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소통시대
Home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 창설 44년, 해체 29년만에 눈물의 청와대 특공부대 기념비 제막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06·27 전우회’는 금년 3월 임원회의를 개최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대테러 임무와 대통령 근접경호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부대원으로서, 부대해체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랑스러운 606·27특공부대를 대한민국 특전사의 역사에 기록하는 기념비 건립을 계획했다. 기념비 건립을 위해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조직했고, 행사간 경과보고를 한 김봉환 자문위원을 중심으로 특수전 사령부와 업무협조, 전우회원의 의견수렴, 기념비 건립계획 수립, 소요 예산 편성 등의 업무를 추진하였다. 또한 전우회원의 열망과 정성을 담은 기부 및 모금활동을 통해 약 1,000만원을 모아 소요 예산에 보탰다. 그리고 특수전학교(SWS)를 거쳐가는 모든 특전요원들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대테러부대이며 특공무술을 창시한 606·27특공부대의 발자취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특수전학교 백마대공원내로 건립위치를 선정했다. 게다가 부대 창설 44주년, 부대해체 29년이 되는 2022년에 부대의 기념비를 건립하는 것이 다소 늦은감이 있지만, 제막식 행사에 참석한 모든 전우회원의 바램이 이루어지는 그순간 너무 가슴 벅찬 감동에 그들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 초대 특공대장 김종헌 장군에게 특공무술 유단자증을 수여하며 존경과 감사 표시 특히 초대 특공대장인 김종헌(육사24기) 장군은 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투입된 1특전여단의 결사대 64명을 지휘하는 특공대장으로 12미터 높이의 거대한 미루나무를 제거하고 북한측 5초소와 8초소를 때려부수었다. 당시 김종헌 소령 결사대의 응징에 놀란 북한은 작전이 종결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 회의에서 대표 한주경을 통해 미군 장교가 피살된 데 대해서 유감의 뜻을 표하는 김일성의 친서를 유엔측 수석대표 마크 푸르덴 해군소장에게 전달했다. 이것은 크고 작은 도발사건로 점철된 정전 23년의 역사에 처음이 있는 일이었다. 미국은 사과로 받아들이고 사건을 종결짓기로 했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도 남북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됐다. 이로써 김종헌 장군은 도끼만행 사건의 응징과 동시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도 남북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번 제막식에서 606·27특공부대 출신이자 대한민국 특공무술협회 총재로 취임하는 김봉환(육사34기) 장군이 특공무술 창시에 큰 역할을 했으며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초대 특공대장 김종헌 장군에게 특공무술 유단자증을 수여하며 전우회 일동의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여 행사를 빛냈다. 또한 행사에 참석해 축사 및 기념사를 한 전우회 대표는 특전사 후배들에게 전우회원은 국가원수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뜨거운 열정과 불멸의 군인정신으로 지금도 대한민국의 역사속에 살아 숨 쉬고있음을 강조하며 “과거 역사를 망각한 국민에게는 미래가 없다”라고 역설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5-31
  • 창설 44년, 해체 29년만에 눈물의 청와대 특공부대 기념비 제막식 개최(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28일 오전 특수전학교(SWS) 백마대공원에서는 대한민국 최초 대테러부대인 ‘606·27특공부대 기념비’ 제막식이 감격의 눈시울을 적시며 거행됐다. 초대 특공대장 김종헌(육사24기) 장군과 전 육군참모총장 장준규(육사36기) 대장, 현 특전사령관 소영민(학사11기) 중장 등 606·27특공부대 출신 전우회 및 관련자 약 200여명이 참석한 행사는 국민의례, 부대연혁/경과보고, 제막식, 기념사 및 축사로 진행되었다. 최초 대테러부대인 606특공부대는 국제적으로 항공기납치, 요인암살 등이 빈번했던 1970년대에 테러 전담부대의 필요성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거 1977년 10월부터 특전사 요원 중 체력 특급 및 무도유단자, 특등사수 등인 장교 2명, 부사관 18명을 선발하며 태동했다. 1978년 3월에는 장교 8명, 사병 57명으로 부대를 증편하여 개인 및 팀단위 훈련, 대테러 전술전기 개발, 신형장비 전술적 운영을 숙달했고, 드디어 1978년 6월1일 육군 일반명령 30호에 의거 고유명칭 6178부대, 통상명칭 606부대로 창설 되었다. 이때 606부대의 부여된 임무는 항공기와 건물에 대한 대테러특공작전, 테러 첩보수집 및 분석 연구 및 요인경호 및 공중·육상의 기동타격대 역할 수행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대테러 부대로써 역사에 이름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각종 장비와 훈련장을 갖추고 개인 및 팀단위 훈련으로 대테러 부대의 위용을 갖추던 부대는 1979년 10·26 사태가 발생하자 세계 최고의 대테러부대 육성의 목표가 백지화 되었으며, 같은해 10월30일 대통령경호실에서 특수전사령부로 원대복귀하게 되었다. 동년 12월 12·12사태 발생했고 다음해인 1980년 8월27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대통령 취임에 따라 606특공부대는 다시 대통령 경호실로 배속 전환되어 대통령 근접경호 임무, 청와대 주요접근로 강습 거부, 기동타격대 임무, 의명 특공작전 수행의 임무를 부여 받았다. 또한 부대는 대테러 임무 및 경호임무등 새로운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게 5개팀 1개 특공대에서, 6개팀 2개 특공대로 증편하면서 부대 통상명칭을 27특공부대로 변경했다. 이후 1980년 8월부터 14년 동안 대테러부대 창설요원 수탁교육, 3회의 외국 대테러부대원교육, 6회의 특공무술 시범, 경호기술 및 장비 개발, 근접경호방법 개선 및 발전, 경호요원 보수교육 등을 담당하면서 대한민국의 대테러작전 및 경호임무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허나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27특공부대는 1993년 3월14일부로 공식적으로 해체하게 되었으며, 이때 부대원들은 경호실, 경찰특공대, 국가정보원, 특전사 등으로 진출하여 경호 및 대테러 임무의 최일선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해왔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5-30
  • [김희철의 전쟁사(181)]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⑲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윤인구 총장이 요구한 캠퍼스 부지는 금정구 장전동의 산지 50만 평으로 일반적인 상상을 초월하는 면적이었다. 1952년 준공한 서구 대신동의 부산대학 건물 면적이 566평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1000배 정도 넓은 땅이었다. 위트컴 장군은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과 경상남도 도지사를 설득해 장전캠퍼스 165만 ㎡(50만 평)가 무상양여될 수 있게끔 조치했다. 또한 캠퍼스 시설 공사비 25만 달러를 대한미군원조처(AFAK)를 통해 지원받게 했다. 그외 당시 전차와 버스 등 대중교통의 종점이었던 온천장(현재 부산은행 온천동지점 자리)에서 부산대 무지개 문(구정문)까지 도로가 없어 학생들이 통학에 불편을 겪었는데, 위트컴 장군의 지시로 미 434공병부대가 온천장~부산대 길이 1.6㎞의 진입도로를 뚫어 주었다.오늘날 부산대는 이렇게 해서 터전을 마련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보잘 것 없는 대학의 총장이 그림 한 장으로 세계 최강국의 군수기지사령관을 감동시킨 일화는 음미하면 할수록 짜릿하다. 그 만남이 있은 후 위트컴 장군은 윤인구 총장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대학 건설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5-27
  • [김희철의 전쟁사(180)]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⑱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윤인구 총장의 '그림'은 지금 봐도 신통방통하다. '부산대 동래캠퍼스 평면도'라는 제목을 단 그림은 종 모양으로 설계돼 있다. 종 속에는 종의 추가 움직이는 형태로 대학 본관(현 인문관)과 무지개 문, 대학극장, 도서관, 운동장 등이 짜임새있게 배치돼 있다. 상단에는 종 전체가 흔들릴 수 있게 고리를 달아 놓았다. 캠퍼스 그림을 그리면서 윤 총장은 동료에게 "이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는 날 진리가 세계 끝까지 울려 퍼질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 총장은 위트컴 장군을 초청하기 전부터 그림(캠퍼스 배치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참고한 그림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1929년 제작한 '캠퍼스 라이프 안내' 팸플릿이었다. 청년 윤인구는 1929~ 1930년 프린스턴 대학의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며 그곳의 캠퍼스 분위기와 건물 배치 등을 눈여겨 봐두고 있었다. 목회자가 되고자 했던 청년 윤인구의 교육에 대한 신념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그가 경상남도 학무과장이 되면서 싹이 텄다. 그해 12월 윤인구는 부산대학 창립안을 만들었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을 하나 하나 처리해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5-24
  • [김희철의 전쟁사(179)]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⑰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조국 전 법무장관의 딸이 대학에 제출한 서류가 위조 및 허위라는 법원 판결에 따라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이 취소되는 소동이 있었던 부산대는 1946년 9월 부산 남구 대연동에서 단과대학으로 개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부산수산대와 결별 이후 충무동 등을 전전하다 정착한 부산시 서구 대신동 산자락 판잣집 교사에 인문학부가, 대연동에 수산학부와 대학 예과로 나뉘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1950년 6·25남침전쟁이 터지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기타 대학과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에 편제되었고, 휴전 이후 부산역 대화재가 발생하기 직전인 1953년 9월에 부산대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당시 윤인구(1903~1986) 부산대 초대총장은 종합대학에 걸맞은 캠퍼스 부지를 구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한편 부산역 대화재의 참사로 발생한 피해 복구와 총체적인 재건을 위한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1954년 6월8일 서구 대신동 부산대의 판잣집 건물로 잘생긴 벽안의 미군 장성이 들어섰다. 윤인구(1903~1986) 부산대 초대총장의 초청을 받고 온 위트컴(1894~1982) 미2군수사령관이었다. 반갑게 위트컴 장군을 맞은 윤 총장은 집무실에 붙여놓은 그림 한 점을 보여주며 말했다. "장군, 내 그림을 사주시오"라는 윤 총장의 요구에 위트컴 장군은 "무슨 그림이요?"라고 반문했다. 이에 윤인구 부산대 초대총장은 "이 땅의 꿈과 교육 비전이 담긴 그림이오"라는 답과 함께 흥정하는 눈빛과 잘생긴 얼굴이라는 느낌마저 압도하는 강렬하고 찌를 듯, 파고들 듯한 열정으로 위트컴 장군을 간절히 응시했다. 위트컴 장군은 잠시 고민하다가 윤 총장의 “부산대의 미래에 투자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꿈의 내용에 주목했고, 도시 재건 차원에서 통 크게 수용하며 "하하. 그거 흥미롭군요. 좋소. 내가 그 그림을 사겠소!"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윤 총장이 제시한 그림은 부산대 장전 캠퍼스 배치도였다. 대학 문을 열었으나 캠퍼스 부지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그는 위트컴 장군의 통큰 수락에 감격했다. 바로 인류사에 남을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 거래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5-20
  • [김희철의 전쟁사(178)]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⑯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부산의 재건 과정에서 발휘된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은 마치 하나의 종합예술을 관람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도시가 폐허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걱정하거나 관망하기보다는 가용한 모든 자원을 찾고, 이들을 통합하여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해결책에 집중했다. 여기에는 영국 애버데어(Aberdare)에서 성공적 대민관계와 프랑스 르앙(Rouen) 재건 및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 등 그동안 축적된 그의 경험과 지식이 총동원됐다. 그리고 AFAK라는 해결책을 발견한 위트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시행하는 추진력을 발휘했다. 미국 정부 및 미군, UN, 한국 정부 및 한국군, 민간기업 및 부산 시민 등 다양한 조직과 관련돼 있었고, 조직별 복잡한 예산체계라는 장애물도 있었다. 그러나 각 조직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이들의 노력을 통합하여 빠른 시간 동안에 놀라운 성과로 연결했다. 이때 단순히 화재 피해지역에 대한 긴급공사뿐만 아니라 부산 도시계획 전반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사업이었기 때문에 참여한 ‘대양산업’ 등 많은 국내 기업들이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고, 이 기업들이 국가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전후 복구를 위한 UN의 원조 방법과 한미 상호안전보장법(MSA, Mutual Security Act)에 의해 미국 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1961년까지 총 17억4천4백만 달러를 추가 지원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나를 따르라’는 식의 리더십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국가의 다양한 구성요소와 국제적인 가용 요소까지도 이해하는 통찰력, 그리고 이들을 통합된 역량으로 결집하는 추진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고 오늘의 부산과 대한민국을 만드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종합해 볼 때 위트컴 장군은 하느님이 우리 대한민국에 주신 소중한 선물이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5-18
  • [김희철의 전쟁사(177)]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⑮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부산의 대화재 재건 프로젝트는 위트컴 장군의 지휘 아래 미8군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우드 장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위트컴 장군은 부산 재건 활동을 전담하기 위한 별도의 조직인 PMP(Pusan Military Post)를 신속히 구성했고, 관련 기관과 협력하기 위한 기구도 별도로 만들어 노력의 통합에 만전을 기했다.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는 세분화하여 총 191개 사업으로 진행됐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주택 건설 사업은 도시 재건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서 동래에 111가구의 주택단지와 영도에 109가구의 주택단지를 1954년 8월에 완공했다. 또한 UNKRA와 협력하여 공동 사업으로 1,100채의 주택을 추가로 짓게 함으로써 부산의 주택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공했다. 둘째, 도로 및 교량 건설은 현대적인 교통망을 구축하고 소방 장비의 진입로를 확보하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국제시장을 통과하는 부민동로가 개통되었고, 메리놀 길을 완공함으로써 혼잡한 도심의 교통량을 줄이고, 메리놀 병원의 진입로를 확보하게 됐다. 병원 건립 사업은 메리놀병원을 포함하여 7개 병원을 목표로 진행됐다. 특히 메리놀병원은 총 160개 병상을 보유한 당시 한국 최고의 병원으로 건립됐다. 병원 건립을 위한 미군들의 모금 캠페인이 있었는데 약 6만 달러가 모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개 학교들에 대한 신축 및 수리 사업도 진행됐다. AFAK 프로젝트는 특히 고아원 지원 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5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위트컴은 군부대가 53개 고아원을 직접 지원하게 했으며, 기술을 가르치고 취업까지 지원했다. (다음 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5-16
  • [김희철의 전쟁사(176)]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⑭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는 부산 대화재를 극복하기 위한 묘책으로 위트컴 장군이 제안하고, 미8군사령관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이 승인해 탄생했다. 이는 미군의 기술력과 노동력을 직접 투입함으로써 군이 중심이 되어 복구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이 프로젝트는 당시 많은 양의 물자가 미군을 통해 공급되었고,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력도 군이 다른 조직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프로젝트는 AFAK 기금과 미군 및 한국군의 인력을 묶어 한국의 지역 행정기관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미군은 시멘트, 목재, 유리, 철근, 못 등 자재와 중장비를 한국군 부대에 공급해시설을 복구하도록 지원했다. 이때 민간에서는 군이 지원하지 않는 자재와 기본적인 노동력을 제공했다. 프로그램의 본래 취지는 지역주민을 위해 소규모 개발사업을 하는 것이었으나 위트컴은 프랑스 르앙(Rouen) 재건 경험에 따라 이를 도시 재건사업으로 대폭 확대했다. 1953년 11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총 6백여만 달러의 AFAK 예산이 투입되었는데, 1954년 6월까지 이미 3백여만 달러가 부산에 집중됐다. 내역을 살펴보면 동래, 송도, 영도 등 화재와 관련 없는 지역에서 공사가 더 많았는데, 단순히 화재 피해지역에 대한 긴급공사가 아니라 부산 도시계획 전반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군은 AFAK 기금은 물론 추가적인 예산 확보를 위해 UNKRA(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와 미국 정부에 의한 지원 방법인 FOA(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를 균형 있게 활용함으로써 부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지원 환경을 구축했다. 1954년 말 미8군사령부에 보고한 위트컴 장군의 부산 재건 결과에 대한 마지막 보고서는 장군의 세부적인 지원활동 내용을 담고 있다. “1953년 11월 부산은 폐허가 되었고, 시민들은 좌절하였다. 그러나 8개월이 지난 지금 주택은 건축되고, 길은 포장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고 있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5-12
  • [김희철의 전쟁사(17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이 이재민들에게 즉각적이고 무리한 구호활동을 한다고 보고받은 미국 의회는 전투에 사용할 군수물자를 무단으로 전용했다는 이유로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시켰고, 의회 청문회에 참석하도록 미 본토로 송환했다. 미 의회에 불려간 위트컴 장군은 군수물자 무단 전용에 대해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h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라는 명연설을 했다. 미 의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시 영국 애버데어(Aberdare)에서 그의 성공적인 대민관계와 프랑스 르앙(Rouen) 재건 업적 및 성과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한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명연설을 듣고 기립박수를 통해 군수물자 무단 전용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더 많은 구호품을 지원하면서 위트컴 장군을 부산으로 돌려보냈다. 미2군수사령관의 일차 소임은 장기전으로 소모된 유엔군에게 막대한 장비와 탄약을 재보급하여 화력전투를 보강하고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을 성립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긴박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투에 사용할 군수물자를 무단으로 전용하며 민간의 아픔과 고통을 품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트컴은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고통과 필연적 후유증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가슴 아파했다. 더불어 부산 대화재를 계기로 대한민국과 부산시의 총체적인 재건을 위해 당시 테일러 주한 미8군사령관과 긴밀한 협의를 하면서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미 의회 등의 지원을 받았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5-09
  • [김희철의 전쟁사(17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⑫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부산에 위치한 미2군수사령부의 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11월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자 화마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정부도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 대참사로 인해 부산 전체를 절망의 늪에 빠뜨린 패닉 발생으로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위기를 맞은 그는 자연스럽게 제2차 세계대전시 영국 애버데어에서 보여준 대민관계와 프랑스 르앙을 재건한 경험이 되살아났다. 또한 유년시절 청교도 가문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실천할 기회라는 마음이 치솟아 올랐다. 위트컴 장군은 민간에 사용할 수 없는 전투용 군수물자를 직권으로 풀어 추위에 갈 곳이 없는 이재민들에게 천막촌을 건립해 주고 먹을 것을 제공해 주며 즉각적인 구호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매일 2만 310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텐트, 의류, 침구류 등 군수물자를 긴급히 지원했고 화재 다음 날인 11월 28일엔 즉시 공병부대를 투입하여 화마가 휩쓸고 간 피해지역을 정리했다. 이어 12월 9일에 첫 번째 텐트촌을, 12월 10일에는 두 번째 텐트촌을 제공하겠다고 계획을 밝히면서, 일반 장병들에게는 4만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위트컴은 “이재민 중 누구라도 굶거나, 잠잘 곳이 없거나, 진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라고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장군의 대응방식은 걱정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걱정은 뒤로 하고, 빠르게 해결책을 찾아서 망설임 없이 추진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시적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서 본질적 문제와 해결책을 찾았다. 즉, 화재로 인한 재해의 단순한 복구 수준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거주할 가옥의 건설, 도시 기반시설의 구축, 의료환경 개선, 학교 및 전쟁 고아 지원 등 총체적으로 도시를 재건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했다. 이를 위해 위트컴 장군은 자신의 모든 노하우와 경험을 결집하여 해결책을 구상했다. 이것이 바로 AFAK(미군대한원조,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프로젝트를 활용한 재건사업이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5-0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