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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 ‘9·19 군사합의’ (하)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이 군사합의에 따르면 금번 무인기의 도발은 명백한 합의사항 위반이다. 특히 이번 무인기 도발은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도 “정찰, 감시를 넘어 언제라도 폭탄과 화학무기 등을 이용한 기습 공격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예상을 가능케 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북한의 군사합의를 무시한 북한의 군사적 행동들이 여럿 있었다. 지난 10월 북한은 야음을 틈타 군사합의가 설정한 비행금지구역 코앞까지 군용기를 내려보낸 데 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인 탄도미사일 발사에 나선 다음 9·19 군사합의를 명시적으로 위반하는 완충구역 내 방사포 등 포병 사격까지 감행했다. 이제 더이상 북한의 선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지난 정부에서 그토록 자랑하던 9·19 군사합의는 북측의 계속되는 위반으로 무실화를 넘어 폐기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번은 실수로 볼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합의사항 이행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명백한 의도로 보아야 한다. ◀김진형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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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 ‘9·19 군사합의’(상)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 전문기자] 합동참모본부는 26일 오전 10시 25분경부터 미상 항적 수 대가 인천 강화군, 경기 김포시, 경기 파주시 인근 MDL을 넘어 우리 영공에 침입한 사실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합참은 일부 무인기가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민간인 지역까지 비행했고, 일부는 육안으로 식별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북한 무인기 5대가 2014년 이후 처음으로 우리 영공을 침범해 서울 상공까지 침투한 것이다. 우리 군의 대응 작전으로 인천국제공항과 김포공항의 민항기가 한때 이륙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이 일체의 군사적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합의했다. 바로 ‘9·19 군사합의’이다. 핵심 내용은 △일체의 적대행위 중지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 △서해 해상 평화수역화 △교류협력과 접촉 왕래 활성화를 위한 군사적 보장대책 강구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강구 등 5개 분야에 걸친 합의사항을 합의문에 담았다. 합의서 1조 3항을 상기해 보면, 쌍방은 2018년 11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상공에서 모든 기종의 비행금지구역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기로 했다. “고정익항공기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동부지역은 40km, 서부지역은 20km를 적용하여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다. 회전익항공기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10km로, 무인기는 동부지역에서 15km, 서부지역에서 10km로, 기구는 25km로 적용한다”라고 명기됐다.(하편 계속)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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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미사일 대비해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절실(하)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둘째, 한반도 안보 문제에 한국이 직접적 당사자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은 미·일 동맹을 기반으로 한 안보공동체다. 그러나 한반도 안보 문제에 미·일 두 나라가 따로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 문제,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이 제외된 협력체계가 가동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이 중심에 서서 한반도 문제를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우리 문제가 다른 나라에 의해 간섭받고 심지어 배제된 뼈아픈 경험이 있다. 현재 우리의 군사력·경제력·외교력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일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 있게 한반도 문제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한·미·일 및 한·일 군사 협력은 한국이 먼저 적극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2016년 체결됐지만, 문재인 정부 시절 논란이 됐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정상적 복원을 통한 한·일 및 한·미·일의 원활한 정보 소통체계를 구축하고 군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한·미·일 군사협력 체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확고한 한·미 동맹에 기반을 둔 한·미·일 군사협력, 군사 동맹이 아닌 한·일 군사협력이 담대하게 추진된다면 북한의 도발 억제는 물론 안정적인 한반도 상황 관리가 가능해진다. 글로벌 중추 국가를 위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노력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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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미사일 대비해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 절실(상)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한국과 미국·일본 국방부 장관은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미사일 경보 훈련과 탄도미사일 탐지·추적 훈련 정례화 등 대북 공조 방안에 합의했다. 3국 장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 정착을 달성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자는 약속도 했다. 이를 놓고 일각에서는 일본의 군사 대국화와 연계하며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한·미·일 3국의 무기 시스템과 국제정치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이제는 한·미·일 군사 협력에 대한 담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9, 10월 북한의 계속된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한국 해군과 미국 핵 추진 항공모함,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참가한 3국 연합훈련이 동해에서 두 차례 진행됐다. 북한은 지난 10월 이후 항공기·탄도미사일과 포병 사격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발했다. 특히 지난달 14일에는 화성-17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북한은 핵 탑재가 가능한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뿐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도달 가능한 ICBM을 발사함으로써 미사일 능력을 과시했다. (중편 계속)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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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리딩코리아, 책 읽는 군인으로 강한 군인 만들기,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전문기자] 사단법인 캠프리딩코리아와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는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는 신병들에게 배부할 1,850여 개의 ‘책꾸러미 전달식’을 실시했다. 책꾸러미 전달식에는 캠프리딩코리아 정병국 대표와 유성욱이사,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민승현 본부장 그리고 박원호 육군훈련소장이 참석하였으며, 코로나19 확산방지 차원에서 최소인원으로 진행되었다. ‘책꾸러미’는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에서 제작한 독서가이드북 및 독서노트와 양서 1권 등 총 3권으로 구성된다. 양서는 신병들이 서로 돌려볼 수 있도록 젊은 세대가 좋아하고 시중에서 도서판매 순위가 높은 70여 종의 신간 서적이 전달됐다. 책꾸러미 전달은 '책 읽는 군인'으로서의 힘찬 출발을 지원하는 독서진작 프로그램이다. 입대와 함께 독서를 경험하게 하고 책 읽은 습관을 갖도록 하여 병영독서문화로 발전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입대 장병과 가족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캠프리딩코리아 정병국 대표는 “입시 위주의 교육과 취업 준비 등으로 바빴던 청년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독서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은 병영문화를 선진화하여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미래의 리더를 육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책꾸러미는 매년 12만 명의 청춘이 정예 용사로 다시 태어나는 정병(精兵) 육성의 요람 육군훈련소에서 병영독서문화를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또한 장병들이 군 복무 기간을 사회 진출을 대비하는 유용한 자기계발의 기회로 만들 뿐만 아니라 독서를 통해 열린 병영, 소통하는 선진 군대문화 조성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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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0)]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상징 명칭이 ‘열쇠부대’로 불리는 5사단은 1948년 4월29일 경기도 수색에서 3, 4, 9연대를 기반으로 5여단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후 여단 주둔지가 전라남도 광주로 변경되었고, 1949년 5월12일, 5보병사단으로 승격했다. 이때 15, 20연대가 사단으로 배속되었다. 초대 사단장은 송호성 준장. 이후 1949년 7월에는 백선엽 대령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사단은 15연대를 전주에, 20연대를 광주에 주둔시켜 빨치산 토벌을 주 임무로 하며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였고,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후 1950년 6.25남침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의 소환으로 서울 용산에 올라와 북한군 남하 지연작전에 참여하였다. 이 시점에는 백선엽이 1사단으로 옮겨가고 이응준(군영1기) 준장이 사단장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말이 지연전이지, 닥치는 대로 투입하라는 채병덕 총장의 삽질 작전지시로 말미암아 예하 부대들은 사단장조차 모르는 사이 많은 병력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와중에 2개 대대로 부대 건제를 유지했던 15연대는 1개 대대만 남은 1사단 13연대 재건을 위해 해체되고, 20연대 역시 창동 - 미아리 축선 방어전을 위해 한강 이북에 투입되었다가 전멸하여 지휘 가능한 연대들이 사실상 없어졌다. 그래도 남은 병력들을 긁어모아 7월1일부터 시흥전투지구사령부 예하부대로서 지연전을 전개하며 철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나마 있던 병력들까지 분산되어 17일에는 기어이 사단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후 1950년 10월8일 대구에 주둔 중이던 27연대, 마산에 주둔 중인 35연대, 부산에 주둔 중인 36연대를 근간으로 대구에서 5보병사단을 재창설하였고, 이 연대들이 지금까지 이르게 됐다. 다시 재창설된 5사단은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루었는데, 그 중 36연대가 미 2사단 예속으로 치룬 ‘피의 능선 전투’와 ‘가칠봉 전투’가 유명하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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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5)]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관으로 진압군을 지휘했던 송호성 준장은 해방전에는 중국군에서 기병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역임했고, 1942년 한국 광복군에 들어가 5지대장을 지냈으며 1948년 8월15일부터 11월20일까지 대한민국 육군총사령관직을 수행했었다. 그러나 고령이었던 송 준장은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에 사령관직을 내려놓고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으며 갓 조직된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이라는 아무 실권도 없는 자리에 있었다. 그는 곧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에게 잡혔고, 그들의 강요에 의해 국군의 북침설을 KBS에서 방송했으며, 이후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패주할 때, 송 장군은 북한으로 납북되었다. 그후 북한 정권에 이용만 당하다가 1958년에는 반혁명분자로 규정되어 평안남도 양덕의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년 뒤인 1959년 70세의 나이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아울러 여순사건에 따른 이승만 정부의 위기감은 군내의 좌파 세력을 색출하고자 하는 숙군사업의 강화로 이어졌고, 그 결과 5% 가량의 장병들이 군을 떠났으며, 이듬해인 1949년에는 '귀신 잡는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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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5)]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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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4)]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해병대 창설의 계기가 된 ‘여순 10.19사건’은 1948년 10월 19~27일 간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이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는 1946년 2월15일 광주에서 편성된 4연대가 모체이며, 여기에는 여순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지회, 홍순석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도 지창수 등 사건을 직접 주도하게 되는 부사관들도 포진하고 있었다 또한 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도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창군 이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전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이같은 인식은 국군 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1947년부터 14연대의 관할 지역인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는 군·경간의 물리적 충돌이 세 차례나 발생하였으며,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종결되었다. 이는 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4연대의 반란은 좌익 계열 숙군의 위협과 연대의 제주도 파병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연대 내 남로당계 부사관들의 급조된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10월 19일 오전 7시 육군본부로부터 14연대에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항 명령이 하달되자 이 날 저녁 장교들이 부재한 틈을 타 부대원들을 연병장에 소집시킨 지창수는 연단에서 “경찰을 타도하고,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자”며 부대원들을 선동하였다. 대부분의 사병들이 여기에 찬동하였고, 반대파는 즉각 사살되었다. 지창수를 신임 연대장으로 추대한 반란군은 즉시 여수로 진격하였다. 이때 반란에 참여한 인원의 수효에 대해서는 1,000~2,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던 여수는 쉽게 함락되었고, 반란군은 다시 병력의 대다수를 열차로 이동시켜 20일 오후에는 순천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의 2개 중대와, 광주 4연대 소속 진압군도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사기가 높아진 반란군은 주변 지역으로 공격을 속행하였으며, 그 결과 22일에는 전남 동부 지역의 6개 군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경찰에 의한 고문 등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던 좌익 청년들은 지역의 우익 인사·경찰관 및 그 가족을 보복심에 살해하기도 하였으며, 인민위원회에 의해 경찰서장 등의 우익 인사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우익 인사들에 대한 보복·숙청 외에도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식량배급 등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20일에 개최된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는 광주에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부’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진압군 지휘는 육군총사령관(육군총참모장) 송호성 준장이 맡았고, 총 11개 대대가 진압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반란군과 진압군 간의 첫 교전이 순천시 서면 학구리에서 벌어졌고, 초전에 승리한 진압군은 그대로 진격하여 23일에는 순천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의 주력은 순천에서 도주하였으며, 진압군에 대항한 것은 잔여 병력과 무장한 시민들이었다. 이후 진압군은 기세를 몰아 인근 광양과 보성까지 수복하였다. 10월 24일, 반란군 토벌사령부의 송호성 준장이 이끄는 여수 공략부대는 여수시 미평동 일대에서 반란군의 기습을 받고 잠시 후퇴하였다. 여수 공략전이 잠시 소강 상태에 빠진 사이 지창수가 이끄는 반란군은 백운산과 벌교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작전 속행을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은 10월 25일부터 재차 탈환 작전에 나섰다. 장갑차,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4개 대대 가량의 병력과 항공기, 경비정이 동원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신현준 중령이 이끄는 해군 함대도 출동했다. 결국 10월27일 진압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여수를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은 11월경부터 진압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는 등 게릴라(빨치산)로서 활동하였다. 이에 국군은 이듬해까지 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을 사살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활동은 1950년 초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인명 피해도 끊이지 않았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이어졌던 여순사건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남겼다. 대략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됐고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천 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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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4)]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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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3)]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해병대 출신 최초로 국방장관을 지낸 고(故) 김성은 장군(1924년 3월14일~2007년 5월15일)은 19세의 나이로 만주 하얼빈 농대를 수료한 엘리트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1일 해군병학교를 특임으로 졸업하고 해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한편 해병대는 1948년 ‘여순 10.19사건’ 이후 상륙작전 부대의 필요성에 따라 창설됐다. 이는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해군 함대를 이끌고 출동한 신현준 중령의 “상륙군 없이 반란군을 완전 진압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 그리하여 해병대는 1949년 4월15일 진해에서 380명의 규모로 창설되었고 초대사령관에 신현준 대령이 임명되었다. 해병대사령부 창설당시 중령으로 진급한 김성은은 참모장으로 보임되어 해병대의 육성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공비토벌 지휘관에 임명된 그는 지리산에 근거한 진주 일대의 공비를 소탕했고,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해 한라산 일대의 공비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김 중령은 500여명의 해병대원으로 구성된 ‘김성은 부대’를 지휘해 전쟁 초반 남원·함양·진주지구에서 지연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마산 진동리 전투와 통영 상륙작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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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3)]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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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2)]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62주년 전승 기념행사'와 '전승 기념비 제막식'이 2014년 11월13일 오전에 열렸다. 중공군과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운 해병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행사는 국민의례, 헌화와 분향,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의 회고사, 기념사, 전승 기념비 제막식 등 순으로 진행됐다. 전승 기념비에는 당시 전사한 해병대 776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비 중앙에 495일간의 치열한 전투 장면을 도드라지게 새긴 양각화, 좌우에 '상승해병'과 '무적해병' 휘호, 비문과 헌시 등이 조각됐다. 해병대 제1전투단 부단장으로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 참여한 공정식 전 사령관은 "현재 도라산 전망대 자리인 지하 참호에서 495일간 밤을 지새우며 중공군에 맞서 개성∼판문점∼서울축선의 수도권 서북방을 지켜냈다"고 회고하며 "오늘 행사로 776위의 해병 호국영령의 아픔이 깃든 이 자리가 해병 용사들의 성지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영주 해병대사령관은 기념사에서 "선배 해병들은 '서울 전방의 전선을 사수하라'는 국가의 명령에 서울의 관문을 굳건히 사수했다"며 "앞으로도 임전무퇴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도권 서부와 서북 도서를 지켜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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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2)]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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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1)]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귀신 잡는 해병'신화를 만들며 통영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과 9.28서울 수복을 위한 연희고지와 104고지 전투에서도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김성은 대령(해사1기, 전 해병대사령관/국방부장관)이 1952년 10월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수도권 관문이자 당시 교착상태에 빠진 사천강-장단지구의 지휘관으로 발령받은 그는 함께 배치된 군목이었던 김덕순 목사와 함께 3일을 기도한 뒤, 중공군에 대한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적들이 예상하지 못한 기습적인 ‘귀신 잡는 해병’의 공격으로 중공군 2,700여 명을 전멸시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종국에는 서부전선에서의 수도권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현재의 군사분계선(MDL)으로 확정되게 만들었다. 이처럼 6.25 남침전쟁 전 기간에 걸쳐 명장으로서 명성을 드높인 김성은 장군은 부하에 대한 사랑도 특별했다. 연일 계속된 전투로 기진맥진한 부하들의 참호를 일일이 찾아가 독려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함으로써 부하들이 안도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게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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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1)]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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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0)]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끝없이 지루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근식 중위가 작전보좌관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연대본부는 특별히 포병대대에서 발전시킨 ‘Box Means’ 전법을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일종의 진내사격으로 적을 방어진지 내부로 끌어들이고 우리 해병 전원이 진지 중앙에 파놓은 동굴 속으로 대피하면 포탄에 VT신관을 장착한 포병사격으로 공중에서 폭발시킨 포탄에 의해 진지내에 진입한 중공군을 살상하는 방법이었다. 각 대대장과 작전장교를 연대의 관측소(OP)가 있는도라산 155m고지에 집합시켜 이 전법에 대해 사전 회의를 했다. 특히 아군이 대피하는 시간과 적들이 노출되었을 때 포격하는 시간의 정확성이 매우 중요했다. 자칫 잘못하면 아군의 피해가 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공군의 공격이 집중되던 전초진지 36m고지에 계획을 했고 어느날 자정무렵 공격해온 적들과 교전을 하던 해병들은 신호에 의해 일제히 대피동굴로 피신했다. 이어 VT신관을 장착한 105mm야포사격으로‘Box Means’ 전법이 시작됐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점검해보니 완전히 집단 도살을 당한 것처럼 진지 주변 일대에는 적들의 시체가 산재해 있었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 다음날 인접 전초진지에서도 ‘Box Means’ 전법은 또 적중했다. 연대는 이틀 간 계속된 성과에 만족했고 우리 해병 장병들도 오랜만에 그들의 피로를 풀고 지루함도 달랠 수 있었다. 그후 일과 처럼 매일 공격해 오던 적들의 야간 공격이 뜸해졌다. 반면에 우리 해병연대가 이 작전 성공에 만족했고 기뻐하며 방심한 것이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며칠후 중공군은 다시 전초진지로 야간공격을 했는데 종전의 방법대로 응전하다가 전원이 동굴로 대피했을 때 이번에는 포병사격이 지연되었다. 이때 적들은 미리 준비해 온 폭약장치통을 해병 대피호 속에 박고 폭파시켰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함몰된 대피호 속의 해병들은 모두 매몰됐고 중공군들은 포병사격 전에 신속히 철수해 버렸다. 그때 연대본부에서는 교신이 두절된 전초진지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전초진지에 가보니 진지 중앙부가 함몰되어 있었고 폭파로 매몰돼 전사한해병들을 발굴할 때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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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0)]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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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9)]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이근식 중위가 연대 작전보좌관으로 보직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측 대대의 전초진지 87m고지 쟁탈전이 시작되어 그 치열함이 처절했고 몇주간의 전투 끝에 결국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87m고지를 장악한 중공군은 좌일선 방어 임무를 교대한 5대대의 전초진지 50m고지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특히 야간 공격시 중공군중기관총의 예광탄이 파란 불빛을 내며 50m고지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은 도깨비불처럼 보였다. 우리 기관총 예광탄은 붉은 빛을 내나 중공군은 파란색이라 금방 식별할 수 있었다. 사실 피아간 정면에넓은 개활지가 있어우리 진지 전방에서의 활동은 높은 감제고지에 있는 중공군에게 모두 관측되어 주간전투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따라서 야간공격을 시도했는데 천연장애물인 사천강으로 인해 좌측대대의 야간 공격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또한 서해와 인접한 사천강은 조수간만의 시간이 일정하기 때문에 중공군들은 우리의 야간공격 예상시간에 대비할 수 있었다. 만약 전투가 계속되어 사천강 만조 전에 도강을 못하게 되면 공격중대는 휴대한 병기나 장구를 강변에 버리고 도강해야 됨으로 시간에 쫒기어 공격 성과가 기대에 못미쳤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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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9)]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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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8)]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류탄 돌격 소대장’으로 불리며 도솔산 전투의 영웅이었던 이근식 중위는 장단·사천강지역에서 약4개월간의 5중대장 근무를 했다. 그런데, 치열한 접전을 치룬 우일선 대대와는 달리 그가 소속된 좌일선 2대대는 이렇다 할 결정적인 접전없이 보냈다. 다만 한미 보전협동 수색정찰 시와 중대본부에 적의 포탄 낙하로 인한 피해만 입은 상황이었다. 이후 그는 연대의 요청으로 작전보좌관 직책으로 전속되었다. 연대 작전보좌관은 당시의 모든 중대장들이 동경하고 희망하던 보직이었다. 그는 연대 작전보좌관직을 맡은 처음에는 작전계획서 작성 등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해병 소위로 임관 후 소총소대장, 중대장을 하면서 전투만 했으니 이러한 참모 직능에 대해서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근식 중위를 요청했던 부연대장 남상휘 중령(예비역 준장, 전 포항기지사령관)의 지도로 1개월 정도 지나자 점차 극복하여 참모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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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8)]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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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7)]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1953년 정전협정이 채결될 때까지 중부전선을 중심으로 휴전선 전면에서 피아간의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진행되었고, 이 기간중에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를 편제한 육군의 독립 전차중대는 1951년 10월부터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육군은 먼저 동해안 1군단에는 51, 56, 60 전차중대, 중부전선 2군단에는 52, 55, 58 전차중대, 그리고 금화, 철원, 연천지역의 육군 보병사단에는 53, 57, 59 전차중대를 배치하였다. 육군 입장에서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전차부대는 1951년 10월 5일에 창설된 51, 52전차중대로 교육용 전차를 인수하고 전차병 교육과정을 거쳐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를 편제했다. 게다가 육군의 전차중대는 해병대 보다도 8개월이나 먼저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해병대는 육군보다 2개월 빠른1951년 8월 25일에 전차중대를 창설했지만 전차와 전차병은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듬해 5월 4일 경기도 파주에서 해병 1연대 전차부대의 교육 수료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미 해병대로부터 인수한 M4A3E8 셔먼 중형전차 20대로 완전한 전차중대를 편성하였다. 해병대 입장에서는M36 잭슨은 전차가 아닌 대전차 자주포이기 때문에 1951년 8월25일에 전차부대를 창설하여 1952년 5월4일에 M4A3E8 셔먼 중형전차를 편제하였고 이후 전선에 투입된 해병1연대의 전차중대가 국군 최초라고 주장한다. 육군이 경전차로 취급하였던 M36 잭슨의 경우는 전차를 지원하는 대전차 자주포였기에 북한군 전차와 실제적인 대전차 전투는 수행하지 못하였고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고지 쟁탈전에서보병 화력지원 임무 위주로 운용되었다. 당시 미 육군의 전차부대가 서부지역에 집중 배치된 것과는 달리 주로 동부지역에 배치되었던 육군 전차부대의 주요 전투는 동해안 지역의 ‘월비산 및 351 고지 탈환전', 중동부 화천지역의 ‘689 고지, 오봉 고지, 삼각봉 고지, 지형능선 전투'와 중서부 금화 연천지역의 ‘노리, 베티, 쿠인, 백마 고지 전투' 등이 있다. 해병 1연대 전차중대는 1952년 5월 경기도 개풍군 장단면 수전포로 이동, 6월부터는 도라산 및 임진강의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전차중대는 임진강 자유의 다리를 건너 155m고지(도라산 전망대)를 중심으로 사천강 주변의 전초진지를 포함한 장단반도의 넓은 개활지에서 보전협동 수색정찰과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특히 그해 7월에는 사천강을 도강하는 중공군 보병 1개 대대 병력을 괴멸시키는 대전과도 올렸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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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7)]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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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6)]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장단·사천강지구 전투’가 진행중이던 당시 중공군에겐 제공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우리 L-19정찰기의 활동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어느날 중공군의 대공사격으로 사천강 주변 넓은 개활지에 격추되어 조종사가 적에게 체포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나 L-19정찰기의 추락지점이 우리 보다 적진지에서 더 가까웠고 적이 감제하는 넓은 개활지를 통과하는 불리점으로 접근이 불가능했다. 해병대 입장에서 만약 아군 전초진지 가까이에 떨어졌으면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그들을 구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5중대장 이근식 중위는 미 해병대 전차 20대, 한국 해병대 전차 5대와 함께 한미 보전협동작전으로 87m고지까지의 수색정찰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투입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안타까웠다. 이때 장단반도의 광활한 평야에서 전투를 했던 해병대의 M4A3E8 셔먼 중형전차부대는 단순한 화력지원 위주로 운용했던 육군 보다 전차의 충격력을 과시하는 기동작전까지 전개한 최초의 전차부대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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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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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6)]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