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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들의 임관 40주년 그림 전시회 ①김희철
    [시큐리티팩트=강철군 기자] 육군사관학교 37기는 현재는 시행되고 있지 않지만 유신 사무관제도가 처음으로 시작된 해에 입교하여 당시 40대1일에 가까운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되었다. 또한 대통령 아들과 동기생이라 눈에 보이지 않게 혹독한 선배들의 제재와 기합 속에서 생도생활을 보내 후배들에게는 기합을 적게 주는 온순한 선배기로 인식되었다. 이제 임관 40주년이 되고 4성장군을 3명이나 배출하며 공무원 사회의 정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지금은 모두 퇴역하고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작금의 코로나-19 위기 속에 성대한 임관 40주년행사를 못하는 대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생도시절 미술부 출신들이 그림전시회로 조촐하게 준비한 ’온라인 전시회‘가 6월28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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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2막
    2021-06-28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7)] 4일차, 전쟁의 상흔 느끼며 지인들의 도움으로 발바닥 상처와 폭염 극복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종주 4일째인 8월 22일이다. 오늘은 연천군 신탄리 역 근처의 고대산 가든을 출발하여 철원군에 있는 백마고지 입구, 노동당사, 고석정을 지나 한탄 대교를 건너 철원군 문혜리에 있는 승포회관까지 약 32㎞를 걸었다. 오전 5시 10분에 어제 저녁 남겨둔 오리백숙과 찰밥으로 든든한 아침 식사를 했다. 신탄리 역에서 백마고지 역까지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기차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기차 출발시간이 7시 46분이어서 커피도 한 잔 마신 후 여유롭게 숙소를 떠났다. 약 7분 만에 8㎞ 떨어진 백마고지 역까지 1,000원(경로 500원)의 요금만 내면 데려다 주는 기차가 신기했다. 백마고지 역부터 걷기 시작했다. 백마고지로 가는 길 입구의 월정리 초소에서 근무 중인 초병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단원들끼리 백마고지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었다. 백마고지(白馬高地)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는 야산이다. 백마가 누워 있는 형상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6·25전쟁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백마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발 395미터의 고지는 열흘 동안 주인이 스물네 번이나 바뀌었고 사상자도 14,000명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9사단은 이때부터 백마부대라고 불리게 됐다. 백마고지와 관련 있는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Zone)’라는 말은 6·25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이던 제임스 밴플리트가 ‘적이 전선의 생명선으로 사수하려는 아이언 트라이앵글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의 삼각지대는 철원, 평강, 김화를 잇는 축을 말하는데 중부전선의 핵심으로 철원평야가 그 가운데 위치한다. 월정리 입구 초소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철원 학 저수지 옆을 걸었다. 길을 따라 좌우측에 설치된 철조망에는 빨강색 바탕에 노란색 글씨의 ‘미확인 지뢰’라는 경고판이 걸려 있고 대전차 장애물도 남아 있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백마고지 입구를 지나 ‘금강산 가는 길’을 따라 약 30분 걸어가니 노동당사가 나왔다. 철원 지역은 8·15일 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한 땅이었다. 노동당사는 1946년 초 철원군 노동당이 시공하여 그해 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노동당사는 공산치하에서 반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잡혀와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했던 곳이어서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 줄 등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은 건물이 낡고 붕괴 위험이 있어 밖에서만 볼 수 있다. 건물 곳곳마다 6·25전쟁 당시 새겨진 총탄과 포탄 자국이 남아 있어 전쟁이 주는 상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노동당사 앞에서 휴식 중에 재활용 쓰레기 분리 작업을 하는 분들이 잘 익은 수박과 시원한 캔 음료를 주었다. 그분들의 훈훈한 마음이 느껴져 잠시나마 목마름과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정오쯤 동송읍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어제 발바닥에 문제가 생긴 단원 때문에 신발 구매를 부탁드렸던 지인이 보낸 일행과 만났다. 새 신발과 함께 치료약까지 덤으로 보내줘 너무 고마웠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동송읍 입구에서는 한사모 회장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한밤의 사진편지를 사랑하는 모임’(약칭 한사모)은 매주 일요일 오후에 모여서 걷는 모임으로 남·여 회원 100여명의 평균 나이는 70이 넘는다. 당시 필자는 55세였는데, 100세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할지 보여주는 선구자 같은 분들로 생각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약 10여분을 함께 걸어 근사한 식당으로 갔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폭염에 주의하라는 TV 방송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상황인데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낮 시간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고 있을 뿐 아니라 한 단원은 발바닥 때문에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사모 회장님은 “자네는 현역 대령이고 나이도 젊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일 모래 면 80살이 될 사람들인데 이렇게 강행군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면서 안전을 신신당부하셨다. 그리고 “오늘만은 특별히 배낭을 숙소에 미리 갖다 놓겠다”며 우리들의 배낭을 자신의 차에 싣고 오늘 저녁 묵을 숙소를 향해 떠나셨다. 우리는 식당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배낭 없이 가볍게 한탄강을 바라보며 걸었다. 한탄강은 평균 하폭 약 60미터에 길이가 110㎞에 이르며, 강 유역이 현무암지대로서 다른 하천과 달리 깊이 20-30m의 협곡이 형성돼 있다. 굽이굽이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비경을 갖고 있고 사시사철 맑은 물과 풍부한 수량으로 각종 민물고기의 서식처일 뿐만 아니라 철원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젖줄이기도하다. 고석정은 한탄강 중류에 있는데 철원 8경의 하나로 정자와 그 일대의 현무암 계곡을 총칭한다. 강 중앙에 위치한 10미터 높이의 기암봉 동굴에는 임꺽정이 은신했었다고 전해진다. 승일교는 한탄강 중류 지점에 있는 폭 6m, 길이 120m의 다리로 이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6·25전쟁 전에 김일성이 만들기 시작했으나 그 후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완성돼 이승만 대통령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합친 승일교란 얘기가 있고, 다른 하나는 6·25전쟁 당시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다가 전사한 박승일 대령을 기리기 위하여 명명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데, 현재는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오늘은 기차도 타고 신발도 바꾸고 격려도 받은 특별한 날이었다. 멀리 서울에서 방문해 주신 한사모 함수곤 회장님과 박현자·김영신·윤정자 회원님께 특히 감사했다. 덕분에 좋은 음식 잘 먹고 잘 쉬었으며, 무거운 배낭을 숙소까지 운반해 주셔서 쉽게 걸었다. 그리고 숙소인 군 복지회관 근무자에게 다음 날 숙소(육단리 승리회관)까지 배낭 운반을 당부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오늘 하루동안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여정에 관심을 갖는 분들의 우려도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DMZ 종주는 지금 진행 중이고 기온, 나이, 피로도 축적 등을 포함해서 여러 난관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단장으로서 무사히 목적지까지 걸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되 새겼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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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3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6)] 3일차, 6·25 전쟁 상흔과 남침땅굴 보며 ‘평화’ 기원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오늘은 종주 3일째다. 연천 해돋이 펜션을 출발, 임진강 서측 둑을 따라 북삼교를 지나 아스팔트 도로인 지방도, 국도를 주로 걸어 신탄리역 근처의 고대산 가든까지 약 27Km 정도를 종주한다. 오늘 걷는 지역에는 필리핀 6.25전쟁 참전비, 제1땅굴, 필승교, 태풍 전망대 등이 위치하고 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5시 10분쯤 식사하고 6시에 숙소였던 펜션을 출발했다. 옛날 고구려 군사들이 오르내리며 훈련했을 것으로 보이는 무등 보루에 오르기 위해 땀 흘리며 걸었다. 높지 않은 야산이지만 나무는 울창했고 길은 잘 단장돼 있었다. 보루에 올라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생각했다. 보루를 내려가 군부대를 지나 강 자락을 따라 걸었다. 북삼삼거리를 거쳐 북삼교를 건너 강변에 나 있는 평화누리 길을 한참 걸은 후 마을로 들어갔다. ‘장병 상회’ 앞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수박 아이스 바를 사먹고 있는데, 땀에 젖은 우리를 본 동네 아주머니가 냉수를 통째로 가져다주며 조금 더 가면 식당이 있다는 정보도 알려주었다. 아주머니가 알려준 ‘평화 식당’에서 점심으로 콩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넓은 방에서 식사하고 누워서 조금 쉬다가 나왔지만 오후 햇볕이 너무 강해 걷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뜨거운 열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인지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한 걸음씩 옮기는 발은 천근짜리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무거웠다. 어쩌면 3일 동안 누적된 피로가 걷기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6·25 전쟁터에서 선배들이 겪었을 수많은 고난과 지금 전선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후배들의 고통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신탄리역 근처의 고대산 가든에서 여장을 푼 후 한방 오리백숙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빨래까지 마친 후 오늘 코스를 되돌아봤다. 오늘 코스에는 필리핀 참전기념비가 있었다. 6.25전쟁 당시 필리핀은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파병한 나라로 7148명이 참전하여 112명이 전사했으며 299명이 부상당했고 16명이 실종됐다. 특히 1951년 4월 22일 경기도 율동전투에서 중공군 1개 대대를 격퇴해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 승리로 미 제3사단은 연천에서 철수할 수 있었고, 이를 기념하여 연천군은 1966년 4월 22일 필리핀 참전비를 건립했다. 지난해 9월 주한 필리핀 대사는 ‘6·25전쟁 참전 70주년 기념행사’에서 “필리핀은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한국의 형제들과 나란히 싸울 것”이라며 양국의 ‘형제애’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6·25전쟁을 잊힌 전쟁이라고 하지만 필리핀 젊은이들은 역사 시간에 배우면서 참전용사들의 용맹과 영웅적 활약을 잊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오늘 걸으면서 필자는 평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군 복무 동안 경험했던 여러 번의 긴장 상태와 직접 투입돼 임무를 수행했던 국지도발 작전도 상기하면서 후손들이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또 한국이 6·25전쟁 참전국에 대한 지속적인 보은과 함께 그들의 번영과 참전용사 후손들까지 지원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오늘 걸은 코스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이 지역에는 제1땅굴, 필승교, 태풍전망대 등이 있어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장을 걷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1땅굴은 DMZ 지하에 굴착된 북한의 남침용 땅굴로 7.4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2년 후인 1974년 연천군 고랑포에서 발견됐다. 이후 철원, 파주, 양구에서도 발견돼 전 전선에 걸쳐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존재한 사실이 드러났다. 필승교는 북한이 황강 댐 방류를 할 경우 방류 상황이 맨 처음 관측되는 지점으로 임진강 홍수를 조절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점이며, 한 때 무장간첩들이 침투했던 통로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군사분계선에서 800m 떨어진 태풍전망대는 임진강과 북한의 농장, 댐 등을 볼 수 있고, 6.25전쟁 때 격전지였던 베티 고지, 노리 고지 등도 보인다. 오늘은 한 방에서 4명이 합숙을 하는데, 한 단원의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있는 것을 보았다. 필자는 군에서 장거리 행군을 하면서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물집이 생기면 걸을 때 많은 불편함을 주고 특히 물집이 터졌을 때 느끼는 고통이 매우 크다는 것과 물집이 터진 상태에서 걷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단원의 발바닥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장거리 걷기를 하려면 발이 자유롭게 움직일 정도로 큰 신발을 착용해야 한다. 따라서 신발을 바꾸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민가가 거의 없는 지역이니 신발을 살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내일 종주 코스에서 제일 가까운 부대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신발을 구매하여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새 신발을 신으면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위험은 감수하며 신발을 바꿔보기로 했다. 이제 겨우 3일을 걸었지만 단원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지체 없이 걷기를 중단해야 한다. 어려운 선택의 시간이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100㎞, 250㎞ 등 여러 번의 장거리 걷기를 하며 ‘인간이 갖고 있는 자가 치유 능력’을 경험했던 터라 ‘좋아질 거야’라는 믿음을 갖고 내일 전개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어렵게 잠을 청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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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2막
    2021-06-15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5)] 2일차, 길 잘못 들어서는 우여곡절 겪으며 장거리 걸어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기상 알람을 4시 반에 맞추어 놓았지만 책임감과 긴장감 때문인지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깨어났다. 아침은 전 회원들이 방바닥에 둘러앉아 컵라면과 오곡 가루를 물에 타서 마셨다. 하루 종일 걷는 운동량에 비해서 먹는 것이 너무 부실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황포돛배 마을을 출발하여 비룡대교를 건너 평화누리길을 따라서 구미교, 숭의전, 당포성, 주사절리, 임진교, 군남 홍수조절지 그리고 왕정리를 지나 무등리까지 걷는다. 총 거리는 약 35Km로 첫날 걸었던 24㎞보다 비교적 장거리이다. 중간에 마땅한 숙소가 없어 종주 코스를 이렇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 6시에 출발했다. 안개가 끼어있는 날씨이지만 주변이 잠들어 있는 이른 시간에 활동하는 느낌은 왠지 좋다. 어둠이 걷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고, 밝아오는 햇살을 마중하는 것도 좋으며 대지의 힘을 두 발로 받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도 좋다. 4명이 숙박한 첫 숙소를 떠나는 것이어서 출발하기 전에 기념사진도 한 장 남겼다. 비룡대교를 건너 평화누리길로 접어들었다. 평화누리길은 임진강 뚝 그리고 임진강 물길 옆으로 걷는 소로가 연결되어 있는 길이다. 물길 옆 소로의 일부 지역은 장마철에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면 도로 위로 물이 흐르듯이 강물이 넘어와 흐르는 곳도 있었다. 한 단원이 앞에서 길을 개척했는데 평화누리길 표지를 찾지 못해 되돌아오기도 했다. 어떤 곳에는 이정표가 거꾸로 매달려있어 이정표를 바로 세워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1시간 정도 걷기 꾼들이 말하는 알바(다른 길로 헤매다가 계획된 길로 되돌아오는 행위)를 했다. 조기에 인지해 다행스러웠지만 다시 되돌아 올 때까지 시간과 체력을 허비하여 심리적으로도 상쾌하지 않았다. 나는 단원들에게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오늘 걷는 코스가 장거리인데다 기온도 매우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무그늘에서 쉬거나 햇볕 쨍쨍 내리쬐는 강 뚝에서 쉬기도 하고 지나는 축대 옆에 만들어진 그늘에서 쉬기도 했다. 뚝 길가에 있는 밭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식물들이 무성했다. 밭에는 탐스런 호박도 보였다. 한 단원이 강 뚝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그 호박 참 먹음직스럽게 잘 자랐네’라고 혼자 말을 했다. 그때 바로 뚝 아래에서 ‘그 호박, 임자 있으니 따가지 말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단원이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배낭이 무거워 호박을 주셔도 가져갈 수가 없다’라고 답했다. 그런 후 서로 얼굴을 보고 정황을 좀 더 이야기하며 오해가 풀렸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라는 속담이 생각났다. 연천지역은 오랜 한반도 역사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70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있는가 하면 학곡리 고인돌처럼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있고 당포성, 호로고루, 은대리성, 무등리 보루 등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성들도 있다. 또 신라 시대의 경순왕릉이 있고,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숭의전도 있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미국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미군 ‘그레그 보웬’ 에 의해 1978년 전곡리에서 발견됐다. 아슐 문화(Acheulean culture)는 인류의 선사시대인 전기 구석기 시대 석기를 만드는 고고학적 공법으로 약 백만년 전 인류의 주요한 석기 제작 기술이었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란 이름은 프랑스의 생뜨 아슐(St. Acheul) 유적지에서 주먹도끼가 많이 발견돼 붙여진 이름이다. 전곡리에서 이 주먹도끼가 발견된 것은 동아시아 지역 최초의 사건이어서 발견 당시 세계 고고학계가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전곡리 유적지에서는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6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됐다. 임진강 서안 무등리에 해발 100m 정도의 봉우리 2개가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다. 나지막한 봉우리들이지만 주변에서는 가장 높다. 무등리 보루는 이 봉우리들에 구축된 성으로 남쪽 봉우리에 1보루, 북쪽 봉우리에 2보루가 있다. 동쪽으로는 임진강이 접해있고 강 건너편의 움직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군사적으로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1999년 홍수로 성벽 5∼6m가 노출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에서 기와와 화살 촉, 탄화 곡물이 수집됐고 탄화 곡물의 연대측정 결과 6∼9세기 사이의 쌀과 좁쌀로 밝혀졌다. 또 약 1500여년 전으로 추정되는 장수의 갑옷도 발견돼 고구려 유적지로 추정하고 있다. <블로그 way & story: 산성과 읍성이야기> 숭의전은 태조가 고려 왕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곳으로 1399년 건물을 짓고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했다. 이후 1425년에 이르러 이 중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4위만 받들게 했다. 1451년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으로 명명했고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을 제사지내게 했다. 오늘 걸으면서 연천이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플래카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도로를 지나는 군용차량과 일렬로 행군하는 장병들의 모습을 보며 전방지역임을 실감했다. 북일가든에서 점심을 먹고 왕정 파출소, 임진농협 왕산지점을 거쳐 임진강의 아름다운 전경이 보이는 숙소인 해돋이 팬션에 도착했다. 이미 옷과 신발은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6-09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4)] 첫날 종주 힘들었지만 어려움 극복하고 완주하겠다는 의지도 확인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오늘 걸은 거리가 약 24㎞ 정도이다. 이른 새벽 집을 출발해 임진각까지 왔고 임진각부터 숙소가 있는 감악산 펜션까지 장거리를 더운 날 걸어와서 인지 단원들 모두가 아주 힘들어 했다. 그래서 숙소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근처 가게의 아주머니가 우리들에게 걷는 사연을 물었다. 단원 한 명이 걷는 취지와 오늘 임진각부터 걸어왔다고 설명하면서 시원한 물을 좀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커다란 양푼에 얼음물을 가득 갖다 주셨다.(아마도 냉장고에 있는 얼음을 다 꺼내 가져온 것 같았다). 시원한 물을 마시며 그 아주머니의 훈훈함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이 종주 첫째 날이어서 원래 계획은 숙소에 도착하면 근처 음식점에서 단합을 다지는 의미로 성대한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지쳐서 음식점으로 이동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저녁식사는 숙소 주인이 권하는 중국집에서 음식을 배달 시켜 먹었다. 저녁식사 후 단원들의 발바닥 상태를 포함한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문제는 없었지만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힘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실 제일 젊은 나에게도 오늘은 무척 힘든 하루였다. 출발 전에 우리들을 엄청 아끼고 사랑하는 주위의 여러분들로부터 진심 어린 우려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 나이가 70이 넘은 사람들이 300㎞가 넘는 먼 거리를 12일 동안 장기간 걷는 것은 무리다. 또 만약에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아주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라며 걱정을 하신 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걷기로 했고, 이렇게 시작된 대장정의 첫날이 지나면서 화살은 시위를 떠나 목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힘든 하루였지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완주하겠다는 의지와 소망을 서로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걷기의 궁극적 목표가 건강 유지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평상시 신념과 함께 고령인 단원들의 피로가 젊은이들과 다를 것이라 여겨져 “내일 단원들의 걷는 모습을 세밀히 지켜보며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목표 지점인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도착하기 전이라도 단원 중 누군가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판단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즉시 모든 일정을 중단하겠다”라는 종주 가이드라인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오늘 걸으면서 금년(2013년) 초 아내와 함께 약 40일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여정이 기억났다. 한겨울에 걸었기 때문에 길은 몹시 미끄러운데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겨울임에도 비가 자주 내렸다. 날씨가 추웠고 잠자리도 불편해 순례길 걷기를 시작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앞서면서 계획대로 목적지까지 걸을 수 있을지 약간의 걱정도 됐다. 그러나 며칠을 걸으면서 환경에 적응됐고 처음의 후회와 걱정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리고 추위와 불편함에도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러자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친절함과 훈훈함이 느껴지면서 행복했다. “그동안 내가 반복된 일상에 감각이 무디어져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너무 두꺼운 옷을 입고 다녀서 주변 사람들의 훈훈함과 친절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었겠다”라고 생각했다. 특히 종착지가 가까워오면서 순례길에 머무는 것이 너무 좋고 곧 끝나는 것이 아쉬워 10㎞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걷고 숙소를 정했던 기억도 났다. 순례길을 걸은 후 나는 “과거는 감사, 현재는 행복, 미래는 설레임”이란 문구를 염두에 두고 생활하고 있다. 오늘 DMZ 종주단의 첫날 걷기는 매우 힘들었다. 단원들의 힘들어하는 표정이 역력하여 걱정도 됐다. 그러나 평화누리길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과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준비해준 얼음물이 시원함과 함께 훈훈한 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번 DMZ 종주도 어려움은 있을 테지만 걷고 나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라고 막연한 상상을 해보았다. 그래서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환경에 순응하면서 즐겁게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첫날 비록 힘은 들었지만 계획대로 잘 걸은 것처럼 마지막 날까지 모두 잘 걸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단원들은 모두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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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2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3)] 첫날 24㎞ 구간은 임진각에서 감악산 펜션까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19일 새벽 5시 30분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택시로 경의선 출발지인 공덕역으로 갔다. 6시 32분 문산행 첫 전철을 탔고, 전철 안에서 단원 전원이 합류했다. 그런데 전철로 이동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허구 헌 날 내버려두고 우리가 출발하는 날 이렇게 비를 뿌리면 우리 걷기꾼들은 어찌 한 단 말입니까?” 이런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순응하면서 걸어야겠다”는 마음의 준비와 각오를 단단히 했다. 7시 40분경 문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임진각으로 갔다. 임진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DMZ 종주단 4명은 330㎞ 대장정을 시작했다. 첫날 목표는 임진각을 출발하여 파주 적성에 있는 황포나루를 지나 감악산 펜션까지 약 24㎞였다. 임진각은 DMZ에서 남쪽으로 약 7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북녘 땅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이 고향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DMZ는 국가가 자국의 영토임에도 국제법상 병력 및 군사시설을 주둔시키지 않을 의무가 있는 특정지역이나 구역을 의미한다. 한반도의 DMZ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의해 휴전됨으로서 생겨났다. 육상의 군사분계선인 MDL(Military Demarcation Line)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씩 양국의 군대를 후퇴시키기로 약속하면서 만들어진 지역이다. 임진강 하구인 경기도 파주시 정동리부터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다. 임진각은 분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임진각 주변에는 평화누리 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 공원은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만들어졌으며 대형 잔디에 각종 볼거리와 작품들이 있다. “바람의 언덕” 아래로는 무지개 색으로 팔랑이는 바람개비가 많이 있다. 그 주위에는 자유의 다리, 평화의 종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고 6.25 전쟁 당시 각종 유물과 전쟁기념물도 있다. 망향의 노래비에는 1983년 ‘이산가족 찾기’의 배경 음악이었던 ‘잃어버린 30년’의 가사가 통일을 기다리며 서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 년 세월 /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정 나누는데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 봅니다 / 내일일까 모래일까 기다린 것이 눈물 맺힌 삼십 년 세월 / 고향 잃은 이 신세를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 다한 정 나누는데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 봅니다.” 여정의 시작점이 있는 ‘평화누리길’이라는 도로 이름은 우리 DMZ 걷기꾼들이 염원하는 평화통일과 연관되어 있는 듯했고 이런 것들이 더해져서 어서 빨리 평화롭게 통일이 되기를 기원한다. ‘평화누리길’은 2010년 개장되었으며 총 189㎞의 길로 DMZ 접경지역인 김포시, 고양시, 파주시, 연천군 등 4개 시·군을 잇는 대한민국 최북단의 걷는 길이다. 우리는 파주 평화누리길 셋째 길에 위치하고 있는 임진각을 출발하여 마정리, 장산리를 지났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 이 지역에서 중대장 근무를 했다. 이 지역에서 군 생활을 할 때 화창한 날 장산 전망대에 올라 북한의 송학산을 포함한 북녘 풍경과 임진강, 초평도 도습지를 한눈에 본 기억을 더듬었다. 이번 순례길에서는 그러한 정경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일정상 그곳을 지나쳐 화석정, 그리고 율곡리를 걸었다. 율곡리는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십만양병설’로 유명한 율곡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그 중 대표적인 유적지로 ‘자운 서원’과 ‘화석정’이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이다.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 혼란으로 여러 학자들이 지방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게 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원에서는 선배 유학자를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했다고 한다. 자운 서원은 1615년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됐고 이이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화석정은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의 절경을 한 눈에 감상 할 수 있는 정자로서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강을 벗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하며 지금은 이이 선생이 8세에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라는 시가 걸려 있었다. 율곡리를 지나 좀 걷다 보니 전진교가 보인다. ‘천하무적 전진부대’에서 중대장을 할 때 수 없이 많이 통과했었던 다리이다. 전진교를 건너 초소에서 출입자 명부에 인적사항을 기록 할 때에는 어떤 돌발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했었고 업무를 마치고 나올 때에는 별일 없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두포 나들목을 지나 장파리의 리비교를 지난 후 황포돛배로 향한다. 리비교는 정전협정 직전 미군이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건설한 다리로 대전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미 공병대 리비 중사의 이름을 붙였다. 황포돛배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운송수단의 하나였고 우리가 가는 그곳은 임진강 황포돛배라는 지명이며 그곳에 가면 그 배를 탈 수도 있는 곳이다. (4편에 계속)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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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1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2)] 사전 답사 통해 330㎞ 종주 계획 완성하다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DMZ를 따라 함께 걷기로 한 ‘DMZ 종주팀’을 구성 후 몇 가지 사항을 결정했다. 먼저 출발지는 문산 임진각, 최종 도착지는 고성 통일 전망대로 정했다. 코스를 이렇게 정한 이유는 한반도의 허리를 걷는다는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휴전선 가까이 위치해 있어 분단의 아픔을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DMZ 종주 출발일은 8월 19일, 기간은 12일로 정했다. 아주 더운 혹서기를 피해 걷기에 좋은 계절을 선택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내가 전역하는 날이 9월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기간을 정했다. 그리고 별도의 지원 차량이나 인원 없이 오롯이 4명이 배낭에 필요한 짐을 휴대하고 걷기로 했다. 잠자는 장소는 종주 코스 주변의 민간 숙박시설을 이용하되 그런 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는 군 숙박시설을 협조해 이용하기로 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컵라면, 초코파이 또는 에너지 바 같은 것을 준비하고, 점심과 저녁식사는 그날 걷는 코스에서 만나는 음식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기본적인 방향을 정한 이후 실제로 매일 걸어야 하는 구간을 확정하기 위해 2013년 6월 13일부터 3일간 차량을 이용해 종주 구간을 사전 답사했다. 전 코스를 12일로 구분하여 하루하루 걸어야 할 이동로를 직접 확인하고 묵을 숙소를 찾아 예약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구체적인 이동로를 판단할 때에는 지역 행정관서에서 만든 관광지도를 사용했다. 걷는 길이 자세히 표시돼 있지는 않았지만 국도와 지방도가 명확히 구분돼 있는데다 지역의 명소들과 숙박, 음식점 등 관광과 관련된 정보들이 모두 포함돼 있어 여러모로 유용했다. 경기도 지역은 미개통 구간이 여러 곳 있기는 했지만 걷기 전용도로인 ‘평화누리길’을 주로 택했고, 강원도 지역은 경기도처럼 걷기 전용도로가 아직 없기 때문에 국도 및 지방도를 걷기로 했다. 어떤 구간에는 음식점이 아예 없는 지역도 있었다. 이런 구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초코파이나 에너지 바 등으로 점심 요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간 숙박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는 군에서 운용하는 숙박시설을 이용했다. 당시 나는 전역을 40여일 앞둔 현역이었기에 군 숙박시설을 협조하기에 유리했다. 군 숙박시설을 사용할 수 없었다면 걸어서 DMZ 종주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민족을 분단한 휴전선 155마일(약 250㎞)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약 330㎞에 달했다. 결국 하루 걷는 코스는 가용한 숙박시설의 위치를 고려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동거리를 좀 길거나 짧게 잡을 수밖에 없는 곳도 몇 군데 생겼다. 이동거리가 긴 곳은 걷기에 많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걸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정할 수밖에 없었다. DMZ 종주단을 상징하는 표식도 만들어서 배낭 뒤에 부착했다. 30여년이 넘는 군 복무를 하면서 수많은 훈련계획을 수립했었지만, DMZ 종주 계획을 만들면서 더 많은 고민을 한 것 같다. 걷는 사람들의 나이와 체력 상태,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 등 여러 변수가 많았음에도 DMZ 종주 계획은 완성됐다. 단원들은 계획을 공유하고 걷기에 대한 의기를 투합했다. 단장을 맡은 나는 모든 계획이 실행 과정에서는 계획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부딪히는 상황에 유연히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도 단원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어떠한 결정도 단장이 혼자서 할 수 있다는 확답도 받았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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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8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 우리는 왜 DMZ 종주를 결정했나?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내가 배낭을 메고 군사분계선(DMZ)을 따라 걸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DMZ를 종주하자’는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주말걷기 모임에서 만난 한 회원이 “안 대령이 금년에 전역하는데, 전역 전에 DMZ 종주를 하면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면서 “혼자 걷기 어려우면 동행하겠다”라는 제안을 했다. 많은 땀을 흘렸고 청춘을 불살랐던 그 지역. 군 생활을 할 때는 늘 바쁘고 긴장해야 했는데 전역을 앞둔 지금 걷는다면 여유롭게 과거를 뒤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 하겠다는 그 회원의 말이 DMZ 종주를 결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DMZ 종주는 엄밀히 말하면 DMZ에 인접한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길은 대부분 군부대의 허가를 얻어야 통과할 수 있는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 이남지역이지만 일부 구간은 민통선 지역이 포함된다. 따라서 현역 신분이 아니면 군부대의 협조를 받기도 어렵고 그 지역을 정확히 알지 못해 걷기를 계획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나는 당시 현역이었고 특히 민통선 구간은 내가 과거에 근무했던 부대였다. 60, 70대 아저씨들이 12일 동안 무거운 배낭을 메고 더운 여름에 330㎞를 걷는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최초에 제안한 회원을 포함하여 동행자를 구하는 것, 이들의 나이가 많으니 각자 가족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 실제 걸을 수 있는 거리를 판단하는 것 등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런 고민 끝에 드디어 4명의 인원으로 ‘DMZ 종주팀’을 구성했다. 이후 차량으로 종주할 지역을 사전에 답사하고 지역별로 숙소를 미리 정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건강을 해치면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통일을 염원하면서 전 코스를 완주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그 여정이 벌써 8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걷는 동안 만난 우리의 산하는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기저기 전쟁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어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걸으면서 육체적 어려움을 겪는 상황마다 슬기롭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5670 아저씨들의 위대한 잠재력도 돋보였다. 아직까지 중장년층의 국토순례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데다 DMZ 종주라는 특별한 지역을 종주한 것이었기에 우리의 경험을 글로 남기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쪼록 연재되는 이 글이 이런저런 이유로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는 중장년층에게 특히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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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2
  • 후임병 강제추행·가혹행위 등 혐의 받은 해병대 예비역 집행유예 2년 선고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해병대 복무 당시 후임 병사들에게 강제추행과 가혹행위 등을 한 20대 예비역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제주지법 제2형사부(부장판사 장찬수)는 6일 강제추행과 특수협박, 위력행사 가혹행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22)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또 보호관찰 1년과 사회봉사 120시간, 성폭력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명령했다. A씨는 해병대 모 부대 병장으로 복무하던 지난해 2월부터 7월까지 생활관 등에서 후임 병사들에게 뒷짐 지고 몸을 굽혀 머리를 땅에 박고 두 다리를 벽이나 책상에 걸치는 '메뚜기 자세'를 시키고 폭행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가혹행위를 한 혐의를 받는다. A씨는 또 후임 병사들의 신체 일부를 만지며 추행하고, 둔기로 위협한 혐의도 받는다. A씨에게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후임 병사들은 11명에 이른다. 재판장은 "상명하복이 엄격한 군대 생활에서 하급자가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점을 악용해 범행을 저지르는 등 죄질이 절대 가볍지 않다"며 "다만 피해자 일부와 합의했고,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 전역군인
    • 종합
    2021-05-06
  • 국가안보역사의 산증인 홍일식과 故 박찬세의 우정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60년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려대 4·18의거의 주도자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고려대 교우회 고문, 향년 86세)이 코로나19 확진 후 입원 치료 중 6일 별세했다. 빈소는 11일 오후 5시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3호에 마련되어 13일 오전 9시 발인 후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근세기 역사의 현장을 누비던 거목인 故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이 영면에 들자, 박원장과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두 거인(巨人)의 우정을 지켜보며 감동하던 언론사 대표를 지낸 이강식씨(고려대 후배)가 ‘남이 봐도 되는 日記’를 보내왔다. 이를 통해 역사의 현장에서 누구에게나 가슴을 활짝 열고, 따뜻이 맞이하는 巨人이자 약하고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하는 大人이면서도 不義와 不敬을 용납 않는 단호한 포청천, 그래서 가는 곳마다 팬들이 북적이는 인기인이었던 故 박찬세 원장과 홍일식 전 총장 두 거인(巨人)의 우정 이야기를 공개한다. ■역사의 현장 속을 누비던 두 巨人의 감동적인 우정을 그린 ‘남이 봐도 되는 日記’ 전문 천학(淺學)인 데다, 과문(寡聞) 한 탓에 동서고금 인물들의 우정담(友情談)에 관해 아는 건 부처님과 마하가섭, 중국의 삼국지 삼 형제, 관중과 포숙,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성룡-이순신, 다산-초의선사-추사, 익살맞은 치기로 우화를 남긴 오성-한음 정도일 뿐이다. 작심하고 찾아보면 꽤 있음 직도 하련만, 특히 근현대 산업화/민주화 이후 한국史에서 후세에 길이 전할 만큼 귀감이 될 '우정 교류' 얘기는 아쉽게도 얼핏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밤에 볏단을 서로 옮겨쌓는 형제의 동화가 있다만, 그것은 同氣간의 정이니, 벗들의 우정과는 좀 다르다.)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팽배가 원인이기도 하겠으나, '우정'에 대한 절대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있음은 아닐까. 말로만, 아쉬울 때만, 상대가 잘 나갈 때만 우정을 찾는 얍삭한 처세훈(處世訓)이 날로 보편화되어 그럴까. 헌데, 그런 시대 풍토에서도 이런 우정이 살아있더라. ■ 두 거인(巨人)인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과 홍일식 전 고려대총장 한 사람은 '작은 거인'이다. 160cm가 채 안 되는 키, 말 그대로 단구(短軀) 임에도 누구나 그를 진정한 거인, '리틀 빅맨'이라 불렀으니. 또 한 사람은, 우선 외모로도 진짜 거인이다. 1950~60년대 靑年期엔 육 척 장신에 늠름한 어깨로 기골이 장대하다는 소릴 적지않이 듣기도 했단다. 두 사람 모두 '거인'으로 추앙되는 '참 이유'는 간명하다. 살아온 족적, 쌓아온 업적, 만인이 존경하는 인품 等等 족탈불급의 '큰 그릇'을 저마다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두 거인의, 부럽기 짝이 없는 '멋진 우정' 얘기를 남기고자 한다. 같이 걸으면, 누가 봐도 '언밸런스'라고 할 그들이 한 평생 우정의 꽃을 피우고, 지켜온 러브 스토리 -. 여문 작가가 소설로 엮으면 대박이 터지고 넘치리라. 1950년대 중반, 대학 저학년 시절에 만난 두 사람은 고대신문을 통한 글과 문장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고, 첫 상면 순간에 '평생의 벗'으로 점지됐음을 느꼈단다. 이후 근 70년 동안, 찰떡같은 밀애를 이어온 것이니. 그들이 서로 '통하는 바'는 '민족'이었다고 한다. 법학도와 국문학도로 각자의 主전공은 달랐으나, 민족문제를 놓고 괴로워한 젊은이들의 심혼(心魂)이 韓민족의 분(憤)과 원(怨)과 한(恨)을 화두로 놓고 늘 분방한 담론을 펼쳤고, 그러면서 情을 쌓았더란다. 그 습관이 그대로 이어져, 米壽가 멀지 않은 지금까지 무슨 특별한 사안이 없더라도, 입과 귀가 심심할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걸거나 찾아가 만나서 수작(酬酌)을 곁들여 진지한 대화를 나누곤 했단다. 작게는 대소 집안일이나 주변 지인들 근황에서부터 민족, 나라, 인류의 미래까지 주제가 마를새 없었다고. 맛있는 먹거리, 귀한 술이 생겼을 땐, 가족보다 먼저 서로를 불러, 아이들처럼 둘이서 즐기곤 했다고도 한다. ■ 박찬세는 1960년 4월 고대신문 편집국장의 신분으로, 4.19의 도화선이 된 '고대 4.18 의거 선언문'을 쓰다.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어찌 방관하랴.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이 기치를 들고 거리로 나선 노도(怒濤)의 고대생들이 그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던 중 깡패들에게 난타를 당하고 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사진이 다음날 朝刊에 게재되면서 전 국민이 분연히 들고일어나 4.19 혁명의 큰 불길로 확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찬세는 졸업 한참 후, 그의 文才를 모셔간 정부에서 권력 핵심의 요직을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은 수구초심, 오랜 염원인 '민족통일'을 위한 기반 사업에 헌신했다. 통일원 15년, 그중 10년을 통일연수원장으로 일했으니, 오늘날 우이동 '통일연수원'이 그의 정성 어린 작품이다. ■ 홍일식은, 새삼 形言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의 어르신 홍일식은 36년 동안 高大 '민족문화연구소'를 지켜오는 내내 오직 '민족문화'를 부여안고, 국학 중흥의 초석을 놓았다. <한국문화사 대계>, <한국 민속 대관>, <中韓대사전> 등 그의 손으로 탄생시킨 국학연구의 보배들이 즐비하다. 당연한 행로인, 민족고대 13代 총장이 되어 그가 보여준 인본(人本)과 공선사후(公先私後)의 탁월한 리더십은 명문 사학 경영의 전범으로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玄民, 南齋, 그리고 芝薰을 열과 성으로 기리는가 하면 범국민을 대상으로 孝정신 함양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가히 국학의 本山, 인문학의 巨峯이 바로 그다. ■ 그런 두 사람은 '닮은꼴'이 많다, "나의 벗 石岳,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곧 다시 만나기를 바라네" 누구에게나 가슴을 활짝 열고, 따뜻이 맞이하는 巨人 / 약하고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하는 大人 / 그러면서도 不義와 不敬을 용납 않는 단호한 포청천 / 그래서 가는 곳마다 팬들이 북적이는 인기인이라는 점. 현모양처와 해로했고, 자식들이 성실하게 잘 자랐으며, 一家가 더 없이 화목한 점도 똑같이 닮았다. 석악(石岳) 박찬세, 가석(可石) 홍일식. 아호(雅號)에 '돌石'을 함께 지닌 것도 천연(天緣)이다. (두 사람은 만나기 이전부터 아호를 가졌더란다.) 다만, 가무 음곡에 있어서는 석악이 한 수 위라, 그의 청탁 불문 엄청난 주량과 흥겨운 시가(詩歌)는 그대로 신화가 되어 '高大夜史'에 전해오고 있으니... 때로,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야, OO는 어떻고, OO는 네 말이 맞아." 평소 책이나 서간에선 석악兄, 가석兄 하던 분들이 둘만 있을 때 "야~, 자~" 하는 모습은 되레 보기 좋더라. 石岳이 팔순을 맞은 해, 어느 회고 글의 마지막 구절. "可石이 나의 친구라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그런, 그들의 우정,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지난 3월 6일의 悲報 – ‘石岳 박찬세 급서(急逝)’. 아니, 이럴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보름 전만 해도 호방하게 폭탄주를 즐기시던 분이, 누구보다 산행도 잘하시고, 건강장수를 다짐하시던 분이 이처럼 허무하게 떠나시다니, 이렇게 황당할 수가... 두 거인의 우정의 끈, 한쪽 걸이가 떨어졌다. 그를 알고, 존경하고, 함께 지내온 모든 사람들에겐 진정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이라. 오늘, 可石이, 몸을 추스르며, 석별의 情을 전한다. "나의 벗 石岳,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곧 다시 만나기를 바라네. 可石 洪 一 植 읍소" 비통(悲痛)을 넘어 오관(五官)이 먹먹하다. 이제 누구에게서 '감식초酒'를 마셔볼 수 있을 거나. 한 분의 거인만이라도 오래 우리 곁에 남아계셔서 두 분의 우정담을 간간히 들려주시길 소망할 뿐이다. 근데, 아무래도, 지금... 눈물이 자꾸 앞을 가려, 자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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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
    202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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