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보기
-
-
국방부, 군복 불법 유통 막기 위한 민·관·군 협의회 최초로 개최
-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입지 않는 군복의 불법 유통을 막기 위한 민·관·군 협의회가 처음으로 열렸다고 국방부가 30일 밝혔다. 이날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협의회에는 국방부, 환경부, 경찰청, 관세청 등 정부 부처와 중고나라, 번개장터, 당근마켓, 헬로마켓 등 국내 4대 온라인 중고마켓, 중고의류 수출업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군복단속법에 따라 군복은 시중에서 거래할 수 없으며, 적발 시 벌금형 등의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온라인 중고마켓에서는 빈번히 거래되고 있고, 중고의류 수출업체를 통해 해외로 유출돼 동남아 등지에서 한국 군복이 종종 유통되는 게 현실이라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이에 이날 회의에서 국내 4대 온라인 중고마켓은 '부정군수품 거래 금지' 안내문을 게시하는 등 군복 불법 유통을 막기 위해 더욱 노력하기로 했다. 또 (주)한국의류섬유재활용협회와 (주)기석무역 등 중고의류 수출업체는 의류 수거 시 군복이 발견되면 즉시 국방부 조사본부에 알리고 군에 반납하거나 자체 폐기 처리하기로 했다. 국방부는 장병과 예비군 대상 관련 교육을 철저히 하고 전역 시 소지할 수 있는 사계절용 한 벌, 여름용 한 벌 등 군복 두 벌을 초과해 가져가지 않도록 확인 절차를 강화할 방침이다. 아울러 군복류 불법 유통 근절을 위해 국방부, 환경부, 경찰청, 관세청이 참여하는 범부처 단속반을 연중 지속해서 운영하고 민·관·군 협의회를 정례적으로 열기로 했다. 김윤석 국방부 전력자원관리실장은 "불용 군복류 불법 유출은 위법행위일 뿐 아니라 국가안보를 저해하는 요소라는 점에 민·관·군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
- 외교안보정책
- 국방
-
국방부, 군복 불법 유통 막기 위한 민·관·군 협의회 최초로 개최
-
-
[김희철의 전쟁사(46)]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휴전 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러 양측의 뺐기고 뺐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1953년 7월, 또한번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공록 대위는 국군11사단 20연대 9중대장으로 중부전선 금성지구 격전지 적근산 전투에 투입됐다. 이 대위는 평북 강계가 고향으로 1947년 혼자 월남했다. 1950년 육군사관학교가 4년제 정규과정으로 바뀌면서 생도를 모집했는데 그는 2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여 6월 1일 입교했다. 그러나 입교한 지 24일만에 전쟁이 터졌다. 그날로 경기도 포천 전투에 투입됐다. 사람들은 생도들로만 구성된 부대를 '육사생도대대'라고 불렀다. 포천 지역은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집중 운용하며 쳐내려왔다. 우리군은 남쪽으로 계속 밀렸다. 태릉·광나루·수원·포항 전투…. 전투가 계속되면서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해 8월 살아남은 생도들이 부산 동래에 모였다. 이미 86명이 전사했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됐고, 9주 훈련을 마친 뒤 다시 전선에 투입됐다. 그들은 6.25남침전쟁 동안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던 1953년 7월, 이공록 대위가 지휘한 11사단 20연대 9중대는 13시간 철야 행군 끝에 적근산 자락에 도착하니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주먹밥 하나로 허기를 달래고 밤잠을 청했으나 포성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목표는 중공군이 장악한 602고지였다. 한여름 폭염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앞에도 뒤에도 용맹한 국군들은 거침없이 내달렸다. 적이 던지는 수류탄을 되집어 던지며 돌격했다. 하지만 완강한 적의 저항에 아군 피해만 늘었다. 적 포탄 한 발에 우리 병사 2~3명씩이 쓰러졌다. 이 대위 눈앞에서 피 흘리며 쓰러지는 부하들을 보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 병사의 왼쪽 어깨를 관통한 총알이 오른쪽 겨드랑이를 뚫고 지나갔다. 그 병사가 몸을 질질 끌고 와 그의 앞에서 휙 쓰러졌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헬리콥터가 있으니 조금만 참아라"고 거짓말했다. 그게 그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줄 수 있기 바라며…. 1차 공격에 실패한 뒤, 야간 공격을 하기로 했다. 남은 중대원을 확인하니 장교는 9중대장 이 대위와 부중대장인 이순택 중위뿐이고, 병사는 90명에 불과했다. 소대장 4명을 포함해 7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이다. 엄청난 죄책감이 밀려왔다. 9중대장 이 대위는 분노에 북받쳐 소리쳤다. "이제 우리 중대는 중대장 없이 제1소대는 내가, 제2소대는 이 중위가 지휘한다. 기필코 602고지를 점령하자." ■ 전투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청춘들의 출혈을 멈추게 한 ‘휴전 협정’ 조인 또다시 피 튀기는 전투가 시작됐다. 이공록 대위와 부중대장은 각각 단독으로 공격해 정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11사단 20연대 9중대의 돌격대가 1시간 만에 목표를 점령했다. 대대장에게 목표 점령을 보고하고 증원 부대를 요청했다. 그런데 목표를 점령하고 만나기로 약속한 이 중위가 보이지 않았다. 무전기로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수소문했더니, 공격 도중 적 포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이 대위는 넋을 잃었다. 장교 신분도 잊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남은 대원은 60명이었다. 중대 병력의 3분의 2가 희생됐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모두 얼빠진 사람처럼 축 늘어져 산 송장 같았다. 그는“이렇게 많은 부하를 희생시키고 혼자 살아남았다니…. 차라리 적의 포탄이 내 몸에 덮쳐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중얼 거렸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욕심도 없어졌다. 이 대위는 총을 집어 들었다. 총구를 왼쪽 가슴에 대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그 순간, 지쳐 늘어져 있던 병사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을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생사를 함께 하자고 약속한 전우들 아닌가. 이 대위는 벌떡 일어났다. 그 병사 어깨에 손을 얹고 "잘 싸웠다! 어디 다친 데는 없나?" 하고 말을 건넸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그도 이 대위와 거의 같은 또래다. 이 대위 나이 스물셋. 병사들 중엔 이 대위와 나이가 같거나 2~3살 위인 사람도 많았다. 7월27일 아침, 예측할 수 없는 하루가 또 시작됐다. 오늘도 죽고 죽이는 포격전이 계속되겠지. 그때 통신병이 전화라며 달려왔다. 새로운 공격 명령일 거라 생각했는데 부드러운 대대장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 10시를 기해 모든 사격을 중지하라는 상부의 지시다." 휴전이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 처절했던 적근산 전투를 회상하며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 전쟁 직후 이 대위는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삶과 죽음을 같이했던 그의 부하와 전우들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는데도 그는 군복을 벗을 수 없었다. 1969년 월남전에 파병돼 1년 2개월간 싸운 뒤, 귀국과 함께 중령으로 예편했다. 참전했던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전쟁 때 육사를 제대로 마치지 못해 40년 넘게 졸업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 1996년 입교 46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포천에는 전쟁 때 죽은 동기생 86명의 참전비가 있다. 이공록 대위는 “죽은 그들과 살아남은 ‘육사 생도 2기생’들에게도 참으로 행복했던 생도 시절이 있었다. 단 24일뿐이었던...”이라고 한마디를 남겼다. 또한 1981년 9월 적근산 전투에서 생존한 이한설 목사는 “전쟁을 겪어보지 않아 그 참혹함을 모르고 전쟁을 잊고 사는 이들과 내가 목숨을 걸었던 그 곳에서 밤낮으로 철책을 지키는 손주 같은 장병들이여,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한다. 나라가 힘이 있고 부강해야 다시는 이땅에서 그 날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국군이 있다. 국민들은 군을 신뢰하고 군인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복무해야 한다. 기억하자. 그날의 비극을 …”이라고 증언을 마무리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46)]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하)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80)] 진급과 출세가 직업군인의 목표만은 아니다(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기원전 1200년경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목마 속에 숨어 성내로 침입하여 잠깐의 승리로 방심한 트로이성을 함락 시켰다. 허나 “신은 인간을 질투한다. 왜냐면 인생은 끝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던 아킬레우스는 마지막 순간에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쏜 독화살에 맞아 죽었고,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기록된 영웅이 되었다. 아킬레우스의 말처럼 인생은 끝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래서인지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쓴다 할지라도 목숨은 하늘의 뜻에 달렸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려 따를 뿐이다”라는 뜻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말하며 신 앞에서 겸손해야 될 인간들의 욕망이 결국 한계가 있음을 강조했다. ■ 타인에게 행복해져 보이기 보다는 자신이 행복한 삶을 영위해야 신이 질투한다. 통계자료를 제공하는 ‘월드오미터’에 의하면 2020년 전세계 인구는 77억명 정도이고 1위 국가는 중국으로 14억4000만명, 2위는 인도로 13억8000만명, 3위 미국은 3억3000만명이며 우리나라는 28위로 5178만명이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우리도 현재까지 잘 기억하는 인물들은 높은 직책이나 장수한 사람도 있지만, 낮은 직책이거나 단명했더라도 본인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행복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이 많다. 30대 였지만 나사렛 촌구석 목수의 아들 예수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장군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많은 국민들이 현재의 해군참모총장의 이름은 잘 몰라도 400여년 전인 1592년도 해군총장 이순신 제독의 이름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성웅으로 추모하고 있다. 따라서 아킬레우스의 말처럼 끝이 있는 인생이기에 인간들은 타인들에게 자신이 행복해져 보이기 보다는 자신이 행복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후손들이 기억을 못하더라도 신이 질투할 만한 행복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80)] 진급과 출세가 직업군인의 목표만은 아니다(상)
-
-
[김희철의 전쟁사(45)]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 (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10월말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울까지 점령하였으나 아군의 반격으로 후퇴, 현재의 휴전선을 따라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 후로는 대대적인 공방전대신 전선 일대의 요충지 탈환을 위한 국부적이고 치열한 고지전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국군은 중부전선 적근산 일대에서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는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겨우 735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당시 7중대 소총병이었던 이한설 목사(현재 서울 성암교회 원로목사)은 중대원이 거의 전멸하고 생존한 6명중에 한사람이었다. ■ 이한설 서울 성암교회 원로목사, “송장 썩는 냄새와 시체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가 두려워…” 이 목사는 증언을 통해 "전투는 화력이 난무하던 초반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탄약이 소진되어 종국에는 총검을 가지고 혈투를 펼치는 백병전 양상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중공군이 던진 방망이수류탄 파편에 맞아 왼쪽 겨드랑이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후송은 커녕 다시 올라가 싸워야 했다”라며 말을 이어갔다. 때는 폭염이 작열하는 한여름이라 중공군과 아군의 시체가 어우러져 썩어가고 있었다. 여름 밤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나는 송장 썩는 냄새, 시체의 피를 빨아 손가락 마디만한 크기로 커진 모기의 공격은 두렵기까지 했다. 한밤중에도 지척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총검이 몸통을 비집고 들어가는 소리는 두려움을 넘어 적에 대한 증오와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더 크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전투의 장기화로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찾아오는 허기는 인근 밭의 강냉이를 날로 뜯어먹는 것으로 달랬다. 누적된 피로에 쏟아지는 졸음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살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고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했던 것을. 그것이 6·25남침전쟁이었고 735고지 전투였다. 전쟁은 처절했고 전투는 치열했다. 나중에 참호를 정리하며 발견된 시신들은 개머리판이 부서진 총을 부둥켜안고 있거나 수류탄 안전핀을 입에 물고 폭사한 모습 등 아수라장이었다. 6중대는 고지를 점령하자 그곳에서 사투하다 장렬히 전사한 김영국 중대장의 시신을 발견하여 곧 대대OP로 후송했다. 치열한 전투에서 간신히 생존한 이 목사는 “7중대장 김영국 중위는 수세에 몰리자 분연히 적진에 뛰어들어 적 여러 명을 사살하고 기관총을 탈취해 전세를 뒤집으려다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한 영웅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결국 9월 아군 2사단은 전투기 지원 하에 735고지 왼쪽 전방 633고지를 공격했고 북쪽으로 1㎞를 더 진출해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말했다. 김영국 중위와 7중대원의 용맹성과 전공이 크게 인정 보도됨에 따라 이들에게 이승만대통령과 트루만 대통령의 표창장에 이어 UN군사령관과 미9군단장의 표창장이 연달아 수여 되었다. 김영국 중위 개인은 육군 대위로 일계급 특진과 동시 을지무공훈장과 미(美) 은성무공훈장도 수여 받았다.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45)]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 (중)
-
-
스타트업 미디어 EO, 4월 3일부터 9일까지 ‘스코페 잡페어’ 개최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마켓컬리, 쏘카, 왓챠 등 분야별 최고의 스타트업이 주최하는 ‘스타트업 코딩 페스티벌(이하 스코페)’이 기업가 정신과 기회를 이야기하는 스타트업 미디어 EO와 함께 LIVE 채용 설명회를 진행한다. 4월 3일(토)~4월 9일(금)까지 펼쳐지는 ‘스타트업 코딩 페스티벌 잡페어(이하 스코페 잡페어)’는 스코페 참가 개발자들의 시상식과 주최 스타트업들의 LIVE 채용 설명회로 구성된 비대면 이벤트다. 스코페 잡페어는 EO의 유튜브 채널 및 플랫폼을 통해 매일 저녁 8시 실시간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EO 플랫폼에서 사전 참가 신청을 한 사람들은 각 스타트업의 임원·실무진에게 직접 질문하고 답변받을 수 있다. 스코페는 대한민국 개발자들만의 새로운 개발 문화를 만들기 위해 진행하는 코딩 페스티벌이다. 세계적인 클라우드 기업 아마존웹서비스(AWS)의 후원으로, 각 분야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6개 스타트업(마켓컬리, 쏘카, 왓챠, 오늘의집, 번개장터, 브랜디)과 7000여 명의 개발자가 참가한다.
-
- 사이버보안
- 종합
-
스타트업 미디어 EO, 4월 3일부터 9일까지 ‘스코페 잡페어’ 개최
-
-
ADT캡스, 원격코드실행 해킹사고 점검도구 무료 배포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ADT캡스는 해킹 위험도가 높은 원격코드실행(RCE) 해킹 사고를 확인할 수 있는 점검 도구(ASSERT)를 무료로 배포한다고 29일 밝혔다. ADT캡스는 해당 취약점을 다수의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널리 사용 중인 PC 자산관리 솔루션(TCO!Stream)에서 발견했다. 취약점 정보는 해당 솔루션 개발사에 통보했다. 해당 취약점은 해커가 원격으로 시스템에 접속해 악성코드를 실행할 수 있어서 위험하다. 이 취약점을 악용하면 중앙 관리 서버 제어권을 획득할 수 있으며 기업의 전체 네트워크까지 장악할 수 있다. ADT캡스 관계자는 “원격코드실행 취약점을 악용한 해킹 공격은 그 피해가 심각해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며 “앞으로도 사이버 안전망 확보를 위해 주요 사이버 위협 정보와 예방책을 공유하는 활동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
- 사이버보안
- 종합
-
ADT캡스, 원격코드실행 해킹사고 점검도구 무료 배포
-
-
안랩, 온라인 라이브 견학 ‘매뉴얼북’ 무료 제공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안랩(대표 강석균)은 온라인 라이브 견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쌓은 노하우를 매뉴얼북으로 만들어 무료로 제공한다. 기업과 기관의 견학 담당자 누구에게나 무료로 제공된다. 이번 매뉴얼북은 온라인 견학 운영에 필요한 장비·인력과 진행 절차 및 라이브 방송 플랫폼 선택 기준·사용법 등을 단계별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기업 및 기관의 상황에 맞게 쉽게 적용할 수 있다. 또한 실제 진행 경험에서 얻은 실용적인 팁을 담아 온라인 라이브 견학을 처음 진행하는 담당자들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했다. 안랩은 추후 이해를 돕기 위한 튜토리얼 영상도 유튜브로 제공할 예정이다.
-
- 사이버보안
- 종합
-
안랩, 온라인 라이브 견학 ‘매뉴얼북’ 무료 제공
-
-
베스핀글로벌, 3개월 원격보안서비스 무료 체험 제공
-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베스핀글로벌이 클라우드 네이티브 보안 서비스인 '섹옵스(SecOps)'의 원격 보안 서비스 무료 체험 이벤트를 진행한다. 섹옵스는 클라우드 보안 전문 아키텍트, 통합된 솔루션 및 운영정책, 모니터링, 지능분석을 통한 자동화된 운영 및 보안 관제 연동 등 클라우드의 원스톱 보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품이다. 베스핀글로벌은 기업이 합리적인 비용으로 쉽고 빠르게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원격 보안관제 서비스'를 보안 장비 2대까지 지원한다. 또 별도 구축 과정 없이 국내 보안 컴플라이언스 규정을 100% 충족하는 '원격 취약점 진단 서비스'를 시스템 50대와 웹 URL 1개까지 지원힌다. 서비스 제공기간은 도입일로부터 3개월이다. 정현석 베스핀글로벌 실장은 "사용자가 클라우드 보안을 쉽고 편리하게 시작하면서 클라우드를 안전하게 구축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번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
- 사이버보안
- 종합
-
베스핀글로벌, 3개월 원격보안서비스 무료 체험 제공
-
-
국방부, '군 내부정보 부동산 투기 악용 사례' 전수조사 착수
-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국방부는 군 내부정보를 부동산 투기에 악용한 사례가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자체 전수조사에 착수했다고 29일 밝혔다. 특히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신도시 외에도 군공항 이전부지와 군사보호시설 해제 지역 등 군 관련 사업 전반을 들여다볼 방침이어서 사실상 전수조사 절차에 돌입한 셈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국방부 감사관실과 검찰단 등 50여명으로 구성된 자체 조사단은 지난주부터 조사 대상 인원과 범위를 특정하기 위한 실무 작업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조사 대상자는 국방부 본부, 합참, 각 군, 국직기관에서 근무하는 택지 및 도시개발 관련 업무담당자로서 이전에 관련 부서에 근무한 사람도 조사 대상자에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이번 전수조사 범위를 정부합동조사단의 조사대상인 신도시뿐 아니라 군부대 및 군공항 이전사업과 군사보호시설 해제 지역, '기부 대 양여사업' 등 군과 관련이 있는 지역 전반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는 최근 LH 부동산 투기 사례와 유사하게 군 부지 등과 연관된 개발 사업의 경우에도 군인이나 군무원 등 내부 관계자가 아니면 사전에 정보를 알기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조사 과정에서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개별 사례에 대해서는 즉각 군 검찰 수사로 전환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정보 확보를 위한 '개인정보 활용동의서'를 제출하지 않은 이들을 우선해서 조사하고 부족할 경우 수사 의뢰 등 조처를 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군인 및 군무원 당사자가 아닌 가족 등 제삼자의 거래 내역까지 들여다보는 데는 한계가 있어 '반쪽' 조사에 그칠 것이란 지적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사안의 엄중함을 고려해 필요한 범위에서 직원의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에 대해서도 조사 및 수사를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
- 외교안보정책
- 국방
-
국방부, '군 내부정보 부동산 투기 악용 사례' 전수조사 착수
-
-
[김희철의 전쟁사(44)]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소·중대장 시절에 적근산 주변의 735, 633, 602고지 등을 수색할 때 6·25남침전쟁 당시 치열했던 전흔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휴전 직전 필자의 장인(故강철 대령, 종합1기)이 11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일화와 관련된 현장도 발견했다. 1950년 10월말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울까지 점령 하였으나 아군의 반격으로 후퇴, 현재의 휴전선을 따라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 후로는 대대적인 공방전대신 전선일대의 요충지 탈환을 위한 국부적이고 치열한 고지전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 735(김일성)고지의 처절한 공방전, 야릇한 고요함과 정적이 전해준 공포 1951년 8월초에 국군 2사단은 중부전선 적근산과 김화를 연결하는 산악지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사단 좌측에 31연대, 우측에 17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17연대 정면에 위치한 735고지는 일명 ‘김일성 고지’로도 불리웠고 피아간 상대방을 견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쌍방이 이 고지를 점령확보하기 위해 수차에 걸쳐 뺐고 뺐기는 공방전이 전개 되었다. 2사단장 함병선 준장은 8월3일에는 사단유격대대와 17연대 1대대로 하여금 735고지를 공격, 탈취하였으나 적의 역습으로 후퇴하는 등 수 차례에 걸친 탈환전이 되풀이 되었다. 1951년 8월8일 17연대가 이 고지를 확보하자 사단 예비연대였던 32연대와 전선방어 임무를 교체하였다. 32연대는 예하 7중대를 735고지에 배치하고 그 후방 약 2km 지점에 735고지를 바라볼 수 있는 785고지정상에 2대대OP(관측소 또는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7중대장은 대대관측장교 윤영목 중위(현재 미국 오레곤 6.25참전 유공자 회장)와 육군종합학교 9기 동기생인 김영국 중위였고 그의 직속상관은 2대대장인 박동석 소령이었다. 최전방 요충지 735고지에는 윤중위의 후배관측장교인 이소위가 관측병, 통신병, 연락병 3명과 함께 7중대장을 위한 관측 및 포병지원임무를 맡고 있었다. 김영국 중위는 평소 친밀했던 군 동기인 관계로 수시로 윤중위에게 포지원을 잘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참고로 당시 2사단에는 105mm 곡사포 1개대대라는 미약한 화력지원력이 전부였다. 1951년 9월, 32연대 7중대가 735고지 방어임무를 맡고 있던 중 9월1일 밤 20:30시경부터 중공군 80사단 239연대가 대대적인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735고지에 배치된 포병관측장교 이소위는 즉시 긴박한 상황을 보고하고 동시에 포병지원사격을 요청해와 735고지 능선 넘어에서 공격해 오는 중공군에 고사계 사격으로 저지 및 선멸을 시도하였다. 동시에 적군 상공에 조명탄을 계속 발사하여 아군의 적정관찰과 방어사격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군은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방어하는 7중대의 6배가량 되는 2개대대 병력의 절대다수 인해전술로 물밀듯 중대경계초소와 소대방어선을 강타하며 735고지 정상을 향하여 공격해왔다. 적이 아군 주진지에 접근함에 따라 포병의 화력지원은 아군 피해를 우려해 점점 어려워졌다. 7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포병관측장교의 유선망도 단절돼 무전기로만 교신했다. 윤중위는 대대OP에서 보병대대장 박소령과 긴밀한 보·포협동을 유지하면서 계속 포병대대본부에 전황을 보고하여 화력지원을 요청했다. 얼마 후 735고지에 이소위와 함께 있던 관측병이 무전으로 “이소위님이 쓰러졌습니다. 적군이 중대OP 부근까지 접근해 왔으며 이 상황에서 도저히 포병 지원 임무를 수행할 수 없으니 일단 대대OP로 철수해야 되겠습니다.”라고 보고해 왔다. 사실상 적과 밀집된 이 시점에서 조명탄 이외의 포격지원이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상황을 즉시 포병대대본부에 보고하고 7중대 관측장교 이소위의 철수를 통보하였다. 약 1시간 후인 23:30시경에 이소위가 관측병 등에 업힌 채 통신병, 연락병과 함께 윤중위가 있는 대대OP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당시 이소위는 완전히 실신 상태였으며 다행히 상처는 없기에 나의 야전 천막속에 눕히고 안정을 되찾도록 하였다. 7중대의 전방 관측반이 735고지에서 철수한 후부터 포병지원 임무는 전적으로 대대 관측장교인 윤 중위가가 맡게 되었고 보병대대 OP에서 대대장과 긴밀한 협조하에 모든 포병사격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하루가 지난 9월2일 자정이 넘어서도 전투는 계속됐고 01:00시경에는 735고지 도처에서 백병전이 감행되었으며 적군은 7중대 OP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김영국 중대장은 시시각각으로 대대장에게 중대의 위급상황을 보고하였으며 대대장은 수차에 걸쳐 중대장에게 “후퇴하지 말고 결코 사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후 01:30시경에 김영국 중대장으로부터 “적이 735고지 중대OP까지 침투했고 중대 잔여병력이 분산되었으니 이제는 아군 피해를 염려 말고 735고지 정상에 진내사격을 가해 적군을 저지해 달라”는 최후의 요청이 들어왔다. 이후 김영국 중대장과 그의 통신병과의 통신은 두절되고 02:00시경에는 쌍방의 총포성이 완전히 멈췄다. 그 후에 닥쳐온 정적, 벌레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야릇한 고요함이 공포로 밀려왔다. 이로써 735고지는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일부잔여 7중대원은 고지 각처에 은거하고 있었다. ■ 7중대의 원한을 갚은 6중대의 735고지 탈환전 그런데 적은 735고지를 점령한 후 새병력을 투입해서 대대OP(관측소)를 향해 계속 공격해 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2사단에서는 735고지 재탈환작전을 계획하고 역습부대로 32연대 6중대를 선정해 다음날 9월2일 06:00시에 제6중대 병력을 735고지 산기슭에 배치하고 공격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이때 대대OP에는 제2사단장 함병선 준장이 참모진과 미고문관을 대동하고 6중대 탈환전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했다. 6중대의 공격개시에 앞서 사전에 준비된 작전계획에 따라 공격준비사격으로 미군 함제 전폭기의 735고지 폭격이 시작되었다. 대대관측장교 윤 중위는 이 전폭기들을 위해 WP(백린)탄을 735고지 정상에 발사해서 목표확인을 도와주었다. 전폭기 4대 편대가 계속 교대로 날아와 고지에 새로 구축한 적의 방어진을 강타했다. 약 30분간 계속된 폭격이 끝난 다음 제2사단을 지원하는 18포병대대는 물론 인접 미9군단 예하의 8인치와 240mm 대형 장거리포까지 동원하여 포사격이 계속되었다. 공중에서의 폭격과 지상에서의 집중포격으로 735고지는 완전히 초토화 되었다. 이로 인해 지도상의 735m고지가 1m낮아진 734m고지로 부르게 되고 후일 일부 전사에도 734고지로 기록하게 되었다. 06:00시 포격이 멈추자 6중대는 일제히 735고지를 향해서 공격을 개시했다. 중대가 고지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 아군의 폭격과 포격을 피해 참호속에 피신해 있던 생존 중공군이 일제히 밖으로 나타나 소총,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6중대의 공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며 그 중간중간에 정밀포격지원으로 적의 반항을 약화시켰다. 6중대는 약4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735고지 부근에 산재해 있던 7중대원들과 합세하여 10:00시경 드디어 735고지를 탈환하였다.(하편 계속)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44)]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