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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사(62)]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많은 미군이 이 땅에 왔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70여 년 전 연인원으로 따지면 150만 명이 넘을 것이다. 지휘관도 아주 많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해 워커, 리지웨이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찬란하게 떠올랐던 기라성 같은 장군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한국군 육성에 가장 공을 들이고 한국에 대한 정이 남달랐던 사람은 단연코 밴플리트였고 이는 이승만 대통령과 부자(父子) 이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미 장성들이 전쟁 전후에 한국에 머물렀지만 그가 보인 한국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각별하다. 밴플리트는 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뒤에도 한국과 미국의 관계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세상을 떠났다. ■ 밴플리트는 자신의 사재부터 털었고 휘하의 각 지휘관들 돈을 모아 육사 도서관 건립 지금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는 밴플리트의 동상이 서 있다. 원래 동상이 섰던 육사 도서관 옆에서 구석진 자리로 옮겨지긴 했으나,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그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들어섰다는 사실은 뜻깊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밴플리트는 한국군 현대화의 가장 절실한 과제를 능력 있는 ‘초급 장교의 육성’이라고 본 인물이다. 그래서 벌인 일이 육군사관학교 설립이다. 전쟁 중에 벌어지는 전투에 관한 지원은 미 8군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 설립은 권유할 수 있을 뿐이지, 지원을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설립과 발전에 골몰했다. 하루 빨리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만들어 유능한 장교들을 길러내야 한국군이 발전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1952년 들어서면서 그는 결국 일을 벌인다. 미 8군의 건설 자재를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짓던 서울 태릉의 연병장으로 옮기도록 했다. 자재들이 곧 산더미처럼 쌓였다. 밴플리트의 열정은 그러나 곧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미 의회에서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짓는데 왜 미 8군의 건설 자재를 사용하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미 8군의 한국군 지원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에 합당한 지적이었다. 그는 부득불 그 엄청난 양의 건설 자재들을 다시 원위치로 옮겨야 했다. 그는 위대한 군인이기는 했으나 행정에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쯤되면 웬만한 장성이라면 아마 민망함과 무안함 때문에 같은 일에 다시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달랐다. 밴플리트는 자신의 사재부터 털었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앞장서서 돈을 내놓고 휘하의 각 지휘관들에게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위해 도서관을 지어야 하니 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기부해라”고 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 마침내 육사내에 빨간 벽돌의 도서관을 지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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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7
  • [김희철의 전쟁사(61)]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밴플리트 장군이 1951년 4월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부터 대한민국의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령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존경했다는 숨겨진 일화가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라는 책에 공개돼 감동을 더하고 있다. 그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으로 6·25 남침전쟁 중인 1951년 7월31일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했다. 1653년 조선에 표류해 13년을 이 땅에서 머물렀던 하멜과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이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네덜란드인이다. 밴플리트는 장교 생활 초기에 이름 때문에 손해를 봤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미 참모총장과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마셜이 기억하는 미군 지휘관 중에 밴플리트 장군과 이름이 흡사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마셜이 기억하는 자는 술주정뱅이로 미군에서 소문이 자자해 마셜의 귀에도 그 이름이 들어갔다. 이 동명이인 때문에 밴플리트는 장군 진급에 여러 번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밴플리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와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다.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명성을 얻은 뒤 후에 각각 미국 대통령과 5성 장군(원수)의 자리에 올랐으나 밴플리트는 마셜의 오해 덕택에 그들보다 훨씬 뒤처졌다. 그러나 군인, 전쟁터의 지휘관으로 지닌 자질과 역량은 그 둘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적과 싸우려는 투지는 그들을 오히려 넘어선다는 평가가 많다. 밴플리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술주정뱅이로 오해 받은 것을 일소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해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8개월 만에 부사단장과 사단장을 거쳐 군단장까지 고속 승진한 인물이다. 또한 1~2차 세계대전을 거쳐 6.25남침전쟁까지의 프랑스 유타 비치 상륙작전, 벌지전투, 그리스 반군 게릴라 소탕 작전 등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각종 전투에서 수차례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6·25 남침전쟁 중에 3군단의 치욕스런 ‘현리전투’의 패배를 겪고, 정전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한국군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서라면 각 부대들이 전선에서 계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따라 ‘야전훈련사령부(FTC)’를 창설하여 운용했다. ‘야전훈련사령부(FTC)’가 운용된 양양에서는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1952년 6월을 기해 수도사단을 제외한 9개 한국군 사단들이 훈련을 수료했으며, 밴플리트는 야전훈련사령부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 임무를 중지 하고 이들을 각 군단으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가칠봉전투’ 승리는 물론, 영웅적인 ‘백마고지 전투’나 ‘베티고지’의 혈전 등은 ‘야전훈련사령부(FTC)’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의 높은 전투력으로 이룩해낸 승전이었다. 특히 한국군은 중공군에게 힘없이 밀리던 ‘51년 초와는 달리 ‘52년부터 UN군 전선 주축을 담당하며 중공군의 맹렬한 파도 같은 공격에도 끄떡없는 단단한 방벽처럼 버티었다. 이에 따라 미군 수뇌부는 변화된 한국군에 대해 높게 평가를 했고, 이들이 현대 기계화 전장에 대한 인식도 늘려가고 있었으며, 그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계획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한국군의 재건에서 부터 우리의 육군이 오늘날의 현대화한 군대로 성장한 것은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과 그가 만든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 시작되었으며 밴플리트 장군은 궁극적으로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닌 성과를 올렸다. 또한 그는 다른 미군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데 있어 매우 단호했다. 1951년 말, 대한민국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던 공산 빨치산들을 일거에 토벌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밤의 인민 공화국'으로 불리던 그 지역의 치안을 회복하고 후방지역을 조기에 안정시킨 성과를 내기도 했다. ■ 밴플리트, ‘강철같은 사나이’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북진정책 뜻을 같이해… 6.25남침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미군 장성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그들을 자식처럼 대하며 각별히 챙겼다. 특히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과 부자(父子) 이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추운 겨울 날씨에 밴플리트가 있는 전선을 방문했다. 이른 아침 지프를 타야 할 때 밴플리트가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자, 이 대통령은 미소로 답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밴플리트는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밝은 얼굴과 외투 밖으로 보이는 백발은 마치 검은 구름 위에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빛났다”라고 회고했다. 밴플리트는 "2년간인 재임 기간 동안에 이승만 대통령은 얼어붙은 전방과 훈련 지역을 수시로 시찰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였다"며 "그런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서양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부르는지도 이해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워싱턴의 휴전정책으로 북진작전에 제한이 가해져 사실상 군사적 승리가 가로막히자, 북진작전'이란 같은 뜻을 갖고 있었던 밴플리트와 이승만 대통령 두 사람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려고 하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두 사람은 전쟁을 보는 눈도 같아서 전쟁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에게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있었다. 거기에다 밴플리트는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겼다. 밴플리트 장군은 전쟁 중 워싱턴과 서울 간에 전쟁의 해법을 놓고 의견이 대립할 때면,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을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의 위대한 애국자, 강력한 지도자, 강철 같은 사나이, 그리고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며 존경하고 흠모했다. 그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은 밴플리트 장군의 작전에 그대로 투영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빼앗기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런 마음을 밴플리트가 알고, 그가 부임한 이후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적에게 점령되지 않도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26
  • [김희철의 전쟁사 (60)]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9월15일, UN군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지휘아래 7합동기동부대가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의 함정을 이용하여 미10군단 예하 1해병사단, 7보병사단과 국군 해병대1연대, 육군 17연대로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 칭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했다. 6.25남침전쟁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작전으로서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9월 15일 06:00에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이 문산호를 타고 경북 장사리에 상륙하여 양동작전을 성공시킨 것도 의미있는 전쟁의 역사이다. 하지만 전투중 북한군에 의해 대부분 전사하는 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숨은 영웅들이 있었다. ■ 보훈처, 2014년 9월의 6.25남침전쟁 영웅에 故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선정 인천상륙작전 한달전인 8월 22일 인천앞바다의 영흥도에 임병래 중위(1922년 평남 용강 출생, 1950년 4월 20일 해군 중위 임관, 해군정보국 창설 요원)가 이끄는 인천상륙작전 첩보대가 은밀히 상륙하여 잠입에 성공했다. 그들은 서울과 수원, 인천 등 사지(死地)를 왕래해 북한군의 병력배치와 그 규모, 보급관계, 지뢰매설 사항, 상륙지점의 지형, 암벽의 높이, 기뢰 수송사항, 인천 해안포대의 위치, 인천시내 주둔 병력의 규모와 활동내용을 수집해 해군 본부와 맥아더 사령부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X-Ray작전이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9월 14일 새벽2시 영흥도 옆섬인 대부도에 주둔해 있던 북한군 1개 대대가 첩보대의 활동을 눈치채고 영흥도로 기습 공격을 했다.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될 9월 15일이 다가오자 영흥도 첩보기지는 철수명령을 받았으나,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1948년 6월 1일 해군 신병 10기로 입대, 해군 정보국 특수공작 2조에 편성됨)를 비롯한 해군 첩보대원 9명과 해군 의용대원 30여명은 공격해 오는 북한군들과 치열한 교전을 치루게 됐다. 적으로부터 포위될 위기에 직면하자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다른 대원들이 보트로 탈출할 수 있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공격을 차단해 다른 대원들은 그곳을 탈출했지만 마지막까지 퇴로 보장을 위해 적군을 저지하던 두 대원은 끝내 탈출에 실패해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절대절명의 순간, 인천상륙작전을 불과 24시간 앞둔 시점에서 포로가 될 경우 인천상륙작전이 탄로 날 것으로 판단한 임중위와 홍하사는 적을 쓰러뜨린 다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장렬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작전의 승패를 좌우하는 군사기밀은 목숨걸고 지켜야 할 가치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이로써 9월15일 ‘크로마이트 작전’이라 칭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고, 이어 유엔군 미해병대(7사단 32연대)와 육군(17연대), 그리고 한국 해병대는 서울로 진격했다. 이에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결정적 기여자인 고(故)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미 은성무공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이 두 분의 유해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또한 보훈처에서는 2014년 9월의 6.25전쟁 영웅에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를 선정하여 그 소중한 정신과 실천을 가슴 깊이 기리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2016년 ‘인천상륙작전’이란 영화로 재탄생하여 미국과 한국에서 인기리에 상영된 바 있다.(중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23
  • [김희철의 전쟁사 (59)]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미 8군사령관에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은 미국 입장에서 한국군 부대들이 공산군에 투항하는 사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국공내전)에서 많은 국민당 군대가 공산군에 투항해서 편입되었고 한국에 침입한 병력의 다수가 원래는 국민당 군대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한국수호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아 미군 합동참모본부에 작전지침을 요청한 맥아더가 받은 지침에 “기본적 임무가 '일본의 수호'이고 아주 어려운 상황에선 일본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담겼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을 지킬 마음은 확고했지만 전략적 가치가 작다고 판단된 한국은 사태가 불리해지면 언제라도 버릴 생각이었다. 이처럼 중공군의 개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맥아더의 유엔군은 지상군사령관 겸 미 8군사령관이던 워커 장군을 잃어 새로운 사령관이 필요하였고, 당시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받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어떻게 치러야할 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이런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맹위를 떨쳤던 리지웨이 장군이 새로 부임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 각하, 나는 당신을 만나 기쁘고 이 자리에 서게 되어 기쁘며 나는 여기 머물 생각입니다(I'm glad to see you, Mr. President, glad to be here, and I mean to stay)"라고 인사했다. 그제야 1.4후퇴와 워커장군의 순직으로 굳었던 이 대통령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어 리지웨이는 한국군 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직 하나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면 귀하의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내는 일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합니다. 우리 통합된 연합군에겐 오직 하나의 공통된 운명만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렇게 각오를 밝힌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의 보급 및 전투근무지원 능력이 2주정도라는 것을 식별하는 통찰력과 강한 추진력으로 지평리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의 승리를 통해 서울을 재탈환하는 등 중공군의 공세에 반격을 가하며 전선을 북쪽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만들어 다짐한 약속을 실천했다. 또한 리지웨이 장군은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무력통일론은 집요했고, 한국은 인적 자원이 많으므로 무기를 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으로 이 용감한 노신사에 대해 존경과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라며 이 대통령에 대한 심경을 피력했다. 이어 “공산당에 대한 증오와 그 자신의 국민들을 위해 매우 편견에 가득 차 있기는 했지만......그리고 더 나아가 거의 불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지만, 그는 전 생애를 통해 헌신한 그의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이같이 행동하고 있었다”라고 이 대통령에 대한 이해와 존경을 기술했다. ■ 리지웨이가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자 클라크 대장이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 1951년 4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해임되자 대장으로 승진한 리지웨이는 제2대 유엔군사령관 및 미 극동군 사령관, 그리고 제2대 GHQ(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자리에 올라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을 통치하면서 한반도의 유엔 연합군을 지휘하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감동을 받아 존경심을 갖고있던 리지웨이는 일찍이 서울을 압박할 개성시의 전략 전술적 가치를 알아차려 대한민국이 개성을 반드시 차지하거나 적어도 중립지대로 할 것을 본국에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리고는 개성을 되찾을 군사 활동 또한 계획하였다. 하지만 전쟁에 질려 있던 미 정부와 언론에서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반응만 나오자 리지웨이는 결국 개성 되찾기를 포기하였다. 결과적으로 서부전선은 38선 이남으로 휴전선이 형성됨으로써 서울이 북한의 장사정포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이 위협이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북한 김신조 일당의 1.21사태 등 대남 도발사를 볼 때에도 휴전선에 근접한 서울에 대한 코리안 리스크를 미리 식별한 리지웨이의 당시 판단은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1년 뒤인 1952년 4월28일,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해제하고 일본을 서방 자유진영에 편입시킴으로써 리지웨이는 GHQ 최고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5월, 리지웨이는 미국 대통령 후보에 오르게 된 아이젠하워 원수의 뒤를 이어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직에 올랐다.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클라크 대장이 유엔군사령관(~1953년 10월)으로 부임하면서 잠시 공석이 되어 유엔군사령관직을 겸임했던 밴플리트는 미 8군사령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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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4-21
  • [김희철의 전쟁사 (58)]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한 외국 인사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다. 도쿄에 주재하던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부인과 함께 서울에 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자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일본은 물론 남한을 비롯한 미군의 대일 점령 지역도 관할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군인 경력의 상당 부분을 필리핀에서 근무한 극동통으로 이승만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그는 필리핀 망명 정부의 각료이며 군인·정치가 였던 로물로를 통해 이승만과 친분을 맺었다. 반소·반공주의와 기독교라는 공통점을 가진 맥아더와 이승만은 의기투합했다. 덕택에 맥아더는 해방되자 이승만이 다른 망명 지도자들보다 빨리, 1945년 10월16일에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왔다.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를 거쳐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은 맥아더와 두 차례 회동을 가졌다. 맥아더는 하지 미군정 사령관을 도쿄로 불러서 함께 이승만을 만나게 했다. 이승만은 맥아더의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왔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가 결정한 한국 신탁통치와 미·소 협상에 부정적이었던 맥아더는 적극적인 대소련 공세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뜻을 같이했다. 1946년 5월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끝난 뒤 미국 국무부와 남한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자 이승만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방미 활동을 계획했다. 그해 12월4일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도쿄에서 맥아더를 만났다. 맥아더는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을 미국 정부에 건의하겠다고 말했고 1947년 1월 마셜 국무장관이 취임하자 이를 지켰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남한에 과도독립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가 유엔에 가입한 뒤 유엔을 통해 소련군을 철퇴시킨 다음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외교·선전 활동을 벌였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이 확실해진 1947년 9월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제출했다. 11월 14일 유엔총회는 '한국 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후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주관 아래 일련의 절차가 진행된 결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됐다. ■ 맥아더의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고 8군 사령관은 밴플리트 장군이 맡아… 1950년 6월25일에 북한군이 남침하자 미국이 참전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권을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과거 망명시절 어느 모임에서 영관장교인 맥아더를 만났을 때 그의 인물 됨됨이를 감지하고 장래를 위하여 친밀하게 지내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승만과 맥아더 장군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맥아더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하식장에 참석한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받을 경우, 캘리포니아를 지키듯이 코리아를 방위하겠다"라고 다짐했다. 결국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1950년 9월15일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이 약속을 지켰다. 서울 수복 후 유엔군의 북진이 계속되자 중국은 ‘중국 인민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침공 행위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고 10월20일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불법 침범하는 구실로 제시한 항미원조(抗米援朝)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유엔군은 패퇴하여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한편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미 8군사령관에 부임했다. 이 때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군의 원폭 사용과 일본군 투입을 공언하여 정치적 문제가 되는 가운데 중공군의 동계 대공세로 불리는 신정 3차공세에 밀려 서울을 내주고 1.4후퇴를 한 상태여서 입지가 무척 좁아졌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고군분투하던 그는 계속해서 워싱턴과 반대되는 만주 폭격 등 공세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며 트루먼 대통령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듯했다. 결정타는 1951년 4월 5일 공화당 마틴 의원에게 보낸 편지가 하원에서 낭독된 것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망설임과 혼란 속에서 백악관은 4월 9일 새벽에 맥아더의 해임을 공표했고, 이로 인해 트루먼 행정부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특히 맥아더가 하원에서 행한 연설은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당시만 해도 맥아더가 출마를 하면 바로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후에 맥아더가 상원 청문회에 나와 전쟁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그의 인기는 급락했다. 하원에서 연설 당시가 맥아더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는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고 미 8군사령관의 자리는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의 사관학교 동기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벌지전투 등에서 맹위를 떨쳤던 밴플리트 장군이 맡았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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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0
  • [김희철의 전쟁사 (57)] 1군단장 백선엽 장군, 7차례의 고지 쟁탈전 끝에 38도선 북쪽인 설악산 일대를 우리 영토로 확정(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이 ‘51년 11월에 수도사단(사단장 준장 송요찬)과 8사단(사단장 준장 최영희) 그리고 기존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를 통합하여 ’백야전 전투사령부(사령관 소장 백선엽)’를 창설하였다. 수도사단은 월비산·351고지일대에서 수색과 정찰의 반복으로 북괴군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군단 작전지시 제14호에 따라 책임지역을 11사단에 인계하고, 11월16일부로 호남지구에 창설된 ‘백야전사령부’에 배속되어 공비토벌 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이에 11사단은 작전명령 제18호에 의거 사단예비인 9연대로 하여금 월비산∼261고지∼351고지∼148고지∼187고지∼36고지를 인수하게 하였다. 따라서 9연대는 배속 받은 대전차공격대대를 261고지와 월비산에, 사단 수색중대를 148고지 일대에 배치하여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그로부터 2일이 지난 11월18일 저녁, 북한군 9사단 86연대의 1개 대대는 어둠이 깃든 후 월비산을 목표로 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이 고지에 배치된 대전차공격대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날 후반야에 3개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아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였다. ■ 월비산·351고지는 피탈됐지만 서부전선보다 북으로 80㎞를 더 확보 월비산을 탈취한 북한군 1개 대대는 그 여세를 몰아 대전차 공격대대가 351고지에 미처 방어편성을 끝마치기도 전에 급습하여 이 고지마저 장악하였다. 11사단은 수도사단으로부터 월비산을 인수받은 지 불과 8일 만에 이를 고수하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빼앗겼다. 당시 대전차공격대대 1중대 이재화 중위(예비역 대령, 16연대장 역임)는 수도사단 1개연대가 방어하던 진지를 2개중대로 배치한 것과 신병들로 구성되어 전투경험이 적은 것도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증언했다. 11사단장 오덕준 준장은 심기일전하여 339고지∼351고지∼208고지∼37고지선에 새 방어진지를 편성한 후 방어태세를 강화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 전투로 북한군 사살 891명, 포로 37명, 소총 369정 노획 등의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후 수차례의 고지 쟁탈전이 휴전 직전까지 계속되었으나 우리 국군은 새롭게 편성된 방어진지를 잘 지켜냈다. 휴전협정 이후, 월비산은 안타깝게도 북한 땅이 되었으며 월비산과 351 고지 아래로 북측 민통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국군은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보다 북쪽으로 80㎞를 더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월비산 정상에 국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북한군 초소가 있으며 월비산 아래에는 북측 민통선과 더불어 남한 측에서 건설한 금강산으로 가는 도로가 지나간다. 금강산과 월비산의 모습은 고성군 현내면에 위치한 통일전망대에서 볼 수 있으며 월비산과 351 고지는 절경인 해금강과 더불어 분단의 아픔과 6.25남침전쟁의 치열함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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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9
  • [김희철의 전쟁사(56)] 1군단장 백선엽 장군, 7차례의 고지 쟁탈전 끝에 38도선 북쪽인 설악산 일대를 우리 영토로 확정(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군 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과 11사단 등은 강원도 고성군의 월비산과 351고지 탈환을 위해 1951년 10월 중순부터 휴전 직전까지 7차례에 걸쳐 고지 쟁탈전을 치루었다. 특히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수행한 전투로 해군의 지속적인 함포사격 지원과 더불어 공군은 총 1538회를 출격해 적 핵심시설 및 진지, 벙커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비록 마지막에 적에게 피탈됐지만 더는 전선이 밀리지 않은 덕분에 현재 38도선 북쪽인 설악산 일대를 우리 영토로 확보할 수 있게 됐다. ■ 산으로 달이 솟는 것이 날아오르는 형상인 월비산에서의 치열한 전투 월비산은 건봉산 줄기가 동해로 뻗으면서 형성된 표고 459m로 고성 서남쪽 5㎞ 지점에 돌출한 산이다. “달이 솟는 것이 마치 날아오르는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흥만과 더불어 월비산 일대는 6 · 25남침전쟁시의 전쟁영웅인 ‘김동석 대령(가수 진미령의 부친)’이 지휘한 HID36지구대의 활동지역이기도 했다. 그들은 야간에 은밀히 북한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게릴라, 기습, 암살, 첩보, 납치, 주요시설 폭파 등 각종 임무를 수행했다. 밤이면 물에서 올라와 첩보활동을 펼치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활동방식 때문에 북한군들은 이들을 ‘물쥐’라고 불렀고 김동석 대령은 ‘물쥐 대장’이 되었다. 국군 1군단은 1951년 9월6일경 향로봉∼건봉산∼송현리를 잇는 선상에 주저항선을 형성하여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10월10일 예하 수도사단으로 고성 일대의 전술적 요충지인 월비산을 선제공격하게 함으로써 월비산·351고지 전투가 개시되었다. 국군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지형상 월비산을 확보하지 않고는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도사단장(송요찬 준장)에게 그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에 수도사단은 1기갑연대로 하여금 1951년 10월 10일 월비산 공격의 발판이 되는 148고지∼351고지를 공격하도록 하여 이를 탈취하였다. 10월 12일부터 3일간 1기갑연대는 주목표인 월비산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간신히 261고지와 350고지까지 진출하는 데 그쳤다. 수도사단 사령부에서는 병력을 집중투입하기로 작전계획을 수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기갑연대는 15일 오전에 공군이 포함된 제병협동 및 합동작전으로 공격을 재개하였다. 당시 유엔 공군기의 오폭으로 3대대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일대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으나, 월비산 정상으로 돌진하여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 끝에 이날 오후 마침내 월비산을 탈취하였다. 월비산 전투가 일단락되면서부터 동부전선의 상황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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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6
  • [김희철의 전쟁사(87)]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에서 반격작전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으로 접근하자, 이 선의 돌파 여부가 초미의 관심을 끈 정책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유엔군 계통으로 38도선 돌파 명령이 내려지지 않자, 이승만 대통령은 38도선 돌파 결심이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능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한국군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라`고 명령하였다. 참모총장 이하 육본 참모들의 사이에 벌어진 논의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한 그해, 이 대통령은 75세, 장군들은 30세 안팎이라 경륜 많은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들이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는 70세, 미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중장은 60세였다. 둘 모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 후 미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지만, 조지 워싱턴 대학 학사, 하바드 대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 박사인 이승만 대통령이 그들을 포함한 리지웨이, 밴플리트 및 클라크 장군 등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밀릴 것은 전혀 없었다. 동서양의 학문을 겸비한 이승만은 조선조 말기에 민족주의 운동을 하다가 무기징역수로 복역하면서 ‘영한사전’을 저술했고,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40여년 간 망명생활을 했던 독립투사였으며 미국을 포함한 해외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를 받고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이승만이 6·25 남침전쟁을 포함한 대한민국 역사에 남긴 업적과 과오의 진실 밝혀야… 우남(雩南) 이승만은 이 땅에 5천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려 대한민국 번영의 기틀을 다진 건국 대통령이었다. 70여년 전 이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주의로 인해 대한민국은 세계 강국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을 바라본 외국인들의 다양한 시각과 평가들은 놀랍다. 이승만의 청년기를 직접 지켜봤던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는 “이승만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위인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이었던 로버트 T.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은 금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 지도자형으로써 동서 문화를 조정 통합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올리버 박사는 "20세기를 통틀어 이승만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인물은 거의 없을 것이며 그의 이름은 많은 정치가들을 배출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조직력과 지도력, 예언자의 비전을 두루 겸비한 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이다"라며 극찬했다. 해외에서는 이처럼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를 받았으나 이승만은 정작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잊혀졌다. 잘못된 역사 인식과 편견으로 인해 ‘이승만은 민주주의 파괴자’로 인식되어 왔고 ‘독재자’였다는 오명까지 쓰게 되었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건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위상이 추락되었고, 갈 곳 없는 역사의 방랑자가 되어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행히도 2010년 이후 이승만에 대한 연구와 관련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여 이승만의 진실이 서서히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왜곡과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어린 시절 배우고 들었던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이 왜곡되었고, 그 결과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이승만을 나쁘게 평가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링컨 대통령이 일궈낸 업적을 기리며 지금도 그를 추모하면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노래하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세운 업적들을 재조명하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래서 과연 이승만 대통령이 6·25 남침전쟁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 그가 대한민국 번영과 자유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남긴 과오는 무엇인지, 우리 후대가 그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중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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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5
  • [김희철의 전쟁사(55)] 눈물 어린 애국의 결정판 백두산함으로 최초 승리한 대한해협해전과 전초전인 옥계해전(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리했다는 느낌도 잠시, 침몰하던 적함에서도 포탄을 쏴댔다. 김창학과 전병익이 파편을 맞은 것이 이때였다. 백두산함 조타실에서 키를 잡았던 김창학 삼등병조(현재의 하사)는 복부에 파편을 맞았고, 주포 갑판에 있던 전병익 삼등병조는 가슴에 파편을 맞았다. 1950년 6월 26일 이른 새벽. 6·25남침전쟁은 막 시작됐지만 그들의 전쟁은 그때 끝났다. ■ 대한해협 해전의 영웅 고( 故) 김창학 하사와 전병익 중사 적함과의 교전 막바지에 중상을 입은 김창학과 전병익은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사병식당으로 옮겨졌다. 먼저 김창학의 윗옷을 벗기니 복부 여러 곳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업혀 들어온 전병익은 왼쪽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회백색 폐부가 보일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피를 많이 흘린 이들은 연신 물을 찾았다. 주계장 조경규가 물컵을 입에 가져다줬으나 힘이 없어 마시지 못했다. 솜에 물을 적셔 입에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면서 “적함은 요…?”라고 물었다. 항해사 최영섭 소위는 “격침했다. 살아야 해. 정신 차려”라고 외쳤다. 이 말에 이들의 눈빛이 환해졌다. 두 사람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한민국…”이라고 하면서 숨을 거뒀다. 지켜보던 대원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원 평강 출신으로 스무 살이 되던 1947년 가족들과 함께 월남해 해군 장교(해사 3기)가 된 갑판사관 겸 항해사 최영섭 소위(예비역 해군 대령, 현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 는 평소 병사들에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죽자”고 말해 왔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순간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회고록 ‘6·25 바다의 전우들’을 통해 증언했다. 이렇게 국민의 힘으로 탄생시킨 백두산함은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지만 큰일을 해냈다. 백두산함이 수평선 끝에 걸쳐 있던 ‘검은 연기’를 확인하지 않고 동해로 갔다면 부산은 위태로웠을지 모른다. 당시 부산에는 우리 군부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600여 명이 기습 침투상륙하면 그대로 점령됐을 수도 있었다. ■ 6·25남침전쟁의 분수령이 된 백두산함의 ‘대한해협해전’ 평가 백두산함은 3일정도 훈련을 한 뒤인 6월26일, ‘옥계해전’ 전개에 따라 동해안 작전지원을 위해 이동하던 중, 우리 군의 헛점을 찔러 부산 앞바다로 우회하여 기습 침투하려는 북한 함정을 발견하여 대한해협에서 격침시킴으로써 6.25남침전쟁의 첫 승전보를 알렸다. 해군본부에서 발행한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 의하면 ‘대한해협해전’은 6·25남침전쟁 발발후 우리군 최초의 승리였으며, 이로써 부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북한은 ‘대한해협해전’에서의 패전 이후 해상작전을 바꿔야 했다. 따라서 “북한군은 지상군 작전과 연계해 무장 게릴라 병력을 해안에 상륙시킨다는 작전을 철회하고 서해안 도서지역 침투로 선회했다”고 분석했다. 미국 군사연구자들도 대한해협해전을 높이 평가했다. 6·25남침전쟁 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첩보 임무를 수행했던 노만 존슨 박사는 1991년 출간한 책 ‘한국전쟁’에서 “북한군 특수요원 600~700명이 해로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고 투입됐다. 다행히 부산 인근 해상에서 이 위장선이 한국 해군에 의해 격침됐다. 이 사건이 6·25전쟁의 분수령이 됐다”고 적었다. 2007년 미 해군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과 미 해군’에는 “600여 명의 북한군이 탑승한 무장 수송선이 거의 무방비 생태였던 부산항을 향하고 있었다. 백두산함이 적 위장함을 침몰시킨 이후 부산은 한반도에서 연합군의 최후 보루가 됐고, 증원 병력과 물자의 주요 도입항이 됐다. 백두산함의 승리는 그만큼 중요했다.’”라고 기록되어 대한해협해전 승전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담아 놓았다. 또한 이 책은 “백두산함의 적함 격침은 중요한 항구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아찔한 국가적 위기를 막았고, 이후 모든 지원이 가능해져 유엔군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우리 국민의 성금을 모아 무기를 장착한 눈물어린 애국의 결정판이자 해군의 최초 전투함인 백두산함이 6·25남침전쟁 초기에 큰 위기에 빠질 뻔했던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15
  • [김희철의 전쟁사(54)] 눈물 어린 애국의 결정판 백두산함으로 최초 승리한 대한해협해전과 전초전인 옥계해전((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ㆍ25남침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아침은 평온했다. 우리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은 전날 밤 늦게 진해에 입항했다. “미국에서 사온 배를 한번 보여 달라”는 요청이 많아 동해, 서해, 남해의 여러 기지를 돌고 복귀한 것이다. 마침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 영외 거주자들은 집으로 퇴근했다. 당일 오전, 당직근무를 하던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예비역 해군 대령, 현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가 당직하사관과 함께 군함 청소를 마쳤을 때, 통제부사령장관(현 당직사령)이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장병들을 급히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정오 무렵 승조원 전원이 집결하자 최용남 함장은 “적군이 오늘 새벽 동해안 옥계 해안으로 쳐들어왔다. 동해로 출동한다”고 밝혔다. 대원들은 그때까지도 전쟁이 시작된 줄 전혀 몰랐다. 흔히 있는 소규모 침투 정도로 생각했다. ■ 죽을 각오로 적함에 접근해 공격하여 승리를 쟁취한 ‘대한해협 해전’ 6월25일 오후 3시 백두산함은 소해정 YMS-512정과 함께 진해항을 출항했다. 부산에서 오륙도를 바라보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오후 8시 10분경, 울산 부근 해상을 지날 때 우현 견시병(見視兵)이 “우현 45도 수평선에 검은 연기 보임”이라고 외쳤다. 갑판사관 겸 항해사 최영섭 소위가 쌍안경으로 보니 검은 연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해는 이미 넘어갔지만 하지 때라 잘 보였다. 잠시 항로를 벗어나 검은 연기의 정체를 확인하고 뒤따라가도 늦지 않을 듯싶었다. 마침 함께 가던 소해정의 속도가 느려 백두산함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차였기에 소해정을 먼저 옥계 해안으로 보냈다. 백두산함은 15노트 속도로 빠르게 검은 연기 쪽으로 달려갔다. 1시간 반쯤 항해하니 선체를 새까맣게 칠한 괴선박이 눈에 들어왔다. 배 이름이 없었고 국기도 달려 있지 않았다. 국적, 출항지, 목적지를 묻는 발광신호를 보냈으나 괴선박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밤 10시 30분경,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발광신호를 보내며 접근했다. 그러자 괴선박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속력을 높였다. 거리는 300야드(약 270m)까지 좁혀졌다. 괴선박의 갑판 위에 무장 병력이 가득했다. 코 모양을 보니 동양인이었고 600명은 넘어 보였다. 앞쪽에 큰 대포가, 뒤에는 기관포들이 달려 있었다. ‘아, 인민군이구나….’라는 판단을 하고 급하게 속력을 높여 3000야드(약 2700m) 거리로 물러났다. 최용남 함장은 장교 7명을 모아 냉수로 건배를 제안했다. “괴선박은 인민군 군함이 틀림없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살아서 마시는 마지막 물이 될 수도 있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해군본부에 공격 허가를 요청했다. 밤 12시가 지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26일 0시 30분경, 3인치 함포에서 첫발이 발사됐다. 그간 모의탄으로만 훈련하던 백두산함이 실탄 사격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적함은 기다렸다는 듯 함포와 기관포로 응사했다. 적함의 화력이 더 우세했다. 백두산함의 포탄은 100발이 전부였다. 20~30발을 쐈으나 파도에 배가 흔들리면서 거의 맞지 않았다. 최함장은 여기서 포탄을 다 쓰면 동해안에 상륙한 적군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에 제한이 된다고 판단했다. 최용남 함장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가까이 가면 우리도 맞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나, 어쩔 수 없이 죽을 각오를 하고 “적함에 접근해 공격한다.”라고 결심했다. 이에 대원들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행동했고, 백두산함은 최고 속력(18노트)으로 돌진해 500야드(약 450m) 거리에서 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중 한발이 적함 함교에 적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 마스트(돛대)가 꺾였고 기관실에도 여러 발이 명중했다. 최초 발견 후 5시간이 지난 새벽 1시10분경 연기에 휩싸인 적함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가라앉는 적함의 흘수선(배와 수면이 접하는 선)을 계속 때렸다. (하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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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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