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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전자(DNA) 정보를 확보해 국가 관리기록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황기환 지사의 유전자(DNA) 정보는 지난 4월10일 순국 10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파묘하는 과정에서 채취한 시료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 확보하였다. 황기환 지사 유해는 2008년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발견되어 2013년부터 국내봉환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으나 유족이 확인되지 않아 2차례 법원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국가보훈부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지난 1월 31일 묘지 측이 파묘에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은 황기환 지사 유해의 유전자(DNA) 정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파묘 과정에서 시료를 확보해 4월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황기환 지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 유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전자(DNA)정보가 황기환 지사의 유족을 확인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분석기법을 적용해 2개월만에 어렵게 정보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황기환 지사의 소중한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하고, 유족을 찾는데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앞으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협업해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국외 독립유공자의 유해 유전자(DNA) 정보를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고 후손을 찾는 중요 단서로 활용해 이분들의 희생과 공헌이 우리사회에 영원히 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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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시크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 대행 등이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복지증진 업무협약’을 3일 10시에 체결했다. 이날 업무 협약은 대한민국 자유수호에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분위기 조성,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삶 향유를 위한 복지증진, 생활안정을 위한 일자리 지원 확대 등을 목적과 주요 골자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업무협약에 따라 첫 번째 실천사업으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부-전국경제인연합회-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께 협력해 자유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곳곳을 쉼 없이 전진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용사의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헌정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발볼 차이로 기성화가 안맞거나 보행 불편이 있는 6‧25참전유공자 및 재방한 유엔참전용사 등 300명 영웅의 발을 삼면측정(3D스캔)하고 그에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One & Only Heroes Shoes)”를 제작해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직접 전달한다. 또한, 맞춤형 신발 제작을 위해 취형한 발 모양과 참전영웅의 인적사항, 참전기간, 누적 발걸음 수 등이 표기된 동판을 제작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헌신에 감사와 예우를 전하는 의미에서 11월 11일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부산)에 맞추어 유엔평화공원에 ‘영웅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모든 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자 일류보훈으로 가는 기본” 이라며 “국가보훈부 승격에 걸맞게 품격 높은 보훈으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경제계와 함께하는 일류보훈 동행’으로 시작된 양 기관의 상호협력은 이번 협약으로 더욱 공고화되어 향후 주거개선 및 제대군인 일자리 지원 등 국가유공자 생활안정을 위한 복지증진 사업으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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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전문기자] 주모로코 한국대사관(대사 정기용)은 6·25 남침전쟁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북아프리카 모로코 군인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족은 6·25 남침전쟁에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하메드 벤 카두르 라스리(당시 병장·실제 모로코 이름은 무흐 벤카두르 엘 아스리)의 딸인 프테탐 엘 아스리(81)씨와 손녀다. 라스리씨는 1951년 3월5일 1037고지 전투 중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유해는 부산 유엔 공원에 안장돼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9월 프랑스 군사기록원 자료를 통해 라스리씨를 포함한 8명의 모로코 군인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6·25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고, 모로코 보훈처와 함께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나섰다. 6·25 남침전쟁의 숨은 영웅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윤종진 보훈처 차장이 지난해 12월 현지 방문을 계기로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적극 나선 모로코 보훈처는 몇달간의 조사와 확인 끝에 첫 성과를 냈다. 그러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라스리씨의 병적 상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달리 기재된 데다, 유족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소재 파악도 어려웠다. 딸인 프테탐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군복 입은 사진이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단 한 가지 단서였다. 프테탐씨는 "4살 때 입대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6·25 남침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부산 유엔 공원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모로코인 참전용사들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프랑스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된 이유다. 모로코 참전용사 확인 작업은 애초 2012년에 시작됐지만, 당시 모로코 측에서 관련 자료 확인에 난색을 보이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참전용사 확인은 2021년 정 대사가 엘렌 르 갈 당시 주모로코 프랑스 대사에게서 6.25 참전 모로코인 자료가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재개됐다. 이후 부산 유엔공원에서 모로코 출신 참전용사 2명이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 대사관측은 프랑스 참전용사 및 전쟁피해자 사무소(ONACVG)의 협조로 프랑스 군사 기록원에 남아있는 관련 기록을 확보, 지난해 처음으로 참전용사 8명의 존재를 찾아냈다. 정기용 대사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에 모로코 출신 6·25 참전용사 가족을 찾게 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추가로 참전 용사와 가족을 찾는 한편 모로코 내 학교 교재에 이 사실을 수록하고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후속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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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며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인보다도 백선엽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라며 “백 장군님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시어 현재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작금에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이 계속되는 속에서 출범하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참군인 김관진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 이 재단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틸러리 전 연합사령관, 권오성 육군협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국회 회의 때문에 늦게 도착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만든 분, 백선엽 장군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내신 분, 박정희는 오늘의 선진 경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축사를 시작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렇기 때문에 이 세분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라발전에 큰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입니다. 허나 지난 정권에서는 폄하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세분의 역사적인 공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본 장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의 일에도 분골쇄신의 각오로 절대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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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창군(創軍) 원로이자, 6.25남침전쟁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할 때에 다부동전투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만드시고, 평양 선두입성, 중공군의 공세 저지, 남부군 토벌 등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셨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중에 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어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과 제10대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지신 구국영웅이다. 미군은 지금도 백선엽 장군님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있다. 백 장군은 전역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해서 교통부 장관 재임시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내신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에 김관진 이사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公人)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 ‘제복의 영웅’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여러 추모 및 기념단체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초일류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백남희 여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훈부의 도움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창립하여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장군님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공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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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회관에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호텔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민식 보훈부 장관, 권오성 육군협회장, 이중근 부영그룹회장, 고현석 육군참모차장, 벤플리트 장군 손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홍두승 단장)의 식전 공연에 이어 초대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녀이자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2부에서는 김재창 장군의 ‘가까이서 본 선배 백선엽 장군’과 유광종 대표의 ‘백선엽,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주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다부동 대첩 및 평양입성 전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던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의 박형수(94세) 회장과 김주찬(94세) 부회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전장 실상을 이야기할 때와,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가 환영사로 대한민국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며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한 백선엽 장군과 인연을 맺였던 청년 대표와 연평해전 전사자 서정우 하사의 모친의 플로어 맨트도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땐 국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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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2)]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⑳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윤인구 총장의 꿈과 교육사상은 위트컴 장군의 노력으로 165만 ㎡(50만 평)의 부지 확보와 온천장~부산대 길이 1.6㎞의 진입도로 개설 및 대한미군원조처(AFAK)를 통한 캠퍼스 시설 공사비 25만 달러 지원만으로 구현하기에는 부족했다. 1957년 세워진 무지개 문은 윤 총장의 꿈과 교육사상에 따른 하늘로 높이 화살을 쏘아 올리는 형상이다. 설계자의 의도대로 이 문을 통해 학생들이 드나들고 금정산을 배경으로 하늘과 구름이 무시로 오고 가며 활시위처럼 당겨진 무지개 문의 한 중간에는 종을 매달았다. 교육은 어딘가에 있을, 어딘가에 닿을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윤 총장은 "교육가는 차가운 돌맹이에서 혈맥이 뛰는 생명체를 제작해 내려는 사람이다"고 정의했다. 교육가는 창조적 마인드를 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초대형 프로젝트를 계획한 윤 총장은 1958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중업을 만나 본관 건물(현 인문관) 설계를 요청한다. 그의 두뇌와 김중업의 감각이 결합되자 시너지가 만들어졌다. 본관 건물의 중앙 홀은 5층까지 전면유리로 꾸며졌다. 안에서 창밖을 보면 아스라한 도심 풍경 속에 황령산까지 눈에 잡힌다. 맑고 푸른 날 바깥에서 이 건물을 보면 둥근 유리벽에 하늘과 구름이 넘실거린다. 광명이 주는 진리가 숨쉬는 모습이다. 70m에 이르는 필로티, 즉 공중에 떠 있는 공간은 자유를 상징한다. 이 속으로 금정산의 바람이 드나든다. 윤 총장은 자유를 '만사에 구애받지 않음'이라며, 이는 주어진 환경과 여건 등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을 돌파하는 능력을 말한다고 했다. 대학정신의 소중한 덕목이다. 완공 행사때 당시 문교차관 김선기는 "궁궐같다"고 했고, 유네스코에서는 낭비라고 일침을 놨다. 그러나 윤 총장은 "호연지기를 기르고 큰 인물을 키우려면 그만한 그릇이 필요한 법"이라고 응수했다. 본관 건물 공사비는 당시 기준으로 약 300억 원이 들어갔다. 1958년과 최근을 비교하면 그동안 한국은 359배 성장했다. 금값의 인플레를 고려하면 67배의 실질성장이다. 단순 계산으로 '300억×67' 하면 약 2조 원이 된다. 전쟁 직후 가난에 허덕이는 상태에서, 그것도 지방에서 국가가 지으라고 한 것도 아닌 대학의 본관 건물을 이렇게 웅장하고 미려하게 지을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윤인구 총장은 이렇게 도약한 학교로 만드는 것이 위트컴 장군에 대한 보답이라고도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위트컴 장군의 부산대 방문은 우연이 아닌 희망의 만남이 되어 학교를 지을 땅도 없고 돈도 없는 윤인구와 부산시민에게 역사적인 인재 육성의 기틀이 조성되는 계기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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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2)]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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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44년, 해체 29년만에 눈물의 청와대 특공부대 기념비 제막식 개최(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06·27 전우회’는 금년 3월 임원회의를 개최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대테러 임무와 대통령 근접경호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부대원으로서, 부대해체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랑스러운 606·27특공부대를 대한민국 특전사의 역사에 기록하는 기념비 건립을 계획했다. 기념비 건립을 위해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조직했고, 행사간 경과보고를 한 김봉환 자문위원을 중심으로 특수전 사령부와 업무협조, 전우회원의 의견수렴, 기념비 건립계획 수립, 소요 예산 편성 등의 업무를 추진하였다. 또한 전우회원의 열망과 정성을 담은 기부 및 모금활동을 통해 약 1,000만원을 모아 소요 예산에 보탰다. 그리고 특수전학교(SWS)를 거쳐가는 모든 특전요원들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대테러부대이며 특공무술을 창시한 606·27특공부대의 발자취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특수전학교 백마대공원내로 건립위치를 선정했다. 게다가 부대 창설 44주년, 부대해체 29년이 되는 2022년에 부대의 기념비를 건립하는 것이 다소 늦은감이 있지만, 제막식 행사에 참석한 모든 전우회원의 바램이 이루어지는 그순간 너무 가슴 벅찬 감동에 그들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 초대 특공대장 김종헌 장군에게 특공무술 유단자증을 수여하며 존경과 감사 표시 특히 초대 특공대장인 김종헌(육사24기) 장군은 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투입된 1특전여단의 결사대 64명을 지휘하는 특공대장으로 12미터 높이의 거대한 미루나무를 제거하고 북한측 5초소와 8초소를 때려부수었다. 당시 김종헌 소령 결사대의 응징에 놀란 북한은 작전이 종결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 회의에서 대표 한주경을 통해 미군 장교가 피살된 데 대해서 유감의 뜻을 표하는 김일성의 친서를 유엔측 수석대표 마크 푸르덴 해군소장에게 전달했다. 이것은 크고 작은 도발사건로 점철된 정전 23년의 역사에 처음이 있는 일이었다. 미국은 사과로 받아들이고 사건을 종결짓기로 했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도 남북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됐다. 이로써 김종헌 장군은 도끼만행 사건의 응징과 동시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도 남북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번 제막식에서 606·27특공부대 출신이자 대한민국 특공무술협회 총재로 취임하는 김봉환(육사34기) 장군이 특공무술 창시에 큰 역할을 했으며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초대 특공대장 김종헌 장군에게 특공무술 유단자증을 수여하며 전우회 일동의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여 행사를 빛냈다. 또한 행사에 참석해 축사 및 기념사를 한 전우회 대표는 특전사 후배들에게 전우회원은 국가원수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뜨거운 열정과 불멸의 군인정신으로 지금도 대한민국의 역사속에 살아 숨 쉬고있음을 강조하며 “과거 역사를 망각한 국민에게는 미래가 없다”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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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44년, 해체 29년만에 눈물의 청와대 특공부대 기념비 제막식 개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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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44년, 해체 29년만에 눈물의 청와대 특공부대 기념비 제막식 개최(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28일 오전 특수전학교(SWS) 백마대공원에서는 대한민국 최초 대테러부대인 ‘606·27특공부대 기념비’ 제막식이 감격의 눈시울을 적시며 거행됐다. 초대 특공대장 김종헌(육사24기) 장군과 전 육군참모총장 장준규(육사36기) 대장, 현 특전사령관 소영민(학사11기) 중장 등 606·27특공부대 출신 전우회 및 관련자 약 200여명이 참석한 행사는 국민의례, 부대연혁/경과보고, 제막식, 기념사 및 축사로 진행되었다. 최초 대테러부대인 606특공부대는 국제적으로 항공기납치, 요인암살 등이 빈번했던 1970년대에 테러 전담부대의 필요성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거 1977년 10월부터 특전사 요원 중 체력 특급 및 무도유단자, 특등사수 등인 장교 2명, 부사관 18명을 선발하며 태동했다. 1978년 3월에는 장교 8명, 사병 57명으로 부대를 증편하여 개인 및 팀단위 훈련, 대테러 전술전기 개발, 신형장비 전술적 운영을 숙달했고, 드디어 1978년 6월1일 육군 일반명령 30호에 의거 고유명칭 6178부대, 통상명칭 606부대로 창설 되었다. 이때 606부대의 부여된 임무는 항공기와 건물에 대한 대테러특공작전, 테러 첩보수집 및 분석 연구 및 요인경호 및 공중·육상의 기동타격대 역할 수행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대테러 부대로써 역사에 이름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각종 장비와 훈련장을 갖추고 개인 및 팀단위 훈련으로 대테러 부대의 위용을 갖추던 부대는 1979년 10·26 사태가 발생하자 세계 최고의 대테러부대 육성의 목표가 백지화 되었으며, 같은해 10월30일 대통령경호실에서 특수전사령부로 원대복귀하게 되었다. 동년 12월 12·12사태 발생했고 다음해인 1980년 8월27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대통령 취임에 따라 606특공부대는 다시 대통령 경호실로 배속 전환되어 대통령 근접경호 임무, 청와대 주요접근로 강습 거부, 기동타격대 임무, 의명 특공작전 수행의 임무를 부여 받았다. 또한 부대는 대테러 임무 및 경호임무등 새로운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게 5개팀 1개 특공대에서, 6개팀 2개 특공대로 증편하면서 부대 통상명칭을 27특공부대로 변경했다. 이후 1980년 8월부터 14년 동안 대테러부대 창설요원 수탁교육, 3회의 외국 대테러부대원교육, 6회의 특공무술 시범, 경호기술 및 장비 개발, 근접경호방법 개선 및 발전, 경호요원 보수교육 등을 담당하면서 대한민국의 대테러작전 및 경호임무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허나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27특공부대는 1993년 3월14일부로 공식적으로 해체하게 되었으며, 이때 부대원들은 경호실, 경찰특공대, 국가정보원, 특전사 등으로 진출하여 경호 및 대테러 임무의 최일선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해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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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44년, 해체 29년만에 눈물의 청와대 특공부대 기념비 제막식 개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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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1)]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⑲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윤인구 총장이 요구한 캠퍼스 부지는 금정구 장전동의 산지 50만 평으로 일반적인 상상을 초월하는 면적이었다. 1952년 준공한 서구 대신동의 부산대학 건물 면적이 566평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1000배 정도 넓은 땅이었다. 위트컴 장군은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과 경상남도 도지사를 설득해 장전캠퍼스 165만 ㎡(50만 평)가 무상양여될 수 있게끔 조치했다. 또한 캠퍼스 시설 공사비 25만 달러를 대한미군원조처(AFAK)를 통해 지원받게 했다. 그외 당시 전차와 버스 등 대중교통의 종점이었던 온천장(현재 부산은행 온천동지점 자리)에서 부산대 무지개 문(구정문)까지 도로가 없어 학생들이 통학에 불편을 겪었는데, 위트컴 장군의 지시로 미 434공병부대가 온천장~부산대 길이 1.6㎞의 진입도로를 뚫어 주었다.오늘날 부산대는 이렇게 해서 터전을 마련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보잘 것 없는 대학의 총장이 그림 한 장으로 세계 최강국의 군수기지사령관을 감동시킨 일화는 음미하면 할수록 짜릿하다. 그 만남이 있은 후 위트컴 장군은 윤인구 총장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대학 건설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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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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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1)]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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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0)]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⑱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윤인구 총장의 '그림'은 지금 봐도 신통방통하다. '부산대 동래캠퍼스 평면도'라는 제목을 단 그림은 종 모양으로 설계돼 있다. 종 속에는 종의 추가 움직이는 형태로 대학 본관(현 인문관)과 무지개 문, 대학극장, 도서관, 운동장 등이 짜임새있게 배치돼 있다. 상단에는 종 전체가 흔들릴 수 있게 고리를 달아 놓았다. 캠퍼스 그림을 그리면서 윤 총장은 동료에게 "이 거대한 종소리가 울리는 날 진리가 세계 끝까지 울려 퍼질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 총장은 위트컴 장군을 초청하기 전부터 그림(캠퍼스 배치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참고한 그림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1929년 제작한 '캠퍼스 라이프 안내' 팸플릿이었다. 청년 윤인구는 1929~ 1930년 프린스턴 대학의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며 그곳의 캠퍼스 분위기와 건물 배치 등을 눈여겨 봐두고 있었다. 목회자가 되고자 했던 청년 윤인구의 교육에 대한 신념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그가 경상남도 학무과장이 되면서 싹이 텄다. 그해 12월 윤인구는 부산대학 창립안을 만들었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을 하나 하나 처리해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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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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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0)]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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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9)]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⑰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조국 전 법무장관의 딸이 대학에 제출한 서류가 위조 및 허위라는 법원 판결에 따라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이 취소되는 소동이 있었던 부산대는 1946년 9월 부산 남구 대연동에서 단과대학으로 개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부산수산대와 결별 이후 충무동 등을 전전하다 정착한 부산시 서구 대신동 산자락 판잣집 교사에 인문학부가, 대연동에 수산학부와 대학 예과로 나뉘어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1950년 6·25남침전쟁이 터지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기타 대학과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에 편제되었고, 휴전 이후 부산역 대화재가 발생하기 직전인 1953년 9월에 부산대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당시 윤인구(1903~1986) 부산대 초대총장은 종합대학에 걸맞은 캠퍼스 부지를 구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한편 부산역 대화재의 참사로 발생한 피해 복구와 총체적인 재건을 위한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1954년 6월8일 서구 대신동 부산대의 판잣집 건물로 잘생긴 벽안의 미군 장성이 들어섰다. 윤인구(1903~1986) 부산대 초대총장의 초청을 받고 온 위트컴(1894~1982) 미2군수사령관이었다. 반갑게 위트컴 장군을 맞은 윤 총장은 집무실에 붙여놓은 그림 한 점을 보여주며 말했다. "장군, 내 그림을 사주시오"라는 윤 총장의 요구에 위트컴 장군은 "무슨 그림이요?"라고 반문했다. 이에 윤인구 부산대 초대총장은 "이 땅의 꿈과 교육 비전이 담긴 그림이오"라는 답과 함께 흥정하는 눈빛과 잘생긴 얼굴이라는 느낌마저 압도하는 강렬하고 찌를 듯, 파고들 듯한 열정으로 위트컴 장군을 간절히 응시했다. 위트컴 장군은 잠시 고민하다가 윤 총장의 “부산대의 미래에 투자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꿈의 내용에 주목했고, 도시 재건 차원에서 통 크게 수용하며 "하하. 그거 흥미롭군요. 좋소. 내가 그 그림을 사겠소!"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윤 총장이 제시한 그림은 부산대 장전 캠퍼스 배치도였다. 대학 문을 열었으나 캠퍼스 부지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그는 위트컴 장군의 통큰 수락에 감격했다. 바로 인류사에 남을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 거래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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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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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9)]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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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8)]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⑯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부산의 재건 과정에서 발휘된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은 마치 하나의 종합예술을 관람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도시가 폐허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걱정하거나 관망하기보다는 가용한 모든 자원을 찾고, 이들을 통합하여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해결책에 집중했다. 여기에는 영국 애버데어(Aberdare)에서 성공적 대민관계와 프랑스 르앙(Rouen) 재건 및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 등 그동안 축적된 그의 경험과 지식이 총동원됐다. 그리고 AFAK라는 해결책을 발견한 위트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시행하는 추진력을 발휘했다. 미국 정부 및 미군, UN, 한국 정부 및 한국군, 민간기업 및 부산 시민 등 다양한 조직과 관련돼 있었고, 조직별 복잡한 예산체계라는 장애물도 있었다. 그러나 각 조직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이들의 노력을 통합하여 빠른 시간 동안에 놀라운 성과로 연결했다. 이때 단순히 화재 피해지역에 대한 긴급공사뿐만 아니라 부산 도시계획 전반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사업이었기 때문에 참여한 ‘대양산업’ 등 많은 국내 기업들이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고, 이 기업들이 국가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전후 복구를 위한 UN의 원조 방법과 한미 상호안전보장법(MSA, Mutual Security Act)에 의해 미국 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1961년까지 총 17억4천4백만 달러를 추가 지원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단순히 ‘나를 따르라’는 식의 리더십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국가의 다양한 구성요소와 국제적인 가용 요소까지도 이해하는 통찰력, 그리고 이들을 통합된 역량으로 결집하는 추진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고 오늘의 부산과 대한민국을 만드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종합해 볼 때 위트컴 장군은 하느님이 우리 대한민국에 주신 소중한 선물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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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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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8)]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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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7)]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⑮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부산의 대화재 재건 프로젝트는 위트컴 장군의 지휘 아래 미8군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우드 장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위트컴 장군은 부산 재건 활동을 전담하기 위한 별도의 조직인 PMP(Pusan Military Post)를 신속히 구성했고, 관련 기관과 협력하기 위한 기구도 별도로 만들어 노력의 통합에 만전을 기했다.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는 세분화하여 총 191개 사업으로 진행됐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주택 건설 사업은 도시 재건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서 동래에 111가구의 주택단지와 영도에 109가구의 주택단지를 1954년 8월에 완공했다. 또한 UNKRA와 협력하여 공동 사업으로 1,100채의 주택을 추가로 짓게 함으로써 부산의 주택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공했다. 둘째, 도로 및 교량 건설은 현대적인 교통망을 구축하고 소방 장비의 진입로를 확보하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국제시장을 통과하는 부민동로가 개통되었고, 메리놀 길을 완공함으로써 혼잡한 도심의 교통량을 줄이고, 메리놀 병원의 진입로를 확보하게 됐다. 병원 건립 사업은 메리놀병원을 포함하여 7개 병원을 목표로 진행됐다. 특히 메리놀병원은 총 160개 병상을 보유한 당시 한국 최고의 병원으로 건립됐다. 병원 건립을 위한 미군들의 모금 캠페인이 있었는데 약 6만 달러가 모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개 학교들에 대한 신축 및 수리 사업도 진행됐다. AFAK 프로젝트는 특히 고아원 지원 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5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위트컴은 군부대가 53개 고아원을 직접 지원하게 했으며, 기술을 가르치고 취업까지 지원했다. (다음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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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7)]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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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6)]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⑭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는 부산 대화재를 극복하기 위한 묘책으로 위트컴 장군이 제안하고, 미8군사령관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이 승인해 탄생했다. 이는 미군의 기술력과 노동력을 직접 투입함으로써 군이 중심이 되어 복구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이 프로젝트는 당시 많은 양의 물자가 미군을 통해 공급되었고,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력도 군이 다른 조직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프로젝트는 AFAK 기금과 미군 및 한국군의 인력을 묶어 한국의 지역 행정기관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미군은 시멘트, 목재, 유리, 철근, 못 등 자재와 중장비를 한국군 부대에 공급해시설을 복구하도록 지원했다. 이때 민간에서는 군이 지원하지 않는 자재와 기본적인 노동력을 제공했다. 프로그램의 본래 취지는 지역주민을 위해 소규모 개발사업을 하는 것이었으나 위트컴은 프랑스 르앙(Rouen) 재건 경험에 따라 이를 도시 재건사업으로 대폭 확대했다. 1953년 11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총 6백여만 달러의 AFAK 예산이 투입되었는데, 1954년 6월까지 이미 3백여만 달러가 부산에 집중됐다. 내역을 살펴보면 동래, 송도, 영도 등 화재와 관련 없는 지역에서 공사가 더 많았는데, 단순히 화재 피해지역에 대한 긴급공사가 아니라 부산 도시계획 전반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군은 AFAK 기금은 물론 추가적인 예산 확보를 위해 UNKRA(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와 미국 정부에 의한 지원 방법인 FOA(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를 균형 있게 활용함으로써 부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지원 환경을 구축했다. 1954년 말 미8군사령부에 보고한 위트컴 장군의 부산 재건 결과에 대한 마지막 보고서는 장군의 세부적인 지원활동 내용을 담고 있다. “1953년 11월 부산은 폐허가 되었고, 시민들은 좌절하였다. 그러나 8개월이 지난 지금 주택은 건축되고, 길은 포장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고 있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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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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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6)]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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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⑬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이 이재민들에게 즉각적이고 무리한 구호활동을 한다고 보고받은 미국 의회는 전투에 사용할 군수물자를 무단으로 전용했다는 이유로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시켰고, 의회 청문회에 참석하도록 미 본토로 송환했다. 미 의회에 불려간 위트컴 장군은 군수물자 무단 전용에 대해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h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라는 명연설을 했다. 미 의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시 영국 애버데어(Aberdare)에서 그의 성공적인 대민관계와 프랑스 르앙(Rouen) 재건 업적 및 성과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한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명연설을 듣고 기립박수를 통해 군수물자 무단 전용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더 많은 구호품을 지원하면서 위트컴 장군을 부산으로 돌려보냈다. 미2군수사령관의 일차 소임은 장기전으로 소모된 유엔군에게 막대한 장비와 탄약을 재보급하여 화력전투를 보강하고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을 성립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긴박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투에 사용할 군수물자를 무단으로 전용하며 민간의 아픔과 고통을 품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위트컴은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고통과 필연적 후유증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가슴 아파했다. 더불어 부산 대화재를 계기로 대한민국과 부산시의 총체적인 재건을 위해 당시 테일러 주한 미8군사령관과 긴밀한 협의를 하면서 AFAK(미군대한원조)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미 의회 등의 지원을 받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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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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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