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3-24(금)

외교안보정책
Home >  외교안보정책

실시간 외교안보정책 기사

  • 국방부, 법무부와 군 성폭력 피해자 지원 강화 위한 업무협약 체결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국방부와 법무부는 14일 용산구 국방부 본관에서 군대 내 성폭력 피해자 지원 강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협약은 법무부가 성범죄 피해자에게 지원하고 있는 제도들을 군내 성폭력 피해자도 활용할 수 있도록 상호 협력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법무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피해자 국선변호사'나 '심리치료 서비스' 등 피해자의 회복 지원을 위한 다양한 지원제도들을 제공 받게 된다. 즉 군내 성폭력 피해자는 전문성을 가진 국선변호사에게 법률적 조력을 받게 되며, 범죄피해 트라우마 심리치유 기관을 통해 전문적인 심리치료를 지원할 수도 있다. 국방부와 법무부는 이런 협력 방안들이 제대로 이행될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이견이 있을 경우 상호 협의를 통해 조정해 나가기로 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법무부는 국방부 내 성폭력 피해자 지원제도 개선을 위해 적극 협조할 것”이라며 “이번 협약이 성폭력 피해자를 빨리 일상으로 회복시키고 보호할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외교안보정책
    • 국방
    2021-10-14
  • 6‧25전쟁 당시 적 지역에 침투해 활동한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 시행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국방부가 6‧25전쟁 당시 특별한 희생을 했지만 민간인 신분이라는 이유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던 비정규군 공로자의 보상을 시행한다. 국방부는 지난 4월 13일 6‧25전쟁 당시 민간인 신분이라는 이유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던 비정규군의 명예회복을 위한 ‘6‧25 비정규군 보상법’을 제정한 후 시행령 제정 등 제반 준비를 마치고 14일부터 공로자를 대상으로 보상 신청서를 접수한다고 밝혔다. 비정규군은 1948년 8월 1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의 기간 동안 적 지역으로 침투하여 유격 및 첩보수집 등의 비정규전을 수행한 조직 또는 부대에 소속된 사람을 의미한다. 켈로부대(KLO, Korea Liaison Office), 미 8240부대, 미 중앙정보국 첩보부대(영도유격대), 미 극동공군사령부 첩보부대(6004부대) 등과 비정규군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비정규전을 수행한 것으로 인정하는 조직 또는 부대가 이에 해당한다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공로금은 6‧25 전쟁기간 동안 공적이 유사한 백골병단 보상법의 입법례를 고려하여 보상심의위원회에서 공로자로 인정되는 분께 1인당 1000만원을 지급한다. 공로금 지급 신청은 공로자 본인 및 유족(배우자 및 직계존비속)이 신청서를 작성해 보상심의위원회를 방문하거나 우편으로 제출하면 위원회의 심사‧의결을 거쳐 결정되며, 자세한 사항은 국방부 홈페이지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확인 가능하다.
    • 외교안보정책
    • 국방
    2021-10-14
  • [숨은 중국 알기 (27)] 6.25 전쟁 참전을 통해 중국이 얻은 것과 잃은 것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은 6.25전쟁 참전이 당연하고 필요했다고 평가한다. 국가안보 관점에서 북한을 점령한 미국과 압록강을 경계로 직접 대치하는 상황은 허용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입장이다. 그것은 전쟁을 통해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이 더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많은 인명이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도 적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침략자로 인식돼 1979년 미국과 수교하기 이전까지 서방세계로부터 거의 고립돼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대만을 해방시켰다면 오늘날과 같은 대만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향후 자신들을 곤란하게 할 제2의 6.25전쟁 같은 무력충돌은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에 강한 유감을 갖고 있었다.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8차 대회 참석을 위해 중국을 방문한 북한대표단 단장 최용건에게 마오쩌둥은 “나는 김일성에게 이 전쟁은 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라고 질책한다. 이어서 펑더화이는 “6.25전쟁은 도대체 누가 일으킨 것이냐? 미 제국주의가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당신들이 일으킨 것인가?”라고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 대표단에 배석한 주중 북한대사 이주연은 “왜 이 문제를 제기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러면 중국 입장에서 6.25 전쟁 참전으로 잃은 것부터 알아보겠다. 첫째, 소위 대만해방 기회의 상실이다.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을 선포했지만 대만으로 이전한 국민당은 건재했다. 중국공산당은 해·공군 전력이 미흡한 상태에서 푸지엔성(福建省)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대만해협을 건너 진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 저지를 위해 대만에 제7함대를 주둔시키자, 중국공산당은 대만해방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둘째, 서방국가들로부터 침략자로 인식돼 장기간 고립됐다. 미국이나 유럽은 마오쩌둥의 신중국에 대해 초기에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유엔에서도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돼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 참전으로 평화파괴자라는 프레임에 갇히면서 서방세계로부터 고립됐고, 결국 소련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셋째, 많은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 중국 측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병력 손실은 42만 6000명에 달하며 그 가운데 전사자만 11만 4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도 20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넷째, 경제발전 지연이다. 중국공산당은 오랜 내전을 끝내고 경제발전에 전념하기 위해 국방비를 대폭 감축하기로 했다. 신중국 건국 다음 해인 1950년 국방예산은 정부예산의 43%를 차지했지만 1951년에는 30% 수준으로 대폭 낮추고자 했다. 하지만 6.25전쟁 참전이 장기화되면서 45.64%까지 증가했다.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개혁개방도 앞당겨졌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중국은 최근 ‘6.25전쟁을 언제 끝냈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대다수 희생자는 초기작전이 아니라 유엔군의 반격과 고지전에서 발생했으며, 3년 가까이 전쟁이 지속되면서 경제적인 타격도 지대했다. 중국 화동사범대학 국제냉전사연구센터의 선쯔화(沈志華)에 의하면, 전쟁종료 시점을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37도선까지 밀고 내려온 3차 전역 직후, 즉 1951년도 초반으로 보고 있다. 1951년 1월 13일 유엔 총회 정치위원회는 6.25전쟁의 즉각적인 정전을 건의한 13개 국가의 제안을 통과시킨다. 국제적으로 전쟁의 장기화를 원하지 않아 미국이 ‘전쟁 계속’을 주장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군 축출’이라는 최초 목표에 집착해 이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미국에게 ‘전쟁 계속’의 명분을 주었고 서방진영도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6.25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2년 6개월가량 지속됐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승부로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이어서 미국은 대만에 군사원조를 증가하는 한편, 1955년에 미·대만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후속조치로 미군사령부와 육·해·공군을 배치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압박은 점차 가중되는 상황이었다. 중국은 6.25전쟁에서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렀지만 얻은 것도 적지 않다. 중국은 약 1세기 동안 서방과 일본에 연속으로 패전하여 국토가 침략당하고 반식민지상태로 전락했지만 6.25전쟁 참전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첫째, 북한이라는 완충지역을 확보했고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상실한 영향력을 점차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둘째,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의 위치에 올랐다. 중국은 세계 최강 미군과 33개월 간 전쟁을 치르며 끝까지 견디어 내었고 미국 대표와 동등한 입장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이 ‘미군은 북위 17도선을 넘지마라’고 경고했을 때, 미군은 중국과 무력충돌을 우려해서 작전에 신중했다고 한다. 셋째, 중공군 실전 경험 축적 및 현대화 추진의 계기가 됐다. 중공군은 6.25전쟁 기간 중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현대식 무기를 지원받았고 미군과 2년 반 동안 전투를 하면서 유격전 수준의 군대가 해·공군과 화력이 결합된 현대전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후 미군을 모델로 군비증강 및 군사개혁을 시도하게 됐다. 최근 들어 우리는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6.25전쟁 참전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미화하면서 중국이 얻은 점을 강조하고 있는 사항에 유념해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더욱 공세적으로 나오겠다는 신호이다. 시진핑은 마오쩌둥이 이루지 못한 ‘한반도에서 미군 축출’이라는 과제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10-13
  • [숨은 중국 알기 (26)] 6·25전쟁 당시 중공군은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는 60년대에 초등학교 다닐 때 “무찌르고 말테야 중공 오랑캐 ~ ♬” 라는 전시 동요를 자주 들었다. 그 때부터 중공군은 오랑캐 군대이고 인해전술을 주로 사용하는 형편없는 군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사를 연구하면서 중공군은 그런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당혹스러웠다. 6.25 당시 중공군이 어떠했는지 그들이 수행한 5차례의 전역을 통해 알아보겠다.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유엔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평안남도 영원-덕천 일대에서 방어를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유엔군과 한국군의 진출 속도가 너무 빨라 중공군이 설정한 방어선 도달 전에 통과할 것으로 보고 계획을 변경해 공격으로 전환했다. 1차 전역인 이 공격작전은 유엔군과 한국군을 청천강 너머 적유령 산맥 앞에서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중공군은 공격을 멈추고 적유령 산맥 일대에서 웅크리고 유엔군과 한국군이 계속 도로를 통해 북진하기를 기다렸다. 덫을 놓고 걸려들기만 기다리는 매복의 형국이었다. 또 1차 전역에서 생포한 포로를 풀어주면서 중공군은 소규모로 곧 철수할 것이라는 허위 정보까지 유포하는 미끼도 던졌다. 유엔군은 중공군과 교전이 있었지만 소규모의 중공군이 참전한 것으로 판단하여 계속 북진을 결심한다.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가겠다는 성급한 마음이 냉정함을 가렸기 때문이다. 곧이어 중공군은 매복에 걸린 유엔군과 한국군을 유린하였고, 이것이 2차 전역이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평양을 내주고 38선 부근까지 철수했다. 중공군이 1, 2차 전역에서 보여준 전투력은 유엔군을 긴장시켰다. 첫째, 야간 이동능력이다. 중공군 제1진 약 25만 명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유엔군의 항공정찰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만 산길로 이동해 전선에 투입됐다. 이런 대규모 병력이 일주일 정도 노출되지 않고 이동한 것은 전사에도 드문 일이다. 둘째, 심리전이다, 중공군은 깊은 밤 무당 굿판 같이 꽹과리치고 피리불며 나타나는 등 귀기어린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생소한 전투방식에 유엔군은 초기에 공포감으로 전의를 상실했다. 주민 선무에도 능해 중공군은 가급적 민가에서 숙영하지 않았다. 또한 서울 점령 시 환영인파 없이 적막한 거리를 보고 “너희들이 어떻게 하여 서울 시민들이 다 남쪽으로 내려갔나. 이게 해방인가”라며 북한군을 질책했다고 한다. 셋째, 자신들의 장점인 우회기동, 매복, 포위, 측후방 차단 등의 유격전법을 사용했다. 당시 중공군 부사령원 홍쉐쯔(洪學智)는 항미원조전쟁회억(抗美援朝戰爭回憶, 1991년)이라는 회고록을 발간했는데 ‘중국이 본 한국전쟁(홍인표 역)’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번역됐다. 이 책속에 미군 중대장 5명이 중공군의 전술과 전투력에 관해서 홍 부사령원과 나눈 대화가 나온다. 원문을 인용하면, 홍 부사령원이 먼저 “중공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허심탄회하게 말씀 좀 해보시오”하자, 어느 중대장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당신들 전술은 대단합니다. 나는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지만 우리 작전은 포병화력 공격부터 시작해 비행기가 대량 폭격을 퍼부은 뒤 보병이 나중에 갑니다. 그런데 반해 중공군은 바로 우리 등 뒤로 접근해 배후를 강타하지 않습니까. 이런 전투는 처음 겪어봅니다.” 홍 부사령원은 “당신네들 전투는 밀어붙이는 것이고 우리는 지형을 이용해서 분할, 우회, 포위로 이루어지는 거죠.” 다른 중대장이 거들었다. “중공군의 그와 같은 전법은 끔찍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네들 병사들은 용감합니다. 우리는 모두 중대 및 대대 단위로 움직이지요. 중공군은 어떻게 3~5명씩 작전을 벌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옆의 중대장이 말을 이었다. “중공군들은 독립작전에 능합니다. 각개전투 능력은 우리가 당신들보다 못합니다.” 또 다른 중대장이 말했다. “전투는 낮에 하고 밤에는 쉬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밤에 공격해 오니 우리는 언제 기습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형편입니다.” 홍 부사령원이 결론을 내린다. “무슨 방법을 쓰든 아군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고 당신네들을 이길 수만 있으면 좋다는 생각이오.” 중공군은 1930년대부터 20여 년간 국공내전과 항일전을 거치며 단련된 백전노병들로서 매복, 야간기습, 우회기동, 측후방 차단, 포위 등 유격전의 대가들이다. 중공군은 3차 전역을 전개해서 1950년 1월 서울을 점령했고 북위 37도선까지 진출했지만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남한강-횡성-강릉선까지 북진한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반격에 대한 대응으로 4차 공세를 펼쳤지만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함으로 한계를 노출했다. 유엔군은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중공군을 몰아부처 서울을 수복하고 38선 일대를 회복했다. 이후 중공군은 5차 전역을 펼쳤지만 일시적인 성공에 그쳤고, 1951년 6월 말부터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38선 일대에서 고지전으로 전환됐다. 유광종의 저서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에는 중공군에 대한 백 장군의 증언이 실려 있다. “중공군은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싸움의 때를 가려 나설 줄 알았고, 적절한 시점을 선택해 물러설 줄도 알았다. 약한 상대를 고를 줄 알았고, 강한 상대를 피할 줄 알았으며, 상대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골라 사정없이 때릴 줄 알았다. 화력이 강한 미군에게는 은폐와 엄호로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았고 전투력이 약한 국군에게는 사나운 맹수가 달려들 듯 덮쳤다.” 한국군을 덮친 대표적 사례가 5차 전역이 벌어진 1951년 5월 중순 현리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3군단은 중공군에 의해 오마치 고개라는 보급로가 차단당하자 조직적인 작전활동을 포기하고 중장비를 파기한 뒤 분산하여 1400고지 방태산 등을 넘어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산을 넘어왔지만 이곳에는 중공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중공군에게 등을 보이며 1600고지 계방산 일대를 넘어가야 했다. 이 패배로 3군단은 해체됐다. 그렇지만 한국군이 중공군을 격멸시킨 빛나는 승리도 있었다. 중공군 5차 전역에서 우리 6사단이 용문산에서 중공군 1개 군단의 공격을 막아내고 화천 북방까지 추격하여 격멸시킨 파로호 전투이다. 파로호는 화천댐으로 생긴 인공호수인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승을 기념하여 ‘중공 오랑캐를 격파했다’는 의미로 파로호(破虜湖)로 바꾸었다. 주민들은 파로호의 물고기를 중공군 시신을 먹고 자랐다는 거부감 때문에 10년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패배의 교훈을 잊어서도 안 되지만 승리의 기억을 왜곡시켜서도 안 된다. 승리의 기억은 우리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원천이다. 용문산과 파로호에서 중공군을 격멸시켰던 우리 앞 세대의 강한 의지를 오늘날에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 앞에는 과거의 중공군이 아니라 새로운 상대 즉 ‘중국의 영향력’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 임방순 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10-05
  • [김희철의 전쟁사(126)]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⑬ 한미동맹으로 적은 국방비 쓰며 경이적인 경제 성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5월부터 8월말까지 숨 막힐 듯한 폭염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4차 대유행 속에서도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이 열렸던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은 하루 관람객이 3,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역시 파블로 피카소는 입체파 창시자이자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답게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특히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전시물 중의 하나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7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다. 이는 피카소가 1951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6·25남침전쟁을 소재로 2m에 달하는 화폭에 그린 작품으로 오른편엔 투구와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총칼을 겨누고 있고, 그 반대편에선 임신부와 아이들이 잔뜩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다. 피카소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일으킨 “6·25남침전쟁이 공포와 희생을 강요하고 애꿏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비극적인 참상을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 천신만고 끝에 마무리한 포로 송환, 그러나 88명은 중립국 선택 1953년 7월17일 휴전협상이 조인되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8월5일부터 한달간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별 무리없이 판문점에서 교환되었다. 그러나 송환을 원치 않는 한국인과 중국인 포로 2만 2000여 명은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졌다.이들은 인도군이 관리하는 판문점 근처의 비무장지대에 수용되었고. 남북한과 중공 대표들이 3달간 설득 작업을 벌였다. 이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중공군 1만 4,227명, 인민군 7,582명이었다. 특이하게 88명이 제3국행(인도행)을 택했다. 이 중 12명은 중공군, 76명(한국군 2명, 인민군 74명)은 한국인 포로였다.이들이 제3국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제각각이었다. "북녘에 부모님이 있어 지척의 거리인 남한에 살면 부모님을 만날 수 없다는 슬픔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포로수용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남한 땅에서 반공포로로 불리며 살기 싫어서, 공산당이 싫어 남한에 남아야 하는데 20살이기 때문에 다시 군대에 끌려갈 게 뻔해서"와 "초등학교 때부터 미국이 별천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등으로 다양했다. 이들 76명의 한국인 포로들은 1954년 2월 21일 오스트리아 선적 여객선 '아스투리아스호'를 타고 인도 남단 마드라스항으로 떠났다. 이들 포로에 대한 뒷이야기는 ‘광장’과 ‘시간의 저편’ 등의 소설과 영화 ‘공동경비구역’의 중립국감독위원회 책임수사관(배우 이영애 역)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조국을 버린 이들이나 아직도 남북간에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는 국군포로 문제를 접할 때마다 다시 한번 분단의 아픔, 동족상잔의 후유증을 절감하게 된다. ■ 한미상호방위조약 부속합의서인 "한미합의 의사록"으로 미군 자동개입 전략 구현 한편 반공포로 석방에 자극을 받은 미국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고 다른 인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이승만이 요구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휴전협정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승인한다고 통보하였으며, 양국 대표 및 실무자들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한미간에 작성된 상호방위조약 전문을 받아 보니, 조약 3조에 "한미는 각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라는 문구는 강제가 아니어서 불안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 어느 한쪽이 외부의 침략을 받으면 자동개입한다”는 조건을 넣으라고 압박했다. 이것 때문에 한국과 미국은 다시 1년간 줄다리기를 했다. 이 대통령의 명을 받은 외교부와 국방부는 손발이 닳도록 미국을 부지런히 다녔지만 그 문구를 수정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다시 "당신들이 상호방위조약 전문을 수정해 줄 수 없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보완책으로 ‘한미합의 의사록’이라는 부속합의서를 만들어서 그 안에 다음과 같이 명시하자“라고 제안했다. ”1. 한국 육군 20개 사단을 무장화시켜주고, 해군과 공군 전력을 대폭 강화시켜 명실공히 북한의 침략을 억제할 수 있는 70만 대군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한다. 2. 미군 2개 사단을 한국 전방 지역에 고정 배치한다“는 내용을 넣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에 의한 이 요구안은 미국이 울며 겨자 먹기로 합의해 주었다. 따라서 미 2사단과 7사단이 문산과 동두천에 주둔하게 됐다. 그런데 문산과 동두천 축선은 북괴군의 주 공격로이다. 그곳을 거치지 않고는 서울로 진입할 수가 없는 요충지에 미군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북괴군이 남침하면 미군이 자동 개입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절묘한 전략이었다. 결국 이승만이 북진 통일 주장을 접고 휴전협상에 찬 물을 끼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국의 요구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갈등을 무마했다. 이 대통령의 혜안과 배짱 덕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됨으로서 한반도 및 그 주변의 장기적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로써 한미동맹에 따른 미국의 확고한 방위보장에 힘입어 한국은 최근까지 GNP의 4% 이내라는 비교적 적은 국방비만 쓰면서 경제개발 우선정책으로써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보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정치외교력과 애국심에 자연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여건을 만들어준 그분께 감사드리며 명복을 빈다.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9-29
  • 내달 1일 해병대의 요람인 포항서 첫 국군의 날 행사 개최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국방부는 다음 달 1일 오전 경북 포항의 해병대 제1사단 인근 영일만에서 제73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한다고 28일 밝혔다. 포항은 1959년 해병대 1사단이 주둔한 이래로 용맹한 해병을 양성해온 곳으로, 교육훈련단과 군수지원단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명실상부한 해병대의 요람이다. 이런 의미로 행사지역을 포항으로 정했다. 이번 행사의 주제는 '국민의 군대, 대한강군'으로, 국민과 장병의 눈높이에 부응하고 첨단 과학화와 자주국방 역량 강화를 통해 정예 강군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국군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올해 행사에서는 육·해·공군 합동전력이 참가해 합동상륙작전을 시연한다. 다음 달 취역을 앞둔 해군의 두 번째 대형수송함 마라도함(LPH·1만4천500t급)과 공군 F-35A 전투기, 상륙돌격장갑차 등이 동원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행사는 한반도 안보상황 등을 고려하여 전반적으로 '로우키'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재인 정부 들어 국군의 날 행사는 해군 2함대사령부(2017년), 전쟁기념관(2018년), 대구 공군기지(2019년), 육군특수전사령부(2020년)에서 열린 바 있다.
    • 외교안보정책
    2021-09-28
  • [숨은 중국 알기 (25)] 중국의 6·25전쟁 참전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아닌 ‘보가위국(保家衛國)’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6·25전쟁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북한과 체제경쟁은 물론이고, 중국에 대해서도 우리는 공산침략을 막아낸 전쟁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정의의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6·25전쟁 당시 중공군과 북한군의 영웅담을 담은 ‘1953 금성 대전투’란 중국 영화가 우리의 영상등급위원회를 통과해 배포 직전에 이르렀다가 없던 일이 됐다. 강한 반대 여론을 의식한 수입사가 판권 계약을 파기하고 사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가 6·25전쟁에 대한 중국의 논리와 시각을 거부하고 있지만, 향후 중국의 공세는 더욱 집요하고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중국의 주장에 동조해 “UN군의 개입은 불법이고 중공군의 참전은 정의”라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오늘날에도 우리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6·25전쟁 참전에 대해 4차례에 걸쳐 알아보겠다. 첫 번째는 중공군이 참전한 배경과 과정이고, 두 번째는 중공군의 주요전투와 전투력이다. 그들은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세 번째는 중국이 얻은 것과 잃은 것들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중공군 철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서상문은 방대한 중국 자료를 토대로 “6·25전쟁 –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와 전투수행(상·하권)”을 저술했다. 2016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그의 저서에서 발췌 인용한 내용을 토대로 중국의 6·25전쟁 참전에 대한 4차례 시리즈를 기술하겠다. 마오쩌둥은 북한의 한반도 무력적화 계획에 반대했다. 1949년 4월 김일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대표단이 마오쩌둥을 예방하고 남침계획에 대한 그의 의도를 탐색했다. 하지만 그는 시기상조론을 주장했다.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을 끝내가는 시점이어서 대만 해방, 티베트 복속, 체제안정, 경제회복 등 자신들의 국내 문제가 더욱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5월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건넨 “남침 동의 요청‘에 경악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남침 계획을 승인하였다. 중국 동지들의 동의를 받으라고 하였다”라고 일방통보를 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과 회담을 중단하고 즉시 스탈린에게 확인했고 동일한 답변을 들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결심에 이의를 제기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결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마오쩌둥은 곧바로 정치국회의를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남침 계획에 동의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김일성으로부터 6·25 전쟁 개전일도 통보받지 못했다. 서상문은 그의 저서에서 마오쩌둥의 러시아 통역 스쩌(師哲)의 회고를 인용하여 “마오쩌둥은 외국 통신사(프랑스 파리)의 보도를 보고 전쟁발발 사실을 알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대체로 북한은 개전 3일 차인 6월 28일 중국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오쩌둥은 전쟁에서 소외돼 있었지만 미국이 예상보다 빠르게 6·25전쟁 참전을 결정하고 개전 10일 후인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 미군 대대급 기동타격대가 나타나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쟁 1개월 후인 7월의 전황은 북한이 낙동강까지 진출해 곧 부산을 점령할 기세였지만 그는 불안했다. 미군이 참전한 이상 전세가 역전돼 UN군이 38선을 넘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도달하면 반드시 중국 내륙으로 진입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은 대만해협에 항공모함을 파견했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중국을 침략하려는 사전조치로 인식했다. 마오쩌둥은 7월 7일 4야전군 13병단 소속 3개 군단을 주력으로 약 25만 명 규모의 동북변방군을 창설하고 동북지역으로 이동시킨다. 미군과 전쟁을 대비한 조치였다. 서상문은 마오쩌둥이 9월 하순 경 이미 참전 결심을 굳히고 그 후 공산당 당·정·군 고위 간부들의 반대 의견을 설득해나갔다고 언급한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마오쩌둥은 10월 1일 심야회의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파병 요청이 있었음을 밝히고 파병문제를 논의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참석자들은 원론적으로 군사 개입은 찬성하지만 즉각적인 참전은 신중해야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건국 1주년도 안된 상태에서 해외 파병은 마오쩌둥이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이 문제를 두고 3일 밤낮으로 앉거나 서거나 하면서 심각하게 고심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마오쩌둥은 10월 4일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해 참전의 당위성에 대해 설득을 시도한다.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동북군구사령원 가오강(高崗) 등은 “미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할 것이다. 앉아서 당할 순 없다. 일본 제국주의가 40여 년 동안 점진적으로 진행했던 것과는 달리 미 제국주의는 4∼5년 내에 중국 동북지역으로 진출하려 할 것이다. 미국이 북한 전역을 점령해버리면 중국으로선 군대를 진입시킬 명분을 잃게 되고, 우리가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미국이 침략할 때까지 수수방관하면 중국혁명은 실패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4야전군 사령원 린뱌오(林彪) 등 반대파들은 “지금은 오랜 국공내전으로 폐허가 된 중국을 재건할 때이며, 참전해도 미군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몇 백만명에 불과한 북한을 구하려고 5억 인구의 중국을 뒤흔들어 놓는 것은 조금도 수지가 맞지 않다”라면서 “파병하지 않는 게 제일 좋지만 파병해야 한다면 출전은 하되 군대를 북한지역 북쪽에 주둔시킨 후 형세를 관망하며 싸우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주장했다. 참전론자들은 중국의 안위를 위해 참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같은 공산국가인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그다음 문제이다. 이러한 중국의 논리는 明나라의 임진왜란 참전이나 淸나라의 청일전쟁 참전이나 모두 동일하다. 10월 5일 다시 정치국 확대회의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의 요청을 받고 참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덩샤오핑 등 참석자들은 점차 마오쩌둥의 의견에 동조해가면서 10월 6일 최종적으로 파병을 결정했다. 이어서 10월 8일 김일성에게 참전을 통보하고 10여일 후인 10월 19일 주력부대가 압록강을 넘어 6일 후인 25일 첫 전투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중국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북한지역에 적대 또는 경쟁세력이 진입하는 것을 저지한다는 것이다. 소련의 공군 지원도 거부됐고 미군에 비해 해·공군 력이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위해 중국은 무력개입을 했다. 명분은 항미원조(抗美援朝)였지만 속마음은 ‘보가위국(保家衛國)’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북한에 급변사태 등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면 중국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개입할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9-27
  • 육사, 6·25전쟁 참전한 미 웨스트포인트 1947년 졸업생 전사자 추모비 건립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6·25전쟁에 참전했던 전사한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1947년 졸업생 12명의 추모비가 서울 육군사관학교 교정 안에 건립됐다. 육사와 주한미군전우회 코리아챕터는 24일 오후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사 화랑연병장과 웨스트포인트 졸업생 추모공원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 6·25전쟁 참전 전사자 12명의 추모비 제막식을 공동 주관했다. 이들 12명은 1947년 6월 미 육군참모총장이던 아이젠하워 장군이 참석한 가운데 졸업 및 임관한 310명 중 일부로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으며, 3명은 아직 유해도 찾지 못한 상태다. 특히 1945∼1951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7개 기수 초급장교들의 희생이 컸다. 육사 교정에는 1948∼1950년 3개 기수 전사자들의 추모비가 이미 있어 이번에 추가로 추모비를 건립하게 됐다고 육사는 전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김정수 육사교장, 이서영 주한미군전우회(KDVA) 코리아챕터 회장, 최병혁 수석부회장, 매틀락 연합사 작전참모부장, 이성춘 서울지방보훈청장 등이 참석했고, 한미연합사령관 출신인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전우회장의 감사영상도 상영됐다. 육사와 주한미군전우회는 정전 70주년이자 한미동맹 70주년인 오는 2023년까지 나머지 3개 기수인 1945, 1946, 1951년 졸업생 전사자들의 추모비를 모두 건립할 계획이다.
    • 외교안보정책
    • 국방
    2021-09-24
  • 국방부 적극행정 우수사례 경진대회서 ‘미라클 작전’ 최우수상 선정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국방부는 23일 하반기 '적극행정 우수사례 경진대회'를 개최해 아프가니스탄 조력자들을 안전하게 수송한 '미라클 작전'을 최우수상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적극행정 우수사례 경진대회’는 적극적인 업무추진으로 성과를 달성한 우수한 사례를 발굴하고, 이를 통해 국방부 내 적극행정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기 위한 자리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국방부와 육·해·공군 및 국직기관에서 제출된 총 35건의 사례가 경합을 벌인 결과, 아프간 조력자 390명을 안전하게 수송한 미라클 작전의 성공적 수행 사례가 최우수상으로 선정했다. 국방부는 “국무조정실과 국방부, 외교부, 법무부, 인사혁신처 등 범정부 협업을 통해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결정, 동맹 및 우방국들과 긴밀한 공조로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며 “이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제고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국방시설본부의 군사시설 매입예산 113억 원 절감, 국방부 보건정책과의 병사 진료비 절감 사례 등이 우수상을 받았다. 이번 경진대회는 국민 심사 30%와 적극행정위원회 현장 평가 70%를 합산해 선발했다. 특히 국민 심사는 '광화문 1번가'를 통한 온라인 심사 20%, '적극행정 모니터링단' 심사 10%를 반영해 이뤄졌다.
    • 외교안보정책
    • 국방
    2021-09-23
  • 한·미 국방부, 내주 서울서 '통합국방협의체' 회의 개최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한국과 미국 국방부는 27∼28일 서울에서 제20차 한미통합국방협의체(KIDD) 회의를 개최한다고 국방부가 23일 밝혔다. 양국은 이번 회의에서 한반도 안보정세 평가를 공유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을 위한 대북정책 공조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또 조건에 기초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추진, 포괄적·호혜적 한미동맹 발전을 위한 국방협력 증진방안 등 동맹의 주요 안보 현안 전반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진다고 국방부는 전했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는 북한이 공개한 신형 장거리 순항미사일 시험발사와 열차에서 쏜 단거리 탄도미사일 등에 대한 평가 및 대응 방안 논의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한미 양국은 이번 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을 토대로 11월 열리는 한미 국방장관의 연례 회의체인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추가 논의를 이어갈 전망이다. KIDD는 2011년 SCM 합의에 따라 설치된 협의체로, 이번 회의에는 김만기 국방정책실장과 싯다르트 모한다스 미 국방부 동아시아 부차관보를 양측 대표로 양국 국방·외교 주요 직위자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 외교안보정책
    • 국방
    2021-09-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