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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사(84)]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로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한반도에 진입한 중공군 70만명의 약 절반 병력이 전선에 투입된 4월22일 춘계공세를 감행했고, 맥아더의 뒤를 이은 리지웨이 사령관이 지휘하는 유엔군은 서울 북방 임진강-의정부-가평-인제를 연하는 선까지 철수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1주일 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참지원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분석한 유엔군은 29일에 전 전선에서 적을 저지하고 반격하여 문산과 의정부를 재탈환하며 북상했다. 이때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는 3일 동안 설마리 전투에서 500여 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되는 등 처절한 피로써 적의 진격을 지연시켜 중공군의 서울 침공 의도를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국군 6사단이 졸전으로 패퇴하며 사창리가 돌파되어 가평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영연방 27여단 예하 호주 및 캐나다 대대가 진내사격 등의 선전으로 가평을 사수하였고 중공군 5차 공세의 전선분할 기도는 백지화 되었다. ■ 3군단의 현리전투 패배 불구, 6사단의 용문산/파로호 대승으로 UN군 반격작전 계기 마련 이후 5차 4월 춘계 공세에 실패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미군이 더 이상 예전같이 당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4월 공세에서 일찍 손을 떼고 전력의 집중 방향을 전환하여 중동부전선의 돌출되고 특히 약한 국군을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중공군은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5월16일부터 일명 ‘5월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과 9사단을 앞세운 국군 3군단과 미 10군단의 지휘를 받는 국군 5사단, 7사단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국군 7사단의 전방연대들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20시경에 진지를 피탈당하고 통신마저 두절되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국군 3군단이 배치된 현리 및 인제와 후방지역인 홍천을 잇는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자 유일 퇴로인 오마치고개가 차단되자 3군단은 전의 상실해 6·25남침전쟁사상 가장 큰 최악의 치욕적인 패전 기록을 남겼다.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리지웨이 대장의 뒤를 이어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밴플리트 중장은 5월21일 3군단이 담당했던 지역을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에게 인계시키고, 5월26일 유재흥 장군이 지휘했던 3군단은 해체되었으며 육군본부의 작전권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로써 육군본부의 역할은 인사·행정·군수·훈련으로 제한되었으며, 국군에 대한 지휘권은 완전히 유엔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더불어 장도영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6사단도 중공군 4월 공세 시 사창리에서 치욕적인 패배 및 도주로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조롱을 받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6사단은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용문산에서 설욕의 기회를 노리며 방어 준비를 했고, ‘결사(決死)’ 맹세 띠를 두르고 공격해 온 중공군19병단 63군의 3개 사단을 격멸하며 ‘용문산 대첩’의 쾌거를 달성했다. 중공군 6차(5월) 공세의 한 축인 용문산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 63군은 5월 21일 새벽에 서둘러 퇴각하였다. 하지만 주도권을 확보한 국군 6사단은 곧 바로 추격을 시작하여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진격하였고 ‘파로호 전투 대승’의 신화를 남기며 UN군 반격작전 계기를 마련했다.(하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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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9
  • [김희철의 전쟁사(83)]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중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 유엔군 총사령관(미군 사령관)은 맥아더(~1951년 4월)원수를 시작으로 리지웨이(~1951년 12월)와 밴플리트(~1952년 5월) 대장이 6~8개월 동안 지휘하다가 4번째인 클라크( ~1953년 10월) 대장이 가장 장기간인 17개월 동안 중공군 공세와 맞서 싸우며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때 밴플리트 대장은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 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다. 그러자 미군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은 한반도 상공에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 살포했다고 비난하는 심리전을 전개하며 유엔군 지휘부를 흔들어 군사작전과 정전협상에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의 여건을 만들며 용전했던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밴플리트 등 미 8군사령관들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 및 겸직하면서 5번씩이나 교체됐다. 반면에 북한 인민군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1950년 7월4일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해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했고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여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항미원조(抗米援朝)를 외치며 불법 침범한 중공군의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소련의 T-34, 야크기 등을 지원받아 북한군 7개 사단으로 남침했는데, 이 중 4개 사단은 모택동 팔로군에서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또한 33개월의 전쟁기간 동안에 북한 인민군이 주축이 된 전투는 개전초기부터 유엔군이 압록강으로 북진할 때인 3~4개월이었고 상단의 북진 상황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배치와 같이 나머지 약 30개월은 대부분이 중공군과의 전투였다. 따라서 6·25 남침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내전이 아니다. 소련과 중공이 주도한 공산주의·전체주의·제국주의 세력의 일방적인 침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유엔군 지휘부 교체의 틈을 이용해 중공군은 계속된 공세 감행 개전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격전을 치루던 1950년 8월12일 미 공군은 두만강 연안 나진 일대를 폭격했다. 이에 인천상륙작전이 실행되던 9월11일경 중국은 북한과 미국 양측에 중재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재탈환하자 중국은 9월30일 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방관하지 않겠다고 유엔에 경고했다. 10월3일 미군이 38도선을 넘으면서 중공군을 파병하겠다고 워싱턴에 통보했다. 유엔군의 북진이 계속되자 중국은 ‘중국 인민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침공 행위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고 10월20일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불법 침범하는 구실로 제시한 항미원조(抗米援朝)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유엔군은 패퇴하여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한편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8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이 때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미군의 원폭 사용과 일본군 투입을 공언하여 정치적 문제가 되는 가운데 중공군의 동계 대공세로 불리는 신정 3차공세에 밀려 서울을 내주고 1.4후퇴를 한 상태여서 입지가 무척 좁아졌다. 그는 계속해서 워싱턴과 반대되는 만주 폭격 등 공세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며 트루먼 대통령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듯했다. 결정타는 1951년 4월 5일 공화당 마틴 의원에게 보낸 편지가 하원에서 낭독된 것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망설임과 혼란 속에서 백악관은 4월 9일 새벽에 맥아더의 해임을 공표했고, 이로 인해 트루먼 행정부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특히 4월 19일 맥아더가 하원에서 행한 연설은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당시만 해도 맥아더가 출마를 하면 바로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후에 맥아더가 상원 청문회에 나와 전쟁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그의 인기는 급락했다. 하원에서 연설 당시가 맥아더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맥아더의 후임(유엔군 사령관)으로는 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임명되었고 리지웨이의 자리는 밴플리트 장군이 맡았다. 밴플리트가 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22일 중공군은 유엔군 지휘부 교체의 틈을 이용해 5차 공세(춘계공세)를 시작했다.(중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3-09
  • [김희철의 전쟁사 (35)] 밴플리트 장군과 FTC의 구성원들은 '한국군의 아버지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이 한창일 때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가칠봉전투에서 승리한 백남권 3사단장에게 항상 수류탄을 앞가슴 양쪽에 차고 다닌다고 ‘한국의 리지웨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백남권 사단장은 당시 “우리 3사단이 단시일에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한 것은 현리전투 패전 후 유엔군이 주도한 FTC에서의 철저했던 훈련과 미군의 화력 및 항공 지원에 큰 힘을 입었던 겁니다”라고 승리의 원인을 사전 교육훈련과 화력지원 등 유엔군의 공로로 돌렸다. ■ 국군의 문제, 능력 있는 장교진의 부재와 훈련이 부족한 보충병 그리고 떨어진 사기 야전훈련사령부 (FTC : Field Training Command)는 백남권 사단장이 ‘가칠봉전투’ 승리 소감에서 말했던 것처럼 6.25남침전쟁 와중에 국군의 전투수행 능력을 월등하게 향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의 제 5차 4월공세(’51.4.22~4.30)시 사창리전투에서 치욕적인 도주를 했고, 국군 3사단이 포함된 3군단은 현리전투의 패배로 부대가 해체되는 치욕을 겪었다. UN군 전선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한국군 사단들은 6사단이나 3군단처럼 중공군의 공세를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어 전 전선에 위기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서라면 정전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각 부대들이 전선에서 계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방어를 위한 훈련이 강화되어야 하고 특히 대대, 중대, 소대, 분대와 같은 부대단위 훈련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군의 진정한 문제는 능력 있는 장교진의 부재와 부족한 훈련을 받은 보충병, 그리고 전반적으로 떨어진 한국군의 사기라고 판단하고 ‘51년 7월에 들면서 전선이 소강상태로 변하자 야전훈련사령부를 설치 운용하여 한국군의 재건을 시작했다. 목표는 정전 협정 체결을 위한 시간을 버는 것과 중국군의 제한적인 공격에 대해 대비하고 전력이 약해진 부대들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밴플리트를 포함한 한국과 미국의 군 관계자들은 한국군이 인력, 장비, 물자, 전투 효율성 등 거의 모든 분야가 미흡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6사단의 패배와 3군단의 붕괴는 한국군에게 치명타를 가져온 결과였고 이들은 한국군에 필요한 것은 인력과 장비가 아닌, 지휘력과 훈련이라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와는 달리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군의 문제를 장교단의 리더십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밴플리트 장군은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였으나 해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전선이 유동적으로 언제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한국군의 자신감 회복과 사기 고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은 전선에서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며 9주 훈련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제안했고 이에 따라 전선에 무조건 48시간 내로 복귀할 수 있는 위치마다 야전훈련사령부(FTC)를 4곳 개설하였다. 부평리는 미 제1군단이, 양양에는 한국군 제1군단이, 양구는 미 제10군단이, 마지막으로 사창리에는 미 제9군단이 책임지고 훈련시켜 한국군의 문제점을 해결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한국군 보충병에 대한 훈련 강화 및 교육훈련체계 재구성 2. 한국군 교육 훈련 기관의 지휘통제 일원화 3. 리더십 프로그램의 강화 4. 미군 병과학교에서 한국군 장교에 대한 교육 훈련 진행 5. 모든 한국군 보병사단에 대한 부대 훈련 프로그램 진행 또한 FTC의 구성 인원들을 한국군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이들로 메웠으며 이들의 노력 덕에 한국군만을 위한 강의계획과 교범, 훈련 번역서가 제작됐다. 사실상 이들 모두가 ‘한국군의 아버지들’인 격이다. 그들은 한국군이 다시 한 번 부활하여 전장에서 명성을 떨치기를 기대했다. 백선엽 장군은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야전훈련사령부에서 받았던 훈련이 오늘날 육군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기초가 되었다’ 고 기술했다. 52년 6월을 기해 수도사단을 제외한 9개 한국군 사단들이 훈련을 수료했으며 밴플리트는 FTC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 임무를 중지하고 이들을 각 군단으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FTC는 부대훈련소인 UTC로 전환되어 차후 신설될 한국군 2개 사단 및 한국군 보충병 연대에 대한 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하면서 한국군의 기반 재건을 확실하게 지원했다. 보병 뿐만이 아니라 포병, 공병 등 지원부대에 대한 훈련도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훈련은 유동적으로 진행되었으며 훈련에 참여하는 장병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인력을 순환식으로 운용하여 전체 훈련과정에서 장병들이 열외되는 상황을 최소화시켰다. 또한 훈련 기간 중 경계병을 최소화시켜 최대한 많은 병사들이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마지막 9주차에는 지금까지 진행한 훈련에 대해 검토한 후 연대 및 사단 참모들이 사단급 지휘소 훈련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한국군 사단들의 전투력 재건이라는 화려한 부활로 화답했다. 모든 사단들이 물자와 병력을 제대로 보충받아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특히 1사단은 전투 효율성이 70%까지 증가했고, 6사단의 경우는 85%까지 상승했다. 11사단의 경우는 100% 완편 체제를 갖췄으며 대대급 이하 전투에서 맹활약을 했다. 이 같이 사기가 고양된 한국군 9개 사단은 순차적으로 전선에 복귀했으며 ‘51년 후반기부터 실시된 고지전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다. 백남권 3사단장의 ‘가칠봉전투’ 승리는 물론, 영웅적인 ‘백마고지 전투’나 ‘베티고지’의 혈전 등은 FTC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의 높은 전투력으로 이룩해낸 승전이었으며 공산군에게 힘없이 밀리던 ‘51년 초와는 달리 ‘52년부터 한국군은 UN군 전선 주축을 담당하며 공산군의 맹렬한 파도 같은 공격에도 끄떡없는 단단한 방벽처럼 버티었다. 특히 ‘52년 8~10월 사이에 이뤄진 ‘중공군의 7차’ 맹공세를 한국군이 스스로 버텨냈고 끝내 격퇴시켰다는 점은 확실히 FTC의 존재가 어떠했는지 말없이 반증하는 증거이다. ■ FTC에서 시작된 재충전과 교육훈련은 성공하는 인생과 승리하는 전쟁의 필요충분 조건 미군 수뇌부는 한국군에 대해 높게 평가를 했고, 이들이 현대 기계화 전장에 대한 인식도 늘려가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계획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FTC가 운용된 양양에서는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그중 8사단만이 1949년 6월20일 강릉에서 전쟁 발발 전에 창설됐다. 전쟁 중에는 12·15사단(1952년 11월8일)이 양양 전진리에서 창설됐고 21사단(1953년 1월15일)은 양양 조산리, 20사단(1953년 2월9일)은 양양 주청리에서 각각 창설됐다. 22·25사단(1953년 4월21일)은 현재 102기갑여단이 위치한 장산리에서 창설됐다. 정전협정 이후에는 27사단(1953년 9월18일)이 양양 송암리에서 창설됐다. 7군단(1969년 1월18일)과 23사단(1975년 8월1일), 8군단(1987년 4월1일)은 모두 양양 장산리에서 창설됐다. 102보병여단(1988년 6월1일)은 삼척에서 창설됐다. 결과적으로 한국군의 재건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과 그가 만든 FTC에서 시작되었으며, 밴플리트 장군과 FTC의 구성 인원들은 궁극적으로 '한국군의 아버지들' 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닌 성과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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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8
  • [김희철의 전쟁사(34)]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 가칠봉은 치열한 혈전과 사투의 역사 현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원도 해안면에 위치한 가칠봉(1,241m고지)은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로 가칠봉이 들어가야 비로소 금강산이 1만 2천봉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칠봉에서 '가' 자가 '더할 加'를 쓰는 만큼 가칠봉은 아름다운 산이지만 6.25남침전쟁 때에는 처절했던 격전장이자 혈전 사투의 현장이었다. 가칠봉은 제 4땅굴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다. 이웃에 있는 도솔산, 가리봉과 함께 태백산맥 중앙부를 이루는 산으로 북한강의 지류인 소양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가칠봉 동쪽에서는 침식분지로 유명한 펀치볼(해안분지)이 펼쳐져 있다. 현재 군사분계선은 가칠봉 북쪽을 지나가고 있으며 능선상에 을지전망대가 위치해 사전 신청하면 민간인의 제한된 방문도 가능하다. 백골 3사단 투입 열흘만에 가칠봉 점령, 이승만 대통령 휘호 ‘지려충순(志慮忠純)’으로 격려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5월16일부터 시작한 일명 ‘5월 공세’에서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과 9사단을 앞세운 국군 3군단이었다. 이 공세에서 치욕스런 패배를 당한 3군단은 해체되었다. 국군 3사단은 현리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피의 능선’을 점령한 후 펀치볼 북방의 1052·가칠봉·1211·1320고지 등에서 격전을 거듭하던 5사단과 ‘51년10월 중순 진지를 교대하여 북한군과 이들 고지들을 확보키 위한 혈전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은 펀치볼 일대의 요새를 계속 빼앗기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고지들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아군의 공격에 안감 힘을 다해 저항했다. 이러한 가칠봉·1052·1211·1252고지 등은 5사단이 한달 동안 맹공을 가했으나 적의 최후 발악적인 방어와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완전한 점령에는 실패한 곳이었다. 1052고지, 가칠봉, 1211고지 등에는 김일성 훈장을 받은 병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북한군 최정예 부대임을 자처하는 최현 중장(종전후 북한 민족보위상 역임)이 지휘하는 2군단의 예하 사단들이 필사적으로 아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개전초기 낙동강 전선의 ‘안강·기계전투’시 기갑연대장이었던 3사단장 백남권 장군은 진지를 교대한 후 22연대와 23연대로 하여금 1052고지와 가칠봉을 공격케 하고 18연대를 사단 예비로 운용했다. 공격개시 1주일만에 장춘권 대령이 지휘한 22연대가 적의 방어 벽을 뚫고 큰 피해 없이 1052고지를 점령해 버림으로써 3사단의 용명을 떨쳤다. 당시 장춘권 22연대장(예비역 육군 소장)은 5사단이 한달 동안 공격을 했어도 점령 못한 난공의 작전지역에 대해 사전 충분한 정찰과 분석을 했다. 공격을 위한 전술적인 계획 등을 치밀히 짜 놓은 후, 16개 대대의 사단 전 포대 약 80문의 포와 3만여 발의 포탄을 지원 받도록 협조도 했다. 연대의 공격 목표는 1052고지가 있는 능선을 따라 약4km에 걸쳐 솟아 있는 5개의 산봉우리들이었는데, 20초 사이에 봉우리마다 7천여발씩의 집중 포격을 가했다. 새벽 6시쯤 포격이 멈추는 순간 공격을 개시했는데 정오도 안돼서 5개 고지를 모두 점령해 버렸다. 어느 고지에서는 몇 번씩 육박전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큰 피해 없이 비교적 쉽게 점령했다. 공격 개시 전 1개 중대 병력의 특공대를 적 후방에 은밀히 침투시켜 보급로를 차단하고 교란시켰던 작전도 아주 주효했었고 돌격해 올라가 보니 고지의 호들은 우리 포격에 모두 부서졌고 박살이 나 버린 적병 시체만 나뒹굴어 포로를 한 명도 못 잡았다. 그러나 목표를 점령한 날밤 적의 기습적인 역습을 받아 가운데 고지를 빼앗겼었는데 밤새 전투를 벌여 새벽엔 다시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는 공격 때보다 고지들을 방어할 때 피해가 더 많았다. 그 이유는 적 진지들이 포격으로 다 파괴돼 버려 고지 점령 후 새로이 진지 구축하는 동안의 적 기습에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김종순 대령의 23연대가 가칠봉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 두 고지 전투는 점령한 후의 영예에 앞서 눈물겨운 고투와 쓰라린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당시 김덕준 대령(예비역 육군준장, 한국제강협회 부회장 역임)이 지휘한 진백골18연대는 예비대로 있다가 23연대와 교대해서 가칠봉 일대의 무명 고지들을 방어했는데 북한군은 매일 밤 나팔을 불며 공격을 했다. 진지 구축전에 기습을 해오자 급한 나머지 북한군이 도주할 때 미처 수습치 못한 적의 시체들을 끌어다 참호 앞에 쌓아 방탄벽을 만들며 적 공격을 방어했다. 18연대장도 훗날 증언시 “사실, 공격 때보다 고지들을 방어할 때 피해를 더 많이 보았다”고 토로했다. 역전의 백골 3사단은 10여일 만에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해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1211·1320고지 등은 천연의 지형적 조건과 북한군의 결사적인 방어 때문에 점령하지 못하고 작전임무가 끝나고 말았다. 난공불락 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가칠봉 일대에 3사단이 투입되어 이 같은 전승을 올리자, 유엔군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지려충순(志慮忠純)’이란 휘호를 써 보내 격려를 했다. 유엔군사령부서는 미국 은성 훈장 3개와 동성 훈장 6개를 보내 왔다. 하루 500명 사상 낸 최악의 사투, 탄우 맞으며 육박전…적 시체로 방탄벽 쌓기도 북한군들은 휴전이 되자 “6·25전쟁 중 이 1211 고지 등과 철의 삼각 지대의 오성산은 자기들이 끝까지 사수를 했다”고 호언하며 그 감투정신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 가칠봉과 1211 고지일대의 전투는 문자 그대로 악전 고투였으며 처참한 산악전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아군은 벼랑 아래에서 노무자들이 로프를 타고 올라와 보급해 주는 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육박전을 계속했고, 때로는 처리치 못하고 도주한 북한군의 시체들을 주워 모아 벙커 앞의 방탄벽을 쌓기도 했다. 백골 3사단은 이 일대에서 1개 중대 병력이 40여명밖에 안 남고 하루에도 3∼5백 명의 전 사상자가 나올 때가 있었다. 가칠봉 공격시에는 전방 23연대와 방어하는 적과의 거리가 불과100야드로 대치하고 있었다. 산봉우리 위에서 감제하는 적병들은 아군이 움직이기만 하면 총격을 내리퍼부었다. 인력이 모자라 사단 본부 요원과 군악대까지 총동원해 노무자들과 함께 탄약과 보급품을 지어 나르는 데 5시간 이상 걸렸다. 따라서 사단장은 어려운 도보 보급 해결을 위해 공병대대로 펀치볼에서 가칠봉 밑의 능선까지 올라가는 도로도 개설 했다. 미군 항공 지원을 받아 가칠봉에 네이팜탄을 일주일 동안 물 붓듯 퍼붓고 공격해 올라가는데도 여전히 북한군의 사격은 계속되었다.사단장은 특공대가 고지로 돌격해 올라갈 때는 무반동총과 기관총 진지로 나가 망원경으로 확인하여 목표를 조준해주며 진두 지휘를 했다. 그리고 고지들을 점령한 후에는 적의 야간 역습에 대비하여 반듯이 해가 지기 전까지 완전 사주 방어 태세를 갖추게 했다. ‘한국의 리지웨이’ 백남권 3사단장, 자결하고 싶다며 통한의 속죄 난공불락의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하자 유엔군 방송 종군기자가 3사단장 백장군을 직접 찾아와 생방송 인터뷰도 했다. 적병과 아군의 시체가 깔려 있고 구더기가 들끓는 산꼭대기에서 사단장은 제일성으로 “남의 귀한 자식들을 이렇게 죽인 것에 죄스럽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나는 지금 혈전 끝에 막 점령한 고지의 정상에 서서 담배를 한 대 피우니 그처럼 감회가 깊을 수가 없다. 계속 진격해서 백두산 꼭대기에 대한민국 태극기를 꽂은 후 나는 내 앞가슴에 차고 다니는 이 두개의 수류탄을 뽑아 그 동안 전장에서 죽어간 내 부하들의 죽음을 속죄하는 뜻으로 자결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①지휘관의 공명심 ②지휘관의 무지 ③지휘관의 태만에 의한 훈련 부족 등으로 인한 사병들의 희생을 항상 경계했다. 나는 오늘 많은 부하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딛고 영광스러운 지휘관이 됐지만 죽어 넘어진 영령들을 바라볼 때 가슴이 메어지고 속죄의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 가 없다”고 고지점령 소감을 술회했다. 이때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백남권 3사단장에게 항상 수류탄을 앞가슴 양쪽에 차고 다닌다고 ‘한국의 리지웨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는”우리 3사단이 단시일에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한 것은 현리 패전 후 양양 FTC에서의 철저했던 훈련과 미군의 화력 및 항공 지원에 큰 힘을 입었던 겁니다”라고 승리의 원인을 사전 교육훈련과 화력지원 등 유엔군의 공로로 돌렸다. 또한 “1211고지는 여러 번 공격을 했으나 끝내 점령을 못했어요. 이 고지는 너무 가파른 절벽이라 우리 사병들이 가까스로 9부 능선까지 기어올라가 수류탄을 던지면 도로 굴러 내려와 버리더군요.이 같은 불가항력의 지형에다 적의 발악적인 저항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어요”라며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역전의 3사단은 혈전의 ‘가칠봉전투’를 치루다가 미7사단과 진지를 교대하고 11월말 양구로 나왔는데 인명 피해가 1개 연대 병력에 가까운 전사3백여 명, 부상1천5백여 명이나 되었다. 백남권 3사단장은 휴전 후 1957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재직시 화랑의 후예 기상을 닦는 국방의 요람지로 육사를 ‘화랑대’라고 명명한 것이 유래가 되어 현재까지도 이 별칭이 불리우고있고, 육사와 인접한 ‘태릉정류소’라고 불리던 경춘선 역을 ‘화랑대역’으로 변경하게도 만들었다. 부하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백장군은 육군보병학교장, 21사단장, 논산훈련소장, 6관구사령관 등을 거쳐 육군소장으로 전역 후 인천제철 부사장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현충원에서 영면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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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4
  • [김희철의 전쟁사(33)] 펀치볼 전투 승리 영광과 환희의 색깔보다는 남겨진 상처와 고통을 성찰해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실제로 6·25남침 전쟁사는 양구 펀치볼(해안분지)의 고지들에서 약 221일 동안 벌어졌던 주요 전투를 9개, 사상자 수를 약 25만 여명으로 압축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백석산, 도솔산, 단장 및 피의 능선, 펀치볼, 가칠봉 등 핵심 전투들이 벌어진 고지들의 이름을 딴 양구군 월운리의 ‘펀치볼지구전적비’, 만대리의 ‘가칠봉전투전적비’ 등 많은 ‘전적비’속에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전쟁기념물은 선별되고 구성된 기억을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목적이 전제돼 있어 종종 전쟁이 남긴 상처와 고통에 대한 성찰적 기억보다는, 전쟁 승리의 영광과 환희를 채색하는 방식과 가깝게 세워졌다. 미 8군 사령관인 밴 플리트 중장은 7월21일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에 양구의 펀치볼(해안분지) 일대를 공격하게 했다. 그곳은 지난 6월19일 ‘도솔산 전투’에서 국군 1해병연대에게 패한 북한군들이 도주한 대우산이 포함된 지역이었다. 미 2사단이 7월27일 펀치볼(해안분지) 서쪽의 대우산(1179m)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으나, 장마 때문에 공격은 중단되었다. 8월 중순이 되어 장마가 끝나자 미 10군단의 군단장인 바이어스 소장은 펀치볼(해안분지) 북쪽의 고지들을 연결한 선에 작전통제선 헤이스(Hays)라인을 설정하고 다시 각 사단에 공격을 명령했다. 8월18일부터 서측엔 국군 7사단이 백석산(1142m) 기슭인 양구 방산면 송현리의 554고지·901고지 공격에 나섰으며, 중앙 미 2사단과 국군 5사단은 이른바 ‘피의 능선’이라고 불리는 983고지·940고지·773고지 공격에 나섰다. 그리고 국군 8사단은 해안분지 동북쪽인 인제군 서화면 노전평의 1031고지·965고지 공격에 나섰다. 서측 국군 7사단은 8월26일 554고지를 점령했고, 국군 8사단도 1주일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노전평전투에서 승리해 1031고지와 965고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미 2사단과 국군 5사단 병력이 투입된 피의 능선전투는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미 10군단은 북한군의 병력과 화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8월29일 예비부대로 편성되어 있던 미 해병 1사단을 해안분지 북쪽의 고지 공격에 새롭게 투입했다. ■ ‘헬기공중기동 작전’ 최초 시도로 격찬 받은 미 해병 1사단의 ‘펀치볼전투’ 화채그릇처럼 움푹 파인 모양을 하고 있어서 펀치볼(Punch Bowl)이라고도 불리는 해안분지는 1천m가 넘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당시 북한군은 부대 교대를 실시하여 북한군 3군단이 2군단 지역을 인수하고 3군단 예하1사단이 해안분지 북쪽의 924고지와 1026고지를 각각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라고 부르면서 방어진지를 공고히 구축하고 있었다. 이 고지들에 대한 공격 임무를 맡은 미 해병 1사단장 토마스 소장은 당시 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국군 해병 1연대로 하여금 김일성(924m)고지와 모택동(1026m)고지를, 미 해병 7연대에게는 해안분지 동북쪽의 702고지와 660고지를 공격하게 했다. 8월 31일 공격을 시작한 국군 해병 1연대는 산악의 특징상 기동로가 제한됨을 고려하여 정면보다는 측방으로 우회, 좁은 공간에서 목표를 공격하여 9월 2일 김일성(924m)고지를 점령했으며, 9월 3일에는 모택동(1026m)고지도 점령했다. 미 해병 7연대도 9월 1일 702고지를 점령했으며, 9월 2일에는 660고지도 확보했다. 미 해병 1사단은 9월 8일 다시 전방의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서 9월 20일까지 격전 끝에 749고지와 해안분지 북쪽 5km 812고지까지 추가로 점령했다. 이로써 미 10군단은 작전의 목표를 이루어 펀치볼(해안분지)을 완전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사단은 885고지에 224명의 수색중대와 36톤의 보급품을 헬기를 이용하여 공중 투입하는 ‘헬기공중기동 작전’을 최초로 시도하여 미국 신문에 보도됐고 격찬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400여 명의 전사자와 1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북한군 2,700여 명을 사살하고 55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국군 해병 1연대도 100여 명의 전사자와 3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38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4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 국군 5사단의 혈전으로 고지 주인이 6번이나 바뀐 가칠봉전투 펀치볼(해안분지) 북쪽의 김일성(924m)고지와 모택동(1026m)고지 등이 미 해병 1사단에 의해 점령되자 해안분지 서쪽의 ‘피의 능선’을 방어하던 북한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고립될 것을 우려해 이른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고 불리는 방산면 문등리와 동면 사태리 일대의 894고지·931고지·851고지로 퇴각했다. 그러자 미 10군단 군단장인 바이어스 소장은 미 2사단에게 좌측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게 했으며([김희철의 전쟁사](30) ‘스타크래프트 게임’ 인기맵 제목이 된 ‘단장의 능선’ 전투 참조), 국군 5사단에게는 우측에서 해안분지 북서쪽의 가칠봉(1,242m)을 병행공격하게 했다. 가칠봉 지구는 해안분지 북쪽의 분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외곽에는 높은 산들이 솟아 있다. 이러한 지형때문에 6.25 당시에는 군 작전상 대단히 어려운 지점이었다. 북한군은 이러한 자연지형을 이용해,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고 각종 포화의 지원 하에 반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아군은 저지대에 있어 지형상 불리한 조건이었으나 5사단장 민기식 준장, 27연대장 유의준 대령 등의 지휘하에 전투에 임했다. 8월30일까지 각 부대 배치와 수색 작전을 통해 정찰을 완료하고 배치된 위치에서 진지를 구축한 후, 8월31일 작전상 유리한 지점까지 북한군을 유인하여 막대한 희생을 입히고 총공격을 개시하여 가칠봉(1241고지)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역습하는 북한군의 저항을 격퇴하면서 2일간의 부대 방어에 간신히 임했으나 다시 빼앗겼다. 9월4일 민기식 5사단장은 27연대를 선두로 가칠봉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국군은 가칠봉을 점령하는데 또 성공했으나, 북한군이 27사단·12사단의 4개 연대 병력을 동원해 대규모 역습이 가해져 고지에서 부득이 퇴각한 후, 재차 육박전을 전개하는 등 여러 차례 진퇴를 반복하였다. 그 뒤 가칠봉에서는 10월 14일까지 40여 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여섯 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 끝에 국군은 가칠봉과 인근의 고지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칠봉전투’에서 패하면서 북한군은 사태리 방면의 쌍두령(雙頭嶺)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5사단은 600여 명이 전사하고 400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어 ‘51년10월 중순에 국군 3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반면 북한군은 1천여 명이 사살 당하고 250여 명이 생포되었다. 결과적으로 국군 7, 8사단은 북한군 5군단이 방어하던 백석산을 공격해 10월1일 점령했고, 또한 5사단은 가칠봉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미 10군단은 북한군을 패퇴시키고 양구 북방의 고지를 확보해 취약했던 이 지역의 방어선을 효율적으로 구축했다. 그리고 유엔군은 중동부전선에서 전력의 우위를 입증하면서 공산군에 협상을 압박하는 정치적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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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2
  • [김희철의 전쟁사(32) ]‘무적해병’신화를 만든 ‘도솔산전투'의 진짜영웅 이근식 소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철수는 했지만 당시의 전투지역은 고지대이기 때문에 식사추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들은 2일째 식사를 못하고 건빵과 물만 먹고 마시며 전투를 하고 있었다. 얼마후 2일간 밀렸던 식사가 노무자들의 지게로 운반되어 도착했다. 소대원들은 소금과 함께 주먹만한 삶은 쇠고기 덩어리를 반찬으로 철모에 수북히 담겨있는 밥 2일분을 다 한끼로 먹어 치웠다. 대원들의 얼굴에 희색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우리는 5시간 정도 푹 쉬고 잤다. 재 공격을 위한 휴식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중대 통신병이 SCR-300 무전기를 가지고 3소대장 이소위에게 왔다. 1대대 작전장교(서정남 대위)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렸다. ■ "국가를 위한 희생은 사치품 같은 소리…,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뿐" "3소대장, 공격하느라 수고가 많지? 대대장님(공정식소령 해사1기, 훗날 해병대 사령관 역임)께서 이번 공격에서는 반드시 '무명고지'를 점령하도록 하라는 특별지시가 있었으니 필히 점령하라"는 지시와 함께 격려하는 교신이었다. 얼마나 상황이 긴박했으면 대대 작전장교가 중대장을 제치고 공격소대장에게 직접 목표점령을 지시했을까? 그 특별지시는 소대원들에게 큰 격려가 됐고 이번 공격이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 임무인가를 다시 깨우쳐 주었고,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다. 17:00시, 2차 공격준비를 위해 소대원 전원을 집합시켰다. 총원 40여명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소대장을 포함하여 23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번쩍이고 있었다. 그속에는 살기가 있었다. "견적필살(見敵必殺)"의 각오였다. 이소위는 살아남은 소대원들에게 "자, 아침 공격에서 우리는 많은 동료 해병을 잃었다. 그러나 목표는 점령 못했다. 이번에는 필히 목표를 점령하여 전우의 원수를 갚는 거야. 인명은 재천이다. 나를 봤지? 적탄에 맞았어도 나는 살아있지 않나…"라며 분발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물이 나왔다. 대원들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지만 그들은 아무말 없이 그의 지시에 묵묵히 따랐다. 이제 공격을 개시하면 소대원 중 누군가 적탄에 맞아 부상당하거나 죽을 것이고 그것이 운을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제 곧 모두 죽음 앞에 서게 된다. 그들은 이 때 무엇을 생각 했을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기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은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는 사치품과 같은 소리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해병대의 명예를 위해 명령에 따라 공격했다. 그러나 생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같은 것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죽음이란 남의 일 같이 생각되었다. 오로지 목표를 점령하므로써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고 전해졌다. 오전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이소위는 산악 지형의 특성으로 총보다 수류탄이 더 효과적인 공격임을 깨닫고 수류탄을 4개씩 분배했다. 소대원들의 손을 잡으며 “동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류탄 공격을 감행하여 목표를 점령 할 것이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손을 굳게 잡은 대원들의 얼굴은 무표정 했다 17:55분, 미 해병대의 항공기 와 155mm야포의 공격준비사격을 지원받고 5분 뒤에 그들은 다시 그 지긋지긋한 공격대기지점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이소위는 목표 정상에 우선 뛰어 올라가 수류탄 돌격공격을 하기위해 3명의 특공대를 편성했고 중대장에게 연막차장 지원을 요청했다. 이윽고 멀리 후방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105mm 연막탄이 "쉬"소리를 내며 우리의 머리 바로 위를 지나 목표 너머 에 떨어졌다. 이어서 제3탄과 제4탄이 날아와 정확히 목표상에 다시 명중했다. 이소위는 무턱대고 일어서서 착검을 한 총을 들고 연막 속으로 목표 정상에 뛰어 올랐다. 연막으로 인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적이 파 놓은 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순간 적의 박격포 포탄이 나의 왼쪽에서 폭발했다. 나는 다시 나의 왼쪽 무릎부분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때마침 옆을 보니 특공대로 자원한 자동화기사수 고호선해병이 바로 오른쪽 호 속으로 뛰어들어 왔다. 호 속에는 적의 시체가 있었다. 아직 체온을 느낄 정도였다. 정상에 소대장과 함께 둘이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들이 들어있는 호 앞 너머에서부터 그 지긋지긋한 소련제 수류탄이 역시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이 까맣게 마치 까마귀 떼가 죽음의 사신으로 그들을 향하여 날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전부 그 둘의 머리 위로 지나쳐 뒤에서 폭발했다. 그런데 그 중의 1발이 고해병이 있는 호 속으로 떨어졌다. "앗" 하며 놀라는 순간 고해병은 적의 수류탄을 주워 적진으로 되던졌다. 적진에서 "쾅"하고 터졌다. 계속 20~30발 정도의 수류탄이 날아오더니 뜸해졌고 잠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다" 하고 둘의 것을 모으니 수류탄이 8발이다. 이소위는 오전 공격을 통해 적이 바로 앞 너머 10m정도 지점에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격발한 후 멀리. 가까이 그리고 좌우로 고루고루 적진에 던졌다. 자동화기사수 고해병은 적의 역습에 대비해 경계했다. "쾅,쾅…"하는 소리가 바로 앞에서,오른쪽.왼쪽에서. 그리고 멀리서 들렸다. 8발의 수류탄 폭발 소리를 세었다. 조용해졌다. 이제 육박전을 할 순간이 온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무아지경으로 무명고지 정상에 우뚝 올라섰다. 고해병도 뒤따랐다. 앞에 도망가는 적들이 보였다. 그는 "돌격 앞으로!" 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번의 "돌격명령"은 적 격멸과 동시에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고 방어중에 있던 적을 소탕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간간히 들려오는 총성보다 더 컸다. 그리고 자신감에 찬 승리의 소리였다. 그러나 "와" 하는 해병들의 돌격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뒤돌아 와서 고지 아래쪽을 내려다 보니 소대원들은 굴러오는 적의 수류탄을 피해 정상에서 30~40m 아래쪽으로 물러서 엎드려 있었다. 그래도 이소위는 다시 소대원들을 향해 "돌격 앞으로"하고 도주하는 적을 쫓았다. 대원들이 쫓아오건 말건 좀 무모했지만 그리고 쫓아가 적을 잡아서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도망가는 적 1명을 뒤에서 덮쳐서 잡았다. 쓰러진 적을 일으켜 꿇어 앉히고 그 머리에 총구를 댔다. 죽이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런데 전사한 해병들의 얼굴이 눈 앞에 떠 올랐다. 동시에 그들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생각이 났다. 순간 적을 보니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무슨 짐승의 얼굴로 보였다. 그래서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적의 얼굴이 보였다. 그 포로는 무릎을 꿇고 마치 파리가 두 앞발을 비비고 있는 것 같이 양손바닥을 부쳐서 비비면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라고 했다. 그 절망에 찬 애절한 표정의 그 얼굴에서 다시 전사한 부하 해병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수많은 해병들의 희생의 댓가로 이 적을 사살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총구를 치우고 "일어섯" 했을 때, "살았다"하는 안도와 감사의 표정을 보이던 그 포로의 얼굴에서 죽음과 삶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알 수 없는 어떤 자비를 베푸는 자의 희열을 맛본 것 같았으며 결국 그 포로를 사살하지 않고 후송시켰다. 그리고 이소위는 목표를 점령할 때 바로 옆에 떨어진 적의 박격포 포탄의 파편에 의해 몸의 왼쪽 부분, 겨드랑이, 왼쪽 다리 특히 무릎 관절 속으로 파편창을 입은 것을 잊고 있다가 목표 점령 후 긴장이 풀려서 인지 왼쪽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쓰러졌다. 이근식 소위는 어두운 밤길 고지 능선을 따라 덩치 큰 3.5인치 로켓포 사수의 등에 엎혀 밤새 10시간 동안 넘어지고 뒹굴면서 동이 틀 무렵에 구호소에 도착했다. 그는 간단한 응급치료를 받고 미군 헬리콥터에 실려 원주를 거쳐 미군 수송기편으로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1개월간 입원치료 후 퇴원하여 다시 전투에 임했다. ■ 북한 인민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한 대승리 그러나 계속된 교전으로 피해만 늘어나자, 2중대 3소대장 이근식 소위가 수류탄을 이용하는 맹활약으로 중간 목표를 일몰 이후에 점령했던 사례를 참고로 해병대 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정상적인 주간 공격보다는 적이 예상치 못한 야간공격으로 적을 기습하기로 결심했다. 1해병연대는 6월11일 02시에 무지원, 무조명하 야간공격을 기습적으로 감행하여 3시간 만에 방심했던 적들의 주저항선을 돌파하고 전과확대로 전환하여 대암산(1,314고지, 목표15)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국군 해병의 공격기세를 유지한 계속 공격으로 전투력이 저하된 인민군들은 6월19일 도솔산(목표24)을 포기하고 대우산으로 도주함으로써 ‘도솔산전투’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으며, 개인 및 공용화기 등 198점을 빼앗는 큰 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산악전 사상 유례없는 대공방전으로서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전투 중 적들이 노획한 아군 무전기로 감청을 잘하자 해병 1연대 장병들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제주 출신들에게 당시 잘알려지지 않은 제주 사투리로 무전 교신을 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4.3사건’으로 자신 및 가족이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하기위해 입대한 제주도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26일, 국군 해병 1연대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無敵海兵)’ 이라는 휘호와 함께 부대 표창을 받았다. 또한 연대장과 이근식, 오정근, 김의태 소위는 미 은성무공훈장, 대대장들과 고호선해병 등에게는 미 동성무공훈장, 2중대장에게는 "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됐다. 그 뒤 해병대에서는 ‘도솔산의 노래’라는 군가를 제정하여 그날의 용전의 기백을 후배 해병들에게 알리고 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2-26
  • [김희철의 전쟁사(31)] 도솔산 전투 승리를 축하한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 기념비, ‘무적해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군 3군단은 ‘51년 중공군의 기습적인 제 6차공세(5월공세)로 ‘현리전투’에서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다. 이후, ‘용문산대첩’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며 쾌승한 장도영장군의 6사단은 5월 21일부터 양평에서 양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진격했다. 이때 38선을 재돌파한 국군 6사단과 해병 1연대, 학도병들은 `화천댐을 확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중공군 3개 사단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하며 대승을 올리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였다. 한편 5월21일 오후 9시 즈음에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 1연대 수색중대가 대관령에 도착하여 선점했다. 이후 한신 대령의 1연대의 첫 전투에서 아군 12명 피해에 1,180명의 적을 사살했다. 그리고 백선엽 장군의 1군단은 계속 북진하여 23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일대까지 도달했다. 5월 말이 되자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 5차공세인 4월 춘계공세를 시작하기 전의 전선이었던 캔사스(KANSAS)선까지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도솔산전투’는 처음에 캔사스(KANSAS)선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미 해병대 1사단의 5연대가 맡았으나 많은 손실만 입고 탈환하지 못했다. 따라서 파로호 전투에서 혁혁하게 공을 세운 국군 해병대 1연대(연대장 대령 김대식)가 6월3일 도솔산 공격 임무를 인수하여 6월4일 첫 공격을 시작하였다. ‘무적해병’신화를 만든 ‘도솔산전투'지역은 38선 이북으로 양구군 해안면 칠정리의 도솔산(1,148m)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높이 1,000m를 오르내리는 높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기암절벽과 험하고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편에서 북상중인 유엔군의 전선부대가 한 걸음도 진격하지 못하게 되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캔사스선으로 철수한 공산군은 북한강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중공군 9병단이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하며 점령 중이었고, 북한강 우측인 이지역에는 북한 인민군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펀치볼과 도솔산 일대의 전술적인 이점과 천연적인 지세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견고한 난공불락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중 도솔산 일대에 배치된 북한 인민군은 약 4200명의 병력으로 무수히 많은 지뢰를 매설하고 수류탄과 자동화기를 퍼부으며 완강히 저항했으므로 국군 해병대는 한 걸음도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군 해병대는 치열한 육박전과 인민군이 예상치 못한 강력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24개 고지를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전진하였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 다시 빼앗기고, 또 빼앗는 가운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24개 목표 고지를 6월 19일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전투의 발판이 되었다. ■ 도솔산 전투의 진짜 영웅, ‘수류탄 돌격 소대장’ 이근식 소위(예비역 대령) 국군 해병대 1연대(연대장 대령 김대식)는 1차 목표를 대암산(1,314고지, 목표15)로 정하고 최초 2개대대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첫 공격이 좌절되자 6월5일에는 위 상황도와 같이 3개 대대 병진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해병대의 공격 4일째 되는 날인 6월7일 05:00시에 이근식 소위(해간 3기)는 해병 1연대 1대대 2중대 3소대장으로서 "도솔산"공격 중간목표 중의 제 4목표인 "무명고지"에 대한 공격명령을 중대장 이응덕 중위(해간1기)으로 부터 받았다. 앞서 최초공격을 하던 1소대장 최영남 소위(해간.3기)가 중상을 입고 후송되어 선임하사관이 소대를 지휘했으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해 철수했다. 다시 2개소대로 재공격했으나 역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적의 소련제 수류탄 투척을 수반한 완강한 저항에 또 실패했다. 3소대장 이근식 소위는 소대원들을 공격대기 지점으로 인솔하던 중 상공에서 포탄의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낙하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왼쪽 어깨등에 파편을 맞아 피가 흘렀으나 경상이었다. 다행히 소대원들의 피해는 없었다. 09:00시 소대는 짙은 안개가 사라지고 정상의 적 진지가 희미하게 보이는 돌격선에서 착검을 하고 돌격준비를 완료했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50~60m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수류탄 투척 거리 밖이다. 적의 진지는 산 정상에 있고 소대는 밑에서 돌과 흙으로 구성된 경사진 능선을 중심으로 기어올라가는 자세로 공격해야 했다. 2,3소대장의 "돌격 앞으로!"의 명령으로 호각소리와 함께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그 때 돌격 함성과 함께 정상의 적 진지로부터 소련제 수류탄이 위로부터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굴러내려와 폭발하였고 동시에 우측의 암벽진지로부터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불리한 여건이었으므로 앞으로 나가는 해병의 수보다 쓰러지는 해병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적의 목전에서 공격은 돈좌되었다. 이소위는 수차에 걸친 공격 중에 많은 부하 해병들이 전사했다는 데에서 오는 자책감과 강박감에 솟구쳐 오르는 통분을 억누르기 힘들었고 사기가 떨어진 대원들은 소대장의 얼굴 만 보고 있었다. 순간,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도 마비되어 어떤 결심을 한 표정으로 2소대장에게 "김 소위! 내가 저 정상의 적 진지를 분쇄할테니 뒤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2소대장은 "않돼. 올라가면 죽는 거야!" 하며 극구 그를 말렸다. 그러나 이소위는 “단지 나의 책임을 다할뿐이다" 라는 무언의 항변을 하면서 뒤쪽에 엎드려 있는 소대원들에게 "산 위에서 무엇이든 움직이면 쏴!"라고 지시하고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 2발을 양손에 쥐고 허리에 수류탄 2발을 차고 포복으로 정상의 적 진지를 향하여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는 바로 머리위에서 적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철모가 아닌 전투모를 쓰고 있었지만 무아 중에 벌떡 일어나 정상에 우뚝 섰다. 적을 2~3m 거리에서 내려다 보는 위치 였다. 적들은 방심한 채 옆과 앞뒤로 판 호안에서 수류탄을 모아놓고 아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적이 주어서 다시 던지는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양손에 쥐고있던 안전핀을 뺀 수류탄 2발을 미리 격발시켰다. "딱,딱"하고 수류탄의 격발 소리가 적막을 뚫고 들리는 순간 수그려져 있던 적의 머리가 들렸다. 적의 눈과 그의 눈이 소리 없는 불꽃으로 부딪쳤다. 순간 쌍방은 놀란 나머지 꼼짝도 않했다. 그는 바로 그들 속으로 수류탄 2발을 던지고 엎드렸다. "쾅,쾅" 소리와 함께 허리에 차고 있던 수류탄도 뽑아 격발시키고 좀 멀리 던졌다. 그리고 해병들이 엎드려 있는 쪽으로 마치 수영선수가 다이빙하듯이 붕 떠서 40~50m의 거리를 곤두박질하면서 돌아올 때 2개의 수류탄 폭음이 뒤에서 들렸다. 순간 함성이 들렸다. "우리 소대장님 만세!" "우리 소대장님이 제일이다!" 순식간에 대원들의 두려움이 소멸된 듯 했다. 사기가 되살아난 것이다. 이후 그에게는 "수류탄 돌격 소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어느정도 사기를 회복한 소대원들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이 다시 공격을 계속했다. 그때 이소위는 복부에 적탄을 맞고 그 충격으로 몇바퀴 뒤로 뒹굴었고 순간적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권총 탄띠의 왼쪽 허리에 차고 있던 탄창(칼빈 소총탄 15발) 2개의 주머니가 그의 복부쪽으로 돌아와 있어서 그 탄창의 맨 위 쪽에 있던 총알탄피 2개를 관통하고 관통력이 약해져서 총알이 회전하면서 그의 전투복을 뚫고 속내의를 뚫고 복부 위에서 기적적으로 멈췄다. 소대장이 적탄에 맞은 것을 보고 심통한 표정에 잠겨있던 대원들도 그가 "안 죽었어!"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니 다시 함성이 일어났다. "우리 소대장님 만세!" 정말 천우신조였다. 그는 "이제 나는 죽지 않는다'라며 자신감과 확신을 갖게 됐다. 이후 중대장에게 무전기로 상황보고를 하고 중대본부 지역으로 전원이 재공격준비를 위해 철수 하였다. 중대장도 그들의 전투상황을 70~80m정도 뒤에 있는 고지에서 관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질책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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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2-25
  • [김희철의 전쟁사](30) 미군, 한국전에서 2주간의 공방에도 점령 못한 최초의 사례로 희생자만 낳은 ‘단장의 능선’ 전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치열했던 고지전이 일어난 곳들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전투지역은 ‘단장의 능선’이다. 한창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 게임’중에서도 ‘단장의 능선’이라는 맵이 있었을 정도이다. ‘단장의 능선’은 강원 양구와 인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중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를 연결하는 5km 정도의 능선을 말하며, 지금은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단장의 능선’이란 이름은 연합통신 특파원이었던 스탠 카터(Stan Carter)가 전투상황을 취재하면서 어느 전방대대 구호소를 방문했을 때 한 부상병이 벌벌 떨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라고 고통스럽게 부르짖은 데에서 암시를 받아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여 이후부터 931고지 일대를 ‘단장의 능선’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한 프랑스 감독이 ‘단장의 능선 전투’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1955년에 발표했고 1956년 오스카상 다큐멘터리 부분에 출품도 했는데 영화제목은 'Cr?vecœur'였다. 영어로 하면 'Heartbreak' 이며 한국어로 번역하면 '단장(斷腸 - 창자가 끊어질 듯 괴롭다)'이라는 의미이다. ‘단장의 능선 전투’는 1951년 7월 10일 개최된 휴전회담에서 공산군 측이 고의적으로 회담을 지연시켜 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 측이 공산군 측을 회담에 응하도록 하는 한편 당시의 방어선을 보다 유리한 지역에 설치할 것을 목적으로 실시한 ‘피의 능선 전투’와 바로 이어진 치열한 전투이다. 1951년 9월13일 ~ 10월13일 동안의 이 전투에서는 미2사단이 예하 프랑스 대대 및 네덜란드 대대와 미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당시의 방어선을 보다 유리한 지역에 설치하여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공격했다. 당시 미 2사단은 단장의 능선 일대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6, 12사단 및 중공군 204사단과의 일진일퇴를 벌이며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다. ‘단장의 능선’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역사, 2만5000명의 젊음을 앗아간 치열했던 전투 피의 능선 전투(8월18일~9월5일)에서 인민군을 몰아낸 미 2사단 정보참모는 적의저항이 경미할 것으로 예상하며 공격 기세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포병사령관 워커 대령 등 연대급 지휘관들은 피의 능선처럼 단장의 능선도 저항이 완강할 것이라 고 건의했다. 미 2사단장 디사조 준장은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1개 연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만으로 9월 13일부터 단장의 능선 공격작전에 투입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단장의 능선 931고지에 주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자 소모를 자초하게 되었다. 5개 포병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은 미 23연대는 18일 야간 공격까지 감행하여 중간 목표인 850고지를 점령하였고 병행 공격하던 좌인접 미 9연대 2대대가 894고지도 점령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미 2사단장 디사조 준장이 9월20일 귀국하고 후임으로 로버트 염 소장이 부임했는데, 23일 미 23연대 1대대가 931고지를 점령했지만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었다. 9월 26일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가 다시 공격하였으나 피해만 늘어나 27일 공격작전을 중단시키고 재편성하였다. 미 2사단 23연대에 의해 시행된 이 ‘1차 공격 전투’는 미군이 한국전을 통틀어 2주간의 공방을 벌이면서도 점령을 하지 못한 최초의 사례였다. ‘단장의 능선 전투’의1차 공격에서 실패를 교훈삼아 사단장 로버트 염 소장은 3개연대를 동시에 투입시키는 ‘터치다운 작전’을 시행하였다. 위의 상황도와 같이 2차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72전차대대가 좌측 문등리 계곡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10월1일~5일 간에 사단공병대대로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스터만 특수임무부대(전차1개중대)는 우측 사태리 계곡으로 진출하여 북한군을 교란시켰다. 2차 공격은 10월5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미 23연대 1대대는 851고지를 공격하여 931고지에 대한 적의 증원을 견제하고 2대대와 프랑스대대는 6일 아침에 목표를 점령하였다. 좌측 미 38연대도 단장의 능선 서측방 490고지와 728고지를 점령하였지만 미 9연대는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867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7일 미 23연대는 2개 대대를 추가 투입하여 851고지를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심기일전한 미 9연대가 단장의 능선 서측방 작전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미 38연대는 8일에 636고지를, 9일에는 네덜란드대대와 협조하여 610고지를 점령하였을 뿐 더 이상 공격이 부진하였다. 이때 사단공병대대가 2구간 도로를 개통하여 10일에 2차 공격의 마지막 단계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동안 준비해왔던 제72전차대대가 충격을 가하면서 단장의 능선 서측 문등리 계곡으로 돌입하여 북괴군을 유린함으로써 진지 교대차 남진하던 중공군 204사단을 분산시키고 적 후방을 교란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는 능선의 동측 사태리 계곡에서 기동한 제23전차중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부대와 보전 협동으로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제9연대는 문등리 계곡 서측에서 병행공격을 실시하였다. 11일 미 23연대는 520고지를, 미 38연대는 905고지를 탈취하면서 미 2사단은 대부분 작전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미 23연대 3대대가 서쪽에서 851고지를 공격하고 1대대와 프랑스대대가 남쪽에서 주 능선을 따라 진출하여 격전을 치른 끝에 13일 ‘단장의 능선 전투’ 최종 목표인 851고지를 점령함으로서 성공리에 작전을 종료하게 되었다. 적군 2만1000여 명, 아군 3700여명의 피로 ‘단장의 능선’ 확보...휴전회담 재개 약 1개월 동안 일진일퇴의 백병전을 거듭한 끝에 유엔군이 적의 최후 거점을 점령함으로써 전투가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탄약 69만 7000발, 항공기 출격 842회, 폭탄 투하 250톤이라는 엄청난 화력지원을 하였다. 또한 탱크를 이용해 충격을 가하는 기동전과 육박전에 이어 헬리콥터 작전이 사상 처음으로 시도되었으며, 특히 마지막 날에는 견고한 진지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화염방사기까지 동원되었다. 이 전투로 북한군과 중공군 3개 사단은 사상자가 21,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단장의 능선 고지들을 내주고 지혜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미 2보병사단 또한 37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단장의 능선’ 3개 고지를 모두 점령함으로써 가칠봉과 백석산 사이에 한국군 쪽으로 생긴 공산측의 돌출부를 제거하여 전선을 정리/조정하였다. 이 전투가 끝난지 9일 후,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공산군 측이 유엔군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여 10월 25일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을 재개했지만, 결국 다른 의제들의 합의에 실패함으로써 휴전회담은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로서 격전의 현장에 세워진 ‘비목(碑木) 비석’의 내용처럼 포연과 함께 사라져간 아까운 젊음들의 피만 부르는 고지쟁탈전은 1953년 7월까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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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 [김희철의 전쟁사(29)] 지리한 휴전회담 속의 고지전 서막인 피의능선 전투에서 2만명의 희생자 낳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1년 7월10일 휴전회담이 진척을 보이지 않자 유엔군 사령부는 군사력에 의한 압력으로 협상을 강요할 필요성을 느껴 지상에서 적에게 적극적인 압력을 가하고 유리한 방어선을 확보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7월21일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에게 동부전선의 아군 취약 지역인 펀치볼을 우선적으로 공격했다. 펀치볼은 강원도 양구 북방에 위치한 해발 450 m 내외의 분지로써, 주변의 지형은 도솔산, 대우산, 가칠봉등 1,200m 내외의 고지군으로 둘러쌓여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긴 지형이다. 펀치볼 능선에서의 공방전은 9월 중순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지금 휴전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유엔군은1951년 8월 중순 장마가 그치면서 그동안 중단했던 공격을 재개했다. 이때 벤플리트 사령관은 미 2사단장에게 이른바 펀치볼이라고 불리는 해안 분지에의 공격과 병행하여 대우산 서측의 983고지(피의 능선)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피의 능선(Bloody Ridge)’은 양구 북방 방산면 고방산리와 동면 월운리 일대의 983고지·940고지·773고지를 잇는 능선을 가리키며, 미국 ‘성조지(stars and stripes)’의 종군기자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능선이 피로 물들게 된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투에서 벤플리트 사령관은 한국군의 전투 기량과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국군 5사단 36연대를 미 2사단에 배속시켰다. 국군 5사단 36연대(연대장 황엽 대령)는 미 2사단과 함께 양구 북방 해안분지 서쪽에 있는 983고지의 공격을 맡게 되었다. 피의 능선 983고지 일대는 양구읍과 해안분지인 펀치볼을 내려다보며 아군 동향을 관측하고 포격을 가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북한군은 이곳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해 놓았을 뿐 아니라, 북한군 12사단과 27사단 병력을 집중시켜 배치하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 2700명 희생으로 북한군 1만5000명 사살하며 ‘피의 능선’ 완전장악 성공 국군 36연대는 8월 18일 새벽부터 미군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북한군 제12사단이 지키는 983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날 밤까지 공격은 계속되었으나 북한군이 진지 전방에 대규모로 매설해 놓은 지뢰 때문에 적의 방어선 돌파에 실패했다. 그러자 국군 제36연대는 피의능선 983고지 전방에 소수 병력으로 고착시키며 북한군 27사단이 지키는 동쪽의 940고지와 773고지로 우회하여 공격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8월 19일부터 773고지와 940고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해서 8월 20일 773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940고지와 983고지를 공격해서 8월 22일에는 983고지마저 점령했다. 그날 밤 북한군 12사단이 반격을 가해오자 미 2사단 사령부는 9연대와 38연대를 보내 국군 36연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북한군 12사단과 27사단이 전력을 보강해 총공세를 가해오면서 8월 27일 피의 능선 고지들은 모두 다시 북한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국군 5사단과 미 2사단 사령부는 열흘간 전투에 지친 36연대와 국군 35연대를 교대하여 고지 탈환 임무에 나섰다. 국군 35연대는 8월 28일 773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그날 밤 북한군의 역습을 받고 고지에서 또 퇴각했다. 그러나 국군 35연대는 8월29일 오전 반격에 나서 773고지를 다시 탈환한 뒤 미 9연대 3대대와 임무를 교대했다. 미 9연대는 940고지 공격에 나섰으나 북한군의 반격을 받아 773고지마저 다시 빼앗기고 물러났다. 이처럼 피의 능선 고지들을 둘러싸고 격전이 계속되자 북한군은 6사단을 추가로 이 지역으로 보내 병력을 증강시켰다. 그러자 국군과 유엔군도 이 지역으로 국군 7사단 8연대 등의 병력을 추가로 투입시켰다. 9월에 들어서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 9월3일 미 9연대가 다시 773고지를 점령했다. 당시 미 1해병사단과 국군 1해병연대는 해안분지 북쪽의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서 924고지와 1026고지 등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해안분지 서쪽의 피의 능선을 방어하던 북한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고립될 것을 우려해 940고지와 983고지를 포기하고 이른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고 불리는 방산면 문등리와 동면 사태리 일대의 894고지·931고지·851고지로 퇴각했다. 북한군이 퇴각하자 미 9연대와 23연대는 9월5일까지 940고지와 983고지를 확보해 ‘피의 능선’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1만5천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국군과 유엔군에도 2천7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루 3만 발 포격,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일명 무제한 사격)’ 적용 특히 미군은 ‘피의 능선 전투’에서 4개 포병대대를 동원해 105mm와 155mm 대포 등으로 북한군 진지에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일명 무제한 사격)’이라고 불리는 하루 평균 3만 발씩 무자비한 포격을 가했다. 훗날 밴 플리트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전쟁 중에 가장 많은 포탄이 소모됐다고 말했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펀치볼 해안분지 북쪽의 능선으로 몰아내고 양구읍과 해안분지를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하였으며 이어 ‘피의 능선’ 북방의 ‘단장의 능선’탈취를 위한 공격을 계속하게 된다. ‘피의 능선 전투’로 피아 2만명의 수많은 희생자가 묻혀 있는 이 지역에서는 6.25남침전쟁이 끝나고 47년 후인 2000년부터 시작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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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김희철의 전쟁사(28)]밴 플리트 장군, “중공군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 내고 최대한 응징” 지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손자병법 제 6허실편의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은 “전쟁에서 거둔 승리는 반복되지 않으므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승리하기 어려우니 끝없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 3차공세 이후 킬러, 리퍼, 러지드작전 등으로 캔사스(Kansas)선까지 반격하여 북진했고 이어진 제 4차공세까지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중공군의 제 5차 춘계공세가 서울을 향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중공군은 손자병법 허실편처럼 유엔군의 허를 찔러 국군이 배치된 동부전선을 공격했다. 알몬드의 미 10군단과 한국군 3군단이 방어 책임지역을 두고 분규에 빠지는 까닭에 후방이 차단된 3군단은 ‘현리전투’에서 치욕스런 패배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지속된 공격으로 손자병법의 ‘병형상수(兵形象水)’라는 의미처럼 흐르는 물같이 동부전선에서 오대산 밑의 속사리까지 커다란 주머니 모양의 돌파구가 형성되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미 2사단이 5월18일 하룻동안에도 중공군 1개 사단의 공격을 격퇴시키며 위의 상황도에서 보듯이 퇴각한 국군 5, 7사단이 방어했던 지역의 좌측 ‘벙커고지’를 사수했다. 이 날까지 미 38포병대대는 1만2000발 이상의 포격으로 중공군에게 화력세례를 퍼부어 중공군은 약 3만5000명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되었고, 이는 적의 돌파구 확장을 거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동측 백선엽 장군의 국군 1군단도 오대산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전선에 수도사단과 11사단을 배치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유사시 속사리에 도달한 중공군들이 K-18비행장에 탄약과 포탄 및 보급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강릉으로 향할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현리전투 패배 씻어낸 밴 플리트 포격과 백선엽의 결단 현리전투에서 패배한 3군단의 퇴각에 따라 방어선이 무너진 상황으로 다급해진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아주 중요하고도 기민하게 줄탁동시(啐啄同時)적인 판단을 했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던 미 8군의 예비 미 3사단에게 돌파구 첨단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고 대관령 서쪽 용평에 있는 3군단의 간이 활주로에서 작전회의를 개최했다. 큰 키의 밴 플리트 장군은 짚차 보닛 위에 두루마리 지도를 펼쳐놓고 이후 작전을 지시했다. 그는 “지금 전선에 큰 포켓(pocket, 주머니)이 생겨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며 단호한 어조로 “중공군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 내고 최대한 응징을 가해야 한다”라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어 백장군에게는 “1군단은 대관령에서 서북쪽으로”, 미 3사단 소속 라이딩스 장군에게는 “하진부리에서 동북방향으로 지체없이(Wihtout delay)공격을 시도하라”고 지시하며 수세적인 방어에서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하는 작전회의를 간명하게 10분만에 끝냈다. 워싱턴 정가, 5배 이상 포격 등 단호한 대응 보고 신조어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만들어 한편, 중공군 공격이 주춤해졌던 5월19일 아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미 10군단 사령부에서 밴 플리트, 알몬드 장군과 함께 차후 작전을 논의했다. 이때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밴 플리트 장군에게 미 8군 예비로 있던 187공수연대와 미 3사단의 증원을 요구하였다. 그는 그날 저녁 187공수연대를 바로 증원하기로 하고, 알몬드에게 곧 미 3사단도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에서 홍천 및 하진부리까지 약 200km를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 3사단은 1만 7000명의 병력과 전차, 야포 및 전투지원 중장비 등을 이끌고 좁고도 험한 길을 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반 만에 그 거리를 주파하는 ‘기적의 행군’을 해냈다. 다행히도 미군 부대원 대부분은 운전을 할 수 있어 밤낮없이 교대로 약 1,000대의 트럭을 몰면서 재촉하여 돌파구 첨단이 붕괴되기 전에 도착했다. 그들은 두갈래로 부대를 나누었는 데, 한쪽은 홍천에 도착해 미 2사단을 증원했고 다른 한쪽은 하진부리에 도착해 무너진 3군단의 서부지역을 방어했다. 사실 그 당시 미군도 모르고 있었으나 중공군은 능력을 초과한 공격으로 병참선이 신장되어 있었으며, 지역목표를 탈취하고 수천 명의 한국군을 격파하였으나 그들이 입은 피해도 막심하였다. 생존자들은 피로하고 탄약과 식량은 거의 바닥나 있었다. 이렇게 중공군의 피해가 과중했던 이유는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적군을 꺽기 위해서는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육사 동기생이었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전차전으로 과감한 돌파를 시도했던 용장 조지 패튼 장군의 휘하에서 미 3군단을 이끌고 보병과 전차를 활용하여 과감한 기동전을 구사했던 명장이었다. 휘청거려 자칫 구멍이 뚫릴지도 모를 이 동부전선의 주머니형 돌파구에 미 8군의 강력한 예비인 미 3사단을 과감히 투입했다. 또한 군사령관으로 작전을 지휘하면서 공군기를 165회나 출격시켰으며 4만1천발의 포탄을 중공군에게 퍼부어 기준의 5배를 초과하는 많은 포탄을 소모했다. 그러자 워싱턴 정가는 그의 과감하고 단호한 대응을 보면서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일명 무제한 사격)’이라는 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작전지시를 받은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대관령을 넘어오는 비행기 속에서 세부적인 작전 구상을 했다. 군단사령부에 도착하자 바로 참모회의를 소집하여 “송요찬 장군의 수도사단 1연대(연대장 한신 대령)를 먼저 대관령에 급파해 길목을 막고, 그 공백을 11사단과 1101공병단에 맡기는 것”으로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1연대가 대관령까지 이동하는 데 약 3시간이 소요되어 오후 3시즈음 확인해보았던 작전참모 공국진 대령이 흥분한 목소리로 “송요찬 장군이 1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다”며 군단장에게 보고했다. 송 사단장은 자신의 정면도 인민군들이 압박을 해오는 위험에 처해 있어 1연대를 뺄 수 없다는 이유로 군단장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좁고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단독으로만 전투해왔던 경험에 인접부대와 협조된 작전을 고려하는 인식이 부족했고, 또한 수도사단장 송 장군은 군단장 백선엽 장군과 나이도 비슷하며 최근까지 같은 계급이었고, 동부전선에서 전투를 잘하기로 용맹을 날리던 터라 어느 정도 라이벌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 장군은 한국군 내부 구성원끼리 사소한 감정에 휘말려 벌이는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다리기로 했으나, 작전참모 공대령은 “당장 부대를 보내야 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연약한 지휘 방식을 쓸 수 없다”며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라고 극단적 언사로 다그쳤다. 이에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로저스 1군단 수석 고문관을 대동하여 수도사단 사령부로 갔다. 백 장군은 엄숙한 목소리로 “귀관은 내 명령에 복종할 것이냐 아니면 불복할 것이냐?”고 질책했다. 송요찬 장군은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눈치 채고 벌떡 일어서서 “각하, 죄송합니다.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라며 바로 전화기를 들어 출동 명령을 내렸다. 마침 한신 대령은 두 사람의 미묘한 갈등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미 출동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때 작전참모 공대령이 지휘소를 빠져나와 1연대의 기동을 확인했다. 그때 한신 대령의 연대는 모든 전투태세를 갖추고 이동을 위해 트럭에 올라탈 준비까지 끝낸 상태였다. 그날(5월21일) 오후 9시 즈음에 연대 수색중대가 먼저 대관령에 도착했는데 1시간 뒤부터 중공군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라도 출동이 늦었다면 중공군은 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대관령고지를 선점하여 전체 작전에 어려운 상황이 될 뻔한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고, 연대장 한신 대령과 작전참모 공대령의 책임감과 용이주도함이 작전 성공에 기여하였다. 그때부터 1연대와 수도사단은 승리를 거듭했다. 그동안 무리한 공격을 계속해온 중공군은 장거리 이동으로 지쳐 있었고 화력과 보급도 소진한 상태였다. 1연대의 첫 전투에서 아군 12명 피해에 1,180명의 적을 사살했다. 이후 1군단은 계속 진격하여 23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일대까지 도달했다. 이미 중공군은 공격 능력도 의지도 모두 상실한 상태였고, 북진을 계속하던 수도사단은 현리전투에서 전의 상실로 패배해 퇴각했던 3군단 장병들도 대거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로서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던 2군단은 덕천전투에서, 3군단은 현리전투에서 해체됐다. 또한 3군단 예하였던 3사단은 백 장군의 1군단으로 배속되었다. 그럼으로써 그 당시 우리 국군 중에 군단 규모로 남은 것은 오직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제 1군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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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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