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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전자(DNA) 정보를 확보해 국가 관리기록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황기환 지사의 유전자(DNA) 정보는 지난 4월10일 순국 10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파묘하는 과정에서 채취한 시료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 확보하였다. 황기환 지사 유해는 2008년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발견되어 2013년부터 국내봉환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으나 유족이 확인되지 않아 2차례 법원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국가보훈부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지난 1월 31일 묘지 측이 파묘에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은 황기환 지사 유해의 유전자(DNA) 정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파묘 과정에서 시료를 확보해 4월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황기환 지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 유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전자(DNA)정보가 황기환 지사의 유족을 확인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분석기법을 적용해 2개월만에 어렵게 정보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황기환 지사의 소중한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하고, 유족을 찾는데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앞으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협업해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국외 독립유공자의 유해 유전자(DNA) 정보를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고 후손을 찾는 중요 단서로 활용해 이분들의 희생과 공헌이 우리사회에 영원히 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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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시크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 대행 등이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복지증진 업무협약’을 3일 10시에 체결했다. 이날 업무 협약은 대한민국 자유수호에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분위기 조성,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삶 향유를 위한 복지증진, 생활안정을 위한 일자리 지원 확대 등을 목적과 주요 골자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업무협약에 따라 첫 번째 실천사업으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부-전국경제인연합회-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께 협력해 자유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곳곳을 쉼 없이 전진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용사의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헌정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발볼 차이로 기성화가 안맞거나 보행 불편이 있는 6‧25참전유공자 및 재방한 유엔참전용사 등 300명 영웅의 발을 삼면측정(3D스캔)하고 그에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One & Only Heroes Shoes)”를 제작해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직접 전달한다. 또한, 맞춤형 신발 제작을 위해 취형한 발 모양과 참전영웅의 인적사항, 참전기간, 누적 발걸음 수 등이 표기된 동판을 제작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헌신에 감사와 예우를 전하는 의미에서 11월 11일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부산)에 맞추어 유엔평화공원에 ‘영웅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모든 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자 일류보훈으로 가는 기본” 이라며 “국가보훈부 승격에 걸맞게 품격 높은 보훈으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경제계와 함께하는 일류보훈 동행’으로 시작된 양 기관의 상호협력은 이번 협약으로 더욱 공고화되어 향후 주거개선 및 제대군인 일자리 지원 등 국가유공자 생활안정을 위한 복지증진 사업으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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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전문기자] 주모로코 한국대사관(대사 정기용)은 6·25 남침전쟁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북아프리카 모로코 군인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족은 6·25 남침전쟁에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하메드 벤 카두르 라스리(당시 병장·실제 모로코 이름은 무흐 벤카두르 엘 아스리)의 딸인 프테탐 엘 아스리(81)씨와 손녀다. 라스리씨는 1951년 3월5일 1037고지 전투 중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유해는 부산 유엔 공원에 안장돼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9월 프랑스 군사기록원 자료를 통해 라스리씨를 포함한 8명의 모로코 군인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6·25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고, 모로코 보훈처와 함께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나섰다. 6·25 남침전쟁의 숨은 영웅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윤종진 보훈처 차장이 지난해 12월 현지 방문을 계기로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적극 나선 모로코 보훈처는 몇달간의 조사와 확인 끝에 첫 성과를 냈다. 그러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라스리씨의 병적 상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달리 기재된 데다, 유족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소재 파악도 어려웠다. 딸인 프테탐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군복 입은 사진이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단 한 가지 단서였다. 프테탐씨는 "4살 때 입대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6·25 남침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부산 유엔 공원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모로코인 참전용사들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프랑스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된 이유다. 모로코 참전용사 확인 작업은 애초 2012년에 시작됐지만, 당시 모로코 측에서 관련 자료 확인에 난색을 보이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참전용사 확인은 2021년 정 대사가 엘렌 르 갈 당시 주모로코 프랑스 대사에게서 6.25 참전 모로코인 자료가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재개됐다. 이후 부산 유엔공원에서 모로코 출신 참전용사 2명이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 대사관측은 프랑스 참전용사 및 전쟁피해자 사무소(ONACVG)의 협조로 프랑스 군사 기록원에 남아있는 관련 기록을 확보, 지난해 처음으로 참전용사 8명의 존재를 찾아냈다. 정기용 대사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에 모로코 출신 6·25 참전용사 가족을 찾게 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추가로 참전 용사와 가족을 찾는 한편 모로코 내 학교 교재에 이 사실을 수록하고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후속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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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며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인보다도 백선엽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라며 “백 장군님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시어 현재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작금에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이 계속되는 속에서 출범하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참군인 김관진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 이 재단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틸러리 전 연합사령관, 권오성 육군협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국회 회의 때문에 늦게 도착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만든 분, 백선엽 장군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내신 분, 박정희는 오늘의 선진 경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축사를 시작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렇기 때문에 이 세분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라발전에 큰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입니다. 허나 지난 정권에서는 폄하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세분의 역사적인 공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본 장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의 일에도 분골쇄신의 각오로 절대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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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창군(創軍) 원로이자, 6.25남침전쟁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할 때에 다부동전투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만드시고, 평양 선두입성, 중공군의 공세 저지, 남부군 토벌 등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셨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중에 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어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과 제10대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지신 구국영웅이다. 미군은 지금도 백선엽 장군님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있다. 백 장군은 전역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해서 교통부 장관 재임시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내신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에 김관진 이사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公人)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 ‘제복의 영웅’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여러 추모 및 기념단체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초일류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백남희 여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훈부의 도움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창립하여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장군님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공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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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회관에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호텔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민식 보훈부 장관, 권오성 육군협회장, 이중근 부영그룹회장, 고현석 육군참모차장, 벤플리트 장군 손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홍두승 단장)의 식전 공연에 이어 초대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녀이자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2부에서는 김재창 장군의 ‘가까이서 본 선배 백선엽 장군’과 유광종 대표의 ‘백선엽,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주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다부동 대첩 및 평양입성 전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던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의 박형수(94세) 회장과 김주찬(94세) 부회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전장 실상을 이야기할 때와,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가 환영사로 대한민국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며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한 백선엽 장군과 인연을 맺였던 청년 대표와 연평해전 전사자 서정우 하사의 모친의 플로어 맨트도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땐 국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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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⑭표트르(Pyotr)대제의 공정한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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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⑭표트르(Pyotr)대제의 공정한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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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3)]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99년 7월, 33년전 아버지가 지휘했던 중동부 최전선 보병연대에 아들이 다시 연대장으로 지휘봉을 잡게 돼 화제가 되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화제의 주인공은 육군산악부대 예하 연대의 37대 연대장으로 7월20일 취임했던 김봉환(육사34기) 대령이었다. 김대령은 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 축구 골키퍼로 지금은 없어진 ’3군사관학교체전‘에서 맹활약하여 선후배에게 신화로 각인된 만능 스포츠맨으로 경호실 등 전후방 각지에서 작전전문가로 근무했다. 지난 1966년 아버지 김촌성(육사8기.예비역준장)씨가 14대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초등학교 5년생으로 장병들과 함께 생활하던 바로 그 부대에 다시 연대장이 되어 33년만에 돌아왔다. 또한 김대령이 1997년 2월 육군대학 공격학처 교관으로 부임할 당시에도 사상 첫 육군대학 2대 교관 탄생 기록을 남겼던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 및 본인 3대가 육군 장교로 근무한 전형적인 무관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김촌성장군은 1948년 육사에 입학해 ’49년 1월 육군 기병소위로 임관, 다음해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 등 많은 훈.표창을 받았으며 전후방 주요 직책을 거쳐 아들이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79년에 준장으로 예편했다. 지난 1944년 조선 신궁체육대회 중장애물 승마경기에서 일본선수를 물리치고 우승하기도 한 김장군은 예편후 LA올림픽 한국승마선수단 감독, 서울올림픽 승마경기 국제심판으로 활동했으며 국제승마협회 공인국제심판도 역임했다. 조부인 故 김인영 예비역 헌병중령(헌병3기)은 아들보다 늦게 1950년 1월, 47세의 나이에 헌병대위로 임관, 치안경비와 포로 후송을 위해 창설된 헌병사령부 예하 2대대 9중대장으로 6·25남침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당해년도 10월21일 강원도 철원군 금화읍 읍내리에서 치안경비와 포로후송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김봉환 장군은 37연대장 취임시 "어릴 적 뛰놀던, 아버지의 땀과 열정이 배어있는 부대를 지휘하게 돼 기쁘다"면서 "최강의 전투부대를 만들기 위해 힘쓰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김 장군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매년 ’금화지구 희생 헌우(군사경찰 전우) 추도식‘이 매년 지속되어 잊혀지기 쉬운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후배 장병들에게 군인으로써 호국정신과 애국심 및 희생정신을 일깨워주고 있으며 3대를 잇는 육군장교 가문으로 작금의 청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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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3)]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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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⑬이스라엘 다얀 국방장관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이스라엘이 아랍권의 13개국과 전쟁을 할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이었던 다얀 장관은 전 세계를 향해 성명을 발표했다. “지금 이스라엘 군대는 막강한 최신무기로 무장하였다. 우리는 이 무기로 아랍연합군을 수 시간 내에 물리칠 것이다.” 이소식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퍼지자 미국과 구소련 등 강대국까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핵무기 또는 그보다 더 강력한 신무기를 개발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무기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이스라엘이 개발한 신무기를 알아내려고 노력을 했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전쟁은 6일 만에 끝났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신무기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후 다얀 장군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단 세 시간 만에 승리를 굳힐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최신무기 덕분이다. 이스라엘 전군의 가슴 속에 비장되어 있던 그 무기는 바로 불타는 애국심이었다.” 결국 불타는 이스라엘 민족의 애국심은 몇 십 배나 되는 적군을 단 시일 내에 무찌를 수 있었던 가장 강한 무기였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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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⑬이스라엘 다얀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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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⑫한신장군의 해의퇴식(解衣堆食)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해의퇴식이란 “자기의 옷을 벗어서 남에게 입혀주고 자신이 먹을 음식을 먹여 준다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 성어이다. 상급자가 아랫사람과 동고동락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진(晉)나라 말년 각국의 제후들이 다투어 일어나 진에 반항하였다. 한 왕의 후손인 한신도 한 자루의 칼을 들고 종군하여, 처음엔 한 왕의 부하로 몸을 의탁하고 있다가 한 왕이 죽은 후 항우의 밑에서 작은 벼슬을 하였다. 그러나 항우가 한신을 중용하지 않자, 한신은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없어 후에 다시 한 왕 유방의 부하로 투신하였다가 한 왕에게 중용되어 초(楚)의 명장 용저를 패사시켰다. 항우는 이 소식을 듣고 겁을 먹어 한신에게 사람을 보내어 유방으로부터 이탈하여 자기와 함께 천하를 삼분해서 각기 왕이 될 것을 종용하였다. 한신이 그 사신에게 “부하를 믿지 않는 한 왕 밑에서는 일할 수 없으며, 자신의 옷과 음식을 나누어 줄 정도로 부하를 아끼고 믿는 유방을 배반할 수 없다.”고 전하라고 일렀다. “사람을 쓰게 되면 의심하지 말 것이며,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 말라(用人不疑, 疑人不用)”는 속담이 있다. 윗사람이 부하를 신임한다면 부하도 역시 충성스럽게 보좌하며 절대로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부리거나 사귀는데 진정과 성실로 대하고 상호 신뢰감을 잃지 않는 것이 정도라 하겠다. 한신장군의 해의퇴식을 통하여 지휘관과 부하 간에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상급자와 하급자 간에 신뢰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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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⑫한신장군의 해의퇴식(解衣堆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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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2)]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10월1일, 국군 1군단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했고, 유엔군은 10월9일, 서부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평양이었다. 이후 북한군이 결사적으로 평양을 방어하는 가운데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의 선두 입성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다. 미 1기병사단의 우측에서 공격하는 국군 1사단은 차량 부족으로 11일 아침에야 고랑포 정면의 38선 진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 후 시변리(13일)-신계(14일)-수안(16일)-상원·율리(17일)-평양 동남쪽 지동리(18일)-대동강 동쪽 도달(19일 아침)까지 미 1기병사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10월19일 오전 지동리를 넘어선 1사단은 평양을 향해 총진격을 개시했다. 이때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자신이 어릴 때 수영을 배웠던 이 지역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미군의 도하공격 하루전인 19일 밤에 도착할 도하장비를 기다리고 있던 미군을 제치고 국군 15연대는 대동강 급속도하를 감행을 건너 본평양에 진출할 수 있었다. 드디어 10월19일 오전 10시50분경 제1착으로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목적지인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에 국군 1사단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이로써 국군 1사단은 제11·12연대가 동평양에, 제15연대가 본평양에 최초 입성한 부대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반면에 대동강 남쪽에서 공격하던 미군은 10월20일에 날이 밝자 부교를 가설하고 본격적인 도하를 감행했다. 한편 우리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던 10월21일 6시30분경, 헌병사령부 제2대대 9중대는 철원군 금화읍 읍내리에서 치안경비와 포로후송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 18명, 실종 42명, 부상 9명의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장렬히 산화하신 선배 헌병전우들의 영령을 추모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길은 길고도 어려웠다. 결국 선배 헌병 전우들이 금화지구에서 목숨을 바친 지 46년이 지난 1996년 10월21일에 이르러서야 당시 육군 헌병감실과 생존 전우, 헌병 7학병 동지회를 비롯한 선후배 헌우 및 헌병병과 장병들의 정성을 모아 추모의 위령비를 세울 수 있었다. 전몰 장소는 현 위령비 위치에서 20Km 이격된 민통선 북방이라 출입이 곤란하고 관리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어 유족들의 참배와 관리가 용이한 당시의 3사단 헌병대 위병소 앞에 건립하게 되었다. 최근 백골부대인 3사단의 군사경찰(헌병) 대대가 상부 계획에 의거 타 지역으로 이전했으나 현지 장병들의 변함없는 적극적인 지원으로 위령비 관리와 행사 준비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 다시금 우리 국군장병들이 이렇게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며 숭고한 희생정신과 그날의 교훈을 되새기면서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고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서 임무를 다하는 모습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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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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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2)]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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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⑪미 해군참모총장 제레미 마이클 보더(Jeremy Michael Boorda)대장의 명예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1996년 5월 16일, 미합중국 해군참모총장 제레미 마이클 보더 대장이 자신의 불명예를 자살로 씻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세계가 놀란 것은 해군 참모총장이라는 신분과 계급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미 해군 역사상 가히 전설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데다가, 또 그가 불명예로 여긴 일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도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 해군 역사상 16세에 말단 수병으로 입대하여 대장계급의 참모총장에까지 오른 사람은 그밖에 없다. 수병으로 근무할 당시에도 ‘수병 중의 수병’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우수한 병사였다. 1961년 간부로 선발되어, 장교로 임관한 후에는 대소 전투함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역시 훌륭한 지휘관으로 주목받았다. 1994년에는 NATO군 사령관으로서 당시 보스니아 폭격명령을 내리는 등 과단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몇 해 전부터 V마크의 훈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다가 최근에 그것을 뗀바 있다. 뗀 이유를 추궁하기 위해 ‘News Week’지 기자가 인터뷰를 신청했다. V마크 훈장은 적과 직접 교전한 병사에게만 수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베트남전선에서 출전한 적이 2번 있으나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그것을 달 자격이 없는데 어쩐 일인지 달고 다니다가 떼었던 것이고, 매스컴이 이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기자가 인터뷰를 신청한다는 보고를 받은 보더 대장은 공보장에게 잠시 집에 갔다 오겠다고 외출, 집에 도착하자 바로 38구경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 것이다. 그는 2통의 유서를 남겼다. 하나는 ‘가족에게’ 또 하나는 ‘우리 수병들에게’라는 제목이었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가족에게 보낸 유서에는 훈장문제로 매스컴의 추궁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해군에 보낸 유서에는 “여러분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씌어 있었다. V마크를 달았던 것은 악의 없는 과실이었지만, “추문을 좋아하는 매스컴에 거론되면 해군의 명예가 실추 될 것이기 때문에” 거론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터뷰를 거절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가 자격이 없으면서 훈장을 달고 다닌 것은 과오에 틀림없지만 과오야 어떻든 지극히 사소한 실수를 불명예로 알고 죽음으로 보상한 그의 군인정신은 본받을 만 하다. 여러분은 가슴에 수여받지 않은 훈·기장은 부착되지 않았습니까? 명예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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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⑪미 해군참모총장 제레미 마이클 보더(Jeremy Michael Boorda)대장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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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1)]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겨울 날씨가 쌀쌀했던 지난 10월21일 오전 강원도 철원군 자등고개 북쪽 과거 헌병대대가 주둔하던 곳 위병소 앞자리에서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역전의 용사들과 함께 금화지구 희생 헌우(군사경찰 전우) 추도식이 열렸다. 코로나-19의 위기속에서 개최된 의미있는 추모식은 위난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자 불타는 충성심으로 군사경찰(헌병)의 투혼을 불사르며 장렬히 산화한지 71년이 되는 날이자, 당시 헌병감실과 생존 전우들이 위령비를 건립한지 25년이 되는 날이다. 행사는 대한민국헌병전우회가 주관하여 치열한 전투 당시 생존자인 문기택, 박우제 및 유족 대표 김봉환(육사34기 예비역 준장), 최상배 등 관련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과보고, 헌우회장 홍종설(육사34기, 전 국방부 조사본부장) 예비역 소장의 추모사 등으로 진행됐다. 또한 역대 헌우회장인 권영욱(육사28기)을 비롯하여 각지역 헌병전우회 및 산악회, 삼필회 그리고 3사단장 손식 소장(육사47기)과 국방부 및 육군의 군사경찰 지휘관 등 50여명이 참석하여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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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1)]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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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⑩ 나폴레옹의 이집트를 원정시 명연설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하는 사이에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군의 세력 하에 들어가 있을 때 남긴 말이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준비에 만전을 기한 다음 전쟁을 일으켰는데, 천연적으로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알프스를 넘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주력군의 총지휘를 모로(Moreau)에게 맡기고, 자신은 예비군을 지휘하여 이탈리아 방면으로 진격키로 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기 위해 지형정찰대를 파견했다. 그런데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정찰대장의 보고내용은 의외였다. 험난하기로 이름난 천험(天險)의 지형이라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이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부대원들은 소수의 인마(人馬)마저 통과하기 어려운 첩첩산중을 대군이 횡단하도록 한 초 모험적인 행동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장군의 강한 의지력 때문에 오히려 사기가 더욱 앙양되었다고 한다. 또한 1797년 5월 19일 오리엔트 호(號)를 타고 이집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이 상륙 후 찌는 듯이 무더운 사막에서 원주민의 기습을 물리친 후, 부족한 식수와 싸우면서 염열지대(炎熱地帶)를 20일 간이나 진군한 뒤 수도 카이로 성(城) 근처에서 결전을 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천천히 피라미드를 가리키며, “여러분! 우리 프랑스 4,000년의 역사가 저 피라미드의 정상에서 여러분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소!”라는 명언을 토했다. 이와 같은 나폴레옹의 연설은 계속된 강행군과 소규모의 전투로 피로와 갈증에 지친 장병들을 감동시켰고, 이 말을 들은 그들의 사기는 샘물처럼 솟아나서 전승을 획득했다. 이처럼 나폴레옹은 항상 시기적절하게 장병을 고무하는 명연설을 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지휘관으로서 항상 숙고해야 할 요결이라 하겠다. 여러분은 난관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극복하겠습니까? 지휘관의 의지는 불가능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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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⑩ 나폴레옹의 이집트를 원정시 명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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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⑨오기 장군의 뜨거운 부하사랑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중국 위나라에 오기라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병사와 똑 같은 옷을 입고 음식도 같이 먹었다고 한다. 잘 때도 잠자리를 따로 펴지 않으며, 행군할 때도 혼자 수레에 앉아 있지 않았고 자기 식량도 자기가 직접 가지고 다녔다.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해야 한다는 오기 장군의 신념은 철저했다. 오기 장군의 병사들 중에 한 명이 종기로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자 오기는 괴로워하는 병사의 모습을 보다 못해 그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었다. 훗날 이 얘기를 전해들은 병사의 어머니는 아들의 고통을 덜어준 장군의 호의를 고마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목 놓아 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상히 생각해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당신의 아들은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은데 장군이 직접 고름을 빨아준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이요? 그런데 왜 우는 것입니까?” 그 병사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더 한층 슬피 울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지난해 장군께서 그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주셨습니다. 그는 오기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끝까지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앞장서 싸우다 죽었습니다. 이번에는 제 아들의 종기마저 빨아 주셨다니···. 이제 그 아이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물론 오기 장군이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자신의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만약 오기 장군이 자신의 수레 위에서 한 발짝도 내려오지 않았으며, 자신의 짐을 다른 부하들에게 지우고, 전쟁 중에도 혼자서 좋은 음식에 좋은 잠자리에서 잤다면, 부하의 다리에 종기가 났는지 또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알지 못했겠지요. 또 평소에는 전혀 부하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는 상관이 설사 고름을 빨아준다 하더라도 부하들은 그것을 일과성이고 전시적인 것으로 받아드리고, 내심으로는 거부할 것이다. 생사가 달려 있는 전쟁터에서 부하를 모르는 상관의 명령에 목숨 바쳐 복종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아마 대개가 “왜 하필이면 제가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도 많이 있잖습니까?”하며 불평할 것이다. 부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관의 명령에 따를 수 있게 하려면 먼저 상관 자신이 부하들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는 각오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오기 장군은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권위, 편하고자 하는 마음, 존경받고자 하는 마음,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의 수레에서 내려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그곳에서 부하들의 웃음과 눈물을 보게 될 것이고 그들과 함께 웃으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기 장군의 뜨거운 부하사랑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런 좋은 하루입니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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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⑨오기 장군의 뜨거운 부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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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⑧시저(Julius Caesar)와 나팔소리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시저는 5대1로 열세인 병력을 이끌고 고올(Gaul) 지방으로 반란군 진압 차 출정했다. 어느 날 공격을 위한 배치를 마치고 연락장교를 불러 나팔대와 예비대에 연락용 비둘기를 띄워 즉시 이곳으로 연락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연락장교는 몹시 곤란해 하다가 “각하! 약 5백 명 가량의 예비대는 북방 16km 지점에 있고 나팔대는 정반대 방향인 남방 16km 지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연락을 취할 비둘기는 현재 한 마리밖에 없기 때문에 둘을 동시에 부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조용히 자기의 의견을 덧붙였다. 그러자 시저는 주저함이 없이 “아니야, 전투의 승패는 병력 수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문제이다. 나팔대를 불러라. 나팔소리에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되고 병사들은 진격하여 승리를 거둘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500여 명의 병력보다는 병사들의 사기에 직결되는 나팔소리에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군 생활을 할 때 부대훈련 출발 및 복귀 시에 군악대 연주를 들으면 기분이 어떠했습니까? 전장에서 진중방송과 기도비닉과의 관계를 볼 때 어느 쪽이 전투에 유리하다고 생각합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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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⑧시저(Julius Caesar)와 나팔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