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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욱 국방장관 "전시작전권 전환돼도 사령관 국적 바뀌는 외에 큰 변화 없어"
-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서욱 국방부 장관이 전시작전권이 전환되더라도 사령관 국적이 바뀌는 외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을 언급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22일 보도했다. 또 일본과 군사적 협력관계를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기도 했다. 보도에 따르면 서 장관은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전시작전권 전환이 마무리되더라도 준비태세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발언을 내놓았다. 서 장관은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지위를 바꾸는 것 외에는 현행 연합사령부를 미래 버전의 연합사령부로 옮겨간다는 면에서 볼 때 실제로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의미에서 사령관 국적이 바뀌는 것 외에 준비태세에 있어 우리의 입장은 큰 변화가 없다"며 "그래서 우리의 준비태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또한 일본과 협력에 관해 서 장관은 "한반도를 보호하는 것이 한미동맹에 맞춰져 있으나 우리는 한일 안보협력 또한 가치 있는 자산이라고 본다"며 "그 때문에 우리는 이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와 관련된 이슈들의 문제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한일관계가 국방협력의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본다"며 "우리는 군사적 논의를 지속적으로 갖고 미래에 협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서 장관이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과 만난지 하루 뒤 이뤄졌다. 블룸버그 통신은 바이든 행정부 국무·국방장관의 한국과 일본 방문이 경색된 한일관계 완화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문재인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 정부가 항공모함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 획득을 추진하면서 수년 내 가장 큰 규모의 군사력 증강에 착수했다고 배경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행보는 트럼프 행정부가 중동의 바닷길을 지키는 것과 같은 국제안보 체계에 더 많이 참여하라고 압박한 뒤 나온 것이라며 한국으로서는 해외에 더 많은 힘을 투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 장관은 항공모함 계획과 관련해 "미래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것, 즉 한반도를 위한 범위의 문제이며 우리가 필요하다고 믿는 인도주의 지원 같은 문제들에서 유연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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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욱 국방장관 "전시작전권 전환돼도 사령관 국적 바뀌는 외에 큰 변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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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0)] 6.25 남침전쟁간 혈전의 승부로 휴전선을 결정지은 '백석산 전투'(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9월30일 7사단으로부터 백석산 공격 임무를 인계받은 8사단 10연대는 1대대를 좌, 2대대를 우, 그리고 3대대와 대전차 공격대대를 예비로 편성하고 오전 6시에 공격개시선으로 진출, 공격준비사격 후 1대대를 시작으로 공격했다. 1대대는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 9시경에는 2,3중대가 적진의 일각을 돌파하고 발판을 마련하였으나, 적의 저항에 수류탄 축척거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한편 2대대는 완만한 경사를 타고 올랐으나 백석산 우측 봉우리에 완전히 감제되어 전진이 어려웠다. 이에 연대 수색중대를 우측방에 보내 공격의 활로를 개척하려 했으나 이조차도 막히고 말았다. 다음날 10연대 1대대는 이른 아침의 안개를 끼고 재공격을 했으며, 3시간의 혈전 도중 우군 전투기들이 백석산을 폭격하자 일제히 돌격을 개시해 백석산의 좌측 봉우리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우측의 2대대는 이날도 여전히 백석산 북쪽 1050고지의 적을 제압하지 못해 공격이 저지되었다. 한편 3대대의 공격을 저지한 백석산 우측의 적들이 좌측 봉우리에서 밀려난 적들과 합세해 좌측 봉우리로 역습을 실시하였고, 이에 1대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다시 밀려나고 말았다. 한편 2대대는 자신들로 인해 공세가 지지부진하자 재공격을 감행해 우측 9부 능선에 도달했고, 이에 적 역습부대가 2대대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였다. 2대대가 적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재편성을 마친 1대대는 1중대를 선두로 재돌격해 백석산 주봉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뒤이어 2대대도 5,6중대가 우측 봉우리를 점령해 백석산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점령 과정에서 6중대 공재호 하사가 대공포판을 등에 지고 단신으로 기암절벽을 기어올라 적의 기관총 진지를 수류탄으로 잠재우고, 적 산병호에도 사격을 가해 돌격의 기회를 여는 수훈을 세웠다. 한편 번개부대인 16연대(2005년 필자가 연대장으로 재직)는 중공군과 접전을 벌인 끝에 백석산 서쪽 743, 650고지를, 10월12일에 인근의 977고지를, 10월16일에는 931고지를 점령했다. 이때 적은 10월10일부로 북한군 5군단이 후방으로 철수하고, 그 자리를 원산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공군 20병단 예하 68군이 맡아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백석산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국군 8사단은 오뚝이처럼 적들이 부대교대로 혼란한 틈을 타 백석산 북쪽까지 진출, 10월 15일 748고지, 도피막, 1090고지 서쪽을 점령한 뒤 10월 18일 미 2사단으로부터 1220고지를 인수받아 이곳을 발판으로 최종목표 1090고지 공략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 백석산 전투후, 휴전협정 조인 시까지 당시 전선이 유지되어 현재의 군사분계선으로 결정됨 백선산 전투와 연계된 전투기간은 최초 8월18일부터 시작되어 최종 10월28일까지 였다. 전투기간중의 전과는 적 사살 1,460명, 포로 101명이었으며, 아군 피해는 전사 244명, 부상 1,165명, 실종 14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렇게 우리 국군이 작전지역 일대에서 가장 높은 백석산과 그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결과 중공군의 주 방어선은 최소한 이보다 5∼10㎞ 북쪽의 어은산(1277) 일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우측 단장의 능선과 문등리 계곡을 감제할 수 있어 이후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를 비롯, 국군의 작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중공군이 어은산 방면으로 퇴각하자 10월 25일부터 휴전회담도 재개되어 백석산 일대의 전투가 종료되었고, 이 전선은 휴전협정 조인 시까지 밀고 당기는 접전을 벌이다가 현재의 군사분계선으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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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0)] 6.25 남침전쟁간 혈전의 승부로 휴전선을 결정지은 '백석산 전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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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토닉, 오스트리아 글로벌 인큐베이션 프로그램 선정...유럽 현지 사업 확장 본격화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본투글로벌센터는 멤버사 디토닉이 최근 오스트리아 글로벌 인큐베이터 네트워크(GIN, Global Incubator Network)가 진행하는 ‘2021 봄 고오스트리아(GoAustria Spring 2021) 인큐베이션 프로그램’에 선정됐다고 22일 밝혔다. 본투글로벌센터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기관이다. 유망 기술을 보유한 혁신 기술 기업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유망 기술 전문 기업 발굴 △글로벌 지향 교육·훈련 △해외 진출 가교 역할 △해외 진출 지속 가능 전문 컨설팅 △입주 공간 등을 지원한다. 디토닉은 2019년부터 본투글로벌센터 멤버사로 활동하고 있다. 디토닉은 고오스트리아 인큐베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유럽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찾고, 현지 투자자 및 대기업·스타트업 등 협력 가능성이 있는 잠재 파트너를 물색한다. 기업 맞춤형 일대일 멘토링 프로그램과 워크숍, 세미나 등 전문 교육도 이어진다. 배정된 멘토를 통해서는 해외 진출 전략 및 투자 유치를 위한 비즈니스 모델 수립 등 다양한 컨설팅을 받는다. 고오스트리아 인큐베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글로벌 인큐베이터 네트워크는 오스트리아 스타트업과 아시아 스타트업을 연결해주는 오스트리아 정부 주도의 네트워크 기관이다. 2016년부터 매년 한국, 홍콩, 이스라엘, 일본, 싱가포르 등에서 10개 스타트업을 선정해 인큐베이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디토닉은 시간과 공간 데이터를 다루는 빅데이터 전문 기업이다. 2014년 현대자동차 사내 벤처 기업에서 분사했다. 시공간 데이터를 처리하는데 필요한 기술 개발에 성공, 현재 스마트시티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디토닉이 개발한 지오하이커(Geo-Hiker)는 시공간 데이터의 빠른 처리 및 분석을 돕는 일종의 가속 엔진 같은 기술이다. 데이터의 시간과 공간적 특징에 따라 최상의 인덱싱 알고리즘이 적용되는 게 특징이다. 아울러 더 신속한 데이터 처리를 위해 노드 간 데이터 분산 최적화 기술을 탑재해 데이터 처리 성능을 극대화했다. 해당 기술은 현대자동차·도로교통공단 등에 도입됐으며, 부산 스마트시티 국가시범도시(에코델타) 사업과 부천시 스마트챌린지 사업, 자율주행차량과 같은 미래 모빌리티 사업, 스마트 팩토리, 스마트팜 사업 등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특히 디토닉은 K-방역 성과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코로나19 역학조사지원시스템의 핵심으로 평가받는 데이터 처리에 직접 개발한 시공간 빅데이터 기술을 제공, K-방역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전용주 디토닉 대표는 “본투글로벌센터의 전방위적 지원과 지난해 아시아-태평양 기업으로 유일하게 선정된 스페인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스웨덴 KSC(Korea Startup Center)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그리고 이번에 선정된 오스트리아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의 지원을 통해 올해 안에 설립될 유럽 지사를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게 됐다”며 “상반기 설립 예정인 동남아 현지 개발 센터, 세일즈 센터와 함께 글로벌 사업화를 빠르게 추진, 디토닉의 기술력을 널리 알리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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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토닉, 오스트리아 글로벌 인큐베이션 프로그램 선정...유럽 현지 사업 확장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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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76)] 직업군인 리더의 자질은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 조직관리는 ‘인자무적(仁者無敵)’ (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인접 부대장인 이진삼 군단장(육사 15기) 주관으로 오후 2시에 시작된 대침투작전 및 진지공사 시범은 당시 상황에 적절하게 필요한 내용으로 잘 진행되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나오는 장수의 5개 덕목인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이 시범을 주관한 이진삼 장군과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에게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비교하며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 위엄 있고 저돌적인 용장(勇將)인 이진삼 군단장 특히 아군 진지를 구축할 때 보기 좋게 전시효과적으로 만드는 것 보다는 침투한 적들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위치에 위장을 잘하여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실물 시범을 보인 것은 매우 유익했다. 또한 야간에 접근하는 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진지 사계 청소하면서 확보된 나무들을 모아 진지 앞 적의 접근로에 원두막식의 조명목을 설치하는 것은 모든 예하부대의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시범 준비부대의 연구개선안 발표와 신랄(辛辣)한 토의가 끝나자, 왜소하지만 당차 보이던 이진삼 군단장은 채양이 유난히도 큰 전투모에 규격보다 큰 삼성별을 달고 위엄 있게 지휘봉을 휘두르며 훈시를 시작했다. 이 장군은 609특공대장을 지낸 대위시절 응징보복작전으로 3번에 걸쳐 북으로 침투해 들어가 35명을 사살했고, 남파된 무장공비들도 본인이 포복으로 접근해 수류탄을 투척하여 척살시킨 이야기로 말문을 열어 무려 두시간 넘도록 자신의 무용담을 쏟아 냈다. 이미 석양이 들기 시작하여 다음 순서인 현장견학 시간이 촉박하게 되었다. 헌데 자신의 말에 도취된 이장군은 사단장 시절 적들이 잘 보이는 가칠봉 정상에 수영장을 만들어 적들을 현혹시키게 만들었고, 심지어 테니스 게임에서 패배한 적도 없다며 본인의 태권도 7단 실력을 과시하듯 간부들과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앞차기와 옆차기 시범도 보였다. 거품을 물며 열변을 토하던 이 군단장은 석양이 서쪽산에 걸리자 훈시를 부랴부랴 끝냈다. 물론 날이 저물어 먼 길을 이동하여 복귀할 참가자들은 현장견학을 생략한 채 출발했고, 시범을 준비한 부대원들은 훈시를 마친 이진삼 군단장이 칭찬하자 성공적인 시범이었다고 모두 자축하는 모습이었다. ■ 현재와 미래의 직업군 리더들이 조직관리 위해 꼭 필요한 인자무적(仁者無敵) 대침투작전 및 진지공사 시범에서 용장(勇將)으로서 4차원같으면서도 특별한 인상을 남겨준 이진삼 군단장은 하나회로 노태우 정부에서 승승장구하여 육군 참모총장을 거쳐 체육부 장관을 역임 후 18대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그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본인은 군인출신으로 제대후까지도 차고 있는 군번줄을 보여주면서 수감 중인 현역군인 간부들의 군번줄을 확인하며 군인의 기본자세를 강조하는 엄장(嚴將)이라는 것을 과시했고 ‘군번줄 의원’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반면에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취임사에서 “적의 숨통을 끊을 수 있게 준비하라”, “지휘세력을 타격하겠다.”, “개성공단 인질 억류 시 군사조치를 취하겠다”라면서도, “본인은 전쟁주의자가 아니다. 전쟁 예방 주의자이며 전쟁을 하고 싶지 않지만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강한 의지를 나타내며 용장(勇將)임과 동시에 엄장(嚴將)임을 밝혔다. 당시에 북한은 그를 한국사회에서 정치적·대중적·심리적으로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김관진 장관 같은 전쟁주의자가 있는 한 평화협상은 불가능하다”는 억지 논리를 내세우며 임진왜란 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 장군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또한 김 장관이 사단 작전참모 재직 시, 무장탈영병 발생하자 본인이 필자의 자리에 앉아 GOP 철책 경계를 강화시키고 봉쇄선을 3단계로 형성하여 도주로를 차단하라는 단편명령 초안을 직접 작성했으며, 그 초안을 필자에게 전해주며 사단장 결재 후 전문으로 하달하라고 신속하고도 현명하게 처리하는 등의 지장(智將)이었다. 그리고 을지연습 상황회의 브리핑에서도 순발력으로 부하들의 실수를 커버하며 순간의 위기를 넘기는 위기 극복 및 용병을 잘하는 솔연(率然)같은 리더로서, 상관에게는 신뢰와 인정을 받고 부하에게는 존경받는 신장(信將)이면서 인장(仁將)인 작전참모였다. 손자는 ‘장자, 지신인용엄(將者, 智信仁勇嚴)’이라며 장수의 5덕목을 강조했다. 허나 앞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리더의 자질을 중에 첫번째 지혜(智慧)가 가장 중요하고, 믿음(信)과 용맹(勇), 엄격(嚴)도 훌륭한 덕목이지만, 세번째인 ‘인(仁)’이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는 매우 필요하다. 맹자가 말한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 사람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라는 명언이 가슴 속 깊이 스며들며, 남북 및 대미 등 국내외 관계를 고려한 현재와 미래의 직업군인 뿐만 아니라 일반사회 조직의 리더들에게도 산 교훈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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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76)] 직업군인 리더의 자질은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 조직관리는 ‘인자무적(仁者無敵)’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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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포인트, ‘클라우드가드 애플리케이션 시큐리티(AppSec)’ 출시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체크포인트 소프트웨어 테크놀로지스는 웹 애플리케이션 및 API 보호 솔루션 ‘클라우드가드(CloudGuard) 애플리케이션 시큐리티(AppSec)’를 출시했다. 클라우드가드 애플리케이션 시큐리티는 클라우드 네이티브 애플리케이션에 보안을 적용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웹 애플리케이션 방화벽(WAF)과 관련해 오탐으로 인해 무분별하게 발생하는 알람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또한 상황인지 인공지능(AI)을 사용함으로써 클라우드 애플리케이션에 대한 공격의 영향을 방지하고, 클라우드의 속도와 민첩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상황인지 AI 엔진은 애플리케이션의 변화에 계속해서 적응되며, 보안 연속성 보장을 위해 자체적으로 업데이트한다. 클라우드가드 애플리케이션 시큐리티는 API를 보호하는 기능도 지원한다. 민감한 데이터를 노출시키고, 명령어를 삽입하거나 API 키를 추출하기 위해 API를 이용하는 범죄자들을 자동으로 차단한다. TJ고넨 체크포인트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제품라인 책임자는 "웹 애플리케이션이 갈수록 범죄자들의 표적이 되고 있지만 기존 WAF는 오늘날의 클라우드 앱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지속적인 수동 관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조직은 공격 및 대가가 침해 위협에 노출된다"며 "클라우드가드 애플리케이션 시큐리티는 모든 클라우드 환경 또는 인프라에서 지속적인 관리가 거의 필요없이 애플리케이션 보안의 모든 측면을 자동화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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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포인트, ‘클라우드가드 애플리케이션 시큐리티(AppSec)’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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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알토 네트웍스, 비전테크와 손잡고 공공 조달 시장 공략 강화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팔로알토 네트웍스 코리아가 정보보안 및 클라우드 전문 기업 비전테크와 공공총판 계약을 체결하고, 공공 조달 시장 공략 강화에 나선다. 팔로알토 네트웍스 코리아는 “조달청 나라장터 종합쇼핑몰에 ‘방화벽장치’ 다수공급계약물품으로 PA-3220과 PA-850 방화벽을 등록했다”고 설명했다. 이 솔루션들은 애플리케이션 레이어까지 상시 관리해 전체 트래픽을 제어하고, 공공기관에서 사용중인 인증 솔루션과 연동해 디바이스 위치와 상관없이 사용자 또는 조직 별로 보안정책을 부여한다. 원격근무 또는 무선네트워크 업무 환경에서 사이버 침해 및 위협을 차단한다. 팔로알토 네트웍스 차세대 방화벽은 App-ID(애플리케이션 레이어 제어), User-ID(인증시스템 연동을 통한 사용자별 제어), DLP(데이터 유출 전송 탐지 및 차단) 등 차별화된 기능을 이용하여 기관의 관문 트래픽(North-South), 내부 트래픽(East-West) 전체에 대해 정밀한 제어가 가능하다. 사용자 인증 시스템과의 연동돼 스마트 업무 환경 무선망 보안에 최적이며, 국내 및 해외 사이버 공격으로부터 공공기관이 보유한 중요한 내부정보를 보호하는 보안 솔루션이다. 비전테크 또한 이번 계약체결로 팔로알토 네트웍스 방화벽 제품의 공공부문 확대에 주력할 계획이다. 이승우 비전테크 대표는 “기존 협력 관계에 있는 지역별 조달 파트너사와 팔로알토 네트웍스 코리아간의 공고한 비즈니스 협력 관계를 정립하고, 추가적으로 지역별 보안사업에 역량이 있는 파트너사를 지속적으로 발굴함으로써 사업 역량을 극대화해 나갈 예정이다”고 밝혔다. 이희만 팔로알토 네트웍스 코리아 대표는 “이제 공공 기관들이 보안에 취약했던 기존의 전통적인 방화벽을 조달청 나라장터를 통해 팔로알토 네트웍스의 차세대 방화벽으로 쉽게 구매하여 설치해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한 사이버 공격 및 암호화 기법을 통한 해킹 공격 등을 파악하고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기관의 대국민 서비스용 콘텐츠, 개인 정보 그리고 기밀 정보 보안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장중심 협업지원 스마트 업무 환경 구현 보안 무선망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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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알토 네트웍스, 비전테크와 손잡고 공공 조달 시장 공략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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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39) 6.25 남침전쟁간 혈전의 승부로 휴전선을 결정지은 '백석산 전투'(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인 6.25 남침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71주년이다.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3년1개월간 벌어진 전쟁에서는 유엔군과 한국군 18만여명이 전사하고 북한군 52만여명, 중공군 90만여명이 숨진 것으로 기록됐다. 남과 북이 격렬하게 맞붙었던 고지전지역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휴전선을 사이에 놓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 최근 김여정의 대북전단 관련 격한 발언으로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오늘의 휴전선을 결정하게 된 마지막 전투인 양구 백석산지구 전투를 통해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6.25전쟁을 되새겨 본다. ■ ‘백석산 전투’ 전초전인 ‘송현리-송정동 전투’, 7사단이 북한군과 치열한 고지전 백석산 전투는 1951년 9월24일부터 10월1일까지 국군 7사단과 8사단이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와 연계해 강원도 양구군 백석산의 북한군 32사단, 12사단을 격퇴하기 위해 벌인 고지전이다. 1951년 8월 초 7사단은 양구 서북방 파로호 남쪽 캔사스선과 그 북측 신 캔사스선을, 5, 8연대로, 3연대는 그 북쪽 전초선(Badge Line)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북쪽 백석산 일대엔 북한 5군단 예하 32사단과 12사단이 있었고, 32사단은 백석산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883고지-901고지-554고지를 요새화한 뒤 남쪽을 향해 정찰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8월 14일, 미 8군사령관은 국군 1군단 및 미 10군단의 합동으로 양구군 해안분지 동쪽 낚시바늘 형상의 능선(J Ridge)을 탈취, 해안분지 공격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포박작전(Operation Creeper)’을 하달했고, 이에 미 10군단장은 16일 국군 5사단에게 가칠봉 일대를, 미 2사단에게는 단장의 능선 공격임무를 부여했다. 그리고 국군 7사단에겐 작전지역 동쪽의 미 2사단이 단장의 능선 남쪽에 위치한 피의 능선에서 전투를 벌이자, 8월18일 적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전투지경선 너머 피의 능선 서측 554고지 공격임무를 부여했다. 이때 7사단은 554고지 공격에 앞서 인근의 883고지와 901고지를 공격하였다. 3연대는 883고지를 공격하여 8월 18일에 탈취하였지만 북괴군의 역습에 다시 철수했다. 8월 20일 3연대는 밀리고 밀리는 격전 끝에 901고지와 883고지를 점령하였고, 5연대는 양갈래고지를 점령하였다가 8월 21일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했다. 8월 25일 8연대와 전차공격대대가 536고지를 탈취했고 이어 8월 31일 901고지를 9월 2일에는 554고지를 탈환했다. 마침내 3연대가 9월18일 883고지를 완전히 점령함으로써 ‘송현리-송정동 전투’는 막을 내렸다. 7사단은 적의 고지들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기상 악화나 동쪽에서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가 연이어 진행중인 탓에 항공지원이나 포병지원을 효과적으로 받지 못하여 병력이 70% 수준으로 감소해 전멸 상태가 되었고, 지원화기들도 고장나 8사단과 바로 임무교대해야 할 정도로 부대의 재정비가 시급히 요망되었다. 그러나 미 10군단장 Clovis E. Byers 소장은 동쪽에서 병행중인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적이 완강하게 저항하자 적이 백석산을 확보하고 있는 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7사단에게 교대준비를 미루고 끝까지 백석산(1142 고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 7사단은 ‘백석산 전투’ 1차전(9.24~27)으로 미2사단 ‘단장의 능선 전투’에 기여 9월24일 당시 7사단은 892, 743, 883, 901 고지를 지키기 위해 좌로부터 5, 8, 3연대 순으로 3개 연대를 몽땅 전방 배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북한군 32사단 및 이를 지원하는 12사단은 여전히 백석산을 정점으로 양 능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언제든 반격할 태세라 예비대를 대규모로 구성할 여력도 없었다. 그래도 명령은 명령이기에 우선 8연대가 주공으로 883고지에서 좌측 능선 접근로를 타고 북쪽의 894 고지를 공격했고, 3연대는 901고지에서 우측 능선을 타고 북쪽 300m에 있는 무명고지를 11중대 및 대대화력을 집중 퍼부어 총포와 방망이 수류탄으로 저항하는 적을 혈전으로 물리치고 1시간만에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9월25일 8연대는 894고지를 두고 여전히 난황을 거듭하다 화기중대의 포화로 적의 진지들이 무력화된 틈을 타 백병전을 벌여 결국 894 고지와 백석산의 서남쪽을 흐르는 능선의 남쪽 요지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3연대 3대대는 동쪽 미 2사단의 1024고지 공격에 호응하듯 전진하며 그 고지가 탈취될 무렵에 서측의 무명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무렵 국군 7사단은 28일에 8사단과 임무 교대를 앞두고 있는 상태여서 그 전에 공략중인 고지들은 어떻게든 점령해 명예롭게 인계한다는 결의가 있었고, 이에 백석산 전방에 위치한 3연대와 8연대를 앞세워 9월26일 백석산을 공략했다. 우선 3연대 1대대는 1024고지 서측을 점령한 3대대를 지나쳐 백석산 남동측 1060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치달았으나 적의 포격에 물러나고 말았다. 한편 8연대는 2대대를 선두로 894고지로부터 공격을 속개해 항공폭격과 포병지원을 받으며 백석산 정상부에 남북으로 우뚝 솟은 두개의 봉 가운데 남쪽에 있는 봉을 손에 넣고 마지막 봉우리를 공략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정말 불운하게도 3연대를 화력지원하던 미군 전차의 직격탄이 아군을 덮쳐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공격기세도 꺾이고 말았다. 게다가 이를 기회로 삼은 적의 역습이 이어졌고, 대대는 좌측 봉우리만 겨우 점령한 채 야간방어에 돌입했다. 9월27일 새벽 적군이 역습을 시작했다. 이들은 단장의 능선에서 교대 후 이곳의 적 32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적 12사단 소속 부대들이었고, 이 공격으로 8연대는 점령중이던 백석산 서쪽 봉우리도 상실하였으며 직후 실시한 역습도 실패했다. 3연대 측도 적의 공격을 받았으나 3대대가 격전 끝에 이들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우측의 미 2사단이 1024고지를 빼앗겨 연대의 우측방이 위협받자 예비대를 투입해 이를 탈환한 뒤 미군에게 인계하였다. 9월28일 자정이 되자 7사단은 노전평 부근 작전지역을 미 해병 1사단에 인계하고 온 8사단에 인수인계 후 육본예비로 전환될 준비를 했고, 공교롭게도 이 날 북한군 측도 32사단과 12사단간의 임무교대가 있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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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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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39) 6.25 남침전쟁간 혈전의 승부로 휴전선을 결정지은 '백석산 전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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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75)] 직업군인 리더의 자질은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 조직관리는 ‘인자무적(仁者無敵)’(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사자성어는 양나라 혜왕의 질문을 받은 맹자의 답에 나온다. 혜왕은 “예전에는 천하를 호령하던 진(晉)나라가 지금은 주위 나라들에게 땅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 있는데, 과인은 이를 수치로 여겨 그들을 물리치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질문하자, 이에 맹자는 “만일 대왕께서 어진 정치를 베푼다면 이 땅의 모든 사내들은 몽둥이 밖에 없어도 갑옷을 입고 칼을 든 적군을 물리칠 것입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 사람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명언을 남겼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시계편(始計篇)에도 ‘장자, 지신인용엄(將者, 智信仁勇嚴)’이라며 장수의 5덕중에 세번째로 ‘인(仁)을 강조했다. 인(仁)의 마음가짐은 지인기갈(知人飢渴, 부하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아는 것)과 동인노고(同人勞苦, 부하의 수고와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의 자세라고 했다. ■ 지휘세력을 타격하여 적의 숨통을 끊을 수 있게 준비하라 북한이 지난 22일 실종자 해양수산부 공무원 A(47)씨에게 총격을 가하고 불로 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김정은이 사과발표를 했다며 대단히 만족하는 듯한 행태가 계속되어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2010년에도 연평도 포격 도발이 있었고 우리는 k-9자주포로 대응 사격을 퍼부었는데, 이 사건으로 취임한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적의 숨통을 끊을 수 있게 준비하라”, “지휘세력을 타격하겠다.”, “개성공단 인질 억류 시 군사조치를 취하겠다.” 등으로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4년동안 북한은 도발을 못했다. 또한 김 장관이 북한 군부가 제일 두려워하는 존재로서 MB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도 많은 우여곡절 끝에 “국방부 장관에 연임된 것은 김정은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스트레스를 가하게 된 것이다”라며 기사화 되었고 그는 용장(勇將)이면서도 엄장(嚴將)임을 드러냈다. 한편 시인 김지하도 “저토록 무섭고 슬픈 눈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김관진 장관의 눈은 깊고 그 빛은 강하다. 무서운 것은 강한 빛 때문이고, 슬픈 건 어떤 운명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저 깊은 눈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리더는 조직관리를 위해서는 지장(智將)과 인장(仁將)이 돼야 하지만 필자가 사단 작전장교 시절 8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만 모셨던 김 전(前) 국가안보실장은 두려움에 떨게 하는 냉혈한도 아니었고, 어떤 운명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저 깊고 강한 눈빛을 가진 무서운 자라고도 느낄 수 없었다. 당시 작전참모 김관진 중령은 손자의 장수 5덕중에 지(智)분야에서 탁월하면서도 의외로 소박하고 지인기갈(知人飢渴)과 동인노고(同人勞苦)의 자질을 실천하는 인장(仁將)이었다. 군에서는 가을이 오면 동계를 대비한 추계진지공사가 진행된다. 마침 인접 군단에서 대침투작전 및 진지공사 시범이 계획되어 필자는 작전참모를 수행하여 참석했다. 시범장까지는 약 3시간 가까이 차로 이동하기 때문에 오전 회의를 마치고 비포장 도로를 따라 출발했다. 사단본부를 벗어나 고개를 몇 굽이 돌아 1시간 정도 지나자 도로가에 고장난 미군 짚차가 한대가 있었고 미군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김관진 참모는 차를 세우고 미군들에게 “What's the matter with you?”라고 물어보았다. 미군의 답을 들은 그는 필자에게 가까운 부대에 연락해서 구난차를 보내주어야 하겠다며 그들을 안심시키고 인접부대 위병소에 들려서 응급 조치를 하도록 지시했다. 다시 이동하던 중 점심시간이 되자 마을 식당으로 들어갔다. 늘 김관진 참모에게 신세를 지고있던 차에 모처럼의 좋은 기회다 싶어 화장실에 가는 척을 하고 점심값을 미리 치루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김 참모의 인상이 구겨졌다. “야, 김희철…! 너 어디서 이런 거 배웠어? 상급자하고 같이 식사를 하면 상급자가 돈을 내는 거야…! 내가 너보다 봉급도 많이 받는데…”하며 본인의 지갑을 열어 식사값을 현금으로 필자에게 내밀었다. 당시 군부대에는 출장비가 없었다. 심지어 소·중대장 시절 임무 수행을 위해 경비가 들어가 비용을 요구하면 상급자는 “장교가 본인이 알아서 하는 거지, 어떻게 경비를 요구하나? 한심한 장교 아니야…?”하는 면박을 받기도 했었다. 짚차 뒷좌석에서 잘 먹었다는 감사 인사도 못하며 안절부절하는 사이에 인접 군단의 대침투작전 시범장에 도착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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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75)] 직업군인 리더의 자질은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 조직관리는 ‘인자무적(仁者無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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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역사의 산증인 홍일식과 故 박찬세의 우정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60년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려대 4·18의거의 주도자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고려대 교우회 고문, 향년 86세)이 코로나19 확진 후 입원 치료 중 6일 별세했다. 빈소는 11일 오후 5시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3호에 마련되어 13일 오전 9시 발인 후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근세기 역사의 현장을 누비던 거목인 故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이 영면에 들자, 박원장과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두 거인(巨人)의 우정을 지켜보며 감동하던 언론사 대표를 지낸 이강식씨(고려대 후배)가 ‘남이 봐도 되는 日記’를 보내왔다. 이를 통해 역사의 현장에서 누구에게나 가슴을 활짝 열고, 따뜻이 맞이하는 巨人이자 약하고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하는 大人이면서도 不義와 不敬을 용납 않는 단호한 포청천, 그래서 가는 곳마다 팬들이 북적이는 인기인이었던 故 박찬세 원장과 홍일식 전 총장 두 거인(巨人)의 우정 이야기를 공개한다. ■역사의 현장 속을 누비던 두 巨人의 감동적인 우정을 그린 ‘남이 봐도 되는 日記’ 전문 천학(淺學)인 데다, 과문(寡聞) 한 탓에 동서고금 인물들의 우정담(友情談)에 관해 아는 건 부처님과 마하가섭, 중국의 삼국지 삼 형제, 관중과 포숙,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성룡-이순신, 다산-초의선사-추사, 익살맞은 치기로 우화를 남긴 오성-한음 정도일 뿐이다. 작심하고 찾아보면 꽤 있음 직도 하련만, 특히 근현대 산업화/민주화 이후 한국史에서 후세에 길이 전할 만큼 귀감이 될 '우정 교류' 얘기는 아쉽게도 얼핏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밤에 볏단을 서로 옮겨쌓는 형제의 동화가 있다만, 그것은 同氣간의 정이니, 벗들의 우정과는 좀 다르다.)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팽배가 원인이기도 하겠으나, '우정'에 대한 절대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있음은 아닐까. 말로만, 아쉬울 때만, 상대가 잘 나갈 때만 우정을 찾는 얍삭한 처세훈(處世訓)이 날로 보편화되어 그럴까. 헌데, 그런 시대 풍토에서도 이런 우정이 살아있더라. ■ 두 거인(巨人)인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과 홍일식 전 고려대총장 한 사람은 '작은 거인'이다. 160cm가 채 안 되는 키, 말 그대로 단구(短軀) 임에도 누구나 그를 진정한 거인, '리틀 빅맨'이라 불렀으니. 또 한 사람은, 우선 외모로도 진짜 거인이다. 1950~60년대 靑年期엔 육 척 장신에 늠름한 어깨로 기골이 장대하다는 소릴 적지않이 듣기도 했단다. 두 사람 모두 '거인'으로 추앙되는 '참 이유'는 간명하다. 살아온 족적, 쌓아온 업적, 만인이 존경하는 인품 等等 족탈불급의 '큰 그릇'을 저마다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두 거인의, 부럽기 짝이 없는 '멋진 우정' 얘기를 남기고자 한다. 같이 걸으면, 누가 봐도 '언밸런스'라고 할 그들이 한 평생 우정의 꽃을 피우고, 지켜온 러브 스토리 -. 여문 작가가 소설로 엮으면 대박이 터지고 넘치리라. 1950년대 중반, 대학 저학년 시절에 만난 두 사람은 고대신문을 통한 글과 문장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고, 첫 상면 순간에 '평생의 벗'으로 점지됐음을 느꼈단다. 이후 근 70년 동안, 찰떡같은 밀애를 이어온 것이니. 그들이 서로 '통하는 바'는 '민족'이었다고 한다. 법학도와 국문학도로 각자의 主전공은 달랐으나, 민족문제를 놓고 괴로워한 젊은이들의 심혼(心魂)이 韓민족의 분(憤)과 원(怨)과 한(恨)을 화두로 놓고 늘 분방한 담론을 펼쳤고, 그러면서 情을 쌓았더란다. 그 습관이 그대로 이어져, 米壽가 멀지 않은 지금까지 무슨 특별한 사안이 없더라도, 입과 귀가 심심할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걸거나 찾아가 만나서 수작(酬酌)을 곁들여 진지한 대화를 나누곤 했단다. 작게는 대소 집안일이나 주변 지인들 근황에서부터 민족, 나라, 인류의 미래까지 주제가 마를새 없었다고. 맛있는 먹거리, 귀한 술이 생겼을 땐, 가족보다 먼저 서로를 불러, 아이들처럼 둘이서 즐기곤 했다고도 한다. ■ 박찬세는 1960년 4월 고대신문 편집국장의 신분으로, 4.19의 도화선이 된 '고대 4.18 의거 선언문'을 쓰다.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어찌 방관하랴.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이 기치를 들고 거리로 나선 노도(怒濤)의 고대생들이 그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던 중 깡패들에게 난타를 당하고 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사진이 다음날 朝刊에 게재되면서 전 국민이 분연히 들고일어나 4.19 혁명의 큰 불길로 확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찬세는 졸업 한참 후, 그의 文才를 모셔간 정부에서 권력 핵심의 요직을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은 수구초심, 오랜 염원인 '민족통일'을 위한 기반 사업에 헌신했다. 통일원 15년, 그중 10년을 통일연수원장으로 일했으니, 오늘날 우이동 '통일연수원'이 그의 정성 어린 작품이다. ■ 홍일식은, 새삼 形言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의 어르신 홍일식은 36년 동안 高大 '민족문화연구소'를 지켜오는 내내 오직 '민족문화'를 부여안고, 국학 중흥의 초석을 놓았다. <한국문화사 대계>, <한국 민속 대관>, <中韓대사전> 등 그의 손으로 탄생시킨 국학연구의 보배들이 즐비하다. 당연한 행로인, 민족고대 13代 총장이 되어 그가 보여준 인본(人本)과 공선사후(公先私後)의 탁월한 리더십은 명문 사학 경영의 전범으로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玄民, 南齋, 그리고 芝薰을 열과 성으로 기리는가 하면 범국민을 대상으로 孝정신 함양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가히 국학의 本山, 인문학의 巨峯이 바로 그다. ■ 그런 두 사람은 '닮은꼴'이 많다, "나의 벗 石岳,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곧 다시 만나기를 바라네" 누구에게나 가슴을 활짝 열고, 따뜻이 맞이하는 巨人 / 약하고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하는 大人 / 그러면서도 不義와 不敬을 용납 않는 단호한 포청천 / 그래서 가는 곳마다 팬들이 북적이는 인기인이라는 점. 현모양처와 해로했고, 자식들이 성실하게 잘 자랐으며, 一家가 더 없이 화목한 점도 똑같이 닮았다. 석악(石岳) 박찬세, 가석(可石) 홍일식. 아호(雅號)에 '돌石'을 함께 지닌 것도 천연(天緣)이다. (두 사람은 만나기 이전부터 아호를 가졌더란다.) 다만, 가무 음곡에 있어서는 석악이 한 수 위라, 그의 청탁 불문 엄청난 주량과 흥겨운 시가(詩歌)는 그대로 신화가 되어 '高大夜史'에 전해오고 있으니... 때로,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야, OO는 어떻고, OO는 네 말이 맞아." 평소 책이나 서간에선 석악兄, 가석兄 하던 분들이 둘만 있을 때 "야~, 자~" 하는 모습은 되레 보기 좋더라. 石岳이 팔순을 맞은 해, 어느 회고 글의 마지막 구절. "可石이 나의 친구라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그런, 그들의 우정,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지난 3월 6일의 悲報 – ‘石岳 박찬세 급서(急逝)’. 아니, 이럴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보름 전만 해도 호방하게 폭탄주를 즐기시던 분이, 누구보다 산행도 잘하시고, 건강장수를 다짐하시던 분이 이처럼 허무하게 떠나시다니, 이렇게 황당할 수가... 두 거인의 우정의 끈, 한쪽 걸이가 떨어졌다. 그를 알고, 존경하고, 함께 지내온 모든 사람들에겐 진정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이라. 오늘, 可石이, 몸을 추스르며, 석별의 情을 전한다. "나의 벗 石岳,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곧 다시 만나기를 바라네. 可石 洪 一 植 읍소" 비통(悲痛)을 넘어 오관(五官)이 먹먹하다. 이제 누구에게서 '감식초酒'를 마셔볼 수 있을 거나. 한 분의 거인만이라도 오래 우리 곁에 남아계셔서 두 분의 우정담을 간간히 들려주시길 소망할 뿐이다. 근데, 아무래도, 지금... 눈물이 자꾸 앞을 가려, 자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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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역사의 산증인 홍일식과 故 박찬세의 우정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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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38) 민족적 비극 6.25남침전쟁의 밴플리트와 마오쩌둥의 교훈을 되새기며 ....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40년전 5.18민주화운동으로 후유증까지 포함하면 사망569명, 행불 65명, 부상 3139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70년전 6.25남침전쟁에서는 우리나라의 공산화를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국군은 전사14만7000명, 부상 70만9000명, 행불13만1000명 등 98만7000명이 희생되었고, 민간인은 사망24만4600명, 부상22만9600명, 행불33만300명과 1000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이는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었다. ■ 밴플리트 美 8군사령관의 외아들, 마오쩌둥의 맏아들도 6.25남침전쟁에서 전사 6.25남침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파병한 16개국과 장비, 물자, 의료를 지원한 나라까지 67개국이 참전하였다. 이를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의 노력으로 2010년 9월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기록으로 등재되었다. 전쟁간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 3만5737명, 부상 11만5068명, 실종1554명으로 총 15만 2359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재 부산에 있는 재한유엔기념공원(UNMCK)에는 처음에 16개 파병국가의 1만1000위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자국으로 송환되고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터키, 미국, 영국 등 11개국의 2300여 유해가 안장되어 전쟁이 끝난 후까지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 잠들어 있다. 전쟁간 유엔군 중 특히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을 했다. 그들 중 35명이 전사, 실종 혹은 부상을 당했다.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의 아들 빌 대위는 일선 소총중대장을 자원,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3차례나 부상을 입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해리스 해병 제1항공사단장의 아들인 해리스 소령도 장진호 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이는 참전한 일반 병사들의 전사·실종 부상자 비율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었다.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장군들은 “군인으로서의 명예도 중요했지만, 지도자로서의 사회적, 정치적 판단과 책임이 더 중요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당연한 조치라고 했다. 또한 한국전쟁을 총 지휘했던 밴플리트 美 8군사령관의 외아들 지미플리터 중위도 공군조종사로 1952년 4월4일 B-26폭격기를 몰고 북한 순천지역에서 실종되어 시신마저 찾지 못하고 전사했다. 자신의 아들을 찾기 위해 수색 및 구출 작전을 시도하는 예하부하들에게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일 겁니다”라며 “내 아들을 찾기 위해 다른 이들의 아들들을 그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없다. ‘지미플리터’ 공군 조종사에 대한 수색은 여기서 중단한다”고 말했다. 한편 1950년, 중국이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을 때 마오쩌둥 주석의 맏아들인 마오안잉(毛岸英)이 자원입대했다. 새어머니인 장칭(江靑) 등이 만류하자 마오쩌둥이 “마오의 아들이 죽음을 무서워한다면 어느 누가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겠는가?”라며 일축했다. 마오안잉은 두번째 부인인 양카이후이(楊開慧)가 낳은 아들이었다. 양카이후이는 1930년 국민당 군벌에게 붙잡혀 “남편을 배반하라”는 집요한 설득을 뿌리치고 총살당했다. 그런 양카이후이가 낳은 자식이었으니 얼마나 끔찍이 여겼을까가 짐작되었다. 하지만 1950년 11월25일 아침에 압록강 남쪽의 중국군 총사령부 막사에 소이탄 100여발이 떨어졌고 마오안잉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뒤늦게 아들의 전사소식을 들은 마오 주석은 줄담배를 피우다 한마디 던졌다. “그 놈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니까….” 장남의 시신 송환문제가 논의되자 마오 주석은 “자기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는 아주 많습니다”라며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이니, 그냥 조선반도(한반도)에 두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이러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지도자 노릇 하기도, 지도자의 자식 노릇을 하기도 어려운 것 같다. ■ 상위 10% 지도층들의 실력, 국가관, 도덕관이 그 나라의 국력을 결정 미국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은 90%의 일반국민들을 비교하면 한국이 미국보다 결코 뒤떨어지지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한국계 미국인들의 말처럼 “여기는 한국처럼 일확천금은 불가능해도 한국사람처럼 머리 좋은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만 하면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미국 땅이다. 하지만 상위 10% 지도층들의 실력 국가관 도덕관을 비교해보면 딱 두 나라간의 그 엄청난 국력차이만큼 벌어져있다는 생각을 떨칠 길이 없다. 미국 워싱턴에는 한국전쟁참전용사 기념비와 조형물이 있다. 그곳에서 4개의 영어단어가 주제로 제시되어 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져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으로 피를 흘려야 자유를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밴플리트 장군이 100세로 별세하기 2개월 전(1992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보낸 편지가 육사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마침 21대 국회가 개원했다. 코로나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하려고 하는 국회의원들에게 밴플리트 장군의 편지를 제시하니, 반드시 읽고 정책에 반영하여 국가안보가 더 튼튼해지길 기대해본다. “인내심과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는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은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자유란 소중한 것이지만 또한 소멸되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은 그들의 ‘자유’를 수호할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군대가 필요하며 그 군대는 국민의 의사에 응해야 하고 그 군대의 전문성과 모범은 시민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미 육군대장 밴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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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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