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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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사(107)]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말의 6·25남침전쟁 상황은 78만의 유엔군(이중 한국군 12만명)과 1백20만의 공산군이 팽팽히 대치한 가운데 군사분계선 책정에서 피아간에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데 혈안이었다. 물론 미국의 ‘명예로운 휴전협상’정책에 따라 전선이 대체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게 사실이지만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의 백마고지와 저격능선에서 치열한 교전 중에 있었고, 임진강을 낀 서부전선의 국군 1사단지역에서도 군사분계선 확정에서의 요지확보를 위한 전초진지 ‘노리’고지 등에서 중공군과의 격렬한 접전이 전개됐다. ■ 국군 1사단, 휴전까지 임진강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 계속 1952년 9월경 국군 1사단은 미3사단의 작전권을 인수해 임진강과 역곡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지역은 미 1군단과 중공군 46, 47, 56군의 도합 3개 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4개 사단으로 편성된 미 1군단 내의 유일한 한국군인 1사단은 미 2·해병 1사단, 영 연방 1사단에 뒤질 수 없다는 각오였다. 또한 수도 서울로 이르는 관문을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임진강변의 제 전초 고지들을 사수하겠다는 강한 전투의지로 임했다. 북진 때부터 계속 서부 전선에서 싸워 온 국군 1사단은 이 지역 지리에 익숙한 데다 막강한 미군 화력과 탱크의 지원을 받는 연합작전으로 중공군과의 고지전에서 개가를 올렸다. 미군 측에서는 강 건너의 조그만 진지들을 가지고 많은 전사·상자를 내면서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을 할 것이 아니라 임진강 이남의 주 저항선을 안전하게 방어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2년7월 지리산 공비 토벌에서 돌아온 1사단은 박림항 준장의 지휘아래 그간 미군들이 잃은 전초 진지들을 모두 탈환하면서 휴전까지 임진강 일대의 노리·퀸·베티·171 고지 등에서 공방전을 계속했다. 당시 1사단 정면에는 대치 중인 중공군 47 군은 국민당군의 투항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로 산악전에 능숙했다. 그러나 폭격으로 보급이 끊기면서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10월6일, 중공군이 맹렬한 포격을 가해왔다. 국군은 텟시고지외 닛키고지에 방어병력을 배치했고 중공군은 2개중대 규모로 나누어 이 두고지를 공격했다. 국군은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고지가 점령될 위기에 처했다. 국군은 두 고지가 점령된 것으로 판단하고 이 두 고지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지만 중공군의 저항에 좌절됐다. 몇 시간후 국군은 박격포와 항공지원을 받아가며 고지를 공격했지만 중공군은 이번에도 격렬하게 저항해왔다. 또 공격이 실패하자 다음날, 항공 및 전차의 지원을 받아가며 닛키고지를 공격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국군은 총 6번의 공격을 감행했는데 모두 실패하고 군단장은 손실만 커진다고 판단하여 역습을 중지하고 재편에 들어갔다. 이에 국군 1사단은 105고지-베티고지-소노리고지에 부대를 배치했다. 12월11일에 또 중공군이 선공을 해왔다. 중공군은 소노리고지와 베티고지를 향해 공격해왔고 소노리고지는 중공군에게 점령되지만 베티고지는 방어에 성공했다. 국군은 소노리고지에 역습을 개시했는데 격퇴당했고, 다시 병력을 모아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번에는 일시적으로 고지를 점령하지만 중공군의 역습에 고지를 빼았꼈다. 1사단장 박림항 준장은 소노리고지 점령의 발판인 대노리고지 점령의 필요성을 느꼈다. 국군 1사단은 유엔군의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으며 대노리고지를 일시적으로 확보했다. 다음날도 소노리고지와 대노리고지에 공격을 다시 시작했는데, 소노리고지를 공격하던 11중대는 약간 주춤했지만 13일에 소노리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강력한 역습으로 대노리고지 확보는 다시 실패했고. 국군 1사단은 소노리 고지에서 계속 방어하게 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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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0
  • [김희철의 전쟁사(106)] 3대에 걸친 불멸의 한국사랑 ‘윌리엄 쇼’일가 (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6년 9월22일은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전사 6주기를 맞는 날이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왔던 친지와 단체들이 성금을 모아 녹번리(현 은평구 녹번동) 그가 전사한 자리에 전사기념비를 건립했다. 당시 비 건립 제막식은 국내외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대한뉴스 제91호로 제작, 상세히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도시계획에 밀려 백낙준 등 61명의 기념비 건립위원들이 1956년 9월22일 전사지에 세운 추모비를 서울 은평구 응암1동 85-41번지 '응암어린이공원'으로 옮겨 놓았다. 비문에 요한복음 15:13(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나니)이 새겨져 있다. ■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 은평평화공원 조성과 동상 건립 은평구는 지난 2008년 5월 안병태(제20대 해군참모총장) 해군전략연구소장의 건의에 따라 2008년 9월22일에 고인의 숭고한 대한민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노재동 은평구청장, 박세직 재향군인회장, 이성호 제5대 해군참모총장을 공동추진위원장으로 한 추모공원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했다. 그리고 기념비가 있는 은평구 응암어린이공원에서 '윌리엄 해밀턴 쇼 추모 및 추모공원 발기인 대회'를 가졌다.드디어 6.25남침전쟁 60주년이자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전사 60주년을 맞는 2010년을 맞아 그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계승·발전시켜 후세에 널리 알리고 역사적 참배현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은평구 녹번동에 추모공원(은평평화공원)을 조성하고 그 자리에 고인의 동상을 세웠고 6월22일을 기해 제막식 행사를 했다. 당시 노재동 은평구청장은 “은평평화공원은 인근 주택이나 지하철역을 나온 구민들이 마땅히 쉴 곳이 없어 녹색 휴게공간을 조성하게 됐다"면서 "쇼 대위의 호국정신과 3대에 걸쳐 한국에 대한 애정을 쏟고 있는 일가를 생각하면 그를 추모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기리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은평평화공원'은 총 5700㎡로서 간선도로 결절점과 지하철역이 위치한 도심중심부 역세권내 조성된 공원으로 사업비는 총 511억원이 소요됐으며 이 중 토지보상비가 414억원, 시공비가 97억원이 투입됐다.이 공원조성 사업은 수도서울을 상징하는 북한산과 한강을 잇는 녹지축 중심공원으로, 향후 북한산~은평평화공원~불광천~한강을 잇는 녹지벨트 구축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런 복합기능을 수행할 은평평화공원 조성은 매우 큰 의미가 있으며 후세들에게 호국보훈의 상징적 공간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때 노재동 은평구청장은 이 행사를 고인의 유가족이 참석한 뜻 깊은 행사로 만들기 위해 유가족 초청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통일부장관을 만나는 등 정부차원에서 적극 지원을 건의한 결과 통일부 및 국가보훈처로부터 유가족 초청비용 등 정부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 행사에는 고인의 큰며느리인 Mrs. Carole Cameron Shaw를 비롯한 손자 William과 David, 그리고 둘째아들 부부 Stephen Richard Shaw and Mrs. Shaw 등 유가족 7명과 참전용사 Jesus Rodriquez와 그의 보호자 등 총 9명이 참석했다. 당초 이 행사에는 고인의 유가족 뿐 아니라 전쟁 당시 미 해병대 소속으로 쇼 대위 구조대원으로 활동했던 A.A.Lenth, R.C.Jenkins 등 생존자 4명도 함께 초청하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윌리엄 해밀턴 쇼가 조선 해양경비대 사관학교(해군사관학교 전신) 교관을 지내던 시절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은 제자이자 친구로 각별하게 지냈다. 왜냐면 그는 민간인 교관으로 헌신하며 유창한 한국말과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육중에 해군사관학교 2기생은 진해만 서도(쥐섬)에서 훈련중에 암약하던 공산당 요원들의 습격으로 몰살당했다. 그중 생존자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은 2001년 10월20일 제자이자 친구로 각별했던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 좌대석을 추가로 설치했다. 그들의 비석 받침대에는 ”그와 한국 친구들의 특별했던 우정은 국가 간 우방과 동맹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라는 헌사를 새겨 넣었다. 지금도 한국을 위해 목숨보다 더 큰 사랑을 바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매년 9월 22일 이곳을 찾고 있으며, 그의 동상 앞에 오래 고개를 숙이고 눈물 짓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김희철 프로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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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9
  • [김희철의 전쟁사(105)] 3대에 걸친 불멸의 한국사랑 ‘윌리엄 쇼’일가(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윌리엄 해밀턴 쇼(서위렴 2세)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와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윌리엄 얼 쇼(William E. Shaw, 한국명 서위렴(徐偉廉) 1세)의 외아들로 1922년 6월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자라났지만 그를 포함한 온 가족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게 된다.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아버지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였다. 윌리엄 해밀튼 쇼는 1943년 미국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역에서 해군 장교로 참전했다. 그는 유럽 대륙의 해방을 가져다 준 사상 최대의 사건인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아이젠하워 장군을 도와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역한 그는 그리워하던 한국의 품으로 1947년에 돌아와 미군정청(美軍政廳) 소속으로 진해 조선 해양경비대 사관학교(해군사관학교 전신) 교관을 하면서 생도들에게 함정운용술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유창한 한국말과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갔다. 특히 교관 시절에 해군사관학교 2기들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더불어 한국해안경비대 등 한국 해군과 해병대 창설에 기여하며 대한민국 국군 태동기를 이끌어갔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 창설에 이바지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하며 한국 선교사를 목표로 다시 하버드대학교에 입학, 철학박사 과정을 수학하고 있었다. 1950년 6·25남침전쟁이 터지자, 젊은 부인과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한국 해안지역의 취약한 방위 상황을 깊이 우려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싸우고자 해군 대위로 재입대하였다. 그는 1950년 6월에 “아버지, 어머니!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이를 도우러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후 평화시에 선교사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입니다”라고 부모님께 편지를 보냈다. 또한 주변 친구들에게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이 내가 태어난 제2의 조국이라면서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 해군에 재입대한 윌리엄 해밀튼 쇼 대위는 유창한 한국어로 맥아더 장군을 보좌하며 선발대로 상륙해 인천상륙 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맥아더 장군의 옆에는 항상 윌리엄 쇼가 있었고 한국 지리와 언어에 능통한 그는 맥아더의 눈과 귀가 되었다. 그는 서울 수복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치열해지는 전투를 보며 자신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윌리엄 쇼는 다시 한 번 해병대에 자원하여 서울탈환작전의 선봉에 나서 진두 지휘한다. 그뒤 김포반도, 행주산성, 신촌 노고산까지 진출했고 한강을 도하해 수색조가 녹번리 쪽으로 향하던 그때, 쇼는 한국인들을 향해 매복하고 있는 북한군을 발견하고 그들의 공격을 경고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녹번리 고개에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매복하고 있었던 북한군의 총구는 길 위에서 북한군 공격을 경고하는 쇼 대위의 머리를 겨누었고, 결국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장렬히 전사했다. 그리고 불과 5일 뒤 서울이 탈환된다. 이후 평소 그의 한국사랑의 정신을 기리던 전우 및 지인들은 故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를 마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했다. 그의 나이 29세,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윌리엄 해밀턴 쇼의 묘비에는 이런 구절이 남아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7-15
  • [김희철의 전쟁사(104)] 3대에 걸친 불멸의 한국사랑 ‘윌리엄 쇼’일가(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하얀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 중에 생명을 걸고 이 나라를 사랑한 선교사와 그의 자녀들이 있었으며, 한국인은 그들을 기억하고 감사해야한다. 가장 먼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917-2004) 박사는 연세대를 최초 건립하였고, 한국전쟁 발발로 재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한 뒤 유엔군의 수석통역관으로 정전협정을 이끌어내는 등의 활약을 했다. 이후 한국의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며, 그의 아들 인요한 박사는 순천에서 태어나 현재까지도 세브란스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휴 린튼(Hugh MacIntyre Linton, 1926-1984)은 미 해군 대위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으며, 휴전 후 선교와 의료 봉사에 매진하여 한국의 결핵 퇴치에 이바지했다. 또한 하워드 마펫(Howaed Moffett, 1917-2013)은 평양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해군 군목으로 참전했으며, 휴전 후 고아와 미망인을 위한 무료 진료를 하는 등 45년간 한국에서 의료 선교에 헌신했다. 특히 윌리엄 E. 쇼(Shaw, William Earl)는 미 감리회 선교사로 1921년 내한하여 서위렴(徐偉廉)이라는 이름으로 평양, 서울, 대전 등에서 1960년까지 선교와 교육에 크게 이바지했다. ■ 윌리엄의 손자까지 3대가 선교, 군인, 장학사업으로 한국인 도와 윌리엄 E. 쇼(Shaw, William Earl, 서위렴)는 1890년 8월22일 시카고에서 출생하여,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과 콜럼비아 대학원(1921)을 졸업했다. 선교 사업에 뜻을 두고 한국 선교사가 된 다음 보스턴 신학대학원도 졸업(1927)했다. 평양에서 광성학교 교사로 봉직(1921-1926)하고, 만주와 해주 지방에서 교육과 전도사업(1927-1937)에 몰두했다. 1938년 무어(J. Z. Moore)선교사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배출했으며,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 단장으로도 봉사했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7년 다시 내한했다. 1950년 6·25남침전쟁 때에는 미군 군목으로 종군하면서 피난 교역자 구호에 힘썼으며, 특히 한국군 군종 창설에 크게 기여했다. 참고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도 군목으로 유럽 전선에 종군했었다. 외아들 해밀턴 쇼가 6·25남침전쟁에서 전사하자 미국 본토에서 5,925명의 신자들이 보내준 14,500불의 헌금으로 쇼 기념교회를 대전에 건립했다. 1955년 목회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쉐파트(Shepard) 부인이 헌금한 6,000불을 기초로 목자관을 건립하여 관장으로 봉직했다. 감리교대전신학원(목원대) 창립 이사(1954-1960)로 참여했고, 신약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크게 존경을 받았다. 1961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뒤, 귀국하여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병원에서 별세하자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부인이 안고 와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제2묘역 라-6)에 안장됐다. 부인 아데린 H. 쇼(Shaw, Adeline Hamilton,1895-1971) 선교사는 1895년 7월 2일 출생하여 1919년 7월 4일 윌리엄 쇼와 결혼하고, 1921년 내한하여 남편을 내조하면서 숭덕여학교 교사 등으로 1960년까지 교육에 헌신했다.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으며, 양화진 (제2묘역 라-5) 남편의 묘 옆에 안장됐다. 며느리 조니타 로빈슨 쇼(Shaw,Juanita Robinson)는 1943년 외아들 해밀턴 쇼와 결혼했으며,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사회사업실(Medical-social)을 개설했다. 서울외국인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했으며, 1968년 귀국하여 미국 코네티켓에서 사회봉사 사업을 마치고 은퇴했다. 서위렴의 큰손자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은 1944년에 출생하여 서울외국인학교를 다녔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1977)를 받고, 내한하여 훌브라이트(Fulbright) 장학사업을 추진했고, 한국 대학생을 위한 하버드 대학 법률연구센터와 교류에 힘썼다. 1966년 캐롤 C. 쇼(Carol Cameron Shaw)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1993년 심장 질환으로 버지니아 스프링필드에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7-09
  • [김희철의 전쟁사(103)] 캐롤송도 없이 핏빛만 가득했던 ‘크리스마스고지 전투’(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차 크리스마스고지 전투 다음해인 1952년, 대위로 진급한 이순호는 국군 7사단 3연대 3대대 9중대장으로 보직 받아 강원도 양구군 백석산 전방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진지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휴전회담이 계속 진행되던 중, 1차 크리스마스고지 전투에서 패배한 중공군 204사단은 크리스마스고지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10월 6일 기습 공격했고 6일간의 전투에서 아군은 또 다시 크리스마스고지를 피탈 당하기도 했다. 당시 9중대장인 이 대위는 패배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반드시 재탈환하여 사수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10월13일 저녁 중공군은 치열한 공격준비사격을 퍼부은 후, 재차 9중대 정면과측면에 각각 1개중대를 투입하여 공격해왔다. 적의 공격에 2소대 지역이 함락되면서 중대의 좌측이 뚫리고 말았다. 다급해진 중대는 수류탄과 총검으로 중공군에 맞섰지만, 적의 공세에 밀려 부대가 포위됐고 삽시간에 적과 아군이 한데 엉키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대위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끝까지 진지를 탈환할 것을 각오하고 화기 소대장에게 분산된 3소대를 수습해서 중대 지휘소로 몰려드는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본부요원에게 수류탄 상자를 들게 하고 직접 수류탄을 던지며 총검을 휘두르는 백병전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때 투척한 수류탄은 3상자로 그의 옆에서 수류탄 통의 테이프를 입으로 뜯어주던 본부요원의 이빨이 2개나 빠질 정도였다. 이에 공격기세가 꺾인 적들이 무수한 시체들을 버리고 퇴각한 뒤에야, 이 대위는 자신이 전투 중에 부상을 입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적의 총탄이 왼쪽 팔과 우측 정강이 두 곳을 관통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대원들의 후송 권고를 뿌리치고 압박붕대로 상처의 지혈만을 한 채 절뚝거리며 방어진지 점검에 나섰고 그 모습을 본 장병들은 가슴 깊이 감동을 받았으며 다시 한번 더 전투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이어 9중대 지역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은 증원을 받아 중대 지휘소로 재차 공격을 해왔고 교전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중대는 또다시 위기에 빠졌다. 이 대위는 중상을 입었지만 중대원들과 함께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을 휘두르는 혈투를 벌이며 끝까지 진지를 지켰으나 그의 가슴에 흉탄이 관통하면서 장렬히 전사했다. 결국 이 대위의 장렬한 죽음을 본 9중대원들은 분노에 차 혼신의 힘을 다해 야간 격전을 처절하게 버텨냈고, 이튿날 11중대의 증원을 받아 이순호 대위의 염원대로 핏빛만 가득한 크리스마스고지를 끝까지 사수할 수 있었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리어 1계급 특진추서와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순호 소령은 보훈처에서 2018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어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유가족과 육군 주요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 행사도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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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7-08
  • [김희철의 전쟁사(102)] 캐롤송도 없이 핏빛만 가득했던 ‘크리스마스고지 전투’(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에서 첫 4개월은 북한군과의 싸움이었지만 나머지 33개월은 압록강을 넘어 남침한 중공군과의 지루한 싸움이었다.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1년,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로 설전을 벌이던 양측은 11월 27일부로 조건부 잠정 군사분계선을설정하고 30일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전쟁기간 중화력이 막강한 미군들보다우리 국군만을 향해 집중공격을 해왔다. 마찬가지로 현재 MDL(군사분계선)북쪽의 어은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중공군은 이 조건부 잠정 합의를 무시하고, 크리스마스 전날 백석산 앞쪽 1090고지 일대의 거대한 산악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하던 국군7사단의 전초진지를 공격했다. ■ 흰 눈의 고지는 순식간핏빛으로 물들고,7사단은죽음 각오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승리 중공군 204사단과 아군 7사단은 이곳에서 4일동안 2차에 걸쳐 한 치의 양보 없는 처절한 혈투를 벌여 흰 눈으로 덮여있던 고지는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국군 7사단은죽음을 각오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중공군을 격퇴하고 전초진지를 사수했다. 이때 아군은 22명이 전사했고 21명이 실종되었지만중공군 172명을 사살하고 5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크리스마스날 시작된 전투였기에 특별한 이름이 없었던 전초진지 무명고지에는 ‘크리스마스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크리스마스고지 전투는 휴전협정에서 최전방 전선을 설정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친 전투였다.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처럼 장병들에게 잠시나마 축복이 넘치는 시간이 됐으면좋았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캐롤송이 평화롭게 울려야 하는 이미지와는 정반대인핏빛 물든 시간이라서 아이러니하다. 양구 전쟁기념관에는 전쟁으로 인한 폐허가 연상되는 커다란 콘크리트 기둥 9개가 서 있다. 9개의 기둥은 양구에서 벌어졌던 크리스마스고지 전투를 포함한 도솔산 전투, 펀치볼 전투, 피의능선 전투, 대우산 전투, 백석산 전투, 가칠봉 전투, 949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를 상징한다. 기둥과 전시관의 벽면을 살펴보면 파인 곳들이 많은데 이것들은 포탄 및 총알의 자국을 나타낸 것이다. 9개의 기둥은 높낮이가 다른데 9개 고지의 높이를 비율로 달리했으며 각 기둥에는 참전부대와 전투 기간 등이 표시되어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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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7
  • [김희철의 전쟁사(101)]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10월,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오성산을 점령하기보다는 전초진지 전반에 걸쳐 아군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소규모 공격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쇼다운(Show Down) 작전’이라고 칭한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제한된 목표를 탈취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이에 따른 저격능선 전투는 개시 42일만인 11월24일에 끝났다. 엄청난 희생을 치루며 공격한 미9군단 예하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의 고지 셋(A·Y·돌바위) 중 두 곳(80%)을 확보했고, 중공군은 삼각고지를 방어했지만 저격능선에서 패퇴했다. 故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나를 쏴라’에서 “저격능선에서 중공군은 패배했고 희생도 아군의 2배로 막대했다. 중국이 최고 승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체 선전일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1957년 7월 김종오 5군단장이 철원 쉬리공원 옆 동산에 ‘저격능선 전투 전적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오만한 적 중공군과 용감히 싸운 불멸의 투혼’이라고 단호하게 새겨져 있다. 참전했던 한 노병은 "중공군은 국군의 전투력을 깔보았고 저격능선에서 오만함이 드디어 분쇄됐다”고 말했지만 그의 낯빛이 씁쓸해진다. 국방부 정책기획관을 역임한 김국헌 장군(육사28기)도 ‘다시쓰는 6·25’에서 미9군단의 저격능선 전투는 무모한 공격으로 실패로 끝났으며, 국군 9사단의 백마고지전투가 필사의 방어로 성공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승전 기록은 미군 격퇴, 오성산 방어에 맞추었다. 지하갱도의 고난은 신화의 소재로 “동굴진지는 물이 적어 겨와 풀을 먹으며 버텼고, 그 정신으로 미군을 제압했다”며 ‘상감령 전투’를 고전 영화로도 제작하며 최대 승리라고 주장한다. 한편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는 ‘화웨이 사태가 점화한 '상감령' 역사기억의 전쟁··· 승자는?’라는 칼럼에서 “중국은 한국군 전과를 깔아뭉갠다. 2사단의 저격능선 공략은 미완성이다. 하지만 중국의 상감령 신화도 절반의 진실이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한반도는 기억의 전쟁터이지만 한국은 그런 문화전투에서 부실하다. 보수우파의 그런 기량은 미흡하다. 그 전투에서 밀리면 치명적이다. 가짜 평화론이 득세한다. ‘정의로운 평화’의 요소는 군사력과 안보 의지이다. 그것 없는 평화는 비굴하고 수세적이다”라고 언급했다. ‘상감령’은 역사의 시위이고 북·중 결속의 원동력이다. 한·미동맹의 기억은 소홀해졌고 그로 인한 손실은 결정적이다. 중국은 한국을 얕잡아보며 북한도 한국을 무시한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의 시대는 혼돈이 됐고, 조 바이든이 미대통령에 당선된 지금은 새로운 선택의 전환점이다. 결론적으로 박 대기자는 “역사 기억은 리더십에 지혜와 투지를 넣는다. 국민적 단합을 투사한다. 저격능선의 기억은 당당하고 상감령의 위세는 그 앞에서 주춤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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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3
  • [김희철의 전쟁사(100)]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저격능선의 삼각고지 전투에서 미 9군단 예하 미 7사단은 고전했다. 갱도작전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10월25일 미 7사단은 삼각고지 공략을 포기하고 그 임무를 한국군에 넘겼다. 그 직후 부임한 2사단장은 강문봉 장군은 고지의 가치는 낮은데 비해 희생이 많았기에 11월5일 삼각고지 작전을 중단했다. 한편 1952년 10월14일 시작된 저격능선 전투에서 갑종장교 5기생인 백낙수 소위(예비역 대위)는 2사단 32연대 1대대 중화기 중대 박격포(81밀리) 소대장으로 쉴 새없이 포를 쐈다. ■ 판초우의에 쌓인 사체 조각들 속에서 “백 소위만 살았군!” 얼마나 박격포를 많이 쏘았는지 탄피가 동산을 이루고 포신이 열을 받아 포탄이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부근에 떨어질 정도여서 할 수 없이 물통을 옆에 놓고 물을 부어가며 포신을 냉각시켰다고 했다. 포진지의 땅이 젖어 포판이 땅속으로 들어가 포를 옮겨가며 사격을 했는데, 결국 많은 사격으로 공이가 부러졌고 부속품이 바로 보충이 안 돼 나머지 4문으로만 사격해야 했다. 백 소위는 “많은 폭음과 섬광으로 고막이 터져 불러도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이 늘어갔고 눈이 멀어버린 병사도 있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적의 반격이 주춤하자 박격포 소대는 전투 임무가 아니라 보급품 수집이나 전사자를 후송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당시 판초우의에 쌓인 사체 조각들과 터진 군화 속의 발가락들이 처절한 참상을 말해주었다. 1952년 10월 29일에는 날아오는 적 포탄이 OP 부근이나 포진지 주위에 떨어졌는데 그는 “그때 1개 포반 4명이 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가면서 전사하여 슬픔과 분노가 교차되었다. 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포사격을 위해 달려가던 병사가 적의 저격병에게 총탄을 맞아 ‘어~머~니~’를 외치며 쓰러지던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저격능선 전투의 마지막 날인 11월24일에도 백 소위의 32연대가 저격능선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을 확보하느라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중공군도 피해가 컸다. 그는 “갑종 동기생 3명 중 1명(박완섭 소위)이 전사하고 1명(강순형 소위)은 부상으로 후송돼 나 혼자 남게 되었어요. 17연대 동기생 3명도 그날 함께 전사하고 말았어요”라며 슬픔을 달랬다. 전투가 종결되고 9사단 28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집결지에 도착했을 때 부상으로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던 대대장이 다가와 “백 소위만 살았군!”하고 건넨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저격능선 전투를 마치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던 백낙수씨는 “아직도 못 잊는 장면은 병사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면 대개 옷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전사자의 80~90%는 신병이야. 인간의 이성으로 죽음을 대하면 감당 못 해. 당시 이성이 마비되었다고 할까. 죽음을 의식 안 하고… 죽으면 죽었나 보다 그러는 거지. 동료가 죽어도 슬픔을 발산할 겨를이 없었어요”라고 쓸쓸히 덧붙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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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2
  • [김희철의 전쟁사(99)]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전쟁사’에는 저격능선 전투는 승리했으나, 1953년 7월 휴전 직전에 상황이 재역전되어 “중공군의 최후 공세에 국군은 저격능선에서 전술적으로 후퇴, 싸워보지도 않은 채 적에게 넘겨줬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격능선에서 아군과 대치하던 중공군 15군단의 45사단은 엄청난 지하갱도를 구축하고 있었다.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은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250여km에 걸쳐 땅굴 진지를 구축했다. 하나의 진지는 20~30km의 종심을 가진 거대한 거미집 같았다고 한다. ■ 삼각고지 전투에서 동굴진지 폭파시킨 부하의 공을 가로채려는 상관들의 추악한 모습 국군 2사단 31연대 5중대 2소대장으로 저격능선의 삼각고지 전투에 참전했던 이상옥 예비역 중령은 “갑종장교 25기 동기 12명이 교육을 마치고 신임 소위로 부임했는데…”라며, “당시 2사단장 정일권 장군은 신임 소위들에게 낮에는 국군 진지를 둘러보라고 시켰고 복귀했을 때 소감을 물었는데, 우리는 보병학교 전술학 시간에 배운 대로 이야기하자 정 장군은 ‘내일 너희가 가서 고쳐주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전투상황이 급해서 바로 배치됐다”고 회고하며 말문을 열었다. 당시 철원 평야 삼각 고지의 제인러셀 고지에 미 7사단 소속 2개 소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공격하고 밤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쉬었는데, 어느 날 심야에 중공군이 기습해 2개 소대 미군 80명이 모두 전사했다. 삼각(제인러셀) 고지는 철원 평야를 감제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요지였다. 저격능선 전투 2단계가 시작된 10월25일, 국군 2사단은 미군이 전멸했던 삼각 고지를 인수하게 되었고, 철수하는 흑인 병사 2명이 기관총과 실탄, 엄청난 양의 수류탄을 인계해주어 든든했다. 또 가슴 높이의 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여 적 포격에 대비했다. 아침 안개를 이용해 삼각 고지 꼭대기에 자리 잡은 우리 진지에서 밑으로 150m쯤 내려가 적의 움직임을 정찰했을 때, 중공군 셋이 식수를 들고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제일 앞선 자를 향해 ‘추항(투항)!’이라 외쳤는데 중공군 병사 둘이 도망치기에 사살했고 군관 1명을 생포했다. 그를 통해 알아낸 삼각 고지 8부 능선의 땅굴 속에 1개 중대(100여 명)가 있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연대본부에서 장교 1명과 사병 9명으로 편성된 특공부대를 투입하였으나 땅굴 속에서 전원 몰살당하고 말았다. 2소대장 이상옥 소위는 “그때 우리 소대가 위치한 곳에 땅굴이 있으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보병학교에서 배운 대로 땅굴 폭파에 필요한 TNT를 계산해서 5~7kg 정도를 연대에 요청했는데 무려 15kg을 보내왔어. 그 무거운 것을 나 혼자 들고 갈 수 없어서 소대원 한 명과 7kg씩 나눠 짊어지고 우리 진지에서 내려와 중공군 땅굴 입구로 갔어”라며 전투담을 시작했다. 삼각 고지 8부 능선의 땅굴 입구는 적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소위는 먼저 중공군을 속이려고 진지 구축을 위한 호 파기 공사를 많이 해서 중공군 땅굴 쪽으로 토사와 바위 등을 많이 흘려보냈고 그때마다 중공군이 기관총 사격을 해왔다. 그러나 호 파기 공사 때문인 것을 알고 이후 토사가 내려와도 기관총을 쏘지 않았다. 그는 중공군이 기관총 사격을 안 하는 틈을 이용해 땅굴 입구까지 접근하였다. 막상 입구에 도착하니 중공군 보초병이 곤히 자고 있었다. 동행한 소대원에게 대검을 주며 “지키고 있다가, 만약 깨면 총은 절대 쏘지 마라”고 지시하고 혼자서 TNT 15kg을 지고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중공군들은 동굴속에서 똥과 오줌도 싸고, 송장도 동굴 안에 있어 썩는 악취 냄새가 심하게 진동해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다. 그때 갑종 동기생인 진찬호 소위가 동굴 작전을 한다니까 어렵게 구해줬던 방독면이 도움이 되었다. 땅굴 높이는 120cm, 좌우폭은 60cm 정도였고 한 5~6m 안으로 들어가니 땅굴이 좌우 두 갈래로 갈라졌다. TNT 두 뭉치에 기폭 장치를 한 후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자고있던 중공군 보초병을 그냥 두고 진지로 되돌아오는데, 꽝 하는 소리가 났다. 이 폭발로 산 정상의 지형이 조금 바뀔 정도로 온 땅이 흔들리고 큰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공격로에 적의 사체가 엄청나게 쌓여 있어 땅굴 폭파로 최소 100명에서 최대 150명 이상이 죽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날 저녁 화가 난 중공군은 엄청난 병력으로 2소대를 공격해왔다. 하지만 적의 공격로는 급경사로 방어에 유리했다. 저녁 8시부터 다음 날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엄청난 양의 포탄이 날아왔으나 호를 깊게 파서 엄폐가 되었다. 낮에는 아군이 공중 폭격을 하니까 못 오지만 밤이 되면 중공군이 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올라왔는데, 미군에게서 인수한 기관총과 충분한 실탄 및 수류탄이 유용했다. 그날 이 소위는 전투에 임하며 부대원에게 “다쳐도, 죽어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면 후송하려면 최소 3명은 있어야 하는데 싸울 병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새벽 생존자를 확인하니 43명의 대원 중 7명이 생존했고, 나머지 병사는 모두 전사했다. 이 전투로 이 소위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상옥 예비역중령은 “이 작전은 상급부대의 계획이나 지침도 없었어요. 오직 나 혼자 생각과 소대원들의 생사를 같이한 용전분투가 만들어낸 결과야. 그런데 전투후에 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마치 자신이 계획입안자, 작전지휘자, 작전유공자인 양 자처하고 수훈 신청을 했어요. 부하들의 공을 가로채는 상관의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지”라며 분노를 삼켰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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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1
  • [김희철의 전쟁사(98)]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문관혁 소위(예비역 대령, 갑종장교 25기)는 이후 저격능선 전투가 끝나는 42일 동안 고지공격과 방어전에 10여 차례 투입되었다. 문 소위는 저격능선 전투 중 11월 24일 전투를 잊을 수 없는데, 당시엔 그 전투가 마지막 전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그날 저녁에 대대장이 ‘오늘 저녁은 죽더라도 A고지를 빼앗기지 마라’는 지시를 받고 소대원 30여 명을 인솔해서 A고지로 올라갔다. 자정이 되자 중공군 2개 중대가 70~80도 되는 가파른 비탈을 올라오며 공격했고 낮에 조준해 놓은 듯 포격을 쏟아내 진지에서 고개를 내밀고 소총을 쏘기 어려워 수류탄을 계속 던졌다. 임무를 교대할 때 가져온 수류탄 80발을 차례로 던졌고 7부 능선까지 올라오던 중공군들은 끝내 A고지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날이 훤히 밝자 중공군이 철수했고, 오전 9시쯤 되어 한 소대가 교대하러 오는데 2사단이 아닌 9사단 병력이었다. 문소위의 갑종 동기생인 9사단 28연대 백성기 소위가 보여 반가웠는데, 그때 대대장이 왜 그날만은 A고지를 반드시 사수하라고 했는지를 깨달았다. 문 소위는 A고지 사수 전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그리고 11월 25일 저격능선 전투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해 12월 중순께 전개된 일부 탐색전을 제외하고 양측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문관혁 소위는 훗날 저격능선 전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국군(유엔군)은 백마고지를 빼앗길 것 같으니까 중공군 전투력을 분산시키면서 저격능선을 확보할 생각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에요. 그러나 적은 유엔군이 오성산을 빼앗으려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했어요. 오성산은 1069m 고지입니다. 김일성이 왔다고 해서 ‘김일성 고지’로 불렀을 정도예요”라며 “중공군은 오성산을 잃으면 중공군이 평강 평원에서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해 오성산 앞 상감령(저격능선)을 사수하려 죽기 살기로 싸웠던 겁니다. 사실 그렇게 희생할 가치가 없는 전투였는데…. 국군(유엔군)이 적 1명을 사상시키는데 실탄이 33만 발이 소모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효율성만으로 따질 수 없지만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그만큼 치열했어요. 그러나 이 전투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휴전할 때 우리 땅으로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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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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