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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수력원자력·원자력안전위 등 사이버공격 지속 발생 및 증가 추세
    ▲ 지난 2014년 12월 30일 조석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원전 사이버 공격 관련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사진제공=연합뉴스] 신용현 의원, "최근 10년간 한수원 인터넷망 사이버 공격 시도 1,366건" 송희경 의원, "5년간 원자력안전위 및 산하기관 사이버 공격 시도 268건"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국내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또 원자력안전위원회 및 산하기관에 대한 사이버공격 시도도 증가하고 있어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6일(일) 바른미래당 신용현 의원(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간사)이 한수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10년간 한수원 인터넷망 해킹시도 현황’ 자료에 따르면 악성코드 공격, 자료훼손 및 유출, 홈페이지 공격 등 총 1,366건의 사이버 공격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이버 공격 시도 유형을 보면, △악의적으로 사용자에게 피해를 주는 프로그램인 ‘악성코드 공격’이 835건으로 가장 많았고, △비인가자가 홈페이지 접속 후 자료를 삭제 또는 변경하는 ‘홈페이지 공격’이 329건 △일명 D-DoS로 불리는 ‘서비스 거부 공격’ 111건 순이다. 그 외에도 자료훼손 및 유출, 비정상 사용 등 다양한 공격이 시도됐다. 한수원 인터넷망에 대한 사이버공격은 2012년 515건이었으나 2016년 145건, 2017년 104건, 2018년 62건 등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이다. 또 최근 3년간 공격이 이뤄진 국가별 현황을 보면 우리나라(151회)를 제외하고는 중국(62회)이 가장 많았다. 신용현 의원은 “10년 간 1,300건이 넘는 사이버 공격 시도가 이뤄진 것을 볼 때 국가기밀 유출, 원격제어 등의 위협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한수원이 사이버 공격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수원은 원전을 운영하는 사업자로서 단 한 번의 사이버공격만으로도 국민안전과 국가안보에 치명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며 “한수원 등 정부당국은 보안시스템 강화, 전담인력 확충 등 사이버보안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송희경 의원이 원자력안전위원회와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한국원자력안전재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올해까지 이들 기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 시도가 총 268건 발생했다. 이 중 202건이 원자력안전위를 대상으로 발생했다. 연도별로는 2015년 32건, 2016년 25건, 2017년 51건, 2018년 63건이었고 올해는 9월까지 97건으로 나타났다. 송 의원은 원자력안전재단의 경우 2015년 방사선 작업종사자 약 19만 명의 정보가 담긴 '방사선작업종사자종합정보시스템'(RAWIS)이 D-DoS 공격용 악성코드 3개에 감염됐는데 4년이 지난 올해 5월에야 발견됐다며 대응이 미흡함을 지적했다. 이들 기관의 자료전송 현황 관리도 제각각이다. 올해 원자력안전위의 업무망 자료가 외장메모리로 전송된 건수는 약 72만 건에 달하는 반면,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은 업무망에서 외장메모리 사용을 차단하고 있다. 원자력안전재단은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송 의원은 "원자력안전위 및 산하 기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 시도는 2015년 대비 올해 3배가량 급증했지만, 사이버보안 전담 인력은 1∼2명뿐이고 대부분 겸직"이라며 "보안 전담인력 확충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원자력 안전기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은 원전 기술 경쟁력은 물론 국민 안전에도 치명적인 위협요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큰 만큼 면밀한 현황 점검과 철저한 대비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전역군인
    2019-10-07
  • [김희철의 Crisis M]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하)
    ▲ 좌측부터 독립군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 만주 간도 한인 마을과 농장을 불태우는 만행 자행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만행에 의한 간도 주민들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있던 무장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알렉셰프스크(자유시)로 집결했다. 이유는 강대국 러시아가 독립군을 지원해 준다면 일제를 상대하기 더 쉽고,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하나로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21년 6월 28일,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을 불러일으켜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인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로 집결한 부대의 지휘권을 놓고 지도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두 파로 나뉜 독립군 중 한 파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의견이 다른 독립군을 배신하고 말았다. 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혁명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 자유대대가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하며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것이다. 이 과정에서 960명의 독립군이 죽고,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히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우리끼리의 싸움으로 이렇게 많은 동지들이 죽게 되자, 사건과 관련된 지도자들은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해외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김좌진장군,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다가 공산당 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 홍범도장군, 러시아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초라한 말년 한편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헤이룽강 부근에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부총재를 역임하였고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했다. 또한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 김봉환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불혹인 40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또 한명의 영웅인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장군도 ‘자유시 참변’을 겪은 뒤 항일 무장투쟁활동을 접고 이르크츠크로 이동하였다. 왜냐하면 홍범도장군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었지만 일찍 사회주의 단체 결성도 주도했고 뒤에는 적군에 가담하여 독립군을 와해시킨 책임을 느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자유시 참변때 주도권을 쥐려고 러시아로 귀화해 러시아 적군과 손잡고 군사 주도권을 위해 따르지 않는 부대들 학살에 가담해서 독립군을 와해시켰다. 또한 사변후 홍범도장군은 재판관으로 참여해서 독립군들을 재판했던 것에 책임을 느끼는 회한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을 했었다. 그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이곳에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김원봉은 북한 국가검열상으로 ‘6·25 전쟁’ 주도, 전후 '팽' 당해 숙청 또다른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인 의열단장 김원봉(1898~1958)은 최근 정부에서 보훈자 선정을 추진 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인물로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무장투쟁노선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경남 밀양(密陽)에서 태어나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고 국내의 일제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 파괴하고, 친일 및 일본군 암살 등 항일 무장투쟁을 하였다. 또한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고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후신인 중국 인민해방군의 조선의용군(5만명)은 ‘6·25남침전쟁’ 직전 북한에 들어가 인민군 전력의 3분의 1 규모를 차지했다. 평양방어사령관을 맡은 무정을 비롯해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12사단장 전우 등 인민군 장성 50% 정도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6·25 새벽 남침한 북한인민군 연대 21개 중 47%인 10개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용군 입북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전쟁 도발 결심과 전쟁 승리의 확신을 심어준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했다. 김원봉은 해방 이후 남북협상 때 월북하면서 사회주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국방부장관)에 올랐다. 6·25 남침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1952년 5월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임명되기도 하며 남침전쟁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6·25남침전쟁’이후 1958년 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 제거작업 때 숙청됐다. 정부는 1962년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인 김좌진, 홍범도 장군에게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원봉은 항일 무장투쟁 업적은 인정되지만 대한민국 건국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어 제외되었고 우리 헌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동족을 비극에 떨어뜨린 위법자로 추락했다. 특히 김원봉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의 중심에 그가 있었고, 천만 이산가족과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우리민족 동족 상잔의 비극 역사를 만든 주역이 되었다. 비극의 역사 반복 막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자주국방태세 강화 지난 24일 북한은 새벽 함경남도 선덕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새로 연구 개발한 초대형 방사포' 2발을 최고 고도는 97㎞, 비행거리는 약 380여㎞으로 시험 발사하면서 금년에만 9차례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미국의 압박으로 발사하지 못하면서 남한을 사정거리에 두고 위협하는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은 거리낌 없이 발사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중앙통신에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굴함 없는 공격전을 벌려 적대세력들의 가중되는 군사적 위협과 압박 공세를 단호히 제압 분쇄할 우리 식의 전략전술무기 개발을 계속 힘 있게 다그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이야기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이란 강대국 미국과는 협상으로 시간을 벌면서 남한을 목표로 노후된 1,000여기의 노동미사일을 대체하여 남한 전역을 사정권에 포함시킨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존하는 위협은 해방 후, 김원봉이 오판해 김일성을 도와준 결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 정부는 이것이 안전보장이사회 의결사항 위반이 아니라고 북한편을 들고 있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들이 대한민국 건국훈장에 추서되어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도 되지만, 한 순간의 오판으로 민족역사의 위법자가 되고, 천만 이산가족을 만들며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든 주역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항일 무장투쟁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이 담긴 삶의 마무리 과정을 돌아보며 가슴이 절여오는 안타까운 심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우리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함께자주국방태세 약화를 막아야 한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전역군인
    • 전문가 분석
    2019-09-02
  • [전역군인 인생 2막] (4) 김종두 ‘정약용 문화교육원’ 상임이사(하), ‘효’학 교수로 기반 다져 민간의 효 문화 기수로 나서
    ▲ 지난 1일 정약용문화교육원 정기총회가 끝나고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김종두 상임이사(앞줄 왼쪽에서 다섯 째). [사진제공=김종두 이사]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김종두 이사, “효교육에 특화된 명품 부사관학과 키워 졸업생 90% 임관”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2009년 33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김종두 상임이사는 육군에서 충·효·예 교육을 담당하던 시절 강사로 초빙돼 인연을 맺은 홍우준(洪禹俊) 경민학원 이사장의 요청으로 의정부시에 위치한 경민대학에 부사관학과인 ‘효충사관과’를 만들게 된다. 홍 이사장은 약관 21세 때 공산당이 싫어 부모와 가족을 북한 땅에 남겨두고 단신 월남하여 수많은 곡절 끝에 경민학원을 설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런 연유로 그는 부모 사랑(孝)과 나라 사랑(忠)에 기초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철학을 갖게 됐고, 자신이 설립한 경민대학교에 ‘효’와 ‘충’을 가르치는 학과를 만들 생각을 했다. 홍 이사장은 그 학과를 만들어 이끌 적임자로 일찍이 김 이사를 점찍어 두고 있었고, 이런 그의 바램은 김 이사의 전역으로 현실화 됐다. 당시 김 이사와 논의하던 그는 효심과 애국심으로 무장한 교육자 양성의 의미로 ‘사(師)’자를, 공직자 양성의 의미로 ‘관(官)’자를 넣은 ‘효충사관과(孝忠師官科)’로 학과 명칭을 정했다. 홍 이사장은 김 이사에게 어떻게 하면 학생을 모집해서 그런 인재를 육성해 낼 수 있는지를 물었고, 김 이사는 “군 초급간부를 양성하는 부사관학과로 특성화하면 군대와 나라에 모두 도움이 되는 명품학과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 이사는 5년 동안 효충사관과를 맡아 학과장으로 재직했다. ▲ 효충사관과 학생들이 제복 착복식을 실시한 후 김종두 학과장(앞줄 맨 왼쪽) 및 학교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김종두 이사] 김 이사는 부사관이 병영에서 초급 ‘지휘자·교육자·관리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 착안해 인근의 65사단과 업무협약을 맺고, 현장 실습을 통한 부하 상담 및 관리 요령 등을 가르쳤다. 또 인근의 사회복지시설에서 토요일마다 장애인 목욕 및 식사, 산책 등을 돕는 봉사활동을 함께 하면서 인성 함양에도 주력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그동안 효충사관과 졸업생들은 90% 이상이 육·해·공군의 부사관(군 공무원)으로 임관했고, 이 가운데 매년 3∼6명씩 3사관학교에 합격해 장교로 임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전통이 이어진다면 효충사관과 출신 영관장교가 나올 날도 멀지 않았다. 경민대와 성산효대학원에서 ‘효행교육지도사’ 5000명 배출 앞장서 김 이사는 학과장으로 재직하던 2011년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권인 ‘효패러다임의 현대적 해석’을 저술했고, 이어 2012년 2권인 ‘새로운 패러다임의 효 교육’과 3권인 ‘효와 소통의 현대적 리더십’ 등을 출간했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준비했던 내용들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효학 개론 성격으로 집필한 ‘효패러다임의 현대적 해석’은 3판 째 출간했다. ▲ 김종두 교수가 발간한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 2, 3권. [사진제공=인터파크] 이후 김 이사는 은사인 최성규(崔聖奎) 총장의 요청으로 경민대에서 성산효대학원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5년간 기획처장 및 효학과 교수를 맡아 강의하면서 효를 학문으로 특성화하는데 주력했다. 또 효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통해 대중의 인식을 전환하고, 인성교육·리더십·사회복지 등 인접 학문과 융합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기존에 출간한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 2, 3권을 인성교육과 융합해 기본서 시리즈 4권인 ‘인성교육의 이해와 실제’를 2018년 출간했다. 한편, 김 이사는 경민대 재직 시절에는 경민대학 총장 명의로, 성산효대학원 재직 시절에는 성산효대학원 총장 명의로 각 지방별 ‘효행교육지도사 자격과정’ 강의를 통해 5000여명의 효지도사 배출에 앞장섰는데, 이렇게 양성된 지도사들은 지역별 초·중·고등학교에서 효를 가르치는 활동을 하고 있다. ▲ 김종두 교수(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지난해 12월 제5기 효행교육지도사 수료식 후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김종두 이사] 인생 2막 성공 비결, “군대 업무 잘하면서 제2의 영역 미리 개척해야” 또한 그는 육군대학 교관시절에 다녔던 서당의 훈장 선생님이신 박성기(朴聖琪) 한학자와 육군의 충·효·예 교육을 함께 담당했던 민병돈(閔炳敦) 전 육사교장, 그리고 박사학위 과정의 은사이신 최성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총장 등 3분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금년 3월 그는 성산효대학원대학교를 떠나 2007년부터 이사로 활동해오던 정약용문화교육원(남양주시 소재)의 상임이사로 부임했고,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위치한 남양주에서 ‘정약용 선생 바로 알리기’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수도권의 많은 사람들이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강진까지 가지 않아도 ‘효에 기초한 애국·애민정신’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교육 사업도 기획하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가 2012년 정약용 선생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으므로 남양주시 마재 마을에 살았던 정약용 선생을 세계적 인물로 알리기 위해 ‘아름다운 마재 마을 가꾸기’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전역을 앞둔 후배들은 그에게 묻는다. 인생 2막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냐고. 그럴 때마다 그가 해주는 말은 “군대 밖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그 분야를 공부해 전문성을 쌓으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라”고 주문한다. 그는 “군대 업무를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제2의 영역도 미리 개척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고 말했다.
    • 전역군인
    2019-06-09
  • [전역군인 인생 2막] (4) 김종두 ‘정약용 문화교육원’ 상임이사(상), 육군의 ‘효(孝)’교육 선구자에서 대학의 ‘효’학 교수로
    ▲ 포병단장(연대장) 이·취임식을 거행한 후 열린 다과회에서 어머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어머니를 이·취임식 행사장 가운데 모신 신임 단장의 모습에서 장병들은 효를 몸소 실천하는 지휘관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진제공=김종두 상임이사]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육군참모총장 지시로 ‘효’교육하던 김종두 중령, 경민학원 이사장이 주목 전역 후 홍우준 이사장 요청으로 경민대 ‘효충사관과’ 만들고 학과장 맡아 김종두 이사, 본지와의 인터뷰서 "군 복무시절에도 부모님에 대한 효도가 나의 기쁨"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김종두 정약용 문화교육원 상임이사(65세)는 ‘효(孝)’를 화두로 평생을 살아온 군인이자 학자이다. 그는 영관장교 시절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충·효·예 교육을 담당했고, 이 때 강사로 초빙됐던 홍우준(洪禹俊) 경민학원 이사장의 주목을 받게 된다. 홍 이사장은 교육사업가이자 정치인이었는데, 당시 김 이사가 ‘효’에 대해 강의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언젠가 자신이 설립한 경민대학교에 이와 관련된 학과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김 이사는 전역하자마자 홍 이사장의 요청으로 경민대학교에 효충사관과를 만들고 학과장을 맡아 효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그는 1976년 3사관학교를 졸업(13기)하고 소위로 임관한 후 2009년 대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군 복무 중에도 ‘효’를 생활화했다. 특히 중대장·대대장·연대장 등 지휘관 근무 시 효에 바탕을 둔 장병 인성교육으로 단 한 건의 사고도 없는 단합된 부대를 육성했다. 김 이사는 뉴스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서당을 2년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효’를 배우게 됐다”면서 “이런 배움이 사관생도 시절 그리운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장교로 임관한 이후 부하 장병들이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않도록 안내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참모장교 근무 중 석사학위 받고 ‘효’서적 처음 출간해 진중문고 채택 효교육 전문가로 알려져 육본 충·효·예 교육담당관 직책 맡고 강의해 향학열이 강했던 그는 1993년부터 대구에 위치한 제2군사령부 및 50사단에서 참모장교로 근무하는 동안 영남대 행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1996년 ‘군장병의 효심과 복무 자세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육군 교육사 리더십 교육장교로 근무하게 되면서 틈틈이 모은 자료를 토대로 ‘孝, 자녀들아 부모를 사랑하자!’라는 책을 처음 출간했다. 이 책이 장병들에게 배포되는 국방부의 ‘진중문고’로 채택되면서 김 이사는 ‘군대 효교육 전문가’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육군대학의 리더십 교관으로도 근무하게 됐다. 1998년 김동신 육군참모총장은 부임하자마자 “장교 중에서 충·효 교육 전문가를 찾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성균관 유도회로부터 “군대에서 충·효 교육을 강화하면 좋겠다”는 건의를 받고, 마침 부임 신고를 하는 김 총장에게 ‘충·효 교육 강화’를 주문함에 따라 김 총장이 그런 지시를 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추천된 김 이사는 ‘육군본부 충·효·예 교육담당관’ 직책을 수행하게 됐다. 육군이 충·효 교육을 강화한다는 소식을 들은 ‘충·효 국민운동본부’는 육군에 충·효·예 교육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1999년부터 2002년까지 3년 간 매주 1개기 35명씩 충·효·예 워크숍을 3박 4일간 실시했다. 첫 해는 충·효 국민운동본부에서, 다음 2년간은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이 진행됐다. 중대장부터 연대장까지의 지휘관과 정훈참모 등 장교 25명과 부사관 10명으로 구성된 각 기의 교육은 육사 교장을 역임한 민병돈 예비역 장군이 ‘충·예’ 교육을, 김 이사가 ‘효’ 교육을 담당했다. 이 교육을 받은 간부들이 야전 부대교육에 적용한 결과 자살 및 안전사고가 30% 가까이 줄어드는 효과를 거뒀다고 2003년 4월 17일자 국방일보는 보도했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가치관이 ‘인생 2막’ 펼치는 토대로 작용 김 이사는 충·효·예 워크숍을 담당하던 첫 해인 1999년 군 내부 교육용으로 ‘충·효·예 기본교재’를 집필하여 육군 예산으로 발간했다. 그의 두 번째 책인 셈이다. 이 해에 그는 세 번째 책인 ‘충효예의 리더십’을 출간했고, 3년간 진행된 워크숍이 끝난 이후 2003년 네 번째 책인 ‘엄마, 나 군대 갈래요’를 출간했다. 김 이사는 충·효·예 교육담당관을 하면서 대령으로 진급했고, 연대장 근무를 마친 후 2003년 국방대학교 리더십교수 겸 리더십 센터장에 보직돼 3년간 ‘정약용의 목민 리더십’을 강의했다. 이 시기에 그는 성산효대학원대학교에서 ‘군대 효 교육을 통한 장병 인성 함양과 리더십 역량 강화에 관한 연구’로 한국에서 최초로 ‘효’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효’ 인성교육에도 앞장섰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한국효운동단체 총연합회’ 사무총장을 맡아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효행장려법)’의 제정을 이끌었고, 한국 효문화진흥원 설립에도 깊이 관여했다. 김 이사가 개척한 ‘인생 2막’은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가치관을 토대로 구축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하편에 계속)
    • 전역군인
    2019-06-02
  • [전역군인 인생 2막] (3) 윤동일 한국열린사이버대 교수(하) '전쟁 인문학' 1인 기업 시험대에 올리다
    ▲ 2016년 삼성전자에서 안보교육 중인 윤동일 교수. [사진제공=윤동일 교수]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축구 전쟁’ 출간, 고대 올림픽엔 단체종목 없었다는 의문에서 출발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윤동일 교수는 인류 역사와 현대의 일상에 숨어 있는 다양한 ‘전쟁 흔적’들을 살펴, 전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감을 통해 새로운 발견을 이어주는 전쟁 연구를 하고 있다. 통칭해 ‘전쟁 인문학’으로 정의하고, 일상의 의식주를 비롯해 전쟁에서 탄생한 스포츠, 과학기술, 상징, 음악, 미술, 게임, 뷰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시도는 우리나라에서 생소한 것으로 이 분야의 퍼스트 무버임에 틀림없다. 그는 2018년 전쟁과 스포츠의 두 번째 이야기인 ‘축구 전쟁-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을 출간했다. 이 책은 “고대 올림픽은 분명히 그리스의 전투방식을 반영했지만 모두 개인 전투기술에 집중되어 있어, 당시 그리스군의 기본인 밀집전투와 관련된 단체종목은 없었다”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이런 의문은 우연한 기회에 연구한 고대 축구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미 기원전부터 축구를 즐겼고 특히 군에서 축구를 정식 군사훈련 종목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것이 로마와 중국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세계 각지에 전파해 중세 집단축구를 거쳐 현대 축구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올림픽으로 전사 양성하고 축구로 집단전술 숙달해 전시 대비 그는 “축구가 세계로 전파되는 중심에 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축구로 집단전술을 숙달하고, 이 전술이 군대의 전법에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요컨대, 올림픽이 전사양성 종목이라면 축구는 부대훈련 종목이었던 셈이다. 아울러 그는 “축구가 태어난 지 100년 만에 세계를 정복한 이유에 대해 많은 연구와 주장이 있지만 아직 반쪽에 불과하며, 축구가 전쟁과 함께 진화했다는 ‘축구의 전투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그는 전쟁과 스포츠의 두 저술을 정리해 “올림픽으로 전사를 양성하고, 축구로 집단전술을 숙달해 비로소 전시 대비태세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윤동일 교수가 육사생도 시절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축구선수로 뛰는 모습. [사진제공=윤동일 교수] 윤 교수가 저서의 시작을 올림픽과 축구로 정한 배경에는 육군사관생도 시절 축구선수 경력도 한몫을 했다. 그는 “축구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고, 북한과 체제경쟁의 한축을 담당했으며 강군육성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3군사관생도들의 체육대회가 폐지된 것에 아쉬움을 표하면서, 미국 육사와 해사 간 미식축구 정기전이 무려 110년 이상 이어지고 있음을 부러워했다. 후배와 부대에 저서 기증하고 대학에 전쟁인문학 과목 개설 그의 책은 출간과 동시에 여러 곳에 무상으로 배부된다. 특히 장교로 임관하는 육사 후배들을 비롯하여 일부 부대와 지휘관들에게 지금까지 천여 권 정도를 기증했다. 군문을 떠나면서 “직접 만든 책을 후배와 부대에 남기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부터 그는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국방상담리더십학과에서 특임교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러 대학에서 수차례 강연은 했지만 특정 대학에 그의 과목이 개설되기는 처음이다. ‘전쟁과 문명’이란 교양과목이 개설되자마자 전쟁에 관심 있는 학생 300명이 수강을 신청해 단번에 대학에서 인기 있는 과목 중 하나로 부상했다. 수강생 중에는 군인보다 일반인이 더 많고, 여성의 비율도 35퍼센트가 넘어 연구의 보편성이 짐작된다. 늘 자신을 ‘전쟁 인문학 전도사’로 자처하며 묵묵히 걸어온 그의 노력이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윤 교수는 전쟁연구를 하는 목적이 “무작정 전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창 쓸 일이 없도록 하는 것(止戈爲武)’에 있다”며 균형 잡힌 접근을 강조했다. ▲ 윤동일 교수가 한국열린사이버대학에서 올해 처음 개설된 ‘전쟁과 문명’이란 과목을 강의하는 모습. [강의 동영상 캡쳐] 책을 쓴 저자이자 교수에 출판사까지 운영하는 멀티 플레이어 군문을 떠난 지 3년이 된 그는 두 권의 책을 쓴 저자이자 대학 교수이고, 혼자서 출판사까지 운영하는 멀티 플레이어다. 그는 매일 아침 도서 주문을 확인해 포장과 택배의뢰, 계산서 발송, 정산 그리고 가끔 배송이나 홍보도 직접 나간다. 학교와 부대, 기업체를 찾아 강의도 하고, 1주에 한 건 이상 칼럼도 쓴다. 틈틈이 걷기 운동도 해야 하고, 매월 병원 2∼3곳을 돌면서 진료 받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일도 거르면 안 된다. 그러다 컨디션이 나빠지면 무기한 일을 중단하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도 바쁘고 치열한 삶을 살지만 한편으론 신중하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윤 교수는 또한 인문학 학술연구와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한국인문학진흥원 부설 연구소장도 맡고 있다. 이 연구소는 국가와 사회에 유용한 인문학 콘텐츠를 개발·보급할 목적으로 지난해 12월에 뜻을 같이 하는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발족했다. 올해 첫 행사로 5월 21일 세한대학교와 인문학 분야의 산학협력 연구를 위한 MOU를 체결하고, 인문학 공동연구와 보급에 힘쓸 계획이다. 전쟁 인문학 저서인 ‘호모 워리어스’ 시리즈 완성이 인생 목표 이제 그에게는 자신이 개척한 전쟁 인문학 저서, 이른바 ‘호모 워리어스(Homo Warriors)’ 시리즈를 완성하는 인생 목표가 생겼다. ‘전사로 태어난 인간’이란 뜻을 가진 이 연작에는 이미 출간한 두 권도 포함된다. 전쟁과 반전쟁(反戰爭)의 관련성을 다룬 이 시리즈는 전쟁과 로고를 비롯해 몇 권의 주제를 출간한 후에 총론으로 마무리하거나, 그 반대로 총론부터 내고 각론을 출간할 생각이다. ▲ 두 번째 저서인 ‘축구 전쟁’과 세 번째 저서로 곧 발간될 ‘프로마코스’(오른쪽)의 표지. [자료제공=윤동일 교수] 그러나 그는 “언제까지 몇 권이나 출간할 것인지는 계획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만간 세 번째 책이 출간될 예정이다. 앞장서서 싸워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고대 상징인 ‘프로마코스’란 제목의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상업 로고를 비롯한 현대의 다양한 상징이 전쟁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을 펼친다. 즉 ‘전쟁 문장’이 모든 현대 상징의 뿌리가 됐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전쟁과 전혀 관련 없다고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쟁은 당신들에게 관심이 아주 많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군을 나선 그가 하는 “모든 활동은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여러 관점들 가운데 전쟁이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거나 소홀했던 사실들을 일깨워 주고 유용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 윤 교수는 본인이 직원이면서 대표인 1인 기업의 CEO다. 물론 상호나 사무실도 없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힘차게 헤쳐 나가는 작은 몸짓에 무한의 신뢰와 응원을 보내고 싶다.
    • 전역군인
    2019-05-12
  • [전역군인 인생 2막](3) 윤동일 한국열린사이버대 교수(상) 병마 이기고 ‘전쟁 인문학자’로 변신
    ▲ 2017년 39사단에서 장병들에게 강의 중인 윤동일 교수. [사진제공=윤동일 교수]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윤동일 교수, 본지와 인터뷰서 "전쟁과 인간 삶의 관련성 알리고 싶어" '전쟁 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영역 개척해 '인생 2막' 점차 꽃피워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윤동일(56) 한국열린사이버대 특임교수는 전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을 가진 학자다. 그는 전쟁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소위 ‘전쟁 인문학’ 분야를 한국에서 최초로 개척해 가는 인물이다. 전쟁 인문학이란 용어도 그의 개인적 견해이고, 아직까지 학문적으로는 정립되지 않았다. 윤동일 교수는 지난 달 말 뉴스투데이 서초동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전쟁에 대해 대중들이 부정적 이미지만 갖고 있어 전쟁과 인간 삶의 관련성을 알리고 싶었다"며 "아직 전쟁 인문학자로서 모든 면에 미흡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인생 2막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전쟁 인문학에 담긴 그의 시선은 독창적이다. 예컨대 올림픽 종목은 전투상황을 가정한 스포츠라고 주장한다. 마라톤은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하는 전령이 죽을힘을 다해 달렸던 전투에서 따왔고, 축구 또한 전쟁의 필요에 의해 고안된 군사훈련 종목이라고 한다. 강인한 체력으로 빠른 공격력을 구사하는 독일축구를 전차군단이라 칭하는데, 강력한 전차가 빠른 속도로 적의 핵심을 제압했던 독일군의 ‘전격전’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의 남다른 행적은 평소 가졌던 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2001년 학위가 없었던 그는 국방부 추천으로 헬싱키 경제대학원 MBA(경영학 석사) 과정에 늦깎이 학생이 됐다. 당시 교수나 원우로부터 “전략이나 리더십 관련 질문을 자주 받았는데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고 털어놨다. 이것이 계기가 돼 전쟁의 흔적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전쟁과 경영의 학제 간 연구가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2009년 전쟁 인문학 입문, 병마와 싸우면서 ‘인생 2막’ 방향 설정 이런 그의 관심이 싹튼 것은 2009년 경영 전문지인 ‘동아비즈니스리뷰’에 특별 기고를 하면서 시작됐다. 전쟁에서 의사소통 수단인 그림(작전상황도)을 갖고 경영에 접목하자는 내용이었는데, 반응이 좋아 후속 기고와 특강 요청을 받게 됐다. 이후 “어렵고 힘들 때 나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으로 생각해 틈만 나면 관련 연구에 몰두했다. 현직 군인으로 업무를 수행하며 연구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즐겁게 임했다. ▲ 윤동일 교수가 2009년 경영 전문지 ‘동아비즈니스리뷰’에 기고한 글. [자료제공=윤동일 교수] 2012년 국방일보의 문을 처음 두드려 ‘군대와 스포츠’란 제목의 연재를 시작했다. 현대 스포츠는 고대 올림픽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대부분이 전투와 관련된 것이라는 주장을 관련 사료와 함께 제시했다. 불과 7개월의 연재였지만 “올림픽은 그리스군의 전투방식을 반영해 전쟁을 대비했다”는 그의 주장은 상당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글은 곧바로 문체부의 스포츠 블로그에 초청돼 스포츠 전문가들과 2년 동안 연재를 이어가기도 했다. 윤 교수는 그저 제복이 좋아 군문에 들어선 대다수 군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순탄하지 않은 군 생활로 여러 위기가 닥치면서 굴곡진 여정으로 내몰렸고, 급기야 2013년에 찾아온 갑작스런 뇌경색과 합병증은 결국 그토록 좋아했던 군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는 장기간 입원하며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다가 “군인의 길은 여기서 멈추지만, 군과 후배들에게 의미 있는 읽을거리 하나를 남기겠다”고 결심한다. 퇴원 후 2014년 첫 번째 책인 ‘모든 스포츠는 전쟁에서 나왔다’ 발간 2013년 말 퇴원한 윤 교수는 남은 군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2014년 군과 후배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담아 ‘모든 스포츠는 전쟁에서 나왔다’란 책을 펴냈다. 스포츠의 전쟁 기원설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과 세부 종목연구로는 처음이었다. ▲ 윤동일 교수가 2014년 발간한 첫 번째 책(왼쪽)과 2018년 발간한 두 번째 책 표지. [사진제공=인터파크] 이 책에서 윤 교수는 방대한 사료와 연구를 통해 “고대 스포츠는 곧 나라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전시 필요한 전투기술을 평시 숙달할 수 있도록 고안된 군사훈련”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페르시아와 몽골의 민속경기 종목이 그들의 전쟁 방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인해 보기를 권하면서 “모든 스포츠는 전쟁에서 유래한 군인들의 군사훈련”이라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이 책의 발간을 위해 전쟁 인문학 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1인 출판사도 만들었다. 전쟁의 신이자 군인들의 수호신인 “아테나를 위하여”라는 그리스어 ‘아테(AΘE)’를 출판사 이름으로 정했다. 당시 일부 출판사에서 무상 인쇄 제의도 받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직접 출간하기로 결심했다. 힘들어도 자신의 뜻대로 책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건강 문제로 53세 전역, 2018년 ‘축구 전쟁’ 펴내며 전성기 돌입 이후 건강 문제 등으로 더 이상 군 생활이 어려워진 윤 교수는 2016년 53세의 나이에 중령으로 전역했다. 시력의 50퍼센트를 잃고, 장기 손상 등으로 신체능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지만 존재 이유와 같은 연구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이미 책도 한 권 펴냈고 가끔 강연 요청도 들어왔기에 그는 전역 이후 인생 2막을 자신이 하고 싶었던 전쟁 관련 연구를 마음껏 하면서 본격적인 집필활동과 강의를 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 윤동일 교수가 2017년 11월부터 주 1회 패널로 출연 중인 국군방송의 ‘국방 FM이 좋다’ 프로그램. [사진제공=국군방송] 윤 교수의 연구에 대한 집념과 노력은 국방일보 기획 연재와 국군방송 출연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2016년 ‘전쟁과 음악’이란 제목으로, 2017년 ‘방패 & 로고’란 제목으로 국방일보에 글을 기고했다, 또 2017년 11월부터 지금까지 매주 1회씩 국군방송의 ‘국방 FM이 좋다’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해 ‘전쟁과 문명’이라 주제로 얘기하고 있다. 국군정신전력원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도 3년째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2018년 윤 교수는 자신의 두 번째 책인 ‘축구 전쟁-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올림픽의 기원인 고대 스포츠 종목은 전사의 개인전투기술 숙달에는 유용하지만 집단전투를 기본으로 하는 그리스 전투방식을 충족하진 못했다”면서 “그 해답이 바로 축구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올림픽이 전사양성 종목이라면 축구는 부대훈련 종목이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 전역군인
    2019-05-06
  • [전역군인 인생 2막](2)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하) 안보교육을 넘어 국악 보급의 선구자로 자리매김
    ▲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문화사업 일환으로 군부대 공연을 지원하는 예술단 ‘군락’의 단원들과 공연 장면.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국군아리랑, 대한국군 등 전통 국악 ‘軍歌’ 창작해 교육 활용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변상문 이사장은 최근 뉴스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우리 소리 즉 국악이 대한민국의 정신이며 얼이고 혼”이라면서 “그럼에도 일본 요나누키 음계의 노래가 마치 우리 것 인양 사회에서 불리고 심지어 군가(軍歌)마저도 70% 이상이 일본풍”이라고 말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전통 국악으로 창작한 군가인 국군아리랑, 대한국군, 탈북아리랑, 통일아리랑 등을 만들어 장병 교육 및 공연에 활용하고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얼과 문화가 많이 훼손된 데다, 그 이후 학교교육을 통해서도 이를 회복시키지 못해 우리 것보다 외국 가곡 중심의 음악교육을 하는 등 아쉬움이 많다고 했다. 변 이사장은 군의 기상나팔도 미국의 남북전쟁에 악상을 둔 트럼펫 연주라면서 “우리 젊은이들이 남북전쟁 악상에 근원을 둔 나팔 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잠을 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팔 소리 대신 우리나라 북 소리를 들려주면 긍정·도전·적극적 심리를 자극해 사고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트럼펫 연주곡을 북소리로 바꿀 것을 정책 제안하여 국방부가 검토 중에 있다. 군 특성에 맞는 ‘풍물놀이’ 개발해 문체부와 군부대 교육사업 진행 변 이사장은 “2014년 10월 유네스코에 세계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된 풍물놀이가 군사훈련 모습을 전통 놀이 형식의 종합 국악으로 표현한 예술”이라면서 “군에서 풍물놀이를 생활화하면 전통문화 보존과 함께 부대 단합을 도모하고 전우애도 고양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군 특성에 맞는 풍물놀이 상품을 이미 개발해 2015년부터 문체부 산하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함께 군부대를 대상으로 풍물 교육 사업을 진행 중이다. ▲ 국방국악문화진흥회는 2015년부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군부대를 대상으로 풍물놀이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 2016년에는 서울시 주최로 일반 시민 및 학생을 대상으로 역사문화 탐방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변 이사장은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아리랑과 뽕짝, 100년을 노래하다’란 교육공연 상품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 세종연구소에서 연수 중인 고위공무원단, 국제대학교 재학생, 서울시 종로구 골목 해설사 등을 대상으로 실시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외에도, 과거 안보교육 위주였던 민방위 교육이 서울시와 행정안전부 지침에 따라 인문학 교육으로 대치되자 이에 맞는 찾아가는 인문학 공연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일제 강점기 의열투쟁사를 그린 ‘음악극 뉴스 스페셜’과 의병·독립군·광복군 이야기인 ‘주파수 1919’ 등으로 2017년부터 서울시 광진구·양천구 등을 대상으로 공연을 곁들인 민방위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 의병·독립군·광복군 이야기인 ‘주파수 1919’의 첫 장면. 12가지 인문학 공연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 다음 달 새롭게 시작하는 창작극 공연에선 ‘辯士’로 직접 출연 그는 오는 5월 11일 돈화문 국악당에서 ‘작금(昨今)의 소리, 나(我), 성(聲), 사(史)’를 공연 한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공연이다. ‘소리’를 의인화 하여 우주가 열린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소리’라는 주인공을 통해 표현한 작품이다. 출연진, 관객이 ‘소리’라는 나로 변신한 배우가 돼 함께 진행하며, 변 이사장은 변사(辯士)로 공연을 이끌어 간다. 또한 변 이사장은 평양 기생 왕수복 공연을 기획하며 통일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있다. 왕수복은 1930년대 서도소리를 하는 기생이었으나 우리 소리가 대중가요에 밀리면서 대중가수로 변신한다. 요즘 말로 10대 가수왕에 등극한 인물이다. 광복 후 월북하여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 교수 김광진과 결혼했고 북한 공훈배우로 대접 받다가 2004년에 이승을 떠났다. 그의 삶 속에 우리의 근·현대사가 농축돼 있다. 그녀의 삶을 통해 남과 북의 같은 문화가 무엇인지 조명하면서 오랜 분단의 시기를 극복하는 것이 공연 의도이다. “무대 위에 올린 사연과 풍류는 통일을 향한 민족의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 금년 5월부터 공연하는 ‘작금의 소리, 나, 성, 사’의 출연진. 좌로부터 변 이사장, 판소리꾼 최한이, 경기민요 김보성, 해금연주 윤세비.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 한반도 전쟁 역사에서 희생된 군인들 위무하는 ‘굿판’ 무대 추진 변 이사장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 역사에서 죽은 군인들의 넋을 달래는 굿판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6·25전쟁 때 죽은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군인들을 위무하는 민속 문화 행사를 전쟁기념관 마당에서 개최하는 것이 중장기 목표이자 꿈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서울 굿(국가 무형문화재 104호)을 비롯한 12개 굿판을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는 “굿이 문화재로 보일 때 유·무형 문화재의 본질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말했다.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사무실을 나올 때, 인터뷰 도중 그가 던진 한 마디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마음을 흔들었다. “모두가 대중가요를 따라갈 때, 누군가는 국악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우리의 역사가, 우리의 문화가 살아서 숨 쉬지 않을까요?”
    • 전역군인
    2019-04-21
  • [전역군인 인생 2막] (2)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상) 국악인을 ‘군통령’ 만드는 안보교육 전문가
    ▲ 1사단에서 국악공연 후 국방TV와 인터뷰 중인 변상문 이사장.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기무부대장 출신 변 이사장, 안보 강의에 국악공연 곁들인 독창적 정신교육 창안 뉴스투데이와 인터뷰서 “국악과 전통문화 알려 민족정기와 얼 살리겠다” 밝혀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국방국악문화진흥회 변상문 이사장은 ‘발상의 전환’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만큼 파격적인 ‘인생 2막’을 실현했다. 기무부대장 출신이면서 ‘국악의 세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국방과 국악의 접목을 시도했다. 국방국악문화진흥회는 2013년 12월 9일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국방부 설립 허가를 받은 교육·연구·문화공연 전문 단체이다. 법인 설립 후, 매년 국방부 사업계획에 따라 장병 정신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금년에도 국방부 및 육·해·공군의 다양한 부대에서 상당히 많은 횟수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교육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군인의 안보의식과 군인정신 고취를 위한 강의 컨텐츠를 만든 후, 이 구성에 맞는 국악과 판소리 등 전통가요를 적절히 곁들여 강의와 공연이 접목되는 독특한 형태로 실시된다. 즉 안보강사와 20대 공연자가 함께 만드는 매우 독창적인 교육 방식이어서 장병들의 호응도 좋다고 한다. ▲ 변상문 이사장과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안보강사들.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 기자가 국방국악문화진흥회를 방문한 지난 4월 초순 변상문 이사장은 금년도 강의 컨텐츠에 대한 강사들의 연구강의를 받고 있었다. 강사들은 시나리오대로 연기하는 배우처럼 강의 컨텐츠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고, 강의에 참여하는 공연자와 호흡도 맞춰야 했다. 변 이사장은 본인이 직접 시연하면서 강사의 강의 진행기술을 지도했다. 12가지 교육·공연 프로그램 개발하고 ‘군락’ 등 자체 예술단 공연 진행 또한 국방국악문화진흥회에서는 자체 개발한 12가지 교육·공연 프로그램을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각급 부대에서 이 내용을 보고 부대 특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교육을 지원하기도 한다. 안성맞춤형 눈높이 교육이다. 이외에, 자체 예술단인 ‘군락(軍樂)’은 매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최하는 문화사업에 참여하여 대대급 이하 부대를 대상으로 전통국악 공연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자체 예술단인 ‘두빛들이’와 ‘세빛들이’에서는 군 장병과 일반인 대상으로 전통국악과 대중가요를 융합한 공연도 진행한다. ▲ 예술단 ‘군락(軍樂)’의 공연에서 진도북춤을 추는 ‘군통령’ 구명서 명무. [사진제공=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와 같이 장병 정신교육의 대부분을 담당하며 단기간에 성장한 국방국악문화진흥회는 변상문 이사장이 이끌고 있다. 그는 3사관학교를 졸업(19기)하고 소위로 임관해 기무부대에서 대부분의 군 생활을 했다. 2000년 당시 35사단 기무부대장으로 재직하며 우연히 판소리를 접한 후 문화적 충격을 받아 본격적으로 우리 소리와 악기에 관심을 갖고 배우기 시작했다. 국악과 판소리에 빠져 행복한 자신 느껴...‘장금도’ 명무 만나며 결심 굳혀 국악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2012년 32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대령으로 전역할 때 육군회관에서 국악공연으로 전역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동국대 대학원에서 국악이론을 전공하며 전문지식도 넓혔지만 그 정도로는 자신 안에 내재된 국악과 판소리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국악과 판소리에 미쳐 10여년 이상 전국 팔도를 돌며 우리나라의 예인들을 만나고 그 문화 속에 빠져 지냈다. 그들과 어울려 국악의 향연에 빠질 때마다 행복한 자신을 느끼면서 국악과 함께하는 인생을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는 “한국문화재재단이 진행한 프로그램 ‘꽃 마중 길에 만난 마지막 해어화’를 통해 일제 강점기 기생조합인 권번 출신 ‘장금도’ 명무(名舞)를 만난 것이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장금도는 기생이라서 군산시 개복동에 깊이 숨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민살풀이춤(살풀이 장단에 맞춰 수건 없이 맨손으로 추는 춤) 명무가 돼 국립국악원 무대에 올랐다. 그 날 기생인 어미를 부끄럽게 여겨 의절했던 아들이 꽃다발을 들고 어미 장금도를 축하해 줬다. 50년 만에 이뤄진 엄마와 아들의 화해였다. ▲ 지난 2007년 10월 제10회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 호남 민살풀이춤을 선보이는 조갑녀(84), 장금도(79, 오른쪽) 등 두 사람이 기자간담회를 갖고 춤 인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그랬던 아들은 2년 후 월남전 참전 고엽제 후유증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어미는 그 아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기 위해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서 민살풀이춤을 췄다. 변 이사장은 “장금도 명무의 삶 자체가 대한민국의 근대사이고 현대사”라면서 “그 분의 삶을 보며 전통문화와 국악 역사에 몰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신이 잘 알고 좋아하는 일 위해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 개척 국방국악문화진흥회는 이와 같이 자기 내면의 소리에 충실히 응답했던 한 사람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든 결정체로서, 뜻을 같이 하는 지인 몇몇이 그의 결단에 힘을 보태어 탄생했다.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좋아하는 일을 위해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즉 이전에 없던 새로운 직업을 창조한 것이다. 변 이사장은 “매년 20만 명의 민간인이 군인이 되고 같은 규모의 군인이 민간인이 된다”면서 “장병들에게 국악과 전통문화를 알려 민족의 정기와 얼을 되살려 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전역 이후 돈을 버는 경제의 길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가치의 길에서 고민했다”며 “후자를 선택했으니 온 정성을 다해 제2의 인생을 살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음 편에 계속)
    • 전역군인
    2019-04-14
  • [전역군인 인생 2막] (1) 강웅식 한국이집트발전협회(KEDA) 회장(하) 이집트와 소통하며 ‘사업 분야’ 다각화
    ▲ 지난해 11월 강웅식 회장(왼쪽 두 번째)이 학술 교류가 활발히 진행 중인 BUC 대학을 방문해 엘 칼라 BUC 총장(왼쪽 네 번째) 및 총리 출신의 아브라함 마흐렙 이집트 KEDA 명예회장(오른쪽 세 번째)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KEDA]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언청이 환자 수술, 인천대-BUC 간 학생 교환 등 다양한 자선봉사와 학술 교류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한국이집트발전협회(KEDA)는 2018년 11월 가난한 이집트 장애인 환자들을 위한 진료소 설립에 현지 콥트교 교황을 통해 2만 달러를 기부했다. 또 빈곤한 농가들이 재정적 자립을 할 수 있게 친환경 양계장 2개소를 설립하는 시범사업도 실시하고 있다. 이어 한국 최고의 언청이 수술 전문의인 정필훈 전 서울대 치과대학원장이 자신을 후원하는 단체의 예산으로 언청이 환자 21명을 무료 수술하는 행사도 진행하는 등 다양한 자선봉사 활동을 추진하였다. KEDA는 또한 학술문화 교류 활동으로 2018년 12월 인천대와 카이로 바드르(BUC) 대학 간 2 2 학생교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인천대와 BUC 대학에서 각각 2년씩 교육받으면 졸업 시 양 대학으로부터 복수학위를 받는 프로그램이다. 또 인천대 의과대학 일부를 BUC 대학에 설립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또 BUC 대학 석좌교수로 위촉된 강 회장은 대학 내에 한국어과와 한국문화연구센터를 개설하기 위해 안철주 KEDA 수석부회장을 2018년 7월부터 BUC 장학생으로 아랍어과에서 수업 받게 하는 등 관련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 지난해 11월 정필훈 전 서울대 치과대학원장이 이집트 아인 샴스 치과대학에서 언청이 수술을 집도하고 환자의 상태를 살펴본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KEDA] 한국기업 선호도 높고 정부 분위기도 가장 우호적...비즈니스 성과 나오는 중 강 회장은 "이집트 정부는 산업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외국 기업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반기고 있다"면서 "그중에서도 한국 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무척 높아 엘시시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분위기가 역대 가장 우호적이다"고 말했다. 양국 산업 발전을 위해 KEDA가 지금까지 추진한 비즈니스도 서서히 성과가 나오고 있다. 2018년 11월 아랍산업화기구인 AOI(Arab Organization for industrialization)와 KEDA는 "상호 합작사업 시 각각을 창구로 한다"는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AOI는 국방 및 민수물자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평시 이사회를 통해 중요 의사결정을 하는데, 이사회 회장은 이집트 대통령이며 국무총리, 국방장관, 외교부장관, 산자부장관, 투자부장관, 방산물자부(MOMP) 장관이 상임이사다. 이집트 방산협회(AOI)와 KEDA 간 MOU 체결..."상호 합작사업 창구로" "프로젝트 제안은 AOI에서, 기술은 한국에서, 자금은 아랍국가에서 제공한다"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AOI와 KEDA의 MOU 체결식에 사우디 알나임 그룹의 회장과 AOI에 1조 달러를 투자한 바레인의 Albaraka Banking Group 대표도 참석했다. AOI를 통해 공급 시 관세 30%가 면제된다. 따라서 이집트는 물론 중동·아프리카에 수요가 많은 제품을 AOI를 통해 무관세로 공급한 후 수출하면 중국제품과도 가격 경쟁력이 있게 된다. ▲ 지난해 11월 AOI와 KEDA 간 MOU 체결식에서 강웅식 회장(오른쪽)이 서명하고 있다. [사진제공=KEDA] MOU 체결식에 참여한 6개 한국기업은 모두 AOI의 CEO와 각 기업별로 MOU를 체결했고, 이에 상응하는 후속조치를 진행 중이다. AOI와 MOU 체결로 KEDA의 모든 회원사는 향후 이집트는 물론 중동·아프리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갖게 됐다. 이집트, MENA 전초기지이자 유럽 허브로 16억 명 시장 진출할 교두보 MENA(아프리카·중동)의 전초기지이자 유럽의 허브인 이집트 정부가 투자 문호를 개방한 지금이 진출 적기라고 강조한 강 회장은 "이집트는 범아랍무역자유지대(GAFTA) 17개 회원국, 동남아프리카공동시장(COMESA) 19개 회원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있어 이 나라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3개 대륙 16억 명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 6월 엘시시 대통령은 탁월한 리더십으로 국민의 성원과 추앙을 받아 연임이 결정됐고, 현재 이집트가 IMF체제 하에 있지만 120억 달러의 IMF 자금을 4회에 걸쳐 벌써 절반이나 갚았다"고 소개하면서 "2017년에 세계 최대의 매장량을 가진 천연가스가 이집트 연안에서 발견되는 등 정부가 국민에게 제시한 비전이 마무리되는 2030년에는 세계 7대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강 회장, 한 달에 절반 이상 이집트 체류..."이집트인과 가족처럼 관계 맺어야" 강 회장의 향후 행보가 어디까지 어떻게 미칠지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다. 최근 강 회장은 한 달에 절반 이상을 이집트에 체류하며 회원(사)들과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현지 활동 사항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평소 한국이집트발전협회의 정례 연찬회 등을 통해 250여 명의 정회원과 50여개 회원사 대표들에게 "이집트와 경제 교류에 앞서 이집트인들과 가족처럼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 지난해 11월 BUC 대학을 방문한 이희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이자 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특강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KEDA] 자신보다 나라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돈보다는 사람을 우선 생각하는 강 회장은 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겼고 그런 인생관이 점차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 북한과 매우 친밀했던 이집트가 엘시시 대통령 취임 이후 2회에 걸친 한국 방문과 정상회담 등으로 친한(親韓) 국가로 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역임한 이희범 KEDA 명예회장은 "강 회장은 진짜 애국자다. 강 회장의 활동을 보면서 한 나라를 상대로 꾸준히 사랑한다는 것이 진짜 중요한 일임을 실감하며, 돈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강 회장을 존경하게 된다"면서 "이집트가 한 때 세계 최대강국이었고, 6.25 참전국이란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 전역군인
    2019-03-28
  • [전역군인 인생 2막] (1) 강웅식 한국이집트발전협회(KEDA) 회장(상) 영국 유학 시절 엘시시 대통령과의 우정이 만든 힘
    ▲ 지난 2018년 10월 이집트 아랍여성 투자그룹 초청 비즈포럼에서 영어로 연설하는 강웅식 회장. 뒤로 엘시시 대통령 사진이 담긴 대형 조형물이 보인다 [사진제공=KEDA]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1991년 영국 왕립육군대학에 유학 온 엘시시 소령과 만나 영어교육 함께 받아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2017년 10월 19일 모하메드 사이드 엘아싸르 이집트 방산물자부(MOMP) 장관이 서울 르메르디앙 호텔에 모습을 보였다.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방위산업 전시회'에 참가 차 방한 중인 그는 이집트에 진출 예정인 국내 중소기업 대표들과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디스플레이 솔루션 기업인 'KREMS', 산업용 배터리를 만드는 IBT배터리, 의료기기 제조사인 메디컬젠바디, 전기 절연체를 생산하는 고려애자 등이 그들이다. KREMS는 이미 방산물자부와 계약을 체결해 이집트에 공장을 세우고 있으며 내년부터 태블릿PC와 LED 패널 생산에 들어간다. 나머지 3개 기업은 엘아싸르 장관에게 궁금한 사항을 묻고 애로사항을 건의했다. 국내 중소기업의 이집트 진출을 주선한 사람은 강웅식(60) 한국이집트발전협회(KEDA) 회장이다. 육사 출신인 강 회장의 이집트와 인연은 압델 파타 엘시시 현 대통령을 만난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 회장은 최근 기자와 만나 “당시 육군 소령이었고, 국방부 파견으로 영국 왕립육군대학에서 1년 동안 유학하면서 엘시시 소령을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 강웅식 회장이 지난 2017년 10월 19일 서울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방한한 모하메드 사이드 엘아싸르 이집트 방산물자부 장관과 간담회를 가진 뒤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KEDA] 그는 “당시 50여 개국에서 외국군 장교들이 왔는데 이 중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16개국은 본 교육 시작 전 2개월간 별도의 영어교육을 받았다”면서 “교육장소가 학생장교들이 머무는 관사 지역에서 100km 떨어져 유일하게 차를 갖고 있던 내가 이집트의 엘시시 소령을 비롯해 오만, 요르단, 모로코 장교들을 태워 먼 거리를 통학했다”고 설명했다. 엘시시 소령과 함께 통학하면서 우정이 싹트고 가족 간에도 깊은 교분 쌓아 비록 중고차지만 강 소령은 이들을 정성껏 태우고 다녔다. 강 회장은 “날씨가 추운 날 가끔 시동이 꺼졌는데, 함께 차를 밀면서 더욱 각별한 우정이 싹텄다”고 회고했다. 이런 우정은 본 교육이 시작되면서 강 소령이 엘시시 소령의 가족을 초청해 한국 음식을 대접하고 아이들까지 같은 학교에 다니며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등 가족 간 교류로 확대되어 더욱 깊어졌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1년의 영국 유학기간이 끝나고 강 소령과 엘시시 소령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군 생활의 특성상 수시로 부대를 옮기다보니 서로에게 연락할 여유도 없이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 소령은 2013년 3월 기갑여단장직을 마치고 대령으로 전역했다. 강 회장은 “그 해 7월쯤 우연히 뉴스를 보다가 이집트에 군사혁명이 발생했고 엘시시 소령이 국방장관인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 지난 1991년 영국 유학시절 당시 엘시시 소령(오른쪽 두 번째)이 강 소령(왼쪽 두 번째) 숙소에 놀러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KEDA] 강 회장은 엘시시 장관과 연락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노력하던 중 북경 주재 이집트 대사관의 국방무관이 장관과 친구라서 그를 통하면 연락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14년 2월 엘시시 장관을 만나러 가는 이집트 국방무관 편으로 편지와 함께 23년 전 엘시시 소령 가족과 찍은 사진 10여 장을 동봉했다. 이 사진을 본 엘시시 장관은 너무 기뻐하며 “강 소령 가족을 대통령 취임 후 이집트로 초청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엘시시 장관, 연락받고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 당선된 후 강 소령 가족 초청 엘시시 대통령 요청 받아 한국 산업화 경험 이집트 도입 위해 KEDA 설립 2014년 5월 97.5%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엘시시 대통령은 취임 직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강 회장 가족을 초청했다. 취임 직전 했던 약속을 대통령이 되어 지킨 것이다. 강 회장 가족이 이집트에 도착하자 공항에는 벤츠 차량과 경호원이 나왔고, 숙소는 대통령 궁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 마련돼 있었다. 대통령 궁에 초청된 강 회장 가족은 엘시시 대통령 가족과 만찬을 하면서 옛날 얘기로 꽃을 피웠다. 이 때 강 회장 아들이 23년 전 학교에서 그린 엘시시 대통령 아들의 그림을 꺼냈다. 당시 선생님이 가장 친한 친구를 그려보라고 해서 그렸던 것을 지금까지 간직해왔다가 이번에 가져온 것이다. 엘시시 대통령과 가족들은 그 그림을 보면서 매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엘시시 대통령은 강 회장에게 "한국식 산업화 경험을 이집트에 도입하고 싶다. 한국 기업이 이집트 기업과 합작투자 형태로 진출할 수 있도록 앞장서 달라"고 요청했다. 강 회장도 엘시시 대통령을 만나러 이집트에 가면서 "기회가 주어지면 양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다"며 준비한 내용이 있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 지난 2016년 한국이집트발전협회란 이름으로 실시한 최초의 정기총회 기념사진. [사진제공=KEDA] 강 회장은 이집트에서 귀국 후 엘시시 대통령의 부탁을 실현하기 위해 2015년 8월 24일 산자부 승인하에 '한국이집트발전협회(KEDA)'를 설립했다. 전 산업자원부 장관 출신인 이희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대표적 중동 진출 기업인 봉경건설의 주봉노 회장, 총리 출신의 아브라함 마흐렙 이집트 대통령 경제고문을 명예회장으로 위촉해 중량감을 더했다. 또 협회 업무를 보다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현지에 이집트한국발전협회(회장 하산 엘 칼라)도 2017년 9월 설립했다. 강 회장은 지금까지 35차례 이집트를 방문했고, 양국의 산업 발전을 위한 가교 역할에 집중하면서 자선봉사 활동과 학술문화 교류 등 상호 우호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실이 2018년에 이르러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
    • 전역군인
    2019-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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