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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잠화' 역할 수행할 차기 대통령 (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옥잠화는 30cm미만으로 자라고 여름에 꽃이 피며, 꽃은 하루만 피었다가 시드는 1일화이다. 엽병의 중앙이 부풀어 마치 부레와 같이 되면 수면에 뜨기 때문에 부레 옥잠화라고도 한다. 열대 또는 아열대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수생식물로 논이나 연못에서 자란다. 한번 심으면 오랫동안 사는 다년생 수초로 오염된 수질을 정화시키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온 국민의 관심사인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일은 2022년 3월9일이고 문재인 대통령 임기는 2022년 5월9일에 만료된다. 이번 신축(辛丑)년 추석은 대통령선거일 171일 전이고 이미 7월부터 본격적인 선거 일정이 시작되어 예비후보 각자의 공약을 발표하면서도 서로 치열하게 헐뜯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다. ■ 시궁창 정치판 속에서 피어날 차기 대통령은 '옥잠화' 같은 역할 수행해야 국어사전에 따르면 공약(公約)이란 정부, 정당, 입후보자 등이 어떤 일에 대하여 국민에게 실행할 것을 약속함이나 법률의 공법에서 ‘계약’을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선거공약(選擧公約)이란 “선거 운동을 할 때에, 정당이나 입후보자가 유권자들에게 제시하는 공적인 약속. 일반적으로 당선 후에 실천하겠다는 시책에 관한 것”이며, 반면에 공약(空約)은 “헛되게 약속함”이라고 한다. 헌정사 최초로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지도 4년이 지나가고 있다. 이른바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참여연대, 새 시대 희망언론 등의 조사에 따르면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의 공약 이행률은 2020년 12월 기준으로 박근혜 정부보다 공약 이행률 낮은 13.9%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헌정사 최초로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4년간 공약 이행률인 42%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치다. 역대 정부의 공약 이행 비율은 김대중 정부가 18.2%, 노무현 정부 43.3%, 이명박 정부는 39.5%로 나타났다. 따라서 국민들은 현혹시키는 감언이설 공약(空約)이 아닌 입에 쓴 진짜 약처럼 실현 가능한 공약(公約)을 부르짖는 정직한 후보를 기다린다. 또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는 군사행동으로 집권한 정권이라면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김영삼, 문재인 정부는 정부수립과 정변의 과도기, 민주화 운동 등으로 창출된 정권이다. 이런 차이와는 무관하게 많은 역대 대통령들은 비극을 겪었다. 친인척들이 부패 및 권력남용으로 구속되거나 본인이 죽거나 감옥에 갔다. 정부수립 73년이 지난 작금에 이르러서는 국가 최고지도자도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정상적으로 국민의 의무도 준수하는 정직한 인물이 선출될 시기로 성장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국민들은 각종 의혹 이슈로 상호 고발과 비난은 물론 배신과 음모와 권모술수가 전개되고 망발의 내로남불과 마타도어까지 난무하는 시궁창 정치판을 정화시켜줄 옥잠화같은 대통령이 나오길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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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22
  • '옥잠화' 역할 수행할 차기 대통령 (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온 국민의 관심사인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일은 2022년 3월9일이고 문재인 대통령 임기는 2022년 5월9일에 만료된다. 이번 신축(辛丑)년 추석은 대통령선거일 171일 전으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일정이 6개월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7월부터 본격적인 선거 일정이 시작되어 예비후보 각자의 공약을 발표하면서도 서로 치열하게 헐뜯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다. 여야 각 당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예비후보들의 토론과 행태들이 국민들을 짜증나게 만들고 있다. 조국 사건, 줄리 관련, 검사 고발사주, 대장지구 사업 등의 의혹 이슈로 상호 고발과 비난은 물론 배신과 음모와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망발의 내로남불과 마타도어까지 말그대로 시궁창 정치판이다. 게다가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될 후보자들이 우선 국방, 근로, 교육, 납세 등 국민의 4대 의무를 당당하게 준수하고 출마 선언을 한 것이 아니라 국방의무 마저도 이핑개 저핑개로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것부터가 문제이다. 초대 이승만부터 19대 문재인까지 12명의 대통령이 국민 4대 의무 중 첫 번째인 국방의무를 준수 여부를 확인해보면 과반수도 안되는 5명의 대통령만이 제대로 이행했다. 8.15광복 이후 정상적인 국방의무를 준수할 대상이었던 대통령 중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육군장교로 입대하여 장성이 되어 전역 후 정계로 입문했고 노무현, 문재인은 병장제대하며 의무를 다했다. 반면에 최규하는 1946년부터 1년간 미군 육군사령부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서기관 상당)으로 근무하다 농림부로 이동해 공무원 생활을 했고, 김영삼은 1951년 2월 잠시동안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을 하다가 그해 바로 국회부의장(장택상) 비서관으로 옮겨 정치활동을 했다. 김대중 본인은 6.25남침전쟁 당시 목포 해상방위대에 복무했다고 하나 해군본부에서는 자료가 없어 확인이 불가하다고 답변했고, 이명박은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어 3년형에 5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병역미필자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73년이 넘어가는 이번 대선에서는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 후보들의 국민의 4대 의무 준수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여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 국가의 정상적인 발전과 국민들이 보편타당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받는 길이라 여겨진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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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21
  • [숨은 중국 알기 (23)] 청일전쟁 패전과 청나라 몰락 자초한 국방비 전용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언론보도에 의하면, 정부는 금년도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한 2차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면서 국방비 5629억원을 전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감액 내역은 환차익·낙찰차액·연내 집행제한 예산 등으로 사업계획 변경과는 무관하다. 이번 추경에서 감액된 사업은 내년도 예산 편성과정에서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반영할 예정이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도 2차 추경 때 1조 4758억원이 전용된 데 이어 3차 추경 때도 2978억원이 삭감된 바 있다.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 예산 전용은 있을 수 있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분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 설명대로 삭감되고 전용된 예산은 다음 해에 반영될 수 있다. 그러나 국방 관련자들은 ‘국방비 전용은 문제없다’라는 관점이 아니라 ‘큰 문제이다’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특히 국방비 전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청나라가 국방비를 전용한 결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몰락과 망국의 길로 들어선 최악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청일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중국 북양함대는 동양 최대였다. 북양함대는 1871년 산둥성 웨이하이시(山東省 威海市) 류공다오(劉公島)에서 창설돼 전성기에는 전함 25척, 보조함 50척, 수송선 30척, 인원 4천명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서구열강에 이어 세계 9위의 해군력이었다. 북양함대의 기함인 '정원(定遠)함'은 독일제 최신예 7000톤급 철갑함으로 정작 독일정부마저 예산부족으로 구매하지 못한 전함이었다. 자매함 ‘진원(鎭遠)’도 동급 전함이었으며, 이들 전함은 멀리 있는 오랑캐를 평정(定遠)하고 진압(鎭遠)한다는 의미로 명명됐다. 당시 청나라는 서태후를 위해 베이징 서쪽에 인공호수까지 포함된 이화원이란 장대한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별장 공사에 수천만 냥의 비용이 들어가면서 해군 예산도 건설비용으로 전용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새로운 전함 도입은 고사하고 1891년부터는 탄약 구입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청일전쟁 발발 3년 전부터는 북양함대를 유지하는 것도 곤란했다. 전쟁 발발 3개월 전 영국은 청나라에게 순양함 2척을 사라고 권유했지만 서태후의 생일 축하 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순양함 2척은 일본이 구입해 주력으로 투입하게 된다. 이처럼 청나라는 국방비가 전용되는데 반해 일왕은 황실 예산 30만엔을 전함 건조에 보태라고 보냈다. 청일전쟁 개전 당시 함포 포탄은 문당 2-3발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화약통에는 모래나 콩만 잔뜩 채워져 있었다. 장부에 기재된 탄약의 재고숫자를 맞추기 위해 진흙으로 포탄을 빚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마련된 해군 예산조차도 서태후의 생일 뇌물로 전용되면서 화약을 구매할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국방비가 전용되니 밑에서도 국방비가 새어나가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동양 최대였다. 이런 북양함대는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면서 전투다운 전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뤼순(旅順)을 거쳐 웨이하이시로 철수했다. 결국 베이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웨이하이시에서 일본군에 항복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국가 지도자 리홍장(李鴻章)은 “싸우지 말고 후퇴해서 함정을 보존하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잃지 말아야 하며, 대양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했다. 싸워서 이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일본군은 북양함대 기함 정원함을 포함해 전함 5척을 침몰시키고 약 10척을 노획했다. 그 중 한 척은 자결한 북양함대 지휘관 정여창(鄭汝昌)의 군인정신에 대한 예를 표하며, 그의 시신을 수송하는데 사용하도록 돌려주었다고 한다. 북양함대의 말로는 청나라의 운명처럼 비극적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은 노획한 청나라 전함을 고철로 매각했고, 진원함은 일본 해군에 편입돼 러일전쟁에 투입됐다가 함포사격 표적이 되고 결국 고철로 처분됐다고 한다. 그 대금은 일본 해군병 학교 강당 신축비용으로 사용됐다. 진원함의 닻과 사슬, 포탄 등 유물은 도쿄 우에노 공원에 전시됐다가 중화민국 장개석 정부의 요청에 의해 반환됐는데, 공산 정권 수립 후, 베이징 군사혁명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원래의 위치 웨이하이시로 옮겨질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창설 당시의 원위치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기구한 운명이다. 청일전쟁 전 과정은 중국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사실이다. 하다못해 일선 병사들의 감투정신도 내세울게 없다. 기강이 무너지고 훈련도 되지 않아 포탄 소리에 정신을 잃고 숨기에 바빴으며, 심지어 전함조차도 전투대열에서 이탈해 도주했다고 한다. 중국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정여창 제독의 자결뿐이었다. 책임감이 넘치는 지휘관이라는 것인데, 지휘관이 음독 자결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당시 정치권은 아무 말이 없다. 패전의 대가는 가혹했다.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었던 청나라 군대는 나라를 지키기는커녕 서구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서구 열강은 청나라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유린했다. 청나라는 급속히 무너져 일본에게 조선의 지배권을 넘겨주고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및 그 부속군도를 할양하는 한편, 은 2억 냥을 배상금으로 지불했다. 청의 3년간 국가예산에 해당하며, 당시 일본의 4년 치 세출예산 액수이다. 일본은 그 돈으로 군사력을 증강하여 10년 후 1904년 러시아와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중국은 패전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청일전쟁 100주년을 맞이한 1985년에 웨이하이시에 ‘중국 갑오전쟁 박물관’을 세웠다. 패전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중국인 특히 지도자들이 이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다짐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다시는 국방비를 전용하지 않겠다”라는 결심일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9-13
  • [숨은 중국 알기 (22)] 중국의 동북공정, 문화공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가 중국에 근무하던 시절 업무시간 이외에 개인적으로 만주지방에 자주 갔었다. 안시성, 봉황성 등 고구려 산성을 포함하여 고구려 및 발해 유적지를 다수 찾아보았다. 안시성이라고 추정되는 지역을 갈 때는 그 지역 주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조언에 따라 밀짚모자 쓰고 편안한 복장으로 주위를 살피며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베이징 부근의 지방도로를 가다가 高麗라는 지명을 만났다. 필자는 근거는 불명확하지만 ‘고구려 군대가 패주하는 당태종을 베이징 부근까지 몰아부쳤다’라는 어디선가 읽은 기억을 떠올리며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읍사무소에 들러 지명의 유래에 대해 설명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당신 같은 사람이 많이 와서 똑 같이 말한다. 이 지역은 당신네 고구려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설명해줄 역사적 사실도 없다”라는 답을 들었다. 2002~2004년 당시 현지에서 볼 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에 산재한 한국 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는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만리장성 이북지역은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고구려와 발해를 한국사로 분류했고, 저우언라이 총리는 하나의 역사를 두 개로 해석해 적용한다는 ‘일사양용(一史兩用)’을 제시했다. 즉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이자 동시에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고구려 수도가 집안(集安)이었던 초기에는 중국의 역사이고, 평양으로 천도한 후기에는 한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때까지도 만주지역에 우리 역사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2002년부터 중앙정부 차원에서 전개한 동북공정 이후에는 달라졌다. 오늘은 동북공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시행한 여러 가지 공정 중 하나이다. 목적은 자신들이 선포한 영토 내에서 분리 독립의 움직임을 사전 차단하고 다민족 통일국가로서 중국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이 공정은 중국이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 사회가 한국과 만나면서 시작된 동요에 대한 대처의 성격이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 사회는 한국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동경이 어우러져서 한국쏠림 현상이 발생했다. 한국방문에 대한 열망을 포함하여 한국방송 청취 열풍도 일었다. 중국 당국은 이런 현상을 방관할 수 없었다. 잠시 동안이지만 한국방송 통제조치가 있었다고 들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백두산 천지에서 공공연히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단체 기념촬영을 하는 현상을 중국 당국은 심각하게 인식했다. 만주지방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이 지역은 한국의 고토이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우리 역사“라는 속마음을 밝힐 때, 중국 당국은 당혹했고 ”언젠가는 수복해야 한다“라는 다소 허황된 소리가 나올 때마다 중국은 기겁하면서 위기감도 느꼈다고 한다.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이 분리 독립을 주장하거나 한국과 연대를 추진한다면 이건 중국의 정체성과 안보에 큰 위협인 것이다. 조선족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내몽골이나 티베트, 신장 위구르 등 변방의 주요 소수민족이 동일한 요구를 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수민족은 중국영토의 64%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때 북한도 한몫 거들었다. 북한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던 2002년에 고구려 고분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했다. 중국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단 북한 단독 등재를 보류시키고 오히려 2003년 자기들이 단독으로 등재 신청을 했다. 이 때 남북한은 한마음으로 중국의 단독 등재를 저지시켰다. 결국 그 다음해인 2004년 고구려 유적은 북한과 중국 공동으로 등재하게 됐다. 북한의 5개 지역 고분 63기는 북한이 담당하고, 중국지역의 53개 유산은 중국이 관리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이 결정에 대해 반쪽이라도 지켜 다행인지, 아니면 반쪽을 잃어 애통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어서 북한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2007년 동북공정과 관련된 내용을 수록한 '고구려 이야기'를 발간했다. 그러나 이 책은 중국을 의식해 종전의 입장에서 많이 후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 이야기’는 서문에서 ‘최근 사람들 속에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여…’라는 식으로 고구려사를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을 에둘러 표현했다. 반면, 북한 학계가 자랑스러운 역사로 다루어온 고구려의 대 수·당 전쟁 관련 대목은 대폭 축소시켰다. 동북공정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2000년 북한 사회과학원이 출간한 ‘고구려사의 제(諸)문제’의 경우 대 수·당 전쟁을 ‘수나라의 침략을 반대한 투쟁’과 ‘당나라의 침략을 반대한 투쟁’으로 직설적으로 표기했으나, ‘고구려 이야기’에서는 살수와 안시성이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북한과 달리 우리 국민의 대응은 그야말로 거국적이었다. ‘고구려사를 지키자’라는 민족적인 명분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한 마음 한 목소리였다. 이러한 국민들의 일치된 외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9월과 10월 당시 원자바오 총리와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시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중국도 한국의 일치된 분노를 외면할 수 없어 2007년 ‘한·중 구두 양해사항’을 교환하고 동북공정의 논란을 종식시키기로 하였다. 양해사항의 요지는 ‘중국은 이러한 사태에 유념하고, 정치 문제화를 방지하며, 학술 교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동북공정이 1라운드였다면 2라운드는 최근의 문화공정이다, 우리가 2008년에 ‘강릉 단오제’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하자, 중국인들은 단오가 왜 한국의 문화유산이냐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른바 문화공정이 촉발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동북공정은 정부차원의 공식 정책이었지만 문화공정은 민간차원의 갈등이다. 그러나 중국의 체제상 순수 민간영역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방송 프로그램을 보자. 중국은 2020년 신문과 방송에서 쓰촨(四川)지역의 파오차이(泡菜)를 김치의 표준이라고 주장했고, 한국의 방송 드라마에 중국풍이 일부 도입되는 등 예사롭지 않다. 중국이 비록 민간차원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전통문화를 중국문화의 일부로 여기겠다는 소위 문화공정을 시도하는 의도에 대해 전문가들의 시각은 다음과 같다. 최근 K-pop과 드라마 등 K-Culture가 전 세계로 전파되어 가면서 중국인들은 아시아 문화의 중심이 자국에서 한국으로 전환돼 간다는 위기감과 함께 아시아 문화는 전부 중국이 원류라는 과열된 애국심이 결합된 결과란 것이다. 중국은 1960년대에 고구려와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정했으나, 40년 후인 2000년대에는 중국사로 규정했다. 그러면 지금부터 40년이 지난 후에는 고구려와 발해사가 어떻게 될까? 김치는 한국 음식으로 남아 있을까? 우리 전통문화는 온전히 유지되고 있을까? 걱정이 앞서며, 역사를 지키려는 거국적 노력과 함께 남북한 협력도 필요하다. 학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9-06
  • [숨은 중국 알기 (21)] 중국은 어떻게 호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는 최근 중국의 한 연구소가 주최한 화상 세미나에 참석했다. 현 아태지역 정세에 대한 해외의 여론을 들어보겠다는 취지로서, 주제는 ‘아태지역 정세에 대한 전략적 대화’였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중국은 타국의 내정에 간섭한다는 오해를 피해야 한다”라고 발표하면서 2018년 출간된 ‘중국의 조용한 침공’이라는 책을 예로 들었다. 이 책은 중국이 자금력을 수단으로 호주의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를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중국은 관련국가에서 큰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국 측 참석자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몽고 참석자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달라. 그리고 한국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필자는 “한국은 쉽게 흔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서 이런 사례는 없다”라고 답변했다. 필자는 중국 측 반응에 의문이 들어 중국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확인해 보았다. 중국은 “‘소리 없는 침입, 중국이 어떻게 호주를 괴뢰국가로 만들었는가’(无声的入侵:中国如何把澳大利亚变成木偶国, Silent Invasion : How China Is Turning Australia into a Puppet State)라는 반중서적이 2018년 2월 26일 호주에서 출간됐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은 호주 정·재계, 학계, 언론에서 사실무근이라고 하는데다, 저자가 유명해지기 위해 악의적으로 조작했으며, 중국-호주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저자인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책의 부제를 “중국이 어떻게 호주를 괴뢰국가로 만들었는가”라고 붙였다. 영향력 행사 정도가 아니라 ‘괴뢰국’ 수준으로 보았던 것이다. 다음은 한국어판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겠다. 저자는 중국과 중공을 구분하고 있으며, 1장 ‘조용히 스며드는 영향력’에서는 “중공의 최종목표가 호주와 미국의 동맹을 깨트리고 호주를 속국으로 삼는 것이다. 호주가 주권을 빼앗기는 과정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만이 경제적 번영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믿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며 베이징의 괴롭힘에 맞서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3장 ‘해외에 있는 중국인들’에서는 “중공은 이주 중국인을 활용해 호주 사회 전체를 중국의 가치에 공감하고 베이징이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탈바꿈한다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장기적으로 한족(중국인)을 유권자 집단으로 동원해 중국을 지지하는 후보를 호주 의회와 고위 공직에 진출키고자 한다는 사실이 문서로 드러났다”고 밝히고 있다. 4장 ‘밀려들어오는 돈’에서는 “중공이 호주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당에 기부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 듯 중국계 호주인 일부가 호주 정치기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그 수는 점점 늘고 있다. 이 추세대로 가면 베이징 대리인들이 정치를 장악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중국이 호주 정치를 흔드는 중심지는 뉴사우스웨일스주 노동당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5장 ‘연구소부터 언론까지’에서는 “호주중국관계연구소의 세미나와 출판물은 중국 공산당 선전물들과 비슷하다. 이 연구소는 합법적인 연구기관이지만 호주에 영향력을 미치고자 베이징의 지원을 받는 위장된 선전집단”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2016년 5월 중공중앙선전부장 류치바오(劉奇葆)가 호주를 방문해 ‘호주의 주요언론사는 신화통신, 인민일보, 중국일보가 제공하는 기사를 싣고, 중국으로부터 거금을 받는다’라는 협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6장 ‘중국에 저당 잡힌 경제’에서는 “중국은 자원과 에너지, 식품산업은 물론 인프라를 겨냥해 전 세계에 수천억 달러를 내보내고 있다. 이런 투자금을 통해 경제를 개방시킨 뒤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다.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호주를 떼어내려고 한다. 굳이 떼어내지 않아도 이 캥거루는 먹을 게 많은 곳으로 뛰어갈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7장 ‘유혹 또는 강압’에서는 “중공이 세계로 영향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호주를 시험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호주의 지정학적 위치, 중국과 밀접하게 연결된 화교,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다문화 정책 등 3가지”라고 주장한다. 호주를 서구 진영의 약한 고리로 판단했고, 중국 우월주의에 빠진 화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중국의 가치와 전통을 높인다는 핑계로 중공의 입장을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란 얘기다. 10장 ‘대학에 들어온 중국’에서는 “2016년을 기준으로 호주 대학이 중국 대학과 공식적으로 체결한 연구협력 계약이 1100여 건, 직원이나 학생 교류 협약도 수백 건이다. 이런 협약이 대학 행정부를 중국에 우호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고 설명한다. 11장 ‘문화전쟁’에서는 ① ‘부동산으로 몰려드는 차이나 머니’와 관련하여 2016년 외국인이 뉴사우스웨일주 신축주택의 25%, 빅토리아주 신규주택의 16%를 사들였는데, 이 중 80%가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⓶ ‘신(神)까지 포섭하라’에서 한 중국인 장로교회가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한 중국인 감리교회는 “위대한 나라로 떠오른 중국과 시진핑의 등장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라고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고대 로마의 한 정치인은 공정한지 아닌지 타당한지 불합리한지는 서로 국력이 비슷할 때 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약소국 A가 강대국 B와 관계에서, 자국의 정책들이 B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좋은 정책이다. 그러나 균형을 잃어 자국에게는 손해가 되고 B에게 이익을 안겨주는 정책이라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호주의 경우처럼 예속되어 간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자국의 이런 현상을 지적한 클라이브 해밀턴의 문제 제기는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는 올해 4월 출간된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우리나라에게 한 마디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중국의 진정한 본질과 야망을 깨닫지 못하면, 한국도 위험하다”라고.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8-30
  • [숨은 중국 알기 (20)] 중국의 ‘조선족’, 한국의 우월함 북한에 전파할 수 있는 통일 촉진자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은 물론이고 백두산을 여행하는 한국인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 조선족일 것이다, 과거 백두산 여행은 연변조선족 자치주 연길에서 출발했고 이어서 해란강, 용정 등 이 일대에 산재한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 투쟁의 유적을 돌아보는 여행과 연계돼 있었다. 한국인들은 연길 시내의 한글 간판과, 한국말이 통하고 한복을 볼 수 있는 거리 풍경에 잃어버린 땅에 대한 어떤 그리움을 많이 느꼈을 게다. 그리고 사업가들은 조선족의 도움으로 먼저 진출한 일본 기업을 제치고 현지에 정착했다고 한다. 오늘은 조선족의 역사를 먼저 짚어본 후, 이어 이들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며 잠재력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조선족의 역사는 임계순 한양대 명예 교수의 저서 ‘우리에게 다가온 조선족은 누구인가’에서 발췌해 인용했다. 조선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이주한 역사는 청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조는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으로 천도하면서 1658년 무렵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하고 조선인의 진입을 금지했다. 청조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함경북도와 평안북도 일부 농민은 봉금령이 완화된 틈을 이용해 아침에 강을 건너 경작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경작을 하다가, 봄에 강을 건너 농사짓고 가을에 수확물과 함께 귀가하는 계절출가이민으로 발전했다. 후에는 아예 고향을 떠나 이 지역에 거주하며 경작하게 됐는데, 조선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삶이 어려운데다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흉년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조선의 애국지사들은 중국 만주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인의 이주는 대폭 증가했고, 일제의 식민 정책에 따른 토지조사사업으로 전답을 빼앗긴 많은 농민들도 이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당시 만주 일대를 통치하던 중화민국과 군벌은 재정 수입을 확충하고자 이주와 토지 개간을 묵인했다. 1920년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조선인은 약 20만 명에 달한다. 1931년 이후 일제가 만주지역 전체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조선인들을 이 지역에 집단으로 이주시켰다. 이 시기의 이주자는 자유의사 보다는 일제의 정책에 의해 강제 이주된 경우가 많았다. 1936년에 만주지역 조선인은 총 85만 4천명으로 증대됐다. 국공내전 기간에 국민당은 소수민족을 강압적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이었지만, 공산당은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고 환심을 사기 위해 개별 민족의 특성을 인정하고 해당언어 사용을 승인했다. 마오쩌둥은 1939년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조선족은 중국 국민으로 정착했다. 중국의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변모되는 순간이었다. 토지개혁 시기에는 토지를 분배받아 경제적으로 기본 생활을 보장받았고, 정치적, 법적으로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조선족의 40%가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가 중심이 되었다.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한국어 교과서로 공부했고 각 가정에서는 한국어로 대화를 했으며, 조선인 집단 거주지이기 때문에 사회생활도 한국어로 가능했다. 한국어를 바탕으로 집단거주하면서 전통문화가 자연스럽게 보존되면서 계승됐다.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과 한국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첫 만남은 환호와 기대로 시작됐지만 곧 상호 실망과 경우에 따라서는 상호 저주로 바뀌어 갔다. 한국인들은 만주지방에서 전통문화를 만나는 기쁨을 맛보았고, 조선족은 부유한 한국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이 일어났다. 한국인은 조선족이 말은 통하지만 사고방식이 다른 점에 당황했고, 조선족은 일부 한국인에 당한 사기 피해로 가정이 해체되는 사례를 보면서 한국인들을 전부 사기꾼으로 보는 것이었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징에 처음 갔을 때, 조선족은 우리를 ‘한국분’이라고 예의바르게 대했지만 3년 후 귀국할 무렵에는 ‘한국놈’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그들의 마음에 그렇게 큰 상처를 주었는지 반성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조선족을 볼 때, 뜨거운 가슴과 함께 냉정한 눈이 필요하다. 첫째, 조선족을 한국말을 하는 중국인으로 보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조선족은 중국에서 태어나 학교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조부모 또는 그 이상 선대 조상이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중국식 교육체계에 의해 중국사회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고, 계속 중국에서 살아야 한다. 말이 통한다고 우리와 생각이 같고 정체성이 동일하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말만 통할 뿐 그 외에는 전부 다른 중국 국민인 것이다. 재미동포 3세 데이비드 김이나 일본에 귀화한 재일동포 4세 야마모또와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조선족이 중국사회에서 우수한 소수민족이라고 인정받아가면서 조상의 고향인 한국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필자가 주목하는 조선족의 잠재력은 이들이 갖고 있는 북한과 인적 네트워크이다. 조선족은 몇 단계만 건너가면 직·간접적으로 북한에 친척과 지인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방문과 소통에 제한이 없다. 이들이 북한 친척이나 지인에게 “한국이 모든 면에서 북한보다 월등하다. 한국은 살기 좋은 동네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인정도 많더라. 한국 주도로 통일돼야 한다”라고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얘기한다면, 북한 주민들은 이 말을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급변사태 등 체제 변화의 순간에 도달했을 때, 한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중국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주저 없이 한국을 택할 것이다. 어느 북한 이탈주민은 북한 사회에서도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말했다.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아무리 자본주의 날라리 풍이니 반사회주의 반동사상이니 하며 단속해도 한류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장마당도 통제하기 어렵다. 조선족을 통해 북한주민을 움직일 수 있고, 북한 주민은 곧 북한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이런 나의 논리에 동의한다면 주위에서 만나는 조선족에게 정다운 말 한마디와 격려의 눈짓을 보내주기 바란다. 그런 작은 매려가 통일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8-20
  • [숨은 중국 알기 (19)] 중북 안보조약, 북한의 행보 사전 통제하려는 ‘전략적 소통’이 목적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북한과 중국을 동맹으로 묶어주는 것은 ‘중북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이후 중북 안보조약)이다. 지난 7월 11일은 조약 체결 60주년 기념일이면서 20년 단위의 유효기간이 자동 연장되는 시점이었다. “어느 일방의 폐기 요청이 없으면 자동 연장된다”라는 조약 7조에 따른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상호 친서교환으로 60주년을 축하하면서 향후 2041년까지 유효기간을 자동 연장시켰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했을 때 중국에서 북한이 전략적 부담이라고 주장한 일부 학자들이 있었다. 북한을 비난하는 국제사회의 여론에 동참하자니 북한이 반발하고, 북한을 두둔하자니 책임 있는 대국으로서 위상에 손상이 갈 뿐만 아니라, 불량국가를 감싼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할 명분이 약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북 안보조약’을 폐기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이어서 이런 소수 의견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북한 또한 아무리 중북관계가 악화된 경우라도 조약 폐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이와 같이 중국과 북한은 모두 이 조약이 자국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오늘은 ‘중북 안보조약’에 대한 이야기로서, 최명해의 ‘중국·북한 동맹관계-불편한 동거의 역사’라는 책에서 주요 개념을 발췌해 인용했음을 밝힌다. 최명해는 두 가지 의문점에서 출발하여 중북 안보조약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조약이 왜 1961년에 체결됐는가’이고, 둘째는 ‘조약에 가상적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조약의 특징인 소위 ‘자동개입 조항’에 대한 해석도 덧붙이고 있다. 첫째, 중북 안보조약이 체결된 1961년은 중국군이 북한에서 철수한 1958년 이후부터 3년이 경과한 시점이다. 이 기간은 북한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응할 동맹체제가 형성되지 않은 안보 공백기였다. 북한은 중국 및 소련과 안보조약이 필요했다. 북한은 6.25전쟁 이전인 1949년부터 중국에게 동맹조약 체결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미국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면서 북한의 요구를 거부해왔다. 그렇지만 중·소 분쟁이 점차 심각해지면서 북한이 소련 쪽으로 기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중국을 움직였다.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의 요구대로 미제의 침략에 함께 맞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소련과 손잡고 중국을 위협하는 상황을 사전 방지하는 것이 더욱 시급했다. 즉 북한의 행보를 통제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조약에는 중국과 북한의 요구가 모두 반영돼 있다. 북한의 요구는 ‘자동개입’ 조항으로 알려진 2조에 담겨있다. 이 조항은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당해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라는 내용이다. 이 조항에 자동개입이란 표현은 없지만, 군사지원의 자동성과 즉응성을 밝히고 있다. 중국의 요구는 3조와 4조에 명시돼 있다. 3조는 “체약 쌍방은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동맹도 체결하지 않으며,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집단과 조직, 어떠한 행동에도 참가하지 않는다”로 소련과 협력하지 말라는 의미다. 4조는 “체약 쌍방은 양국의 공동 이익과 관련되는 일체 중요한 국제 문제들에 대하여 계속 협의한다”로 사전에 중국과 협의하라는 의미다. 6.25전쟁에 끌려들어간 경험 때문에 북한의 행보를 사전 통제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강대국이 약소국과 맺은 안보조약 중 자동개입과 관련해 이렇게 강한 표현은 드물다. 강대국은 약소국 문제로 행동이 제한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소련과 먼저 조약을 체결하고 베이징에 온 김일성에게 ‘북소 안보조약’보다 더 확실한 약속을 해야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북소 안보조약은 제1조에 “체약국은 ... 평화와 안전의 보장을 목적으로...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었을 경우,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원조를 제공한다”라고 평화와 안전의 보장이라는 전제조건을 붙이고 있다. 그래서 중국은 이런 전제조건 없이 무력침공을 당하면 자동개입이 되도록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북한이 먼저 공격하여 반격을 받을 경우는 제외한다”라고 자동개입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둘째, 조약에서 설정하고 있는 ‘가상적은 누구인가’이다. 동맹 형성의 전제조건은 공동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인데, 조약상에 가상적은 명시돼 있지 않다. 1950년 2월 14일 체결된 ‘중·소 우호협력조약’에도 “일본국 또는 일본과 침략행위에 있어서 연합하는 다른 국가”로 가상적을 명시했고, 소련이 동구권 국가와 체결한 조약에도 ‘히틀러주의의 침략자’로 명확하다. 중국이 미국을 가상적으로 명시한다면 미국과의 관계에 한계를 설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최명해는 조약체결 형식에도 의문을 제시한다. 보통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안보조약은 강대국의 지도자가 약소국 수도에서 약소국에 대한 안보의지를 밝히며 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베이징에서 체결됐다. 김일성이 소련과 이와 유사한 ‘북소 안보조약’을 1961년 7월 6일 체결한 다음 귀국길에 중국 베이징을 들러 7월 11일 저우언라이와 체결한 것이다. 평양에서 북한에 대한 안보지원 의지를 대내외에 선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금년도 조약체결 60주년을 기념하면서 김정은과 시진핑 총서기가 주고받은 친서내용을 보면 이러한 관점이 명확하다. 김정은은 친서에서 적대세력의 도전과 방해 책동이 보다 악랄해지고 있다며 ‘적대세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적대세력이라는 표현 없이 ‘전략적 의사소통’을 강화해 나가자고 제안했다. 친서 내용 속에 조약을 체결한 목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북한은 ‘적대세력에 대한 대응’이 목적이었다면 중국은 ‘전략적 의사소통’으로 북한의 행보를 사전 통제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다. 역대 중북 정상회담에서 중국이 매번 ‘전략적 소통’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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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8
  • [숨은 중국 알기 (18)] 마오쩌뚱, 신중국 건국 선포 후 스탈린과 담판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 현대사는 공산혁명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으며, 공산혁명은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 마오는 신중국 건국을 선포한 1949년 10월 1일 이후 제일 먼저 스탈린과 담판을 시도했다. 그래서 마오는 1949년 12월 6일 출발하여 1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래 해를 넘겨 1950년 2월 17일까지 두 달 정도 소련에 체류했다. 정상회담 역사상 유례없는 장기간 회의였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대만으로 축출하고 나서 할 일이 많았다. 우선은 해군력을 보강하여 대만까지 해방시키는 것이고, 국가로서 틀을 잡아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며, 외교적으로 장제스가 스탈린에게 만주의 이권과 몽골 및 신강 등의 주권 문제에서 대폭 양보한 ‘중·소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새롭게 ‘新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1946년부터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기위해 방문을 희망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스탈린은 1945년 8월 14일 장제스와 ‘소련은 국민당을 지원하고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는다’라는 ‘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이야기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합국인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는 독일 패망 후 유럽 처리와 일본과의 전쟁을 놓고 회담을 한다. 일종의 전승국 간 전리품 ‘주고받기’ 거래인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독일을 분단하고 동유럽에서 소련의 기득권을 인정하는데 합의한다. 그리고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패망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이 예상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다. 이 때, 스탈린은 “그러면 우리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루즈벨트가 “너희가 원하는 것이 뭐지”라고 묻자, 스탈린은 “만주 지방에서 러일전쟁 이전 구러시아 제국이 누렸던 이권을 보장해 달라”고 속마음을 드러낸다. 이 제안에 대해 루즈벨트는 쾌히 승낙하면서 “이 문제는 중국과 협의해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미국과 합의를 바탕으로 스탈린은 장제스로부터 만주지역의 이권을 보장받는 대신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국민당을 지원한다고 약속했던 스탈린이기에 마오쩌둥 만나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전역을 공산화시킨 마오쩌둥이 자신의 70세 생일 축하사절로 오겠다는데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자 소련은 마오쩌둥의 격을 낮춰 많은 공산권 국가의 축하사절단 중 하나로 대우했다. 소련은 장제스로부터 보장받은 만주 및 몽골의 이권이 조금이라도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소련의 입장과는 반대로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되찾고 경제와 군사원조까지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스탈린에게 지원받은 것이 없었다. 스탈린은 국민당을 지원했고, 공산당군이 양쯔강을 넘어 진격하려 할 때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구실로 도하를 만류했다. 중국을 분단시키려는 의도였다.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국가이익이 더 중요했다. 당시 중국이 소련에 굽히고 들어간 것은 국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1차 회담 후, 마오를 모스크바 외곽의 어느 한적한 지역에 머물게 하고 오랫동안 관찰했다. 마오도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안하고 먹고 싸고 자기만 한다”라며 원색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마오는 담판을 짓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빼들었다. 그는 스탈린을 향해 “영국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다. 우리도 영국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도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반도와 대만을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시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미국은 중국을 위협할 의도가 없다는 호의적인 신호를 보낸 것이다. 스탈린은 고민이 깊어졌다. 마오가 소련을 떠나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손잡으면 어떻게 하나, 공산권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유고의 티토처럼 독자노선을 걸으면 어떻게 하나... 등 모두가 소련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들이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다독이기 위해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장제스와 맺은 ‘중소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1950년 2월 14일 ‘新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한다. 만주 지방의 철도, 다롄·뤼순항의 운영권은 중국에 무상 반환했다. 하지만 외몽골 독립은 양보하지 않아 마오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중국은 1950년 4월 중앙인민정부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마오의 외교성과를 치하하며 ‘新중·소 우호조약’을 승인했다. 당시 마오는 외몽골을 잃은 것 때문에 조약 승인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탈린은 마오와 회담 후, 공산주의자이기보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보고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 스탈린의 머리를 스친 것은 1949년 3월 김일성이 요구한 남조선 무력 적화통일 승인이었다. 그는 당시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지만 김일성이 남침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고 그러면 중국도 개입해 싸움붙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마오도 억제할 수 있고, 미국도 한반도에 묶어 놓아 유럽에서 압력이 분산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스탈린은 6.25 전쟁이라는 함정을 파서 중국과 미국을 끌어들이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마오가 소련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1950년 1월 30일 경 김일성에게 무력 남침 승인의 신호를 보낸다. “무력 남침문제에 대해 상의할 사항이 있으니 소련을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소련 방문을 마친 후, 1950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무력 남침 조건부 승인’을 받는다. 소련이 내건 조건은 ‘중국이 동의할 경우’였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귀국 후 바로 4월에 마오를 만나 중국이 동의하면 남침을 승인하겠다는 스탈린의 결심을 통보한다. 당시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제안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스탈린의 뜻에 이의를 제기해 관계가 악화되면 당시 소련에 의지하고 있던 군사 및 경제원조는 받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마오쩌둥은 원하지 않은 김일성의 무력남침에 동의했다. 이렇게 6.25 전쟁 발발 이면에는 스탈린의 노림수가 존재하고 있었다. ◀ 임방순 인천대 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8-10
  • [숨은 중국 알기 (17)] 작은 거인 덩샤오핑, 마오쩌둥 시대 수습하고 새 시대 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은 산이고 덩샤오핑은 길이다”라고 말한다. 즉 청조 말기부터 시작된 약 100여 년의 혼란을 끝내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의 공적을 우뚝 솟은 산에 비유한 것이다. 반면 덩샤오핑은 경제적으로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켰고 정치적으로 마오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실용성을 평가하여 사통팔달로 통하는 길로 묘사했다.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어떠한 모습일까? 아마도 마오쩌둥의 시대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당시 강경 친마오의 4인방들은 영구혁명을 내세워 마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 과잉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킨 인물이 덩샤오핑인 것이다. 오늘은 덩샤오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주로 개인적인 특이 이력과 마오쩌둥과 차별되는 사항들이다. 덩은 1904년 쓰촨성(四川省)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덩원밍(鄧文明)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였고, 서구식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18년 14세 어린 아들 덩샤오핑을 시골 고향에서 4일 걸려야 도착하는 대도시 충칭(重慶)의 학교로 보냈고, 이어서 16세인 1920년 프랑스로 유학 보냈다. 반면 마오쩌둥은 1893년 후난성(湖南省)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아들이 고향에서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오는 부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베이징으로 상경했다. 마오는 관습과 기존체제에 반항적이고 주관이 강한 모습이었다. 덩의 프랑스 유학은 순탄하지 않았다.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해 제대로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다. 파리의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고, 같은 유학생 저우언라이 밑에서 적광(赤光)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 저우언라이와 인연의 시작이었다. 중국 유학생들이 귀국할 때 덩은 1926년 소련으로 옮겨 중산대학에 다녔다. 당시 소련 공산당은 아시아 공산 혁명을 위해 동방대학을, 중국의 혁명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중산대학을 세웠다. 1927년 귀국한 덩샤오핑은 그 해 8월 7일 우한(武漢)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비상대책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처음 만나게 된다. 마오는 정식 참석자였고 덩은 회의록 작성자에 불과했다. 덩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과 장정을 함께 하며 국공내전에 참여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중국 서남부 산악지대 해방을 담당한 제2야전군의 정치위원과 지방행정 책임자를 겸직하면서 능력을 발휘했고 1950년 10월 티베트 점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적으로 마오쩌둥에게 발탁돼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했다. 그 후 군사 지휘관보다는 정치위원과 공산주의 이론가로서 활동했다. 그러면 필자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덩샤오핑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다. 첫째 국내정치를 안정시켰다. 덩샤오핑은 문화혁명 때 주자파로 몰려 시골 트랙터 공장에 4년간 유폐됐고 자신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은 홍위병의 핍박으로 불구가 됐다. 그러나 덩은 마오와 문화혁명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보복을 최소화했다. 한풀이와 보복의 차원을 넘어 통합과 발전의 관점에서 중국을 새롭게 출발시킨 것이다. 마오 시대를 “공이 7이고 과가 3이다”라고 정리하고 더 이상 소모적인 과거사 논쟁에 휩싸이지 않게 했다. 무엇보다 인적청산 대신 제도를 개선해 나갔다. 1인 절대권력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구조를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고, 권력투쟁의 원천인 권력의 승계도 지금의 지도부가 합의에 의해 차차기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제도화했다. 이런 제도에 의해 탄생한 지도부가 바로 후진타오와 시진핑이었다. 둘째, 마오는 자신의 이상과 이념에 중국을 꿰맞추려한 이상주의자였다. 반면 덩은 “고양이가 검은 색이든 흰색이든 관계없다.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현실주의자였다. 이념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개혁개방(경제개혁, 대외개방)을 추진하면서 덩샤오핑의 신념은 확고했다. “가난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다”, “먹을 것을 가진 자가 결국 모든 것을 갖는다“라며 경제적 현실을 이념보다 중시했다. 실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국 사회는 평등이라는 공산주의 교조적인 사상에서 벗어나 경쟁과 효율의 개념을 도입해 고속 발전하기 시작했다. 선부론(先富論)도 나왔다. 능력 있고 노력한 자가 먼저 부자가 되고 그 이익을 공유하며 이를 토대로 여러 명의 부자가 탄생하는 개념이다. 자본주의 개념을 받아들인 중국 경제체제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억눌려져 있던 중국인의 부자 마인드를 깨워 인민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돈을 벌게 했다. 셋째,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시대 흐름에 적응했다. 마오쩌둥은 제3차 세계대전을 염두에 두고 소련 및 미국과 전쟁을 준비하는 ‘전쟁불가피론’자였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전쟁가피론’을 주장하며 국방비를 줄여 경제발전에 전념했다. 1979년 미국과 국교수립을 하면서 향후 100년간 맞서지 말 것을 주문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충분히 실력을 갖춘 후 나서라는 의미다. 중국은 이런 자세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고속 발전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한국과 수교를 결심했다.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한국을 냉전의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한국과 수교한다면 얻게 될 국가이익으로 ① 경제적 협력이 가능하고, ⓶ 대만을 고립시킬 수 있으며, ③ 1989년 6.4 천안문 사태로 서방으로부터 고립당한 상황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았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흰 고양이였다. 문제는 침입자를 경고하고 완충해주는 검은 고양이인 ‘북한을 어떻게 설득하고 달래는가’였다. 덩샤오핑은 북한에 최대한 정성을 기울였다. 군사원조를 통해 북한의 안보불안감을 달랬고, 경제원조로 신뢰를 보였다. 그리고 지도급 인사들이 방문하여 김일성에게 직접 한중수교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계속된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북한의 실망감을 해소시키지는 못했지만 북한에게 할 바를 다했다. 중국은 한국과 수교함으로써 한국과 북한에 모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변모하여 한반도에서 전략적 우월을 점하게 됐다, 넷째, 바다를 주목하고 해군력 증강을 강조했다. 덩샤오핑은 바다를 지키고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항공모함 보유를 결심했다. 이를 실현시켜준 인물이 류화칭(刘华清)이었다 류화칭은 국공내전 시절 제2야전군 정치위원이던 덩샤오핑 휘하에 있었으며 1989년에는 덩샤오핑에 의해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발탁됐다. 류화칭은 “중국이 항모를 만들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항공모함 확보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결국 류화칭은 덩샤오핑의 항공모함의 꿈을 실현하였다. 중국의 항모 명칭이 미국처럼 역대 대통령이나 해군제독이었다면 아마 1번함은 덩샤오핑함, 2번함은 류화칭함이 되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93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사망 직후 각막과 장기 일부는 해부학 연구용으로 기증됐으며, 그의 유해는 바다에 뿌려졌다. 중국인들은 남중국해가 덩샤오핑의 묘소라고 한다. 150㎝가 조금 넘는 작은 체구이지만 묘소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이렇게 시대를 열어간 덩샤오핑에게도 과오는 있다. 첫째, 개혁개방에 뒤따르는 부정부패 문제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쥐를 잘 잡았던 고양이가 이제는 주인집 부엌에 있는 생선에 손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보와 권력을 쥐고 있는 혁명원로 자녀들과 친척들의 재산 축적 문제는 중국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덩샤오핑의 아들과 딸, 사위들도 홍콩을 중심으로 각종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데, 이들에게 돈벌이는 땅 집고 헤엄치기다. 둘째, 1989년 6.4 천안문 사태 시 이를 유혈 진압했다. 희생자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의 과오에 대해서 대체로 말을 하지 않는다. 부정부패 문제는 경제가 고속 발전하는 과정에서 어느 나라든 발생하는 보편적 문제라는 것이고, 천안문 사태 유혈진압도 국가의 질서를 위해 불가피했다는 생각이다. 덩샤오핑의 과오를 생각하니 “살아있는 동안 비난받지 않은 사람은 죽은 후에 비난받을 것이다”란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필자는 후세에 덩샤오핑의 공적과 과오가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하다. 필자가 감히 먼저 평가해 본다면 그의 공적은 8이요 과오는 2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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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04
  • [숨은 중국 알기 (16)] 영원한 2인자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발탁해 오늘의 중국 이뤄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가 베이징 근무시절, 한반도 전문가인 한 연구원의 초대를 받아 어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주문한 음식은 소고기를 다진 완자 즉 미트볼이었다. 메뉴판에는 ‘사자머리 완자’라고 적혀있었다. 평범하고 소박한 이 음식이 그 연구원의 설명을 듣게 되자 갑자기 달리 보였다. 그는 “이 음식은 저우언라이 총리가 평소 즐겨 드시던 음식입니다. 서거하시기 며칠 전 이 음식을 보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라며 마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간다. “저우 총리는 옆에 있던 주방장에게 ‘자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앞으로 이 음식 언제 먹어보나’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고 소개했다. 필자는 당시 사자머리 완자를 보면서 저우가 사망한지 30여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한 중국인들의 그리움과 애정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은 중국을 세웠고(建起來), 덩샤오핑은 중국을 부유하게 했으며(富起來), 시진핑은 중국을 강하게 만들었다(强起來)”라고 평가한다. 다분히 국가주석인 시진핑을 부각시키기 위한 선전 차원의 말이다. 하지만 시진핑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퇴임 이후 가능할 것이다. 중국 속담에 “관에 뚜껑 덮은 후에야 평가할 수 있다(蓋棺論定)”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했던 저우언라이는 마오 및 덩과 달리 자기 시대를 만들지 못했고 자신의 사상과 이론도 펼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저우가 없었다면 마오도 없었고 덩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마오와 덩에 비해 손색없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저우는 비록 영원한 2인자였지만, 중국 공산혁명이라는 큰 역사의 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박수 받으며 퇴장한 훌륭한 주연 중 한 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도 중국인들 마음속에 청렴하고 친밀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오늘은 영원한 2인자이자 중국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를 찾아가 보겠다. 그는 청나라 말기인 1898년 3월 5일 짱수성 화이안시(江蘇省 淮安市)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직후 5촌 아저씨의 양자로 입적됐지만 10살 무렵 고아가 돼 선양(瀋陽)에 있는 친척집에 머물렀다. 1913년 텐진(天津)의 난카이 중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고학으로 도쿄 호세이(法政) 대학 부속전문학교에 이어 메이지(明治) 대학에 들어갔지만 학업을 포기하고 1919년 귀국한다. 이후 난카이 대학 재학 중 5.4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그리고 192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과 동시에 유럽지부 조직책을 맡았다. 그는 프랑스에서 4년간 머물다가 1924년 26세의 나이로 귀국한다. 일본과 프랑스 유학 경험을 통해 저우는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을 넓혔다. 즉 나와 다른 세계를 보면서 타인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반면, 마오는 1949년 12월 신중국 건국 선포 직후 스탈린과 회담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것 외에는 외국 경험이 없다. 따라서 저우가 폭넓은 국제감각을 토대로 중국 국민당과 2차 국공합작 협상, 미국과 수교 협상, 월남전 평화협정 등 주요 협상을 맡으며 마오를 보좌했다. 저우는 난카이 대학 시절 두 가지 인연을 만난다. 하나는 평생 동지이자 반려자인 덩잉차오(鄧潁超)이다. 5.4 학생운동 과정에서 만나 평생을 같이했다. 비록 슬하에 자식은 없었지만 저우와 덩은 서로에게 충실했고 한눈팔지 않았다. 저우는 친척들에게 자애로웠지만 불법과 부정 그리고 특권은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사생활은 조금도 흠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조카 1명이 장학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장학금 지급을 중단시키고 자신의 월급에서 그 비용을 지불해주었다고 한다. 친척들 어느 누구도 총리와의 관계를 밝히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고, 친척들도 저우의 이러한 당부를 충실히 지켰다고 한다. 이들은 공산당 입당을 위한 신원확인 과정에서 저우와 친척임이 밝혀졌지만 어떠한 특혜도 없었다. 또 다른 인연은 연극부 동아리 활동이었다. 저우는 주로 여자 역할을 했다.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한 외교적 감각과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 기질이 바로 여기서 함양됐다고 한다. 그래서 저우는 협상의 달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저우는 공산당에 입당하고, 황푸군관학교가 설립되자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한다. 이 때 교장인 장제스(蔣介石)와도 좋은 관계를 형성한다. 필자는 과문한 탓인지 저우언라이의 전 인생을 통틀어 저우를 인간적으로 싫어하거나 매도한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문화혁명 시절 4인방이 저우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반역 음모를 조작해 마오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의심이 많았던 마오조차도 “그가 그럴 리 없다”라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1927년 1차 국공합작 결렬 후 저우언라이는 마오 등과 함께 공산당 활동에 몰두한다. 이 때 저우는 마오보다 당내 서열이 높았다. 1935년 대장정 기간 중 공산당의 향후 투쟁방향을 결정하는 쮼이회의(遵義會議)에서 저우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투쟁방식을 농촌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오를 주목했다. 그는 마오를 홍군 지도자로 추대하여 관철시킨 다음 스스로 마오 휘하에 들어갔다. 저우는 공산당 내의 서열보다도 마오의 옳은 주장과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누가 중국 공산혁명을 이끌어갈 적임자인가”라는 관점에서 인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저우에게는 서열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우가 없었다면 마오도 없었다는 말이 이때 처음으로 나왔다. 저우가 총리로서 급진적이며 이념적인 마오를 27년간 보좌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저우는 프랑스 유학시절 덩샤오핑을 처음 만났다. 덩은 6년 프랑스 유학 후 이어 모스크바에 1년 체류한 다음 1927년 귀국하여 공산혁명 대열에 합류한다. 1974년부터 병세가 심해진 저우는 정상적인 총리 직책 수행이 어려워지자 덩샤오핑을 총리 직무대행으로 임명했다. 저우는 자신이 주창한 중국 근대화를 위한 4개 현대화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로 덩을 눈여겨 봐두었던 것이다. 이같이 저우언라이의 기준은 “누가 중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인가”였다. 그래서 1974년 12월 입원하고 있는 병실로 덩샤오핑을 불러 “당신이 나보다 낫소. 지난 1년간 총리로서 실적이 말해줍니다. 당신을 정식 총리로 건의하겠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병약한 몸을 이끌고 창사(長沙)에 머물고 있는 마오를 찾아가 진지하게 덩샤오핑을 추천한다. 4인방이 득세하던 상황이었지만 저우의 추천으로 덩은 중국군 총참모장과 부주석으로 내정됐고 이어 다시 좌천됐다가 1978년 복권하게 된다. 저우가 없었다면 덩샤오핑도 없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저우가 중국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구상한 개혁개방을 덩샤오핑이 실천해 줄 것으로 믿었고, 덩샤오핑은 훗날 그런 기대에 부응했다. 저우는 1976년 1월 8일 자신의 주치의 우제핑(吳介平)에게 “우 동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소, 여긴 별 일이 없으니 빨리 가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도록 하시오. 그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소”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덩샤오핑은 장례위원장이 되어 저우의 유언에 따라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정리한다. 시신을 화장해서 자기 손으로 중국 산천에 뿌리고 남긴 재산 약 1만위엔은 당에 기부했다. 1976년 1월 15일 그의 유해가 중국 산천에 뿌려지던 날, 유엔 본부는 반기(半旗)를 게양했다. 유엔에서 반기를 게양하는 관례는 그때까지 없었다. 몇몇 회원국 대사들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죽었을 때엔 유엔 깃발이 그냥 나부꼈는데 중국의 제2인자가 죽었다고 해서 유엔에서 반기를 올리고, 또 다른 나라 국기마저 다 내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따졌다. 이에 대해 당시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고,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중국은 금은보화가 많은 나라인데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는 은행에 돈 한 푼이 없었다. 둘째, 중국은 인구가 10억이 넘지만 그는 평생 아내 한 사람만 사랑했고 자녀도 없다. 귀국의 지도자나 국가원수가 이 2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서거했을 때 반기를 게양하겠다”라고. 중국 텐안먼(天安門) 광장에 세워진 저우언라이의 추도비에는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라고 새겨져 있다. 필자는 여기에 “그는 마오쩌둥을 발탁하여 그 밑에서 평생 보좌했고, 덩샤오핑을 발탁하여 중국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라고 추가하고 싶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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