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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 [김희철의 전쟁사(198)]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㊱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턴 투워드 부산’ 행사와 함께 기억해야 할 놀라운 사실은 6·25남침전쟁에 참전한 외국병사가 종전이 되어 본국으로 귀환해 여생을 보내다가 별세했어도 그 유해가 한국으로 되돌아와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는 행사가 여러 차례 있었다는 것이다. 2015년 5월, 프랑스인 ‘레몽 조셉 베나르 (Raymond Joseph Benard)’씨를 필두로 영국인 ‘로버트 맥코터’씨, 2016년 5월 12일 네덜란드인 ‘니콜라스 프란스 베설스’씨, 2016년 10월27일 프랑스인 ‘앙드레 벨라벨’씨, 2017년 9월27일 네덜란드인 ‘요한 테오도르 알데베렐트’씨 등이다. 또한 2015년 5월27일은 ‘유엔기념공원’의 역사에서 특별한 날이다. 마크 리퍼트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묘지인 이곳에 마련된 6·25남침전쟁 참전 미군 묘역을 찾아 처음으로 참배했기 때문이다. 2015년 ‘턴 투워드 부산’ 행사에는 앞서 언급한 영국의 참전용사 ‘로버트 맥코터’씨 유해가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그는 1948년 17세의 나이에 입대해 1950년 8월~ 1952년 8월 한국에서 복무하고 제대 후 2001년 영국에서 사망했다. 맥코터씨는 생전에 기적적인 발전을 이룩한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했고, 한국에 남겨진 전우들을 그리워하며 “같이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가 사망한지 14년 만에 생전에 그리워했던 한국땅에서 영면하게 된 것이다. 맥코터씨의 아들이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부산을 향하여)’ 행사에 부친의 유해와 함께 방한하여 처음으로 안장식을 거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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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2
  • [김희철의 전쟁사(197)]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㉟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곳에서 매년 11월11일 오전 11시가 되면 도시의 소음을 뚫고 싸이렌이 울리고, 6.25남침전쟁 참전국들은 시간을 맞추어 부산 방향으로 고개숙여 엄숙히 묵념을 드리는 추도 행사를 치룬다. 이 행사는 2007년 6·25남침전쟁에 참전했던 캐나다 용사인 빈센트 커트니씨의 제안으로 시작됐는데, 이는 참전용사의 유해가 한국땅에 안장된 영령들을 추모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염원으로 열리는 너무나 뜻깊고 소중한 행사이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됐지만 정부가 ‘유엔 참전용사 국제 추모의 날’로 격상시켜 2020년부터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지구의 어느 곳에 있는 나라인지 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북한 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비롯된 6·25남침전쟁에 참전하여 홀연히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 추모하는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이란 이름의 행사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극동의 작은 나라 전쟁에 참전하여 희생된 고귀한 생명이 그만큼 많다는 것은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대가가 얼마만큼 크고 비싼지를 깨닫게 하는 시금석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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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 [김희철의 전쟁사(196)]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㉞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故 위트컴 장군 부부가 영면하고 있는 ‘유엔기념공원’은 1951년 1월 유엔군사령부가 부산시 남구 대연동 13만4000㎡의 넓은 부지에 전사자의 공동묘지로 조성했으며, 1955년 유엔총회가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로 의결했다. 6.25남침전쟁 당시 참전국은 유엔군으로 파병한 16개국과 장비, 물자, 의료를 지원한 나라까지 67개국이었다. 이 사실은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의 노력으로 2010년 9월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의 파병 및 지원기록으로 등재됐다. 이 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참전한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 3만 5737명, 부상 11만 5068명, 실종 1554명으로 총 15만 2359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유엔군 중 아이젠하워 대통령,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밴플리트 8군사령관, 해리스 해병 1항공사단장 등 미군 고위장성들의 아들 142명이 참전했다. 그들 중 35명이 전사, 실종 혹은 부상을 당했다.([김희철의 전쟁사](37) ‘보훈의 달, 잊혀가는 영웅들과 지도자의 자세’ 참조) 현재 부산에 있는 재한유엔기념공원(UNMCK)에는 처음에 16개 파병국의 1만1000위가 봉안돼 있었으나 대부분 자국으로 송환되고 일부 유해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는 영국 885명을 비롯, 터키 462명, 캐나다 378명, 호주 281명, 네델란드 117명, 프랑스 44명, 미국 36명, 뉴질랜드 34명, 남아공 11명 등 11개국 2311구의 유해가 안장돼 전쟁이 끝난 후까지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 잠들어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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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8
  • [김희철의 전쟁사(19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㉝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묘숙 여사는 북한 조국평통일위원장 허담의 초청으로 1990년 6월 북한땅을 처음 방문한 뒤, 이중간첩으로 오인받아 김포공항으로 귀국하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의 조사를 받으면서도 장진호 전투의 미군 유해발굴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었다. 허나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에서 거주해온 한묘숙 여사(위트컴 희망재단 이사장)가 입원 치료 중 2017년 1월1일 오후 9시 향년 90세로 별세했다. 故 한묘숙 여사는 부산대학교가 설립 초기 장전캠퍼스 부지 제공과 공사 등 국립 부산대학교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크게 공헌하며 도움을 준 故 위트컴 前 유엔군 군수사령관의 미망인이다. 대학측은 그 공적을 기리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유족과 협의를 거쳐 당시 전호환 총장을 장례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한 여사의 장례를 부산대학교장(葬)으로 치르기로 했다. 이에 따라 부산대는 故 한묘숙 여사의 빈소를 양산부산대학교병원 장례식장 4분향소에 마련했다. 이와 별도로 장전캠퍼스 대학본부동 1층에도 분향소를 설치해 고인을 추모했다. 故 한묘숙 여사의 유족으로는 자녀 민태정, 자부 민옥린, 손자/녀 민경동/민영동이 있으며, 부산대 전자공학과 김재호 교수가 양자로서 빈소를 지켰다. 4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내 10.16기념관에서 거행된 故 한묘숙 여사의 영결식은 개식, 고인에 대한 묵념, 약력보고와 추모영상 상영 및 부산대 총장의 조사와 추도사 및 추모곡 순으로 엄수됐다. 영결식에는 부산시장을 비롯한 주요 기관장들과 부산대 전임 총장단, 주한 미국대사와 부산 미국영사, 주한 미8군 사령관과 주한 미해군 사령관 및 유엔평화기념관장과 메리놀병원장, 위트컴 희망재단 관련 인사 등이 참석했다. 故 한묘숙 여사는 10.16기념관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뒤 오후 3시경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유엔기념공원묘지’ 내 故 위트컴 장군 묘역에 함께 안장되었고 이곳에 유일하게 잠들어 있는 민간인 신분의 한국 여인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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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9)]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때마침 사단으로 전입오게 된 동기생 황종수 소령(육사37기)은 11사단에서 중대장을 마치고 육군사관학교 교관요원으로 선발되어 후배를 가르치다가 야전으로 나오게 되었다. 헌데 중령 진급에 유력한 자리인 타 연대 작전과장엔 이미 모두 예정된 대기자들이 있었고 당시 공석이 된 양 대령 연대의 작전과장 자리도 유경험자를 원하기 때문에 보직을 받기가 몹시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양 대령에게 동기생인 황 소령을 추천했으나 그는 몹시 곤란한 표정으로 경력이 문제이고 게다가 육사 교관을 수행하여 야전 경험도 부족하며, 특히 주특기가 작전직능이 아닌 기획직능이기 때문에 더 더욱 고민이라며 쉽게 대답을 안했다. 필자는 양 대령 연대를 찾아갔다. 그리고 필자의 사단 작전장교 시절에 목격했던 황 소령의 중대장 근무 시에 탁월했던 야전성을 설명했다. 당시 황 대위는 11사단 중대장으로 연대전술훈련 평가를 위해 연대의 최전방 중대로 100km가까운 행군을 하여 필자의 아파트 옆에 있던 공터에 주둔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마침 퇴근하던 필자는 훈련에 참여한 병사에게 중대장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동기생인 황종수 대위라고 하여 아파트에서 커피를 타가지고 중대장 텐트를 찾았다. 텐트안에 있던 황 대위는 기습적인 방문에 놀람과 동시에 어쩔 줄 모르며 반가워했다. 그때 필자는 이미 중대장 근무도 마치고 사단 작전장교로 보직받아 숙달되어 가던 차이라 위탁교육을 받고 늦게 중대장직을 수행하는 동기생을 격려하겠다는 단순한 마음이었다. 헌데 숙영지 편성을 보고 깜작 놀랐다. 필자가 중대장 시절에 편성했던 모습과는 몇단계 향상된 배치와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는 훈련에 임해서 상대 연대와 공격, 방어 전투에서 창의적으로 대처하여 완승을 거둔 체험담을 이야기했다. 생도시절 철학을 전공했던 그답게 입담도 좋았지만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 상황조치로 상대방은 허를 찔렸고 상급자로부터는 극찬을 받았다는 성공담도 늘어놓았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탁월하게 맹활약하는 동기생이 너무도 자랑스러웠고 필자도 더 열심히 잘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계기도 되었다. 다음날 새벽에 출근하다가 황 대위의 숙영지를 보니 아무도 없었다. 연대전술훈련 평가를 위해 이미 야간에 타지역으로 이동했는데 그들이 떠난 자리를 보고 또한번 놀랐다. 전장정리를 철저히 하여 티끌만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역시 자랑스럽고 탁월한 동기생 황종수 대위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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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8-03
  • [김희철의 전쟁사(19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2012년 국제신문에 위트컴 장군을 조명하는 기획시리즈 기사가 보도된 이후 부산시가 그해 10월24일 유엔의날 기념행사에 맞춰 부산시민의 감사 뜻을 담은 감사패를 故 위트컴 장군 부인 한묘숙 여사에게 전달했다. 오늘의 부산은 세계와 무역하며 해운과 수산의 중심지로 역할하고 있다. 또한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과도 유용한 교류의 관문이며 오랜 기간 시행된 국제영화제 행사 등 수많은 국제 교류 역사가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열린 세계인의 마음과 인류애를 바탕으로 상생하는 협력과 선행의 표상인 故 위트컴 장군의 모습은 세계시민의 역할을 자부하는 부산시민들에게 인류공영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부산시민들은 자신들의 DNA가 위트컴 장군과 너무도 일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트컴 장군, 그는 영원한 한국인, 부산인이다”라고 추앙하며 자랑스러워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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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8-02
  • [김희철의 전쟁사(19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㉛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이 1982년 7월12일 서울 용산의 병원에서 영면했을 때 동아일보는 ‘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 위트컴 장군 영면하다’라는 부음 기사를 썼다. 故 위트컴 장군은 전역 후에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한국의 재건과 전쟁고아의 성장뿐 아니라 중국과 아시아지역 의료시설 확충과 북한 땅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미군 장진호 전투 전사자의 유해를 찾아오는 일을 여생의 임무라고 믿고 실천했다. 이를 위해 1960년대에는 고령에도 서울을 근거지로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을 돌며 이곳의 낙후된 의료시설을 보고 ‘위트컴 희망재단’을 설립했다. 또한, 그는 스스로 한국인임을 자처하고 한국 여성인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한 여사는 이후 위트컴 장군의 유지에 따라 북한을 25차례나 방문해 미군 장진호 전투 전사자의 유해를 찾았다. 그는 죽어서도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묻히기를 원해 별세한 뒤 현재 부산시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 안치됐다. 장군급으로서는 유일하다. 한편 부산대 김재호 교수는 故 위트컴 장군의 미망인이 서울 용산에 계신 것을 알고 한묘숙 여사를 찾았고, 추모사업회를 만들어 매년 7월12일 유엔기념공원에서 추모식을 열어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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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7-28
  • [김희철의 전쟁사(192)]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㉚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 여사가 묵는 호텔에는 중국이나 북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과 중국 고위층,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자주 찾았다. 이즈음 한 여사는 허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연이 닿았다. 1990년 6월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도 허담의 초청장이 있어 가능했다. 중국에 들어간 지 11년 만이었다. 1990년대 초 북한을 드나들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지도원과 운전수, 참사가 따라붙었는데 선물과 칭찬으로 먼저 호감을 산 뒤 친해지면 북한 외국인 묘지와 장진호에 대해 물어보는 식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한 여사는 1999년까지 스물다섯 번 방북했지만, 방북 초청장은 수도 없이 받았다고 했다. 북한에 들어갈 때는 선물로 옷이나 의약품, 일본약 구심(求心·심장약)을 몇 상자씩 준비했는데, 이를 위해 들어간 경비만 약 백만 달러의 많은 돈이었고 부부의 사재와 위트컴의 연금이 총동원되었다. 한 여사는 서울 집을 팔고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썼다. 위트컴 장군의 연금도 대부분 미군 유해 정보수집에 쏟아부었다. 위트컴 장군 부부의 희생과 봉사는 그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애국심과 인류애의 거룩한 표상이다. 생전 한 여사는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창고를 만들어 유해를 쌓아두고 있는데, 유해가 누구 건지 모른다. 미군 유해를 미국과 협상카드로 생각하니 유해만 모아 쌓아 놓은 거다”라며 “나는 유해 발굴에 협조하는 역할을 했고, 유해가 발견되면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사무국(DPMO, 2015년 국방부 직할청 DPAA로 격상)’이 사망·실종자 명단과 맞춰본 뒤 친인척 유전자 감식을 통해 진위를 밝힌다”고 말한 바 있다. 공식적인 미군 유해 송환은 1954년 유엔 측이 북한으로부터 유해 4011구(국군 유해 2144구, 나머지는 유엔 참전군 유해)를 돌려받은 이후 잠정 중단됐다. 90년대 초 북한은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며 보상금을 요구했는데, 96년부터는 북한에 인력과 장비를 보내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여 220여 구의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2005년 북핵 문제로 북·미 관계가 악화되자 안전 문제 때문에 미군 유해를 발굴 작업은 중단됐다. 그리고 한묘숙 여사는 위트컴 사후"위트컴 장군 희망재단"을 설립하여 고인의 숙원사업을 30년 넘게 지속했다.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미군 유해를 찾아 중국 및 북한을 떠돈 한 여사는 2017년 1월1일 90세의 생을 마감하며 그리운 남편 곁으로 떠났다. 그해 1월4일 그녀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의 존경하며 사랑하는 남편 위트컴 장군 묘역에 함께 안장됐다. 유럽 전선과 한반도 전장을 넘나들며 승리의 발판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애국심과 인류애의 표상이 된 남편은 자신의 평생 숙원을 실천한 아내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위트컴 장군은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유일한 유엔군(미군) 장성이며 한묘숙은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남편 위트컴 장군의 유지를 구현하기 위해 30여 년을 중국과 북한에서 떠돈 아내의 일생은 한 편의 대하(大河)드라마 같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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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7-26
  • [김희철의 전쟁사(191)]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㉙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묘숙 여사가 민간 차원에서 특히 여성의 신분으로 이러한 유해발굴 사업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고, 이로 인해 한때는 이중간첩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유골을 찾으러 왔다고 할 수 없어 중국 대리상을 통해 도그택(군번줄)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군번줄을 가져오면 하나에 500달러, 혹은 1,000달러를 주었는데 큰 돈이 계속 투입되었다. 또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유골도 사 모아 보았지만, 대부분이 짐승들의 뼈였다. 어떤 때에는 북한이 정치적 흥정을 붙이기도 했던 와중에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5년 이후에 숫제 문을 닫아버려 북한 방문이 더 어려워졌다. 한 여사가 유해발굴 사업을 위해 중국에 머물고 있던 1982년 7월12일, 86세의 위트컴 장군이 서울 용산의 미8군 전용호텔이던 내자호텔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위트컴의 평생 숙원인 유해발굴 사업 때문에 존경하는 남편의 임종도 못 지키게 됐다. 아무튼 시간과 노력에 비해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지만 위트컴의 미군 유해발굴 송환 의지와 한묘숙의 헌신적 노력은 그 이후 한·미 국책사업으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중국에 오래 있다 보니 그녀를 찾는 한국 사람도 많이 생겼다. 1980년대 후반 한 여사는 주중 한국대사관과 ‘비슷한’ 역할을 했는데, 김영삼(YS)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방중(訪中) 요청 친서를 직접 공산당 간부에게 전달했고, 대기업 인사들과 중국 고위층을 연결해주기도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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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2
  • [김희철의 전쟁사(190)]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돌이켜 보면 결혼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을 맡아 백악관과 긴밀히 연락하며 한미 외교라인의 가교 구실을 했던 위트컴 장군은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고문 신분으로 사이공에 갔다. 그때 한 여사도 함께 따라가 그곳에서 몇 해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위트컴 장군은 한 여사에게 “홍콩에 한 번 다녀오라”고 부탁했다. 홍콩에서 중국으로 갈 방편을 마련해보라는 말도 남겼다. 그 이유는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한 여사가 홍콩을 드나들던 1979년, 홍콩 사업가의 초청으로 중국 본토에 입국할 기회가 생겼다. 그때 위트컴 장군은 아내에게 “6·25남침전쟁 때 죽은 미군 병사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며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2011년 4월 주간동아에 실린 한 여사의 생전 인터뷰는 이렇다. “장군님이 왜 중국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그토록 애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가 중국으로 갈 때면 장군님은 지도 한 장과 만날 사람의 리스트, 미국대사관 위치를 알려줬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장군님은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에서 무관으로 일한 적이 있어 그때 사귄 중국 고위층을 잘 알았어요”라고 덧붙였다. 또한 “베이징 서우두(首都) 국제공항에 내리면 마중 나온 사람이 ‘홍치’(紅旗·중국 자동차 상표)를 끌고 와 나를 에스코트했는데, 장군님이 다 연락을 해놓았는지 그대로 따라가면 됐어요”라며 신기한 듯 미소를 지었다. 특히 중국이나 북한에서는 유해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는 위트컴 장군도 일절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만약 우리가 ‘뼈다귀’ 찾으러 왔다면 아마 미쳤다고 오해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수십 차례 한국과 중국을 오가다 그녀는 아예 중국에 눌러앉았다. 주로 베이징호텔과 젠궈(建國) 호텔에 투숙했는데, 젠궈호텔 810호에서는 8년간 거주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기자가 “30년이 넘었는데 왜 지금까지 미군 유해 발굴을 계속하느냐”고 묻자 한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장군님이 돌아가실 때도 ‘북한에 묻힌 유해를 제발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데요. 그래서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어요. 사별 후에 미혼이었던 그가 구태여 나와 결혼한 건 자신이 죽어도 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회상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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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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