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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 우리는 왜 DMZ 종주를 결정했나?
-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내가 배낭을 메고 군사분계선(DMZ)을 따라 걸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DMZ를 종주하자’는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주말걷기 모임에서 만난 한 회원이 “안 대령이 금년에 전역하는데, 전역 전에 DMZ 종주를 하면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면서 “혼자 걷기 어려우면 동행하겠다”라는 제안을 했다. 많은 땀을 흘렸고 청춘을 불살랐던 그 지역. 군 생활을 할 때는 늘 바쁘고 긴장해야 했는데 전역을 앞둔 지금 걷는다면 여유롭게 과거를 뒤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 하겠다는 그 회원의 말이 DMZ 종주를 결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DMZ 종주는 엄밀히 말하면 DMZ에 인접한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길은 대부분 군부대의 허가를 얻어야 통과할 수 있는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 이남지역이지만 일부 구간은 민통선 지역이 포함된다. 따라서 현역 신분이 아니면 군부대의 협조를 받기도 어렵고 그 지역을 정확히 알지 못해 걷기를 계획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나는 당시 현역이었고 특히 민통선 구간은 내가 과거에 근무했던 부대였다. 60, 70대 아저씨들이 12일 동안 무거운 배낭을 메고 더운 여름에 330㎞를 걷는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최초에 제안한 회원을 포함하여 동행자를 구하는 것, 이들의 나이가 많으니 각자 가족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 실제 걸을 수 있는 거리를 판단하는 것 등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런 고민 끝에 드디어 4명의 인원으로 ‘DMZ 종주팀’을 구성했다. 이후 차량으로 종주할 지역을 사전에 답사하고 지역별로 숙소를 미리 정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건강을 해치면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통일을 염원하면서 전 코스를 완주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그 여정이 벌써 8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걷는 동안 만난 우리의 산하는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기저기 전쟁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어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걸으면서 육체적 어려움을 겪는 상황마다 슬기롭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5670 아저씨들의 위대한 잠재력도 돋보였다. 아직까지 중장년층의 국토순례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데다 DMZ 종주라는 특별한 지역을 종주한 것이었기에 우리의 경험을 글로 남기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쪼록 연재되는 이 글이 이런저런 이유로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는 중장년층에게 특히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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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역군인
- 인생 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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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 우리는 왜 DMZ 종주를 결정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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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2)]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0여년 전인 1950년 9월15일,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 칭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 그리고 육군 17연대는 서울로 진격했다. 부천과 영등포 등에서 전차를 동원한 북한군의 저항은 있었지만, 연합군은 모두 격파하고 행주나루, 마포나루, 동작나루 등 3개소에서 한강 도하를 시작했고 상륙한지 9일째인 9월 24일 마포나루로 도강한 해병1연대를 마지막으로 UN군은 서울 탈환 작전에 돌입했다. ■ 신속히 진격한 미 5해병연대의 김포공항 탈환으로 공중보급로 확보 9월15일 미 해병상륙단이 인천 동쪽 외곽에 설정된 교두보로 진격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인천시내의 잔적 섬멸작전을 담당했다. 교두보를 확보한 상륙군은 곧이어 미 1해병연대가 경인가도의 우측지역을, 5해병연대는 좌측지역을 담당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이어 16일 정오즈음 미1해병사단은 인천항 남동쪽에 지휘부를 설치했는데, 일본 코베에서 정비를 마친 미 7해병연대가 21일에는 인천에 도착한다는 희소식을 전달받았다. 그 사이 공병대는 인천역에 있던 기차를 수리하여 부평까지 병력과 물자 수송에 투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기차가 지나갈 부평과 부천을 확보하고 영등포로 진격할 미1해병연대는 경인가도의 좌측지역을 담당한 미5해병연대보다는 휠씬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한편 미5해병연대는 진격로상에 있는 100m 남짓 되는 고지들을 연이어 장악하면서 김포공항을 향한 공격을 계속했다. 드디어 17일 오전 7시, 김포공항에 도달해서는 전차를 앞장세우면서 곧장 비행장 내부로 진입을 시작했다. 그 중 전차 한 대는 격납고 문을 밀고 들어가 멀쩡한 야크 전투기 한 대를 노획하기도 했다. 급조된 북한군 1항공사단은 나름대로 방어에 최선을 다하며 18일 새벽 3시에는 야습까지 시도했지만 화력 부족과 미해병대의 분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활주로 사이의 무성한 수풀 속에 숨어 저항하던 적들도 거의 사살되었다. 처절하게 대항했던 북한군 1항공사단의 지휘관 왕연(40세) 준장은 중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전에서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북한군 고위 간부였다. 결국 18일 오전 10시, 김포공항은 미 해병대는 김포공항을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해병대의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북한군은 100명 이상의 전사자와 10명의 포로를 남기고 퇴각했다. 탈환 당일인 18일에는 주활주로를 쓸 수 없었지만, 14시 45분 첫 번째 C-54수송기가 지상요원들을 태우고 비행장에 내렸고 오후에만 무려 36대의 수송기가 착륙해 차량과 물자를 쏟아 내었다. 오후 4시부터는 해병 항공기들이 착륙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 미10군단이 김포공항에 전술항공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코르세어기를 주력으로 하는 3개 항공대대가 일본에서 이곳으로 이동해 작전할 수 있게 되었다. 지상부대들이 내륙 깊숙히 진격하면 원거리로 바다에 떠있는 해군 함포의 지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포병과 항모 항공대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3개의 활주로를 갖춘 김포공항의 가치는 매우 컸다. 이로써 공중 보급이 아주 유리해졌다. 다음 날에는 주활주로도 복구되었다. 이어 김포공항 확보에 성공한 미 5해병연대는 바로 한강 도하 준비에 착수하면서 1해병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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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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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2)]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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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5)]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은 전술학처, 전략학처, 참모학처, 이념학처, 지휘학처와 전투발전부 및 교무처로 편성되어 있었다. 교육과정은 전술 및 전략을 연구하기 위한 기초적인 참모학과 지휘학부터 배웠다. 또한 당시에 강조되던 신좌경사상을 비판하고 이념무장을 강화하기위한 이념학처의 교육도 가미되었다. 더불어 모든 전술교범에는 그때까지도 일본식 용어가 남아있어 ‘작전요무령’이 가장 근간이 되는 교범이었다. 작전 뿐만 아니라 인사, 정보, 군수, 동원 업무도 배웠지만 사단작전 장교를 경험하면서 각종 훈련을 치루며 종합업무를 해온 필자는 타 병과 및 타 참모 직능보다 학습에 좀더 수월하게 임할 수 있었다. 특히 새로 접하는 동원 업무는 교육을 마치고 필자가 향토사단들로 구성된 수도방위사령부로 보직될 예정이라 더욱 관심을 갖는 과목이었다. 참모학 수업을 마치고 공격 및 방어의 전술학 시간이 되자 드디어 전술담임교관들의 풍부한 경험과 연륜이 빛나며 학생장교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당시 학생장교들의 꿈 같은 희망 보직이 육군 대학 교관이었다. 이미 교육 종료후 차기 보직이 교관으로 내정된 동료 학생들은 더욱 열심히 학업에 열중하였고 분임조 토의시 지도하는 교관들도 더욱 정성을 쏟는 모습이 눈에 띠기도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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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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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5)]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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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열혈강호 오리진’, NFT 기반 게임으로 재탄생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게임 개발사 투니플레이는 10일 현재 개발하고 있는 모바일 게임 ‘열혈강호 오리진’을 ACT게임즈와 공동 개발해 NFT 기반 게임으로 업그레이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열혈강호 오리진 NFT는 2022년 3월 론칭 예정이다. 원작 열혈강호는 1994년 연재를 시작한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국내 최장수 만화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무협 만화 가운데 하나다. 2021년 1월 기준 82권까지 출간됐으며, 국내 잡지 연재 단행본 발매 만화 가운데 가장 많은 판매량을 자랑한다. 투니플레이는 오랫동안 지식 재산권(IP) 기반의 게임을 개발한 최고의 인적 자원과 웹툰,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의 협업 사례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열혈강호 오리진은 NFT 기반 게임으로 선보이며 우수한 콘텐츠에 새로운 서비스 형태를 결합해 다른 모바일 게임들보다 돋보이는 형태가 될 것”으로 회사측은 기대하고 있다. 투니플레이는 “열혈강호 오리진 게임이 수집형 카드 형태와 결합해 소비자들에게 만화의 탄탄한 줄거리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재미를 제공해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 관계자는 또 “원작 열혈강호 시리즈가 국내는 물론 대만, 홍콩, 일본 등에 진출해 인기를 구가한 저력있는 콘텐츠임을 고려할 때 ACT 게임즈와 공동 개발하는 열혈강호 오리진 NFT 서비스도 국내를 비롯해 중화권 시장에서 높은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NFT(NON FUNGIBLE TOKEN)는 블록체인을 바탕으로 한 대체 불가능한 자산 증명 수단이다. 위·변조가 불가능한 게 장점이며, 토큰을 통한 유동화가 쉬워 저작자의 소유권 보호와 자유로운 거래라는 측면에서 시장의 관심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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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열혈강호 오리진’, NFT 기반 게임으로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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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서울대, '초대규모 AI' 공동 연구 나선다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네이버와 서울대학교는 10일 초대규모 AI 공동연구를 위한 협약을 온라인으로 체결했다. 양측은 최근 AI 업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른 '초대규모 AI' 분야에서 공동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서울대-네이버 초대규모 AI 연구센터(공동센터장 전병곤 서울대 교수, 하정우 네이버 AI LAB 소장)'를 설립한다. 네이버와 서울대의 AI 연구원 100여명이 참여하며, 3년간 연구비와 인프라 지원비 등을 포함해 수백억원 규모의 투자가 진행된다. 이를 통해 초대규모 한국어 언어모델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언어·이미지·음성을 동시에 이해하는 초대규모 AI를 함께 개발해 글로벌 AI 기술을 선도하는 것이 목표다. 네이버 연구진이 겸직 교수로서 서울대 대학원생들이 AI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공동연구지도하고, 서울대 연구진도 네이버와의 AI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네이버는 AI 인재 양성 차원에서 서울대 학생들의 인턴십 및 산학협력 파견에도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또한, 원활한 연구 협력을 위해, 네이버가 보유한 슈퍼컴퓨팅 인프라 및 데이터를 공동 연구센터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공유한다. 네이버는 작년 10월 국내 기업 최초로 초거대 언어모델 구축을 위해 슈퍼컴퓨터를 도입한 바 있다. 연구 성과는 연 2회 이상 기술 공유 워크샵 개최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공유할 예정이다. 최인혁 네이버 COO는 "새로운 산학협력 모델을 바탕으로 네이버와 서울대의 연구진들이 함께 만들어낼 강력한 연구 시너지가 기대된다"면서 "네이버의 인프라와 데이터, 양측의 연구 역량이 합쳐진 공동 AI 연구센터를 통해, 글로벌 경쟁자들에 맞서 초대규모 AI 분야의 연구를 선도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장병탁 서울대학교 AI 연구원장은 "AI 분야에서 혁신적인 연구를 하려면 인프라와 인력이 모두 중요하다"며 "네이버의 우수한 인프라와 양측의 AI 인재들이 힘을 합쳐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AI를 개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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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서울대, '초대규모 AI' 공동 연구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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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C&C, 영림원소프트랩과 '지능형 디지털 ERP솔루션' 개발한다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SK㈜ C&C는 10일 국내 ERP 전문기업인 영림원소프트랩과 '영림원@멀티버스 산업별 특화 디지털 솔루션·플랫폼 개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협약에 따라 양사는 SK㈜ C&C의 디지털 통합 플랫폼 '멀티버스'를 활용해 영림원소프트랩의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존 전사적 자원관리(ERP) 기능에 인공지능(AI) 기반 분석 기능과 비전 AI·블록체인 등을 적용해 경영 지능화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지능형 디지털 ERP 솔루션 개발을 추진한다. 영림원소프트랩은 대내외 사업 환경을 고려한 종합적 경영분석과 예측 관리, 고객 사업 현장 맞춤형 수요 모델 등을 제공하게 된다. SK㈜ C&C는 영림원소프트랩의 ERP 솔루션 'K-시스템'에 멀티버스의 머신러닝(ML)·딥러닝(DL) 분석 기능을 결합해 고객 맞춤형 경영분석 모델과 빅데이터 분석도구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블록체인을 활용한 투명한 데이터 활용 이력 파악 등 신뢰 기반의 데이터 관리도 함께 지원한다. 비대면 시대에 맞춰 사업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AI 컨택센터 플랫폼'과 'K-시스템 AI 협업 고도화 플랫폼' 개발에도 힘을 합친다. ERP 시스템과 연계해 고객의 다양한 질의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상담용 AI 챗봇과 회계·재무·생산·마케팅 등 고객 주요 업무별 AI 봇 서비스도 연계 구현할 계획이다. 양사는 별도 사업 수행 TF를 구성해 '영림원@멀티버스'를 멀티 클라우드 기반의 고객 맞춤형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와 패키지 솔루션으로 구현해 국내외 고객들이 쉽고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지원한다. 권영범 영림원소프트랩 대표는 "SK㈜ C&C의 멀티버스 플랫폼을 활용해 영림원소프트랩의 산업별 특화 ERP 솔루션을 고도화함으로써, 2000여개의 기존 고객은 물론 국내외 많은 기업들이 손쉽게 '영림원@멀티버스'를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기열 SK㈜ C&C 디지털플랫폼총괄은 "영림원소프트랩의 K-시스템이 멀티버스를 통해 고객 밀착형 디지털 혁신을 이끄는 국내 리딩 디지털 ERP 솔루션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며 "국내 전문 솔루션 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하는 산업 맞춤형 디지털 혁신 플랫폼과 솔루션을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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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C&C, 영림원소프트랩과 '지능형 디지털 ERP솔루션' 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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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시큐리티, OT보안솔루션 '스파이더OT' 출시…OT보안시장 공략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이글루시큐리티가 OT 환경에 특화된 OT 보안관리솔루션 '스파이더 OT(SPiDER OT)'를 출시하고 OT 보안 시장 공략에 나선다. '스파이더 OT'는 이글루시큐리티의 이기종 보안 이벤트 통합 분석 기술과 노하우를 토대로 IT와 OT 영역을 포괄하는 식별-탐지-분석-대응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보안 담당자들은 이를 활용해 IT 보안 장비와 OT 자산을 식별하고, 프로토콜을 분석하는 OT 센서 및 OT 보안 솔루션에서 수집한 이기종의 보안 이벤트를 통합 관리할 수 있다. 정형·비정형 IT/OT 데이터를 통합 분석할 수 있게 변환하는 데이터 정규화 기능과 단일·다기종 경보에 대한 다차원 상관분석 기능 등이 제공된다. OT와 IT를 아우르는 위협 분석 및 가시성 확보로 OT 보안 위협에 대한 선제적 대응도 가능하다. OT 자산 통신·동작에 대한 학습을 토대로 공격 유형과 위험도를 반영한 실시간 경보 모니터링을 수행하고, 사용자 정의IT·IoT(사물인터넷)·OT 통합 대시보드를 활용해 신속히 침해 사고에 대응할 수 있다. 또한 '이글루 CTI(사이버 위협 인텔리전스)' 서비스 연계를 통해 조직과 연관성이 높거나 주로 발생하는 위협 유형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여 탐지에 적용할 수 있다. 이글루시큐리티는 이번 솔루션 출시를 계기로 주요 물리보안·IT 서비스 회사와 OT 보안 전문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고성장이 예상되는 OT 보안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특히 OT 환경에 대한 진단·평가부터 OT 보안 솔루션 구축, OT 보안관제 서비스까지 포함하는 융합OT 보안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이득춘 이글루시큐리티 대표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생산성 향상과 질병에 대한 안전망 확보 차원에서 IT와 OT 영역이 밀접히 연결된 스마트 팩토리·스마트 시티·스마트 빌딩 구축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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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시큐리티, OT보안솔루션 '스파이더OT' 출시…OT보안시장 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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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중국 알기 (4)] 중국인의 처세술 ‘후흑학(厚黑學)’
-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전편에서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유광종 소장의 말을 빌어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존속과 체제 유지를 위해 모략(謀略)을 핵심으로 한 병법(兵法)을 연구하고 사용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통해 생성되고 발전된 모략의 전통이 오늘날에도 국가안보와 외교 영역에서 더욱 발전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이제는 중국인 개인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왕조는 왕조대로 존속해야 했지만 개인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특히 일반 백성은 전란과 재난을 피해 보따리 싸들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다가 어느 지역에 정착하려면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주민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유광종 소장은 정착민과 이주민의 싸움을 계투(械鬪)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착을 해도 낮선 곳이다. 믿을 사람이라고는 혈연밖에 없다. 울타리를 벗어나서 강호(江湖)라는 사회에 들어가면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졸면 죽는’ 살벌한 환경이다. 이 상황에서 공자나 노자의 얼굴이 필요했을까? 개인이 살아남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공자, 노자와 확연히 다른 생존법과 처세술이 요구되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한 것이 바로 ‘후흑학(厚黑學)’이다. 후흑학의 본질은 ‘생존하고 출세하려면 얼굴은 철판을 깐 것처럼 뻔뻔하고, 뱃속은 숯검댕이처럼 검어야 한다’는 것이다. 1912년 중국에서 이종오(李宗吾, 1879~1944))가 후흑학에 대해 처음으로 거론한 ‘기서 후흑학(奇書厚黑學)’이 발간된 이래로 이 개념이 맞다 틀리다란 논쟁은 계속됐다. 이런 와중에서 후흑학은 비즈니스 후흑학, 인간관계 후흑학까지 영역이 급속히 확대됐으며, 심지어는 연애와 결혼 후흑학까지 등장했다. 연애하고 결혼하는데도 사랑과 애정을 전달하는 방법론으로 후흑학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후흑학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청말(淸末)에서 민국초기(民國初期) 중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고 무기력하게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해 갈 무렵, 이를 통탄하고 분개한 청년 이종오는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중화민족을 부흥시킬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에서 답을 찾고자 위기를 극복하고 새 왕조를 창업한 역대 군주들에 대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중국 역대 영웅호걸들은 하나 같이 얼굴은 뻔뻔하였고, 뱃속은 검었다’는 사실이었다. 공자의 가르침과는 큰 관계가 없었고 역사서 기록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종오가 제시한 중국 부활의 해법은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원수를 갚기 위해서, 치욕을 잊지 않고 결심을 다지려고 ‘거친 노적가리에서 잠자고, 쓰디 쓴 간을 씹었으며, 얼음을 껴안고 손으로 불을 잡는’(臥薪嘗膽 抱氷握火) 절치부심의 시절을 거쳐 복수를 한 것처럼, 중국도 인내하면서 실력을 길러 서구로부터 당한 치욕을 갚고 중화의 부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흑학의 요체이기도 하다. 이종오는 후흑을 연마하는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하였다. 1단계는 ‘낯가죽은 두껍고 속마음은 검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접근을 꺼리는 수준’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의도가 간파당하는 초보단계이다. 2단계는 ‘낯가죽은 두꺼우면서도 딱딱하고 속마음은 검지만, 얼굴은 투명하리만큼 맑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단계’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유비(劉備)와 조조(曹操)를 들고 있다. 유비도 알고 보면 얼굴은 뻔뻔하고 속마음은 검었다는 것이다. 3단계는 후이무형(厚而無形), 흑이무색(黑而無色) 단계로 ‘얼굴은 두껍지만 형태가 없고, 속마음은 검지만 색깔이 없는’ 경지이다. 속마음 후흑(厚黑)과 달리 겉모습은 정반대로 ‘불후불흑(不厚不黑)’인 것이다. 국가로서 중국과 중국인 개개인들은 이 3단계를 목표로 오늘도 ‘후흑’을 연마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 사자성어에 대지약우(大智若愚)라는 말이 있다. ‘가장 큰 지혜는 멍청하게 보이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말도 있다. 그 뜻은 ‘(총명한 사람이) 어리버리한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이다. 모두 후흑 3단계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제 후흑학과 관련된 세 가지의 이야기를 하겠다. 첫째는 타면자건(唾面自乾) 고사이다. 중국 당나라 시절, 누사덕(屢師德)이라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아우를 불러놓고 물었다. “누가 너에게 불만을 갖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아우는 “형님 걱정 마십시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제 얼굴에 침을 뱉겠습니까? 저는 그를 책망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누사덕은 “아우야, 침을 닦는다고 그 사람 화가 풀리겠느냐, 그냥 마를 때까지 가만히 두거라”하였다. 그래서 나온 사자성어가 타면자건(唾面自乾 : 얼굴에 뱉어진 침을 저절로 마르게 한다)이다. 후흑학 3단계를 넘어 4단계의 경지가 아닌가 한다. 중국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고사를 언젠가는 배워서 알고 있고, 또 언젠가는 필요시에 다시 생활 속에 소환해 낼 것이다. 둘째, 중국에서 지낸 한국인에게는 꽤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대기업 간부 김 사장은 중국 지사장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생면부지의 중국인 왕 서방이 이런저런 인연을 통해 접근하더니 그렇게 잘 하더란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각종 공적·사적 기념일, 행사, 한국에서 오는 손님과 가족, 친구 접대, 명절날 선물, 중국 생활의 편의 제공 등 모두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지극 정성을 기울이더란 것이었다. 물론 김 사장도 상응하는 선물, 응대를 하여 마음의 부담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김 사장은 왕 서방에게 물어본다.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왕 서방은 “무슨 말이냐, 필요한 거 없다. 그냥 한류가 좋고, 한국인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렇다”라고 허허 웃는다. 김 사장과 왕 서방은 서로 주고받으며 좋은 친구관계로 몇 년을 지냈다. 김 사장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 얼마 전, 왕 서방이 조심스럽게 뱃속에 오래 간직했던 주머니 한 개를 연다. “저 ~ 내 아들 녀석이 이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하는데...” 바로 이거였다. 왕 서방은 자기 외아들의 취직을 위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오랜 기간 집요하게 정성을 들인 것이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백 명이면 백 명 모두 다 왕 서방 아들의 취직에 발 벗고 적극 나설 것이다. 이 때 생각나는 말 한마디 심모원려(深謀遠慮 : 깊게 생각하고 멀리 본다). 보통의 중국인 왕 서방은 후흑학 2단계 수준에 도달했다고 보여 진다. 세계 어느 나라도 취직 청탁 또는 추천은 있고,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접근법에서 차이가 있다. 중국인 왕 서방은 자기 복안을 내보이지 않은 채, 장기간 꾸준하면서 집요하게 정성을 들였다. 보다 중요한 점은 상대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다음에야 완곡하게 뱃속 주머니를 연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손자병법 한마디는 ‘이겨놓고 싸운다’(先勝求戰). 미리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다음에 싸움을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이다. 중국이 이와 같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우리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태까지 관계를 강화한 다음, 청구서를 들이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과 중국인의 뱃속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세 번째 이야기이다. 중국 어느 대학병원에서 한족(漢族)과 조선족(朝鮮族)을 포함한 소수민족의 성인병 발병률을 비교했다. 그 결과 한족이 다른 소수민족보다 스트레스성 질환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배속에 복안 주머니 몇 개씩을 넣고 살면서 ‘모략’해야지, ‘후흑학’해야지... 그래서 뱃속이 편안한 날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우리 앞에 있는 중국인은 누구든 예외 없이 후흑학 3단계 중 어느 지점에 있을 것이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이들보다 더 후흑학에 정통해야 한다. 즉 얼굴에는 중국인 보다 더 두꺼운 철판을 깔고 뱃속은 더욱 검어야 하다. 그리고 당연히 상대가 이를 파악할 수 없게 해야 한다. 중국인이 3단계라면 우리는 그보다 위인 4단계, 5단계 수준이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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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중국 알기 (4)] 중국인의 처세술 ‘후흑학(厚黑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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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4)]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교식을 마치고 학생조직을 편성 할 때 사관학교 1년 선배들이 학생장 및 각 반의 반장직을 맡았고 미국, 터키, 대만에서 한국으로 위탁교육온 장교들도 포함하여 1년간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병·포병·기갑·공병·통신 등을 비롯한 전투병과와 병참·헌병·의무·법무 등 기타 병과 장교들도 함께 입교하며 이들은 각 반과 분임조에 고루 분포되어 수업을 진행했다. 특히 육군대학에서는 학생장교들의 전술지식 함양을 위해 타장교들에 그동안의 야전 근무를 통해 식견이 높고 탁월하다고 인정되며 대령으로 1차 진급한 3명을 전술담임교관으로 운용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당시 3개반으로 구분하여 각반에는 약 60명의 학생장교들을 책임지고 교육하도록 편성된 전술담임교관들이 공지전투[空地戰鬪, Airland Battle] 및 가용 전투력을 최대로 통합하여 조기에 주도권을 장악하고 승전의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공세적 기동전 등의 전술 및 전략지식 함양에 큰 도움을 주었다. 1반의 전술담임교관 윤천득 대령은 갑종200기로 임관한 기갑병과 장교였고, 2반 엄항석 대령은 육사28기로 야전 사단 작전참모를 역임한 보병작전의 대가였다. 3반 김병관 대령은 엄대령과 육사동기이자 육사를 수석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이들은 육군대학에서 전술담임교관을 마치고 다시 야전으로 부임하여서도 역시 근무를 잘하며 군발전에 기여하였고, 훗날 모두 장군으로 진급되어 학생장교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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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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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4)]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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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1)]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 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대통령 후보가 된 아이젠하워의 후임으로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자 그 후임으로 클라크(1952년 5월 ~1953년 10월) 대장이 부임했다. 클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는데 사실 처음부터 해당 전선을 지휘했던 것이 아니라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옮겨가자 대타로 지휘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은 한때 몬테카시노 전투와 같은 격전을 치루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전선이 평온한 상태였는데, 이는 우선순위에 따른 차이에서 기인했다. 태평양보다 유럽쪽에 우선순위가 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전선은 2부 리그 취급이었다. 그래서 물자와 병력이 노르망디에 비해 많이 뒤쳐져 적극적인 공세에 임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건 책임을 진 지휘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이 그 모든 책임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로마에 가장 먼저 입성하기 위해 적군의 후퇴를 방치하는 과오를 범했다는 등으로 연합군 내에서 평판은 매우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한국계의 미군 영웅이었던 김영옥이 이탈리아 전선에 있었을 때, 당시 이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는 로마 점령 이후 그를 보고 계급이 고작 중위라는 것에 놀라서 “왜 겨우 중위냐?”고 물었다. 이에 전쟁영웅 김영옥은 진급 신청을 5번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클라크가 당장 옆에 있는 전속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다가 붙여주면서 즉석 진급시켰다는 일화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던 클라크는 6.25남침전쟁이 치열했던 1952년 여름, 나토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후임으로 임명되어 역대 유엔군사령관 중에 가장 장기간인 18개월 동안 한국 전선을 지휘하였다. 유엔군사령관으로 취임 후 고착된 전선에서 출혈만 강요되는 고지전이 지리하게 계속되는 가운데 클라크 또한 트루먼 행정부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휴전협정을 서두르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클라크는 휴전협정 막바지에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대규모 공세를 위해 원산지역에 기습 상류작전을 펴겠다고 건의하였으나 거부당했다. 또한 52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 당시, 서울 동숭동 미 8군사령부에서 재차 상륙작전 승인을 요청했으나 또 거부당했다. 한편 유엔군사령관으로 수차례 이승만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클라크는 "한국전을 통하여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개석 및 네루와 버금가는 위상을 확보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했던 것 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했던 지도자였다”라고 말했다. 또한 “많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극동 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고 자신의 회고록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 존경하는 마음의 글을 남겼다. 휴전협정이 난항을 거듭하던 1953년 3월, 6.25남침전쟁을 뒤에서 조종했던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던 클라크는 눈물을 흘리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그해 7월27일 휴전 협정 당시의 유엔군 대표로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이때 휴전 회담장으로 가기 직전에 클라크는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이 대통령이 견장에 달린 별 4개 계급장을 보면서 "이건 적에게 항복하라고 달아준 거냐?"며 비꼬았다고 한다. 아무튼 6.25남침전쟁 중에 유엔군 및 미군을 지휘했던 맥아더,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클라크 사령관들은 전략 및 전술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추구했던 전형적인 군인들이었다. 또한 워커, 밴플리트, 클라크 사령관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들은 6.25남침전쟁에 참전하여 노블리스 오빌리제를 실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쟁 중에 워커는 불의 사고로 순직했고 밴플리트와 클라크의 아들은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순직하는 아픔을 겪었다. 특히 군생활동안 이탈리아 전선 및 6.25남침전쟁을 지휘하면서 어쩔 수없이 책임만을 감수했던 클라크 장군은 비록 존경하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조롱까지 당했다. 하지만 워싱턴과 6.25남침전쟁 현장에서의 상충되고 까다로운(delicate) 상황속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참군인이었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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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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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1)]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 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