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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전자(DNA) 정보를 확보해 국가 관리기록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황기환 지사의 유전자(DNA) 정보는 지난 4월10일 순국 10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파묘하는 과정에서 채취한 시료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 확보하였다. 황기환 지사 유해는 2008년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발견되어 2013년부터 국내봉환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으나 유족이 확인되지 않아 2차례 법원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국가보훈부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지난 1월 31일 묘지 측이 파묘에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은 황기환 지사 유해의 유전자(DNA) 정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파묘 과정에서 시료를 확보해 4월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황기환 지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 유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전자(DNA)정보가 황기환 지사의 유족을 확인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분석기법을 적용해 2개월만에 어렵게 정보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황기환 지사의 소중한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하고, 유족을 찾는데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앞으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협업해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국외 독립유공자의 유해 유전자(DNA) 정보를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고 후손을 찾는 중요 단서로 활용해 이분들의 희생과 공헌이 우리사회에 영원히 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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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시크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 대행 등이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복지증진 업무협약’을 3일 10시에 체결했다. 이날 업무 협약은 대한민국 자유수호에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분위기 조성,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삶 향유를 위한 복지증진, 생활안정을 위한 일자리 지원 확대 등을 목적과 주요 골자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업무협약에 따라 첫 번째 실천사업으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부-전국경제인연합회-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께 협력해 자유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곳곳을 쉼 없이 전진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용사의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헌정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발볼 차이로 기성화가 안맞거나 보행 불편이 있는 6‧25참전유공자 및 재방한 유엔참전용사 등 300명 영웅의 발을 삼면측정(3D스캔)하고 그에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One & Only Heroes Shoes)”를 제작해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직접 전달한다. 또한, 맞춤형 신발 제작을 위해 취형한 발 모양과 참전영웅의 인적사항, 참전기간, 누적 발걸음 수 등이 표기된 동판을 제작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헌신에 감사와 예우를 전하는 의미에서 11월 11일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부산)에 맞추어 유엔평화공원에 ‘영웅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모든 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자 일류보훈으로 가는 기본” 이라며 “국가보훈부 승격에 걸맞게 품격 높은 보훈으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경제계와 함께하는 일류보훈 동행’으로 시작된 양 기관의 상호협력은 이번 협약으로 더욱 공고화되어 향후 주거개선 및 제대군인 일자리 지원 등 국가유공자 생활안정을 위한 복지증진 사업으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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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전문기자] 주모로코 한국대사관(대사 정기용)은 6·25 남침전쟁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북아프리카 모로코 군인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족은 6·25 남침전쟁에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하메드 벤 카두르 라스리(당시 병장·실제 모로코 이름은 무흐 벤카두르 엘 아스리)의 딸인 프테탐 엘 아스리(81)씨와 손녀다. 라스리씨는 1951년 3월5일 1037고지 전투 중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유해는 부산 유엔 공원에 안장돼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9월 프랑스 군사기록원 자료를 통해 라스리씨를 포함한 8명의 모로코 군인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6·25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고, 모로코 보훈처와 함께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나섰다. 6·25 남침전쟁의 숨은 영웅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윤종진 보훈처 차장이 지난해 12월 현지 방문을 계기로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적극 나선 모로코 보훈처는 몇달간의 조사와 확인 끝에 첫 성과를 냈다. 그러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라스리씨의 병적 상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달리 기재된 데다, 유족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소재 파악도 어려웠다. 딸인 프테탐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군복 입은 사진이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단 한 가지 단서였다. 프테탐씨는 "4살 때 입대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6·25 남침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부산 유엔 공원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모로코인 참전용사들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프랑스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된 이유다. 모로코 참전용사 확인 작업은 애초 2012년에 시작됐지만, 당시 모로코 측에서 관련 자료 확인에 난색을 보이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참전용사 확인은 2021년 정 대사가 엘렌 르 갈 당시 주모로코 프랑스 대사에게서 6.25 참전 모로코인 자료가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재개됐다. 이후 부산 유엔공원에서 모로코 출신 참전용사 2명이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 대사관측은 프랑스 참전용사 및 전쟁피해자 사무소(ONACVG)의 협조로 프랑스 군사 기록원에 남아있는 관련 기록을 확보, 지난해 처음으로 참전용사 8명의 존재를 찾아냈다. 정기용 대사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에 모로코 출신 6·25 참전용사 가족을 찾게 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추가로 참전 용사와 가족을 찾는 한편 모로코 내 학교 교재에 이 사실을 수록하고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후속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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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며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인보다도 백선엽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라며 “백 장군님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시어 현재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작금에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이 계속되는 속에서 출범하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참군인 김관진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 이 재단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틸러리 전 연합사령관, 권오성 육군협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국회 회의 때문에 늦게 도착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만든 분, 백선엽 장군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내신 분, 박정희는 오늘의 선진 경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축사를 시작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렇기 때문에 이 세분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라발전에 큰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입니다. 허나 지난 정권에서는 폄하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세분의 역사적인 공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본 장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의 일에도 분골쇄신의 각오로 절대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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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창군(創軍) 원로이자, 6.25남침전쟁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할 때에 다부동전투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만드시고, 평양 선두입성, 중공군의 공세 저지, 남부군 토벌 등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셨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중에 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어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과 제10대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지신 구국영웅이다. 미군은 지금도 백선엽 장군님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있다. 백 장군은 전역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해서 교통부 장관 재임시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내신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에 김관진 이사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公人)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 ‘제복의 영웅’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여러 추모 및 기념단체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초일류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백남희 여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훈부의 도움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창립하여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장군님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공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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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회관에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호텔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민식 보훈부 장관, 권오성 육군협회장, 이중근 부영그룹회장, 고현석 육군참모차장, 벤플리트 장군 손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홍두승 단장)의 식전 공연에 이어 초대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녀이자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2부에서는 김재창 장군의 ‘가까이서 본 선배 백선엽 장군’과 유광종 대표의 ‘백선엽,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주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다부동 대첩 및 평양입성 전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던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의 박형수(94세) 회장과 김주찬(94세) 부회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전장 실상을 이야기할 때와,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가 환영사로 대한민국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며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한 백선엽 장군과 인연을 맺였던 청년 대표와 연평해전 전사자 서정우 하사의 모친의 플로어 맨트도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땐 국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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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북한은 임인년 새해 들어 평양 순안비행장 등에서 미사일 발사 무력 시위를 네 차례 감행하면서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핵실험 및 ICBM발사를 재개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이 북한의 최근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소집을 요청했고, AFP통신은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알바니아,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멕시코가 미국의 안보리 회의 요청에 동참했다고 보도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도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북한에 대한 압력을 계속 높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미 국무부 대변인 네드 프라이스은 1월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여러 결의안을 위반하는 것이며, 북한의 이웃 국가들과 더 넓은 국제 사회에 위협이 될 것입니다"라고 발표했고, 존 커비 국방부 대변인 역시도 현지시간 18일 언론 브리핑에서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 시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이 위협을 평가절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 합참 발표에 따르면 미사일은 이날 8시50분부터 4분 간격으로 발사됐고 미사일의 최대 속도는 마하5 정도였다. 합참 관계자는 “북한군은 현재 동계훈련 중”이라며 “동해상 표적을 선정해 정밀도를 향상하고 연속 발사 성능 점검 등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발사 표적에 대해선 지난 14일 북한이 열차형 미사일로 명중시켰다며 사진까지 공개했던 함경북도 길주군 무수단리 앞바다의 무인도 ‘알섬’이 거론된다. 당시 북한은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KN-23을 열차형 발사대에서 쐈다. 특히 순안비행장은 2017년 8월 북한이 화성-12형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을 발사했던 곳이다. 당시 이 미사일은 최대 고도 550㎞로 2700㎞ 정도를 비행하며 일본 홋카이도 상공을 통과해 북태평양 공해상에 도달했다. 개활지인 순안비행장은 한·미의 탐지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점에서 2017년과 마찬가지로 대외 시위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제버릇 남 못준다”는 우리 속담처럼 70년전 민족상잔의 6·25남침전쟁을 일으켰던 북한이 또 전쟁을 감행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아무런 대응도 없이 강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는 현정부가 심히 걱정된다. 군사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17일 북한이 쏜 단거리 탄도미사일 두 발은 약 42㎞ 고도로 380㎞를 날아가 동해상 표적을 겨냥했는데 만일 남쪽으로 발사했다면 육·해·공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까지 닿는 거리이기 때문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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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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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약 70여년 전이며 휴전협정 체결로 6·25남침전쟁이 끝난 그해인 1953년 11월27일 부산역이 있던 중구일대에서도 대형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휴전을 맞아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서울로 정부가 옮겨 가긴 했지만, 여전히 부산 일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전쟁 피난민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화재 사건의 시발점이 된 중구 영주동 일대에는 피난민들이 만든 임시 천막으로 가득 차 있었고, 늦가을 건조한 날씨에 불이 딱 붙기 좋은 목조 건물이 밀집된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판자촌에서 일어난 작은 화재였는데 갑자기 불어온 강풍으로 지역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며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 당시 부산의 도심이었던 부산역~ 중앙동~ 동광동-영주동~대청동입구 일대가 거의 전소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 6시경 잡혔으나, 29명의 사상자와 6천여 세대 3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주택 3,132채 및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옛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돼 버렸다. 그 화재는 ‘부산역전 대화재’로 기록되었고 전쟁의 악몽을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설상가상 부산 피난민들을 다시금 절망의 늪에 빠뜨린 대참사였다. 대참사 이후 부산역은 1965년까지 10년 이상 가건물을 사용했으며, 부산역 신축을 위해 1965년 7월 23일 초량역의 영업을 정지하고 부산진역으로 통합하여 운영했다. 1969년 초량에 부산역이 신축 완공됨과 동시에 명실공히 부산의 종점 부산역으로서의 업무를 다시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신축된 현 부산역은 초량역 위치가 아니고 3부두 옆의 물웅덩이 해변을 매립한 곳이다. 이 화재에 앞서 1953년 1월30일에도 국제시장 대화재가 발생하여 국제시장이 전소되고 부평동, 신창동, 광복동 일부가 피해를 입는 큰 참화가 있었다. 이 국제시장 대화재와 부산역전 대화재를 같은 화재로 착각하여 국제시장, 남포동, 광복동까지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된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1954년 12월 용두산공원 판자촌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3명이 사망하고 192명이 부상 당하는 등 많은 판자촌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궁중 유물을 임시 보관했던 국악원 창고가 전소돼 상당수의 유물이 타 버렸다. 이러한 사유로 그 당시에 사람들이 "부산이 아니고 불산이라고 불러야겠다"고 우스게 소리로 얘기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벽안의 미 2군수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면서 군수창고를 개방해 천막과 구호물자를 꺼내어 이재민들을 도왔던 역사적 사실이 감동을 주고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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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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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2)]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 작전에 종군했던 외신기자들은 우리 해병대가 이러한 기습적인 상륙작전으로 우세한 적군을 공격해서 적의 점령지를 탈환한 전례는 일찍이 없었다며 통영상륙작전의 대승을 높이 평가하는 특필보도로 저마다 최대의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50년 8월23일 통영상륙작전에 대한 취재차 원문고개로 김성은 부대를 방문한 미국 '뉴욕해럴드 트리븐' 신문의 기자 '마가렛 히킨스'는 전광석화 같은 김성은 장군의 묘수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당신들은 정말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냈소”라는 말로 감동을 표현했다. 그녀는 6·25 남침전쟁 발발 후 후퇴를 거듭하며 고전하는 상황속에서 오히려 기습적인 공격을 시도하여 승리한 김성은 부대의 작전에 찬사를 보내며 ‘귀신이라도 잡겠다(The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라는 기사 제목의 승전보를 전세계에 보도했다. 이렇게 통영상륙작전에서 한국해병의 감투 정신을 두고 "귀신이라도 잡겠다"는 기사를 널리 보도함으로써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의 유래가 되는 씨를 뿌려놓은 계기가 되었다. 통영 원문고개 생활공원에 세워진 전적비와 통영상륙작전 기념관에서는 매년 기념식과 추모식이 열리며, 이를 통해'귀신 잡는 해병대' 명성을 얻은 김성은 부대의 맹활약상을 기리고 있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김성은 장군을 비롯한 참전 선배들의 충정에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또한 현재 자유민주주의 행복을 누리는 우리들은 그들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전쟁 영웅분들의 명예 고양은 물론 국민들의 나라사랑 의식을 고취하는 이같은 행사가 이 곳 통영상륙작전 전적지 뿐만 아니라 타 격전지에서도 지속적으로 추진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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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2)]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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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1)]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해병대가 먼저 매일봉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던 적은 계속 매일봉을 향해 전진해 오고 있었다. 이때 선점하고 있던 김성은 부대 7중대가 맹렬한 사격과 치열한 육박전도 불사하며 공세 행동을 감행함에 당황한 적은 필사적으로 대응했으나 더이상 전진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산돼정양리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8월18일 12시부터 해군함정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8월19일 10시까지 통영시내로 진입하며 치열한 소탕작전을 벌여 잔적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해병대 김성은 부대의 적극적인 소탕작전에 전의를 상실한 적은 퇴로인 원문고개도 이미 차단당하자 목선 3척을 이용하여 해상으로 도주하다가 해상을 경비하던 504·512호정에 의해 격침되었다. 이 작전 결과로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에 보급이 끊기지 않게 유지시켰고, 통영반도를 먼저 확보한 뒤 거제도도 점령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견내량 해협을 건너 마산항과 진해항을 봉쇄하려던 북한군 지휘부의 의도도 좌절시켰다. 또한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 따발총 128정, 아식소총 107정, 권총 13정, M1소총 3정, 기관단총 14정, 박격포 2문, 지프차 2대, 트럭 10대, 전화기 5대 등과 많은 포탄·수류탄 등을 빼앗는 대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은 15명이 전사하고 47명만 부상을 당했다. 이 통영상륙작전은 우리 해군·해병들이 최초로 성공시킨 단독 적전 상륙작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이 후퇴 및 철수를 반복하며 방어만 하던 중 유일한 공격작전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1950년 9월23일 유엔군이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인천으로 출항할 때까지 통영을 평정하며 반격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에도 기여하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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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1)]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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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0)]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성은 부대장은 거제도 서해안을 방어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작전상 유리하다고 판단하였고, 전병력을 장평리에 상륙시킨 후 일부 병력을 원문 고개로 진출시켜 적의 후속부대를 저지하고 주전력은 통영 시내에 침입한 적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김성은 부대는 먼저 1950년 8월16일 22시에 해군함정 512호정과 평택호에 나누어 타고 출발하여 17일 새벽 3시 통영반도 동북방 1㎞ 지점에 있는 지도(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함정 703·901·504·512·302·307호정 및 평택호 등의 지원 엄호하에 주병력을 8월17일 18시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장평리에 상륙하며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적은 해병대가 통영항구 정면으로 상륙할 것으로 판단하고, 고지에 배치하였던 병력을 통영 남해안 일대에 집결시켜 해안선에 배치시켰으므로 접전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한편, 해군함정들은 협조된 계획에 따라 통영항 내에 접근하여 매일봉·남망산 및 부두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해병대를 상륙시킨 512호정과 평택호도 남하하여 함포 사격에 가담하였다. 상륙 후 공격을 개시한 ‘김성은 부대’ 2중대와 3중대는 각각 목표 지점을 접전 없이 점령하였고, 상륙부대의 내륙 진출에 따라 해군잠정 901정은 원문고개 서측만으로 깊숙히 침투하여 통영시내로 진입하려는 적의 후속부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고성에서 원문고개로 통하는 진로를 포격하였다. 동시에 해병대는 밤을 세워 가며 맹렬한 공격 작전을 감행하여 8월18일 새벽에 2중대가 유일한 공격로이며 전술상 요지인 원문고개를 점령하여 적의 통영반도 진출입을 차단했다. 또한 7중대는 통영전투에서 승패의 관건이 되는 매일봉(망일봉)을 점령하여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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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0)]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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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9)]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50년 8월에 접어들자 전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포항 외곽에서, 중부 전선에서는 왜관 등지에서 혈전이 계속되었고, 서부 전선에서는 진동리로 기동하는 적이 마산·진해·부산을 위협하고 있었다. 서부지역의 진동면을 공격해 마산과 진해의 점령을 꾀했던 북한군은 진동리지구 전투에서 ‘김성은 부대’의 굳건한 방어와 맹렬한 역공에 의해 공격 기세가 꺾여 본래의 의도인 마산·진해·부산 등지로 직접 공격하여 낙동강 전선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것이 좌절됐다. 이에 일부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 무방비상태에 있던 놓여 있는 통영반도를 먼저 확보한 뒤 거제도도 점령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해 견내량 해협을 건너 마산항과 진해항을 봉쇄하는 것으로 작전을 전환하였다. 예상한 바와 같이 1950년 8월16일 미명을 기하여 고성으로부터 통영으로 향한 북한군 7사단 51연대와 104치안연대의 650명이 1950년 8월 17일 새벽 1시통영시내로 침입해 왔다. 이와 같이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즉시 거제도에 상륙하여 통영으로부터 거제도로 공격하려는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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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9)]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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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8)]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해병대의 진동리지구 전투는 1950년 8월3일,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북한군 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등 계속된 전투를 통해 적 사살 171명, 포로 8명, 그리고 각종 무기 110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며 북한군 6사단 공격의 예봉을 꺾고, 마산을 점령하여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와해시키려는 적의 기도를 완전히 무산시켰다. 또한 1949년 해병대 창설이래 최대 전공을 세우게 되었으며, 이어 치룬 통영상륙작전의 대승도 함께 공로로 인정되어 전투에 참가한 부대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했다. 해병대 사령부는 1992년 이 진동리지구 전투를 기념하는 전첩비를 대한민국 해병대가 피땀흘려 싸웠던 그날의 전적지가 보이는 이곳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지산리에 세웠다. 2017년 개최된 해병대의 진동리지구 전투 기념식에서 전진구 해병대사령관은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조국의 평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치신 호국영령들의 영전에 머리숙여 명복을 빌며, 참전영웅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추모했다. 이어서 그는 "우리 해병대는 국민의 신뢰와 성원을 바탕으로 선승구전의 능력과 태세를 완비하여 만약 적이 도발한다면 해병대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응징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후손들이 자유롭고 마음껏 꿈을 펼칠수 있도록 가장 강하고 튼튼한 국방의 임무를 완수하는 '호국충성 해병대'가 될 것을 다짐한다"라고 밝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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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8)]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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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7)]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6·25 남침전쟁 발발 후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8월 들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고, 남하한 북한군 6사단은 진주-사천-고성을 거쳐 마산을 다음 공격목표로 삼고 예하 6사단 정찰대대는 마산 입구인 진동리까지 진출했다. 마산을 못 지키면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위기에서 8월1일 서부지구전투사령부로부터 진동리 서방에서 적을 저지 및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성은 부대’는 다음날 고사리 지서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적정 파악을 위한 정찰을 실시해 2중대를 부현에, 3중대를 고사리 남방 428고지 서측에 배치했다. 8월 3일 북한군 정찰대대가 전차를 선두로 진동리를 향해 다가오자 335고지의 7중대와 428고지의 3중대는 맹렬한 화력을 집중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진동리에서의 첫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성은 부대는 이후 미 25사단 예하 24연대에 배속돼 마산방어에 투입됐다. 부산 서방 50킬로미터에 위치한 마산은 부산 서측방의 관문으로 마산 방어의 성패는 부산 교두보 확보와 직결되는 전략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미 8군사령부는 적의 주공이 대구 전선에 집중되자 이를 분산시켜 압력을 완화할 목적으로 미 25사단에 역습을 명령했다. 이에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는 ‘미 24연대는 킨(Kean) 특수임무부대의 예비대로서 서북산 일대를 공격해 진동리-함안 도로를 확보한다’라는 기동계획에 의거 다시 8월5일 15시 30분경 진동리에 도착했다. 이윽고 마산-진동리 가도의 타격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병 7중대는 적이 진출해 있던 340고지를 공격했다. 7중대는 적진 최단거리에 접근해 일제히 수류탄전을 거듭하면서 적진을 돌파, 피아 식별이 어려운 진내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과감한 육박전을 감행해 다음날 13시 10분에 전략상 요지인 340고지를 탈환하고 미군에 인계한 다음 진동리로 철수했다. 이후8월7일부터 미 육군 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방어작전시 공세활동의 일환으로 진주 방향에 대규모 역공격(1950.8.7.~ 8.12.)을 실시하는 동안, 우리 해병대는 서북산 일대의 적을 격퇴하여 진동리와 마산 간보급로에 대한 적 위협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했다. 이후 마산에서 다시 미 24사단으로 배속된 김성은 부대는 진해로부터 병력을 보강 받아 재차 진동리로 이동했다. 8월 10일 새벽에 또 해병의 방어진지로 공격을 재개한 적들을 2시간 이상이나 계속된 혈전 끝에 격퇴시키고 날이 밝자 도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아침 8시를 기해 해병대의 공격목표인 서북산 능선일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포격의 지원 속에 이곳을 완전히 장악해 마산으로 통하는 보급로를 확보한 해병대는 이 지역을 미 25사단에게 인계하고 다음 전투지인 중암리로 이동했다. 중암리 전투에서도 대승한 ‘김성은 부대’는 8월14일 진해로 개선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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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7)]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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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6)]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지리적여건의 특성과 ‘여순10.19사건’ 진압작전의 교훈에 따라 상륙작전을 수행할 부대의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1949년 4월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가 드디어 창설되었다. 대령 진급과 동시에 초대사령관으로 임명된 신현준은 하얼빈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이 만주에 세운 봉천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의 대위로 근무했으며 간도특설대의 간부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현준은 8.15 광복 후 잠시 광복군에 편입되었다가, 귀국하여 1946년 조선해안경비대로 입대한 뒤 해군 중위로 임관하였다. 같은 해 인천기지사령관을 거쳐 1948년에는 진해특설기지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해병대가 창설될 때 초대사령관직을 맡았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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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6)]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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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5)]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관으로 진압군을 지휘했던 송호성 준장은 해방전에는 중국군에서 기병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역임했고, 1942년 한국 광복군에 들어가 5지대장을 지냈으며 1948년 8월15일부터 11월20일까지 대한민국 육군총사령관직을 수행했었다. 그러나 고령이었던 송 준장은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에 사령관직을 내려놓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으며 갓 조직된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이라는 아무 실권도 없는 자리에 있었다. 그는 곧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에게 잡혔고, 그들의 강요에 의해 국군의 북침설을 KBS에서 방송했으며, 이후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패주할 때, 송 장군은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그후 북한 정권에 이용만 당하다가 1958년에는 반혁명분자로 규정되어 평안남도 양덕의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년 뒤인 1959년 70세의 나이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아울러 여순사건에 따른 이승만 정부의 위기감은 군내의 좌파 세력을 색출하고자 하는 숙군사업의 강화로 이어졌고, 그 결과 5% 가량의 장병들이 군을 떠났으며, 이듬해인 1949년에는 '귀신 잡는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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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5)]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