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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은 중국 알기 (8)] 실용주의자 덩샤오핑, 마오의 과오 바로잡고 새로운 방향 제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마오가 사망하고 새롭게 등장한 덩샤오핑이 새로운 해법으로 마오가 남긴 혼란을 정리했다. 덩샤오핑은 다시는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혁명 같은 절대 권력의 폐해가 발생돼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절대 권력자 마오의 사례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도 왕조의 번성과 멸망은 황제 1인에 달려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왕조시대의 황제나 마오쩌둥 같은 절대 권력의 출현과 폭주를 억제하기 위해 마련한 정치적 제도가 바로 ‘집단지도체제’이다. 이렇게 덩샤오핑이 마련한 집단지도체제 내에서 후진타오 총서기 시절, 정치국 상무위원 9명은 각각 자신이 담당한 분야가 있었다. 일각에서는 “아홉 마리의 용이 공동으로 통치한다(九龍治水)”라는 말이 나왔다. 개개의 상무위원은 자기 담당 분야의 최고 결정권자였다. 총서기 후진타오도 최종 결정을 위한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에서는 1표에 불과했다. ‘집단지도체제’는 절대 권력의 등장과 전횡을 방지하려는 취지를 달성했다. 그렇지만 권력이 분산된 집단지도체제는 국정 수행의 강한 추진력이 부족했고, 상무위원의 독자 영역이 증대돼 월권과 부패의 소지가 있었다. 이 제도 역시 갈등을 초래하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후진타오의 뒤를 이은 시진핑(習近平)은 집단지도체제의 문제를 해소하고자 권력을 강화하여 시황제(習皇帝)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진핑이 강화된 권력으로 마오쩌둥의 ‘참새 박멸’ 같은 과오를 저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혼자 달려가려는 속성상 자기 확신과 오류에 빠질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시진핑이 덩샤오핑이 정해준 10년 임기를 마치고 2022년에 물러날지 아니면 권력을 더 강화할지 그의 거취가 주목된다. 이쯤에서 마오쩌둥의 ‘참새 박멸’ 소동에 대한 정리를 해보자. 첫째, 절대 권력의 한계인 균형감각의 상실이다. 즉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어서 누가 조언했더라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절대 권력자의 선의는 항상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참새 박멸’도 선의로 시작했지만 참새의 긍정적 역할이 무시됨으로서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북한도 참새 박멸 같은 사례가 있었다. 예를 들면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이다. 이 운동은 김일성 시대와 김정일 시대에 각각 전개됐다.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이란 북한이 중공업 발전을 위해 부족한 공작기계를 확보하기 위해 전개한 운동이다. 즉 ‘기존의 공작기계를 모델로 삼아 동일한 기계를 제작한다’라는 대중운동인데, 공작기계가 무슨 닭이나 소도 아닌데 어떻게 새끼를 친단 말인가. 기계제작과 금속공업 등 중공업 분야의 핵심 산업은 고도의 과학기술 발전과 자본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새끼 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세계적 기술발전 추세와 거리를 두고, 국제적 표준과 검증기준을 따르지 않았던 북한은 대중적 노력동원 운동을 통해 낮은 수준의 기계를 양적으로 생산하며, 오히려 원료와 자재를 낭비하게 되는 역효과를 동반했다, 북한은 오늘날에도 이런 폐쇄된 의식의 연장선에서 자력갱생을 크게 외치고 있다. 실용주의자 덩샤오핑은 김일성에게 “개혁개방해라, 한국과 협력해라, 미국과 맞서지 마라” 등 3가지를 조언했다. 이 3가지는 자신이 추진하여 중국을 발전시킨 핵심 정책이었다. 덩샤오핑은 과거 평양 방문에서 금박 입힌 거대한 김일성 동상을 보았다. 그리고 북한 전국에 이런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지금 북한이 이럴 때가 아닌데” 하고 북한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의 참새 격멸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덩샤오핑 같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전시대 지도자의 과오를 인정하고 이런 토대위에 시대에 부합한 합리적인 발전방향을 추구할 수 있는 지도자 말이다.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젊은이의 사상 오염문제를 제기하면서 “자본주의 사상을 짓부수지 않으면 자멸할 것”이라고 위기감도 나타낸다. 북한의 ‘장마당 세대’는 김일성의 혁명세대, 김정일의 선군세대와 다른 생각과 가치를 추구하는데도 이들을 구시대의 틀에 가두려고 한다. 북한도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참새 20만 마리를 들여왔듯이 자체적으로 문제 해결이 어려운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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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31 10:15
  • [숨은 중국 알기 (7)]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 “참새를 박멸하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 인물은 태산과 같은 공적도 있지만 어둡고 깊은 골짜기 같은 과오도 있다는 의미이다. 중국 공산혁명을 이끈 마오쩌둥도 예외 없이 공적과 과오를 지니고 있다. 훗날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공은 70%이고 과오는 30%이다”라고 정의했다. 마오쩌둥의 과오를 이야기할 때 대약진 운동 실패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4천만명으로 추산되는 아사자가 발생됐기 때문이다. 대약진 운동 기간 중에 일어난 ‘참새 박멸’ 이야기는 절대 권력자의 무지와 자기 확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사례이다. 마오쩌둥은 1957년 어느 날 쓰촨성(四川省)을 시찰했는데, 이때 곡식을 쪼아 먹는 참새를 보았다. 새삼스러운 모습이 아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마오쩌둥은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인민들을 떠올리며, “저 나쁜 놈의 새들, 인민들이 먹어야 할 양식을 먹고 있네”라며 참새를 ‘나쁜 새’라고 규정했다. 마오쩌둥의 이 한마디 말에 따라 베이징에 참새섬멸본부가 구성돼 대대적인 ‘참새 박멸’을 준비했다. 참새섬멸본부에서는 우선적으로 마오쩌둥이 듣고 싶은 통계를 보고했다. “참새 한 마리가 1년에 약 2.4kg 쌀을 먹는다고 한다면, 쓰촨성에 있는 약 320만 마리 참새는 약 7680만 톤의 쌀을 먹는다. 이 양식은 한사람이 1년에 약 240kg 쌀을 소비할 때 무려 3만2000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 통계를 보고받고 이 숫자만 외우고 다녔다. 그리고 점차 ‘참새를 박멸해서 인민의 기아 문제를 해결해야지’라는 자기 확신에 빠져 들어갔다. 마오쩌둥 주변의 어느 누구도 참새가 해충을 잡아먹어서 농사에 도움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자기 확신이 점차 강해져 가는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이나, 그 주변에서 사실을 은폐했던 당시 고위층이나 모두 참새 박멸로부터 비롯된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끝나서 결국 약 4천만명이 아사한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드디어 참새박멸 개시 첫날인 1958년 3월 20일이 밝았다. 쓰촨성 주민은 새벽 5시 부터 일제히 일치단결하여 각 지역마다 독극물이 든 과자를 뿌렸고, 포수들을 배치했다. 학생들은 나무로 만든 새총으로 참새를 겨냥하거나 잠자리채를 들고 나와 참새를 마구 포획했다. 누구는 꽹과리, 주전자, 세숫대야 등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들고 나와 뚜들겨 대면서 고함을 질러대 참새가 앉지 못하도록 했다. 지친 참새는 힘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몽둥이와 빗자루를 든 시민이 이를 주어 담았고 참새 둥지를 파괴하였고, 참새알도 깨트렸다. 절대 권력이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참새 박멸’ 쓰촨 방식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베이징에서는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같은 방식으로 총 40만 마리가 없어졌다. 전국적으로는 총 2억1000마리(최대 19.6억 마리라는 통계도 있음)의 참새가 사라졌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식량 증산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식량은 더 부족했고 아사자는 매년 더 많이 발생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참새가 사라진 자리는 해충이 들끓었고, 그러자 쌀 생산량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 코미디 같은 비극은 마오쩌둥이 실패를 인정할 때까지 계속됐다.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하고 1962년 주석 직에서 물러나 2선에 있었지만 그가 무너뜨린 생태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소련 연해주에서 참새 20만 마리를 구해다 중국에 풀어놔도 메뚜기 등 해충의 창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로운 새’, 참새를 2억1000마리나 잡을 때는 언제이고, ‘이로운 새’, 참새를 소련에서 20만 마리 들여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지금 보면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이 벌인 한편의 비극에 불과했다. 2선에 물러난 마오쩌둥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최고권력 복귀를 위하여 1965년부터 문화혁명을 전개하였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약 10여년간 지속된 이 광풍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희생됐고, 중국은 이념 과잉으로 사회 전체가 경직되고 정체됐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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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7 13:42
  • [숨은 중국 알기 (6)] 북한에 묻힌 마오쩌둥 아들과 한국의 중공군 유해 송환 ‘착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우리 정부는 중공군 유해를 중국으로 송환하고 있다. 2014년 4월 청명절을 기해 437구를 인도한 이래, 2020년 9월 27일 7차 송환 117구를 포함하여 총 716구를 중국에 돌려보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중국을 배려한 인도적 행위이면서 중국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중공군 유해 송환의식을 볼 때마다 필자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오쩌둥 큰아들인 마오안잉이 북한에 묻혀있다는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숨은 중국 알기 (5)] 북한에 묻혀있는 마오쩌둥 아들과 중공군 묘지의 의미’ 참조)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말이다. 중공군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보다 우리 땅에서 잘 관리하는 것이 한중 우호에 더 큰 외교적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오랜 전통은 전사자를 그 지역에 남겨놓는 것이다. 한(漢)나라 흉노 정벌부터 6·25 전쟁까지 대부분의 전사자들을 그 지역에 묻어왔다. 북한지역에 산재한 중공군 묘지가 이를 말해준다. 북한지역에는 평양 형제산, 강동군 및 순안, 개성 방직동, 평남 안주, 회창군 등지에 지원군 열사능이 있다. 중국은 우리에게 유해를 송환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즉 유해 송환은 우리만의 선의인 것이다. 둘째, 엄숙한 의식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간 유해는 선양(瀋陽)의 '항미원조열사능원(抗美援朝烈士陵園)'에 안장된다. 우리처럼 DNA 감식을 통해 유가족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송환 사실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유해를 발굴하고 어떤 절차를 거쳐 유가족에 인도되는가에 더 관심이 많다. 따라서 송환의식 현장에서 부각되는 한중 우호는 그 기억이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바램과 달리 송환의식 행사 후 우리가 보여준 진심과 호의는 점차 흐릿해질 것이며, 세월이 더 흐르면 아무 감동도 없이 송환되었다는 단순 사실만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에게 계속 감동을 주기 위해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북한처럼 중공군 전사자 묘지를 별도로 조성하여 정성껏 관리하는 것이다. 중국군 국방부장이나 정부 및 군사 방문단이 이 묘지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큰 감동을 받을 것이다. 마오안잉의 묘소가 북한과 중국을 이어주고 있는 것 같이 이 중공군 묘지는 한국과 중국을 이어줄 것이다. 그리고 일반 중국 관광객들에게도 반드시 들러야 하는 참배지이면서 관광 명소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유사한 사례가 있다. 전남 진도에 가면 왜덕산(倭德山)이란 자그마한 산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량해전이 끝난 뒤 주민들이 파도에 밀려온 왜군의 시신을 수습해 이 산에 무덤을 만들었다. “워매 징한거, 저 이들도 불쌍한 사람들... 양지바른데 묻어 줘야제” 하는 마음이었다. 오늘날 이 산을 찾는 일본인들은 큰 감동을 받는다고 하며, 왜덕산이 있는 한 이 감동은 지속될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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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15:43
  • [숨은 중국 알기 (5)] 북한에 묻혀있는 마오쩌둥 아들과 중공군 묘지의 의미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을 상징하는 건물인 천안문 앞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오늘도 마오쩌둥은 천안문에서 그 앞을 지나는 중국 사람들과 친밀하게 눈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중국 인민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이 공산혁명을 이끌고 신 중국을 건국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큰아들인 마오안잉(毛岸英)을 6.25 전쟁터에 보냈고, 전사한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운구하지 않고 북한 땅에 묻었던 사실도 기억하고 있다. 마오쩌둥은 많은 중국 청년들이 국가를 위해 자원해서 전쟁터로 나가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 마오안잉도 그들과 똑 같이 전쟁터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전사하자 일반 중국 청년 전사자들과 똑같이 북한 땅에 묻으라고 했다. 자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하지 않은 것이다. 천안문 앞 초상화의 마오쩌둥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북한 땅에 잠들어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 지금부터 마오쩌둥의 슬픈 가족사를 알아보겠다. 마오쩌둥은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베이징 대학의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 이 때 베이징대학 교수 양창지(陽昌濟)의 집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양 교수의 딸 양카이후이(陽開慧)를 만나게 됐고, 두 사람은 공산혁명의 뜻을 함께하는 동지애를 가슴에 품고 결혼하여 슬하에 3형제를 두었다. 혁명가 부부인 이들의 삶은 단란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양카이후이는 1930년 국민당 국부군에게 아들 3형제와 함께 체포됐고 “공개적으로 마오쩌둥과 이혼하고, 공산당을 탈당하면 살려주겠다”라는 회유를 받았지만, “나는 내 남편의 혁명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라며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거부했다. 결국 양카이후이는 살아남지 못했고, 이 당시 그녀의 나이는 29세였다. 마오쩌둥은 부인이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목숨 백 개로도 속죄할 수 없다”라고 애통해 하였으며,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이 집권한 이후 국부의 부인으로서 공식 추모되었다. 하지만 모친을 잃은 3형제는 돌봐줄 사람 없이 중국을 떠돌았다. 이 때 마오안잉의 나이가 겨우 8살이었다. 이후 모친을 잃은 충격으로 막내아들 마오안롱(毛岸龍)은 병을 얻어 사망했으며, 둘째 아들 마오안칭(毛岸靑)도 평생을 정신질환에 시달렸다고 한다. 마오안잉과 마오안칭은 공산당원의 도움으로 1936년 소련으로 건너갔다. 마오안잉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1년 소련군에 자원입대하고 1943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4년에는 중위 계급으로 전차중대 정치장교로 배치돼 독일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마오안잉은 마오쩌둥의 요청으로 1946년 10년 만에 다시 중국 땅을 밟았다. 스탈린은 마오안잉이 귀국을 앞둔 어느 날 그를 초청하여 덕담과 함께 권총 한 자루를 주었다고 한다. 마오안잉은 어느덧 24세의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서 마오쩌둥 앞에 나타났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을 차세대 지도자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마오안잉은 1949년 10월에 류쑹린(劉松林, 후에 류쓰치(劉思齊)로 개명)과 결혼했다. 전사하기 1년 전이었다. 마오쩌둥은 건국 후 1년도 되지 않았지만 6.25 전쟁에 파병을 결심했다. 이 때, 마오안잉은 “저도 참전하겠습니다. 조선으로 보내주십시요”라며 참전 의사를 밝혔고, 마오는 “과연 내 아들이다”라며 즉석에서 허락했다. 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안잉을 어디 배치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마오의 아들을 최전선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이 소련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사령부 소련어 통역요원으로 배치했다.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라고 여겨 사령부에 배치했지만 인간의 일이란 알 수 없는 법. 마오안잉은 전쟁에 투입되고 약 1개월이 지난 50년 11월 25일, 그 안전한 지역에서 미군 B-56 폭격기의 소이탄 세례를 받고 전사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의 전사에 관해 2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첫째는 미군의 폭격에 모두 동굴로 대피하고 있었는데 마오안잉은 이 때 본국에서 오는 전문을 받으러 문서수발실로 가다가 소이탄 폭격을 받았다는 설이고, 둘째는 북한군이 중공군 지휘부에 계란 한 꾸러미를 선물로 보냈는데, 마오안잉이 사령부 요원을 위해 계란볶음밥을 만든다고 불을 피운 순간 이 불빛을 따라 소이탄이 날아왔다는 설이다. 그래서 일부 중국인은 마오안잉의 비극을 기억하면서 아직도 10월과 11월에 계란볶음밥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마오안잉의 생일인 10월 24일에 계란볶음밥 조리법 동영상을 올렸던 파워 블로거 요리사 왕강(王刚)은 이로 인해 문자폭탄을 받기도 했다. 왜 하필 이날에 그런 동영상을 올리느냐고... 펑더화이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마오안잉의 전사 사실을 어떻게 보고할 것인지 고민이었다. 한 달 이상을 지체하다가 해를 넘겨 1951년 1월 마오쩌둥이 “안잉이는 잘 있는가”라는 물음에 저우언라이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망연자실하여 한동안 말이 없다가 눈시울을 붉히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탁자 위의 담배를 찾는데도 한참동안 더듬거렸다고 한다. 중국 공산혁명의 지도자 마오쩌둥도 아들의 전사 소식에는 어느 아버지와 똑 같았다. 마오쩌둥은 그의 부인 양카이후이 총살 소식에 그리고 큰아들 마오안잉의 전사 소식에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속으로 한없이 울었을 것이다. 중국 내부에서는 불타서 흔적도 없는 유해이지만 마오안잉을 중국으로 운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마오안잉의 젊은 부인이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20세였다. 이때도 마오쩌둥은 “안잉을 북한 땅에 묻어라, 전사한 병사들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들과 똑 같이 하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아들 마오안잉에 대한 특혜는 없었다. 마오안잉의 부인은 남편을 추모하러 북한에 자주 간다. 20세에 남편 마오안잉을 잃은 그녀는 이제 90세를 넘겼다. 북한은 그녀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정성껏 접대하면서, 이 기회를 통해 외교 현안을 해결한다. 북한 땅에 잠들어 있는 마오안잉은 아직도 중국과 북한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국방안보
    2021.05.20 14:12
  • [숨은 중국 알기 (4)] 중국인의 처세술 ‘후흑학(厚黑學)’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전편에서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유광종 소장의 말을 빌어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존속과 체제 유지를 위해 모략(謀略)을 핵심으로 한 병법(兵法)을 연구하고 사용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통해 생성되고 발전된 모략의 전통이 오늘날에도 국가안보와 외교 영역에서 더욱 발전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이제는 중국인 개인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왕조는 왕조대로 존속해야 했지만 개인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특히 일반 백성은 전란과 재난을 피해 보따리 싸들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다가 어느 지역에 정착하려면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주민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유광종 소장은 정착민과 이주민의 싸움을 계투(械鬪)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착을 해도 낮선 곳이다. 믿을 사람이라고는 혈연밖에 없다. 울타리를 벗어나서 강호(江湖)라는 사회에 들어가면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졸면 죽는’ 살벌한 환경이다. 이 상황에서 공자나 노자의 얼굴이 필요했을까? 개인이 살아남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공자, 노자와 확연히 다른 생존법과 처세술이 요구되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한 것이 바로 ‘후흑학(厚黑學)’이다. 후흑학의 본질은 ‘생존하고 출세하려면 얼굴은 철판을 깐 것처럼 뻔뻔하고, 뱃속은 숯검댕이처럼 검어야 한다’는 것이다. 1912년 중국에서 이종오(李宗吾, 1879~1944))가 후흑학에 대해 처음으로 거론한 ‘기서 후흑학(奇書厚黑學)’이 발간된 이래로 이 개념이 맞다 틀리다란 논쟁은 계속됐다. 이런 와중에서 후흑학은 비즈니스 후흑학, 인간관계 후흑학까지 영역이 급속히 확대됐으며, 심지어는 연애와 결혼 후흑학까지 등장했다. 연애하고 결혼하는데도 사랑과 애정을 전달하는 방법론으로 후흑학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후흑학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청말(淸末)에서 민국초기(民國初期) 중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고 무기력하게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해 갈 무렵, 이를 통탄하고 분개한 청년 이종오는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중화민족을 부흥시킬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에서 답을 찾고자 위기를 극복하고 새 왕조를 창업한 역대 군주들에 대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중국 역대 영웅호걸들은 하나 같이 얼굴은 뻔뻔하였고, 뱃속은 검었다’는 사실이었다. 공자의 가르침과는 큰 관계가 없었고 역사서 기록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종오가 제시한 중국 부활의 해법은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원수를 갚기 위해서, 치욕을 잊지 않고 결심을 다지려고 ‘거친 노적가리에서 잠자고, 쓰디 쓴 간을 씹었으며, 얼음을 껴안고 손으로 불을 잡는’(臥薪嘗膽 抱氷握火) 절치부심의 시절을 거쳐 복수를 한 것처럼, 중국도 인내하면서 실력을 길러 서구로부터 당한 치욕을 갚고 중화의 부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흑학의 요체이기도 하다. 이종오는 후흑을 연마하는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하였다. 1단계는 ‘낯가죽은 두껍고 속마음은 검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접근을 꺼리는 수준’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의도가 간파당하는 초보단계이다. 2단계는 ‘낯가죽은 두꺼우면서도 딱딱하고 속마음은 검지만, 얼굴은 투명하리만큼 맑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단계’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유비(劉備)와 조조(曹操)를 들고 있다. 유비도 알고 보면 얼굴은 뻔뻔하고 속마음은 검었다는 것이다. 3단계는 후이무형(厚而無形), 흑이무색(黑而無色) 단계로 ‘얼굴은 두껍지만 형태가 없고, 속마음은 검지만 색깔이 없는’ 경지이다. 속마음 후흑(厚黑)과 달리 겉모습은 정반대로 ‘불후불흑(不厚不黑)’인 것이다. 국가로서 중국과 중국인 개개인들은 이 3단계를 목표로 오늘도 ‘후흑’을 연마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 사자성어에 대지약우(大智若愚)라는 말이 있다. ‘가장 큰 지혜는 멍청하게 보이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말도 있다. 그 뜻은 ‘(총명한 사람이) 어리버리한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이다. 모두 후흑 3단계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제 후흑학과 관련된 세 가지의 이야기를 하겠다. 첫째는 타면자건(唾面自乾) 고사이다. 중국 당나라 시절, 누사덕(屢師德)이라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하여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아우를 불러놓고 물었다. “누가 너에게 불만을 갖고 얼굴에 침을 뱉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아우는 “형님 걱정 마십시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제 얼굴에 침을 뱉겠습니까? 저는 그를 책망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누사덕은 “아우야, 침을 닦는다고 그 사람 화가 풀리겠느냐, 그냥 마를 때까지 가만히 두거라”하였다. 그래서 나온 사자성어가 타면자건(唾面自乾 : 얼굴에 뱉어진 침을 저절로 마르게 한다)이다. 후흑학 3단계를 넘어 4단계의 경지가 아닌가 한다. 중국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고사를 언젠가는 배워서 알고 있고, 또 언젠가는 필요시에 다시 생활 속에 소환해 낼 것이다. 둘째, 중국에서 지낸 한국인에게는 꽤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대기업 간부 김 사장은 중국 지사장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생면부지의 중국인 왕 서방이 이런저런 인연을 통해 접근하더니 그렇게 잘 하더란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각종 공적·사적 기념일, 행사, 한국에서 오는 손님과 가족, 친구 접대, 명절날 선물, 중국 생활의 편의 제공 등 모두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지극 정성을 기울이더란 것이었다. 물론 김 사장도 상응하는 선물, 응대를 하여 마음의 부담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김 사장은 왕 서방에게 물어본다.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왕 서방은 “무슨 말이냐, 필요한 거 없다. 그냥 한류가 좋고, 한국인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렇다”라고 허허 웃는다. 김 사장과 왕 서방은 서로 주고받으며 좋은 친구관계로 몇 년을 지냈다. 김 사장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 얼마 전, 왕 서방이 조심스럽게 뱃속에 오래 간직했던 주머니 한 개를 연다. “저 ~ 내 아들 녀석이 이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하는데...” 바로 이거였다. 왕 서방은 자기 외아들의 취직을 위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오랜 기간 집요하게 정성을 들인 것이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백 명이면 백 명 모두 다 왕 서방 아들의 취직에 발 벗고 적극 나설 것이다. 이 때 생각나는 말 한마디 심모원려(深謀遠慮 : 깊게 생각하고 멀리 본다). 보통의 중국인 왕 서방은 후흑학 2단계 수준에 도달했다고 보여 진다. 세계 어느 나라도 취직 청탁 또는 추천은 있고,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접근법에서 차이가 있다. 중국인 왕 서방은 자기 복안을 내보이지 않은 채, 장기간 꾸준하면서 집요하게 정성을 들였다. 보다 중요한 점은 상대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다음에야 완곡하게 뱃속 주머니를 연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손자병법 한마디는 ‘이겨놓고 싸운다’(先勝求戰). 미리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다음에 싸움을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이다. 중국이 이와 같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우리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태까지 관계를 강화한 다음, 청구서를 들이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과 중국인의 뱃속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세 번째 이야기이다. 중국 어느 대학병원에서 한족(漢族)과 조선족(朝鮮族)을 포함한 소수민족의 성인병 발병률을 비교했다. 그 결과 한족이 다른 소수민족보다 스트레스성 질환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배속에 복안 주머니 몇 개씩을 넣고 살면서 ‘모략’해야지, ‘후흑학’해야지... 그래서 뱃속이 편안한 날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우리 앞에 있는 중국인은 누구든 예외 없이 후흑학 3단계 중 어느 지점에 있을 것이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이들보다 더 후흑학에 정통해야 한다. 즉 얼굴에는 중국인 보다 더 두꺼운 철판을 깔고 뱃속은 더욱 검어야 하다. 그리고 당연히 상대가 이를 파악할 수 없게 해야 한다. 중국인이 3단계라면 우리는 그보다 위인 4단계, 5단계 수준이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국방안보
    2021.05.11 11:14
  • [숨은 중국 알기 (3)] 중국의 감추어진 속마음 ‘모략(謀略)’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유광종 소장(前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은 그의 교육 프로그램에서 중국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인용하고 있다. “중국인은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공자(孔子)의 얼굴이요, 두 번째는 노자(老子)의 얼굴이며, 세 번째는 도적의 얼굴이다.” 이 표현은 19세기 중국에 장기 체류한 독일인 의사 ‘웨일즈’의 인상기에 나온다고 한다. 나는 그의 통찰에 동의하면서, 세 번째 도적의 얼굴을 손자(孫子)의 얼굴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적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손자의 ‘모략(謀略)’ 사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중국과 중국인에 드리워져 있는 손자의 얼굴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중국인들이 겉으로 나타내는 공자와 노자의 얼굴과 달리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모습은 도적 즉 손자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손자는 병법의 대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가 저술한 손자병법의 핵심 사상 중 하나가 ‘모략’이다. 손자는 손자병법 첫머리 시계편(始計篇)에서 ‘병자 궤도야’(兵者詭道也)라고 설파하고 있다. 즉 ‘전쟁 또는 작전은 상대를 속이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모략이란 단어에서 중상모략(中傷謀略)이 떠올려져 부정적이지만 ‘지략(智略)’으로 바꾸어 보면 전혀 의미가 달라진다. 이 글에서는 모략을 지략 즉 ‘전략적 사고’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면 중국인의 얼굴에 왜 손자의 모습인 모략이 숨겨져 있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유광종 소장은 중국의 역사적 배경에서 그 답을 찾았다. 다음은 그의 견해를 요약한 것이다. 우리는 중국을 시와 문학 등 문화가 꽃피고 인문이 발달한 문명국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우아한 모습은 사실 중국이 스스로 만들어 낸 역사관에 불과하다. 중국은 자신들의 좋은 역사를 부각시킬 목적으로 역사를 미화시켰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각색된 중국의 역사를 보고 있다. 중국에는 우리를 매혹시키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문화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전쟁과 재난이 수시로 휘몰아쳤던 비극의 모습도 있다. 전란을 살펴보자. 전쟁은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500년 간 지속되었고,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한(漢)나라 말기 삼국 시기 약 100년, 수(隋)나라 통일 전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약 140년, 당(唐)나라 이후 송(宋)나라 건국까지의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 약 60년, 그리고 흉노, 몽고, 거란, 여진족 등 북방민족의 침략, 내란과 민란, 왕권교체기의 혼란으로 중국 땅은 크고 작은 싸움이 항상 끊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청(淸)나라 멸망 후 신 중국 건립 이전 약 100여 년 기간도 군벌 할거와 북벌, 국공내전으로 편안할 날이 없는 시기였다. 통계에 의하면 4천년도 채 되지 않는 중국 역사 속에서 대규모 싸움의 횟수는 약 3,700여 회에 이른다. 재난은 어떤가. 역사적으로 황하 강이 약 1600회 범람하였고 강줄기 흐름도 26차례 바뀌었다. 1117년 북송 휘종(徽宗) 때는 약 100만 명이 사망한 기록이 있다. 가뭄도 중국인에 고통과 비극을 안겨주었다. 1942년 하남(河南) 가뭄으로 사망자는 150만 명에 이르고 있다. 또 새까맣게 몰려오는 메뚜기 떼들도 있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재난이 연속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전란과 재난의 환경 속에서 왕조와 개인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한가롭게 유교의 관점에서 ‘정당한 방법인가, 도(道)에 맞는가’를 고민하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상의 흐름은 왕조와 개인으로 구분하여 각각 발전하여 왔다. 우선 왕조 측면에서는, 자신의 왕조는 살리고 경쟁 왕조는 멸망시키기 위해서 병법을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중국의 병법은 손자병법을 포함하여 약 3000 종에 이른다. 필자는 아무리 찾아봐도 의미 있는 토종 국산판 ‘K 병법’을 발견할 수 없다. 이를 보더라고 중국은 병법의 나라, 손자의 나라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필자는 중국 역사를 통해 명멸했던 크고 작은 왕조의 흥망성쇠와 그들이 존속하기 위해 사용했던 병법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주변 왕조와 공존하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 잠시 숨을 고르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내가 멸망당하느냐 상대를 멸망시키느냐의 죽고 사는 문제는 어느 한쪽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중국 역대 왕조의 전통은 오늘날 국가안보와 외교의 영역으로 이어져 깊게 스며들어 있다. 개인적인 경험담을 예로 들면, 필자가 군사외교관으로 베이징에서 근무할 때였다. 중국 정부에서 개최한 공식적인 외교 행사에서 북한 외교관이 내게 다가와 이런 말을 했다. “당신 중국에 처음 온 것 같은데, 중국에 대해서 뭘 좀 알고 왔는가? 중국 애들 조심해야 된다”라면서 약간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나는 중국에 오랫동안 있었지만 지금도 중국 애들 뱃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뱃속에 주머니 몇 개는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많은 여운을 남겼다. 뱃속의 주머니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런데 중국어에 복안(腹案)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뱃속의 계획’ 정도의 의미다. 머리속의 구상 또는 계획이라면 몰라도 뱃속에 계획을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주머니 몇 개는 또 뭔가, 아마도 삼국지연의에서 제갈공명이 조자룡에게 위기에 닥치면 열어보라고 전해준 3개의 비단 주머니(금낭묘계 : 錦囊妙計)를 의미하는 것 같다. 북한 외교관의 말이 시사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 중국인과 국가적인 과제를 논할 때, 중국인이 보이는 사려 깊고 고상한 공자의 모습이나 노자의 모습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 숨겨져 있는 손자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손자의 모습이 본심이기 때문이다. 둘째, 중국인이 전략적 모호성을 보이며 뱃속에서 주머니 한 개를 꺼냈다고 하자. 이게 그들이 말하는 전부는 아니다. 뱃속에 뭔가 또 들어있다. 그게 몇 개인지는 그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뱃속에는 여러 개의 대안을 마련해 두고 ’전략적 모호성‘을 보이며 상대를 현혹시킨 다음, 준비된 주머니에서 하나씩 상대의 대응을 보아가며 꺼내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제안한다. 중국을 상대하려면 ’부처님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 아니다. 손오공이 재주를 부리고 아무리 하늘 끝까지 갔다고 의기양양해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이다. 중국이 아무리 손자 아니라 증손자 모습을 보여도 우리는 그들을 꿰뚫어 보고 예측하고 대비하면 된다. 중국이 3개의 주머니를 뱃속에 숨겨 나오면 우리는 4개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주머니를 한 개씩 열면서 대결을 펼치다가 마지막 남은 우리의 주머니 1개가 결국 중국을 제압하고 국익을 관철시킬 것이다. 모략, 즉 전략적 사고를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중국을 능가하려면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모략적이어야 한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국방안보
    2021.05.06 15:03
  • [숨은 중국 알기 (2)] 중국을 움직이는 원천인 공산당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우리는 중국이 우리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미국과 다르듯이, 그 이상으로 한국과 중국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의 한 가운데 중국 공산당이 있다. 중국에서 공산당은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 군사, 사회 및 개인생활 등 삶의 모든 분야를 지배한다. 따라서 공산당을 제대로 이해해야 오늘날의 중국은 물론이고 미래의 중국까지 그려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시각은 마오쩌둥 시대의 공산당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오늘날의 중국 공산당은 핵과 항공모함을 보유한 인민해방군 만큼이나 현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 부분이 놓쳐서는 안 되는 중국의 실체이다. 창당에서 오늘날까지 격동의 100년을 이어온 중국 공산당을 현재의 관점에서 몇 가지 특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비교적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긍정적인 측면 위주로 언급하겠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문제와 중국이 직면한 과제는 다음에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첫째, 중국 공산당은 중국 민중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대다수 중국인들은 공산당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늘날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으로 중국이 성장한 것은 공산당의 영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 당시 학생들의 요구는 ‘공산당 물러가라’가 아니고 ‘공산당 개혁하라’였다. 이런 개혁의 목소리도 현재는 크게 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산당이 나름대로 여론을 수렴해 개혁 중이고, 공산당의 사회 통제력이 강하게 작동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억제하고 있는데다, 현실적으로 공산당을 대체할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 봐도 ‘공산당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신중국은 없다’고 말한다. 중국인들은 정치적 자유보다 풍요와 안정을 우선시하며 공산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청년 공산당원은 엘리트로서 향후 중국을 이끌어갈 예비 지도자다. 현재 중국에서 공산당원은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은 약 90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젊은 청년들은 공산당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출세의 기회를 바라면서 공산당 가입을 지원하고 있다. 정식 당원이 되려면 기존 공산당원 2명의 추천을 받아 예비당원으로 등록한 후, 몇 년간 관찰기간을 거쳐 당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당원이 되면 진학, 취업, 승진 등 혜택이 있고, 당의 어느 누구 또는 어느 기관에라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정책을 건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의무가 더 많다고 한다. 당비를 내야하고 자신이 속한 당 지부를 비롯한 각급 당 조직에서 주관하는 주간 및 월간 학습과 교육에 참여해야 하며, 부패와 비리혐의로 고발 또는 기소되면 당원은 일반인과 달리 사법당국의 조사에 앞서 ‘공산당기율위원회’의 엄격한 조사를 먼저 받아야 한다. 따라서 공산당원은 항상 공산당 규율의 틀 속에서 모범적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엘리트이며, 향후 중국을 이끌어갈 예비 지도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범생 엘리트 청년당원들이 초심을 잃고 왜 기존의 부패사슬에 엮이게 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이권과 지위를 탐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싶다. 셋째, 공산당 조직은 사회 곳곳에 결성되어 어디에나 존재한다. 중국 공산당은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 군대도 작전지휘 계통과 공산당 계통으로 이원화 되어 있다. 중국군 부대의 정치위원이 방한했을 때, 우리에게는 정치위원을 상대할 직책이 없어 고심한 적도 있었다. 기업에도 공산당 조직이 있어 공산당 계통으로 하달되는 지시나 방침을 전파하고 한편으로는 애로사항이나 발전방안 등을 건의한다. 넷째, 공산당은 스스로 부패를 척결하는 자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공산당은 스스로 부패를 척결하고 여론을 수렴하여 민심에 다가간다. 그리고 국내외 시대 변화를 예의주시하면서 부응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 2가지만 소개하겠다. 우선 2011년 중동의 재스민 혁명 등 민주화 운동이 확산될 때, 중국 공산당은 위기를 느꼈다. 이들은 이 때에 프랑스 혁명사를 집중 연구했다고 한다. 이른바 집단학습 방법을 통해 지도부 전체가 전문가 강의를 듣고 토론하고 독서도 하면서 혁명을 유발한 빈부 격차와 부정부패 문제, 자유와 인권 문제에 대해서 중국 국내의 현상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한 마음 한 생각 한 목소리인 것이다.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문제에 대한 해결과정에서 정쟁의 소지가 크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 다음 사례는 장쩌민 주석이 2000년에 주창한 ‘3개 대표론’이다. 주요내용은 공산당이 자본가 및 기업가를 당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정책 전환이다. 노동자, 농민이 주축인 공산당이 개혁개방으로 급성장한 자본가와 기업가들을 공산당원으로 끌어 들여 함께 가겠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이념 계급정당에서 실용 국민정당으로 탈바꿈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 공산당은 중산층이 증대하면 체제에 위협이 된다는 기존의 관념을 극복한 것이다. 공산당은 '꼰대 정당'이 아니며, 야당과 언론의 비판이 없더라고 자체적으로 변신하고 발전할 수 있는 만년 집권당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앞서 이야기한 내용을 정리해보자. 첫째, 우리의 기억 속에 공산당이라면 북한을 연상한다.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되어 냉혹하며 혁명만 외치는 집단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 공산당과 공산당원은 사회 모범생이자 엘리트이고 청년 공산당원은 향후 중국을 이끌어갈 예비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마오쩌둥 등 혁명 지도자들을 존경하지만 사고방식은 혁명시절에 멈추어 있지 않다. 둘째,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공산당 체제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공산당 부정부패를 비판하지만 공산당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선거과정을 거쳐 정권이 교체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모순을 지적한다. 중국이 서방과 같은 양당정치 제도와 선거 과정을 거친다면 중국은 분열되고 혼란이 일어나 편안한 날이 없을 거라고 한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국방안보
    2021.04.28 11:16
  • [숨은 중국 알기 (1)] 시리즈를 시작하며, “당신이 아는 중국은 틀렸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에 대한 글을 쓰기는 쉽다. 소재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가하기는 어렵다. 방금 평가한 내용과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가 처음 중국에 갔을 때 경험담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출입문 개폐 버튼 위를 덮은 비닐과 코팅이 벗겨져 있었다. 성질 급한 중국 주민이 엘리베이터 문을 급하게 열거나 닫으려고 계속 눌러댄 흔적이었다. 여기서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전에 생각하고 있던 중국인이란 여유가 있고 대륙 기질의 ‘만만디(慢慢的)’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베이징 아파트에서 접한 중국인은 우리보다도 더 성질이 급했다. 계속 이런 식의 일을 겪으면서 중국에 대한 나의 선입관이 깨지고 그 후에 다른 체험을 통해 터득해서 정리한 개념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기를 반복했다. 이에 대해 필자와 대화를 나눈 한 중국 고위관료는 “중국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중국은 세계 그 자체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다양하다는 의미이다. 중국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는 어느 기자는 “용의 등에 앉아서 양파를 벗기는 기간이었다”라고 소회를 말했다. 벗기고 벗겨도 그들의 속마음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중국을 바라보는 서방세계의 시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everything you know about china is wrong”(당신이 중국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틀린 것이다)라는 미국 뉴스위크지 2009년 언론 보도도 있었다. 서방의 인식체계로는 도저히 중국을 읽을 수 없는 모양이다. 백영서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에 대한 해결책이라면서 “누진 다초점 안경을 끼고 중국을 보라”고 권했다. 그의 권고에 따라 ‘천(千)의 얼굴’을 가진 중국, 화나면 오히려 웃는 중국인들의 특성을 감안하면서 앞으로 중국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다. 이 시리즈는 크게 4개 분야로 구분되는데, ① 개괄부분으로 공산당과 중국인의 내면, ② 공산당과 홍군, 팔로군 시기, ③ 국공내전과 6.25 전쟁시기의 인민해방군, ④ 시진핑 시대, 중국과 미국의 대결 무대 등이다. 내 이야기가 다른 중국 전문가들과 비교해 다르거나 틀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만약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어느 누군가 시정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맞는다고 동감해 준다면 ’중국 제대로 알기‘에 일조를 했다는 보람으로 여기겠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 경희대 중국학연구소 연구위원,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국방안보
    2021.04.23 16:46
  • [김희철의 Crisis M]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상)
    ▲ [김희철의 위기관리]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상) 유해진, 최민식이 출연한 영화 ‘봉오동 전투’ 450만명 관객 돌파 봉오동서 독립군의 뜨거운 첫 승리 이끈 홍범도 장군 김좌진장군,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3,000여 명 살상하는 대승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최근 흥행배우 유해진이 주연한 영화‘봉오동 전투’가 25일 오전 손익분기점인 누적 관객 수 450만 명을 돌파하여 장기 흥행세에 탄력을 더하게 되었다. 개봉 첫날부터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거침없이 흥행 질주를 달려온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인 홍범도장군(1868~1943)이 지휘하여 독립군의 뜨거운 첫 승리를 안겨준 역사적 순간을 담아낸 감동의 드라마이다. 시원한 질주 액션과 믿고 볼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 배우 최민식과 박희순 등이 특별출연해 다채로운 연기 향연을 펼치고 있다. 이에 남녀노소 전 세대 관객들의 끊임없는 호평과 각계각층의 단체 관람 열풍을 이끌며 관객몰이를 이어와 올여름 극장가를 풍성하게 채우고 있다. 실제 영화에 묘사된 ‘봉오동전투’의 4개월 뒤, 청산리에서 또다시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려 청산리·봉오동전투는 대첩(大捷)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봉오동 죽음의 골짜기에서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에게 처절한 패배를 맛본 일본군 동지대(東支隊)는 10월 20일을 기하여 독립군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에 독립군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1889~1930)은 백운평 고지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렸다가 21일 아침에 호구 속으로 들어온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일본군은 완전히 무너져 전위부대 200명이 전멸하였고 뒤이어 도착한 야마타[山田] 연대도 독립군의 공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퇴각하였다. 북로군정서군도 차후 작전을 대비하여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였다. 이 시각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도 일본군이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임명받은 홍범도 대한독립군 사령관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공격하였다. 홍범도의 1연대는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예비대는 우회해 오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이러한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예비대가 빠져나가자 자기 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일본군끼리 교전을 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 10월 22일 새벽에 갑산촌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은 인근 천수평(泉水平)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 명 중 어랑촌(漁郎村)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어랑촌으로 탈출한 일본군은 참패 소식을 그곳에 주둔한 아즈마[東正彦] 부대에게 알렸다. 일본군의 반격을 예상한 북로군정서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출동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였다. 이 전투에 독립군은 북로군정서군과 완루구에서 승리한 홍범도부대 등 약 1,500명이 총동원되었다. 또한 10월 24일에는 천보산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25일 밤 고동하(古洞河) 골짜기에서 독립군의 흔적을 발견하고 추적하던 일본군에게 매복하고 있다가 최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종합해보면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 3,000여 명이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 동지대 5,000여 명과 전투를 벌인 최종 결과, 일본군 3,000여 명(일본측 자료 812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며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그러나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에 협조했거나, 앞으로도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뿐만 아니라, 아예 독립군의 씨를 말려 버릴 작정으로 간도에 있는 한인 마을과 농장을 불태우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간도 주민들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있던 무장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집결했다. 이유는 강대국 러시아가 독립군을 지원해 준다면 일제를 상대하기 더 쉽고,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하나로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다음 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국방안보
    2019.08.30 16:20
  • [강철군의 아우성] GP철수/비행금지 등 계산된 모험(calculated risk)의 결과는?
    [시큐리티팩트 = 강철군 안보전문기자] 남북은 시범철수 대상인 GP 22곳의 병력과 화기 철수를 완료 후 폭파, 11월30일 마무리- 주한미군의 가장 불만은 군사분계선 부근을 비행금지구역으로 묶은 조항
    • 국방안보
    2018.12.03 09:58
  • [동북아 정세 변화와 한국의 대응전략 세미나] 중국의 한반도 통일인식과 독일의 달라진 북한정책 주목돼
    (시큐리티팩트 = 김비오 안보전문기자) “안보도 협업이다“라는 모토에 부합된 ‘동북아시아 정세변화와 한국의 대응전략’ 세미나로 성과 배가, 감상적인 과거사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실리를 추구하도록 보다 더 소통 필요
    • 국방안보
    2018.10.11 17:39
  • 미 헤리티지, “미국은 2개 주요 지역 전쟁에서 승리 곤란” 평가
    (시큐리티팩트=송승종 전문기자) 최근 미국의 저명한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이 발표한 ‘2019 미국 군사력 지수(2019 Index of U.S. Military Strength)’는 유사시 미국이 최대 안보위협으로 지목한 중국·러시아와의 2개 주요 지역 우발사태(major regional contingencies: MRC)에서 승리하기 곤란한 수준이라고 결론지었다.
    • 국방안보
    2018.10.06 23:59
  • [전문가 분석] 매너포트의 유죄 인정, 트럼프 대통령 몰락의 서막인가?
    (시큐리티팩트=송승종 전문기자) 9월 14일(현지시각) AP 통신,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 CNN 등 주요 외신들은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가 ‘제1호’로 기소한 폴 매너포트가 유죄를 인정하고, 특검에 협조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매너포트는 2016년 미 대선 당시, 트럼프 캠프의 선대본부장이었다.
    • 국방안보
    2018.09.17 09:23
  • [전문가 분석] 북한 의도는 남한 겨냥한 C그룹 핵보유국인가?
    ▲ 북한은 5월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만탑산에 있는 핵 실험장을 폐기했다. 사진은 풍계리 지휘소와 건설 노동자 막사가 폭파되는 장면. ⓒ 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박진호 전문기자) 북한 비핵화와 무관한 한반도 종전선언이 갖는 의미 주목해야 최근 미·북 간 종전선언과 북한 비핵화의 우선순위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미국은 비핵화 이후 종전선언을 하자는 것이고, 북한은 평화를 위해 비핵화와 무관하게 종전선언을 하자는 입장이다.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과정에서 드러난 위협의 실체를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5.24 만탑산 핵 실험장을 폐기했고, 6.12 미·북 정상회담 이후 7월에 동창리 미사일 발사실험장 폐기 활동이 관측됐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좋은 반응이라고 받아들이는 정도였으나, 우리나라는 한 때 조만간 북핵 문제가 해결되어 통일이 다가올 것 같은 상황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원인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상황에 대해 국민들이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데 기인한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사격 경과를 종합해 보면 북한이 고도의 전략적 의도를 갖고 개발을 추진해 왔고, 향후 그들이 택할 방향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미국 국제전략연구소(CSIS) 분석 자료에 의하면, 북한이 2016년 9월 9일 실시한 5차 핵실험은 당시 인공지진파 규모 5.1로 폭발 위력이 10KT 정도로서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사용한 원자탄 수준으로 추정했고, 2017년 9월3일 실시한 6차 핵실험은 인공지진파 규모 6.1로 폭발 위력이 140KT급 이상인 수소탄으로 추정했다. 북한은 5차 핵실험을 통해 원자탄은 표준화 및 규격화를 완료하고 생산단계로 전환했으며, 6차 핵실험으로 수소탄의 기술시험을 완료했다고 대외에 공포했다. 또 2016년 3월 직경 60~70cm 가량으로 추정되는 핵탄두를 김정은이 직접 가리키는 모습의 사진을 언론에 공개하여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했음을 시사했다. 따라서 직경 90cm 정도인 SCUD급 이상 미사일에 탑재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핵보유국은 핵탄두 보유량에 따라 A, B, C 그룹으로 나뉘어 전 세계의 핵보유국은 세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다. A그룹은 1,000발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한 미국과 러시아이고, B그룹은 약 200~300발 수준을 보유한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이며, C그룹은 약 100발 정도를 보유한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이다. 북한의 핵탄두 생산량을 추정해 볼 때, 북한의 목표는 최대 B그룹에서 최소 C그룹에 소속되는 정도일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은 금년 5월 24일 만탑산 핵실험 갱도를 폭파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제사회에 비핵화 추진 상황을 연출했다. 하지만 이미 생산단계로 전환된 원자탄의 경우 갱도 폐쇄는 의미가 없다. 생산 공장에서 표준화된 규격대로 생산이 가능함으로 더 이상 핵실험을 위한 갱도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 실질적 위협인 원자탄은 개발이 완료된 2016년 9월 9일 이후 생산이 진행 중인 것으로 봐야 한다. 반면 수소탄은 기술시험까지만 완료한 상태로 미국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미국이 북한의 의도에 응하지 않을 경우 추가적인 핵실험을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다. 즉 북한이 협상 의제로 다루려는 것은 수소탄이고 상대는 미국인 것이다. 원자탄은 이미 개발이 끝났기에 협상 의제도 아니며 한국과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듯하다.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것은 미사일의 시험사격이다. 김정일 시대인 1994년부터 2011년까지 17년 간 총 47회를 발사한데 비해, 김정은은 2011년부터 지난 2017년 11월 28일까지 불과 7년 만에 총 99회를 발사했다. 횟수가 증가한 배경에는 정치적인 목적의 발사도 있지만, 미사일 성능 개량을 위한 시험사격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미사일 시험사격을 통해 밝혀진 북한의 의도는 두 가지로 나눠진다. 먼저 잠수함탄도미사일(SLBM)과 SCUD 성능개량을 통한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개발을 성공시켜 한반도에서 핵·미사일 전쟁 역량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거리탄도미사일(MRBM)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해 일본, 괌, 미 본토를 공격할 수단을 갖는 것이다. 핵탄두 개발과 미사일 시험사격 과정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은 현재 한미동맹의 감시정찰 자산과 방공무기체계를 회피하여 남한에 원자탄을 사용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한편으론 한반도에서 사용할 가능성이 낮은 수소탄과 ICBM은 개발을 중단한 모양새를 취하면서 미국과 협상을 통해 경제 제재를 풀어나갈 의제로 활용하는 상황이다. 북한은 수소탄·ICBM 능력 과시...미 본토 공격 포기로 트럼프 설득 중 북한 의도 말려들면 남한은 핵 위협에 노출...실질적 대비책 강구 필요 이런 이유 때문에 남한이 핵문제를 거론하지 못하도록 포괄적 표현인 “한반도 비핵화”라는 외교적 문구를 사용했고, 불필요한 핵 실험장 폐기나 ICBM 시험장 폐쇄 등을 통해 전략적 의도를 숨긴 정치적 조치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즉,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과 협상에 투 트랙을 갖고 있다. 하나는 한반도에서 실전적으로 사용 가능한 핵·미사일 능력을 협상대상에서 제외시켜 수면 밑으로 감추어 두고 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을 위협하는 수소탄과 ICBM 능력을 대외 과시하여 정치‧외교적 협상 대상으로 가져가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모든 핵을 없애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이란의 상황에서 보듯이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시간이 흐르면 북한과 적절한 선에서 협상할 가능성이 있고, 북한이 수소탄과 ICBM에 대한 합의만 성공한다면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을 체결한 다음 한반도에서 핵을 보유한 상태로 남을 수도 있다. 이것이 북한이 노리는 최종 목표로 보인다. 우리는 투 트랙으로 접근하고 있는 북한의 전략적 의도를 간파하고 미국보다 절박한 입장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일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한 명확한 위협 인식 없이 우리가 협상에 임하면 주도권을 쥘 수도 없고 북한 의도에 말려들어 비핵화는 요원해진다. 지금이라도 북한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한·미 간 ‘핵 공유’ 같은 실질적 대비책을 강구해 나가야 한다. 이화여대 안보학 교수 (공학박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연구위원 방위사업청 자문위원
    • 국방안보
    2018.09.04 10:56
  • [전문가 분석]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 조기 전작권 전환에 '노란불' 켠 이유
    (시큐리티팩트=송승종 전문기자) 지난 8월 22일,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은 서울 중구의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한국군은 “아직 전시작전통제권을 넘겨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not yet ready to take over wartime operational)”고 평가했다.
    • 국방안보
    2018.08.2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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