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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⑦나폴레옹 장군과 초병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의무를 훌륭하게 이행하지 않고서는 권리를 가질 가치가 없다.” 나폴레옹이 전투 중에 있던 어느 날 밤, 아군의 경계태세를 살피기 위해 적진 가까이에 있는 진지를 순찰하고 있었다. “정지! 누구냐?” 으슥한 곳에서 보초가 명령했다. 나폴레옹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다.” 보초가 말했다. “나가 누구냐?” “나폴레옹이다! 너희들이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하고 있는가 살피기 위해서 나왔다. 어서 나를 통과시켜라!” 그러나 보초는 나폴레옹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쏜다!” “보초! 나는 나폴레옹이란 말이다. 어서 총을 내려!” “그런 소리 말고 어서 돌아가십시오! 아무리 지휘관님이라 해도 저의 직속상관의 명령 없이는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정말 안 되겠나?” “예,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결국 나폴레옹은 그냥 자기 막사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다음날 나폴레옹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고집불통이던 그 보초를 불렀다. “부름 받고 왔습니다!” “응, 좋아. 자네 간밤에 나를 통과시켜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하고 나폴레옹 장군은 물었다. “프랑스를 위해서 싸우는 한 군인으로서 맡은 바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합니다. 간밤에 장군님을 통과시키지 않은 것이 죄라면 그에 대한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그 보초는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고집스럽고 용기 있는 그 병사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하하하··· 좋아! 자네야말로 훌륭한 군인일세. 내 당장 육군소위로 승진시켜주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밀고나가는 용기도 중요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해하고 의무를 다하는 태도도 중요하다. 군인은 다른 어떤 조직과는 달리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집단이니, 나폴레옹을 대하던 보초병에게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고집스럽게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임무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도 하지만 지켜나갈 것은 지켜나가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법을 지켜나가는 것과 도덕이나 양심도 중요하지만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태도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하겠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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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8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⑥용기와 의로움이 있는 신사 라이트 대위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아프리카 해안을 항해하던 버큰헤드 호의 조난은 백 오십년도 넘은 일이지만 영국 사람들은 이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1852년 2월 27일 버큰헤드 호는 472명의 군인과 162명의 부녀자 그리고 아이들을 태우고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있었다. 새벽 2시, 모든 사람들이 곤히 잠든 시간에 절망적인 일이 벌어졌다. 남아프리카 희망봉 앞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혀 바닥에 구멍이 나 바닷물이 솟구쳐 배가 침몰 직전에 이른 것이다. 사방에서 북을 두드렸다. 군인들은 갑판 위에 집합했다. 순식간에 열병식이라도 벌이듯이 갑판에 질서정연하게 집합한 이들에게 “서둘러 부녀자와 아이들을 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상어가 우글거리는 밤바다에서 풍랑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배는 자꾸만 가라앉아 갔다. 배의 뒷쪽에 보트가 세 척 있었다. 한 척에 탈 수 있는 사람은 60명이니 다 해야 180명밖에 탈 수 없었다. 군인들은 신속히 배 밑으로 달려가 대부분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부녀자와 아이들을 끌어올려 갑판 위의 보트에 태워 바다로 띄워 보냈다. 거의 모든 부녀자와 아이들이 구출되었다. 이때 선장은 군인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대들도 헤엄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바다로 뛰어내려 저 보트에 타라!” 그러나 제91스코틀랜드 연대의 라이트 대위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정한 군인이면 내 말을 들어라! 너희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보트에 매달리면 혼란이 일어난다. 보트는 가라앉고 말 것이다. 국민을 아끼고 지키는 군인이라면 이 자리에 서 있어라!”라고 명령했다. 이 용감한 대위는 꼼짝도 않은 채 그대로 서있었다. 바닷물은 어느새 갑판 위로 올라와 무릎을 적시고 있었으며 남아 있는 보트도 없고 어떤 희망도 없었다. 병사들은 대위의 말을 따랐다. 배가 가라앉는 순간까지 불평하는 군인, 몸부림치는 군인은 한사람도 없었다. 한 생존자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배는 마지막 순간에 축포를 울리면서 이들 군인과 함께 바닷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고..... 군인은 끝까지 신사여야 한다. 신사는 기사도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다. 기사도는 곧 용기와 의협심과 사랑을 말한다. 위험을 외면하지 않고, 적 앞에 비굴하지 않으며, 부하와 전우에게 친절하고, 이웃을 따뜻하게 보호하며···,신사다운 군인은 바로 이런 기사도를 가진 사람이다. 신사는 계급이나 돈과는 상관없다. 가난한 사람도 계급이 낮은 사람도 얼마든지 신사가 될 수 있다. 정직하고, 정중하고 침착한 사람, 그에게 용기와 의로움이 있으면 그는 신사이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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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5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⑤부하의 능력을 인정한 마셜(George C. Marshall)장군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모든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다. 이는 자존심이나 자부심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훼손되면 정신질환을 일으키기도 한다. 병사들은 업무수행 중 행한 결과에 대해 지휘관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며 이는 전투 시에도 마찬가지이다. 관심과 인정이 얼마만큼 강렬하게 요구되는지를 제2차 세계대전 중 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장군은 그의 저서 ‘포화 속의 사람(Man against Fire)’에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전투 중에 포탄 파편에 맞아 나이 어린 중대 연락병이 쓰러져 죽음 직전에 중대장의 품안에 안겼다. 병사는 죽어가면서 중대장에게 속삭였다. “중대장님. 중대원들이 항상 저더러 비겁한 놈이라고··· 하지만 이번만은 저도 용감했다고 인정해 주세요.” “그럼. 너는 용감했다.” 중대장의 대답에 소년병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죽어 갔다. 부하들은 한 마디의 칭찬, 가볍게 등을 두드려 주는 격려, 표창, 훈장 등으로 자신의 능력이 인정될 때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행동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부하의 능력을 인정한 마셜 장군의 부하에 대한 일화이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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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4
  • [김희철의 전쟁사(129)] 김만술 소위의 신화, 베티고지 전투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베티고지 전투의 영웅 김만술 소위는 앞서 방어한 소대들의 어려웠던 상황을 분석하고 ‘목의 가시’ 같은 ‘서봉’을 기습 공격할 것을 구상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국군이 매번 당하기만 했던 수동적인 입장을 뒤집어 국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한편, 중공군에게 매서운 맛을 보여주기 위해 대대장에게서봉에 대한 공격을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 36대 800 기적의 신화를 만든 전쟁영웅 김만술 소대 그 당시 베티고지에서 발생한 많은 사상자로 인해 병사들은 고지에 오를 때 “오늘은 몇 명이 전사할 것인가?”를 두려워하며 걱정하였고, 상급부대도 “다음에는 어느 소대를 투입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정도로 피해가 많아 국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특무상사로서 실전 경험이 많았던 김만술 소위는 병사들에게 먼저 “아무리 치열한 포탄낙하와 격전 속에서도 침착하고 민첩하게만 행동하면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김만술 소위는 배치되자 곧바로 서봉을 기습 공격하여 적병 5명을 사살하고 8부 능선까지 진출함으로써 우선 소대원들의 사기를 올렸다. 이어 야간에 적의 기습공격에 대비하여 교통호의 모래를 파내는 등 진지를 보강하고, 무선과 유선을 세밀히 점검하며, 시계와 사격방향을 일일이 확인하며 만반의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던 오후 7시경 중공군의 최초 야간공격을 받았다. 아군은 준비된 사격계획에 따라 치열하게 응사하였지만 중공군은 아군의 포화를 뚫고 교통호까지 접근하여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교통호에 뛰어든 적을 김만술 소대장이 선두에서 총검으로 물리치자 공포감에 질렀던 아군 병사들이 일시에 용기를 얻어 용전분투(勇戰奮鬪)한 결과 중공군의 1차 공격을 막아냈다.. 오후 10시즈음이 되자 중공군은 다시 베티고지 중앙봉을 중심으로 좌우측으로 2개 중대 규모의 병력으로 치열한 공격을 재개하였지만, 김만술 소대원들은 상급부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수류탄 투척과 집중사격으로 중공군을 또 물리쳤다. 그러나 적의 사격으로 아군의 무전기가 파괴되었고 이때문에 상급부대 화력지원을 받는데 문제가 생겼다. 자정 즈음에 이강로 하사가 적 매복조의 사격속에서도 통신망 복구를 요청하기 위해 대대본부로 뛰어가 전황보고와 통신 연결을 시도한 노력으로 새벽 2시30분경에 통신이 개통되어 중대 및 대대와 다시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또다시 새벽 4시 경에 중국군은 베티고지와 그 좌측 지점에 각각 1개 소대 규모를 투입시켜 공격을 재개하였다. 김만술 소대는 지근거리까지 유인하여 수류탄 투척과 백병전으로 저지하였다. 하지만 아군 진지에 너무도 많은 적들이 소대원들과 혼재된 상태가 되자 김 소위는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불리함을 판단하고 소대원을 유개호 속으로 피신시킨 후 진내사격을 요청하여 노출된 중공군을 괴멸시켰다. 철수했던 적은 새벽의 짙은 안개를 이용해 다시 공격을 가해오자 수류탄 투척과 백병전 그리고 진내사격을 통해 이를 또다시 격퇴하는 등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 벌어졌고 오전 7시 반에 날이 밝으면서 중국군은 완전히 퇴각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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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3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④진정한 군인 알렉산더 대왕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20세의 젊은 나이로 마케도니아 왕위를 계승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정복할 야망을 꿈꾸어 오던 중 마침내 페르시아 원정의 길에 올랐다.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도 알렉산더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막강한 알렉산더 군대를 당할 수 없어 패하고 말았다. 다리우스의 막사를 점령하고 피로를 풀던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비(妃)와 두 공주가 절세의 미인이고 젊음의 혈기가 끓었음에도 “적을 이기는 것보다 나를 이기는 것이 왕자의 면목을 잃지 않는 것”이라 스스로 다짐하며 유혹을 이겨냈다. 야간을 이용하여 후퇴한 다리우스를 기습공격하자는 참모들의 견의에 대하여 “승리를 한밤중에 도둑질하지는 않겠다.” 고 거부한 알렉산더는 뒷날 페르시아 군을 찾아 다시금 패퇴시켰다. 아직도 잡히지 않은 다리우스를 추격하던 알렉산더는 험한 길과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물을 찾지 못해 거의 혼절할 만큼의 갈증을 느꼈다. 그 때 노새 등에 물을 싣고 가는 사람들과 마주치자 알렉산더는 그들에게 그 물을 나눠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 이 물로 대왕님을 구할 수 있다면 제 자실들은 다음 차례로 돌리겠습니다”라고 말 한 뒤 투구에 가득 물을 부어 건넸다. 물을 받아든 대왕은 그러나 그 물을 다시 그들의 물동이에 붓도록 명했다. 그 물이 그들 자식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일 수도 있겠거니와, 같이 땀 흘리며 갈증에 시달릴 병사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이 물을 마시고 있는 것을 우리의 군사들이 보면 그들은 목이 더 탈 것이다”라고 말했다. 알렉산더의 명성이 널리 퍼졌을 무렵 그는 나라에 있는 현인(賢人)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많은 사람들이 연회에 참석하였지만 디오게네스는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대왕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디오게네스는 “내게 볼 일이 있으면 본인이 오라”는 식이었다. 대왕으로서의 자존심과 체면의 문제였지만 알렉산더는 어느 날 디오게네스를 방문했다. 통나무 통 속에 살면서 천체와 자연의 연구에 몰두한 디오게네스는 대왕의 방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대왕이 그에게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당신이 서서 가리고 있는 햇볕이 내게는 필요하오”라고 말하며 대왕이 빨리 그곳을 떠나줄 것을 재촉했다. 병사들이 칼을 들어 그의 무례함을 탓하려 하였으나 이를 제지한 알렉산더는 “과연 디오게네스답다”고 말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페르시아 정복의 먼 길을 달려 온 젊은 알렉산더는 전쟁에서 이겼고 절세의 미인들을 전리품으로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했다. 진정 군인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또 혼절할 만큼의 갈증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갈증을 부채질한다는 마음에서 물을 거부한 그의 모습은 과연 지휘관다운 것이었다. 진정한 충성심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며 정의로운 싸움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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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3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③승리의 화신 맥아더 장군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필승의 신념이 투철한 군인은 불가능을 모른다. 신념이 확고한 정신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항상 적극적이며 진취성을 가지고 일에 임하되 결코 부정적, 소극적, 회의적인 생각을 품어서는 안된다.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할 때의 맥아더 장군의 경우를 보면 휘하 참모까지 인천상륙작전의 무모함을 논하면서 회의적인 태도로 나왔다. 맥아더 장군은 오직 필승의 신념 하나를 갖고 전반적인 계획과 결정을 고독한 가운데 혼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상했던 회의의 분위기는 작전 수행의 어려움을 가지고 토론하였다. 맥아더는 침묵을 지키며 참모들의 의견을 경청했으며 최종 단안을 내릴 차례가 되었다. 맥아더는 “귀관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주장이 나에게는 오히려 장점으로 생각한다. 누구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공격을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다짐해 두고 싶다. 적군의 지휘관은 우리가 차마 그렇게 어려운 모험을 감행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충만한 자신감으로 힘주어 강조했다. 이 얼마나 백전노장다운 말이며 승리의 확신을 갖고 있는 말인가. 이를 본 합동참모본부의 페레스토시만 제독은 “나도 맥아더장군만큼 자신이 있었으면...”하고 독백했다. 훗날 어느 전사가(戰史家)는 이렇게 평가했다. “그것은 자신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결코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는다는 숭고하고 거의 신비롭기까지 한 굳은 신념인 것이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고 12일 후인 9월28일엔 서울이 탈환되었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던 데일리 뉴스지의 ‘카이스 비치’ 기자는 “맥아더는 패하지 않았다. 적어도 인천에서만은......”이라는 감동적인 기사를 썼다. 한번 결심한 일에 대해 승리를 기대하지 않거나 의구심을 가졌을 때 절대로 전력을 집중하거나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쾌히 쏟을 수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놀라운 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정신의 위력, 이것이 바로 신념이다. 그렇다면 우리 군이 현실적으로 가져야 할 필승의 신념이 구비할 요건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필승의 신념은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 국군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민의 군대인 반면, 북한은 독재체제의 사병집단이다. 우리 군은 정의의 힘으로 불의와 불법적인 사병집단인 북한군을 격멸해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해야 한다. 또한 이와 함께 불타는 적개심으로 적과 싸워 꼭 이기겠다는 투철한 승부욕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전쟁에서는 승리만 있을 뿐 패배는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군인은 언젠가는 싸워야 하는 것이 그 본질이고 속성이다. 따라서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승리로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군대요, 승리 하나로 민족 앞에 우뚝 서야 하는 것이 군인이다. 전투는 운동경기가 아니다. 연습도 있을 수 없으며 한번 싸워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된다는 사생결단의 장이다. 중국의 한비자는 “군사는 반드시 싸워서 이기겠다는 용맹스러운 마음이 가슴속에 끓어 올랐을 때 비로소 그 싸움에서 이긴다”고 했다. 필승의 신념이 전승의 요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승의 신념은 생각만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힘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우리 군은 적보다 우위의 전투력을 갖출 수 있도록 평소 피나는 교육훈련을 통해 전기전술을 연마하고 강인한 정신력을 길러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탁월한 기량이 뒷받침된 필승의 신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북한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필승의 신념은 반드시 적개심이 있어야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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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1
  • [김희철의 전쟁사(128)] 김만술 소위의 신화, 베티고지 전투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베티고지는 임진강 지류가 남북으로 흐르는 가운데 표고 120~150m의 봉우리 3개로 형성된 국군 1사단 11연대 2대대의 전초진지였다. 대대에서는 중공군의 발악적인 공격을 저지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한국전쟁 막바지인 7월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 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 붓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그동안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대대에서는 계속해서 3개 소대를 축차적으로 투입했으나, 배치된 소대들은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중공군의 공격에 반수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매번 교대시켜야 했다. 그날도 날이 새기도 전에 새로운 소대를 다시 투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만술 소위는 이날 2대대 6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베티고지 사수임무를 4번째로 부여 받았다. 앞서 방어를 담당하던 7중대 1소대는 그래도 3일 동안 버티었으나, 이어진 적의 공격으로 전투력이 절반 이하로 감소되어 더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베티고지는 세 개의 봉우리 중 중앙봉과 동봉은 아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중앙봉에서 직선거리로 10m도 안되는 서봉은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1953년 7월 15일 14:00, 김만술 소위는 아직 얼굴조차 익히지 못한 35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베티고지 사수를 위해 중앙봉과 동봉에 투입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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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8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②넬슨 제독의 사명감과 명예심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눈보라가 엄청나게 휘몰아치던 겨울 어느 날, 개학을 맞아 소년은 형과 함께 학교를 향하고 있었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눈보라가 몰아치자 형은 동생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생은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명예를 걸고’ 끝까지 실천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상기하고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눈보라가 더욱더 세차지자 형은 학교에 갈 것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지만 소년은 이를 악물고 학교까지 갔다. ‘너의 명예를 걸고’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마침내 실천했다. 그가 바로 트라팔가(Trafalga)의 영웅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었다.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상대로 교전하고 있을 때였다. 넬슨은 함장인 하디와 함께 갑판 위에서 진두지휘하던 중 적탄이 왼쪽 어깨에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어깨를 감싸고 쓰러질 때까지 버티던 넬슨은 결국 응급실로 운반되었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상태였다. 넬슨은 그 곳에서 이를 악무는 고통을 견디면서 전황을 살폈다. 함장을 부른 제독은 “우리의 빅토리오는 격파되어서는 안 되네.” 라고 말하며 함장을 독려한 뒤 “나는 이제 곧 죽을 것 같네. 이 고통을 이기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겠지만 조금만 더 살아야겠네.” 하며 다시금 전황을 물었다. 얼마 후 함장으로부터 대승리의 소식을 접한 제독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어 함장의 손에 입을 맞춘 뒤 “이제 안심이네. 나는 나의 책임을 다했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1805년 10월 21일 아버지의 교훈대로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 자신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승리 없는 군인은 군인이 아니라는 굳은 신념을 그는 죽는 순간까지 간직했다. 우리는 한 번 계획한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과 부여된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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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10-08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①아이젠하워 대장의 멋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가을 아이젠하워(Eisenhower)대장은 29사단을 방문하였다. 진흙투성이의 미끄러운 언덕에서 병사들과 이야기를 마친 후 군용차가 있는 곳으로 뒤돌아가던 아이젠하워는 진흙길에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병사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나 막상 장군이 일어나 그들을 바라보자 병사들은 행여 야단이라도 맞을까 보아 입을 다물고 일순 긴장했다. 진흙투성이의 아이젠하워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전쟁 중에 여러분을 만나 이야기하고, 또 이렇게 여러분을 웃겨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니 오늘 방문이야말로 대만족일세!” 연합군이 라인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아이젠하워는 몹시 침울해 보이는 한 병사를 만났다.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하고 아이젠하워가 묻자, 병사는 “장군님, 겁이 나서 그렀습니다. 저는 두 달 전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내내 입원해 있다가 어제 퇴원했는데 또 전투에 나선다니 별로 기분이 좋질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이젠하워는 병사의 소심함을 꾸짖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와 나는 좋은 짝이군. 사실 나도 겁이 난다네.” 장군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공격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고, 우리에게는 독일군을 격퇴할 항공기와 막강한 공수부대도 있다네. 우리가 함께 강을 따라 걷다 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걸세.” 1945년 1월 연합군이 파리를 통과할 때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는 전방에서 필요한 O형의 피를 급히 요청했다. 곧이어 많은 지원자들이 진료소에 줄을 이었다. 그 속에는 아이젠하워 연합군 최고사령관도 끼어 있었다. 아무도 그가 최고사령관인 줄을 몰라보았지만 헌혈을 하고 나오자 줄을 서고 있던 한 병사가 그를 알아보았다. 그가 뒤에 있는 다른 병사에게 말했다. “저 피를 내가 수혈 받는다면, 내 몸에 장군의 피가 흐르는 건데.”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 나쁜 성격은 닮지 않았으면 좋겠네.” 예화에서 보여주는 아이젠하워 대장의 멋은 병사들을 위해 걱정하고 보살피는 부하 사랑과 더불어 급박한 전황 속에서도 간직하고 있는 삶의 여유에 있다. 우리는 부하들을 위해 어떤 사랑을 베풀었으며 진정으로 하급자를 사랑하고 있는지요...? ◀유철상 프로필▶ 現 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학군23기/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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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10-07
  • [김희철의 전쟁사(127)] 김만술소위의 신화, 베티고지 전투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 베티고지는 현재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직접 방문은 어렵지만 태풍전망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국가보훈처는 베티고지 전투에서 기적의 36대800신화를 만들며 맹활약했던 故 김만술 육군대위를 5월의 6ㆍ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 임진강 주변의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 때문에 치열해진 베티고지 전투 베티고지(Betty) 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 결국 베티고지는 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2소대원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에 의해 10배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며 기적적으로 격퇴시키고 사수하였다. 6ㆍ25전쟁영웅 故 김만술 대위는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는 18세의 어린 나이인 1947년 6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다. 이후 부산에 주둔하던 5연대에 소속으로 1948년 ‘여순 10·19사건’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전하는 등 약 6년여의 기간을 부사관으로 복무했다. 6ㆍ25남침전쟁이 발발한 후 평양 탈환작전을 비롯한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탁월한 지휘 및 전투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53년 7월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되어 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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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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