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3-2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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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기념관서 콜롬비아군 6·25전쟁 참전 70주년 ‘특별사진전’ 개최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전쟁기념관은 26일부터 11월 21일까지 콜롬비아군 참전 70주년을 맞아 주한 콜롬비아 대사관과 공동으로 특별 사진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사진전은 남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6·25전쟁에 공식 참전했던 콜롬비아군에 대해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표하고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기획됐다. 사진전은 콜롬비아 해군의 최초 참전군함인 알미란테 파디야함 등 50여점의 사진과 콜롬비아 전쟁문학 발간물 등 9점이 전시되며, 콜롬비아 국기 3색에 각각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3개의 이야기 흐름으로 구성했다. 콜롬비아군의 이야기 WAR(빨강)존으로 시작해 병사 개개인의 이야기 PEOPLE(파랑)존을 지나 6·25전쟁에서 희생된 청년들을 오늘날 생생히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 MEMORY(노랑)로 마무리한다. 6·25전쟁 당시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라 파병 요청을 받은 콜롬비아는 육군과 해군을 파병했다. 육군 1개 보병대대와 해군 프리깃함 1척이 참전했고, 참전 인원은 5100명이다.
    • 외교안보정책
    • 국방
    2021-08-26
  • 보훈처, 콜롬비아 국방부와 보훈정책 협력 위한 양해각서 체결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국가보훈처는 콜롬비아 대통령의 국빈 방한을 계기로 보훈정책에 대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콜롬비아 국방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25일 밝혔다. 이날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은 청와대 본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이반 두케 콜롬비아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후안 카를로스 카이사 로세로 주한 콜롬비아 대사와 보훈정책 강화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번 협약에 따라 양측은 6·25전쟁으로 맺어진 혈맹을 바탕으로 국제보훈 및 제대군인 지원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을 합의했다. 향후 고위급 상호 방문, 국제보훈 및 제대군인 지원 분야 지식 및 경험 공유, 정례협의체 구축 등을 위해 협력할 계획이다. 고령의 6·25전쟁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 및 후손의 교류 강화를 중점 추진할 예정이라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 외교안보정책
    • 외교통일
    2021-08-25
  • 한-인니 외교·국방 2+2 고위관리회의 개최…KF-21사업 결실 위해 협력키로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외교·국방 국장급이 24일 화상으로 개최한 2+2 고위관리회의에서 양국 관계와 국방·안보 협력, 지역 정세 등에 대해 논의했다고 외교부와 국방부가 밝혔다. 양측은 지난 4월 양국 국방장관 회담 이후 인니 측이 기술진을 재파견하는 등 한국형 전투기 KF-21/IF-X 공동연구개발 사업을 재개하기로 결정한 것을 평가하고, 좋은 결실을 맺도록 더욱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또 사이버안보, 해양안보, 테러리즘 등 비전통적 안보문제에서도 협력을 심화해 나가기로 했으며, 한국 측은 오는 9월 서울안보대화와 12월 유엔 평화유지 장관회의에 인니 측 고위인사들의 참석과 지지를 당부했다. 양측은 한국의 방역 물품 지원, 양국 기업 간 백신·치료제 개발 협력 등에 주목하고, 코로나19 이후 회복 가속을 위한 경제협력도 강화하기로 했다. 양측은 또한 우리의 신남방정책과 인니가 속한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의 인도·태평양에 대한 관점과의 연계를 계속 모색하기로 했다. 인도-태평양 지역 역학 변화에 대한 대응, 남중국해 문제, 한반도·미얀마·아프가니스탄 등 지역 정세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하고 역내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조를 지속하기로 했다. 지난 6월 정의용 외교부 장관의 인니 방문 시 개최를 합의한 이번 1차 회의에는 박재경 외교부 아세안국장과 김상진 국방부 국제정책관, 압둘 카디르 자일라니 인니 외교부 아태·아프리카 총국장과 로돈 페드라손 국방부 전략총국장이 참석했다.
    • 외교안보정책
    • 국방
    2021-08-25
  • [숨은 중국 알기 (20)] 중국의 ‘조선족’, 한국의 우월함 북한에 전파할 수 있는 통일 촉진자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은 물론이고 백두산을 여행하는 한국인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 조선족일 것이다, 과거 백두산 여행은 연변조선족 자치주 연길에서 출발했고 이어서 해란강, 용정 등 이 일대에 산재한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 투쟁의 유적을 돌아보는 여행과 연계돼 있었다. 한국인들은 연길 시내의 한글 간판과, 한국말이 통하고 한복을 볼 수 있는 거리 풍경에 잃어버린 땅에 대한 어떤 그리움을 많이 느꼈을 게다. 그리고 사업가들은 조선족의 도움으로 먼저 진출한 일본 기업을 제치고 현지에 정착했다고 한다. 오늘은 조선족의 역사를 먼저 짚어본 후, 이어 이들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며 잠재력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조선족의 역사는 임계순 한양대 명예 교수의 저서 ‘우리에게 다가온 조선족은 누구인가’에서 발췌해 인용했다. 조선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이주한 역사는 청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조는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으로 천도하면서 1658년 무렵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하고 조선인의 진입을 금지했다. 청조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함경북도와 평안북도 일부 농민은 봉금령이 완화된 틈을 이용해 아침에 강을 건너 경작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경작을 하다가, 봄에 강을 건너 농사짓고 가을에 수확물과 함께 귀가하는 계절출가이민으로 발전했다. 후에는 아예 고향을 떠나 이 지역에 거주하며 경작하게 됐는데, 조선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삶이 어려운데다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흉년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조선의 애국지사들은 중국 만주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인의 이주는 대폭 증가했고, 일제의 식민 정책에 따른 토지조사사업으로 전답을 빼앗긴 많은 농민들도 이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당시 만주 일대를 통치하던 중화민국과 군벌은 재정 수입을 확충하고자 이주와 토지 개간을 묵인했다. 1920년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조선인은 약 20만 명에 달한다. 1931년 이후 일제가 만주지역 전체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조선인들을 이 지역에 집단으로 이주시켰다. 이 시기의 이주자는 자유의사 보다는 일제의 정책에 의해 강제 이주된 경우가 많았다. 1936년에 만주지역 조선인은 총 85만 4천명으로 증대됐다. 국공내전 기간에 국민당은 소수민족을 강압적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이었지만, 공산당은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고 환심을 사기 위해 개별 민족의 특성을 인정하고 해당언어 사용을 승인했다. 마오쩌둥은 1939년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조선족은 중국 국민으로 정착했다. 중국의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변모되는 순간이었다. 토지개혁 시기에는 토지를 분배받아 경제적으로 기본 생활을 보장받았고, 정치적, 법적으로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조선족의 40%가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가 중심이 되었다.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한국어 교과서로 공부했고 각 가정에서는 한국어로 대화를 했으며, 조선인 집단 거주지이기 때문에 사회생활도 한국어로 가능했다. 한국어를 바탕으로 집단거주하면서 전통문화가 자연스럽게 보존되면서 계승됐다.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과 한국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첫 만남은 환호와 기대로 시작됐지만 곧 상호 실망과 경우에 따라서는 상호 저주로 바뀌어 갔다. 한국인들은 만주지방에서 전통문화를 만나는 기쁨을 맛보았고, 조선족은 부유한 한국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이 일어났다. 한국인은 조선족이 말은 통하지만 사고방식이 다른 점에 당황했고, 조선족은 일부 한국인에 당한 사기 피해로 가정이 해체되는 사례를 보면서 한국인들을 전부 사기꾼으로 보는 것이었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징에 처음 갔을 때, 조선족은 우리를 ‘한국분’이라고 예의바르게 대했지만 3년 후 귀국할 무렵에는 ‘한국놈’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그들의 마음에 그렇게 큰 상처를 주었는지 반성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조선족을 볼 때, 뜨거운 가슴과 함께 냉정한 눈이 필요하다. 첫째, 조선족을 한국말을 하는 중국인으로 보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조선족은 중국에서 태어나 학교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조부모 또는 그 이상 선대 조상이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중국식 교육체계에 의해 중국사회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고, 계속 중국에서 살아야 한다. 말이 통한다고 우리와 생각이 같고 정체성이 동일하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말만 통할 뿐 그 외에는 전부 다른 중국 국민인 것이다. 재미동포 3세 데이비드 김이나 일본에 귀화한 재일동포 4세 야마모또와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조선족이 중국사회에서 우수한 소수민족이라고 인정받아가면서 조상의 고향인 한국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필자가 주목하는 조선족의 잠재력은 이들이 갖고 있는 북한과 인적 네트워크이다. 조선족은 몇 단계만 건너가면 직·간접적으로 북한에 친척과 지인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방문과 소통에 제한이 없다. 이들이 북한 친척이나 지인에게 “한국이 모든 면에서 북한보다 월등하다. 한국은 살기 좋은 동네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인정도 많더라. 한국 주도로 통일돼야 한다”라고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얘기한다면, 북한 주민들은 이 말을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급변사태 등 체제 변화의 순간에 도달했을 때, 한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중국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주저 없이 한국을 택할 것이다. 어느 북한 이탈주민은 북한 사회에서도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말했다.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아무리 자본주의 날라리 풍이니 반사회주의 반동사상이니 하며 단속해도 한류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장마당도 통제하기 어렵다. 조선족을 통해 북한주민을 움직일 수 있고, 북한 주민은 곧 북한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이런 나의 논리에 동의한다면 주위에서 만나는 조선족에게 정다운 말 한마디와 격려의 눈짓을 보내주기 바란다. 그런 작은 매려가 통일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21-08-20
  • 봉오동 전투 승리와 독립군 궤멸 책임의 딜레마에 빠진 홍범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15광복 76주년을 맞이하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됐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했고, 그의 유해는 8월18일 대전국립현충원에 정식으로 안장됐다. 헌데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발생시, 소련 공산당과 협력하여 독립군을 유인·학살했던 홍범도 장군이 묻히는 대전 현충원에는 마찬가지로 북한군의 6.25남침전쟁과 제2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에서 전사한 국군 용사들이 안장돼 있다. 따라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진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한국 독립군을 몰살에 이르게 한 '자유시 참변'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문제 등 냉정한 평가가 요구되면서 현충원 안장과 대한민국장 추서 자격에 부합하는지 논란이 제기된다. ■ 홍범도, 한국 독립군 대학살 '자유시 참변' 가담, 이후 대한 무장독립운동도 막 내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28일 소련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적군(赤軍)이 대한독립군을 포위해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대한독립군은 한인사회당 이동휘의 선전·유도에 따라 자유시에 집결했다. 모인 사람은 4500여 명에 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집요하게 공산화하려 했던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소련으로부터 천문학적 자금을 지원받은 뒤 한인 무장독립군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1919년11월~1921년)로 있는 동안 소련으로부터 200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자유시에 집결한 대한독립군은 민족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성향의 조직이 혼재된 상태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적군 산하로 편입돼야 한다는 세력과 이를 거부하는 세력 등으로 분열돼 반목현상이 심화됐다. 이중 청산리대첩에 참전했던 사할린 출신 부대에서 소련군 편입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소련군은 기관총과 대포, 장갑차 등을 앞세워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홍범도는 사할린 부대 편에 섰다가 이르쿠츠크파 자유대대 편으로 돌아서서 사할린 부대를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 이르쿠츠크파 배후에는 소련 정부가 있었다.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은 전사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 등 상당수가 희생 당했다. 이밖에도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에 끌려간 인원수는 1000여 명이 넘어 3500명에 달했던 대한독립군은 사실상 궤멸되었다. 당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부대는 청산리대첩에 참가했던 부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은 당시 러시아행을 탐탁해 하지 않아 이들과 함께 가지 않고 국내로 되돌아와 참변을 면했다. 그러나 김좌진 역시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항일 무장독립군은 시베리아와 만주 벌판 곳곳에서 사살·체포당하거나 강제노동에 끌려갔고, 이로써 한국 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1920년 이후 봉오동·청산리대첩과 같은 항일 무장독립운동 역사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 중 하나다. 홍범도는 그 뒤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 등을 선물로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자유시 참변 이듬해인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홍범도는 한인 대표로 참석했고, 여기서 레닌과 단독면담도 가졌다. 학계에서는 "레닌의 선물은 사실상 소련에 협조해준 감사의 표시나 다름없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는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군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은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된 뒤 25군단 조선인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군복은 1923년에 벗었다.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추방됐으며,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여생을 보내다 1943년 10월25일 삶을 초라하게 마감했다. ■ 북한군에 의해 전사한 많은 국군들이 영면하는 곳에 친소 괴뢰 홍범도의 안장은 잘못 일본군 1000여명 이상을 괴멸시킨 ‘청산리 대첩’은 중대 규모를 패퇴시킨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작전술적 기동을 통해 일본군 주력을 괴멸시킨 것은 김좌진, 이범석 등의 탁월한 전술적 혜안 때문이었다. 전 육사교장 박남수 장군(육사35기, 육군중장 예편)이 저술한 책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에 따르면 “홍범도는 조선말에 하층계급에서 일어선 ‘의병장’으로서 애국심과 전술적 투쟁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홍범도의 한계였다”는 이 장군의 의견이 적혀있다. 또한 철기 이범석 장군은 그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홍범도 부대가 연합을 이탈한 며칠 후에 안도현 입구인 우도양창 계곡에서 일제의 포위망에 걸려 거의 괴멸 수준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라고도 했다. 이것은 1990년 소개된 ‘홍범도일지’에 실제 그런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편 뉴데일리 기사에 따르면 강규형 명지대 역사학과 교수는 "홍범도는 독립운동을 하기는 했는데,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 몰살을 주도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았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홍범도 나이가 만 53세였다"고 의견을 밝히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어 강교수는 "홍범도가 아무리 독립운동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 ‘자유시 참변’에서 민족운동사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 반민족행위를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고, 이 공로로 레닌한테 돈도 받고 대우도 받지 않았나"라고 지적했다. 홍범도의 공과에 관심을 가져온 한 예비역 장군은 동전의 양면성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보훈 조치를 해야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는 동족상잔 비극인 6.25남침전쟁과 제2연평해전·천안함·연평도 포격 등 북한군의 불법 도발에 의해 전사한 분들이 영면하시는 장소에 홍범도를 안장하는 것을 비판하며, “친소 괴뢰 논란에 빠진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하나만 봐서도 용서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강조했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외교안보정책
    • 외교통일
    2021-08-19
  • [숨은 중국 알기 (19)] 중북 안보조약, 북한의 행보 사전 통제하려는 ‘전략적 소통’이 목적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북한과 중국을 동맹으로 묶어주는 것은 ‘중북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이후 중북 안보조약)이다. 지난 7월 11일은 조약 체결 60주년 기념일이면서 20년 단위의 유효기간이 자동 연장되는 시점이었다. “어느 일방의 폐기 요청이 없으면 자동 연장된다”라는 조약 7조에 따른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상호 친서교환으로 60주년을 축하하면서 향후 2041년까지 유효기간을 자동 연장시켰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했을 때 중국에서 북한이 전략적 부담이라고 주장한 일부 학자들이 있었다. 북한을 비난하는 국제사회의 여론에 동참하자니 북한이 반발하고, 북한을 두둔하자니 책임 있는 대국으로서 위상에 손상이 갈 뿐만 아니라, 불량국가를 감싼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할 명분이 약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북 안보조약’을 폐기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이어서 이런 소수 의견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북한 또한 아무리 중북관계가 악화된 경우라도 조약 폐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이와 같이 중국과 북한은 모두 이 조약이 자국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오늘은 ‘중북 안보조약’에 대한 이야기로서, 최명해의 ‘중국·북한 동맹관계-불편한 동거의 역사’라는 책에서 주요 개념을 발췌해 인용했음을 밝힌다. 최명해는 두 가지 의문점에서 출발하여 중북 안보조약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조약이 왜 1961년에 체결됐는가’이고, 둘째는 ‘조약에 가상적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조약의 특징인 소위 ‘자동개입 조항’에 대한 해석도 덧붙이고 있다. 첫째, 중북 안보조약이 체결된 1961년은 중국군이 북한에서 철수한 1958년 이후부터 3년이 경과한 시점이다. 이 기간은 북한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응할 동맹체제가 형성되지 않은 안보 공백기였다. 북한은 중국 및 소련과 안보조약이 필요했다. 북한은 6.25전쟁 이전인 1949년부터 중국에게 동맹조약 체결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미국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면서 북한의 요구를 거부해왔다. 그렇지만 중·소 분쟁이 점차 심각해지면서 북한이 소련 쪽으로 기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중국을 움직였다.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의 요구대로 미제의 침략에 함께 맞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소련과 손잡고 중국을 위협하는 상황을 사전 방지하는 것이 더욱 시급했다. 즉 북한의 행보를 통제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조약에는 중국과 북한의 요구가 모두 반영돼 있다. 북한의 요구는 ‘자동개입’ 조항으로 알려진 2조에 담겨있다. 이 조항은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당해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라는 내용이다. 이 조항에 자동개입이란 표현은 없지만, 군사지원의 자동성과 즉응성을 밝히고 있다. 중국의 요구는 3조와 4조에 명시돼 있다. 3조는 “체약 쌍방은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동맹도 체결하지 않으며,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집단과 조직, 어떠한 행동에도 참가하지 않는다”로 소련과 협력하지 말라는 의미다. 4조는 “체약 쌍방은 양국의 공동 이익과 관련되는 일체 중요한 국제 문제들에 대하여 계속 협의한다”로 사전에 중국과 협의하라는 의미다. 6.25전쟁에 끌려들어간 경험 때문에 북한의 행보를 사전 통제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강대국이 약소국과 맺은 안보조약 중 자동개입과 관련해 이렇게 강한 표현은 드물다. 강대국은 약소국 문제로 행동이 제한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소련과 먼저 조약을 체결하고 베이징에 온 김일성에게 ‘북소 안보조약’보다 더 확실한 약속을 해야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북소 안보조약은 제1조에 “체약국은 ... 평화와 안전의 보장을 목적으로...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었을 경우,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원조를 제공한다”라고 평화와 안전의 보장이라는 전제조건을 붙이고 있다. 그래서 중국은 이런 전제조건 없이 무력침공을 당하면 자동개입이 되도록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북한이 먼저 공격하여 반격을 받을 경우는 제외한다”라고 자동개입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둘째, 조약에서 설정하고 있는 ‘가상적은 누구인가’이다. 동맹 형성의 전제조건은 공동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인데, 조약상에 가상적은 명시돼 있지 않다. 1950년 2월 14일 체결된 ‘중·소 우호협력조약’에도 “일본국 또는 일본과 침략행위에 있어서 연합하는 다른 국가”로 가상적을 명시했고, 소련이 동구권 국가와 체결한 조약에도 ‘히틀러주의의 침략자’로 명확하다. 중국이 미국을 가상적으로 명시한다면 미국과의 관계에 한계를 설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최명해는 조약체결 형식에도 의문을 제시한다. 보통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안보조약은 강대국의 지도자가 약소국 수도에서 약소국에 대한 안보의지를 밝히며 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베이징에서 체결됐다. 김일성이 소련과 이와 유사한 ‘북소 안보조약’을 1961년 7월 6일 체결한 다음 귀국길에 중국 베이징을 들러 7월 11일 저우언라이와 체결한 것이다. 평양에서 북한에 대한 안보지원 의지를 대내외에 선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금년도 조약체결 60주년을 기념하면서 김정은과 시진핑 총서기가 주고받은 친서내용을 보면 이러한 관점이 명확하다. 김정은은 친서에서 적대세력의 도전과 방해 책동이 보다 악랄해지고 있다며 ‘적대세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적대세력이라는 표현 없이 ‘전략적 의사소통’을 강화해 나가자고 제안했다. 친서 내용 속에 조약을 체결한 목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북한은 ‘적대세력에 대한 대응’이 목적이었다면 중국은 ‘전략적 의사소통’으로 북한의 행보를 사전 통제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다. 역대 중북 정상회담에서 중국이 매번 ‘전략적 소통’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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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8
  • [숨은 중국 알기 (18)] 마오쩌뚱, 신중국 건국 선포 후 스탈린과 담판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 현대사는 공산혁명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으며, 공산혁명은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 마오는 신중국 건국을 선포한 1949년 10월 1일 이후 제일 먼저 스탈린과 담판을 시도했다. 그래서 마오는 1949년 12월 6일 출발하여 1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래 해를 넘겨 1950년 2월 17일까지 두 달 정도 소련에 체류했다. 정상회담 역사상 유례없는 장기간 회의였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대만으로 축출하고 나서 할 일이 많았다. 우선은 해군력을 보강하여 대만까지 해방시키는 것이고, 국가로서 틀을 잡아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며, 외교적으로 장제스가 스탈린에게 만주의 이권과 몽골 및 신강 등의 주권 문제에서 대폭 양보한 ‘중·소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새롭게 ‘新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1946년부터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기위해 방문을 희망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스탈린은 1945년 8월 14일 장제스와 ‘소련은 국민당을 지원하고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는다’라는 ‘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이야기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합국인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는 독일 패망 후 유럽 처리와 일본과의 전쟁을 놓고 회담을 한다. 일종의 전승국 간 전리품 ‘주고받기’ 거래인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독일을 분단하고 동유럽에서 소련의 기득권을 인정하는데 합의한다. 그리고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패망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이 예상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다. 이 때, 스탈린은 “그러면 우리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루즈벨트가 “너희가 원하는 것이 뭐지”라고 묻자, 스탈린은 “만주 지방에서 러일전쟁 이전 구러시아 제국이 누렸던 이권을 보장해 달라”고 속마음을 드러낸다. 이 제안에 대해 루즈벨트는 쾌히 승낙하면서 “이 문제는 중국과 협의해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미국과 합의를 바탕으로 스탈린은 장제스로부터 만주지역의 이권을 보장받는 대신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국민당을 지원한다고 약속했던 스탈린이기에 마오쩌둥 만나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전역을 공산화시킨 마오쩌둥이 자신의 70세 생일 축하사절로 오겠다는데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자 소련은 마오쩌둥의 격을 낮춰 많은 공산권 국가의 축하사절단 중 하나로 대우했다. 소련은 장제스로부터 보장받은 만주 및 몽골의 이권이 조금이라도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소련의 입장과는 반대로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되찾고 경제와 군사원조까지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스탈린에게 지원받은 것이 없었다. 스탈린은 국민당을 지원했고, 공산당군이 양쯔강을 넘어 진격하려 할 때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구실로 도하를 만류했다. 중국을 분단시키려는 의도였다.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국가이익이 더 중요했다. 당시 중국이 소련에 굽히고 들어간 것은 국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1차 회담 후, 마오를 모스크바 외곽의 어느 한적한 지역에 머물게 하고 오랫동안 관찰했다. 마오도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안하고 먹고 싸고 자기만 한다”라며 원색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마오는 담판을 짓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빼들었다. 그는 스탈린을 향해 “영국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다. 우리도 영국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도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반도와 대만을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시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미국은 중국을 위협할 의도가 없다는 호의적인 신호를 보낸 것이다. 스탈린은 고민이 깊어졌다. 마오가 소련을 떠나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손잡으면 어떻게 하나, 공산권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유고의 티토처럼 독자노선을 걸으면 어떻게 하나... 등 모두가 소련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들이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다독이기 위해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장제스와 맺은 ‘중소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1950년 2월 14일 ‘新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한다. 만주 지방의 철도, 다롄·뤼순항의 운영권은 중국에 무상 반환했다. 하지만 외몽골 독립은 양보하지 않아 마오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중국은 1950년 4월 중앙인민정부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마오의 외교성과를 치하하며 ‘新중·소 우호조약’을 승인했다. 당시 마오는 외몽골을 잃은 것 때문에 조약 승인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탈린은 마오와 회담 후, 공산주의자이기보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보고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 스탈린의 머리를 스친 것은 1949년 3월 김일성이 요구한 남조선 무력 적화통일 승인이었다. 그는 당시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지만 김일성이 남침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고 그러면 중국도 개입해 싸움붙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마오도 억제할 수 있고, 미국도 한반도에 묶어 놓아 유럽에서 압력이 분산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스탈린은 6.25 전쟁이라는 함정을 파서 중국과 미국을 끌어들이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마오가 소련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1950년 1월 30일 경 김일성에게 무력 남침 승인의 신호를 보낸다. “무력 남침문제에 대해 상의할 사항이 있으니 소련을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소련 방문을 마친 후, 1950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무력 남침 조건부 승인’을 받는다. 소련이 내건 조건은 ‘중국이 동의할 경우’였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귀국 후 바로 4월에 마오를 만나 중국이 동의하면 남침을 승인하겠다는 스탈린의 결심을 통보한다. 당시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제안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스탈린의 뜻에 이의를 제기해 관계가 악화되면 당시 소련에 의지하고 있던 군사 및 경제원조는 받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마오쩌둥은 원하지 않은 김일성의 무력남침에 동의했다. 이렇게 6.25 전쟁 발발 이면에는 스탈린의 노림수가 존재하고 있었다. ◀ 임방순 인천대 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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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0
  • [숨은 중국 알기 (17)] 작은 거인 덩샤오핑, 마오쩌둥 시대 수습하고 새 시대 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은 산이고 덩샤오핑은 길이다”라고 말한다. 즉 청조 말기부터 시작된 약 100여 년의 혼란을 끝내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의 공적을 우뚝 솟은 산에 비유한 것이다. 반면 덩샤오핑은 경제적으로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켰고 정치적으로 마오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실용성을 평가하여 사통팔달로 통하는 길로 묘사했다.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어떠한 모습일까? 아마도 마오쩌둥의 시대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당시 강경 친마오의 4인방들은 영구혁명을 내세워 마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 과잉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킨 인물이 덩샤오핑인 것이다. 오늘은 덩샤오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주로 개인적인 특이 이력과 마오쩌둥과 차별되는 사항들이다. 덩은 1904년 쓰촨성(四川省)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덩원밍(鄧文明)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였고, 서구식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18년 14세 어린 아들 덩샤오핑을 시골 고향에서 4일 걸려야 도착하는 대도시 충칭(重慶)의 학교로 보냈고, 이어서 16세인 1920년 프랑스로 유학 보냈다. 반면 마오쩌둥은 1893년 후난성(湖南省)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아들이 고향에서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오는 부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베이징으로 상경했다. 마오는 관습과 기존체제에 반항적이고 주관이 강한 모습이었다. 덩의 프랑스 유학은 순탄하지 않았다.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해 제대로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다. 파리의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고, 같은 유학생 저우언라이 밑에서 적광(赤光)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 저우언라이와 인연의 시작이었다. 중국 유학생들이 귀국할 때 덩은 1926년 소련으로 옮겨 중산대학에 다녔다. 당시 소련 공산당은 아시아 공산 혁명을 위해 동방대학을, 중국의 혁명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중산대학을 세웠다. 1927년 귀국한 덩샤오핑은 그 해 8월 7일 우한(武漢)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비상대책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처음 만나게 된다. 마오는 정식 참석자였고 덩은 회의록 작성자에 불과했다. 덩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과 장정을 함께 하며 국공내전에 참여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중국 서남부 산악지대 해방을 담당한 제2야전군의 정치위원과 지방행정 책임자를 겸직하면서 능력을 발휘했고 1950년 10월 티베트 점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적으로 마오쩌둥에게 발탁돼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했다. 그 후 군사 지휘관보다는 정치위원과 공산주의 이론가로서 활동했다. 그러면 필자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덩샤오핑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다. 첫째 국내정치를 안정시켰다. 덩샤오핑은 문화혁명 때 주자파로 몰려 시골 트랙터 공장에 4년간 유폐됐고 자신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은 홍위병의 핍박으로 불구가 됐다. 그러나 덩은 마오와 문화혁명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보복을 최소화했다. 한풀이와 보복의 차원을 넘어 통합과 발전의 관점에서 중국을 새롭게 출발시킨 것이다. 마오 시대를 “공이 7이고 과가 3이다”라고 정리하고 더 이상 소모적인 과거사 논쟁에 휩싸이지 않게 했다. 무엇보다 인적청산 대신 제도를 개선해 나갔다. 1인 절대권력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구조를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고, 권력투쟁의 원천인 권력의 승계도 지금의 지도부가 합의에 의해 차차기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제도화했다. 이런 제도에 의해 탄생한 지도부가 바로 후진타오와 시진핑이었다. 둘째, 마오는 자신의 이상과 이념에 중국을 꿰맞추려한 이상주의자였다. 반면 덩은 “고양이가 검은 색이든 흰색이든 관계없다.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현실주의자였다. 이념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개혁개방(경제개혁, 대외개방)을 추진하면서 덩샤오핑의 신념은 확고했다. “가난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다”, “먹을 것을 가진 자가 결국 모든 것을 갖는다“라며 경제적 현실을 이념보다 중시했다. 실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국 사회는 평등이라는 공산주의 교조적인 사상에서 벗어나 경쟁과 효율의 개념을 도입해 고속 발전하기 시작했다. 선부론(先富論)도 나왔다. 능력 있고 노력한 자가 먼저 부자가 되고 그 이익을 공유하며 이를 토대로 여러 명의 부자가 탄생하는 개념이다. 자본주의 개념을 받아들인 중국 경제체제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억눌려져 있던 중국인의 부자 마인드를 깨워 인민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돈을 벌게 했다. 셋째,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시대 흐름에 적응했다. 마오쩌둥은 제3차 세계대전을 염두에 두고 소련 및 미국과 전쟁을 준비하는 ‘전쟁불가피론’자였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전쟁가피론’을 주장하며 국방비를 줄여 경제발전에 전념했다. 1979년 미국과 국교수립을 하면서 향후 100년간 맞서지 말 것을 주문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충분히 실력을 갖춘 후 나서라는 의미다. 중국은 이런 자세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고속 발전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한국과 수교를 결심했다.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한국을 냉전의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한국과 수교한다면 얻게 될 국가이익으로 ① 경제적 협력이 가능하고, ⓶ 대만을 고립시킬 수 있으며, ③ 1989년 6.4 천안문 사태로 서방으로부터 고립당한 상황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았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흰 고양이였다. 문제는 침입자를 경고하고 완충해주는 검은 고양이인 ‘북한을 어떻게 설득하고 달래는가’였다. 덩샤오핑은 북한에 최대한 정성을 기울였다. 군사원조를 통해 북한의 안보불안감을 달랬고, 경제원조로 신뢰를 보였다. 그리고 지도급 인사들이 방문하여 김일성에게 직접 한중수교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계속된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북한의 실망감을 해소시키지는 못했지만 북한에게 할 바를 다했다. 중국은 한국과 수교함으로써 한국과 북한에 모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변모하여 한반도에서 전략적 우월을 점하게 됐다, 넷째, 바다를 주목하고 해군력 증강을 강조했다. 덩샤오핑은 바다를 지키고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항공모함 보유를 결심했다. 이를 실현시켜준 인물이 류화칭(刘华清)이었다 류화칭은 국공내전 시절 제2야전군 정치위원이던 덩샤오핑 휘하에 있었으며 1989년에는 덩샤오핑에 의해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발탁됐다. 류화칭은 “중국이 항모를 만들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항공모함 확보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결국 류화칭은 덩샤오핑의 항공모함의 꿈을 실현하였다. 중국의 항모 명칭이 미국처럼 역대 대통령이나 해군제독이었다면 아마 1번함은 덩샤오핑함, 2번함은 류화칭함이 되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93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사망 직후 각막과 장기 일부는 해부학 연구용으로 기증됐으며, 그의 유해는 바다에 뿌려졌다. 중국인들은 남중국해가 덩샤오핑의 묘소라고 한다. 150㎝가 조금 넘는 작은 체구이지만 묘소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이렇게 시대를 열어간 덩샤오핑에게도 과오는 있다. 첫째, 개혁개방에 뒤따르는 부정부패 문제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쥐를 잘 잡았던 고양이가 이제는 주인집 부엌에 있는 생선에 손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보와 권력을 쥐고 있는 혁명원로 자녀들과 친척들의 재산 축적 문제는 중국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덩샤오핑의 아들과 딸, 사위들도 홍콩을 중심으로 각종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데, 이들에게 돈벌이는 땅 집고 헤엄치기다. 둘째, 1989년 6.4 천안문 사태 시 이를 유혈 진압했다. 희생자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의 과오에 대해서 대체로 말을 하지 않는다. 부정부패 문제는 경제가 고속 발전하는 과정에서 어느 나라든 발생하는 보편적 문제라는 것이고, 천안문 사태 유혈진압도 국가의 질서를 위해 불가피했다는 생각이다. 덩샤오핑의 과오를 생각하니 “살아있는 동안 비난받지 않은 사람은 죽은 후에 비난받을 것이다”란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필자는 후세에 덩샤오핑의 공적과 과오가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하다. 필자가 감히 먼저 평가해 본다면 그의 공적은 8이요 과오는 2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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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04
  • 한-싱가포르 국방전략대화…국방교류협력 더욱 강화키로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한국과 싱가포르 국방부는 2일 서울에서 제6차 국방전략대화를 개최해 국방교류 협력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고 국방부가 밝혔다. 김만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과 테오엥디(Teo Eng Dih) 싱가포르 국방부 정책차관보가 양국 수석대표로 참석, 양국 간 상호 관심사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했다. 양국은 회의에서 앞으로 국방기술 협력과 인도주의적 지원 및 재난구호, 사이버안보 등의 분야에서도 교류 협력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계기로 2년 전 체결한 화생방 정보 분야 양해각서(MOU)를 토대로 국방기술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또한, 인도적 지원 및 재난구호 분야에서도 양국 간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초국가적인 사이버안보 위협에 대응할 수 있도록 양국이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등 긴밀한 파트너십을 구축해 나가기로 했다. 국방부는 "이번 국방전략대화는 8년 만의 대면 회의"라며 "앞으로도 이를 연례적으로 개최해 양국 간 국방협력 발전 방안을 지속해서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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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02
  • 한-이탈리아 국방장관 전화 통화…다양한 분야 협력 강화키로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서욱 국방부 장관은 28일 로렌조 궤리니 이탈리아 국방장관과 전화 통화를 갖고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서 장관은 이날 오후 궤리니 장관의 요청으로 이뤄진 통화에서 양국 간 국방교류협력 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두 장관은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이탈리아 방문을 계기로 체결한 한-이탈리아 국방협력협정이 지난 6월 발효된 것을 계기로 해양안보, 대테러, 사이버안보, 방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 간 협력을 활성화해 나가기로 했다. 서 장관은 또 우리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이탈리아의 변함없는 지지를 당부했고, 궤리니 장관은 한반도 상황의 진전을 기대하며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 방침을 밝혔다고 국방부는 전했다. 아울러 서 장관은 올해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유엔 평화유지장관회의에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했고, 궤리니 장관은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답하면서 레바논에서 이탈리아 부대와 함께 활동하는 동명부대의 명성과 기여를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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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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