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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0)] 파로호·426고지·406고지 등 전쟁 격전지 걸으며 군인의 삶 되돌아봐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5일, 종주 일곱째 날이다. 오늘은 대성산 인근의 승리회관을 출발하여 봉오리를 지나 율목교, 파포리, 상서면사무소, 파포삼거리를 거쳐 파포고개를 넘어 화천읍으로 향했다. 봉오리부터는 아스팔트 포장이 잘된 461지방도였다. 구만리의 파로호 전시관을 지나 풍산리에 있는 칠성부대 상승회관까지 약 26㎞를 걸었다. 이 지역은 6·25 전쟁 당시 파로호 전투, 426고지, 406고지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새벽 5시 10분, 선식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평상시보다 좀 서둘러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출발했다. 우연히도 단원 모두가 천주교 신자여서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 내일은 일요일이니 미사에 참석하자고 의견 일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10여분 정도 걸으니 8305부대 위병소가 보였다. 32년 전 필자가 연대장님께 전입신고를 했던 부대다. 그리고 어제 위문 왔던 선임하사 윤현준님을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부대 가까이에 있던 군 관사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 같았다. 그 당시 선임하사의 집은 군 관사였는데, 소대장 근무 시절 명절이나 생일 때 초대받아 식사 대접을 받은 기억이 났다. 어제 윤현준님께 그 이야기를 하니 정작 본인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낯선 환경에서 부대 음식만 먹다가 정성이 가득 담긴 따뜻한 음식을 대접받은 특별한 경험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일상생활이었기 때문에 기억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지금과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열악했다. 병사들 내무반에는 벽돌과 진흙으로 만든 뻬치카라는 난방시설이 있었다. 석탄가루와 진흙을 섞어 만든 혼합물을 뻬치카에 태워 내무반을 따뜻하게 유지했다. 이를 전담 관리하는 ‘뻬당’(뻬치카 당번병)으로 책임감 있는 상병 또는 병장이 임명됐다. 뻬당은 밤새 뻬치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봐야 했지만 따뜻한 장소에 항상 있을 수 있어 병사들은 좋아했다. 그리고 장교들이 묵었던 독신자 숙소(BOQ)는 나무를 때서 난방을 했다. 저녁에 소대원이 방 바닥을 따뜻하게 데워 놓으면 온기를 느끼며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이른 새벽이 되면 방바닥의 온기는 사라지고 방안의 마실 물도 얼어 있었다. 당시는 목욕탕도 귀해 목욕을 하려면 인근 읍내에 나가야 했다. 근무가 없는 일요일에 가끔 나가 소주 한 잔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당시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다. 봉오리 삼거리를 걸으면서 야외기동훈련, 연대전투단 훈련 등 타 지역에서 장기간 훈련을 하고 부대 복귀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봉오리 지역을 행군하며 지나갈 때 길가의 지역 주민들로부터 따뜻한 격려도 받고 음료수도 나눠줘 마신 기억이 났다. 그때는 지역주민과 군의 관계가 상당히 인간적이었고 훈훈했던 것 같다. 4시간 20분 동안 조금 빠르게 걸었다. 율목교, 파포리, 상서면사무소, 파포삼거리를 지나 파포고개를 넘어 화천읍으로 향했다. 모두들 미사를 드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지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걸어서 오전 11시에 시작하는 교중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후 성당 앞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휴식도 취하고, 친절한 교우님들이 주시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커피도 마셨다. 성당 근처에 있는 성원식당에서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오랫동안 편히 쉬었다. 자전거를 타고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식당에서 만나 즐겁고 가벼운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들은 춘천을 출발하여 화천까지 왔고 평화의 댐까지 가는 중이라고 했다. 이어 구만리에 있는 파로호 전시관을 지나 풍산리에 있는 칠성부대 상승회관까지 걸어 이날 종주를 마쳤다. 6·25 전쟁 시 파로호, 426고지, 406고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파로호는 1944년 5월에 화천댐이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호수이며 건설 당시 이름은 ‘화천호’였으며, 상류에는 평화의 댐이 있다. 6·25전쟁 시 용문산 전투에서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의 공세를 막아낸 뒤 도망가는 중공군들을 파로호까지 추격하여 괴멸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기념해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깨뜨린 호수)로 개명했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파로호는 1945년 38선에 의해 북한령이 되었다가 휴전협정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7월 20일에 금성천 및 화천댐 근처 425고지, 406고지 전투 결과 승리로 화천댐을 포함한 호수 전체가 우리 땅이 됐다. 그 결과 지금도 우리에게 풍부한 물과 전기를 공급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북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한 홍수 피해를 조절할 수도 있게 됐다. 칠성전망대에서는 화천 북방 철책선 약 1.2㎞ 지점의 425고지와 406고지를 볼 수 있다. 그 지역에서는 6·25전쟁 막바지에 아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1953년 7월 휴전을 앞두고 북한의 김일성은 “화천 발전소만은 넘겨줄 수 없다”며 탈환을 지시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화천 발전소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절대 사수 명령을 내리고 1953년 7월 19일 2군단 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중공군은 1953년 7월 20∼22일 425고지를 계속 공격했다. 인해전술을 내세운 중공군의 공격에 아군은 백병전을 불사하며 싸워 고지를 지켰다. 그리고 7월 23∼24일 406고지의 3연대 6중대가 중공군의 마지막 공격을 격퇴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고지를 지켜낸 상태에서 휴전 협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규학 6중대장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규학 중대장은 전사하기 며칠 전 아내에게 애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를 썼다. 그가 쓴 편지에는 “그리운 금원씨 날이 밝으면 어떤 임무가 주어질지 모르지만 이 밤 당신 꿈을 꾸리다”라는 애틋한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20년 구순이 된 그의 아내 정금원 할머니는 남편이 전장에서 보낸 편지는 받았으나 오지 못한 남편을 아직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매일경제, 2020. 06.14, 정전 이틀 전 전사한 남편을 기다리는 구순의 아내) 이 편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한 군인과 그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애절함과 슬픔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 때문에 현재 우리가 편안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전역 이후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할지 자문하게 됐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갈망하며 칠성부대 상승회관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하루도 더운 날씨였지만 계획대로 무사히 종주를 마쳤고, 천주교 신자인 단원들이 함께 주일미사까지 드릴 수 있어서 행운이었고 은총을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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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4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9)] 민통선 지역 내 6·25전쟁 격전지 걸으며 소대장 근무 시절 소환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4일, 종주를 시작한지 여섯째 날이다. 오늘은 육단리에 위치한 필승회관을 출발하여 사곡리를 지나 용암리에 있는 민통선 출입통제초소인 용암초소를 통과 후 DMZ 종주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대성산 민통선 지역인 말고개, 중고개를 넘어 봉오리에 있는 승리회관까지 약 25㎞ 거리를 걸었다. 현재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이 군사 분계선(MDL, Military Demarcayion Line) 또는 휴전선이라고 불리는 선으로 나누어져 있다. MDL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 지역에는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돼 있고, MDL 남쪽 5∼10㎞에 이르는 공간은 군사작전 등의 목적으로 민간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이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이라고 부른다. 오늘 구간에는 단원 중 두 번째로 연장자인 이창조님이 49년 전인 1964년 7월에 37연대 6중대 1소대장으로 부임했던 부대가 있고, 필자가 32년 전인 1981년 7월에 50연대 2대대 통신소대장으로 부임한 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종주단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필승회관을 출발하여 사곡리를 거처 용암초소로 향했다. 도로 좌우측 풍경은 30여년전 모습과 흡사했고, 승리 전망대 5㎞라는 이정표도 보였다. 15사단의 별칭인 승리부대가 떠올라 필자는 가슴이 뛰었다. 15사단은 6·25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통 있는 부대이다. 1953년 강원도 고성군 351고지에 배치돼 북한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했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부대’란 의미로 ‘승리 부대’라는 별칭을 하사했다고 한다. 민통선 지역은 민간인도 신분이 확인되면 차량에 탑승한 상태로 출입 및 통과가 가능하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 걷기 위해서는 별도의 허가가 필요했다. 용암초소에서 출입 허가를 받은 후 말고개를 향해 걸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도로에서 DMZ까지 거리는 약 2-3㎞다. 길 좌측에는 삼천봉, 승리 전망대, 천불봉, 승암고개 등 많은 고지가 있고 길 우측에는 대성산이 있으며 그 사이에 재건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재건촌 입구에는 커다란 기념비와 조그만 가게가 있었다. 우리는 가게 앞에 있는 파라솔에 앉아 시원한 음료도 마시고 지역 주민으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으며 휴식을 취했다. 이 기념비에는 1968년 8월 30일 민통선 북방 전략촌 건설계획과 유휴 농지 개발, 식량증산 목적으로 구호주택 50호에 50세대가 입주하여 농경지를 분배(1주택 2헥타르)받아 삶의 터를 마련한 마현 2리의 개척 역사가 기록돼 있었다. 기념비에는 또 “한국전쟁 참화로 지뢰가 뿌려진 황무지에서 우리들 아버지,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호미와 삽을 들었고 밤에는 총을 들고 삶의 희망을 지켜왔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눈물과 땀을 뿌렸던 사람들은 마현 2리 역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고 그 역사를 거울삼아 후손들이 뿌리내리고 희망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라며 험난한 세월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전하고자 비를 세웠다고 적혀 있었다. 재건촌을 출발하여 5번 국도를 따라 걷기 시작해 말고개 초입에 들어섰다. 말고개는 철원군 근남면과 화천군 상서면을 잇는 해발 690미터의 고개다. 보통 고개 이름에서 말이라는 단어는 큰 고개를 의미한다. 이곳 말고개 역시 고개가 크다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으로 짐작된다. 옛날 근무했던 시절에는 차량이 지나면 흙먼지를 일으키는 도로였으나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다. 조금 걷다 보니 승암고개가 보였다. 승암고개는 6.25전쟁 당시 그리스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장소다. 1953년 7월 정전 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중공군은 7월 20일부터 마현리 북쪽에 있는 승암고개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미군에 배속된 그리스 왕립 헬레닉(Hellenic) 대대와 스파르타 대대는 정전 협정이 맺어지기 하루 전인 1953년 7월 26일까지 승암고개를 성공적으로 사수했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총알이 떨어진 극한 상황에서 고대 스파르타 전사들의 후예답게 소총에 대검을 장착한 후 용맹스럽게 돌진하여 비록 19명이 전사했지만 육탄전으로 승암고개를 사수했다. 그 당시 그리스는 2차 세계대전으로 국토가 피폐해진데다 1949년까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 내전이 벌어져 6·25전쟁 참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현재 그리스군의 6·25전쟁 참전기념비는 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에 있다. 좀 더 걷다 보니 필자가 근무했던 필승대대가 보이면서 1983년 대대에 근무할 때 발생했던 가슴 아픈 사건이 기억났다. 그 때도 비무장지대 안에는 GP가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우리 부대는 DMZ 출입을 통제하는 통문에서 GP까지 차량이 통행할 도로를 만들고 있었다. 한 여름 어느 날 오후 나는 대대 상황실에서 근무 중 긴급한 상황을 보고받았다. “DMZ에서 지뢰가 폭발하여 다수 인원이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환자 수송을 위해 긴급 헬기를 요청하고 급하게 지프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현장을 구체적으로 확인해보니 도로개설공사 현장에서 땅을 파던 불도저가 6·25전쟁 시 매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차 지뢰의 뇌관을 눌러 터진 것으로 확인됐다. 지뢰 파편들이 공사현장 경계 작전을 수행하던 소대장과 병사들을 피범벅으로 만들어 의식을 잃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을 들것으로 옮기고 급하게 날아온 헬기에 실어 후송했다. 소대장은 나와 같은 중대에서 생활했던 아주 친한 육사 동기생이었다. 헬기에 실려 후송되는 동기생과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치료를 잘 받아서인지 인명 피해는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 동기생은 그 후 약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헬기 추락사고로 운명했다.) 말고개는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과 화천군 상서면을 연결한다. 대성산 동쪽 사면은 마현리이며 남쪽 사면에서는 사동천이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북서쪽 사면에서는 한탄강의 지류인 남대천이 발원한다. 대성산은 6·25전쟁 초기 아주 치열하게 전투가 있었던 대표적인 지역이다. 국군은 1951년 6월 9일 대성산지역에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대성산 1042고지와 신월동, 865고지를 탈환했다. 이후 1951년 6월 14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승암고개, 삼천봉, 비조봉 일대까지 진출하여 김화지역을 사수했다. 국군이 대성산을 사수함으로써 중공군의 공격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대성산지구 전투에 대한 장병들의 전공을 높이고 넋을 추모하고자 15사단 8305부대와 화천군이 1983년 10월 1일 대성산지구 전적비를 세웠다. 우리 일행이 대성산 중턱의 말고개 정상에 거의 도착 할 때 어제 통화했던 옛 전우인 소대 선임하사의 전화를 받았다. ‘근처에 왔는데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고 물어본다. 어제 전화를 받고 급하게 일정을 조정하여 이 근처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고개 정상 근처에서 감격적으로 해후했다. 32년 전 연대본부에서 대대까지 필자를 오토바이로 모시러 왔던 윤현준님이 멀리 일산에서 새벽에 출발해 4륜 차량을 끌고 위문을 온 것이다. 종주계획을 수립할 때 대성산 정상에도 올라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피로도와 시간 때문에 정상에 오르는 것을 계획에서 제외했다. 그런데 지금은 4륜 차량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부대와 협조한 후 4륜 차량을 타고 대성산 정상에 올라갔다. 눈앞에 전개되는 마현 1,2리 정착촌 마을, 비무장 지대 DMZ와 그 너머 북녘 땅 오성산도 볼 수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와 전적비 앞 잔디에 돗자리를 펴고 윤현준님이 준비해온 김밥과 떡, 막걸리로 점심 파티를 하며 회포를 풀었다. 우리의 이런 정경을 본 사람은 가끔 지나가는 차량에 탑승한 군인들 몇 명 뿐이었다. 마침 전적비 주변 환경 미화를 하던 병사들의 도움으로 우리 전체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점심 파티 후 우리는 필자가 32년 전에 근무했던 부대를 방문했다. 이미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서 옛날 건물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사람 손이 닿는 것은 다 바뀐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던 지형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함께 근무했던 끈끈한 전우애는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휴일 부대를 책임지고 있는 당직사령과 기념촬영도 했다. 군 전역을 약 1달 정도 앞둔 현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내가 초임지에서 윤현준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가식이 없었고 소탈했으며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군 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소대장인 필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고마운 사람이다. 군 생활을 하면서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문제가 된 경우를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러나 나는 부사관과 갈등이 전혀 없이 30여년 동안 생활해온 것 같다. 어쩌면 처음 부임지에서 그와 생활하면서 신분에 대한 벽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인간적 만남을 바탕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4륜 차량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중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봉오리를 지나 49년 전 이창조 소위가 처음 부임하여 근무했던 부대도 잠깐 방문했다. 그 부대는 이외수 문학관이 있는 다목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숙소인 봉오리에 있는 필승회관에는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했다. 그리고 저녁은 윤현준님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DMZ 종주 엠블럼을 감사의 표시로 전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불원천리를 마다않고 달려와 격려해준 윤현준님께 이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7-06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8)] 6·25 전쟁 격전지 걸으면서 군 복지시설 혜택도 누려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오늘은 8월 23일, 종주 5일째다. 문혜리의 군 숙소인 승포회관을 출발하여 지경리, 김화, ‘저격능선 전투 전적비’, 와수리를 거쳐 육단리에 있는 필승회관까지 걸었다. 약 18㎞로 이번 종주 기간 중 하루에 걷는 거리가 가장 짧은 구간이다. 거리가 짧은 이유는 다음 날 걸어야 할 지역이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숙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전 6시 승포회관을 출발, 호국로라는 이정표를 보며 43번 국도를 따라 지경리, 학포리를 통과하여 김화로 향했다. 어제 한사모 회원님들의 격려 덕분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더구나 천근같이 무거운 배낭들을 승포회관 관리관이 한사모 회장님이 당부한대로 오늘 숙소인 육단리 필승회관까지 옮겨 주기로 약속해 배낭 없이 나설 수 있었다. 길 가장자리와 부대 입구 등 여기저기에 백골이 그려진 모습을 보니 아마도 3사단 지역인 것 같았다. 잠자리 비행기가 일 열로 지나가는 모습도 보았고 ‘멸북’ ‘통일’이라는 구호가 적힌 도로 장벽도 통과했다. 점심은 종주 구간에 있는 철원반점에서 간짜장을 먹었고, 식사 후 식당 안방을 차지하고 잠시 쉬었다. 지경리를 지나고 쉬리공원에서 휴식한 후 조그마한 예쁜 다리를 건너 학포리를 거쳐 와수리에 도착했다. 학포리에는 ‘저격능선 전투’(Battle of Sniper Ridge)를 기념하는 전적비가 산등성이에 우뚝 솟아 있다. 이곳에서는 남대천 건너에 있는 저격능선을 볼 수 있다. 김화 북방 약 7㎞ 지점의 이 능선은 해발 고도가 580미터이고 능선 상부의 면적은 약 1㎢ 정도다. 오성산으로 접근할 수 있는 주요 지점이며 전선 고착 시 전방의 전초 진지를 차지하기 위해 중요한 지역이었다. 6·25전쟁 당시 이 능선에서 미군이 중공군 저격병들로부터 여러 번 저격을 받아 인명 피해를 입으면서 미군들이 저격 능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유래가 전해진다. 그 후 1952년 10월 14일부터 42일간 저격 능선에서 중공군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저격능선 전투’라고 부르며 그 기념비가 있는 것이다.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김화-금성 간 도로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휴전 회담에서 군사분계선 설정 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저격능선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최대 격전으로 평가된다. 와수리와 숙소가 있는 육단리를 지나며 발바닥에 문제가 생긴 단원의 치료약을 사려고 약국을 찾았다. 그런데 두 군데 모두 문이 닫혀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후 필승회관 관리관과 상의하여 가까이 위치한 필승부대에 의료 지원을 요청했다. 대민지원을 나온 군의관은 그 단원의 발바닥을 정성껏 소독하며 아주 친절하게 치료했다. 발바닥이 악화된 이유가 며칠간의 여정이었다는 말을 들은 군의관은 한편 놀라면서도 환자의 나이가 70대 중반이라는 사실에 감탄하며 무리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돌아갔다. 아직 현역 대령 신분인 필자가 단장을 맡다보니 이런 일이 있을 때 군부대의 협조를 얻기 쉬운 장점도 있었다. 저녁은 필승회관에서 질 좋고 저렴한 삼겹살에 반주를 곁들여 배불리 먹었다. 단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아주 훌륭한 식사라며 흡족해했다. 군 복지시설을 사용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단원님들은 이번 종주 간에 군 복지시설을 이용할 기회를 가진 것이 아주 좋은 경험이라며 즐거워했다. 내일 종주할 코스에는 필자가 1981년 소위로 임관한 후 처음 부임했던 부대가 있다. 그 당시 필승부대로 불리는 사단 사령부에서 전입신고를 하고 연대를 거쳐 대대에 도착할 때까지 기억과 대대에서 근무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특히 화천군 명월리에 위치한 사단 사령부를 출발하여 연대본부까지 이동할 때가 기억났다. 더불백 하나를 들고 덮개가 덮혀진 트럭 뒤편에 앉아서, 달리는 차량이 만들어내는 뿌연 흙 먼지를 바라보며 꽤 긴 시간을 이동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던 긴장된 시간이었다. 연대 본부에서 5Km정도 떨어져 있는 대대까지 가는 길 좌우측 철조망에 붙어 있는 ‘미확인 지뢰지대’ 라고 씌어져있는 팻말은 신임 소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대대에서 통신소대장으로 1년 정도 근무하며 전투진지가 있는 대성산을 수십 번도 더 올라가곤 했다. 당시 소대 선임하사가 불현 듯 생각나서 전화했다. “DMZ 종주 5일째로 내일 말고개, 중고개를 넘어 옛날 함께 근무했던 소대를 잠깐 방문하려고 한다”고 하자 반가워하면서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는 핀잔도 들었다. 잠자리에 누우니 수많은 단어들과 수많은 정겨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육단리, 다목리, 삼거리, 대성산, 적근산, 삼천봉, 말고개, 중고개, 실내 고개, 수피령, 봉오리, 민촌……. 그리고 대성 산의 좋은 기운과 맑은 공기를 느끼면서 편하게 잠이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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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30
  • SA들의 임관 40주년 그림 전시회 ③송상건
    [시규리티팩트=강철군 기자] 육군사관학교 37기는 현재는 시행되고 있지 않지만 유신 사무관제도가 처음으로 시작된 해에 입교하여 당시 40대1일에 가까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되었다. 또한 대통령 아들과 동기생이라 눈에 보이지 않게 혹독한 선배들의 제재와 기합 속에서 생도생활을 보내 후배들에게는 기합을 적게 주는 온순한 선배기로 인식되었다. 이제 임관 40주년이 되고 4성장군을 3명이나 배출하며 공무원 사회의 정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지금은 모두 퇴역하고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작금의 코로나-19 위기 속에 성대한 임관 40주년행사를 못하는 대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생도시절 미술부 출신들이 그림전시회로 조촐하게 준비한 ’온라인 전시회‘가 6월28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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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30
  • SA들의 임관 40주년 그림 전시회 ②신대균
    [시규리티팩트=강철군 기자] 육군사관학교 37기는 현재는 시행되고 있지 않지만 유신 사무관제도가 처음으로 시작된 해에 입교하여 당시 40대1일에 가까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되었다. 또한 대통령 아들과 동기생이라 눈에 보이지 않게 혹독한 선배들의 제재와 기합 속에서 생도생활을 보내 후배들에게는 기합을 적게 주는 온순한 선배기로 인식되었다. 이제 임관 40주년이 되고 4성장군을 3명이나 배출하며 공무원 사회의 정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지금은 모두 퇴역하고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작금의 코로나-19 위기 속에 성대한 임관 40주년행사를 못하는 대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생도시절 미술부 출신들이 그림전시회로 조촐하게 준비한 ’온라인 전시회‘가 6월28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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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9
  • SA들의 임관 40주년 그림 전시회 ①김희철
    [시큐리티팩트=강철군 기자] 육군사관학교 37기는 현재는 시행되고 있지 않지만 유신 사무관제도가 처음으로 시작된 해에 입교하여 당시 40대1일에 가까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되었다. 또한 대통령 아들과 동기생이라 눈에 보이지 않게 혹독한 선배들의 제재와 기합 속에서 생도생활을 보내 후배들에게는 기합을 적게 주는 온순한 선배기로 인식되었다. 이제 임관 40주년이 되고 4성장군을 3명이나 배출하며 공무원 사회의 정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지금은 모두 퇴역하고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작금의 코로나-19 위기 속에 성대한 임관 40주년행사를 못하는 대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생도시절 미술부 출신들이 그림전시회로 조촐하게 준비한 ’온라인 전시회‘가 6월28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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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8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7)] 4일차, 전쟁의 상흔 느끼며 지인들의 도움으로 발바닥 상처와 폭염 극복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종주 4일째인 8월 22일이다. 오늘은 연천군 신탄리 역 근처의 고대산 가든을 출발하여 철원군에 있는 백마고지 입구, 노동당사, 고석정을 지나 한탄 대교를 건너 철원군 문혜리에 있는 승포회관까지 약 32㎞를 걸었다. 오전 5시 10분에 어제 저녁 남겨둔 오리백숙과 찰밥으로 든든한 아침 식사를 했다. 신탄리 역에서 백마고지 역까지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기차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기차 출발시간이 7시 46분이어서 커피도 한 잔 마신 후 여유롭게 숙소를 떠났다. 약 7분 만에 8㎞ 떨어진 백마고지 역까지 1,000원(경로 500원)의 요금만 내면 데려다 주는 기차가 신기했다. 백마고지 역부터 걷기 시작했다. 백마고지로 가는 길 입구의 월정리 초소에서 근무 중인 초병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단원들끼리 백마고지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었다. 백마고지(白馬高地)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는 야산이다. 백마가 누워 있는 형상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6·25전쟁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백마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발 395미터의 고지는 열흘 동안 주인이 스물네 번이나 바뀌었고 사상자도 14,000명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9사단은 이때부터 백마부대라고 불리게 됐다. 백마고지와 관련 있는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Zone)’라는 말은 6·25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이던 제임스 밴플리트가 ‘적이 전선의 생명선으로 사수하려는 아이언 트라이앵글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의 삼각지대는 철원, 평강, 김화를 잇는 축을 말하는데 중부전선의 핵심으로 철원평야가 그 가운데 위치한다. 월정리 입구 초소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철원 학 저수지 옆을 걸었다. 길을 따라 좌우측에 설치된 철조망에는 빨강색 바탕에 노란색 글씨의 ‘미확인 지뢰’라는 경고판이 걸려 있고 대전차 장애물도 남아 있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백마고지 입구를 지나 ‘금강산 가는 길’을 따라 약 30분 걸어가니 노동당사가 나왔다. 철원 지역은 8·15일 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한 땅이었다. 노동당사는 1946년 초 철원군 노동당이 시공하여 그해 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노동당사는 공산치하에서 반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잡혀와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했던 곳이어서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 줄 등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은 건물이 낡고 붕괴 위험이 있어 밖에서만 볼 수 있다. 건물 곳곳마다 6·25전쟁 당시 새겨진 총탄과 포탄 자국이 남아 있어 전쟁이 주는 상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노동당사 앞에서 휴식 중에 재활용 쓰레기 분리 작업을 하는 분들이 잘 익은 수박과 시원한 캔 음료를 주었다. 그분들의 훈훈한 마음이 느껴져 잠시나마 목마름과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정오쯤 동송읍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어제 발바닥에 문제가 생긴 단원 때문에 신발 구매를 부탁드렸던 지인이 보낸 일행과 만났다. 새 신발과 함께 치료약까지 덤으로 보내줘 너무 고마웠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동송읍 입구에서는 한사모 회장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한밤의 사진편지를 사랑하는 모임’(약칭 한사모)은 매주 일요일 오후에 모여서 걷는 모임으로 남·여 회원 100여명의 평균 나이는 70이 넘는다. 당시 필자는 55세였는데, 100세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할지 보여주는 선구자 같은 분들로 생각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약 10여분을 함께 걸어 근사한 식당으로 갔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폭염에 주의하라는 TV 방송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상황인데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낮 시간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고 있을 뿐 아니라 한 단원은 발바닥 때문에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사모 회장님은 “자네는 현역 대령이고 나이도 젊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일 모래 면 80살이 될 사람들인데 이렇게 강행군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면서 안전을 신신당부하셨다. 그리고 “오늘만은 특별히 배낭을 숙소에 미리 갖다 놓겠다”며 우리들의 배낭을 자신의 차에 싣고 오늘 저녁 묵을 숙소를 향해 떠나셨다. 우리는 식당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배낭 없이 가볍게 한탄강을 바라보며 걸었다. 한탄강은 평균 하폭 약 60미터에 길이가 110㎞에 이르며, 강 유역이 현무암지대로서 다른 하천과 달리 깊이 20-30m의 협곡이 형성돼 있다. 굽이굽이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비경을 갖고 있고 사시사철 맑은 물과 풍부한 수량으로 각종 민물고기의 서식처일 뿐만 아니라 철원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젖줄이기도하다. 고석정은 한탄강 중류에 있는데 철원 8경의 하나로 정자와 그 일대의 현무암 계곡을 총칭한다. 강 중앙에 위치한 10미터 높이의 기암봉 동굴에는 임꺽정이 은신했었다고 전해진다. 승일교는 한탄강 중류 지점에 있는 폭 6m, 길이 120m의 다리로 이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6·25전쟁 전에 김일성이 만들기 시작했으나 그 후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완성돼 이승만 대통령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합친 승일교란 얘기가 있고, 다른 하나는 6·25전쟁 당시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다가 전사한 박승일 대령을 기리기 위하여 명명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데, 현재는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오늘은 기차도 타고 신발도 바꾸고 격려도 받은 특별한 날이었다. 멀리 서울에서 방문해 주신 한사모 함수곤 회장님과 박현자·김영신·윤정자 회원님께 특히 감사했다. 덕분에 좋은 음식 잘 먹고 잘 쉬었으며, 무거운 배낭을 숙소까지 운반해 주셔서 쉽게 걸었다. 그리고 숙소인 군 복지회관 근무자에게 다음 날 숙소(육단리 승리회관)까지 배낭 운반을 당부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오늘 하루동안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여정에 관심을 갖는 분들의 우려도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DMZ 종주는 지금 진행 중이고 기온, 나이, 피로도 축적 등을 포함해서 여러 난관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단장으로서 무사히 목적지까지 걸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되 새겼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6-23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6)] 3일차, 6·25 전쟁 상흔과 남침땅굴 보며 ‘평화’ 기원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오늘은 종주 3일째다. 연천 해돋이 펜션을 출발, 임진강 서측 둑을 따라 북삼교를 지나 아스팔트 도로인 지방도, 국도를 주로 걸어 신탄리역 근처의 고대산 가든까지 약 27Km 정도를 종주한다. 오늘 걷는 지역에는 필리핀 6.25전쟁 참전비, 제1땅굴, 필승교, 태풍 전망대 등이 위치하고 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5시 10분쯤 식사하고 6시에 숙소였던 펜션을 출발했다. 옛날 고구려 군사들이 오르내리며 훈련했을 것으로 보이는 무등 보루에 오르기 위해 땀 흘리며 걸었다. 높지 않은 야산이지만 나무는 울창했고 길은 잘 단장돼 있었다. 보루에 올라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생각했다. 보루를 내려가 군부대를 지나 강 자락을 따라 걸었다. 북삼삼거리를 거쳐 북삼교를 건너 강변에 나 있는 평화누리 길을 한참 걸은 후 마을로 들어갔다. ‘장병 상회’ 앞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수박 아이스 바를 사먹고 있는데, 땀에 젖은 우리를 본 동네 아주머니가 냉수를 통째로 가져다주며 조금 더 가면 식당이 있다는 정보도 알려주었다. 아주머니가 알려준 ‘평화 식당’에서 점심으로 콩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넓은 방에서 식사하고 누워서 조금 쉬다가 나왔지만 오후 햇볕이 너무 강해 걷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뜨거운 열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인지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한 걸음씩 옮기는 발은 천근짜리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무거웠다. 어쩌면 3일 동안 누적된 피로가 걷기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6·25 전쟁터에서 선배들이 겪었을 수많은 고난과 지금 전선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후배들의 고통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신탄리역 근처의 고대산 가든에서 여장을 푼 후 한방 오리백숙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빨래까지 마친 후 오늘 코스를 되돌아봤다. 오늘 코스에는 필리핀 참전기념비가 있었다. 6.25전쟁 당시 필리핀은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파병한 나라로 7148명이 참전하여 112명이 전사했으며 299명이 부상당했고 16명이 실종됐다. 특히 1951년 4월 22일 경기도 율동전투에서 중공군 1개 대대를 격퇴해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 승리로 미 제3사단은 연천에서 철수할 수 있었고, 이를 기념하여 연천군은 1966년 4월 22일 필리핀 참전비를 건립했다. 지난해 9월 주한 필리핀 대사는 ‘6·25전쟁 참전 70주년 기념행사’에서 “필리핀은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한국의 형제들과 나란히 싸울 것”이라며 양국의 ‘형제애’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6·25전쟁을 잊힌 전쟁이라고 하지만 필리핀 젊은이들은 역사 시간에 배우면서 참전용사들의 용맹과 영웅적 활약을 잊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오늘 걸으면서 필자는 평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군 복무 동안 경험했던 여러 번의 긴장 상태와 직접 투입돼 임무를 수행했던 국지도발 작전도 상기하면서 후손들이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또 한국이 6·25전쟁 참전국에 대한 지속적인 보은과 함께 그들의 번영과 참전용사 후손들까지 지원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오늘 걸은 코스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이 지역에는 제1땅굴, 필승교, 태풍전망대 등이 있어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장을 걷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1땅굴은 DMZ 지하에 굴착된 북한의 남침용 땅굴로 7.4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2년 후인 1974년 연천군 고랑포에서 발견됐다. 이후 철원, 파주, 양구에서도 발견돼 전 전선에 걸쳐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존재한 사실이 드러났다. 필승교는 북한이 황강 댐 방류를 할 경우 방류 상황이 맨 처음 관측되는 지점으로 임진강 홍수를 조절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점이며, 한 때 무장간첩들이 침투했던 통로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군사분계선에서 800m 떨어진 태풍전망대는 임진강과 북한의 농장, 댐 등을 볼 수 있고, 6.25전쟁 때 격전지였던 베티 고지, 노리 고지 등도 보인다. 오늘은 한 방에서 4명이 합숙을 하는데, 한 단원의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있는 것을 보았다. 필자는 군에서 장거리 행군을 하면서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물집이 생기면 걸을 때 많은 불편함을 주고 특히 물집이 터졌을 때 느끼는 고통이 매우 크다는 것과 물집이 터진 상태에서 걷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단원의 발바닥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장거리 걷기를 하려면 발이 자유롭게 움직일 정도로 큰 신발을 착용해야 한다. 따라서 신발을 바꾸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민가가 거의 없는 지역이니 신발을 살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내일 종주 코스에서 제일 가까운 부대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신발을 구매하여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새 신발을 신으면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위험은 감수하며 신발을 바꿔보기로 했다. 이제 겨우 3일을 걸었지만 단원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지체 없이 걷기를 중단해야 한다. 어려운 선택의 시간이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100㎞, 250㎞ 등 여러 번의 장거리 걷기를 하며 ‘인간이 갖고 있는 자가 치유 능력’을 경험했던 터라 ‘좋아질 거야’라는 믿음을 갖고 내일 전개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어렵게 잠을 청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6-15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5)] 2일차, 길 잘못 들어서는 우여곡절 겪으며 장거리 걸어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기상 알람을 4시 반에 맞추어 놓았지만 책임감과 긴장감 때문인지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깨어났다. 아침은 전 회원들이 방바닥에 둘러앉아 컵라면과 오곡 가루를 물에 타서 마셨다. 하루 종일 걷는 운동량에 비해서 먹는 것이 너무 부실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황포돛배 마을을 출발하여 비룡대교를 건너 평화누리길을 따라서 구미교, 숭의전, 당포성, 주사절리, 임진교, 군남 홍수조절지 그리고 왕정리를 지나 무등리까지 걷는다. 총 거리는 약 35Km로 첫날 걸었던 24㎞보다 비교적 장거리이다. 중간에 마땅한 숙소가 없어 종주 코스를 이렇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 6시에 출발했다. 안개가 끼어있는 날씨이지만 주변이 잠들어 있는 이른 시간에 활동하는 느낌은 왠지 좋다. 어둠이 걷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고, 밝아오는 햇살을 마중하는 것도 좋으며 대지의 힘을 두 발로 받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도 좋다. 4명이 숙박한 첫 숙소를 떠나는 것이어서 출발하기 전에 기념사진도 한 장 남겼다. 비룡대교를 건너 평화누리길로 접어들었다. 평화누리길은 임진강 뚝 그리고 임진강 물길 옆으로 걷는 소로가 연결되어 있는 길이다. 물길 옆 소로의 일부 지역은 장마철에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면 도로 위로 물이 흐르듯이 강물이 넘어와 흐르는 곳도 있었다. 한 단원이 앞에서 길을 개척했는데 평화누리길 표지를 찾지 못해 되돌아오기도 했다. 어떤 곳에는 이정표가 거꾸로 매달려있어 이정표를 바로 세워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1시간 정도 걷기 꾼들이 말하는 알바(다른 길로 헤매다가 계획된 길로 되돌아오는 행위)를 했다. 조기에 인지해 다행스러웠지만 다시 되돌아 올 때까지 시간과 체력을 허비하여 심리적으로도 상쾌하지 않았다. 나는 단원들에게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오늘 걷는 코스가 장거리인데다 기온도 매우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무그늘에서 쉬거나 햇볕 쨍쨍 내리쬐는 강 뚝에서 쉬기도 하고 지나는 축대 옆에 만들어진 그늘에서 쉬기도 했다. 뚝 길가에 있는 밭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식물들이 무성했다. 밭에는 탐스런 호박도 보였다. 한 단원이 강 뚝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그 호박 참 먹음직스럽게 잘 자랐네’라고 혼자 말을 했다. 그때 바로 뚝 아래에서 ‘그 호박, 임자 있으니 따가지 말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단원이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배낭이 무거워 호박을 주셔도 가져갈 수가 없다’라고 답했다. 그런 후 서로 얼굴을 보고 정황을 좀 더 이야기하며 오해가 풀렸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라는 속담이 생각났다. 연천지역은 오랜 한반도 역사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70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있는가 하면 학곡리 고인돌처럼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있고 당포성, 호로고루, 은대리성, 무등리 보루 등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성들도 있다. 또 신라 시대의 경순왕릉이 있고,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숭의전도 있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미국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미군 ‘그레그 보웬’ 에 의해 1978년 전곡리에서 발견됐다. 아슐 문화(Acheulean culture)는 인류의 선사시대인 전기 구석기 시대 석기를 만드는 고고학적 공법으로 약 백만년 전 인류의 주요한 석기 제작 기술이었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란 이름은 프랑스의 생뜨 아슐(St. Acheul) 유적지에서 주먹도끼가 많이 발견돼 붙여진 이름이다. 전곡리에서 이 주먹도끼가 발견된 것은 동아시아 지역 최초의 사건이어서 발견 당시 세계 고고학계가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전곡리 유적지에서는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6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됐다. 임진강 서안 무등리에 해발 100m 정도의 봉우리 2개가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다. 나지막한 봉우리들이지만 주변에서는 가장 높다. 무등리 보루는 이 봉우리들에 구축된 성으로 남쪽 봉우리에 1보루, 북쪽 봉우리에 2보루가 있다. 동쪽으로는 임진강이 접해있고 강 건너편의 움직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군사적으로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1999년 홍수로 성벽 5∼6m가 노출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에서 기와와 화살 촉, 탄화 곡물이 수집됐고 탄화 곡물의 연대측정 결과 6∼9세기 사이의 쌀과 좁쌀로 밝혀졌다. 또 약 1500여년 전으로 추정되는 장수의 갑옷도 발견돼 고구려 유적지로 추정하고 있다. <블로그 way & story: 산성과 읍성이야기> 숭의전은 태조가 고려 왕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곳으로 1399년 건물을 짓고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했다. 이후 1425년에 이르러 이 중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4위만 받들게 했다. 1451년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으로 명명했고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을 제사지내게 했다. 오늘 걸으면서 연천이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플래카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도로를 지나는 군용차량과 일렬로 행군하는 장병들의 모습을 보며 전방지역임을 실감했다. 북일가든에서 점심을 먹고 왕정 파출소, 임진농협 왕산지점을 거쳐 임진강의 아름다운 전경이 보이는 숙소인 해돋이 팬션에 도착했다. 이미 옷과 신발은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6-09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4)] 첫날 종주 힘들었지만 어려움 극복하고 완주하겠다는 의지도 확인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오늘 걸은 거리가 약 24㎞ 정도이다. 이른 새벽 집을 출발해 임진각까지 왔고 임진각부터 숙소가 있는 감악산 펜션까지 장거리를 더운 날 걸어와서 인지 단원들 모두가 아주 힘들어 했다. 그래서 숙소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근처 가게의 아주머니가 우리들에게 걷는 사연을 물었다. 단원 한 명이 걷는 취지와 오늘 임진각부터 걸어왔다고 설명하면서 시원한 물을 좀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커다란 양푼에 얼음물을 가득 갖다 주셨다.(아마도 냉장고에 있는 얼음을 다 꺼내 가져온 것 같았다). 시원한 물을 마시며 그 아주머니의 훈훈함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이 종주 첫째 날이어서 원래 계획은 숙소에 도착하면 근처 음식점에서 단합을 다지는 의미로 성대한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지쳐서 음식점으로 이동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저녁식사는 숙소 주인이 권하는 중국집에서 음식을 배달 시켜 먹었다. 저녁식사 후 단원들의 발바닥 상태를 포함한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문제는 없었지만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힘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실 제일 젊은 나에게도 오늘은 무척 힘든 하루였다. 출발 전에 우리들을 엄청 아끼고 사랑하는 주위의 여러분들로부터 진심 어린 우려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 나이가 70이 넘은 사람들이 300㎞가 넘는 먼 거리를 12일 동안 장기간 걷는 것은 무리다. 또 만약에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아주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라며 걱정을 하신 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걷기로 했고, 이렇게 시작된 대장정의 첫날이 지나면서 화살은 시위를 떠나 목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힘든 하루였지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완주하겠다는 의지와 소망을 서로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걷기의 궁극적 목표가 건강 유지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평상시 신념과 함께 고령인 단원들의 피로가 젊은이들과 다를 것이라 여겨져 “내일 단원들의 걷는 모습을 세밀히 지켜보며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목표 지점인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도착하기 전이라도 단원 중 누군가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판단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즉시 모든 일정을 중단하겠다”라는 종주 가이드라인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오늘 걸으면서 금년(2013년) 초 아내와 함께 약 40일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여정이 기억났다. 한겨울에 걸었기 때문에 길은 몹시 미끄러운데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겨울임에도 비가 자주 내렸다. 날씨가 추웠고 잠자리도 불편해 순례길 걷기를 시작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앞서면서 계획대로 목적지까지 걸을 수 있을지 약간의 걱정도 됐다. 그러나 며칠을 걸으면서 환경에 적응됐고 처음의 후회와 걱정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리고 추위와 불편함에도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러자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친절함과 훈훈함이 느껴지면서 행복했다. “그동안 내가 반복된 일상에 감각이 무디어져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너무 두꺼운 옷을 입고 다녀서 주변 사람들의 훈훈함과 친절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었겠다”라고 생각했다. 특히 종착지가 가까워오면서 순례길에 머무는 것이 너무 좋고 곧 끝나는 것이 아쉬워 10㎞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걷고 숙소를 정했던 기억도 났다. 순례길을 걸은 후 나는 “과거는 감사, 현재는 행복, 미래는 설레임”이란 문구를 염두에 두고 생활하고 있다. 오늘 DMZ 종주단의 첫날 걷기는 매우 힘들었다. 단원들의 힘들어하는 표정이 역력하여 걱정도 됐다. 그러나 평화누리길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과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준비해준 얼음물이 시원함과 함께 훈훈한 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번 DMZ 종주도 어려움은 있을 테지만 걷고 나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라고 막연한 상상을 해보았다. 그래서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환경에 순응하면서 즐겁게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첫날 비록 힘은 들었지만 계획대로 잘 걸은 것처럼 마지막 날까지 모두 잘 걸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단원들은 모두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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