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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방산 명품](5)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FA-50’ 아르헨티나 및 동남아 국가에 4조원대 수출 나서
- ▲ 지난 2016년 10월 21일 경남 사천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경공격기 'FA-50' 출하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대한민국은 40여년 만에 전차, 장갑차, 자주포, 미사일은 물론 함정, 잠수함, 고등훈련기까지 거의 모든 무기체계를 생산하는 신흥 방산강국이 됐다. 뉴스투데이는 한국의 방산제품 중에서 세계로 수출되거나 수출 가능성이 높은 명품을 선정하여 소개하는 ‘수출 방산 명품’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김조원 사장, 아르헨티나 대통령 및 말레이시아 총리 만나 수출 논의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지난 4월 29일 김조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사장은 아르헨티나를 방문해 마우리시오 마크리(Mauricio Macri) 대통령과 가브리엘라 미케티(Gabriela Micheti) 부통령 등 고위급 인사와 면담을 갖고 FA-50 수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나눴다. 아르헨티나 공군은 12대 규모의 노후 전투기 교체 사업을 추진 중인데, FA-50 경공격기를 선호하고 있으며, 사업 추진을 위해 금융 지원과 산업협력 조건이 포함된 제안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조원 사장은 또한 지난 3월말 말레이시아 랑카위에서 열린 '국제해양항공전(LIMA) 2019' 현장에서 마하티르 모하맛 말레이시아 총리를 예방하고 국방총사령관, 공군사령관 등 말레이시아 주요 의사결정권자들과 FA-50 수출을 위한 면담을 갖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공군은 36대 규모의 고등훈련기 및 경전투기(LCA) 획득사업을 추진 중이다. KAI는 올해 초 말레이시아에 FA-50 제안서를 제출했으며, 파키스탄·중국 합작의 JF-17, 인도의 테자스, 이탈리아의 M346, 러시아의 Y-130과 함께 경합 중이다. 특히 경전투기는 일부 공대공 능력과 완전한 공대지 능력을 갖춘 초음속기를 저렴한 가격에 획득해야 하는데, 이 조건을 모두 맞출 수 있는 건 사실상 FA-50 말고는 없는 상황이다. 현재 말레이시아 국방부 대변인이 FA-50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매우 고무적인 상황이기는 하다. 한국 공군은 2002년 8월 훈련기 T-50, 2011년 5월 경공격기 FA-50의 초도 비행에 성공했다. 현재는 T-50 50대, 전술입문기인 TA-50 22대, 경공격기 FA-50 60대, 블랙 이글스 12대 등 총 144대를 보유하고 있고, TA-50 20대를 추가로 구매할 예정이다. 공대지 능력 갖춘 초음속기 FA-50, 2011년 최초로 인도네시아 수출 T-50/FA-50은 2011년 5월 최초로 인도네시아와 16대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총 4억 달러 규모로 저렴하게 판매했고 인도네시아 수송기인 CN-235 4대를 대응 구매하면서 성사시킨 계약이었다. 항공기의 경우 최초 수출 시 구매국에게 큰 할인 혜택을 주는 것이 관례화 돼 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수출용인 ‘T-50i’은 FA-50 규격으로 생산돼 유사시 전투임무에 사용할 수 있게 레이더 경보수신기(RWR)도 장착했다. 이어 2013년 12월 이라크에 T-50 24대 수출 계약이 성사됐다. 수출 규모는 이라크 수출용인 ‘T-50IQ’ 항공기와 조종사 훈련, 후속 군수지원 등을 모두 포함해 21억 달러(한화 2조2천121억 원) 이상으로 한국 항공수출 사상 최대 규모였다. 2017년 5월 6대, 2018년 4월 및 12월에 각각 6대씩 12대가 인도되어 현재 24대중 18대가 납품됐고, 수출대금 중 일부가 제대로 회수되지 않아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2014년 3월에는 필리핀에 FA-50 12대를 정부 간 무역(G2G) 방식으로 공급하는 계약이 체결됐다. 4억2천만 달러 규모로 KOTRA가 G2G 주관기관으로 계약 체결을 이끌었으며, 방위사업청은 항공기의 품질을 보증하는 등 측면 지원했다. 공군은 실전 운용경험을 살려 필리핀 수출용인 ‘FA-50PH’의 평가비행을 돕고, 향후 조종사 및 정비사 훈련을 약속했다. 2015년 9월에는 태국에 T-50 4대(1억1천만 달러)를 수출하는 계약이 체결됐고, 2017년 7월 8대(2억6천만 달러)를 추가로 수출하는 계약이 체결됐다. 태국 수출용인 ‘T-50TH’는 고등훈련 및 전술입문기로 활용되며, 태국은 향후 추가로 4대를 더 도입해 총 16대로 비행중대를 구성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인도네시아·이라크·필리핀·태국 등에 64대 판매, 3조 원 넘게 수출 이와 같이 T-50/FA-50은 인도네시아, 이라크, 필리핀, 태국 등에 지금까지 총 64대가 판매돼 수출 금액만 30억 달러를 상회하는 규모다. 게다가 필리핀은 12대, 태국은 4대의 FA-50을 추가로 도입할 생각도 갖고 있다. 또 리비아와 칠레도 T-50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리비아와는 수출 협상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KAI는 록히드마틴과 함께 지난해 9월 미국 공군의 훈련기 사업 입찰에 참여했으나 보잉-사브가 92억 달러라는 최저 가격을 제시해 사업을 따내면서 KAI의 원대했던 대미 수출의 꿈은 무산됐다. 최소 350대에서 최대 475대까지 구매가 예상된 사업이었고 세계훈련기 시장의 향후 판도를 좌우하는 것이어서 KAI의 타격은 컸다. T-50/FA-50은 초음속 기능과 경공격기 임무를 병행할 수 있는 등 성능이 뛰어나다. 따라서 순수한 훈련기로는 비싸고, 본격적인 전술기로는 약간 부족한 기종이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처럼 자국 내에 반군 세력이 존재하며, 인접국과 분쟁 가능성 때문에 전력을 늘려야 하는 나라는 선호하지만, 훈련 기능만 원하는 나라들에게는 비싼 가격으로 매력이 없다. 이런 연유로 순수 훈련기 버전에 비해 경공격기 버전이 상대적으로 수주 성공율이 좋은 편이다. 훈련기로는 가격대 성능비가 나쁘지만 경공격기로는 오히려 가격대 성능비가 우수한데다 유력한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전술입문기이면서 고등훈련기를 병행하는 FA-50의 기능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김조원 사장은 이와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난 3월 29일 말레이시아 전시회 현장에서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중남미, 아프리카와 유럽에 적극적인 수주 활동을 지속할 것"이라며 "다목적 운용이 가능하도록 성능을 개량해 국산항공기의 경쟁 우위를 지켜나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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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방산 명품](5)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FA-50’ 아르헨티나 및 동남아 국가에 4조원대 수출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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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3) 유엔군의 '자유전사'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과 미국 프리만, 크롬베즈 대령
- ▲ 중장 계급장을 달았던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왼쪽)의 모습, 그리고 6.25전쟁에 참전한 몽클레어 중령(오른쪽 사진의 맨 왼쪽)이 한국전선을 방문한 맥아더 연합사령관(오른쪽 사진의 맨 오른쪽)과 만나는 모습[사진출처=보훈처] 지평리 전투의 영웅 ‘몽클레어’장군, 참전하기 위해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 선택 '미끼'로 던져진 미 23연대 ‘프리만’대령은 "나는 반드시 부하들을 데리고 나갈 것"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에서 1.4후퇴 후,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 내고 중공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푸른 눈을 가진 ‘자유의 전사부대’가 있었다. 이 ‘자유의 전사부대’ 가 승리한 ‘지평리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중공군은 공격을 중단하게 되었고, 몰리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을 만들어 연합군은 북을 향해 전진하게 된다.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 중 한명은 바로 프랑스의 랄프 몽클레어 (Ralph Monclar·1892~1964) 장군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남한을 기습공격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연합군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는 유엔군 파병을 결정했지만 한국에 파병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알제리 등에서의 식민지 전쟁으로 병력 보충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프랑스는 1950년 7월 12명의 시찰단만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반기를 든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몽클레어 중장이다. 그는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모병(募兵)을 실시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 13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모였다. 몽끌레어 장군은 직접 이들을 이끌고 한국전쟁에 참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스 르젠 국방차관이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데 중장인 당신이 대대장을 맡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이에 몽끌레어 장군은 중장 계급장을 떼고 국방차관에게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면 육군 중령이라도 좋다. 계급을 낮춰도 좋으니 나를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몽클레어는 결국 중령 계급장을 달고 대대장으로 이국만리의 전쟁에 참전했다. 공산군의 침략으로 백척간두에 놓인 한국을 돕는 일이라면 몽클레어 장군에게 강등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몽클레어 장군이 한국에 왔을 때 나이는 58세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중요했던 ‘지평리전투’는 1.4후퇴 이후,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산악 전투이다.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내며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지평리까지 무너지면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유명한 명장 ‘맥아더’장군이 지휘하는 연합상륙부대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함으로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하지만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하여 그 선두 부대가 압록강에 도달했을 무렵 중공군이 이미 10월 15부터 압록강을 건너 은밀하게 투입되어 그 역공격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 첫 교전이 10월 25일 개시되었고 이때부터 중공군은 인간을 무기로한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유엔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규모는 최초 18만명, 이후 40만에 이르는 중공군이 한반도 투입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중공군의 기습적인 역공격을 받은 유엔군은 혼란에 빠졌고 더욱이 중공군의 규모와 무기체계, 전술등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터라 피리불고 괭과리 치면서 인해전술로 몰려드는 중공군에 심리적 공황까지 발생,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겪었다. 급기야는 1951년 그 유명한 ‘1.4후퇴’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유엔군은 한반도를 통일하고 고향에서 크리스마스휴가를 보낸다던 계획이, 우리 국군에게는 한 맻힌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려던 꿈이 무참히 깨어지면서 엄동설한에 다시금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자 전쟁수행에 대한 서구제국들의 관심이 급변하고 급기야 한반도에서의 철수와 휴전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은 중공의 유엔 가입과 대만에서의 미군철수 등을 조건으로 내세우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유엔군과 국군은 중공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유엔군의 재편성을 위하여 평택-원주-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금 역공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양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즉, 반격작전으로 중공군을 38도선 이북까지 격퇴하면서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인 ‘제한전쟁’을 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여 전쟁의 무제한적 폭력성을 특정한 목표로 제한하고 이를 통하여 정치적 목적인 휴전협상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중공군과 단절된 전선을 회복하고 철저하게 잔적을 소탕하면서 동해와 서해를 잇는 띠를 만들어 일제히 제한된 거리를 진격하는 여러 개의 작전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 지난 2016년 7월경 방한했던 몽클레어 장군의 손자(오른쪽)가 53사단 군종 참모인 김재학 소령(목사)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김재학 소령] 유엔군의 '라운드 업' 전략 속에서 중공군 섬멸을 위한 '미끼'로 던져진 미 23연대 인해전술로 덥쳐온 중공군을 3차례 전투에서 격파 지평리 전투가 있기 전에 유엔군은 작전명령 월프하운드(Wolfhound)작전, 썬더볼트(Thuderbolt)작전으로 한강선을 확보하고, 라운드엎(Round-up) 작전에 재차 돌입하였으나 중공군의 대규모 ‘2월 공세’로 홍천 남쪽에서 작전이 저지되고 중공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중공군은 이때 수원-이천-원주-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일부 진출해 있었고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횡성과 홍천 중간지인 삼마치 고개와 지평리 일대로 병력을 집결하여 대규모의 공세를 준비 중에 있었다. 드디어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이 ‘2월공세’로 명명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따라서 유엔군과 중공군이 횡성-원주일대와 지평리 일대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 한국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운 UN(프랑스)군의 지평리전투 충혼비와 상황도[사진출처=보훈처] 지평리(砥平里)는 중앙선 열차가 통과하며 원주, 이천, 장호원, 양평등으로 진출할 수 있는 주요 교통요충지로서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분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중공군은 지평리를 점령하고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의 남쪽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이때 지평리에는 라운드 업작전에 투입되었던 미2사단 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군 대대와 미37포병대대, 82방공포대대 B포대, 503포병대대 B포대등으로 편성된 연대전투단이 지형의 잇점을 이용하여 전면방어를 편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중공군 39군 예하의 3개 사단이 지평리를 그 특유의 나팔과 괭과리를 동반한 인해전술로써 포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은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즉각 미 2사단 38연대로 지평리를 증원토록 하는 한편 부대를 재배치하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고 미9 군단이 지평리에 추가적인 증원부대를 급파하도록 조치 하였다. “승리는 승리를 믿는 자, 전투는 끝까지 버티는 자에게만 승리의 영광을 안겨준다”고 한다. 지평리의 병사들은 그동안의 전투에 지쳐 제각기 호를 파고 그 속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대장 프리만 대령과 그 부대원들은 철저한 준비를 이미 완료한 뒤였다. 몽클레어가 이끄는 프랑스 대대, 1일차 전투에서 대승리 드디어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이 횡성의 삼마치고개 일대에서 일제히 공격을 재개 하여 3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한국군 3군단이 패하면서 지평리까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에 프리만 대령은 퇴로가 차단되어 중공군에게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철수를 건의 하였으나 철수허가 대신 지평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접수 하였다. 사실 미23연대는 ‘라운드업 작전’ 속에서 '미끼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중공군을 찾아내어 소화기와 인력에 의존하는 중공군을 연합군의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으로 섬멸코자 계획된 작전이었던 것이다. 미 23연대는 미끼로서 중공군에 던져 졌고 중공군은 그 미끼를 물 게 되었으며 프리만 대령의 미23연대는 그 속에서 미끼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1951년 2월 13일 드디어 중공군이 지평리 전방에서 대규모로 집결 중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제보로 확인되었고 어둠이 깔리면서 중공군의 신호탄이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지평리는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한겨울 지평리의 추위는 살을 에이는 듯하였고 장병들은 긴장속에서 전투준비를 갖추고 중공군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갈 무렵, 중공군의 박격포탄이 여기 저기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중공군의 그 나팔, 호각, 괭과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중공군은 떼를 지어 몰려들었고 장병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중공군의 1제파, 2제파, 3제파를 차례로 격퇴하였다. 중공군의 시체가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한편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레어 중령은 58세의 노병으로 1, 2차 대전을 모두 경험하고 무공훈장을 17차례나 받은 백전노장이며 진정한 군인 이었다. 원래 프랑스 육군 중장 이었던 대대장의 본명은 ‘마그랭 버르너리(Magrin Vernery)’이었고 개명한 새이름 ‘몽클레어’로 또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이 프랑스군 대대의 장병들도 대부분 이와 같이 전쟁을 위하여 자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용맹성과 전투능력을 어느 군대보다도 강하고 철두철미하였다. 프랑스군 대대전방에서도 중공군의 피리와 괭과리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물밀 듯이 중공군이 몰려들어왔다. 이때 프랑스군 진지에서 난데없이 사이렌(신호 및 조기경보 용으로 중대급에 보급된 휴대용 수동식 사이렌 임)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중공군의 피리소리와 괭과리 소리를 삼켜 버렸고 중공군은 신호 및 연락이 끊기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일제히 화력을 집중하면서 진지를 박차고 나가 중공군을 닥치는 대로 쏘고 찌르는 육박전이 벌어졌고 중공군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5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날밤 중공군은 감히 재공격을 하지 못하였다. 한 병사의 기지가 대대전체를 구하며 참으로 값진 승리를 쟁취한 순간이었다. 밤이 지나갔다. 중공군은 3개 사단 병력으로 1개 연대전투단이 방어중인 지평리를 밤새워 포위공격을 하고서도 함락하지 못한 채 시체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퇴각한 것이다. 미 프리만 대령, 절름발이 상태에서 중공군 9만명을 상대로 한 2일차 전투 승리 중공군은 낮에는 유엔 공군의 폭격이 무서워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재편성을 한 다음 밤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한편 이날밤 전투에서 연대장 프리만 대령이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며 헬기로 탈출 치료받도록 조치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붕대를 감은 절름발이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프리만 대령은 "내가 부하들을 이끌고 여기 왔다. 반드시 이들을 데리고 나갈 것이다"라고 전의를 북돋으며 진두지휘, 장병들의 사기를 올렸다.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던 유엔군은 정오경에 수송기 편대를 이용 수십톤의 탄약과 식량 등 보급품을 공수 하였다. 이때 연대 지휘소 부근 헬기장에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날아 들어왔다. 오는 도중 중공군의 저격으로 헬기가 명중되었으나 다행이 치명적이지 않았다. 지평리의 장병들은 가슴에 매단 수류탄 두발을 보고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이란 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당시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가슴에 수류탄 2발을 매다는 코디로 자신을 야전군 지휘관임을 자랑스럽게 외부로 드러내고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장병들과 프리만 연대장에게 오늘밤 하루만 더 버텨줄 것을 당부하고 격려 하였으나 장병들은 오히려 사령관의 귀로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필자는 비록 보지 못하였지만 이글을 쓰면서 상상만 해도 정말 흥분되고 용솟음치는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다. 2월 14일 어둠이 채 깔리기도 전 지평리에는 기분 나쁜 피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전날 2개사단이 동시에 공격하여 실패한 중공군은 그날 밤 새로이 3개사단과 3개연대규모를 추가하여 2일차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중공군이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지평리를 반드시 확보하여야 만 했기 때문에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병력 수 9만여명의 중공군이 3천여명의 유엔군과 혈전을 전개하였다. 중공군이 보유한 화력은 미약했지만 인간이란 무기는 넘쳐나는 듯 했다, 유엔군의 포병과 박격포세례에 살아남은 자는 지뢰지대에서 죽고 지뢰지대를 벗어난 자는 철조망 앞에서 기관총에 죽었다. 그러나 끝이 없이 밀려드는 중공군은 마침내 유엔군의 진지 전방까지 도달하였고, 유엔군은 실탄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날이 밝으면서 중공군은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또 하룻밤이 지나갔고 지평리 외곽의 유엔군 진지 전방에는 전날에 이어 이날밤 사살된 중공군 시체가 산에 산을 이루었다. 이제 지평리에서 2일간 전투를 치룬 미 23연대전투단은 더 이상 버틸 힘도 탄약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금 진지를 보수하고 오늘밤의 결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 6·25 당시 미 23연대장 프리만 대령(왼쪽. 미육군 대장 전역)과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사진출처=보훈처] 미 5기병연대장 크롬베즈 대령, 3일차 전투에서 중공군 괴멸시켜 전투 3일차인 이때 리지웨이 사령관은 미 9군단에 ‘지평리 연결작전’을 명령하였고 9군단장은 미1기병사단 5기병연대장 크롬베즈 대령의 이름은 딴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전차 23대를 앞세우고 지평리로 진격을 하게 되었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대신방향에서 북쪽으로 길 게 뻗은 좁은 도로를 따라 지평리로 전속돌진 하였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은 양쪽이 높은 고지군으로 둘러 쌓여있고 이곳은 중공군이 미23연대 전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곳이어서 중대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폭약을 들고 전차를 저지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2대의 전차가 중공군의 로켓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전차의 승무원이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전차를 도로밖으로 밀어내고 후속전차가 멈추지 않도록 공격템포를 유지하면서 돌진 하였다. 한편 지평리에서는 프리만 대령의 부상이 악화되어 후송되고 2대대장 에드워드 중령이 임무를 대신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중령은 우선 야간에 피탈된 전선에 대하여 주간 역습을 실시 회복하도록 명령하고 야간작전 준비에 돌입하는 한편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의 연결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중령은 보유하고 있던 전차 4대로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설치한 지뢰를 제거하고 중공군의 배후로 우회하여 중공군에게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돌진 해 들어갔다. 더불어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중공군의 지휘소와 탄약고등 전투근무지원시설을 잇따라 유린하면서 파죽지세로 돌진 드디어 양군의 전차가 마주치면서 연결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의 충격적인 돌진은 중공군들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중공군들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이 광경은 군대가 아닌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으로 사라져 갔다. 미군과 프랑스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마치 풀을 베는 농부처럼 메뚜기를 사냥하듯 중공군을 쓰러뜨렸다. 소총사거리를 벗어난 중공군은 박격포와 야포의 세례를 받으면서 무수히 쓰러져갔고 ‘중공군의 2월 공세’는 그들이 자랑하는 무기 인간을 무수히 소모한채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도 큰 피해를 입었다. 최초 이 특수임무부대는 전차위에 보병 1개중대 165명을 탑승시켰으나 이중 살아남은 사람은 23명이고 나머지 142명의 장병이 전사하거나 부상 후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크롬베즈 대령과 에드워드 중령을 감격의 포옹으로 전우애를 확인하였다.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거둔 최초의 완벽한 승리…! 이 전투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이후, 후퇴와 패배를 거듭하던 유엔군이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전투로서 그동안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유엔군이 거둔 최초의 완벽한 승리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장에서 지휘관이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 하는 지휘관의 자세에 대한 수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미 23연대 전투단의 프리만 연대장은 부상 중에도 후송을 거부하고 장병들과 생사를 함께 하였으며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중공군의 포화를 뚫고 헬기로 포위된 전장을 방문했을 때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바로 손자병법 모공편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의 진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레어 중령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진정한 군인으로서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 장병들이 엄동설한의 꽁꽁 얼은 야지에서 구축한 진지는 그들이 흘린 땀만큼 피와 목숨으로 보답한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다. 그렇다 방어작전시 승패는 누가 더 깊이 견고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가용한 화력과 장애물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전투결과로서 보여주었다. 한편 중공군이 대규모의 병력으로 완전히 포위하고 3일간 치열한 전투를 치루면서도 패배하였던 원인은 중공군에게는 인간이 무기인 인해전술만 있었지 곡사화기를 이용한 화력지원체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공군의 신호 및 연락 수단이었던 피리, 괭과리. 북, 호각 등 의 소음은 야간전투에서 심리적인 효과까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 대대 어느 병사의 수동식 사이렌 작동으로 완전히 차단함으로서 예상치 못한 커다란 성과를 달성한 것은 전장에서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25남침전쟁’의 국가적 절명 위기에서 보이지 않는 희생을 통해 나라를 지켜낸 숨겨졌던 국내의 영웅들과 애국자분들에게 감사와 보은도 중요하다. 그런데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장군과 ‘프리만’, ‘크롬베즈’대령,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레어’장군 등 연합군의 알려지지 않은 유엔군 영웅들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 다시한번 더 ‘지평리 전투’에서 장열히 산화한 미군과 프랑스군의 전몰 장병들의 명복을 기원한다. 또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인 67개국이 단일 연합군으로 우리나라를 구해준 해외지원국에 대한 감사하고 기억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명확히 부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렇게 선양해야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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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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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3) 유엔군의 '자유전사'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과 미국 프리만, 크롬베즈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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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2)'구월산 여장군' 이정숙과 '동락리 전투'의 김재옥
- ▲ ‘군번 없는 여(女)전사’들과 이정숙(오른쪽) 여장군 [사진출처=국가보훈처] '구월산 유격대 女將軍’으로 불린 고(故) 이정숙, 남편 김종벽 대위와 함께 반공 유격전 구월산 유격대 생존자, 정부에게 16만원 보조받아 ‘김원봉 복권/서훈’ 보다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들 선양사업을 우선해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서해무장대를 조직, ‘구월산 유격대 여장군(女將軍)’으로 불린 고(故) 이정숙도 있었다. 6·25 당시 구월산 유격대를 창설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은 남편 고(故) 김종벽 대위에 이어 부부가 동시에 일반적인 공로훈장이 아닌 무공훈장 수훈자로 건국 이래 처음이고 부부무공훈장 수훈은 전 세계적으로 극히 드문 사례이다. 이정숙은 1922년 2월 함흥태생으로 6·25남침전쟁 직전 공산군 손에 부모와 남편을 잃었다. 본인도 복역하다가 탈출에 성공하여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서해무장대'를 조직, 무장대원 70여명과 농민군을 진두지휘하여 북한군과 싸웠다. 이후 서해무장대는 김종벽 대위가 이끄는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일명 동키 제2부대로 불린 구월산 유격대는 동년10월 중순,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과 이도면 등의 반공청년들로 조직된 '연풍부대'를 모태로 하여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의 김종벽 대위가 후퇴 중 반공청년들의 자생적 무장조직을 규합한 최초 150여명으로 1950년 12월7일 창설한 유격대이다.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한 뒤 이정숙은 김종벽 대위의 보좌관 직책을 맡아 다양한 특수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1951년1월18일 고립된 재령유격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촌부로 가장한 채, 밤새 100리를 걸어 적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였고, 이외에도 월사리 반도 상류작전, 어양리 지역 상륙작전 등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전쟁중에 육군참모총장 표창도 받았고 “구월산의 여장군”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여성 유격대의 상징으로 꼽히는 이정숙 구월산 여장군의 활약상은 1960년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바 있으며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서도 생생하게 그려져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았으나, 최근 보수와 진보의 정치논쟁 속에서 전쟁영웅들의 활약상이 국민들의 뇌리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구월산 유격대와 더불어 백령도를 근거로 반공유격전을 펼쳤던 일명 “8240동키부대”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윤보선 대통령이 1961년 8월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의 협조를 받아 백령도에 “반공유격전적비”를 세웠던 것이다. 제 8240 동키부대는 황해도 일대의 마을 청년들이 스스로 조직한 결사대가 모체이다. 이름도 계급도 없는 유격대가 되어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중공군, 인민군들과 거의 맨손으로 싸워온 구월산 유격대에 감동한 미군이 이들이 지낼 수 있는 막사와 싸울 수 있는 무기를 공급하면서 조직한 부대이다. 따라서 구월산 유격대는 그때부터 무소속, 무계급의 유격대가 아닌 ‘제 8240부대 동키부대’ 소속이 되었고, 1951년 초에는 2500명으로 늘어났고 휴전 직후 해체될 때까지 800명 규모를 유지했다. 그들은 각종 유격전투를 하는 동안 적 사살 4000여명 생포 57명의 놀라운 전과를 올렸으며, 1954년 백령도로 철수하기 전까지 아군과 연합군들의 사기를 올리고 작전수행에 큰 시너지를 제공했다. 하지만 지금의 옹진군 백석면 형제 바위가 있는 비산곶 전투에서 이들이 탄 배가 적 포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175명 중 171명이 전사하고, 백령도를 사수하기 위해 싸우다 결국 516명이 목숨을 바친 것은 너무도 안타깝다. 그런데 정말 더 가슴 아픈 것은 이러한 분명한 역사가 존재하지만 구월산 유격대의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보상 또한 미흡하다는 점이다. 구월산 유격대 박부서 회장은 “구월산 유격대 생존자들에게는 정부에서 1인당 16만원을 지원하고 있다”면서 “과연 이것이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 혹은 생존자들에게 주는 합당한 보상이냐?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의 희생덕택에 오늘의 평안을 누리는 우리들은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여기서 정부와 국회 그리고 언론들은 이러한 현실을 널리 알리고 적정한 보상이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 충주 여교사 협의회에서 고(故) 김재옥 여교사의 추모를 기리기 위해 설립한 비문 [사진=김희철] 민간인 최초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고(故) 김재옥 여교사와 '동락리 전투' 김재옥이 제공한 북한군 정보를 활용해 기습한 국군, '화려한' 첫 승리 거둬 1966년 임권택 감독이 영화 '전쟁과 여교사' 만들어 빅히트 동락리 전투는 6·25 남침전쟁 초기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 국군에게 희망을 심어준 첫 번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전투경과를 보면, 7월 4일 9시 충주중학교를 출발한 제6사단 7연대 2대대(대대장 소령 김종수)는 저녁에 충주 신덕 저수지에 이르러 진지를 점령했다. 제7연대장(중령 임부택)은 음성 방어가 긴급하다는 판단 하에 제1, 2대대를 무주리와 음성으로 이동 배치하고, 제3대대는 생극으로 전진시켰다. 7월 6일 북한군 제48연대는 “국군이 차를 타고 도망쳤다”라는 동락초교 ‘김재옥’ 여선생과 주민들의 말을 듣고 신양리까지 수색한 결과 국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후 안심한 듯 동락리에 진출한 야포의 엄호 아래 신양리를 경유하고 음성으로 진출하기 위해 야음을 이용, 주력부대가 차량으로 7월 7일 새벽 5시경 동락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국군 제7연대 3대대장은 공격 명령을 내렸고 적은 크게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한편 가섭산 북쪽 644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2대대는 7일 새벽 5시 고지 아래로 신속히 내려가 6시에 공격을 개시하자 기습을 받은 북한군은 당황하며 동락초등학교 교정에서 국군 제 3대대 방향으로 사격을 하던 적의 야포가 2대대 방향으로 포구를 돌리고 있었다. 이때 제2대대 8중대장 신용관 대위는 81mm 박격포 1문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이에 북한군의 포진지를 파괴했고 후속탄에 의해 야적된 포탄 상자도 연쇄 폭발됐다. 이후 제 2대대는 북한군의 저항이 거의 없이 잔적을 소탕할 수 있었다. 동락리전투에서 국군은 ▲적 사살 2186명 ▲포로 132명 ▲122mm 곡사포 6문 ▲76mm 박격포 18문 ▲기관총 32정 ▲소총 1956정 ▲장갑차 4대 ▲1/2톤 트럭 60대 ▲1/4톤 짚차 15대 ▲사이드카 7대 ▲무전기/전화기 16대 ▲말 24필과 상당량의 탄약 등을 노획하며 6·25 남침전쟁 발발 이후 최초 승리이자 최고의 전과를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비해 국군의 손실은 전사 9명, 부상 53명뿐이었다. 노획장비는 대전에서 국민에게 전시함으로써 국군의 승리를 국민에게 널리 알렸다. 노획품은 소련 제품이라는 표시가 있어, 소련이 6·25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로 유엔에 보내졌다. 승전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제 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주었다. 이 동락리 전투의 승리는 북한군의 통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북한군 실태를 국군에게 알린 동락초등학교 여교사였던 ‘김재옥’ 선생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민간인으로서 '태극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 전투는 ‘포화속으로’, ‘피어린 구월산’과 마찬가지로 1966년에 임권택 감독이 당대의 최고 스타배우 김진규와 엄앵란을 기용해 ‘전쟁과 여교사’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해 대히트도 했다. 학도의용군, 불암산 호랑이, 구월산 유격대 등 잊혀진 이름들을 다시 기억해야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참여한 것을 강조하면서 "통합된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김원봉 복권 및 서훈’을 한 때 진행했었다. 한반도를 침공하여 ‘흥남철수’, ‘1.4후퇴’ 등 동족상잔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킨 중공군의 최고지도자인 시진핑이 이번 20일 북한을 국빈 방문했다. 정부는 이번 방북으로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이후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태인 상황에서 이뤄져 북미대화 재개의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부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들은 잊은 채 남침의 책임자 중 한 명인 김원봉 서훈과 시진핑 방북 결과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김원봉 복권 및 서훈’ 보다 오히려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들의 고귀한 영혼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거국적이고 최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조선시대의 의병과 6·25 남침전쟁시 학도의용군, 불암산호랑이, 구월산유격대 등 처럼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난 '숨은 영웅들'에 대한 선양사업은 국가의 가치를 재확인시켜주는 의미가 크다. 매년 치러지는 구월산 유격대 추모행사시 제단 앞의 액자(박정희 대통령 휘호)에 적혀있는 명언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처럼 “세상이 아무리 평안해도 전쟁을 잊고 있으면 국가에 위기가 닥친다”는 뜻의 사마법의 명언을 6·25남침전쟁 70주년을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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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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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2)'구월산 여장군' 이정숙과 '동락리 전투'의 김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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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1) '불암산 호랑이'와 '물쥐 대장' 김동석
- ▲ 탑 주연의 “포화속으로”라는 영화포스터와 6.25 남침전쟁 당시 불암산에 은거하며 유격전을 펼쳤던 육사생도들과 사병들의 ‘불암산 호랑이 은거 제1동굴’ 사진 [사진제공=김희철] 20일 시진핑이 평양 방문했지만, 69년전인 ‘50년 겨울엔 중공군이 한반도 침범 ‘6·25남침전쟁’시 유격전 펼친 '불암산호랑이', 최후의 한 명까지 목숨던져 가수 진미령의 친부 고(故) 김동석 대령은 '물쥐대장', 북한군 후방 교란 대한민국 지킨 '숨은 영웅들' 기려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9년전인 1950년 겨울, 중공군이 한반도를 침공하여 ‘흥남철수’, ‘1.4후퇴’ 등 동족상잔의 비극은 더욱 심화되었다. 20일에는 미·중 무역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의 최고지도자로는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 이후 14년 만에 북한 국빈 방문했다. 이번 시진핑 주석의 방북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이후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태인 상황에서 이뤄져, 북미대화 재개의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됐다. 중공군이 추가 침공까지 한 ‘6·25 남침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었던 대한민국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절약과 근면으로 오늘날의 경제 10대 강국으로 발전을 이뤄냈다. (사)월드피스 자유연합 이사장 안재철은 오랜 시간 연구하여 6·25남침전쟁 때 대한민국을 도운 나라가 67개국임을 밝혀내고 2010년 9월 3일 영국 기네스북 본사로부터 기네스북 등재 인증서를 받았다. “이기록은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일연합군으로 지원한 세계기록”이고 앞으로도 이 기록은 깨질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국가적 절명 위기에서 구해준 해외지원국에 대한 감사와 보은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보이지 않는 희생을 통해 나라를 지켜낸 숨겨졌던 애국자분들에게도 감사하고 기억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명확히 부여되어 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된 지 하루 뒤인 ‘50년 6월 29일 수원에 모인 200여명의 학생들은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소총1정과 실탄만을 지급받아 국군혼성부대에 수십명씩 편입시켜 한강 방어선에 투입됐다. 7월말에는 대구에서 87명의 학생들이 자진입대하여 김석원 장군 휘하의 부대로 편성되어 포항에서 북한군의 4차례 파상공격을 막아내는 전과를 올렸고 이 전투는 60년 뒤에 가수 겸 배우인 탑 주연의 “포화속으로”라는 영화로 재연되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이 최소 2만여명이며 전사자도 7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육군본부가 2004년 펴낸 “학도의용군” 책자에 따르면 전쟁 중 전투참전과 치안활동, 가두선전에 참가한 학생들을 27만5200명으로 집계됐지만, 중앙학도호국단은 전투참가 학생 2만7700여명 중 전사자 1394명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문교부 통계에는 학도의용군 5만여명중 7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기록 부실로 학도병들은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다되어도 전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학도의용군도 군인이라고도 할 수 없었던 “불암산 호랑이”라는 전설같은 역사도 있었다. 6월25일 새벽 북한의 불법남침이 개시되었을 때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는 생도1기(10기)와 2기(종합1·2기)가 13대1의 경쟁을 거쳐 1949년7월15일 생도 제 1기 338명으로 입교했었고, 생도 2기는 4년제 정규과정을 목표로 28대1의 경쟁을 거쳐 1950년 6월 1일 334명이 정식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있었다. 전쟁발발 당일 제1기생 262명은 임관을 20일 남겨놓고 있었다. 북한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육사와 보병학교 교도대대가 문산 축선에 투입됐다. 뒤이어 오후1시 쯤 사관생도들을 포천축선으로 투입하라는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이 하달됐다. 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생도대대를 편성하고 오후 8시쯤 징발된 차량을 이용해 포천시 내촌면의 303고지(부평리)에 배치했다. 생도대대의 우측에는 전투경찰대대가 배치됐다. 생도대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물리쳤지만 전황 악화에 따라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생도대대는 태릉으로 철수해 포천에서 철수해온 제9연대의 잔여병력과 함께 불암산 일대에 배치됐다. 27일 밤이 깊어지면서 전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학교장은 생도들이 적진에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고 철수를 명령했다. 대부분의 생도는 28일 아침 망우리고개를 거쳐 광나루 방향으로 철수해 한강을 건넜다. 그 시기에 철수명령을 받지 못했거나 받았다 하더라도 서울을 쉽사리 적에게 내줄 수 없다는 사명 의식에 불타는 사관생도들이 있었다. 제1기생 김동원 생도는 후방으로 철수하여 몸을 숨겨 살아나가는 방법 대신 목숨을 걸고 불암산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감행하기로 하고 동료 생도들의 뜻을 모았다. 강원기·김봉교·박금천·박인기·이장관·조영달·전희택·홍명집·한효준 등 제1기생 10명과 제9연대 김만석 중사 등 부사관 2명, 병사 5명 등 총 20명의 대원이 모였다. 전 대원의 투표로 최초 유격활동을 제안했던 김동원 생도를 유격대장으로 선출했다. 조영달 생도를 제1조장, 박인기 생도를 제2조장, 김만석 중사를 제3조장으로 각각 선출했다. 암호명은 ‘불암산호랑이’로 했다. 불암산 석천암의 김한구 주지스님의 안내로 인근에 산재한 3개의 자연동굴을 은거지로 활용하기로 했다. 준비를 갖춘 유격대의 정보책으로 임명된 홍명집 생도는 믿을 만한 주민과 접촉해 북한군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공격할 목표를 선정했다. 불암산호랑이의 첫 번째 공격은 7월 11일 새벽 퇴계원에 있는 북한군 보급소 기습이었다. 이 작전에서 유격대는 보급품을 불태우고 3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김봉교·박인기 생도와 제2기생 1명 등 3명이 희생되고, 한효준 생도가 부상했다. 두 번째 공격은 7월 31일 새벽 창동역 부근에 있는 북한군 수송부대와 보안소 기습이었다. 대원들은 수류탄과 화염병을 사용해 보급차량과 사무실 등을 습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퇴각 도중 김만석 중사가 전사했다. 8월 15일 밤에 이뤄진 세 번째 공격의 대상은 생도들의 모교였던 육사였다. 당시 북한군은 육사를 의용군 훈련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유격대는 의용군으로 끌려온 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대담한 공격을 시행해 북한군 50여 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유격대장 김동원 생도 등 6명이 희생되었다. 유격대의 마지막 전투는 북으로 끌려가는 마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9월 21일 밤 진접읍 내곡리에서 적의 수송대를 기습한 것이었다. 그때 1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주민을 구출했으나, 6월 29일부터 9월 21일까지 불암산을 중심으로 80일 동안 활약했던 유격대원 전원이 계급과 군번도 없이 9.28수복을 앞두고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쓰러진 유격대원 중에서 강원기 생도가 다음날 구사일생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구출돼 군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부상 후유증으로 ‘51년 7월 10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강원기 생도의 생존 시 증언으로 ‘불암산호랑이 유격대’의 활약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석천암 김한구 주지 스님의 손자 김만홍 씨도 당시 유격대에 식사와 물을 제공했다는 사실 등을 증언했다. 그러나 불암산 유격대에 대한 정부차원의 선양사업과 무공훈장수여는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 기회에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학도병 2만7700여명과 고립무원(孤立無援) 구천에 떠돌고 계신 ‘불암산호랑이’를 포함한 7000여명의 고귀한 영혼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거국적이고 최우선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 지난 2009년 사망한 김동석 대령이 생전에 친딸인 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는 모습과 그 무수한 공적으로 한국군 사상 가장 많이 받았다는 훈장과 기념패들. [사진제공=진미령, 김희철] 휴전선 동쪽이 고성까지 올라간 이유, 김동석의 ‘HID36지구대’ 활약 덕분 가수 진미령의 부친인 김동석은 한국군 사상 최다 훈장 수여자 미국에서 출판된 “My Father's War"의 저자 황성씨는 6·25남침전쟁 당시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tachment)36지구대원이었던 황하용씨의 아들이다. 이 책에서 작가의 아버지가 활동했던 동해 영흥만은 남북첩보전의 최대 격전 지역이었고 북한인민군은 영흥만 도서에 있는 첩보부대를 타격하기 위해 하루에 300여발씩 밤낮으로 포격을 가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지휘소가 있는 여도에 포격이 집중되었다고 말했다. 황하용씨는 “당시에는 전쟁이 끝나면 영웅이 된다. 부대에 들어가면 입을 것, 먹을 것, 잘 곳을 제공해준다. 고향에 돌려보내준다, 가족을 찾아주겠다”는 말에 HID의 부대원이 된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 부대의 지휘관인 김동석 대령은 전쟁을 전후해서 160번이나 낙하산을 타고 북에 침투했었다. 그는 북한지역 첩보활동을 위해 인민군 경력이 있거나 영흥만을 거쳐 내려오는 피난민 중에 판단이 빠른 자 등 똑똑해 보이는 북한 출신들을 HID로 차출하여 편성하였다. 황하용씨도 이들 중 한명이었다. HID36지구대 첩보부대원들은 야간에 은밀히 북한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게릴라, 기습, 암살, 첩보, 납치, 주요시설 폭파 등 각종 임무를 수행했다. 밤이면 물에서 올라와 첩보활동을 펼치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36지구대 첩보원들의 활동방식 때문에 북한 인민군들은 이들을 ‘물쥐’라고 불렀고 김동석 대령은 ‘물쥐 대장’이 되었다. 백범 김구선생의 경호원을 역임했던 김동석 대령은 육사 8기로 ‘6·25남침전쟁’이 터졌을 때 중위로 중대장이었으나 전쟁기간 중 박성철이 지휘한 북한군 15사단을 낙동강전선 안강-기계전투에서 궤멸시켜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명예를 안기는 등 두 차례나 특진해 소령을 달고 육군첩보부대 HID36지구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앞서 조선 애국의용대 대장을 지내던 1945년 해방직후에는 일본 관동군 소속이었던 박정희 중위가 소련군에게 체포됐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밖에 무수한 공적으로 한국군사상 가장 많은 37개 훈장을 받았고 주한 미군으로부터 전쟁영웅 칭호를 받은 김동석 대령은 정전 직후인 1954년 2월 적진에 잠입하여 강원도 통천부근에서 매복 중, 인민군 17사단장 이영희를 납치해 귀순시킨 뒤, 일본의 미군기지로 보내 정보를 캐내도록 하는 전과도 올렸던 참군인 이었다. 목숨을 걸고 국가를 지킨 전쟁영웅을 대하는 미국과 한국정부의 태도는 극과 극이다. 미국은 끝까지 찾아내 업적을 기리지만 한국은 그 평가와 업적발굴에 인색하다. 양양의 호국사찰 '영혈사'의 HID호국영령 천도제가 유일한 위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설악산 기슭인 양양에 위치한 호국사찰 ‘영혈사’에서 조국을 위해 산화한 HID36지구대의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호국영령 천도제를 봉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국군정보사령부내의 박물관에 김동석 대령의 유품을 모아 전시하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는 소식에 약간의 위안을 갖기도 한다. 그동안 북파공작활동에 얽힌 비밀들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어왔던 김동석 대령은 작고 전인 2005년에 자신의 회고록을 발간했는데, “적진에 들어가지도 적 지휘관을 암살하지도 않았던 가짜 HID들이 설쳐, 진짜 HID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회고록 “This man"의 출판 동기를 밝히기도 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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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1) '불암산 호랑이'와 '물쥐 대장' 김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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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목선 삼척항 진입 사건과 정부가 밝혀야 할 3가지 진실
- ▲ 북한 목선이 삼척항으로 진입하는 CCTV 영상과 정박 지점 모습. [사진제공=연합뉴스] 정부 관련부처의 대응 및 처리 과정에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점 대두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북한 목선 삼척항 진입 사건과 관련, 정부 관련부처의 대응 및 처리 과정에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아 의문점이 대두된다. 은폐 및 축소 의혹을 받고 있는 군 일각에선 “군의 발표는 청와대와 조율된 내용인데 군으로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건 억울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또 청와대가 사실을 알면서도 군의 은폐 및 축소를 방치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 정부가 3가지 의문점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첫째, 해경으로부터 이미 구체적인 보고를 받아 사실을 알았음에도 합참이 다른 내용으로 발표한 이유이다. ① 합참은 17일 언론 브리핑 시 왜 해경 보고와 다르게 발표했나? 합참은 15일 3차례에 걸쳐 청와대와 함께 해경의 상황 보고를 받았다. 삼척항 방파제에 미상의 어선(4명 승선)이 들어왔고, 선원이 북한에서 왔다고 진술했다는 내용이다. 또 해당 어선은 10일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다가 13일 오후 기관 수리 후 15일 자력으로 삼척항에 입항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럼에도 합참은 17일 언론 브리핑 시 북한 어선이 기동하지 않고 떠 내려와 식별하지 못했고, 삼척항 인근에서 발견됐다고 말했다. 또 청와대 해명 과정에서 해경이 15일 보도자료를 발표한 사실을 군 당국이 알지 못한 상태임이 밝혀졌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설사 해경의 보도자료 발표를 몰랐다 해도 이미 15일 해경 상황 보고를 통해 북한 목선의 삼척항 정박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합참이 왜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17일 언론 브리핑을 했느냐이다. 또 해경 보고서에 “목선 GPS(위치추적장치) 보유”로 기술됐음에도 브리핑 당시 GPS 장착 여부를 묻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한 것도 의문이고, 이후 삼척항 정박을 언론에 밝히지 않은 이유를 묻자 “발견지점과 이동경로를 심문 중이어서”라고 답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② 군 당국의 언론 브리핑 자리에 왜 청와대 행정관이 참석했나? 둘째, 청와대 국가안보실 행정관이 군 당국의 언론 브리핑 자리에 ‘이례적으로’ 참석한 이유이다. 17일 언론 브리핑 당시 현역 군인 신분인 청와대 행정관이 사복을 입고 브리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고 알려졌다. 통상적인 국방부 언론 브리핑에는 당일 발표 사안과 관계된 부서의 책임자와 실무자 등이 참석한다. 청와대가 관심을 갖는 사안일 경우 브리핑 결과를 국방부 해당 부서에서 청와대 국가안보실로 보고한다. 따라서 청와대 행정관이 직접 브리핑룸에 앉아서 지켜보는 경우는 전례가 거의 없다. 혹시 청와대가 사전 조율을 위해 국방부로 행정관을 보냈고, 조율이 끝난 후 자연스럽게 언론 발표를 보기 위해 참석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또 브리핑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이나 상황이 발생하면 청와대가 곧바로 대응할 필요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지 여러 가지 의문이 든다. 이와 관련,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21일 기자들과 만나 "해당 행정관이 그 자리에서 국방부 관계자들과 어떤 협의나 조율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③ 통일부는 북한 선원 4명 중 2명을 왜 서둘러 북한으로 송환했나? 셋째, 1차 합동신문 결과 밝혀진 귀순 의사에 따라 북한으로 돌아가길 희망한 2명을 서둘러 돌려보낸 사유이다. 정부는 북한 선원 4명 중 2명을 ‘자유 의사에 따라’ 지난 18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정부 소식통은 “국정원·군·경찰의 1차 합동신문이 끝난 뒤 통일부가 바로 이들을 인수했다”고 말했다. 귀순 의도를 갖고 8일 간 항해하며 어렵게 한국에 와서 ‘서울에 사는 이모에게 연락하겠다’고 휴대전화까지 빌려달라던 선원 중 일부가 북한행 의사를 밝혔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통일부는 18일 “선장 동의를 얻어 북한 어선을 폐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19일 추가 브리핑에서 “북한 어선은 폐기하지 않고 동해 해군 1함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선박 폐기 여부 발표도 이처럼 다른데, 귀순 의사가 과연 맞을지 의문이 들어 돌려보낸 사유가 주목된다. 군 관계자는 “군이 경계작전에 실패한 건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은폐 및 축소 논란의 책임을 군이 모두 지는 건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했다. 또 다른 군 관계자도 “마치 군이 17일 브리핑 내용을 알아서 만든 것처럼 하는데 우리로선 억울한 측면이 있다”며 “군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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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안보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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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목선 삼척항 진입 사건과 정부가 밝혀야 할 3가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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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방산기술 보호 방안 모색하는 국제 논의의 장 열려
- ▲ 20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개최된 ‘제6회 방산기술보호 국제 컨퍼런스’에서 왕정홍 방위사업청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한경 기자] 방위사업청, 미·영·불 등 60여 개국 참여한 ‘방산기술보호 국제 콘퍼런스’ 개최 한·미 상호 정책공유 및 이해 증진 위한 ‘방산교역 아웃리치 세미나’도 열어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방위사업청은 20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효과적인 방산기술보호와 수출통제’라는 주제로 '제6회 방산기술보호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방위사업청은 2014년부터 방산기술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선진국의 정책과 관리 방법을 벤치마킹하고,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전문가들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 매년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콘퍼런스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60여 개국 정부기관과 바세나르체제(WA), 무기거래조약(ATT), NATO 사이버안보협력센터(NATO CCDCOE), 프랑스 국제전략연구소(IRIS) 등 주요 국제기구 및 연구기관과 국내의 방산기술보호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방산기술 동향을 살펴보고, 이를 보호하고 통제하기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행사는 ‘4차 산업혁명 기술융합 시대의 기술보호와 국제공조의 중요성’을 강조한 왕정홍 방위사업청장의 개회사에 이어서 안규백 국회 국방위원장, 이태호 외교부 차관, 미하엘 라이터러 주한 EU대사의 축사로 시작됐다. 이어 필립 그리피스 바세나르체제 사무총장과 하이디 그랜트 미국 국방부 방산기술보호본부 본부장의 기조연설이 있었다. 필립 그리피스 사무총장은 “바세나르체제 42개 회원국이 방산기술보호와 수출 통제를 위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으며, 한국의 콘퍼런스는 전 세계가 소통하는 기술보호 협력의 장(場)이 되고 있다”며 “한국이 기술보호 분야도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이디 그랜트 본부장은 “한국이 방산기술 보호 분야에서 역내 리더로 성장하기까지 과정을 직접 보고 싶어서 이번 콘퍼런스에 참석했다”며 “한국이 국회와 국방부 주도하에 방산기술보호체계를 갖춘 것이 다른 국가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하이디 본부장은 “방산기술보호를 위한 여정에 지도, 이동수단, 연료가 필요하다”고 비유하면서 “현 세계 상황을 정확히 보여줄 지도와 주요 기술 차단을 위한 법안, 기관, 정책 등의 이동수단 그리고 국제적 파트너십, 참여, 교류 같은 연료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본 세션에서는 국제 수출통제 정책과 발전 방향, 방산기술보호 제도 및 시스템 발전 방안,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방산기술보호 패러다임 전환을 주제로 15건의 발표가 진행됐다. 고려대 국제대학원 박성훈 교수,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손승우 교수,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임종인 교수가 각 세션의 좌장을 맡아 첨단 방산기술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 기술적인 방법론에 대한 심도 있는 발표와 토론을 유도했다. 이번 콘퍼런스는 과거에 비해 더욱 짜임새 있는 구성과 발표자들의 알찬 내용으로 참석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 발표자의 심도 있는 내용에 비해 외국 발표자들의 일부 내용이 너무 개괄적이란 의견도 제기됐다. 방위사업청 김종출 국방기술보호국장은 “60여 개국 500여 명이 참가한 이번 콘퍼런스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방산기술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국가들 간 기술보호 협력 관계를 형성해 방산수출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행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콘퍼런스 개최 현장에는 방산업체를 대상으로 ‘방산기술보호 수출입 상담 컨설팅’ 부스도 마련됐다. 또한 방사청은 이번 콘퍼런스와 연계해 19일 상호 정책 공유 및 이해 증진을 위한 ‘한·미 방산교역 아웃리치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기술보호와 절충교역 지원 활동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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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방산기술 보호 방안 모색하는 국제 논의의 장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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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 국민의 위문 손편지에 압록강 국경수비대장 꿈을 키우다…
- ▲ 방탄조끼와 우의를 입고 DMZ 안개바다 속에서 계곡과 능선을 누비는 모습[사진제공=김희철] DMZ안개바다의 孤島, 마도로스 GP장의 꿈은 DMZ가 아닌 압록강 국경수비대장.. ‘내 생명 조국을 위해…’,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정신자세로 “화랑대에서 동작동까지…….” 정성어린 국군장병 위문 손편지가 전방을 지키는 힘이 되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유난히 밝은 달빛아래 비치는 희미한 산등선과 계곡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찾기 위한 투쟁을 밤새도록 하면 눈은 올빼미가 되고 귀는 토끼귀가 된다. 이곳 저곳 기웃대면서 피곤에 지친 소대원들을 격려하고 졸고 있는 병사들을 깨우다 보면 어느덧 동녘은 훤하게 밝기 시작하고, 골짜기 골짜기에서 서서히 안개가 피어 오른다. 샘 솟 듯 피어나던 안개는 하나 둘 씩 모여 시내물이 되어 흐르고, 다시 모여 강이 되고, 점점 안개바다가 되어버린다. 보이던 산등선과 계곡은 안개바다에 잠기고 우뚝 솟은 GP만이 돗단배가 되며 마도로스 GP장은 홀로 외로운 항해를 떠난다. 저 멀리서 파문을 일으키며 몰려오는 안개 파도를 헤치고 낚싯줄울 길게 드리우고 월척(간첩/공비)을 찾아 잡는 고깃배 …., 필자는 그 외로운 어선의 선장이 되어 안개바다 속을 계속 항해했었다. 얼마후에는 이 배(GP)에서 하선하여 잠수복으로 갈아입고 DMZ지뢰밭을 누비며 직접 수색과 매복작전을 통해 월척(간첩/공비)사냥에 나서게 된다. 관측하고 보고 만하는 마도로스에서 大漁(간첩)를 찾아 직접 잡는 마도로스 어부(작전소대)로 교대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GP를 인계하고 DMZ수색/매복작전을 담당하는 소대로 임무를 교대할 때를 앞두고 840m거리의 적 민경초소를 볼 때는 갑자기 내 눈에 살기를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도 가까운 거리의 적 민경초소에 몰래 뛰어가서 몇 놈의 목이라도 따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의(戰意)가 불타던 생도시절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지뢰밭과 마주 보는 적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을 코 앞에 둔 DMZ안개바다는 너무도 평화롭다. 生과 死의 교차로에 서있는 군인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타성에 젖은 것인가? 그래도 필자가 근무한 GP는 사단에서 적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VIP코스였다. 적을 관측하고 심리전을 전개하며, 상급 기관 및 외국 손님까지 방문하는 곳이라 바쁘게 근무하다 보니 어느덧 교대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교대를 얼마 앞두고 대대교육관 김중위에게서 전화가 왔다. 참모 중대장들과 심의를 했는데 필자가 지휘한 소대가 최우수GP소대로 선정되어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대대 본부에서는 위생병이 군생활에 회의를 품고 자살하는 사고가 있었다. 또 휴가 병사는 집에서 놀러갔다가 뱀에 물려 인접사단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도 발생하여 부대원들의 사기가 침체일로에 놓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대대장이 방문한다는 전달이 왔다. 당시의 전기사정은 좋지 않았다. 수시로 전기가 끊어져 급수도 직접 물지게로 운반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날도 전기가 끊어져 대대장 방문 대비 보고서도 어쩔 수 없이 석유 호야등 밑에서 급하게 작성했다. GP내무반에까지 들어오신 대대장은 소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최우수 GP소대 표창’을 수여해 주셨다. 표창장을 받아 든 소대원들은 자신들이 前 소대장을 상급부대에 청원하여 보직해임시킨 장본인이란 것을 잊어버린 채 사기는 하늘을 찌르며 천정의 유리를 깼다. 그런데 필자는 표창장을 받아 들고도 배가 고팠다. 필자가 생도시절 “화랑대에서 동작동(현충원)까지...”를 외치며 견위수명(見危授命) 하는 자세로 지키고 싶은 곳은 남북으로 분단된 반쪽짜리 국경선이 아니라 진정한 한민족의 국경선인 ‘압록강 국경수비대’에서 군인으로 국경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의 꿈은 ‘압록강 국경수비대장’이었으나 현실은 DMZ 한 가운데 외롭게 떠있는 섬 중에 하나인 GP장이었다. 제한된 인원들과 동거동락하면서 근 6개월 가까이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을 하면 따분하고 지루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답답함을 해소시켜주고 힘을 불어 넣어주는 것들이 존재했다. 간혹 사단 심리전부대에서 심리 요원인 여군하사들이 GP를 방문해 적 민경초소에서 잘 보이는 관측대에서 노래도 하고 병사들과 춤을 추며 심리전을 전개할 때는 GP 축제의 날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라 부모형제나 친구들의 손편지가 사기고양에 큰 도움이 되였다. 여자 친구의 편지나 선물이 오면 본인 뿐만 아니라 타 전우들도 모두 들뜨는 분위기 였다. 특히 정성어린 어머니의 편지를 전 소대원들에게 낭독할 때에는 눈물이 글썽해지는 소대원들도 있었다. 소대장은 국가를 위하기에 앞서 동거동락하는 소대원들을 보며 그들을 위해 위험한 임무도 마다하지 않는다. 소대원들은 학생들을 포함한 국민들의 장병 위문 손편지와 선물 보따리를 받을 때 외로운 고도에서 혼자만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응원해주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임무를 다한다. 최전방에서 근무를 하다가 후방으로 재 배치 받은 동료 장교들까지도 전방 생활에 대한 애틋함과 추억에 전방 동료에게 격려와 위문을 했었다. 국민들의 위문편지처럼 장병들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군인들은 존재한다. ▲ 태릉 화랑대 대강당 입구에 있는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는 기념비와 일기장[사진제공=김희철] 지금도 최전방 155마일 휴전선의 DMZ 안개바다와 푸른 하늘과 바다에서 우리의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피끓는 젊음을 불사르고 있는 많은 참군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국민들의 사랑과 응원을 받는 그들의 꿈은 아마도 ‘압록강 국경수비대’ 처럼 통일된 미래의 조국 영토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을 것이다. 생도시절, 태릉 화랑대 대강당 입구에 있던 “내 생명 조국을 위해..”라는 기념비 앞에서 청운(靑雲)의 꿈을 키우며 “화랑대에서 동작동(현충원)까지…”를 한없이 외쳤었다. 이 한 목숨을 국가를 위해 바치겠다는 각오를 잊지 않고 실천하는 참군인이 많아 질수록 우리나라는 더욱 번영하는 강국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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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 국민의 위문 손편지에 압록강 국경수비대장 꿈을 키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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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방산 명품] (4) 대우조선해양의 ‘1400톤급 잠수함’ 인도네시아에 2조3천억 원대 수출
- ▲ 2016년 3월 24일 거제 옥포조선소에서 열린 인도네시아 수출 잠수함(1번함) 진수식에서 리아미잘드 리아꾸두 인도네시아 국방장관, 방위사업청 정우성 단장, 대우조선 정성립 사장 등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대우조선해양] 대한민국은 40여년 만에 전차, 장갑차, 자주포, 미사일은 물론 함정, 잠수함, 고등훈련기까지 거의 모든 무기체계를 생산하는 신흥 방산강국이 됐다. 뉴스투데이는 한국의 방산제품 중에서 세계로 수출되거나 수출 가능성이 높은 명품을 선정하여 소개하는 ‘수출 방산 명품’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2011년 1차 사업 3척(1조 2000억 원)과 이번 2차 사업 3척(1조1600억 원) 수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 잠수함 수출국 반열에 올라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지난 4월 12일 대우조선해양은 인도네시아로부터 1400톤급 잠수함 3척을 수주했다. 총 계약 규모가 10억2천만 달러(1조1천600억 원)에 달하며, 지난 2011년 인도네시아에 1400톤급 잠수함 3척의 수출 계약을 최초로 체결한데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수주다. 대우조선해양은 2004년 인도네시아 잠수함 창정비 사업 수출을 시작으로 2011년 당시 세계적인 잠수함 건조 강국인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을 제치고 약 11억 달러(1조 2000억 원) 규모인 인도네시아 잠수함 도입 1차 사업의 계약을 따냈다. 국산 중형승용차 7만 3000여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 액수로서 역대 방위산업 수출 단일계약 중 최대 금액이었다. 인도네시아 수출 성사로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잠수함 기술을 다른 나라에서 전수받아 자국의 잠수함을 건조한 후 수출까지 하는 최초의 나라가 됐다. 독일로부터 기술을 배워 잠수함을 만들었던 한국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 잠수함 수출국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2011년 계약한 1차 사업의 잠수함 3척은 2017년 '나가파사(NAGAPASA) 함'으로 명명된 1번 함에 이어 2018년 2번 함까지 국내에서 건조돼 인도네시아로 인도됐다. 3번 함은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지역 PT. PAL 조선소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공동으로 건조해 이번 2차 사업 계약식 날 진수됐다. 이번 2차 사업 계약은 수출 침체로 고심하는 국내 방산업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고, 선박 건조 중 가장 고난도인 잠수함 건조기술을 해외에서 확실히 인정받은 '쾌거'란 평가다. 이로 인해 한국은 잠수함 수출국의 입지를 확고히 다지게 됐고, 왕정홍 방위사업청장은 계약식에 참석해 “한국 정부도 원활한 사업 추진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대우조선해양이 인도네시아에 수출하는 1400톤급 잠수함은 1988년 말 독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1200톤급(장보고급) 잠수함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기술연구 개발 끝에 독자 개발한 국내 최초의 수출형 잠수함이다. 1400톤급 잠수함은 길이 61m로 40명의 승조원을 태우고 중간기항 없이 1만 해리(1만8천520㎞)를 항해할 수 있다. 부산항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항까지 왕복할 수 있는 거리이다. 향후 30년 이상 운용될 이 잠수함들은 인도네시아 해상 안보와 영해수호 활동 및 연합해군 작전 등을 수행하게 된다. 방사청 관계자는 "이번 2차 사업 계약으로 동남아 잠수함 시장을 개척하는데 한국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고, 방산업계 관계자는 "수출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잠수함을 건조해 판매한 경험이 있는지가 최우선적인 평가 항목"이라면서 "고압의 심해를 운항하는 잠수함 건조기술은 고난도의 최첨단 선박 건조기술의 총합체"라고 강조했다. 한국군, 장보고급인 1200톤급과 손원일급인 1800톤급 각각 9척씩 보유 중대형 잠수함인 3000톤급도 확보, 작년 9월 도산안창호함(1번함) 진수 한국군 최초의 잠수함은 장보고급으로 분류되는 1200톤급 잠수함이다. 독일 209급 잠수함을 도입한 것인데, 1987년 1차로 3척이 주문됐다. 1번함은 독일 호발츠베르케-도이체(HDW) 조선소에서 건조됐으며, 2번함은 대우조선해양이 독일에서 갖고 온 부품을 옥포대우조선소에서 조립해 건조했다. 3번함부터는 부품에서 건조까지 모든 제조 과정이 국내에서 이뤄졌다. 1989년 10월에 2차로 3척이 주문됐고, 1994년에 3차로 3척이 추가 주문돼 모두 9척이 건조됐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건조기술을 기반으로 기존 장보고급을 개량한 1400톤급 잠수함이 만들어졌다. 1993년 1번함인 장보고함이 최초로 취역했고, 2000년 이억기함을 마지막으로 총 9척이 취역해 임무를 수행 중이다. ▲ 지난해 9월 14일 3000톤급 도산안창호함 진수식이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열렸다. [사진제공=대우조선해양] 두 번째 잠수함은 손원일급으로 분류되는 1800톤급이다. 독일 214급 잠수함을 도입한 것으로 수중에서 외부 공기의 흡입 없이 공기를 발생시켜 추진하는 ‘공기불요추진체계(AIPS)’를 갖춰 2주간 수중작전이 가능하다. 1차로 건조하는 3척은 2000년 현대중공업이 계약을 따냈고, 이후 6척은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이 교대로 1척씩 건조했다. 2007년 1번함인 손원일함이 취역했고, 2018년 신돌석함이 끝으로 취역했다. 해군은 214급에 더해 중대형 잠수함인 3000톤급 잠수함까지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대우조선해양은 독자적인 잠수함 설계 및 건조 역량을 증명했다. 지난해 9월 진수한 ‘도산안창호함’은 기존 214급과 비교해 약 2배 정도 커졌으며, 공기불요추진체계에 고성능 연료전지를 적용해 수중 잠항기간도 늘었다. 3000톤급 잠수함은 2020년 취역 예정이며, 연안 방어를 넘어 전방위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한국은 209급이 처음 취역한 1993년 당시 세계에서 43번째로 잠수함 보유국에 이름을 올렸지만 그동안 끊임없는 기술 개량과 노하우 축적으로 이제는 잠수함을 건조해 수출하는 5번째 나라가 됐다. 잠수함 기술 도입국에서 잠수함을 만들어 수출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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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방산 명품] (4) 대우조선해양의 ‘1400톤급 잠수함’ 인도네시아에 2조3천억 원대 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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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화웨이 통신장비 '백도어' 검증 불가능, ‘소스코드’ 받아야 확인돼
- ▲ 지난해 9월26일 중국 베이징 PT엑스포의 ‘화웨이’ 전시관에서, 한 직원이 랩톱 컴퓨터로 5G 무선 기술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과기부, ‘5G보안 기술자문협의회’ 통해 “화웨이 보안상 결함 없다”고 결론 문제 핵심인 ‘백도어’ 검증 여부 언급 없어...‘국민 기만행위’에 불과 전문가들 기자와 만나 "화웨이가 '소스 코드' 주기 전엔 확인 불가능" 주장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미국과 중국 간 기술 냉전을 초래한 화웨이 5G 통신장비의 ‘백도어’ 설치 유무는 장비를 사용하는 기업 혹은 국가가 확인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예상된다. 익명을 요구한 복수의 네트워크 전문가들은 지난 16일 기자와 만나 “화웨이 장비의 백도어 유무는 화웨이가 소프트웨어의 소스코드를 제공해야만 확인이 가능하다”면서 “하지만 어떤 글로벌 통신장비 회사도 개발기술을 담은 소스코드를 제공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화웨이 백도어 문제를 검증하겠다며 지난해 10월부터 8개월 동안 ‘5G보안 기술자문협의회’를 구성·운영해 온 것은 ‘국민 기만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백도어’란 사용자 인증 등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응용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시스템 보안이 제거된 비밀 통로로서 통상 서비스 유지·보수의 편의를 위해 개발자가 만들어 사용한다. 지난달 27일 일부 언론은 “정부가 보안 전문가들과 함께 5G 통신장비에 대해 8개월간의 점검을 마친 결과 화웨이 장비에 보안상 특별한 결함은 없는 것으로 사실상 결론이 났다”고 보도했다. 5G보안 기술자문협의회는 5G 네트워크에 대한 국민들의 보안 우려를 해소하자는 취지로 정부가 주도해 산·학·연 보안전문가,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이동통신 3사, 한국인터넷진흥원, 과기정통부 등 20명 내외로 구성됐다. 궁극적인 목적은 화웨이 장비의 백도어 유무 검증이었고, 대다수 국민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협의회를 구성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협의회에서는 8개월 동안 화웨이를 포함해 삼성전자, 노키아, 에릭슨 등 통신사들이 사용하는 모든 5G 장비의 보안 기능을 점검했다. 협의회 참석자, "기술 표준에 맞는지 여부만 점검...보안문제 드러나기 어려워" 협의회에 참석한 정부 측 한 관계자는 “다른 통신장비 업체에는 없고 화웨이에서만 발견된 보안상 결함은 없었다”며 “반대로 화웨이 장비에는 문제가 없지만 다른 업체 장비에서 발견된 보안상 결함은 있었다”고 밝혔다. 기술적인 점검을 맡은 학계측 관계자는 “통신사와 통신장비 업체에 보안요소 점검 항목을 요청해 이를 기술 표준에 맞는지 점검하는 방식이어서 그 이상으로 장비 하나하나를 다 뜯어보는 것은 쉽지 않다”며 “장비 자체에 보안 문제가 있으려면 실질적으로 누군가 공격을 가해야 하기 때문에 사전에 보안 문제가 드러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협의회에 참석한 관계자들의 표현을 보면, 점검할 대상에게 자신들이 점검 받을 항목을 요청해서 기술 표준에 맞는지 확인하는 수준의 보안 점검을 했다는 얘기다. 즉 원래 목적이었던 통신장비의 백도어 유무를 검증하는 활동은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옥연 교수 컨퍼런스서, "백도어 제조사외 확인 불가능, CC인증으로 검출 안돼" 해커 출신 보안 전문가 "백도어 찾기보다 백도어 이용 공격 포착 기술 개발 필요" 이와 관련, 지난 13일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주최한 ‘2019 국방보안 콘퍼런스’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옥연 국민대 정보보안암호수학과 교수는 “4G, 5G 모두 핵심 네트워크 장비의 백도어 (설치) 문제는 제조사 외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며 “정상적인 보안 기능 시험 성격이 강한 CC(국제공통평가 기준) 인증으로는 백도어 검출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통신사에서 백도어 검출이 불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국가의 핵심통신망에 대한 합법적 잠입도 가능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미국이 우려하는 것도 이런 부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말했다. 개발과정에서 만든 백도어가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으면 인증되지 않은 사용자에 의해 시스템 기능이 무단으로 사용되는 등 컴퓨터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 또 개발자나 제조사가 다른 의도로 백도어를 만들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한 해커 출신 보안 전문가는 “최초 장비 공급 시에는 백도어를 설치하지 않았다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과정에서 백도어를 집어넣을 수도 있다 “면서 “백도어를 찾으려는 노력보다 백도어를 이용한 공격이 시작될 때 포착하는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대부분 전문가들, " 백도어 검증이 제조사외 불가능한 것은 상식의 영역" 정부, 중국 의식해 협의회 결과 발표없이 정리하며 시장에 맡기는 분위기 대다수 보안 전문가와 네트워크 전문가들은 통신장비의 백도어 설치 여부는 개발자나 제조사외에는 확인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주관한 협의회에서는 그런 전문가들을 모아 8개월 동안 점검한 결과 보안상 결함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면죄부를 줬다. 그러면서 5G보안 기술자문협의회는 이 같은 결론에 대해 공식적인 발표를 하지 않고 내부 보고로 조용히 끝내는 분위기다. 정부가 어떤 방향을 정하기보다는 통신 시장의 해석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화웨이 통신장비의 백도어 설치 유무를 검증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는데, 백도어에 대한 언급은 사라지고 보안상 결함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슬그머니 정리하는 모양새다. 이런 정부를 국민들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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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화웨이 통신장비 '백도어' 검증 불가능, ‘소스코드’ 받아야 확인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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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6) 대한민국 지뢰 잔혹사를 돌파한 어벤저스들
- ▲ 목함지뢰 3발 폭발, 수색 중인 부사관 2명에게 중상 입힌 DMZ 지뢰도발 현장 [방송화면 캡처]2015년 북한군이 불법매설한 목함지뢰 밟은 우리 부사관 2명 중상 6·25전쟁 이후 지뢰매설 추정치, DMZ 남측 127만말 북측 80만발 2001년부터 민간인 지뢰사고는 40건, 군 사고는 26건이 발생, 휴전 후 4000명 피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대한민국은 6.25전쟁 이후 수십년 동안 '지뢰 잔혹사'를 겪어왔다. 그 가슴 아픈 역사를 정면돌파해온 숨은 어벤저스들을 소개한다. 2015년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불법으로 침범해 서부전선 DMZ 철책 통문에 의도적으로 매설한 목함지뢰에 의해 DMZ수색작전 중 우리 부사관 2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軍은 북한의 도발에 의해 피해도 입지만 기존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면서도 많은 인명 손실을 겪는다. 최근 국제 민간기구 ‘국제지뢰금지운동’(ICBL)도 DMZ의 경우 1㎡당 2.3개꼴의 지뢰가 매설돼, 세계 최고 수준의 지뢰 밀도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DMZ 전 지역은 6·25전쟁 이후 출입이 통제된 미확인 지대로 지뢰 매설량을 추정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것이 국방부의 공식 입장이다. 하지만 한국지뢰제거연구소는 각종 군 자료를 토대로 남측에는 127만말, 북측에는 80만발, 합계 약 200만발의 지뢰가 묻힌 것으로 추정했다. 또 남한 지역에만 DMZ에 52만발, 민통선 이북에 74만발, 민통선 이남에 1만발이 설치된 것으로 봤다. 문제는 전체 지뢰지대 중 미확인지대가 94.8%나 된다는 것이다. 특히 DMZ 내부의 경우 기확인지대가 2.7%뿐으로 사실상 모든 지역이 미확인지대다. 철책선 순찰로 옆에는 ‘들어가면 죽는다’, ‘미확인지뢰지대’ 등의 경고판이 곳곳에 있다. 국방부는 대인지뢰 90만발로는 M2, M3, M14, M16A1 등을, 대전차지뢰는 M6, M7, M15 등을 DMZ에 묻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부분이 6·25전쟁부터 1980년대까지 묻은 냉전의 산물이다. 약 40만발 묻힌 발목지뢰로 불리는 ‘M14’는 플라스틱 재질로 무게가 9.4g에 불과해 폭우가 오면 유실되곤 한다. 밟으면 발목을 앗아 간다. M16A1은 밟으면 공중으로 도약해 폭발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 DMZ수색작전 중 우리 부사관 2명에게 중상을 입힌 북한의 대표 지뢰인 ‘목함지뢰’는 폭약의 파괴력이 M14의 7배다. 나무 상자에 TNT폭약을 넣었기 때문에 홍수가 나면 물에 떠서 유실되곤 한다. 2001년부터 2016년까지 민간인 지뢰사고는 40건, 군 사고는 26건이 발생했다. 휴전 후부터 따지면 4000명이 넘게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 전방지피와 지뢰제거 공병팀의 시범모습[사진제공=국방부] 1982년 GP장 시절 인근부대 지뢰제거 중 폭발로 간부 순직 및 병사 실명 1987년 지뢰제거에 솔선수범(率先垂範) 하다 순직한 故 강병식 대령 1982년부터 필자가 근무했던 승리부대는 GP현대화 및 추진철책 공사 위해 많은 부대가 DMZ에 투입됐다. GP장근무를 하면서도 GP현대화공사장 확장과 진입로 개척을 위해 주변 지뢰 제거작업을 했다. 어느날 인접 GP에서 유승한 중위(학군19기)와 한황진 중위(육사37기)가 진입로 개척을 위해 불도저까지 동원하여 지뢰 제거 및 도로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유중위는 안전을 책임지는 선탑자로서 불도저에 타서 운전병을 통제하였고, 한중위는 소대원들을 데리고 주변 경계를 하였다. 불도저의 삽날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순간 ‘꽝’하는 소리와 함께 대전차 지뢰가 터져 삽날1/3이 파편이 되어 흩어졌고 도져는 부서진 삽날을 들어 올린채 지뢰지대로 점점 더 들어갔다. 지뢰폭발로 흩어진 파편은 운전병의 양눈을 파고들었고 선탑자 유중위와 한중이도 온몸에 파편이 박혔다. 다행이 모두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치명상은 아니였지만 안면이 피범벅이 되었다. 선탑자 유중위는 양눈에서 피가 흐르는 운전병 대신 불도저를 급정거 시키고, 상급부대에 사고 보고를 했다. 아찔한 순간이 었다. 사전 지뢰탐지를 했지만 깊히 밖혀 있던 지뢰를 찾지 못한 탓에 사고가 발생했고 의무후송을 간 운전병은 실명하고 두명의 중위는 얼굴이 곰보가 되어 있었다. 필자가 GP장을 마치고 DMZ추진철책 설치를 위한 지뢰지대 개척 작업시에는 소대원들 모두 머리카락과 손톱을 깍아 유서와 함께 편지봉투에 넣어 소대에 보관하고 DMZ로 투입했었다. 인접 사단에서 중대장 근무를 하던 이충원 육사동기는 지뢰제거 작전시 지뢰폭발로 중상을 입어 장기간 입원치료를 받았고, 훗날 유신사무관으로 나가 통일부에 근무하기도 했는데 그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 전방 민통선 이북에서 지뢰제거중인 국군장병 모습[사진제공=국방부] 1987년 필자가 사단작전장교 근무시절 당시의 전초(GP담당)대대장 고(故) 강병식대령(육사31기)은 GP주변 지뢰제거 임무를 부여받고 맨 선두에 서서 지뢰제거를 하다가 M16A1 대인지뢰 폭발로 두다리가 절단되어 순직했다. 바로 뒤에 있던 중대장과 소대장도 부상을 당해 후송되어 간신히 회복되었으나 트라우마 때문에 군생활을 다하지 못하고 조기 전역했다. 지휘관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맨 앞에서 “나를 따르라(Follow me..!)”하는 솔선수범(率先垂範)을 보이는 위치이다. 강 대령은 대대장으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지뢰제거의 선두를 맡길 수도 있었는데 너무도 부하들을 사랑한 나머지 모범을 보였고, 안중근 장군의 유묵처럼 ‘견위수명(見危授命, 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친다)’을 실천하다 순직했다. 필자가 DMZ추진철책 설치를 위한 지뢰지대 개척 작업 임무를 수행하다가 상급부대 명령에 의해 대대본부 작전항공장교 보직을 받고 소대장직을 인계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 그 소대의 선임하사도 지뢰폭발로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군인들의 위국헌신(爲國獻身)하는 자세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국민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국가를 위해 임무를 완수하는 군인들과 운명을 달리한 순직자들에게 감사하고 추모하며 보답을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순직한 이들을 최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 그러나 현 대통령은 지난 11월 ‘연평도 포격도발8주기 추모식’과 이번 3월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또한 현충일 천안함-연평해전 유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해놓고 김정은 사진 테이블에 올려놓아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 씨 등 가족들을 울먹이게 만들었다. ▲ 2019년 ‘518민주화운동기념식’에서 문대통령이 기념사하는 모습[동영상캡쳐] 하지만 문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기념식’에 참석하여 장시간의 기념사까지 하였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음의 공포 속에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을 국가통수권자가 간과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문대통령은 국군의날 기념식 및 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근간은 도발을 용납하지 않는 군사력과 안보태세"이고 "이기는 군대가 돼야 한다"면서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해서 강조했다. 대통령의 기념사처럼 “국가다운 국가, 싸워 이기는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나라를 위해 생사의 기로에서 주저함 없이 임무를 수행하다 희생한 전몰장병들과 그 가족들을 최우선으로 끝까지 책임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정부의 배려와는 무관하게,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현재 이 시각에도 견위수명(見危授命)하는 우리의 자랑스런 국군장병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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