년 1월 현재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창설, 초대교장으로 재직했다. 당시 직접 생도들에게 항해술을 가르치는 등 장교 육성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병단’은 국방사령부로 편입된 후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했다. 1946년 1월 초 태극기가 나부끼는 진해 앞바다에서 첫 해상 훈련을 실시했고, 이듬해에는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군함인 ‘충무공정’을 진수시켜 인천 근해에서 편대 훈련을 했다. 손 제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8년 12월15일 정식으로 발족된 대한민국 해군의 참모총장직을 맡았고,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 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해병대의 필요성을 느껴 1949년 4월15일 해병대도 창설하였다. 한편 1947년 가을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 정부는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면서 조선경비대를 5만명으로 늘린다는 방침을 정했다. 1947년 12월 기존의 9개 연대로 서울·대전·부산에 각각 여단을 창설했고, 이듬해 4월 추가로 2개 여단이 편성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가장 시급한 과제의 하나는 국군 창설이었다. 1948년 8월 16일 이범석 국방장관은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훈령'을 발표하여 "금일로부터 육·해군 각급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성되는 영예를 안게 됐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장병들에게 진충보국(盡忠報國) 정신을 실천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국군조직법이 제정됨에 따라 미 군정의 조선경비대와 해방병단이 모체가 된 조선해안경비대는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8월31일 광복군 선·후배인 유동열 미 군정 통위부장과 이범석 국방장관 사이에 군사 업무가 이양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이 광복군을 잇는다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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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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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1)] 기록상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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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85)]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장렬하게 순직한 솔선수범의 표상 고(故) 강병식 대령(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88년 5월4일 오전, 필자는 사단 작전처 벙커 사무실에서 군단에 보낼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내용은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전방 경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비무장지대(DMZ)와 후방 FEBA지역의 장애물 보강작전 결과보고서였다. 물론 그날 계획된 폐쇄 감시초소(GP)에 대한 지뢰 매설이 성공적으로 끝날 것을 예상했던 보고서였다. 헌데 정신없이 작성하는 중에 고개를 들어보니 오후 지뢰매설 작전에 투입할 예정인 전초대대장 강병식 중령이 사무실 책상 앞에 서서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대대장님 오후에 폐쇄 GP 지뢰매설 작전에 투입하셔야 하는데 어떻게 이 자리에..?”하며 당황하는 필자에게 그는 “오전에 정기 신검(건강검진)이 계획되어 있어 춘천병원으로 가는 중에 걱정하지 말라고 잠깐 들렸어…”라고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책임감 투철한 강 중령은 부하들의 GP 지뢰매설 작업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신검이 끝나자 마자 부대로 복귀 폐쇄 GP의 지뢰매설 작전명령을 작성해 전초대대에 하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중대장 근무시에 지뢰제거 작전을 경험한 필자는 안전에 최대한 유의하고 가장 우수한 소대장을 선발해서 작전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신병교육대장 시절부터 친 형같이 필자를 아껴주던 선배 강병식 중령은 “오후의 작전에는 신검(건강검진)을 마치고 내가 직접 현장에서 지휘할꺼니까 걱정하지마, 안전하게 이상없이 임무 완수할께…”라는 말을 남기고 춘천으로 향했다. 대대장직을 수행하던 강중령의 많은 동기생들이 5월4일 오전에 춘천병원에서 신검을 받았는데 모처럼 만난 그들은 점심을 함께 했다. 그러나 책임감이 투철한 그는 부하들의 GP 지뢰매설 작업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신검이 끝나자 마자 홀로 부대로 복귀했다. ■ “모두 엎드려!”라고 외치던 이 짧은 순간이 16명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신검(건강검진)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 강 중령은 중대장과 함께 소대장 이동진 중위와 14명의 소대원들의 군장 상태를 확인하고 GOP 통문을 통과해 폐쇄 GP가 있는 DMZ안으로 투입했다. 지뢰를 매설할 폐쇄 GP에 도착한 강중령은 주변에 경계병을 배치하고 지뢰운반조와 매설조를 투입하려다가 그의 본능적인 부하를 사랑하는 솔선수범(率先垂範)의 정신이 되살아났다. 전년도 추계진지공사시 도로 낙석 보강작업을 하던 현장의 위험한 낙석 맨 꼭대기에서도 직접 작업했던 강 중령은 위험한 곳에 사랑하는 부하만을 보내기가 싫었다. 그는 “나를 따르라(Follow me!)”는 보병학교의 구호처럼 지뢰운반과 경계는 중대장이 통제하는 부하들에게 맡기고 본인과 소대장 이중위 둘이서 직접 지뢰매설을 하기로 했다. 그날은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날’ 이었다. 아침부터 바람이 몹시 불었다. M14폭풍지뢰, M16대인지뢰 등 매설해야 할 지뢰도 많았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면이 40도 이상 기운 급경사가 나타났다. 전초대대장 강 중령과 소대장 이 중위는 앞에서 뇌관을 제거한 뒤 지뢰를 매설하고 있었고 뒤따르는 중대장과 소대원들은 다음에 매설할 지뢰들을 들고 있었다. 긴장한 가운데 시간이 흐르며 이마엔 땀방울도 맺혔다. 그때 DMZ 골짜기의 텃새바람인 매서운 돌풍이 산꼭대기 폐쇄 GP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돌풍은 GP 철책선 상단 2m위에 걸려 있던 애꿎은 경보 보조물을 건드렸다. 보조물은 땅에 떨어졌고, 매설했던 지뢰 뇌관을 건드렸다. 5월4일 15시15분, 선두에 있던 전초대대장 강 중령과 소대장 이 중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짧은 순간이 이들 16명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그 둘은 소리쳤다. “모두 엎드려!” 모두가 일제히 땅 위에 엎드렸다. 반면에 강 중령과 이 중위, 두 사람이 몸을 던진 곳은 터지는 지뢰 위였다. 전초대대장 강병식 중령은 사랑하는 소대장과 부하들을 위해, 소대장 이동진 중위는 존경하는 대대장을 보호하려고 서로가 덮친 것이다. 강병식 중령은 육군사관생도 시절 수기부 및 응원단장으로 활약하면서, 어떤 어려운 일이든 주저하지 않았고 선두에서 진두지휘를 했다. 1975년 육사 31기로 졸업·임관 후 36사단 소대장을 시작으로 5사단 중대장·교육보좌관·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성격이 올곧고 대쪽 같았으며 부하를 끔찍이 사랑했던 그는 1987년 4월15일 15사단 독수리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해 전초대대장 직을 수행하는 등 상관의 신뢰와 부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또한 부산수산대(현 부경대학교)를 졸업하며 학군단 24기 소위로 임관한 이동진 중위는 전역을 두 달 앞두고 있었고 졸업 전 국내 굴지의 기업 공채에 합격해 부모를 기쁘게 했던 전도가 양양한 25살의 건실한 청년이었다. ■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따르라(Follow me!)”는 솔선수범(率先垂範)의 희생정신 그날 오후 늦은 시각, 사단 사령부는 혼돈에 빠졌다. 헌병대장과 감찰참모가 현장 확인을 위해 출동하고 사단 의무대 헬기장에는 강중령과 이중위의 시신이 도착했는데 처참한 광경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그들은 영안실로 옮겨졌고 사단장실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작전 및 정훈 참모와 참모장이 직접 발표문을 준비했다. 상급부대에서는 아마도 이번 사고에 대한 문책도 예상되었다. 하지만 전초대대장 강 중령의 확고한 사생관과 솔선수범(率先垂範)하는 리더십 그리고 책임감 및 희생정신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사실 인간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한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군인이 임무를 수행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가장 숭고한 가치이지만 전투에 임하는 군인일지라도 죽음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기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평소 사생관에 대한 자세가 확고하지 못하면 행동이 따르지 못할 것이다. 지뢰가 터지는 순간 부하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평소부터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과 “나를 따르라(Follow me!)”는 솔선수범(率先垂範) 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 중령은 생도 시절부터 이순신 장군과 강재구 선배를 흠모하고 표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를 강조한 것은 본인 스스로에게도 결연한 다짐이고 각오였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초연했기에 독전을 통해 13대300승리의 신화를 만들 수 있었다. 부하가 던진 수류탄이 잘못 떨어지자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본인은 장렬하게 순직했던 강재구 소령도 그의 일기에 “부하들을 위해 내 몸을 바쳐서라도 좋은 지휘관이 되리라”고 기록했다. 故 강병식 중령과 이동진 중위는 흠모하고 표상으로 삼았던 이순신 장군과 강재구 선배를 따라 몸을 던져 부하들을 구했다. 같은 달 12일, 이들은 보국훈장 삼일장과 함께 각각 중령에서 대령으로, 중위에서 대위로 추서됐고 다음 달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제1묘역에 나란히 안장됐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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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85)]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장렬하게 순직한 솔선수범의 표상 고(故) 강병식 대령(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