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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전자(DNA) 정보를 확보해 국가 관리기록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황기환 지사의 유전자(DNA) 정보는 지난 4월10일 순국 10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파묘하는 과정에서 채취한 시료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 확보하였다. 황기환 지사 유해는 2008년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발견되어 2013년부터 국내봉환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으나 유족이 확인되지 않아 2차례 법원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국가보훈부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지난 1월 31일 묘지 측이 파묘에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은 황기환 지사 유해의 유전자(DNA) 정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파묘 과정에서 시료를 확보해 4월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황기환 지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 유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전자(DNA)정보가 황기환 지사의 유족을 확인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분석기법을 적용해 2개월만에 어렵게 정보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황기환 지사의 소중한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하고, 유족을 찾는데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앞으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협업해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국외 독립유공자의 유해 유전자(DNA) 정보를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고 후손을 찾는 중요 단서로 활용해 이분들의 희생과 공헌이 우리사회에 영원히 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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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시크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 대행 등이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복지증진 업무협약’을 3일 10시에 체결했다. 이날 업무 협약은 대한민국 자유수호에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분위기 조성,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삶 향유를 위한 복지증진, 생활안정을 위한 일자리 지원 확대 등을 목적과 주요 골자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업무협약에 따라 첫 번째 실천사업으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부-전국경제인연합회-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께 협력해 자유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곳곳을 쉼 없이 전진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용사의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헌정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발볼 차이로 기성화가 안맞거나 보행 불편이 있는 6‧25참전유공자 및 재방한 유엔참전용사 등 300명 영웅의 발을 삼면측정(3D스캔)하고 그에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One & Only Heroes Shoes)”를 제작해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직접 전달한다. 또한, 맞춤형 신발 제작을 위해 취형한 발 모양과 참전영웅의 인적사항, 참전기간, 누적 발걸음 수 등이 표기된 동판을 제작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헌신에 감사와 예우를 전하는 의미에서 11월 11일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부산)에 맞추어 유엔평화공원에 ‘영웅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모든 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자 일류보훈으로 가는 기본” 이라며 “국가보훈부 승격에 걸맞게 품격 높은 보훈으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경제계와 함께하는 일류보훈 동행’으로 시작된 양 기관의 상호협력은 이번 협약으로 더욱 공고화되어 향후 주거개선 및 제대군인 일자리 지원 등 국가유공자 생활안정을 위한 복지증진 사업으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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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전문기자] 주모로코 한국대사관(대사 정기용)은 6·25 남침전쟁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북아프리카 모로코 군인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족은 6·25 남침전쟁에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하메드 벤 카두르 라스리(당시 병장·실제 모로코 이름은 무흐 벤카두르 엘 아스리)의 딸인 프테탐 엘 아스리(81)씨와 손녀다. 라스리씨는 1951년 3월5일 1037고지 전투 중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유해는 부산 유엔 공원에 안장돼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9월 프랑스 군사기록원 자료를 통해 라스리씨를 포함한 8명의 모로코 군인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6·25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고, 모로코 보훈처와 함께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나섰다. 6·25 남침전쟁의 숨은 영웅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윤종진 보훈처 차장이 지난해 12월 현지 방문을 계기로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적극 나선 모로코 보훈처는 몇달간의 조사와 확인 끝에 첫 성과를 냈다. 그러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라스리씨의 병적 상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달리 기재된 데다, 유족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소재 파악도 어려웠다. 딸인 프테탐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군복 입은 사진이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단 한 가지 단서였다. 프테탐씨는 "4살 때 입대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6·25 남침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부산 유엔 공원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모로코인 참전용사들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프랑스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된 이유다. 모로코 참전용사 확인 작업은 애초 2012년에 시작됐지만, 당시 모로코 측에서 관련 자료 확인에 난색을 보이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참전용사 확인은 2021년 정 대사가 엘렌 르 갈 당시 주모로코 프랑스 대사에게서 6.25 참전 모로코인 자료가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재개됐다. 이후 부산 유엔공원에서 모로코 출신 참전용사 2명이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 대사관측은 프랑스 참전용사 및 전쟁피해자 사무소(ONACVG)의 협조로 프랑스 군사 기록원에 남아있는 관련 기록을 확보, 지난해 처음으로 참전용사 8명의 존재를 찾아냈다. 정기용 대사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에 모로코 출신 6·25 참전용사 가족을 찾게 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추가로 참전 용사와 가족을 찾는 한편 모로코 내 학교 교재에 이 사실을 수록하고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후속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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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며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인보다도 백선엽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라며 “백 장군님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시어 현재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작금에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이 계속되는 속에서 출범하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참군인 김관진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 이 재단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틸러리 전 연합사령관, 권오성 육군협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국회 회의 때문에 늦게 도착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만든 분, 백선엽 장군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내신 분, 박정희는 오늘의 선진 경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축사를 시작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렇기 때문에 이 세분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라발전에 큰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입니다. 허나 지난 정권에서는 폄하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세분의 역사적인 공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본 장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의 일에도 분골쇄신의 각오로 절대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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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창군(創軍) 원로이자, 6.25남침전쟁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할 때에 다부동전투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만드시고, 평양 선두입성, 중공군의 공세 저지, 남부군 토벌 등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셨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중에 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어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과 제10대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지신 구국영웅이다. 미군은 지금도 백선엽 장군님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있다. 백 장군은 전역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해서 교통부 장관 재임시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내신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에 김관진 이사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公人)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 ‘제복의 영웅’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여러 추모 및 기념단체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초일류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백남희 여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훈부의 도움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창립하여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장군님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공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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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회관에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호텔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민식 보훈부 장관, 권오성 육군협회장, 이중근 부영그룹회장, 고현석 육군참모차장, 벤플리트 장군 손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홍두승 단장)의 식전 공연에 이어 초대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녀이자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2부에서는 김재창 장군의 ‘가까이서 본 선배 백선엽 장군’과 유광종 대표의 ‘백선엽,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주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다부동 대첩 및 평양입성 전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던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의 박형수(94세) 회장과 김주찬(94세) 부회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전장 실상을 이야기할 때와,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가 환영사로 대한민국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며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한 백선엽 장군과 인연을 맺였던 청년 대표와 연평해전 전사자 서정우 하사의 모친의 플로어 맨트도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땐 국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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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⑫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부산에 위치한 미2군수사령부의 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11월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자 화마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정부도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 대참사로 인해 부산 전체를 절망의 늪에 빠뜨린 패닉 발생으로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위기를 맞은 그는 자연스럽게 제2차 세계대전시 영국 애버데어에서 보여준 대민관계와 프랑스 르앙을 재건한 경험이 되살아났다. 또한 유년시절 청교도 가문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실천할 기회라는 마음이 치솟아 올랐다. 위트컴 장군은 민간에 사용할 수 없는 전투용 군수물자를 직권으로 풀어 추위에 갈 곳이 없는 이재민들에게 천막촌을 건립해 주고 먹을 것을 제공해 주며 즉각적인 구호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매일 2만 310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텐트, 의류, 침구류 등 군수물자를 긴급히 지원했고 화재 다음 날인 11월 28일엔 즉시 공병부대를 투입하여 화마가 휩쓸고 간 피해지역을 정리했다. 이어 12월 9일에 첫 번째 텐트촌을, 12월 10일에는 두 번째 텐트촌을 제공하겠다고 계획을 밝히면서, 일반 장병들에게는 4만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위트컴은 “이재민 중 누구라도 굶거나, 잠잘 곳이 없거나, 진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라고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장군의 대응방식은 걱정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걱정은 뒤로 하고, 빠르게 해결책을 찾아서 망설임 없이 추진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시적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서 본질적 문제와 해결책을 찾았다. 즉, 화재로 인한 재해의 단순한 복구 수준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거주할 가옥의 건설, 도시 기반시설의 구축, 의료환경 개선, 학교 및 전쟁 고아 지원 등 총체적으로 도시를 재건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했다. 이를 위해 위트컴 장군은 자신의 모든 노하우와 경험을 결집하여 해결책을 구상했다. 이것이 바로 AFAK(미군대한원조,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프로젝트를 활용한 재건사업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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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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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⑪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영국의 브리스톨 해협에 위치한 11항만단 지휘관으로 보직됐고,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노르망디 상륙작전 지원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때 지역주민들에 대한 예의, 군인으로서의 행동 규범, 제복 착용에 이르기까지 모범적 모습을 보이는 11항만단 부대원들에 대해 애버데어(Aberdare) 시민들은 감동했다. 특히 그들의 전통을 존중하며 주민들이 어떻게 차를 만드는지를 배우는 등 주민들과의 친화 과정은 대민관계의 전형적 모델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중심인 존중의 리더십은 추후 한국 국민들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게 만든 결과로 당시의 브리스톨 해협 애버데어 시민들이 스스로 11항만단을 ‘The Aberdare Port’라고 부르며 자긍심을 가질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또한 11항만단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했던 프랑스 오마하(Omaha) 해변 전투에서 5만여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사물자의 수송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이후 기능이 마비된 오마하 해변과 주변 항만들을 재건하면서 정상적으로 항만을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상륙 이후 초기 90일 동안 총 926,689톤, 일일 10,296톤이라는 엄청난 물량을 처리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위트컴은 파렛트, 크레인, 트럭, 철도, 화물의 적하역, 장비의 엔진 종류, 나라별 처리 방식의 차이점, 해변의 조류 등 엄청난 수준의 전문성에 바탕을 둔 항만 운영에 대해 누구보다도 심도 있는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상륙 이후 지속적인 군수지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임무들을 성공적으로 훌륭하게 수행하자 독일군에 의해 폐허가 된 프랑스 르앙(Rouen)을 재건하라는 추가적인 임무가 부여되었다. 르앙은 노르망디의 중심 도시로서 센 강을 관통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내륙의 항만 도시이다. 유서 깊은 르앙 성당이 위치하고 있고, 역사적으로는 자유의 여신상이 조립 및 분해된 곳이며, 잔다르크가 화형 당한 곳이기도 하다. 위트컴은 임무를 부여받은 즉시 끊긴 다리들을 건설하고 마비된 항만들의 기능을 회복하는 재건 작전을 수행했다. 위트컴의 지휘 아래 수개월간의 집중적인 복구 노력을 통해 다시 큰 선박들이 이동하게 됐고, 도시기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위트컴이 영국 애버데어에서 보여준 대민관계와 프랑스 르앙을 재건한 경험, 그리고 그의 리더십은 차후 부산의 재건을 위한 값진 토대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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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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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2)]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을 지휘했던 위트컴 장군은 1953년 미 제2군수사령관으로 부임했으나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는 위기를 맞게 된다. 해방 직후 30여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전쟁이 끝나자 순식간에 백만이 되고 도시기능은 마비되었으며 공동묘지 위에까지 판자 조각, 양철 등으로 비만 겨우 가릴 수 있는 판자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남한 인구 약 2천만 명 중 천만이 빈민이요 대부분이 실업자였다. 판잣집이 밀집해 있다 보니 조그만 부주의가 대형화재로 이어져 부산은 그때 ‘불산’이라고도 불렀다. 11월 27일 오후 8시 20분경 당시 부산시 중구 영주동 17통16반 허도영(許道榮)의 방에서 난롯불 부주의로 발생한 화염은 풍속 11.8m의 강풍으로 순식간에 부산역 대화재로 확대되었다. 14시간에 걸친 화마는 부산역을 중심으로 한 번화가의 주요 건물 및 민가 등 약 1,250호를 태우고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에 진화되었으나 같은해 1월 30일 국제시장 화재의 12.6배가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광활한 지역의 일제 건축물과 미군 막사 같은 주요 건축물이 모두 전소되었으며 또한 민간주택 3,132채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29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데다, 6,000여 세대 약 3만여 명의 이재민은 11월말 삭풍이 몰아치는 혹한 속에 노천에서 떨고 있었다. 이 현장을 목격한 위트컴 장군은 대학 시절 선교사가 꿈이었던 것처럼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실천할 기회라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 이는 어린 시절 도전과 해결이라는 어머니의 가정교육이 그 뿌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이재민들을 위한 즉각적인 구호활동을 개시하였다. 매일 23,10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텐트, 의류, 침구류 등 군수물자를 긴급히 지원하였다. 화재 다음 날인 11월 28일 장군은 즉시 공병부대를 투입하여 지역을 정리하였고, 일반 장병들에게는 40,000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준비하도록 했다. 이렇게 조건반사적인 조치를 할 수 있는 전문성은 제2차 세계대전시 아이슬란드와 영국에서의 항만 운영과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 등의 지휘 경험이 뒷받침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에 위트컴 장군이 지휘했던 11항만단은 독일군에 의해 폐허가 된 프랑스의 루앙(Rouen)시를 재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수개월 동안 집중적인 복구 노력을 통해 큰 선박들이 이동하며 도시기능이 살아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위트컴의 경험들은 이번 부산역 대화재로 피해가 확대된 부산의 재건을 위한 값진 토대 및 추진 동력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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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2)]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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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1)]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하와이의 YMCA에서 일하다가 1917년 National Guard 및 예비군 장교(ROTC)로 임관한 위트컴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1914-1918)하자 미 육군 16사단 32연대 보병 장교로 제2차 마론강 전투에 참전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위트컴은 1941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아이슬란드에 미군 장교 최초로 파견되어 모든 항만을 지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대령으로 진급한 후 영국의 브리스톨 해협의 뉴포트(Newport)에 위치한 미 11항만단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강한 훈련 및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에 가장 치열했던 오마하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사물자의 수송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상륙작전 성공 후에 노르망디 해변 및 주변 항만들의 운영 및 보급 작전을 지휘하였고, 이후 폐허가 된 프랑스 루앙(Rouen)시의 항만 운영 및 재건을 위한 임무를 추가로 수행하여 지역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이 작전의 공로로 위트컴은 훗날 6·25남침전쟁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한국군 재건에 기여했던 전쟁영웅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또한 위트컴이 대학시절에 선교사로 활동할 꿈을 꾸었던 필리핀에서의 미군 상륙작전이 1945년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필리핀 마닐라 항만의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17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수송, 군수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종전 후 전역하여 사회활동을 했으나 냉전시대였던 1950년 현역으로 복귀하여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하 6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추위속에서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 등을 위한 수송 및 보급작전을 지휘하여 당시 ’미군 최고 군수전문가‘의 위치에 올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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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1)]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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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0)]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1894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 토피카(Topeka)에서 주대법관을 역임한 아버지 조지 허버트 위트컴과 당시 남자대학에서 최초로 강의한 여성 법률가이며 교수인 어머니 제시 위트컴 사이의 5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가는 물론 외가가 모두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집안에서 성장한 위트컴은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의 엘리트 교육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터득하게 된다. 캔자스주 토피카의 워시본(Washbon)대학 재학시에는 대학 편집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각종 토론회에서 우수 토론자로 선정되었고 미식축구 선수로도 맹활약을 했다. 또한 아펜잴러와 언더우드가 활동했던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학생자원선교활동) 멤버로 필리핀 선교사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위트컴은 대학 졸업 후 다양한 회사에서 간부로 근무하였고,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기업 및 정부기관의 예산, 조직, 기술 등에 관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할 수 있었다. Southwestern Telephone Company 등 여러 통신회사에서 세일즈 매니저, 지역 책임자로 근무했고, 보스턴 시정부의 업무 개선을 위해 다양한 지원활동도 했다. 또한 3백만 불 이상의 실업자 구호 펀드를 모금했으며, 시정부의 자문위원회에 참여하여 정책에 대한 조언을 통해 100만 불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당시 위트컴은 공화당의 매사추세츠 주지사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상당한 지명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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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0)]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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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9)]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전협정 체결로 치열한 전투는 일단 마무리됐지만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을 결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의 복귀와 한국군 재건을 위해 한국군에게 인계할 장비와 화기 및 추가적인 지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복구 사업을 담당하는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 프로그램 업무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 복구 및 한국군 전력증강을 위해 연일 계속된 후속조치로 피로한 상태였던 어느날 밤에 위트컴 장군 방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1953년 11월27일 밤 8시30분경에 부산 영주동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은 갑자기 불어온 강풍으로 지역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며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 동광동을 지나 중앙동 부산역까지 번지며 일대가 거의 전소되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보고였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 6시경 잡혔으나, 29명의 사상자와 6천여 세대 3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주택 3,132채 및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옛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돼 버렸다. 게다가 당시 광활한 지역의 일제 건축물과 6·25남침전쟁을 지원했던 미군 막사 같은 주요 건축물이 모두 전소되며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에 위트컴 장군은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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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9)]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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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8)]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현리전투에서 국군 2군단이 대패하자 밴플리트가 국군 전투력 강화를 위해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이에 힘입어 양양에서는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그 중 8·12·15사단은 아이젠하워에게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계획을 브리핑하기 이전에 창설됐다. 이후 20·21·22·25사단이 각각 창설됐으며 정전협정 이후에도 27사단(1953년 9월) 등의 부대들이 양양 송암리 등지에서 창설됐다. 결과적으로 양양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한국군 재건은 밴플리트 장군과 그가 만든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밴플리트 장군은 일명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력 강화는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의 교육훈련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력을 증강할 수 있는 장비와 화기가 갖춰져야 했다.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1953년 미군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 위트컴 장군은 마치 한국군 재건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밴플리트 장군을 내조하듯이 한국군 전력증강과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및 정확한 수송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한국군을 위해 탄약 70만 발, 소화기 50만 정, 화포 1500여 문, 차량 2만여 대 등 200만t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지역 치안 유지는 물론 전쟁포로와 피난민 관리 임무도 수행했다. 이로써 6·25남침전쟁 중반에 10개 사단 규모였던 한국군이 1953년 정전협정 무렵에는 20개 사단 56만 8994명의 대군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대군이 된 것은 일명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리던 밴플리트 장군의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 등의 한국군 재건 노력부터였지만, 숨은 공로자였던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 위트컴 장군의 한국군 전력증강에 매진한 공도 컸던 것으로 평가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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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8)]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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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7)]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52년 유혈만을 강요하는 진지 고착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지원없이 우리 자체의 병력과 화력만으로는 155마일에 달하는 전선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자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는 “미군이 장기적으로 한국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앞으로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해 독자적인 방어에 나서야 할 것”이라며 한국군 잔력증강의 필요성을 최초로 언급했다. 1952년 말, 밴플리트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에게 “곧 미국의 새 대통령 당선자이자 자신과 육사 동기였던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니 그 때 당신이 한국군 전력증강의 필요성과 세부 계획을 브리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당시 미 8군의 게스트하우스였던 지금의 서울 필동 ‘한국의 집’을 백선엽 장군에게 2주 동안 제공하면서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 등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한국군 전력증강의 밑그림을 작성할 수 있도록 지원도 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경선 때 ‘6·25남침전쟁의 휴전 필요성’을 선거공약으로 강조하고 다녔던 아이젠하워가 그해 12월3일 한국을 방문하자 밴플리트가 계획한 대로 백선엽 장군의 브리핑이 있었다. 백 장군은 “현재 한국군은 10개 사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추가로 화력과 장비를 제대로 갖춘 한국군 20개 사단으로 증강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등이 맡고 있는 지역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보고 말미에 “미군 1개 사단이 주둔하는 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을 창설할 수 있으며 미국이 협조하면 2년 안에 증강을 완료할 수 있다”고 한 마디를 더 보태며 강하게 설득했다. 브리핑을 경청한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는 “원칙적으로는 동의한다”며 표정이 좋아졌다. 한국에서의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고 미군을 철수시키고자 했던 그가 한국군을 증강해 휴전선의 대부분을 한국군에게 맡기고자 하는 계획 자체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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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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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7)]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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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6)]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공산학정을 탈출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대한민국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이 대부분 모여 있던 부산에서 1953년 11월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했다. 그때,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개방해 그들에게 천막과 구호물자를 꺼내어 피난민들이 포함된 이재민들을 도왔던 미 2군수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1894년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났다. 위트컴 장군은 1916년 ROTC로 군생활을 시작해 제1·2차 세계대전과 6·25남침전쟁 등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하던 ‘오마하 해안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1945년에는 일본이 점령 중이던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한 상륙작전에서 17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를 섬 요충지로 오차 없이 정확하게 수송해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냉전 시절 미 공군이 주둔하며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서유럽과 미국 본토를 보호한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기지도 그의 손을 거쳤다. 1941년 위트컴 장군이 기지를 건설할 때는 독일 해군의 이동을 감시하는 전초기지였다. 1950~51년에는 영하 60도인 그린란드에 공군기지를 건설하고자 세계 각국의 병력과 장비,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했는데, 당시 투입된 인력과 장비는 파나마 운하 건설 때와 비슷하다 하니 군수전문가로서 그의 면모와 능력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군사작전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충원하고, 보급 지원을 하는 병참(兵站)은 전쟁 성패와 직결되는 군사전략 수준의 역할이다. 중국 한(漢)나라 유방이 항우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한신’보다 후방 보급을 맡은 ‘소하’의 공을 으뜸으로 친 것도 군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위트컴 장군 역시 유방의 소하처럼 부임지마다 그 소임을 철저히 완수해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다.‘군수분야의 영웅’ 위트컴 장군은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1953년 미군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제 2군수사령부는 개전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은 한국군을 위해 탄약 70만 발, 소화기 50만 정, 화포 1500여 문, 차량 2만여 대 등 200만t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지역 치안 유지는 물론 전쟁포로와 피난민의 관리 임무도 수행했다.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와 정확한 수송, 국군 전력 증강은 그의 몫이었다. 개전 초기 9만6112명이던 한국군 병력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당시 20개 사단 56만8994명의 대군이 된 것도 한국군 전력 증강에 매진한 위트컴 장군의 공이 컸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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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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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6)]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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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두산백과 자료에 의하면 6 ·25남침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또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종교인·공무원 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이로인해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시작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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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