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3-3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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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은 중국 알기 (14)] 보이지 않는 ‘잠규칙(潛規則)’이 현행 법규 위에 존재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 지도자들은 ‘법에 의한 통치’(依法治國)를 내세운다. 이는 덩샤오핑(鄧小平) 시대부터 역대 지도자를 거치며 계속 추진돼온 방침으로 시진핑(習近平) 시대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국가를 법으로 통치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중국 지도자들이 새삼 강조하는 이유는 법으로 통치가 안 된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면 법과 규정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우리는 잘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잠규칙(潛規則), 즉 잠수함처럼 숨어있는 규칙인 것이다. 아직도 중국 사회 곳곳에서 그리고 외교에서도 잠규칙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첫 번째, 20년 간 중국과 비즈니스를 해온 류재윤이 그의 저서 ‘지금이라도 중국을 공부하라’에서 밝힌 자신이 겪은 경험이다. 그는 중국 어느 지방에 공장을 건설하려고 규정과 방침에 따라 서류를 작성하여 행정기관에 제출했다. 그런데 담당자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계속 안 된다고만 말했다. 그가 문제 해결을 위해 인맥과 꽌시(關系)를 동원하여 수소문한 결과, 한 친구가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정리해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중국 친구는 “아마 잠규칙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잠규칙이 뭐냐고 물어보자 “우리가 공개적으로 알고 있는 규칙보다 상위에 있는 규칙이지. 보이지 않지만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거든, 하지만 숨어있는 규칙이어서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고 있어, 그런 이유로 그게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고, 공개적으로 물어봐도 절대 알려주지 않는 거야”라고 답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회사에 대해 숨어있는 규칙을 알아보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 결과, 드디어 잠규칙을 알아냈다. 몇 년 전에 그 지방 책임자가 자기 회사에 투자를 요청했는데, 타산이 맞지 않아 거절한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체면이 상한 책임자는 “저 회사하고는 앞으로 어떤 거래도 하지마라”고 했다. 그 한마디가 바로 자기 회사에 대한 잠규칙이었다. 어떤 문서에도 그런 조항이 명시돼 있지는 않았지만, 그 지역 공무원들은 예외 없이 그 잠규칙을 확실하게 숙지하고 철저히 준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서에 있는 규칙을 해결해도 잠규칙에 묶여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중국의 현실이다. 심지어 잠규칙을 처음 만들어 낸 당사자가 은퇴한 후에도 한번 정해진 잠규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한다. 류재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퇴한 예전 책임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과거에 체면을 상하게 한 ‘투자요청 거절 건’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고, 과거에 묶여 진행되지 못하는 현재의 일을 풀어달라고 역시 정중히 부탁했다. 그 은퇴한 책임자는 손상됐던 체면을 살려주는 사과를 받아들이고 현직 공무원들에게 “내가 한 말에 신경 쓰지 말고 규칙대로 하라”고 연락을 취했다. 잠규칙이 해결되자 공장 건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외국 회사가 자신들의 투자 요청을 거절했다고 중국 사람들이 모두 잠규칙을 만들어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체면이 손상됐는지 여부이다. 두 번째, 최근 우리의 사드배치 문제로 중국이 취한 소위 한한령(限韓令) 또는 금한령(禁韓令)조치이다. 중국 정부는 “이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취하는 조치들이다”라는 입장이다. 필자가 보기에 한한령은 국가 차원의 잠규칙이다. 정부의 지시가 없음에도 나타나는 모습이 같다면 원인도 같아 보인다. 즉 중국 지도자가 체면을 손상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시진핑 국가주석은 수차례 공식적으로 사드배치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우리 정부도 사드배치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사드배치 발표 10일 전인 2016년 6월 29일 중국을 방문한 우리 총리도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사드배치 문제에 대해 “양국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채널로 협의를 해보자”라고 언급했다. 그러고는 2016년 7월 8일 사드를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을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발표였다. 당시 필자가 만나 본 중국인들은 정부 공무원이든 일반인이든 누구나 똑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한국이 그럴 줄 몰랐다. 왜 중국을 배신하는가” 그들은 국가 지도자부터 일반인까지 체면을 손상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 중국인들의 이어지는 조치는 잠규칙이 아니겠는가? 바로 한한령인 것이다. 따라서 잠규칙, 한한령에서 벗어나려면 중국의 체면을 살려주어야 한다. 우리가 제시한 ① 사드 추가배치를 검토하지 않고, ②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참여하지 않으며, ③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이 군사동맹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란 3불 입장으론 손상된 체면이 회복되지 않는 모양이다. 중국은 사드배치 이전 상태 즉 사드를 철거해야 비로소 체면이 회복된다고 생각하고 한한령을 해제할 듯하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사드의 ‘단계적 처리’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한한령을 풀겠다고 중국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사드를 철거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우리 안보와 생존문제에 있어서 ‘사드 철거’와 ‘한한령 해제’는 결코 동일한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등가성(等價性)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중국의 체면도 살려주면서 사드 배치라는 정책을 관철시킬 수 있는 성숙되고 고차원적인 외교력을 왜 발휘하지 못했는지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필자는 현 정부가 3불 문제에 대해 다음 정부를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3불은 당시 우리의 입장이지 중국과의 합의나 약속은 아니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당시 외교장관도 “3불은 우리가 중국에 동의해 준 사안이 아니고 기존 입장을 반복하고 확인해주었을 따름이다”라고 국회에서 밝힌 바 있다. 다음 정부는 3불이 단순 입장표명이냐 아니면 약속이냐의 소모적인 논란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국이 3불은 약속이며 한·중 간 합의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여 문제를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정부는 3불에서 자유로운 입장에서 출발해 중국을 상대해야 한다. 세 번째, 잠규칙은 아니지만 이에 준하는 개인 경험이 있어 소개한다. 필자가 대만에서 유학한 시기는 대만과 단교하기 1년 반 전이었다. 당시 필자의 대만 동기생들은 한국이 조만간 중국과 수교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중국과 수교하는데, 한국만 장제스(蔣介石)가 임시정부를 도와준 50여년 전 의리를 지켜 국교를 유지할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필자에서 “너 언젠가 중국 갈 거지, 대만에서 공부한 거 중국에서 활용할 거지”라고 뼈있는 한마디를 던지곤 했다. 대만 친구들의 예상대로 우리는 1992년 8월 대만과 단교와 동시에 중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당시 대만인들도 모두 우리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아직까지 그 감정이 남아있다. 역시 대만의 체면을 살려주지 못한 우리 정부의 미숙함 때문에 나 자신이 정부를 대신해 미안함을 표하게 됐다. 중국인들은 ‘군자가 보복을 하는데 10년도 늦지 않다’(君子報仇十年不晩)라는 말을 하곤 한다. 뒤끝이 10년 이상 간다는 의미이다. 중국인을 대할 때, 그들의 체면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뒤끝 즉 잠규칙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국가 관계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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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2
  • [숨은 중국 알기 (13)] 중국은 왜 북한의 ‘천년 숙적’이 되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우리가 중국과 북한 관계를 볼 때 의아한 부분이 있다. 중국과 북한이 그들이 항상 강조하는 만큼 혈맹인가이다. 중국과 북한은 기회 있을 때마다 ‘피로써 맺어진 혈맹, 선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우의’ 등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중국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중국과 북한은 언제나 변함없는 혈맹이라기보다 필요할 때만 혈맹인 것이다. 특히 북한은 외양상 중국을 혈맹으로 치켜세우지만 내면적으로는 강하게 불신하고 있다. 북한의 중국에 대한 불신의 역사는 혈맹의 기간보다 짧지가 않다. 그러면 북한의 대중국 불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첫 번째는 김일성이 1934년 중국 만주지방에서 중국 공산당의 항일무장조직인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여 항일빨지산 투쟁을 할 때였다. 당시 만주지방에는 항일독립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도 있었다. 일본관동군은 항일무장단체를 소탕하기 위해 이들 친일파를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했다. 이들 친일파 비밀조직을 ‘민생단(民生團)’이라고 했다. 항일무장단체는 조선인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어떤 미심쩍은 행적이라도 있으면 민생단으로 간주해 처형했다. 이른바 민생단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지속돼 약 5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희생을 당했다고 한다. 동북항일연군에 속한 김일성도 조사 대상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중국 중학교를 다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돼 처형을 면했다고 한다. 당시 20대 초반의 김일성은 중국인들이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인들을 민생단으로 몰아서 처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김일성은 이때부터 중국인을 어디까지 믿고 함께 해야 하는가 고민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6.25 전쟁 당시 얘기다. 중공군은 1950년 11월, 2차 전역에서 38선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때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은 부대정비와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더 이상 남진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펑더화이에게 “승리하는 군대가 공격을 멈추는 법이 어디 있는가, 계속 부산까지 밀고 가서 공산혁명을 완수하자”라고 항의했지만, 펑더화이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펑더화이는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한 국군과 유엔군을 38선까지 밀어내 자국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동시에 멸망 직전의 김일성 정권을 살려주었고, 평양을 회복했으며, 북한 영역을 대부분 회복시켜준 것으로 참전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 것이다. 펑더화이에게는 한반도 공산혁명은 둘째 문제였다. 많은 희생을 치르며 완수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후 펑더화이는 스탈린의 중재로 비로소 38선 이남으로 남진을 시작했다. 이 때 김일성은 중국의 본심을 깨달았다. 중국은 결코 북한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인다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를 깨달은 것이다. 김일성은 전쟁 기간과 전쟁 이후 중공군 사령부를 거의 방문하지 않았으며, 이 사건 이후 중국에 대한 불신이 굳어졌다고 한다. 세 번째로, 김일성은 1956년 8월, 중국 공산당과 유대가 있는 ‘연안파’와 더불어 일부 ‘소련파’를 숙청했다. 이른바 ‘8월 전원회의 사건’(또는 8월 종파사건)이다. 중국은 북한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당시 중국을 방문 중인 소련 부수상 미코얀과 함께 국방부장 펑더화이를 북한에 파견했다. 중소 합동 진상조사단인 셈이다. 중국과 소련은 숙청된 인원들의 복권과 김일성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중국이 소련과 함께 북한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도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은 중국이 언제라도 내정간섭을 하면서 자신의 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다. 네 번째로, 김일성 시대 말기인 1992년 북중 관계에 가장 극적인 한중 수교가 이뤄진다. 북한은 중국에게 “한국과 수교 필요성은 인정하나 우리가 미국 및 일본과 수교한 후 추진했으면 좋겠다”라고 제의했지만 중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기존 우호관계 유지를 약속했음에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배신감을 달래기는 역부족이었다. 김정일 시대에 들어서는 1997년 2월 12일 조선로동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황장엽이 중국 베이징 한국 영사관에 망명한 사건이 있었다. 북한은 선물을 사려고 외출한 황장엽을 남한 당국이 납치했다고 주장하며 그의 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의 요청을 거부하고 황장엽을 필리핀으로 보냈고 결국 한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김정일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은 믿을 수 없다는 평소의 생각을 굳히게 됐다. 김정은도 김일성, 김정일의 대중국 인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 첫 사례가 고모부인 장성택을 ‘국가전복음모행위’라는 죄목으로 2013년 12월 12일 처형한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대외무역의 90% 이상을 하고 있는데, 장성택은 대외무역을 장해 점차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김정은은 장성택이 중국의 지원으로 정권 교체를 도모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낀 것이다. 다음 사례는 이복형 김정남을 쿠알라룸프르 국제공항에서 살해한 것이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정은은 중국이 김정남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다. 몇 차례 암살을 기도했지만 번번이 중국의 개입으로 무산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김정은은 중국이 자신을 대체하여 김정남을 지원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마지막 사례는 UN 등 국제사회로부터 북한이 핵실험에 따른 경제제재를 받을 때 중국이 동참한 사실이다.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원치 않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춘 것이다. 2017년 당시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못하나 건너오지 않고 있다’라고 할 정도로 중국은 철저히 북한을 제재했다. 김정은은 이런 중국을 향해 “미국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이어서 ‘조중 친선이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목숨과 같은 핵과 맞바꾸면서까지 구걸할 우리가 아니라는 걸 똑똑히 알아야 한다’라고 반발했다. UN의 대북 경제제재에 동참하는 중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감과 불신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시사점은 중국과 북한 관계는 앞으로도 과도하게 혈맹을 강조할 때도 있을 것이고, 최고 지도자의 특사 면담도 거절하는 냉랭한 시기도 있을 것이다. 개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북 관계의 특수성과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과 북한은 모두 자기의 이익에 충실하고 있다고 본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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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5
  • [숨은 중국 알기 (11)] 중국의 북한 다루기 알면 우리도 '갑질 외교' 가능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가 2003년도 중국에 있을 때, 한 한반도 연구자가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북조선 친구들 참 골치 아픕니다. 그들은 우리한테 원조를 받아가면서도 오히려 큰 소리를 칩니다. 유류를 더 많이 지원해 달라, 이번에는 왜 현금을 안 주는가 등 요구가 끝이 없습니다. 충분히 주는데도 더 달라고 합니다”라고. 그는 정부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 당국은 북한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며 두둔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갑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甲과 乙이 뒤바뀐 중국과 북한 관계에 대해 2007년도에 중국에서 한 권의 책이 발간됐다. 제목은 ‘조선진상(朝鮮眞相)’, 조선의 실제 모습이라는 의미다. 이 책은 곧 이어 일본에서 ‘대북조선·중국 기밀파일(對北朝鮮·中國機密ファイル)’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고, 국내에서도 이듬해인 2008년 ‘중국의 대북조선 기밀파일’로 출판됐다. 주요 내용은 “북한을 중국 편으로 계속 남겨놓기 위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말라. 비리조차도 문제 삼지 말라”라는 북한에 대한 중국 정책의 감춰진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책에서는 이 정책을 기조정책(忌朝政策 : 북한문제로 곤란해지지 않도록 북한을 기피하는 정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이 중국에 아무리 갑질을 해도, 북한을 특별대우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를 수록하고 있다. 중·북 관계에서 甲과 乙이 뒤바뀌었다면 의문이 뒤따른다. ‘중국이 북한을 특별대우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가’이다. 우선 중국이 북한에 양보하거나 전폭 지원 및 배려한 대표적 사례를 알아보자. 첫째, 1962년 중국은 북한과 중·북 국경협약(中朝边界条约)을 맺는다. 중국은 이 협약에서 백두산 천지 분할 및 압록강과 두만강의 섬 귀속 문제에 대해 북한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했다. 중국은 북한에 양보한 내용이 밝혀지는 부담 때문에 이 협약을 공개하지 않지만 중국이 영토 문제에서 양보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한다. 둘째, 1962년 중국은 대약진 운동의 후유증으로 자국 경제 발전에도 힘이 부쳤다. 그럼에도 이 때 중국의 자원 배분은 북한이 우선이었다. 심지어 북한이 밀을 요구하자 중국은 오스트리아에서 수입해 지원했으며, 북한이 방직공장의 방직추 10만 개를 요구하자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조선이 인력을 파견하여 우리 방직공장에서 설비를 해체해서 가져가라”고 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사례다. 셋째, 1960년 소위 ‘조선해방 15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중국은 북한과 친선 축구시합을 했다. 이 때 중국 군중들이 북한 심판에게 야유를 보내는 일이 있었는데, 저우언라이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국가체육위원회 간부들을 비판하면서 군중들에게 북한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심화교육을 시키라고 지시했다. 북한 축구팀이 텐진(天津)으로 이동하자 허롱(賀龍) 당시 부총리도 관계자들에게 “어떠한 불쾌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중국이 북한을 특별대우한 대표적 사례이다. 1963년 5월 말, 마오쩌둥(毛澤東)은 우한(武漢)에서 김일성에게 “(중국) 동북지역 전체는 조선의 후방기지이다. 장래에 전쟁이 발생하면 이 지역을 김일성 동지에 맡겨 통일지휘를 하도록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1964년 9월 김일성이 동북지방을 비밀리에 방문하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선양(瀋陽)에서 영접하면서 “이 지방은 당신이 통제할 것이고 어떻게 통제할 지 분부만 내리면 된다”라고 마오쩌둥의 의사를 전달했다. 김일성은 중국 동북국 제1서기 송런치옹(宋任窮)과 중앙대외연락부 부부장 우슈취엔(伍修權)의 안내를 받으며 몇 주간 이 지역을 시찰했다. 김일성은 중국의 이러한 제안과 이어지는 환대에 만족했고, 중국은 북한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필자가 제시한 이 사례들은 최근에 공개됐다. 중국 션즈화(沈志華)가 2017년도에 발간한 ‘최후의 천조(天朝)-모택동·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이라는 책에 기술돼 있는 내용들이다. 션즈화는 중국과 러시아에서 해제된 1960년대 비밀문서를 인용하고 있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과 특별대우는 1960년대 초반 중·소 분쟁이 점차 격화되는 시점에서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의 목적은 명확했다. 북한이 소련 쪽으로 기울어 반중노선을 채택할 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었다. 즉 북한을 중국 편으로 잔류시키고자 하는 단 하나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을 적대세력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중·소 분쟁이 점차 약화돼 가던 80년대와 종식된 90년대, 그리고 중국과 소련이 관계를 회복한 2000년대에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중국은 북한의 극렬한 반대와 반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한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한·중 국교 수립은 소련보다 2년 늦춘 배려는 있었지만 북한에게는 깊은 상처를 주었다. 중국에게 북한이 중요했던 시점은 북한이 소련카드를 들고 있을 때였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 그 자체는 그저 평범한 변방의 낙후된 주변국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북한은 중국이 1992년 한국과 수교하자 극도로 배신감을 느끼고 연일 비난을 퍼부었지만 덩샤오핑은 의연했다. 북한이 덩샤오핑을 ‘사회주의 배신자’라고 아무리 독설을 퍼부어도 중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런 중국이 약간 움찔한 때가 있었다. 북한이 대만카드를 꺼내들었을 때이다. 북한은 대만과 1997년 1월, 6만 배럴의 대만 저준위 핵폐기물을 황해북도 평산에 있는 폐광산에 옮겨 처리하는 데 합의했고, 1996년에는 대만의 관광 전세기의 북한 운항에 합의했다. 북한의 예상대로 중국은 움직였다. 중국은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북한에게 식량을 원조해 주는 대가로 북한이 대만과 교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중국은 소련이든 대만이든 중국에 경쟁적이거나 적대적인 어떠한 세력도 북한에 진출하면 안 된다는 변함없는 원칙이 있다. 최근 중·북관계가 급속히 긴밀해진 시기가 있었다. 양국은 2018년~2019년 2년 사이에 정상회담을 무려 5차례나 개최했다. 이런 배경에는 중·소 분쟁과 동일한 상황이 있었다. 북한이 중국에게 미국카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북한이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기 전에 이를 차단하려고 북한에 ‘혈맹이네, 전통 우의이네’ 하면서 선수를 치고 나갔다. 미국이 북한과 협력하는 상황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인 것이다. 중국은 이렇게 경쟁세력이나 적대세력 등 외부세력이 북한지역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북한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중국이 기울인 정성과 노력의 결과 북한은 중국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어떠한 외세와도 손잡고 있지 않다. 중국이 북한을 잘 다루고 있는 것이다. 비록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이 보였던 대중국 외교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북한보다도 중국을 상대할 카드가 더 많다. 이미 바닥에 깔려 있어 누구나 알고 있는 미국카드가 있고, 오른손에는 쿼드(4개국 협의체)카드, 일본카드, 대만카드, 베트남 등 동남아카드를 쥐고 있다. 왼손에도 있다. 호주카드, 인도카드, 러시아카드, G7카드, 나토카드 등이다. 이게 전부 다가 아니다. 또 있다. 바로 가장 위력적인 카드인 조커로 ‘국내 한목소리 카드’이다. 이 카드가 기존카드들과 맞아 떨어지면 우리는 중국에 갑질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국내 한목소리 카드’를 내세워 중국에 갑질을 해대는 유쾌한 상상을 해본다. 우리는 결코 중국에게 을이 아니기 때문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6-22
  • [숨은 중국 알기 (10)] 중·소 분쟁 당시 북한이 취한 ‘전략적 모호성’의 실익과 한계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이들과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며, 최소한 적대관계는 피해야 한다. 주변국들이 우리에게 외교적으로나 정치·경제적인 압박을 가하면, 이를 상대해서 국익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군사적 압력 상황은 더욱 어렵다. 따라서 중국과 북한 관계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몇 차례 중·북 관계를 언급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주변 강대국 A의 압력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강대국 B를 끌어 들였을 때, B가 과도한 요구를 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이번에는 A와 B가 우리를 배제한 채 타협을 한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약소국 입장에서 제일 좋은 방법은 A와 B를 상호 견제시켜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 공간에서는 자율성이 증대돼 국익을 챙길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 질 수 있을까? ‘전략적 모호성’일까? ‘전략적 모호성’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만, 두 가지 치명적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첫째, 모호성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 모호성을 유지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위험성 때문에 자칫 A와 B로부터 동시에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중·소 분쟁 와중에 있던 북한의 1960년대 외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오늘날 미·중 패권 경쟁 속에 있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북한은 중공업 위주의 경제 발전을 추진하면서 4대 군사노선에 따라 최신 군사장비를 확충하려고 했다. 소련은 북한의 중공업 분야 원조는 물론 최신 무기도 제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공산 종주국이자 UN 상임이사국이어서 북한을 외교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중국은 소련에 비해 여러모로 낙후돼 있었다. 하지만 북한에 민간 생활에 요긴한 경공업 품목을 원조하고 있었고, 북한의 정치적 성향이 소련보다 중국에 더 가까웠다. 당시 소련은 미국에 평화공존을 제기하면서 스탈린 개인우상화를 비판하고 있었으나, 중국과 북한은 미국과 평화공존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스탈린 개인우상화 비판도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권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금기사항이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소련과 중국 두 나라가 모두 필요했다. 어느 한 국가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때 북한이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전략이 바로 ‘전략적 모호성’이었다. ‘전략적 모호성’이란 특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위험 부담을 회피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전략이라기보다는 당면한 곤란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임기응변’에 가깝다. 다시 말하자면 ‘전략 없음’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소련에 가서는 후르시초프 서기장이 듣고자 하는 발언을 했다. 후르시초프는 그 대가로 김일성이 요구하는 원조를 약속했다. 중국 마오쩌둥 앞에서는 그가 원하는 바를 언급했고 이에 만족한 마오쩌둥은 곧바로 북한에 대량의 원조를 약속했다. 중국과 소련은 북한이 자국 편에 줄서기를 요구하며 소위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북한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필요한 것을 챙겼다. 이때의 북한 외교 형태를 등거리 외교 또는 시계추 외교라고 한다. 북한은 ‘전략적 모호성’으로 양측에서 많은 경제적 원조를 받아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외에도 북한은 1961년 7월 6일 소련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고 이어서 5일 후, 7월 11일에는 중국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을 의식해서 북한과 조약 체결을 계속 미루던 소련과 중국을 북한이 압박한 결과였다. 즉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상황’(The tail is wagging the dog)이 발생한 것이다. 약소국 생존론에 의하면 약소국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강대국에 대하여 외교적 자율의 공간이 넓어진다고 한다. 첫째는 대립하고 있는 두 강대국이 나를 중심으로 경쟁할 때, 둘째는 국내에서 한 목소리가 나올 때이다. 당시 북한은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전략적 모호성’은 여기까지였다. 북한이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고 1962년부터 중국과 점차 가까워지자 소련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곧바로 제재를 가했다. 소련의 요구는 북한이 중국의 ‘인민공사’나 ‘대약진 운동’과 같은 대중동원 방식을 버리고 소련이 제창한 ‘동유럽공산국가 경제협력기구(COMECON)’ 분업체계에 합류하여 중공업이 아닌 경공업을 발전시키라는 것이었다. 소련은 우선 후르시초프가 북한에 약속한 중공업 경제 원조를 취소했다. 그리고 동구 공산권국가들에게 북한과 교역을 제한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 여파는 예상보다 컸다. 소련의 원조를 전제로 수립된 북한의 ‘7개년 인민경제발전계획(1961년~1967년)’은 차질을 빚었다. 중국이 제공하는 경공업 위주의 원조는 소련의 중공업 원조를 대체할 수 없었다. 북한은 큰 타격을 입고 경제발전 목표량을 하향 조정하면서 목표년도도 3년 연장했지만 달성할 수 없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경제적 원조가 절실했다. 1965년 무렵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발생하자 이번에는 북한이 중국과 소원해지면서 소련에 접근했다. 경제적 원인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은 북한이 우호관계 재개 신호를 보냄에 따라 취소했던 원조를 재개했다. 소련도 중국과 분쟁상황에서 북한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국이 가만있지 않았다. 중국은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중국과 북한 대사를 소환하고 국경을 폐쇄하는 등 양국관계는 급격히 악화됐다. 중국이 약속했던 경제원조는 당연히 취소됐다. 당시 소련도 대외원조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상황이어서 소련의 원조만으로는 북한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국제정치에 공짜는 없다. ‘조금 주고 많이 챙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북한이 중국과 소련에 대해서 챙길 것은 다 챙기면서 ‘전략적 모호성’으로 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당연히 견제와 보복이 뒤따른다. 이 현상이 미·중 패권경쟁 시대인 2020년대와 중·소 분쟁 시대인 1960년대가 다르겠는가,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다르겠는가. 북한은 ’전략적 모호성‘의 한계를 깨달았다. 즉 모호한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언젠가는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진실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A쪽으로 쏠린다면 B의 견제는 불가피하고, B로 쏠린다면 이번에는 A의 보복을 감수해야 한다는 국제정치의 속성도 알기 시작했다. 이 속성은 공산주의 이념을 넘어서는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중국이나 소련, 어느 한쪽으로 편향돼서는 안 되겠다는 취지로 자주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그리고 외교의 대상을 중국과 소련을 넘어 제3세계 비동맹 국가로 넓혀나갔다. 국제정치학자들은 이런 북한의 정책 전환을 비판한다. 비동맹외교는 친구는 많이 사귈지 모르겠지만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친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북한이 경제적 자립 즉 자력갱생보다는 자본과 기술을 갖춘 서구로 방향을 돌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전략적 모호성은 상황에 따라 필요하지만 그 한계도 잘 알아야 한다. 모호성의 유효기간은 짧아서 지속될 수 없고,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진실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한계 말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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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문가 분석
    2021-06-14
  • [숨은 중국 알기 (9)] 중국 한반도 전문가, 정체된 북한 아쉬워하며 한국 높이 평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는 베이징 근무시절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나를 통해 한국의 정책과 생각을 알아보려고 했기 때문에 접촉이 필요했다. 중국의 對한반도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싱크탱크인 그들은 향후 정책을 구상 중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도 자신들이 건의한 정책이었다고 한다. 내가 만난 중국인 한반도 전문가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그들은 북한에 우호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수교 이전에 북한에 유학하여 대부분 김일성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정적으로 북한과 가까웠다. 사회주의 이념을 공유하였고,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교류가 빈번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2001년 9월 북한 방문을 마치고 와서 ‘친척집에 다녀왔다(走親戚)’라고 말할 정도였다. 둘째, 북한을 경외롭게 보고 있었다. 이들이 북한에 있던 시기는 대략 70~80년대였다. 이 당시에는 북한도 경제적으로 그럭저럭 괜찮았고, 어떤 면에서는 중국보다 나았다. 한 연구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평양에 있는 대학교에 유학을 갔는데 기숙사 휴게실에서 칼라 TV를 처음보고 무척 놀랐다. 당시 중국에서 칼라 TV는 드물었다”고. 그래서 그는 “중국 인민들은 언제 칼라 TV를 볼 수 있을까? 북한이 부럽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 다른 연구원은 북한에 대해, “그 작은 나라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미국에 대항하는지 모르겠다. 그 결기가 대단하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셋째, 한국이 북한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한다. 이들 연구원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서울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점차 남북한과 한반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립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묶은 호텔 창밖에 비친 역동적인 서울의 모습과 활기찬 야경에서 앞으로 한반도의 주인은 남한이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들 눈에 비친 서울의 모습은 어둡고 정체된 평양과 도저히 비교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남북한은 같은 민족인데 평양이 왜 이정도로 발전을 못하는가 하는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이런 아쉬움은 북한과 교류했던 많은 중국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사항이다. 북·중 접경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연구원은 60년대와 70년대 이야기를 한다. 당시 두만강의 제방은 북한쪽이 훨씬 높고 튼튼해서 물난리가 나면 전부 중국 쪽으로 범람해서 북한은 멀쩡한데 자기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중국 쪽 제방은 견고한데 북한쪽 제방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북한이 항상 홍수 피해를 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연구원은 자기가 어렸을 때, 북한 학용품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북한을 왕래하는 친척들이 건네주는 북한산 연필, 공책, 책가방 등은 중국 제품과 비교할 수 없이 고급스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지금은 달라져 중국 학생들은 북한산 제품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오히려 중국 학용품이 북한에서 고급품으로 인기를 누린다고 한다. 한때 북한을 좋아했던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이 왜 이렇게 정체되어 있는가 하고 무척 아쉬워한다. 그들은 아직도 심정적으로는 북한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어떠할까? 우선 공통적으로 한국을 높게 평가했던 3가지의 사례를 들겠다. 첫째, 전 국민이 한마음이 돼 참여했던 1997년 ‘금모으기 운동’이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금목걸이, 아기 돌 기념 금반지, 포장도 풀지 않아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금수저 등을 국가를 위해서 내어 놓는 것을 보고 경탄 했다.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애국심이란 것이다. 강요된 것도 아니고 애국주의 공교육의 결과도 아니며, 국가를 위한 자발적인 마음의 발로였기 때문이다. 둘째, 2002년 서울 월드컵에서 보인 붉은 악마를 포함한 전 국민의 일치된 함성과 질서의식이다. 중국인들은 시청광장이든 호프집이든 일치단결하여 응원하는 한국인의 모습에 가슴 뭉클했고, 응원이 끝나면 자발적으로 주변을 정돈하고 깔끔하게 떠나는 질서의식에 경의를 표했다고 했다. 역시 당시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선진화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중국의 동북공정에 보인 한국인들의 대응이다. 당시 우리들은 중국이 우리 고대사인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당(唐)제국의 지방정부로 격하시켜, 자국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계획에 반발하고 분노했다. 이때는 여·야도 없었고 진보·보수도 안보였다. 오직 한 목소리로 중국을 성토했고 중국도 한걸음 물러났다. 이 문제로 한국인을 전부 반중국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2006년 9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에게 “학술연구기관의 연구 차원이라고 하지만 이런 문제가 양국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유감을 표명하자 원자바오 총리도 “관련 학술연구기관의 일이기는 하지만, 양국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지시했으며, 정부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라고 화답했다. 전 국민의 지지를 받은 노 대통령의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고, 중국도 이를 존중한 것이다. 이 때 한국과 중국은 작은 나라 큰 나라 관계가 아니었다. 역사 문제와 국가이익을 앞에 두고 대화하는 동등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였다. 그런데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한국이 왜 자국 군대의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가’이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한국군의 맞대응을 미국이 적절히 억제함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조절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전작권 문제는 한국의 위상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필자가 중국에서 접한 중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심정적으로는 북한을 좋아했지만, 남북 경쟁의 무게 추는 한국으로 기울었다는 현실 감각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국론이 분열되면 중국은 물론 어느 나라도 우리를 쉽게 흔들 수 있어 한 목소리가 중요함을 깨닫게 됐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6-08
  • [숨은 중국 알기 (8)] 실용주의자 덩샤오핑, 마오의 과오 바로잡고 새로운 방향 제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마오가 사망하고 새롭게 등장한 덩샤오핑이 새로운 해법으로 마오가 남긴 혼란을 정리했다. 덩샤오핑은 다시는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혁명 같은 절대 권력의 폐해가 발생돼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절대 권력자 마오의 사례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도 왕조의 번성과 멸망은 황제 1인에 달려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왕조시대의 황제나 마오쩌둥 같은 절대 권력의 출현과 폭주를 억제하기 위해 마련한 정치적 제도가 바로 ‘집단지도체제’이다. 이렇게 덩샤오핑이 마련한 집단지도체제 내에서 후진타오 총서기 시절, 정치국 상무위원 9명은 각각 자신이 담당한 분야가 있었다. 일각에서는 “아홉 마리의 용이 공동으로 통치한다(九龍治水)”라는 말이 나왔다. 개개의 상무위원은 자기 담당 분야의 최고 결정권자였다. 총서기 후진타오도 최종 결정을 위한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에서는 1표에 불과했다. ‘집단지도체제’는 절대 권력의 등장과 전횡을 방지하려는 취지를 달성했다. 그렇지만 권력이 분산된 집단지도체제는 국정 수행의 강한 추진력이 부족했고, 상무위원의 독자 영역이 증대돼 월권과 부패의 소지가 있었다. 이 제도 역시 갈등을 초래하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후진타오의 뒤를 이은 시진핑(習近平)은 집단지도체제의 문제를 해소하고자 권력을 강화하여 시황제(習皇帝)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진핑이 강화된 권력으로 마오쩌둥의 ‘참새 박멸’ 같은 과오를 저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혼자 달려가려는 속성상 자기 확신과 오류에 빠질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시진핑이 덩샤오핑이 정해준 10년 임기를 마치고 2022년에 물러날지 아니면 권력을 더 강화할지 그의 거취가 주목된다. 이쯤에서 마오쩌둥의 ‘참새 박멸’ 소동에 대한 정리를 해보자. 첫째, 절대 권력의 한계인 균형감각의 상실이다. 즉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어서 누가 조언했더라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절대 권력자의 선의는 항상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참새 박멸’도 선의로 시작했지만 참새의 긍정적 역할이 무시됨으로서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북한도 참새 박멸 같은 사례가 있었다. 예를 들면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이다. 이 운동은 김일성 시대와 김정일 시대에 각각 전개됐다.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이란 북한이 중공업 발전을 위해 부족한 공작기계를 확보하기 위해 전개한 운동이다. 즉 ‘기존의 공작기계를 모델로 삼아 동일한 기계를 제작한다’라는 대중운동인데, 공작기계가 무슨 닭이나 소도 아닌데 어떻게 새끼를 친단 말인가. 기계제작과 금속공업 등 중공업 분야의 핵심 산업은 고도의 과학기술 발전과 자본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새끼 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세계적 기술발전 추세와 거리를 두고, 국제적 표준과 검증기준을 따르지 않았던 북한은 대중적 노력동원 운동을 통해 낮은 수준의 기계를 양적으로 생산하며, 오히려 원료와 자재를 낭비하게 되는 역효과를 동반했다, 북한은 오늘날에도 이런 폐쇄된 의식의 연장선에서 자력갱생을 크게 외치고 있다. 실용주의자 덩샤오핑은 김일성에게 “개혁개방해라, 한국과 협력해라, 미국과 맞서지 마라” 등 3가지를 조언했다. 이 3가지는 자신이 추진하여 중국을 발전시킨 핵심 정책이었다. 덩샤오핑은 과거 평양 방문에서 금박 입힌 거대한 김일성 동상을 보았다. 그리고 북한 전국에 이런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지금 북한이 이럴 때가 아닌데” 하고 북한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의 참새 격멸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덩샤오핑 같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전시대 지도자의 과오를 인정하고 이런 토대위에 시대에 부합한 합리적인 발전방향을 추구할 수 있는 지도자 말이다.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젊은이의 사상 오염문제를 제기하면서 “자본주의 사상을 짓부수지 않으면 자멸할 것”이라고 위기감도 나타낸다. 북한의 ‘장마당 세대’는 김일성의 혁명세대, 김정일의 선군세대와 다른 생각과 가치를 추구하는데도 이들을 구시대의 틀에 가두려고 한다. 북한도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참새 20만 마리를 들여왔듯이 자체적으로 문제 해결이 어려운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5-31
  • [숨은 중국 알기 (7)]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 “참새를 박멸하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 인물은 태산과 같은 공적도 있지만 어둡고 깊은 골짜기 같은 과오도 있다는 의미이다. 중국 공산혁명을 이끈 마오쩌둥도 예외 없이 공적과 과오를 지니고 있다. 훗날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공은 70%이고 과오는 30%이다”라고 정의했다. 마오쩌둥의 과오를 이야기할 때 대약진 운동 실패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4천만명으로 추산되는 아사자가 발생됐기 때문이다. 대약진 운동 기간 중에 일어난 ‘참새 박멸’ 이야기는 절대 권력자의 무지와 자기 확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사례이다. 마오쩌둥은 1957년 어느 날 쓰촨성(四川省)을 시찰했는데, 이때 곡식을 쪼아 먹는 참새를 보았다. 새삼스러운 모습이 아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마오쩌둥은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인민들을 떠올리며, “저 나쁜 놈의 새들, 인민들이 먹어야 할 양식을 먹고 있네”라며 참새를 ‘나쁜 새’라고 규정했다. 마오쩌둥의 이 한마디 말에 따라 베이징에 참새섬멸본부가 구성돼 대대적인 ‘참새 박멸’을 준비했다. 참새섬멸본부에서는 우선적으로 마오쩌둥이 듣고 싶은 통계를 보고했다. “참새 한 마리가 1년에 약 2.4kg 쌀을 먹는다고 한다면, 쓰촨성에 있는 약 320만 마리 참새는 약 7680만 톤의 쌀을 먹는다. 이 양식은 한사람이 1년에 약 240kg 쌀을 소비할 때 무려 3만2000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 통계를 보고받고 이 숫자만 외우고 다녔다. 그리고 점차 ‘참새를 박멸해서 인민의 기아 문제를 해결해야지’라는 자기 확신에 빠져 들어갔다. 마오쩌둥 주변의 어느 누구도 참새가 해충을 잡아먹어서 농사에 도움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자기 확신이 점차 강해져 가는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이나, 그 주변에서 사실을 은폐했던 당시 고위층이나 모두 참새 박멸로부터 비롯된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끝나서 결국 약 4천만명이 아사한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드디어 참새박멸 개시 첫날인 1958년 3월 20일이 밝았다. 쓰촨성 주민은 새벽 5시 부터 일제히 일치단결하여 각 지역마다 독극물이 든 과자를 뿌렸고, 포수들을 배치했다. 학생들은 나무로 만든 새총으로 참새를 겨냥하거나 잠자리채를 들고 나와 참새를 마구 포획했다. 누구는 꽹과리, 주전자, 세숫대야 등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들고 나와 뚜들겨 대면서 고함을 질러대 참새가 앉지 못하도록 했다. 지친 참새는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몽둥이와 빗자루를 든 시민이 이를 주어 담았고 참새 둥지를 파괴하였고, 참새알도 깨트렸다. 절대 권력이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참새 박멸’ 쓰촨 방식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베이징에서는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같은 방식으로 총 40만 마리가 없어졌다. 전국적으로는 총 2억1000마리(최대 19.6억 마리라는 통계도 있음)의 참새가 사라졌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식량 증산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식량은 더 부족했고 아사자는 매년 더 많이 발생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참새가 사라진 자리는 해충이 들끓었고, 그러자 쌀 생산량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 코미디 같은 비극은 마오쩌둥이 실패를 인정할 때까지 계속됐다.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하고 1962년 주석 직에서 물러나 2선에 있었지만 그가 무너뜨린 생태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소련 연해주에서 참새 20만 마리를 구해다 중국에 풀어놔도 메뚜기 등 해충의 창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로운 새’, 참새를 2억1000마리나 잡을 때는 언제이고, ‘이로운 새’, 참새를 소련에서 20만 마리 들여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지금 보면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이 벌인 한편의 비극에 불과했다. 2선에 물러난 마오쩌둥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최고권력 복귀를 위하여 1965년부터 문화혁명을 전개하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약 10여년간 지속된 이 광풍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희생됐고, 중국은 이념 과잉으로 사회 전체가 경직되고 정체됐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5-27
  • [숨은 중국 알기 (6)] 북한에 묻힌 마오쩌둥 아들과 한국의 중공군 유해 송환 ‘착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우리 정부는 중공군 유해를 중국으로 송환하고 있다. 2014년 4월 청명절을 기해 437구를 인도한 이래, 2020년 9월 27일 7차 송환 117구를 포함하여 총 716구를 중국에 돌려보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중국을 배려한 인도적 행위이면서 중국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중공군 유해 송환의식을 볼 때마다 필자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오쩌둥 큰아들인 마오안잉이 북한에 묻혀있다는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숨은 중국 알기 (5)] 북한에 묻혀있는 마오쩌둥 아들과 중공군 묘지의 의미’ 참조)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말이다. 중공군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보다 우리 땅에서 잘 관리하는 것이 한중 우호에 더 큰 외교적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오랜 전통은 전사자를 그 지역에 남겨놓는 것이다. 한(漢)나라 흉노 정벌부터 6·25 전쟁까지 대부분의 전사자들을 그 지역에 묻어왔다. 북한지역에 산재한 중공군 묘지가 이를 말해준다. 북한지역에는 평양 형제산, 강동군 및 순안, 개성 방직동, 평남 안주, 회창군 등지에 지원군 열사능이 있다. 중국은 우리에게 유해를 송환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즉 유해 송환은 우리만의 선의인 것이다. 둘째, 엄숙한 의식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간 유해는 선양(瀋陽)의 '항미원조열사능원(抗美援朝烈士陵園)'에 안장된다. 우리처럼 DNA 감식을 통해 유가족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송환 사실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유해를 발굴하고 어떤 절차를 거쳐 유가족에 인도되는가에 더 관심이 많다. 따라서 송환의식 현장에서 부각되는 한중 우호는 그 기억이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바램과 달리 송환의식 행사 후 우리가 보여준 진심과 호의는 점차 흐릿해질 것이며, 세월이 더 흐르면 아무 감동도 없이 송환되었다는 단순 사실만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에게 계속 감동을 주기 위해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북한처럼 중공군 전사자 묘지를 별도로 조성하여 정성껏 관리하는 것이다. 중국군 국방부장이나 정부 및 군사 방문단이 이 묘지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큰 감동을 받을 것이다. 마오안잉의 묘소가 북한과 중국을 이어주고 있는 것 같이 이 중공군 묘지는 한국과 중국을 이어줄 것이다. 그리고 일반 중국 관광객들에게도 반드시 들러야 하는 참배지이면서 관광 명소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유사한 사례가 있다. 전남 진도에 가면 왜덕산(倭德山)이란 자그마한 산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량해전이 끝난 뒤 주민들이 파도에 밀려온 왜군의 시신을 수습해 이 산에 무덤을 만들었다. “워매 징한거, 저 이들도 불쌍한 사람들... 양지바른데 묻어 줘야제” 하는 마음이었다. 오늘날 이 산을 찾는 일본인들은 큰 감동을 받는다고 하며, 왜덕산이 있는 한 이 감동은 지속될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5-21
  • [숨은 중국 알기 (5)] 북한에 묻혀있는 마오쩌둥 아들과 중공군 묘지의 의미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을 상징하는 건물인 천안문 앞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오늘도 마오쩌둥은 천안문에서 그 앞을 지나는 중국 사람들과 친밀하게 눈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중국 인민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이 공산혁명을 이끌고 신 중국을 건국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큰아들인 마오안잉(毛岸英)을 6.25 전쟁터에 보냈고, 전사한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운구하지 않고 북한 땅에 묻었던 사실도 기억하고 있다. 마오쩌둥은 많은 중국 청년들이 국가를 위해 자원해서 전쟁터로 나가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 마오안잉도 그들과 똑 같이 전쟁터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전사하자 일반 중국 청년 전사자들과 똑같이 북한 땅에 묻으라고 했다. 자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하지 않은 것이다. 천안문 앞 초상화의 마오쩌둥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북한 땅에 잠들어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 지금부터 마오쩌둥의 슬픈 가족사를 알아보겠다. 마오쩌둥은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베이징 대학의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 이 때 베이징대학 교수 양창지(陽昌濟)의 집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양 교수의 딸 양카이후이(陽開慧)를 만나게 됐고, 두 사람은 공산혁명의 뜻을 함께하는 동지애를 가슴에 품고 결혼하여 슬하에 3형제를 두었다. 혁명가 부부인 이들의 삶은 단란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양카이후이는 1930년 국민당 국부군에게 아들 3형제와 함께 체포됐고 “공개적으로 마오쩌둥과 이혼하고, 공산당을 탈당하면 살려주겠다”라는 회유를 받았지만, “나는 내 남편의 혁명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라며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거부했다. 결국 양카이후이는 살아남지 못했고, 이 당시 그녀의 나이는 29세였다. 마오쩌둥은 부인이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목숨 백 개로도 속죄할 수 없다”라고 애통해 하였으며,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이 집권한 이후 국부의 부인으로서 공식 추모되었다. 하지만 모친을 잃은 3형제는 돌봐줄 사람 없이 중국을 떠돌았다. 이 때 마오안잉의 나이가 겨우 8살이었다. 이후 모친을 잃은 충격으로 막내아들 마오안롱(毛岸龍)은 병을 얻어 사망했으며, 둘째 아들 마오안칭(毛岸靑)도 평생을 정신질환에 시달렸다고 한다. 마오안잉과 마오안칭은 공산당원의 도움으로 1936년 소련으로 건너갔다. 마오안잉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1년 소련군에 자원입대하고 1943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4년에는 중위 계급으로 전차중대 정치장교로 배치돼 독일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마오안잉은 마오쩌둥의 요청으로 1946년 10년 만에 다시 중국 땅을 밟았다. 스탈린은 마오안잉이 귀국을 앞둔 어느 날 그를 초청하여 덕담과 함께 권총 한 자루를 주었다고 한다. 마오안잉은 어느덧 24세의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서 마오쩌둥 앞에 나타났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을 차세대 지도자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마오안잉은 1949년 10월에 류쑹린(劉松林, 후에 류쓰치(劉思齊)로 개명)과 결혼했다. 전사하기 1년 전이었다. 마오쩌둥은 건국 후 1년도 되지 않았지만 6.25 전쟁에 파병을 결심했다. 이 때, 마오안잉은 “저도 참전하겠습니다. 조선으로 보내주십시요”라며 참전 의사를 밝혔고, 마오는 “과연 내 아들이다”라며 즉석에서 허락했다. 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안잉을 어디 배치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마오의 아들을 최전선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이 소련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사령부 소련어 통역요원으로 배치했다.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라고 여겨 사령부에 배치했지만 인간의 일이란 알 수 없는 법. 마오안잉은 전쟁에 투입되고 약 1개월이 지난 50년 11월 25일, 그 안전한 지역에서 미군 B-56 폭격기의 소이탄 세례를 받고 전사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의 전사에 관해 2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첫째는 미군의 폭격에 모두 동굴로 대피하고 있었는데 마오안잉은 이 때 본국에서 오는 전문을 받으러 문서수발실로 가다가 소이탄 폭격을 받았다는 설이고, 둘째는 북한군이 중공군 지휘부에 계란 한 꾸러미를 선물로 보냈는데, 마오안잉이 사령부 요원을 위해 계란볶음밥을 만든다고 불을 피운 순간 이 불빛을 따라 소이탄이 날아왔다는 설이다. 그래서 일부 중국인은 마오안잉의 비극을 기억하면서 아직도 10월과 11월에 계란볶음밥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마오안잉의 생일인 10월 24일에 계란볶음밥 조리법 동영상을 올렸던 파워 블로거 요리사 왕강(王刚)은 이로 인해 문자폭탄을 받기도 했다. 왜 하필 이날에 그런 동영상을 올리느냐고... 펑더화이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마오안잉의 전사 사실을 어떻게 보고할 것인지 고민이었다. 한 달 이상을 지체하다가 해를 넘겨 1951년 1월 마오쩌둥이 “안잉이는 잘 있는가”라는 물음에 저우언라이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망연자실하여 한동안 말이 없다가 눈시울을 붉히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탁자 위의 담배를 찾는데도 한참동안 더듬거렸다고 한다. 중국 공산혁명의 지도자 마오쩌둥도 아들의 전사 소식에는 어느 아버지와 똑 같았다. 마오쩌둥은 그의 부인 양카이후이 총살 소식에 그리고 큰아들 마오안잉의 전사 소식에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속으로 한없이 울었을 것이다. 중국 내부에서는 불타서 흔적도 없는 유해이지만 마오안잉을 중국으로 운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마오안잉의 젊은 부인이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20세였다. 이때도 마오쩌둥은 “안잉을 북한 땅에 묻어라, 전사한 병사들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들과 똑 같이 하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아들 마오안잉에 대한 특혜는 없었다. 마오안잉의 부인은 남편을 추모하러 북한에 자주 간다. 20세에 남편 마오안잉을 잃은 그녀는 이제 90세를 넘겼다. 북한은 그녀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정성껏 접대하면서, 이 기회를 통해 외교 현안을 해결한다. 북한 땅에 잠들어 있는 마오안잉은 아직도 중국과 북한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5-20
  • [숨은 중국 알기 (4)] 중국인의 처세술 ‘후흑학(厚黑學)’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전편에서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유광종 소장의 말을 빌어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존속과 체제 유지를 위해 모략(謀略)을 핵심으로 한 병법(兵法)을 연구하고 사용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통해 생성되고 발전된 모략의 전통이 오늘날에도 국가안보와 외교 영역에서 더욱 발전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이제는 중국인 개인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왕조는 왕조대로 존속해야 했지만 개인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특히 일반 백성은 전란과 재난을 피해 보따리 싸들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다가 어느 지역에 정착하려면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주민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유광종 소장은 정착민과 이주민의 싸움을 계투(械鬪)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착을 해도 낮선 곳이다. 믿을 사람이라고는 혈연밖에 없다. 울타리를 벗어나서 강호(江湖)라는 사회에 들어가면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졸면 죽는’ 살벌한 환경이다. 이 상황에서 공자나 노자의 얼굴이 필요했을까? 개인이 살아남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공자, 노자와 확연히 다른 생존법과 처세술이 요구되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한 것이 바로 ‘후흑학(厚黑學)’이다. 후흑학의 본질은 ‘생존하고 출세하려면 얼굴은 철판을 깐 것처럼 뻔뻔하고, 뱃속은 숯검댕이처럼 검어야 한다’는 것이다. 1912년 중국에서 이종오(李宗吾, 1879~1944))가 후흑학에 대해 처음으로 거론한 ‘기서 후흑학(奇書厚黑學)’이 발간된 이래로 이 개념이 맞다 틀리다란 논쟁은 계속됐다. 이런 와중에서 후흑학은 비즈니스 후흑학, 인간관계 후흑학까지 영역이 급속히 확대됐으며, 심지어는 연애와 결혼 후흑학까지 등장했다. 연애하고 결혼하는데도 사랑과 애정을 전달하는 방법론으로 후흑학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후흑학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청말(淸末)에서 민국초기(民國初期) 중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고 무기력하게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해 갈 무렵, 이를 통탄하고 분개한 청년 이종오는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중화민족을 부흥시킬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에서 답을 찾고자 위기를 극복하고 새 왕조를 창업한 역대 군주들에 대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중국 역대 영웅호걸들은 하나 같이 얼굴은 뻔뻔하였고, 뱃속은 검었다’는 사실이었다. 공자의 가르침과는 큰 관계가 없었고 역사서 기록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종오가 제시한 중국 부활의 해법은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원수를 갚기 위해서, 치욕을 잊지 않고 결심을 다지려고 ‘거친 노적가리에서 잠자고, 쓰디 쓴 간을 씹었으며, 얼음을 껴안고 손으로 불을 잡는’(臥薪嘗膽 抱氷握火) 절치부심의 시절을 거쳐 복수를 한 것처럼, 중국도 인내하면서 실력을 길러 서구로부터 당한 치욕을 갚고 중화의 부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흑학의 요체이기도 하다. 이종오는 후흑을 연마하는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하였다. 1단계는 ‘낯가죽은 두껍고 속마음은 검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접근을 꺼리는 수준’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의도가 간파당하는 초보단계이다. 2단계는 ‘낯가죽은 두꺼우면서도 딱딱하고 속마음은 검지만, 얼굴은 투명하리만큼 맑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단계’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유비(劉備)와 조조(曹操)를 들고 있다. 유비도 알고 보면 얼굴은 뻔뻔하고 속마음은 검었다는 것이다. 3단계는 후이무형(厚而無形), 흑이무색(黑而無色) 단계로 ‘얼굴은 두껍지만 형태가 없고, 속마음은 검지만 색깔이 없는’ 경지이다. 속마음 후흑(厚黑)과 달리 겉모습은 정반대로 ‘불후불흑(不厚不黑)’인 것이다. 국가로서 중국과 중국인 개개인들은 이 3단계를 목표로 오늘도 ‘후흑’을 연마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 사자성어에 대지약우(大智若愚)라는 말이 있다. ‘가장 큰 지혜는 멍청하게 보이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말도 있다. 그 뜻은 ‘(총명한 사람이) 어리버리한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이다. 모두 후흑 3단계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제 후흑학과 관련된 세 가지의 이야기를 하겠다. 첫째는 타면자건(唾面自乾) 고사이다. 중국 당나라 시절, 누사덕(屢師德)이라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아우를 불러놓고 물었다. “누가 너에게 불만을 갖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아우는 “형님 걱정 마십시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제 얼굴에 침을 뱉겠습니까? 저는 그를 책망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누사덕은 “아우야, 침을 닦는다고 그 사람 화가 풀리겠느냐, 그냥 마를 때까지 가만히 두거라”하였다. 그래서 나온 사자성어가 타면자건(唾面自乾 : 얼굴에 뱉어진 침을 저절로 마르게 한다)이다. 후흑학 3단계를 넘어 4단계의 경지가 아닌가 한다. 중국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고사를 언젠가는 배워서 알고 있고, 또 언젠가는 필요시에 다시 생활 속에 소환해 낼 것이다. 둘째, 중국에서 지낸 한국인에게는 꽤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대기업 간부 김 사장은 중국 지사장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생면부지의 중국인 왕 서방이 이런저런 인연을 통해 접근하더니 그렇게 잘 하더란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각종 공적·사적 기념일, 행사, 한국에서 오는 손님과 가족, 친구 접대, 명절날 선물, 중국 생활의 편의 제공 등 모두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지극 정성을 기울이더란 것이었다. 물론 김 사장도 상응하는 선물, 응대를 하여 마음의 부담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김 사장은 왕 서방에게 물어본다.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왕 서방은 “무슨 말이냐, 필요한 거 없다. 그냥 한류가 좋고, 한국인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렇다”라고 허허 웃는다. 김 사장과 왕 서방은 서로 주고받으며 좋은 친구관계로 몇 년을 지냈다. 김 사장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 얼마 전, 왕 서방이 조심스럽게 뱃속에 오래 간직했던 주머니 한 개를 연다. “저 ~ 내 아들 녀석이 이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하는데...” 바로 이거였다. 왕 서방은 자기 외아들의 취직을 위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오랜 기간 집요하게 정성을 들인 것이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백 명이면 백 명 모두 다 왕 서방 아들의 취직에 발 벗고 적극 나설 것이다. 이 때 생각나는 말 한마디 심모원려(深謀遠慮 : 깊게 생각하고 멀리 본다). 보통의 중국인 왕 서방은 후흑학 2단계 수준에 도달했다고 보여 진다. 세계 어느 나라도 취직 청탁 또는 추천은 있고,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접근법에서 차이가 있다. 중국인 왕 서방은 자기 복안을 내보이지 않은 채, 장기간 꾸준하면서 집요하게 정성을 들였다. 보다 중요한 점은 상대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다음에야 완곡하게 뱃속 주머니를 연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손자병법 한마디는 ‘이겨놓고 싸운다’(先勝求戰). 미리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다음에 싸움을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이다. 중국이 이와 같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우리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태까지 관계를 강화한 다음, 청구서를 들이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과 중국인의 뱃속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세 번째 이야기이다. 중국 어느 대학병원에서 한족(漢族)과 조선족(朝鮮族)을 포함한 소수민족의 성인병 발병률을 비교했다. 그 결과 한족이 다른 소수민족보다 스트레스성 질환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배속에 복안 주머니 몇 개씩을 넣고 살면서 ‘모략’해야지, ‘후흑학’해야지... 그래서 뱃속이 편안한 날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우리 앞에 있는 중국인은 누구든 예외 없이 후흑학 3단계 중 어느 지점에 있을 것이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이들보다 더 후흑학에 정통해야 한다. 즉 얼굴에는 중국인 보다 더 두꺼운 철판을 깔고 뱃속은 더욱 검어야 하다. 그리고 당연히 상대가 이를 파악할 수 없게 해야 한다. 중국인이 3단계라면 우리는 그보다 위인 4단계, 5단계 수준이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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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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