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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 ‘9·19 군사합의’ (하)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이 군사합의에 따르면 금번 무인기의 도발은 명백한 합의사항 위반이다. 특히 이번 무인기 도발은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도 “정찰, 감시를 넘어 언제라도 폭탄과 화학무기 등을 이용한 기습 공격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예상을 가능케 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북한의 군사합의를 무시한 북한의 군사적 행동들이 여럿 있었다. 지난 10월 북한은 야음을 틈타 군사합의가 설정한 비행금지구역 코앞까지 군용기를 내려보낸 데 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인 탄도미사일 발사에 나선 다음 9·19 군사합의를 명시적으로 위반하는 완충구역 내 방사포 등 포병 사격까지 감행했다. 이제 더이상 북한의 선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지난 정부에서 그토록 자랑하던 9·19 군사합의는 북측의 계속되는 위반으로 무실화를 넘어 폐기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번은 실수로 볼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합의사항 이행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명백한 의도로 보아야 한다. ◀김진형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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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 ‘9·19 군사합의’(상)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 전문기자] 합동참모본부는 26일 오전 10시 25분경부터 미상 항적 수 대가 인천 강화군, 경기 김포시, 경기 파주시 인근 MDL을 넘어 우리 영공에 침입한 사실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합참은 일부 무인기가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민간인 지역까지 비행했고, 일부는 육안으로 식별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북한 무인기 5대가 2014년 이후 처음으로 우리 영공을 침범해 서울 상공까지 침투한 것이다. 우리 군의 대응 작전으로 인천국제공항과 김포공항의 민항기가 한때 이륙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이 일체의 군사적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합의했다. 바로 ‘9·19 군사합의’이다. 핵심 내용은 △일체의 적대행위 중지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 △서해 해상 평화수역화 △교류협력과 접촉 왕래 활성화를 위한 군사적 보장대책 강구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강구 등 5개 분야에 걸친 합의사항을 합의문에 담았다. 합의서 1조 3항을 상기해 보면, 쌍방은 2018년 11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상공에서 모든 기종의 비행금지구역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기로 했다. “고정익항공기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동부지역은 40km, 서부지역은 20km를 적용하여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다. 회전익항공기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10km로, 무인기는 동부지역에서 15km, 서부지역에서 10km로, 기구는 25km로 적용한다”라고 명기됐다.(하편 계속)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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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미사일 대비해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절실(하)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둘째, 한반도 안보 문제에 한국이 직접적 당사자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은 미·일 동맹을 기반으로 한 안보공동체다. 그러나 한반도 안보 문제에 미·일 두 나라가 따로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 문제,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이 제외된 협력체계가 가동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이 중심에 서서 한반도 문제를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우리 문제가 다른 나라에 의해 간섭받고 심지어 배제된 뼈아픈 경험이 있다. 현재 우리의 군사력·경제력·외교력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일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 있게 한반도 문제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한·미·일 및 한·일 군사 협력은 한국이 먼저 적극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2016년 체결됐지만, 문재인 정부 시절 논란이 됐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정상적 복원을 통한 한·일 및 한·미·일의 원활한 정보 소통체계를 구축하고 군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한·미·일 군사협력 체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확고한 한·미 동맹에 기반을 둔 한·미·일 군사협력, 군사 동맹이 아닌 한·일 군사협력이 담대하게 추진된다면 북한의 도발 억제는 물론 안정적인 한반도 상황 관리가 가능해진다. 글로벌 중추 국가를 위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노력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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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미사일 대비해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 절실(상)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한국과 미국·일본 국방부 장관은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미사일 경보 훈련과 탄도미사일 탐지·추적 훈련 정례화 등 대북 공조 방안에 합의했다. 3국 장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 정착을 달성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자는 약속도 했다. 이를 놓고 일각에서는 일본의 군사 대국화와 연계하며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한·미·일 3국의 무기 시스템과 국제정치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이제는 한·미·일 군사 협력에 대한 담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9, 10월 북한의 계속된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한국 해군과 미국 핵 추진 항공모함,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참가한 3국 연합훈련이 동해에서 두 차례 진행됐다. 북한은 지난 10월 이후 항공기·탄도미사일과 포병 사격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발했다. 특히 지난달 14일에는 화성-17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북한은 핵 탑재가 가능한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뿐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도달 가능한 ICBM을 발사함으로써 미사일 능력을 과시했다. (중편 계속)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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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리딩코리아, 책 읽는 군인으로 강한 군인 만들기,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전문기자] 사단법인 캠프리딩코리아와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는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는 신병들에게 배부할 1,850여 개의 ‘책꾸러미 전달식’을 실시했다. 책꾸러미 전달식에는 캠프리딩코리아 정병국 대표와 유성욱이사,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민승현 본부장 그리고 박원호 육군훈련소장이 참석하였으며, 코로나19 확산방지 차원에서 최소인원으로 진행되었다. ‘책꾸러미’는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에서 제작한 독서가이드북 및 독서노트와 양서 1권 등 총 3권으로 구성된다. 양서는 신병들이 서로 돌려볼 수 있도록 젊은 세대가 좋아하고 시중에서 도서판매 순위가 높은 70여 종의 신간 서적이 전달됐다. 책꾸러미 전달은 '책 읽는 군인'으로서의 힘찬 출발을 지원하는 독서진작 프로그램이다. 입대와 함께 독서를 경험하게 하고 책 읽은 습관을 갖도록 하여 병영독서문화로 발전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입대 장병과 가족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캠프리딩코리아 정병국 대표는 “입시 위주의 교육과 취업 준비 등으로 바빴던 청년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독서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은 병영문화를 선진화하여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미래의 리더를 육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책꾸러미는 매년 12만 명의 청춘이 정예 용사로 다시 태어나는 정병(精兵) 육성의 요람 육군훈련소에서 병영독서문화를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또한 장병들이 군 복무 기간을 사회 진출을 대비하는 유용한 자기계발의 기회로 만들 뿐만 아니라 독서를 통해 열린 병영, 소통하는 선진 군대문화 조성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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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0)]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상징 명칭이 ‘열쇠부대’로 불리는 5사단은 1948년 4월29일 경기도 수색에서 3, 4, 9연대를 기반으로 5여단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후 여단 주둔지가 전라남도 광주로 변경되었고, 1949년 5월12일, 5보병사단으로 승격했다. 이때 15, 20연대가 사단으로 배속되었다. 초대 사단장은 송호성 준장. 이후 1949년 7월에는 백선엽 대령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사단은 15연대를 전주에, 20연대를 광주에 주둔시켜 빨치산 토벌을 주 임무로 하며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였고,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후 1950년 6.25남침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의 소환으로 서울 용산에 올라와 북한군 남하 지연작전에 참여하였다. 이 시점에는 백선엽이 1사단으로 옮겨가고 이응준(군영1기) 준장이 사단장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말이 지연전이지, 닥치는 대로 투입하라는 채병덕 총장의 삽질 작전지시로 말미암아 예하 부대들은 사단장조차 모르는 사이 많은 병력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와중에 2개 대대로 부대 건제를 유지했던 15연대는 1개 대대만 남은 1사단 13연대 재건을 위해 해체되고, 20연대 역시 창동 - 미아리 축선 방어전을 위해 한강 이북에 투입되었다가 전멸하여 지휘 가능한 연대들이 사실상 없어졌다. 그래도 남은 병력들을 긁어모아 7월1일부터 시흥전투지구사령부 예하부대로서 지연전을 전개하며 철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나마 있던 병력들까지 분산되어 17일에는 기어이 사단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후 1950년 10월8일 대구에 주둔 중이던 27연대, 마산에 주둔 중인 35연대, 부산에 주둔 중인 36연대를 근간으로 대구에서 5보병사단을 재창설하였고, 이 연대들이 지금까지 이르게 됐다. 다시 재창설된 5사단은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루었는데, 그 중 36연대가 미 2사단 예속으로 치룬 ‘피의 능선 전투’와 ‘가칠봉 전투’가 유명하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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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①아이젠하워 대장의 멋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가을 아이젠하워(Eisenhower)대장은 29사단을 방문하였다. 진흙투성이의 미끄러운 언덕에서 병사들과 이야기를 마친 후 군용차가 있는 곳으로 뒤돌아가던 아이젠하워는 진흙길에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병사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나 막상 장군이 일어나 그들을 바라보자 병사들은 행여 야단이라도 맞을까 보아 입을 다물고 일순 긴장했다. 진흙투성이의 아이젠하워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전쟁 중에 여러분을 만나 이야기하고, 또 이렇게 여러분을 웃겨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니 오늘 방문이야말로 대만족일세!” 연합군이 라인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아이젠하워는 몹시 침울해 보이는 한 병사를 만났다.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하고 아이젠하워가 묻자, 병사는 “장군님, 겁이 나서 그렀습니다. 저는 두 달 전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내내 입원해 있다가 어제 퇴원했는데 또 전투에 나선다니 별로 기분이 좋질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이젠하워는 병사의 소심함을 꾸짖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와 나는 좋은 짝이군. 사실 나도 겁이 난다네.” 장군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공격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고, 우리에게는 독일군을 격퇴할 항공기와 막강한 공수부대도 있다네. 우리가 함께 강을 따라 걷다 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걸세.” 1945년 1월 연합군이 파리를 통과할 때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는 전방에서 필요한 O형의 피를 급히 요청했다. 곧이어 많은 지원자들이 진료소에 줄을 이었다. 그 속에는 아이젠하워 연합군 최고사령관도 끼어 있었다. 아무도 그가 최고사령관인 줄을 몰라보았지만 헌혈을 하고 나오자 줄을 서고 있던 한 병사가 그를 알아보았다. 그가 뒤에 있는 다른 병사에게 말했다. “저 피를 내가 수혈 받는다면, 내 몸에 장군의 피가 흐르는 건데.”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 나쁜 성격은 닮지 않았으면 좋겠네.” 예화에서 보여주는 아이젠하워 대장의 멋은 병사들을 위해 걱정하고 보살피는 부하 사랑과 더불어 급박한 전황 속에서도 간직하고 있는 삶의 여유에 있다. 우리는 부하들을 위해 어떤 사랑을 베풀었으며 진정으로 하급자를 사랑하고 있는지요...? ◀유철상 프로필▶ 現 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학군23기/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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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①아이젠하워 대장의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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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7)] 김만술소위의 신화, 베티고지 전투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 베티고지는 현재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직접 방문은 어렵지만 태풍전망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국가보훈처는 베티고지 전투에서 기적의 36대800신화를 만들며 맹활약했던 故 김만술 육군대위를 5월의 6ㆍ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 임진강 주변의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 때문에 치열해진 베티고지 전투 베티고지(Betty) 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 결국 베티고지는 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2소대원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에 의해 10배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며 기적적으로 격퇴시키고 사수하였다. 6ㆍ25전쟁영웅 故 김만술 대위는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는 18세의 어린 나이인 1947년 6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다. 이후 부산에 주둔하던 5연대에 소속으로 1948년 ‘여순 10·19사건’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전하는 등 약 6년여의 기간을 부사관으로 복무했다. 6ㆍ25남침전쟁이 발발한 후 평양 탈환작전을 비롯한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탁월한 지휘 및 전투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53년 7월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되어 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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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7)] 김만술소위의 신화, 베티고지 전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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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6)]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⑬ 한미동맹으로 적은 국방비 쓰며 경이적인 경제 성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5월부터 8월말까지 숨 막힐 듯한 폭염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4차 대유행 속에서도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이 열렸던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은 하루 관람객이 3,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역시 파블로 피카소는 입체파 창시자이자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답게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특히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전시물 중의 하나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7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다. 이는 피카소가 1951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6·25남침전쟁을 소재로 2m에 달하는 화폭에 그린 작품으로 오른편엔 투구와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총칼을 겨누고 있고, 그 반대편에선 임신부와 아이들이 잔뜩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다. 피카소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일으킨 “6·25남침전쟁이 공포와 희생을 강요하고 애꿏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비극적인 참상을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 천신만고 끝에 마무리한 포로 송환, 그러나 88명은 중립국 선택 1953년 7월17일 휴전협상이 조인되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8월5일부터 한달간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별 무리없이 판문점에서 교환되었다. 그러나 송환을 원치 않는 한국인과 중국인 포로 2만 2000여 명은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졌다.이들은 인도군이 관리하는 판문점 근처의 비무장지대에 수용되었고. 남북한과 중공 대표들이 3달간 설득 작업을 벌였다. 이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중공군 1만 4,227명, 인민군 7,582명이었다. 특이하게 88명이 제3국행(인도행)을 택했다. 이 중 12명은 중공군, 76명(한국군 2명, 인민군 74명)은 한국인 포로였다.이들이 제3국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제각각이었다. "북녘에 부모님이 있어 지척의 거리인 남한에 살면 부모님을 만날 수 없다는 슬픔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포로수용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남한 땅에서 반공포로로 불리며 살기 싫어서, 공산당이 싫어 남한에 남아야 하는데 20살이기 때문에 다시 군대에 끌려갈 게 뻔해서"와 "초등학교 때부터 미국이 별천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등으로 다양했다. 이들 76명의 한국인 포로들은 1954년 2월 21일 오스트리아 선적 여객선 '아스투리아스호'를 타고 인도 남단 마드라스항으로 떠났다. 이들 포로에 대한 뒷이야기는 ‘광장’과 ‘시간의 저편’ 등의 소설과 영화 ‘공동경비구역’의 중립국감독위원회 책임수사관(배우 이영애 역)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조국을 버린 이들이나 아직도 남북간에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는 국군포로 문제를 접할 때마다 다시 한번 분단의 아픔, 동족상잔의 후유증을 절감하게 된다. ■ 한미상호방위조약 부속합의서인 "한미합의 의사록"으로 미군 자동개입 전략 구현 한편 반공포로 석방에 자극을 받은 미국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고 다른 인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이승만이 요구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휴전협정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승인한다고 통보하였으며, 양국 대표 및 실무자들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한미간에 작성된 상호방위조약 전문을 받아 보니, 조약 3조에 "한미는 각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라는 문구는 강제가 아니어서 불안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 어느 한쪽이 외부의 침략을 받으면 자동개입한다”는 조건을 넣으라고 압박했다. 이것 때문에 한국과 미국은 다시 1년간 줄다리기를 했다. 이 대통령의 명을 받은 외교부와 국방부는 손발이 닳도록 미국을 부지런히 다녔지만 그 문구를 수정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다시 "당신들이 상호방위조약 전문을 수정해 줄 수 없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보완책으로 ‘한미합의 의사록’이라는 부속합의서를 만들어서 그 안에 다음과 같이 명시하자“라고 제안했다. ”1. 한국 육군 20개 사단을 무장화시켜주고, 해군과 공군 전력을 대폭 강화시켜 명실공히 북한의 침략을 억제할 수 있는 70만 대군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한다. 2. 미군 2개 사단을 한국 전방 지역에 고정 배치한다“는 내용을 넣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에 의한 이 요구안은 미국이 울며 겨자 먹기로 합의해 주었다. 따라서 미 2사단과 7사단이 문산과 동두천에 주둔하게 됐다. 그런데 문산과 동두천 축선은 북괴군의 주 공격로이다. 그곳을 거치지 않고는 서울로 진입할 수가 없는 요충지에 미군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북괴군이 남침하면 미군이 자동 개입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절묘한 전략이었다. 결국 이승만이 북진 통일 주장을 접고 휴전협상에 찬 물을 끼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국의 요구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갈등을 무마했다. 이 대통령의 혜안과 배짱 덕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됨으로서 한반도 및 그 주변의 장기적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로써 한미동맹에 따른 미국의 확고한 방위보장에 힘입어 한국은 최근까지 GNP의 4% 이내라는 비교적 적은 국방비만 쓰면서 경제개발 우선정책으로써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보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정치외교력과 애국심에 자연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여건을 만들어준 그분께 감사드리며 명복을 빈다.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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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6)]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⑬ 한미동맹으로 적은 국방비 쓰며 경이적인 경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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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5)]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⑫ 미국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와의 단판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공포로 석방에 놀란 아이젠하워는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대통령 특사로 한국에 급파했다. 로버트슨 특사는 “한국은 많은 유엔군 병력의 생명과 피의 대가로 확보하려는 휴전을 방해할 권리가 없다”는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에 이승만은 과거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배반을 당했는데(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을 때와 1945년 한국이 분단되었을 때), 현재의 상황은 또 하나의 배반을 의미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런 미국에 협력하느니 차라리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하였다. 특사로 한국에 급파되어 이승만과 단판을 벌였던 로버트슨은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그는 “이승만은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로 몰고 갈 충분한 능력이 있는 매우 감정적이며, 분별력이 없고, 비논리적인 광신자이지만,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불굴의 정신은 지원되어야 마땅하다”고 보고서에 썼다. ■ 반공포로 석방으로 협상에서 미국에 힘을 실어주며 ‘한미 상호방위조약’도 체결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단독으로는 북진통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몰랐을까? 모르고 북진통일론을 주장했을까? 많은 역사학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점은 서울에 찾아 온 닉슨과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승만은 닉슨에게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 이 대통령은 이어서 닉슨에게 “내가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미국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두를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 훗날 닉슨은 자신의 회고록에 “나는 이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being unpredictable)’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외교에 능수능란했던 이승만, 또 공산주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상대편에게 심어줌으로써 공산세력과 협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 힘을 실어주었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미국은 유리한 입장에서, 그리고 상대편은 무언가에 쫓기듯 위축된 입장에서 협상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로버트슨과의 2주간의 치열한 협상 끝에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다음과 같은 안건들을 제안하고 동의했다. “1. 정전 후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2. 미국은 한국에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제공하며 1단계로 2억 달러를 제공한다.(1954년 당시 우리나라 수출총액은 2400만 달러였다) 3. 미국은 한국군의 20개 사단과 해공군력을 증강시킨다. 4. 양국은 휴전회담에 있어 90일이 경과되어도 정치회담에 성과가 없을 경우 이 회담에서 탈퇴하여 별도의 대책을 강구한다. 5. 한미 양국은 정치회담을 개최하기 이전에 공동목적에 관하여 양국의 고위회담을 개최한다.” 휴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이런 조건들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전협정 조인 후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는 이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싸워서 이기기보다 평화를 얻는 게 더 어려웠고, 적군보다 이승만 대통령이 더 힘들었다.” 이로써 1953년 7월 27일, 3년 넘게 진행됐던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이루어졌다. ■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전쟁 없이 경제강국 기반 만든 이승만 대통령은 진정한 리더 1953년 8월 3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울로 왔고,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을 했다. 덜레스는 가조인 후 “이 조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되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끔을 포기하는 대가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면 미국의 자동 개입을 보장받고, 70만 대군을 보유하는 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부상하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1953년 10월1일 변영태와 덜레스가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공식 조인했으며, 1954년 1월15일 한국 국회가, 1월26일 미국 상원이 비준함으로써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승만의 예언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에게 그 값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북아에서 70여 년 간 전쟁이 없이 장기간 평화가 유지되는 것도 한미상호방위조약 덕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삼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던 이승만의 심모원려 덕분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가능했다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한미동맹으로 인해 동북아에서는 70여년 간 전쟁이 사라졌다. 그동안 동북아는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남침전쟁 등 대규모 전쟁이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3년 한미동맹으로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장기적인 평화가 이루어졌다. 장기적인 평화 덕분에 제일 먼저 일본이 경제발전을 이루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일어섰고, 이어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으며,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국으로 등장했다. 결론적으로 최근 들어 전개된 동북아의 눈부신 성장은 70여년 전 휴전으로 미봉한 채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의 발목을 붙잡아 한국에 주둔케 한 이승만의 심모원려(深謀遠慮) 덕분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 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한국인들의 진정한 리더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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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5)]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⑫ 미국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와의 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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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4)]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⑪헌병 보호하에 3만여명의 반공포로 대탈주 감행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승만은 이미 1953년 6월6일 미국에 휴전협정을 체결하려거든 먼저 한국과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당시에 미국같은 초강대국에 한국같은 신생독립국이 먼저 군사동맹 체결을 요구하는 것은 통상적인 외교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여기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도박같은 초강수를 두어 버린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 관할에서 벗어나 있는 헌병사령관 원용덕을 불러 반공포로를 석방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이것은 우리가 원치 않는 휴전협정을 언제라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승만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엄청난 도박 감행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는 1953년 6월18일 새벽 1~2시경 북한 송환을 반대하는 반공포로들이 수용돼 있는 부산, 대구, 광주, 마산, 영천, 논산, 부평 등의 7개 포로수용소 하늘에 예광탄이 발사되었다. 동시에 3만5457명의 반공포로들이 우리 헌병의 보호를 받으며 포로수용소 철조망을 뚫고 대탈주를 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1시 미국을 상대로 이번 조치가 자신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것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덕분에 2만6930명이 자유를 찾았다. 그러나 미군이 감시하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경비병의 발포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다쳤다. 탈주한 반공포로중 8293명은 탈출에 실패해 다시 철조망에 갇혔다. 이들은 중립지대 인도군 수용소로 옮겨져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거쳤으나 대부분 석방됐다. 미국은 물론 세계는 이승만의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국의 충격은 정말 컸다. 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즉각 반공포로 석방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브리그스 주한 미대사는 대통령에게 항의하면서 손으로 책상을 치기도 했다. 면도를 하고 있던 영국의 처칠 총리는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면도기를 손에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해 포로들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주민들이 포로들의 옷을 갈아입히고 집에 숨긴 채 숙식을 제공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미국이 가장 놀란 것은 이승만이 1950년 7월 이후 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이양하도록 한 양국의 합의 위반을 넘어, 이를 무시하고 포로들을 석방했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휴전협상을 앞두고 한미 관계에는 균열의 징후가 보였다는 점이다. 클라크 장군이 지휘하는 미 극동군사령부 겸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 정부가 휴전에 반대해 한국군이 유엔군 지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지휘할 경우에 대비한 비밀계획까지 수립했다. 일명 에버레디(Everready)계획이라고 불린 이 계획은 1953년 5월22일 작성되어 워싱턴에 보내졌다. 이 계획에는 필요한 경우 유엔의 이름으로 군정을 실시하거나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철수까지 포함한 아주 민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미국 정부는 한때 쿠데타를 사주해 이승만을 실각시키는 방안까지 검토했으나 국군의 충성심이 높고 마땅한 대안이 없어 접어버렸다. 결국 이승만이 북진통일 주장을 접고 휴전협상에 찬 물을 끼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은 한국의 요구를 수용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갈등을 무마했다. 정말 이승만 대통령은 항간의 소문대로 '내치는 등신, 외교는 귀재'라는 말이 실감난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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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4)]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⑪헌병 보호하에 3만여명의 반공포로 대탈주 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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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3)]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⑩정부의 강력 항의에도 6월8일 포로교환 협정 체결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대선 승리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큰 노력을 했던 것은 다름아닌 북진통일이었지만, 당시의 미국이나 공산권 모두 전쟁 지속보다는 협상의 길을 모색하려는 상황에서 자신의 핵심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유엔 참전국들은 자국 군대가 큰 희생을 치르지 않도록 하면서도 패배를 당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전진도 후퇴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선을 유지시키고만 있었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이제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상황을 이용해 겉으로는 북진통일을 고집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선택한 것 중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휴전후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었다. 그러던 중 1952년 말 유엔총회는 인도 주도하에 이루어진 장기간의 토의 끝에 12월3일 54:5의 표결로 남북한 양측에 억류되어 있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단에 넘길 것을 규정한 인도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결의안을 채택한 12월3일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 조기 종결’ 공약을 강도 높게 주장했던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방한한 날이기도 했다. ■ 이승만 대통령, 판문점 협상에서 반공포로들의 강제송환 결정에 대노 다음해인 1953년 2월2일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한달 뒤인 3월3일에는 6.25남침전쟁을 사주해 동족상잔 비극의 원흉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했다. 전쟁의 주모자가 사라진 것은 전쟁의 조기 종결 가능성을 높힐 수 밖에 없었다. 소련 정부는 3월19일 중국과 북한에 “전쟁의 종결은 세계 각국은 물론 중국과 북한 인민의 이해에도 부합될 것이다”라고 통보하며 가급적 빨리 전쟁을 끝냈으면 좋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 이어 4월20일부터 1주일 간 유엔 측은 5,800명, 공산측은 684명의 부상병 포로를 각기 송환했고, 이것이 끝나면서 4월26일 전쟁의 단계적인 축소를 위한 움직임 속에 본격적인 휴전회담이 판문점에서 재개되었고, 양측 모두 합의에 도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포로 송환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전쟁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문제는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반공포로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었다. 이들을 억지로 송환하는 것은 인도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유엔군은 '자발적 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유엔군은 이를 통해 도덕적 우위와 이념적 승리를 선점하려고 했다.포로의 숫자도 문제였다. 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 2,474명의 숫자를 제시했으나, 공산 측은 한국군 7,142명과 유엔군 4,417명을 합쳐 고작 1만 1,559명의 포로 숫자를 제시했다.휴전협상 초기에 공산측이 자랑하며 제시했던 인원과는 달리 5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공산 측도 유엔군의 포로 명단에서 남한 출신 의용군 등 민간인 억류자 4만 명이 빠진 것을 문제삼았다. 결국 회담은 난항을 겪다가 1953년 6월4일 판문점 협상에서 1952년 말 유엔에서 채택된 결의안에 포함된 방식을 근거로 모든 전쟁 포로의 교환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였다. 한국에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인도의 장성에게 그 책임을 맡기도록 하였다. 즉 송환을 반대하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본인 의사를 존중하는 것으로 타결됐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첫째, 양측은 송환을 원하는 모든 포로를 두 달 안에 송환한다. 둘째,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보호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안에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위원단과 포로를 인도군이 수비한다. 셋째, 송환 거부 포로에 대해 90일 간 본국 파견원이 설득하도록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송환 협정에 관한 내용을 보고받고 대노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송환된 소련군 병사들을 스탈린이 모두 숙청한 일이 있었다. 이 협정에 따라 귀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을 억지로 돌려보낼 경우 그들이 희생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반공포로들을 관리할 중립국 인도가 친북한인 것도 큰 문제였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6월8일 포로 교환 협정이 체결되었고, 반공포로들은 중립국감시위원단과 인도군 수비대에 넘겨질 운명이 되었다.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 문제가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포로의 강제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를 놓고 휴전회담이 2년을 끌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게 되면 휴전회담이 무효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휴전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큰 대가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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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3)]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⑩정부의 강력 항의에도 6월8일 포로교환 협정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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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2]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⑨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방한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가을부터 중동부 전선에서 노리, 백마, 화살머리, 저격능선전투 등의 피비린내 나는 고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승전보와 패배의 비보가 교차되며 국민들을 안타깝게 만들 때,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12월3일 방한했다. 광릉 수도사단에서 대기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방한한 아이젠하워는 수도사단을 함께 시찰했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수행원들만 대동해서 곧장 경기도 북부에 주둔 중인 미 3사단과 미 9군단을 방문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 대통령을 비롯한 각 부처 장관들과 많은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던 중앙청 광장의 환영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미국 대통령 당선자 환영행사는 무산됐고, 이 대통령은 약소국의 설움을 뼈져리게 느꼈다. 한편 미국은 1951년 후반기부터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들을 후보에 올려놓고 195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측 의견에 잘 따르는 유화적인 인물을 당선시키려 했다. 이렇게 되면 휴전협정이 쉽게 성사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택한 돌파구는 개헌이었다. 즉 대통령 선출권을 국회에서 행사하는 간선제에서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 추진과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부산 정치파동 등을 겪으며 국내외로부터 ‘독재자’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 아이젠하워의 경무대 방문은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의 서막 알리는 신호탄 미국의 이러한 의도를 잘 알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오기가 발동해 아이젠하워가 서울을 떠나기로 예정했던 날 오전부터 사람들을 경무대에 모이도록 했다. 전날 미국 대통령 당선자 환영 행사식장에 있다가 그냥 귀가했던 3부 요인들과 장관들이 다시 모두 경무대의 응접실에 모였다. 아이젠하워를 다시 오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신중함에 고집까지 강했던 아이젠하워는 역시 초청에 응하지 않았고 경무대를 예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대통령 당선자여서 일선에 있는 미군부대 시찰 외의 어떤 공식적인 활동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를 경무대로 오도록 하기위해 김태선 서울시장을 미 8군 사령부로 보냈으나 사령부 정문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힘이 많이 빠진 이 대통령은 다시 백선엽 육군총장을 보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체면이 걸린 문제였다. 비록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더라도 아이젠하워가 자존심 강한 이 대통령의 체면과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면 앞으로 양국의 협력에는 상당한 장애가 생길 수 있었다. 특히 한국군의 전력증강 사업을 앞두고 미군이 지닌 몫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지프가 미 8군 사령부에 도착하자 백선엽 장군은 2층의 사령관 집무실로 곧장 올라갔다. 사령관의 집무실을 아이젠하워에게 내준 상태였기에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는 자신의 집무실에 있지 않고 그 옆의 부속실에 있었다. 밴플리트는 돌연 나타난 백 장군을 보더니 “나도 설득했지만 소용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뒤에 그는 짤막하게 “마크 클라크에게 직접 이야기해보라”며 사령관 집무실에 붙은 다른 부속실을 가리켰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머물던 방이었다. 백 장군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제 한국은 병력 수만으로는 100만 대군을 갖출 수 있다. 공산주의에 맞서 함께 싸우는 이 100만의 한국군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느냐?”라고 반문했다. 이어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지 않고 그냥 떠나면 한국군의 전력증강 사업 등 양국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어려워진다. 클라크 장군께서 설득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혔다. 이승만 대통령의 학식과 미국에 대한 이해, 자유와 민주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존경했던 클라크였다. 그는 결코 길지 않은 백선엽 장군의 협박에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어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서 사무실 뒤로 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젠하워가 머물고 있던 방이었다. 그는 곧 밖으로 다시 나왔다. 클라크는 백 장군을 보면서 “경무대로 돌아가 기다려라.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곧 경무대를 방문한다”고 짧게 말했다. 6시 무렵에 아이젠하워는 마침내 경무대에 왔다. 그는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브래들리 합참의장, 그리고 한국전선에서 활약 중이던 아들 존 아이젠하워를 대동하고 경무대에 도착했다. 응접실로 들어가기 전 간단한 의장대 사열식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아무래도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하는 일을 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대해 모종의 정치적 약속을 해줘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았더라면 자존심 강했던 이 대통령과 차기 미 행정부의 관계는 매우 냉랭해지고 차후 협력이 어렵게 될 가능성이 컸다. 다행히 미 대통령 당선자가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를 데리고 왔던 덕분에 그때의 환송 면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1시간 남짓 경무대에 머물다가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상대로 벌인 도박 같은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 체결’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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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2]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⑨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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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1)]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⑧유엔군, 준동하는 친공포로들을 강경진압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리지웨이 대장의 후임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에 부임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수용소의 질서를 잡기 위해 강경책을 구사했다. 1952년 5월 신임 포로수용소장으로 부임한 헤이든 보트너 준장은 총검을 장착한 보병과 탱크를 수용소 안에 진입시켜 10일 만에 포로들을 진압했다. 기가 꺾인 포로들은 작은 규모의 새 수용 막사로 분산 수용되었다. 먼저 분산 수용을 시도한 곳은 가장 저항이 심하고 친공포로들의 본부 역할을 했던 76수용소였다. 6월10일 새벽 경비병들이 기관총과 박격포를 조준한 가운데 대부분의 포로는 새 막사로 이동했으나, 1,500여명이 불을 지르며 저항하는 바람에 30여 명이 죽고, 130여 명이 다쳤다. 결국 76수용소의 포로 6,500명은 500명 단위로 나뉘어 새 수용소로 분산 수용되었다. 포로들이 떠난 막사에서는 창 3,000여 개, 가솔린 수류탄 1,000여 개, 칼 4,500여 자루가 발견되었다. 거제도 부근의 봉남도에 설치한 새 막사에서도 12월14일 폭동이 발생해 85명이 죽고 113명이 다쳤다. 압수된 비밀문서에는 1952년 6월20일을 기해 모든 수용소에서 동시다발로 탈출한다는 계획이 적혀 있었다. 간발의 차이였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보트너 소장은 이어 반공과 친공포로들을 심사를 통해 분리하여 반공포로들은 영천, 부평, 마산, 논산, 가야 등지로 옮겨 친공포로들의 테러에서 보호했다. ■ 어렵게 시작한 휴전회담, '뜨거운 감자'인 포로송환 문제 때문에 난항을 겪다 한편 전선이 휴전선을 경계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미국이나 공산권 모두 전쟁 지속보다는 협상의 길을 모색했다. 양측은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을 시작해 보름만에 군사분계선 설정, 전투행위와 정전상태 감시기구 설치 등 5개 의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포로 송환'을 둘러싸고 암초에 부딪쳤다. 이 문제는 10월에 처음 의제에 올랐으나 회의 벽두부터 공산측이 "휴전협정 조인 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를 석방하자"는 주장을 들고 나와 공전을 거듭했다. 포로 송환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전쟁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공산측 주장이 옳았다. 문제는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포로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었다. 이들을 억지로 송환하는 것은 인도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유엔군은 '자발적 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유엔군은 이를 통해 도덕적 우위와 이념적 승리를 선점하려고 했다.포로의 숫자도 문제였다. 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 2,474명의 숫자를 제시했으나, 공산 측은 한국군 7,142명과 유엔군 4,417명을 합쳐 고작 1만 1,559명의 포로 숫자를 제시했다. 최초 공산 측의 자랑과 달리 5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공산 측도 유엔군의 포로 명단에서 남한 출신 의용군 등 민간인 억류자 4만 명이 빠진 것을 문제삼았다. 결국 회담은 난항을 겪다 1년 후인 다음 해인 1952년 5월, 송환을 반대하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본인 의사를 존중하는 것으로 타결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국 정부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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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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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1)]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⑧유엔군, 준동하는 친공포로들을 강경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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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0)]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⑦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당한 포로수용소 도드 소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포로수용소에서의 정신 교육을 통해 포로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유도했고, 각 종교 단체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였으며 특히 목사들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수용소 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겼났다. 이로인해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양측의 충돌이 더욱 거세졌다. 이러한 갈등은 1952년 5월7일 친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장 도드(Francis. Townsend dodd)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 발생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갑자기 공산포로들이 밥에 독을 넣었다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단식투쟁을 하면서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평소 포로 대표단의 요청이 있으면 면담을 자주 가졌던 도드 소장은 아무 생각없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포로들과 얘기를 나눴다.포로들이 슬그머니 수용소 문을 열고 나와 도드를 둘러싸는데도 경비병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러다 '똥통'을 비우러 나왔다가 들어오는 포로들과 뒤엉켜 도드는 철조망 안으로 밀려 들어가고 문은 닫혀버렸다. 세계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포로수용소장이 '포로들의 포로'로 전락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도드를 포로로 잡은 친공포로들은 곧바로 현수막을 걸었다."우리는 도드를 포로로 잡았다.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한 그의 안전은 보장된다. 총격이나 그밖의 폭행이 가해진다면 그의 생명이 위험할 줄 알아라"현수막이 납치 직후 곧장 내걸린 것으로 보아 도드 납치 계획은 미리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포로들은 이어 친공포로에 대한 학대 중지, 송환 강제 심사 철회, 자유 송환 중지, 포로 대표단 인정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후임 소장으로 임명된 찰스 콜슨 준장은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를 살상한 유혈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포로들의 송환 강제 심사나 개인 심사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했다. 콜슨이 무릎을 꿇자 도드 장군은 감금 78시간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이는 도드가 살해되더라도 무력으로 수용소 질서를 바로잡으려던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뜻에 완전히 배치되는 조치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리지웨이 사령관은 도드와 후임 소장 콜슨 장군을 대령으로 강등하는 문책을 단행했다. 미군은 수용소 내에서 폭력과 살인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결국 포로들을 광주, 논산, 부산 등으로 분산 배치시켰다. (다음편 계속) ◀ 김희철 프로필 ▶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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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0)]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⑦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당한 포로수용소 도드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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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19)]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⑥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로 포로교환 이견 상존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은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한 신경전이 전개되는 답답한 양상이었다. 그러던 중, 1951년 12월18일에 최초로 포로 교환 협상을 위해 포로 명단을 교환했다. 이때 공산측 포로는 북한군 11만2000명과 중공군 2만명으로 도합 13만 2000명이었고, 반면에 연합군은 미군 3200명, 남한군 7000명, 유엔군 1600명으로 총 1만1800명이었다. 당시 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가 매우 컸다. 이에 따라 포로 교환 원칙에 대해 이견이 생기고 상호 갈등도 심화되며 회담도 장기화 되었다. 북한과 중공군 측은 포로 전원의 본국 송환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유엔군과 국군은 포로들의 1대1 교환과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을 강조했다. 특히 남한은 북한군 포로들 가운데 상당수가 남한에서 강제로 징집당해 북한군으로 끌려갔다고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석방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가 매우 컸던 것은 1950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급속한 유엔군의 북진과정에서 11만명이 넘는 많은 수의 북한군들이 패잔병이 되어 포로로 잡혔고, 반대로 중공군 개입후 1·4후퇴과정에서 1만명에 이르는 유엔군이 북한군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군에게 붙잡힌 포로들은 거제도에 수용되여 미군이 관리했으나, 말이 잘 통하지 않자 나중에는 한국군에게 수용소의 통제와 감독을 맡겼다. 그러나 포로 숫자가 많아지면서 수용소 내에 다양한 조직이 생겨났고 이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수시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이데올로기 갈등이 가장 심했는데, 특히 포로 교환이 논의되면서 다툼은 더욱 격해졌다. 공산주의 사상에 투철한 포로들은 남한에 남으려는 반공포로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미군은 1952년에 포로 심사 과정 중 반공포로들 가운데 일부를 민간인으로 구분하여 석방하려고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개별적인 의사 확인을 방해하면서 전원 북송을 주장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미군은 정신 교육을 통해 포로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유도했다. 각 종교 단체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였는데, 특히 목사들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수용소 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겼다. 후에 이 기독교인들은 반공포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수용된 포로들 중에는 남한에서 억지로 끌려갔다가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북한 체제에 실망하여 남한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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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19)]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⑥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로 포로교환 이견 상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