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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사(82)]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9사단장 김종오 소장은 9월 22일부로 좌에 30연대, 우에 29연대를 배치하고 28연대를 예비로 확보하는 한편, 그밖에 배속받은 51연대도 대대단위로 운용하면서 주저항선을 방어하였다. 이중 백마고지 방어를 담당한 제30연대는 395고지에 1대대를, 중마산 일대에 2대대, 역곡천 남안에 예비 3대대를 각각 배치하고 있었다. 이무렵 전 전선에 걸쳐 적의 공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정찰과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중, 10월 3일에 중공군 군관 1명이 귀순하여 "중공군 제114사단이 10. 4∼6일 사이에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에 사단은 백마고지 방어 병력을 2개 대대규모로 증강하며 사단 예비로 하여금 즉각 역습에 임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정찰활동을 강화하였다. 10월 6일 새벽부터 국군 9사단 정면에 포격을 집중하던 적은 봉래호 뚝을 파괴하여 역곡천을 범람시키며 중공군 38군 114사단이 19시15분, 30연대가 방어하고 있는 395(백마)고지 일대로 공격해 들어왔다. 중공군은 병력을 교대해가며 파상 공세를 지속했지만 배치된 9사단 30연대는 쉽게 내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395고지 능선은 ‘y’자를 왼쪽으로 기울인 형태같이 되어 있었는데, 특히 북서쪽은 ‘>’자로 되어 있어 이 방면으로 들어오는 중공군들은 양쪽 능선에서 집중포화를 맞고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결국 반듯한 북동쪽으로만 반복 공격을 해올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 340연대가 1개 대대를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투입하였다. 그러나 연대는 이 날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한편 중공군 113사단은 이날 밤 백마고지 공격에 앞서 좌인접 미 2사단 방어지역이며 백마고지 서남방 3㎞ 지점의 281(화살머리)고지에도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는 백마고지에 대한 양동작전으로 판단되었으며, 이 고지에 배치된 프랑스 대대는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근접 전투를 벌여가며 적의 파상공격을 방어하였다. 다음날 밤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 중공군은 2개 대대로 전초진지를 포위하면서 계속 압력을 가하였으며, 국군은 30연대가 일시 고지 정상으로부터 철수하였으나 약 2시간후 사단으로부터 탈환명령을 받은 28연대가 역습을 감행함으로써 이를 다시 탈환하였다. 연대는 탈환 즉시 적의 역습을 대비하여 진지 강화에 주력하였다. 그래도 파상공세가 계속되면 방어하는 측은 피해와 피로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 이에 9사단장인 김종오 장군은 방어 전투력이 소진되기 전에 빠르게 대대~연대 단위로 밀어내기식 교대를 해가며 고지를 고수했고, 빠른 교대를 위해 (연대본부, 연대장을 거치지 않고) 휘하 대대에 직접 명령을 내려 이동시키는 월권을 행하기까지 했다. 다행이 그 덕에 백마고지 일대의 9사단 병력은 전투력이 완전 소진되지 않은 채 서로 교대해 가며 효율적으로 손실을 보충할 수 있었다. 또한 9사단 예하 포병뿐만 아니라 인근 미 포병부대까지 총동원되어 화력지원에 나섰고, 미 공군의 지원까지 계속되었다. 거기다 백마고지의 동쪽 평야지대에는 국군 53전차중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이들은 전투 내내 중공군의 측면에 정확한 직사포를 퍼부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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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5-27
  • [김희철의 전쟁사(81)]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국군 9사단이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을 격파한 전투로 6·25남침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중공군 역시 ‘항미원조 전쟁경험 총결’이라는 기록물에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한 전투이다. 9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개전초기 6사단장으로 춘천지구전투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5일동안 지연시켜 북한군의 남침계획을 무력화시켰고, 낙동강전선에서 반격 작전에 나서 그해 10월 최초로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하는 등의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김 장군은 6·25남침전쟁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된 1951년 5월 현리전투에서 3사단장으로 중공군에게 불명예스런 패배를 당한 것을 설욕하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차였다. ■ 훈련으로 흘린 땀은 전장에서 흘릴 피를 줄이고 승리의 영광을 안겨… 1952년 10월6일 시작된 백마고지 전투는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고지 쟁탈전으로 피아간 12차례 공방전을 벌여 7번이나 주인이 바뀐 대혈전으로 중공군 1만여 명, 국군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27만5000여 발의 포탄으로 황폐해진 고지의 모습이 하얀 말이 드러누워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백마고지’라 불렸다. 한편 밴플리트 장군은 1951년 5월,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의 패배와 현리 전투에서 3군단의 붕괴는 한국군에게 치명타를 가져온 결과였고 이로 인해 한국군에 필요한 것은 인력과 장비가 아닌, 지휘력과 훈련이라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는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은 전선에서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며 9주 훈련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제안했고 이에 따라 전선에 무조건 48시간 내로 복귀할 수 있는 위치마다 ‘야전훈련사령부(FTC)’를 4곳에 개설하였다. 부평리는 미 1군단이, 양양에는 한국군 1군단이, 양구는 미 10군단이, 마지막으로 사창리에는 미 9군단이 책임지고 훈련시켜 한국군의 문제점을 해결했다. 또한 FTC의 구성 인원들을 한국군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이들로 메웠으며, 이들의 노력 덕에 한국군만을 위한 강의계획과 교범, 훈련 번역서가 제작됐다. 사실상 이들 모두가 ‘한국군의 아버지들’인 격이다. 그들은 한국군이 다시 한 번 부활하여 전장에서 명성을 떨치기를 기대했다. 고 백선엽 장군은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 받았던 훈련이 오늘날 육군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기초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1952년 6월을 기해 수도사단을 제외한 9개 한국군 사단들이 훈련을 수료했으며, 밴플리트는 ‘야전훈련사령부(FTC)’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 임무를 중지하고 이들을 각 군단으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마지막 9주차에는 지금까지 진행한 훈련에 대해 검토한 후 연대 및 사단 참모들이 사단급 지휘소 훈련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한국군 사단들의 전투력 재건이라는 화려한 부활로 화답했다. 또한 모든 사단들이 물자와 병력을 제대로 보충받아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후 ‘가칠봉 전투’ 승리는 물론, 영웅적인 ‘백마고지 전투’나 ‘베티고지’의 혈전 등은 FTC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의 높은 전투력으로 이룩해낸 승전이었다. 공산군에게 힘없이 밀리던 ‘51년 초와는 달리 ‘52년부터 한국군은 UN군 전선 주축을 담당하며 중공군과 북한군의 맹렬한 파도 같은 공격에도 끄떡없이 단단한 방벽처럼 버티었다. ■ 유엔군의 확전 방지 위한 현전선 고수 명령으로 출혈만 강요된 고지전 계속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유엔군은 확전 방지를 위해 현재의 선에서 더 이상 공격하지 말고 전선을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중공군과 북한군은 이 명령을 교묘히 이용해 주요고지를 기습해서 탈취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한국군이 장악한 고지를 골라서 노렸다. 우리 국군의 전투력과 화력이 미군에 비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1952년 철원은 인근의 평강, 김화와 함께 철의 삼각지대를 이루면서 유엔군과 중공군이 대치해 있는 곳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중공군은 작은 목표물로 큰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요충지를 찾아 공격하고자 했고, 철원 서쪽의 395고지(백마고지)와 281고지(화살머리고지)는 그들이 노리기 딱 적격인 장소였다. 당시 유엔군이 철원평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위의 상황도처럼 철의 삼각지대 중앙에 있는 395고지는 남동쪽으로 펼쳐진 철원평야 일대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즉 395고지 하나만 차지하면 철원 일대를 통과하는 유엔군 보급선을 전부 위협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남쪽 평야에서 보면 여긴 고지가 맞지만 주변, 특히 북쪽이 해발고도가 1000m가 넘는 산들이라 그 산들과 함께 보면 동네 야산 수준이라 감제당할 수 밖에 없는 형상으로 아군이 불리했다. 그러나 새롭게 부임한 김종오 사단장은 FTC의 체계적인 훈련계획에 따라 초급간부와 병사들에 대한 교육을 마친 상태였다. 특히 155mm포는 갖추지 못했지만 9사단은 이전보다 잘 훈련된 3개 포병대대와 전차중대도 보유했고 효과적인 화력지원을 위한 화력지원통제소를 한국군 최초로 설치하여 운용 준비를 끝냈다. 이런 상황에서 펼쳐진 중공군 38군의 공세를 맞이한 게 395고지 일대에 주둔해 있던 국군 9사단이었고, 마침내 후일 ‘백마고지’라 불리게 되는 395고지의 전투가 시작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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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6
  • [김희철의 전쟁사(80)] ‘인천상륙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결작전 (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시 777린치 특임부대 말고도 또 다른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처럼 북한군 6사단도 낙동강 전선에서 호남지역으로 우회하여 미8군 방어선의 측방인 진주 및 마산 방향으로 공격하며 부산 교두보를 위협했다. 이에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상주 남쪽에 있던 미 25사단에게 마산 방면으로 이동하여 적을 분쇄하고 대구 일대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키도록 진주-사천선까지 공격하는 명령을 내렸다. 미 25사단장 킨(Kean) 소장은 8월3일 36시간 동안 야간 행군까지 강행하며 240km를 이동해 마산에 집결했고 배속부대를 포함한 킨(Kean)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작전에 투입했다. 예하 35연대는 격전을 치르면서 10일 목표인 진주고개에 도달했으나 미 5연대는 봉암리에서 포위 공격을 받아 전진이 부진했으며, 미 5해병연대는 11일 고성을 점령하고 12일 사천 입구까지 진출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저지되었다. 따라서 워커 장군은 기동 예비대 부족을 인식하고 각 부대를 진동리-남지선까지 후퇴시켜 방어선을 축소하고 미 5해병연대를 8군 예비로 돌렸다. ■ 킨(KEAN) 특수임무부대는 적 기도 분쇄 등 소방차 역할 및 777린치 특임부대 운용에 교훈 제공 이 작전은 개전 이래 최초로 실시한 아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이지만 적정 판단의 부정확성, 적의 침투 및 후방 교란과 산악지역의 매복에 대한 대비책 결여 등 미비점으로 인해 예상외의 큰 피해를 입고 성과마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마산 지역을 끝까지 확보함으로써 적의 기도를 분쇄했다. 또 상주지역 방어부대를 마산지역에서 반격 작전으로 운용하다가 예비로 전환하여 타지역에 재투입하는 등 소방차 역할을 충실히 하여 추후 반격 여건 조성에 기여하였다. 특히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 작전시 이를 참고로 한 777린치 특임부대 운용 등 차기 작전에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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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5
  • [김희철의 전쟁사(79)] 인천상륙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결작전 (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의미이다. 6·25남침전쟁시 낙동강에서 교착 상태를 맞게 되자 유엔군은 북한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1950년 9월15일 새벽,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 칭한 인천상륙작전을 기습적으로 감행했다. 그리고 26일 밤 12시에 낙동강에서 북진한 미 1기병사단의 선발부대인 777린치 특임부대와 오산에서 연결에 성공함으로써 크로마이트 작전을 완결 시켰다. ■ 777린치 특임부대는 하루 동안 160km이상의 초고속으로 진격해 연결에 성공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인천에 상륙한 국군 2해병대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때를 맞춰 낙동강 전선의 미 8군도 9월16일 09시를 기해 총반격을 개시했다. 위의 상황도처럼 미 1군단은 대구-김천-대전-수원의 경부 축선을 따라 진격하여 미 10군단과 연결함으로써 북한군을 양분시켜 차단 고립시키고, 미 9군단은 호남 일대를, 국군 1, 2군단은 중동부 및 동부 축선을 담당하여 적을 분쇄하는 반격작전을 시작했다. 특히 중앙의 1기병사단은 총반격 작전의 주공부대였다. 선봉은 7기병연대 1,3대대를 주축으로 이룬 777린치 특임부대가 맡았다. 한편 인천으로 후속 상륙한 미 7사단 32연대가 해병의 우측방을 방호하며 연결 작전을 위해 안양으로 진출했다. 21일 밤 32연대는 야간전투를 불사하고 작전지도를 나온 작전참모까지 전사하는 격전을 치룬 끝에 수원 비행장을 탈취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에 따라 수원비행장은 유엔군의 전진 기지뿐만 아니라 초과된 인천의 보급 수요를 대체할 보급기지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전략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은 ‘망치와 모루’의 작전개념에 의한 모루의 역할 분담이었다. 결정적 타격을 가할 망치의 역할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로 전환한 미 8군 사령부의 몫이었다. 모루의 역할을 맡은 미 10군단은 단지 2개 사단에 불과했다. 수원 일대에서 미 8군과 연결하고 서울을 탈취하는 것으로 작전을 제한하고 원주 방향으로 진출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최초의 시도도 위험 부담 때문에 자제했다. 망치역할의 미 1기병사단 최선두 777린치 특임부대(3대대)는 9월22일 08시 다부동 서쪽에서 출발하여 낙동리-상주-보은-청주-천안-오산으로 고속 돌파했다. 드디어 26일 하루 동안에 보은으로부터 무려 160km이상을 초고속으로 진격한 당일 22시26분경 미 7사단 31연대와 오산 북방 6km 지점에서 합류 및 연결에 성공하여 크로마이트 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었다.(일설엔 32연대와 연결했다는 기록도 있음) 28일에는 31연대가 오산 부근의 92와 117고지에서 북한군 방어부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즈음 미 1기병사단의 주력도 오산에 도달해 있었으나 31연대장은 미 1기병사단과 협공을 거부하며 독단 전투를 수행하다가 전진 속도를 지연시켰다. 이에 알몬드 군단장은 10월5일 31연대장을 전격 경질했다. 그만큼 협공과 작전 속도를 중시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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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4
  • [김희철의 전쟁사((78)]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시점에서 퇴로를 차단당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산악지대의 소로를 통해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그때 패잔병이 되어 38선을 넘어간 북한군 병력은 10여만명 중 2~3만명으로 추정됐다. 국군과 UN군은 이들을 추격하며 다음 단계인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훗날 박정모 소위는 금곡전투, 원산상륙작전, 화천댐 탈환작전 등에서 큰 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 등을 수여 받았고 해병 대령으로 전역한 뒤 2010년 숙환으로 별세했으며, 양병수 이등병도 미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2014년 ‘9월의 현충인물’에 6·25남침전쟁간 서울 탈환작전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영웅 박정모 대령이 선정되어 그 소중한 정신과 실천을 가슴 깊이 기리고 있다. 최근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안중근 장군의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 무릎수술에도 불구하고 군생활을 한 추장관의 아들 서일병이다”라는 구두 논평을 냈다가 논란이 커지자 유감을 표명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박 의원 주장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안중근 장군의 말을 제대로 실천한 진짜 군인은 추장관의 아들 서일병이 아니라 6·25남침전쟁시 태극기를 게양한 박정모 해병소위, 연희고지 전투의 고길훈 해병소령, 영등포 전투의 탱크킬러 모네건 일병, 백선엽 장군 등과 같은 전쟁영웅들임을 명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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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김희철의 전쟁사(77)]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서울 서측방에서 미 5해병연대가 고전하자 뒤늦게 합류한 미 7해병연대를 미 5해병연대 좌측방에 배치하였다. 25일에는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를 서빙고 쪽으로 도하시켜 서울 북서쪽과 남동쪽에서 포위하는 형태를 갖추고 일거에 서울 시내 돌입작전을 전개했다. 서울 탈환작전은 주공인 미 5해병연대와 국군 1해병대대는 중앙에서 치열한 전투로 연희 고지와 와우산을 점령했고 일부부대는 서울시내로 진입한 상태였다. 북쪽은 미 7해병연대와 국군 5해병대대가, 남쪽은 미1해병연대와 국군 2해병대대가 배치된 반원 모양의 궁형(弓形)태세를 형성하였다. ■ 북한군 점령 89일 만에 박정모 해병소위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새벽의 포연 속에서 휘날리게 하다 9월25일 밤, 서빙고 쪽으로 도하했던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가 남산을 점령하였을 때 서울 탈환의 막바지 전투가 개시됐다. 주요 공격목표는 중앙청과 서울시청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주공 미 5해병연대와 국군 1해병대대는 며칠동안 서울 연희 고지 전투 등 격렬한 전투로 병력 손실도 많고, 인원도 부족해서 서대문 방면과 마포 일대에서 공세를 취했으나 북한군의 최후 발악적인 저항으로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진이 불가해 26일 새벽까지 고착되었다. 다만 서울 남쪽을 담당한 국군 2해병대대가 국부적인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원효로와 삼각지 일대를 확보했을 뿐이었다. 26일 서울 진입 전투는 철수를 위해 시간을 얻기 위한 북한군의 지연 전술을 분쇄하는 것으로 ‘바리게이트 전투’로도 불린다.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서울 시민을 동원해 주요 도로 요충지에 200~300m 간격으로 전진을 방해하는 바리게이트 장애물을 설치했고 북한군 병사들은 빌딩의 지붕이나 창문마다 득실거렸다. 그들은 전진하는 유엔군 부대원들을 저격하거나 휘발유로 만든 사제 폭탄을 던졌다. 바리게이트 장애물 극복은 매우 느리고 위험했지만 보병들이 바리게이트 주변의 저격수나 기관총수들을 사살하거나 패주시키면, 공병들이 뛰어들어 지뢰를 제거하고, 그후에 전차가 바리게이트를 깔아 뭉개면서 진격로를 열었다. 바리게이트 한 개를 돌파하는데 약 1시간 정도 걸려 속도가 매우 느렸다. 다음날 조선호텔까지 진출해 대대본부를 배치시킨 미 1해병연대에 소속된 국군 2해병대대장 김종기 소령은 중소대장들에게 작전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박성환 종군 기자가 “중앙청은 미 5해병연대의 목표이나, 우리 동포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한다고 이승만대통령께서 말씀하셨고, 상금 3000만원이 걸려있다”는 것을 귀띔해줬다. 이 말을 들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 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박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 허가를 상신했다. 허락을 받은 박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하며 중앙청 장소로 접근했다. 세종로 일대에서 북한군이 구축한 마대 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했다. 우선 청내의 잔적을 제압한 후에, 2개 분대를 중앙동 입구에 배치하고 1개 분대로 근접에서 방호하도록 운용하며 2미터 길이의 깃봉을 든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이등병을 대동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철제 사다리는 폭격고로 절단되었고 끊어진 와이어 로프 일부를 사용해 꼭대기로 기어오르다 떨어져 부상을 당할 뻔 했다. 천신만고 끝에 동창문까지 접근한 다음 태극기를 봉에 달아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걸고 고정시켰다. 이때가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서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유엔군의 서울 공격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9사단과 18사단 등 2만여명 병력을 추가 동원해 서울을 끝까지 방어하려 했다. 그들은 서울 시가지 교차로 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지 전투를 전개할 준비를 갖추면서 연희 고지와 안산을 고수해 아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용감한 한미 해병대에 의해 무산됐고, 이어서 9월28일 유엔군들은 북한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 듯 소탕하며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고 서울은 완전히 수복됐다. 3개월 동안 적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 시민들이 다시 찾은 자유는 더욱 가치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번 기회에 분단된 조국이 통일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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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5-20
  • [김희철의 전쟁사(76)]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쟁기념관은 해병대 창설에 참여하고 6·25남침전쟁 때 공을 세운 고길훈 해병 소장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 2020년 7월2일에 밝혔다. 함남 영흥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4년 도쿄 메이지대 문과를 졸업하고 광복 후 귀국해 1946년 5월 11일 해군에 입대했다.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에 참여해 초기 해병대의 체제 정립에 기여했다. 1950년 북한군이 호남지역까지 남하하자 해군본부는 제주도에서 대기하던 해병 300여 명을 '고길훈 부대'로 명명하고 호남지역 사수를 명령했다. ‘고길훈 부대’는 군산지역에 상륙해 사흘 동안 군산 일대를 방어하면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이 과정에서 군산항에 적재된 정부 재산을 지켜냈다. 이후 고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 1해병대대장으로 참여해 연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해병학교장과 1해병연대 부연대장 등을 역임한 고장군은 휴전 후에는 해병1여단장과 1상륙사단장 등을 맡았다. 1963년 12월 해병 소장으로 예편했고, 1981년 2월 61세로 별세해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어 1952년과 1954년 을지무공훈장을 각각 수여했다 이 연희고지 전투는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도 감행하는 불굴의 해병대 정신을 알려주는 전례로 널리 알려졌다. 이에 해병대는 이 104(연희)고지에 전적비를 세우고 매년 9월 서울 수복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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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8
  • [김희철의 전쟁사(75)]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엔군은 부천과 영등포 등에서 전차를 동원한 북한군의 저항은 있었지만 모두 격파하고, 9월19일부터 행주나루, 마포나루, 동작나루 등 3개소에서 한강 도하를 시작했고 인천에 상륙한지 9일째인 24일 마포나루로 도강한 미 1해병연대 등으로 서울 탈환 작전에 돌입했다. 한편 김일성은 서울방어를 위해 철원에서 편성 중이던 북한군 25여단과 김천의 9사단 87연대 등 정예부대 2만 여명을 전환 배치했다. 이에 유엔군 맥아더 사령관과 알몬드 미 10군단장은 9월25일 즉 전쟁 발발 3개월을 맞춘 서울 탈환을 ‘목표’로 시행한 언론플레이와 군사작전의 달성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미 1해병사단 및 국군 해병대는 작전기간 단축을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 대대원의 90%가 넘는 희생을 감수하며 감행한 연희고지전투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후 한미 해병대는 부천, 영등포, 안양, 수원을 차례로 점령하고 서울 시내로 진입하면서 연희고지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연희고지가 북한군의 최후의 요새였다. 그렇기에 이를 점령하는 것이 서울 수복의 최대 관건이었다. 연희고지는 서대문구에 있는 산으로 104고지 · 연희산 · 염산이라고도 불린다. 이 전투는 9월21일 미 5 해병연대에서 하달된 공격 명령으로 시작되어 23일에 끝났다. 행주나루로 도하에 성공한 후 수색지역을 무혈 점령하고 연희고지 앞까지 도달한 첫날 미 5해병연대장 머리 중령은 동쪽 끝에 위치한 105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미 3해병대대는 좌측에서, 미 1해병대대는 우측에서, 국군 1해병대대장 고길훈 해병소령에게는 중앙에서 근접한 연희능선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국군 1해병대대는 104(연희)고지의 양쪽으로 1중대와 2중대가 공격했고 이들이 개활지에 도달하자 바로 적의 기습사격으로 인해 발이 묶였다. 22일에는 박격포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 600명의 역습도 있었으나 격멸했고, 적들의 완강한 저항을 타개하기 위해 포병 및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전차부대와 함께 104고지 근처의 철로를 따라 전진했다. 하지만 적의 집중포화로 막혔고 결국 이날 전사자 11명과 부상자 45명을 냈다. 이때 적의 병력은 약40%의 손실을 입었다. 한편 104고지 오른쪽에 있는 터널 속에서 피아 정찰대가 서로 마주치게 되었는데, 이미 우리 해병은 북한군 병사들이 삭발하고 있다는 알고 있었던 까닭에 해병들은 상대의 머리를 만져보고 적임을 확인하여 이들을 모조리 포로로 생포하기도 했다. 그 다음날인 23일 국군 1해병대대는 공격력을 증대하기 위해 3개 중대를 병진으로 적의 진영을 정면 돌파하는 공격을 했다. 이 과정에서 적의 거센 저항에 신양수 소위, 김한수 중위 등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1해병연대장 신현주 대령은 약 62명의 병력을 1대대에 추가로 증원했다. 이러한 전투들이 계속 되던 중 일부 소대가 개천을 넘어 약진하여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그동안 상급부대의 작전기간을 단축하라는 독촉때문에 무모한 정면돌파 위주의 공격으로 각 중대 모두 전술적 소대 운영은 사실상 어려웠다. 특히 이날은 대대와 각 중대가 모두 전혀 예비대를 운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처럼 다가온 성공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이틀째의 공격에서도 국군 1해병대대는 전사 32명, 전상 68명, 실종 1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보았으며 22일과 23일 양일간의 계속된 전투에서 거의 모든 분대장들을 잃었다. 최후의 전투가 종료되고 1해병대대의 남은 병력은 26명에 불과했다. 연희고지 전투에서 국군 1해병대대가 희생을 무릅쓴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을 격퇴시키며 104(연희)고지를 점령했고, 미 3해병대대는 안산까지 진출했으며 미 1해병대대가 와우산을 점령을 함으로써 서울 탈환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결국 예비인 미 2해병대대까지 투입한 한미 해병대가 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써 9.28 서울 수복이 가능했으며 기적같은 인천 상륙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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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7
  • [김희철의 전쟁사(74)]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 1해병사단이 영등포를 점령하고 한강에 도달할 즈음에 미 7사단도 인천항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뒤늦게 18일과 19일 상륙하여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주 임무는 수원 쪽으로 남하하여 미 1해병사단의 남쪽 측면을 보호함과 동시에 서울로 후퇴할 북한군을 차단하고 낙동강에서 북진하는 미 8군 및 한국군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 7사단의 32연대는 별도로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했는데 이것은 해병대 뿐만 아니라 미 육군과 한국 육군(17연대)도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시키려는 ‘정치적 배려’ 때문이었다. 한편, 낙동강 전선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김일성 역시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울 방어를 위해 병력을 끌어모아 전환 배치시키기 시작했다. 철원지역에서 편성 중이던 북한군 25여단 70, 78연대와 9사단 87연대 등 2만 여명을 투입했는데, 상당수는 정예 부대였다. 이렇게 된 이상, 최초 5일 이내의 서울 탈환 계획은 물 건너 간 일이 되었지만, 맥아더 사령관과 알몬드 미 10군단장은 9월 25일 즉 전쟁 발발 3개월을 맞춘 서울 탈환을 ‘목표’로 언론 플레이와 군사작전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미 1해병사단 등 작전부대들은 작전기간 단축을 위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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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4
  • [김희철의 전쟁사(73)]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9월17일 오전, 경인가도의 우측지역을 담당하여 서울로 진격하던 미 1해병연대의 선봉 M26전차대는 지금의 송내 일대에서 민가를 은폐물로 삼아 포탑만 내놓고 있는 T-34 전차 한 대를 격파하면서 다음 목표인 영등포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중간에 있는 부천 소사에서 낮은 언덕에 매복한 북한군 18사단 22연대가 공격을 시작하면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미 1해병연대 2대대의 월터 모네건(Walter Monegan, 19세)일병의 바추카포팀이 맹활약 하면서 전차대와 함께 T-34/85 전차 4대를 격파하여 진격로를 열었다. 하지만 대가는 치러야 했다. 아군 M26전차 2대가 대전차 지뢰를 밟아 파괴되었고, 공병대가 지뢰를 제거해야 했기에 진격은 지체되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19일에 연대는 영등포 입구인 안양천 부근까지 진입했다. 당시 영등포는 한강 남쪽에서는 서울의 유일한 구로서 당당한 서울의 일부였기에 많은 북한군이 결의를 가지고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20일 새벽 4시 30분, T-34/85 전차 5대를 앞장세운 대대병력의 북한군이 자살폭탄 트럭까지 준비하여 미 해병대의 진지를 기습했다. 트럭이 폭발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 모네건 일병은 포복으로 굉음을 내며 달려드는 적 전차에 접근하여 물탱크 뒤에서 정확한 바추카포 사격으로 2대를 격파하고 3번째 전차를 조준하다가 다른 전차에서 쏜 기관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60년대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미 해병들은 치열한 백병전을 치르면서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모네건 일병이 소속된 미 1해병연대의 선봉 M26전차대는 4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1대를 노획했으며, 300여 명을 사살했다. 치열한 전투로 시신과 파괴된 전차의 잔해가 도로를 메웠기에 이를 치운 다음 다시 공격을 시작하기도 했다. 미 1해병연대는 그 날 오전 알몬드 10군단장으로부터 영등포 시가지를 폭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포병 사격과 항공 폭격을 시가에 퍼부었다. 21일 아침 영등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80고지와 85고지를 격전 끝에 장악하고 눈앞에 한강과 서울 시내를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22일, 미 1해병연대는 영등포를 점령했고 끊어져 있는 한강 인도교까지 수색정찰대를 내보냈다. 포로 신문 결과 영등포를 치열하게 방어하던 북한군은 9사단 87연대로 김천에서 16일 기차로 출발하여 낮에는 터널 속에 숨고 밤에만 움직여 20일 영등포에 도착했는데 이 전투에서 80%의 전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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