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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9) 낙오된 1개 중대가 인민군 1개 사단을 늪에 빠뜨리다
    ▲ ‘충북지역전사’의 요도 ‘북한군의 작전단계’ [사진제공=김희철] 낙오된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장, 북한군 1개 사단 공격 지연시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50년 발발한 6.25남침전쟁시 북한의 인민군은 국군에 비해 2배인 198,380명의 병력과 전차여단 등 3배인 화력/장비의 우세로 기습 남침공격을 했다. 북한은 6.25전쟁 후 ‘조국해방 전쟁사’에 전후 상황경과를 분석하여 ‘3단계 5차 작전기’로 구분하여 기술했다. 1단계는 개전-선 공격, 2단계는 한/만 국경선으로 패퇴, 3단계는 중공군의 침략과 전선의 고착화이다. 특히 1단계를 충북지역전사의 요도 ‘북한군의 작전단계’와 같이 5차에 걸친 작전기로 세분화하여 분석하였다. ‘조국해방 전쟁사’에 제시된 북한 인민군의 1단계 ‘선 공격’ 중 ‘제2작전기(6.29~7.6)’가 바로 공격기세를 계속 유지하여 한국군의 방어 템포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종 승리의 관건인 단계였다. 그런데 피아 혼란한 상황에서 전쟁사를 돌이켜 보면 원 소속부대에서 연락 두절로 낙오되었으나 해당 지휘관이 끝까지 부대를 인솔하여 아군 작전에 크게 기여한 사례가 있었다. 비록 원소속부대가 아닌 타부대였지만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장의 임기응변(臨機應變)식 ‘임무형지휘’ 결과로 인접 사단의 지휘 및 작전 공백을 해소시켰다. 즉 북한 인민군의 공격 템포를 24시간 끊어버리고 아군 방어 준비시간을 확보하여 한국군 전체 작전에 기여한 것이다. 블확실성의 연속인 전장 상황에서 임무형지휘가 중요 불확실한 전장, 예상과 다른 상황 전개 대처가 변수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대, 인제군 기린면의 38도선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는 주력과 멀리 떨어진 방동리에 있어 철수 명령도 못 받아 뒤늦은 6월 27일이 되어야 철수를 시작하여 적중을 탈출했다. 북한군 편의대와 교전도 하면서도 굶주린 상태로 산악지대를 이용 행군을 강행하여 7월 4일 아침에 제천에 도착했다. 다시 철수를 계속하다가 제천 4km남쪽 산곡동에서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충분한 급식과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다음날인 5일, 단양에 도달했을때 중대 병력은 타부대 낙오병을 합쳐 200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중대가 단양까지 왔는데도 아군을 만날 수 없었고 도로와 철로상에 가설된 교량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이미 국군 8사단 후발대가 단양을 떠났고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와 일부 주민들은 철수 또는 피난한 다음이었다. 8사단, 제천-단양 방어중 작전명령 착오로 전장이탈 한편, 동해 강릉에서 방어하다가 대관령으로 철수한 8사단은 6월 27일 강릉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던 중 육본의 작전명령에 따라 공격을 중단하고 진부-평창을 거쳐 7월2일 제천에 도착했다. 육본 명령은 6사단이 장호원-청부-보은 축선, 8사단이 중앙선 축선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임무를 받은 8사단은 6사단 7연대로부터 제천지역을 인수받고 제천 방어와 원주 탈환 준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7월4일 탈환작전을 위해 원주에 이르는 가리파고개에 배치되어 있던 8사단 10연대가 인민군의 치열한 공격으로 방어에 실패해 분산 철수하여 적과 접촉이 단절되었다. 때마침 육본에서 6사단장을 거쳐 전달된 육본 작전명령에는 “충주로 이동하라”고 했다가 다시 전문으로 “8사단은 즉각 대구로 이동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8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중요한 요충지인 제천을 아무런 이유 없이 포기하라는 육본 명령이 의심스러웠지만 관계 참모의 확실하다는 확인보고를 받은 뒤에 이동 명령을 하달했다. 7월 5일 새벽 2시, 제천에서 부대원들을 열차에 탑승시켜 대구로 출발시키고 사단장은 짚차로 충주를 거쳐 대전 육본에 도착하여 작전명령 확인 결과, 육본에서는 8사단을 대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실이 없음을 알았다. 곧바로 대전역으로 이동 철도비상전화로 이동 상황을 확인 결과, 이미 이동부대는 대구, 영천까지 도달하여 사단 참모장에게 되돌아갈 준비 명령을 하달하고 L-5연락기편으로 대구로 이동, 주력과 합류했다. 바로 이 싯점에 6사단 2연대에서 낙오되어 본대를 찾을 수 없었던 9중대장 정대원 중위(육사8기)는 국군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단약역으로 달려가 철도비상전화로 8사단 군수참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용병(用兵)에는 속임수를 써야한다”는 뜻의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 사례 상급부대와 통신이 단절됐지만 지휘관의 창의적 판단력으로 전투 승리 손자병법 제1 시계(始計)편에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는 “용병(用兵)에는 꾀와 속임수를 써서 아군의 의도를 속여 적들이 대처 못하도록 한다”는 뜻으로 손자가 가장 우선해서 강조한 병법이다. 8사단은 한시라도 빨리 제천이나 단양으로 진출하려고 서둘렀으나 이 날 오후 피난민을 만재한 과중한 중량의 열차가 죽령터널에서 고장을 일으켜 선로가 막혔기 때문에 더이상 진출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때 낙오된 1개중대가 단양에 남아있다는 상황은 새로운 변수가 됐다. 8사단으로는 북한 인민군이 선점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양을 방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게 하였다. 때마침 북한 인민군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홍천-원주-제천 축선을 따라 남하하던 인민군 7사단은 전투력이 쇠진하여 7월5일 제 12사단으로 개칭하고 진격방향을 바꾸어 충주로 투입하고 제천지구를 인민군 8사단에 인계하였다. 중앙선 축선으로 남진하라는 임무를 받은 인민군 8사단은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임무수행에 다소 미흡했다. 12사단과 임무교대 하였으나 국군의 방어선이 어딘지 알 수 없어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인민군 8사단은 편의대를 피난민 사이에 침투시킨 결과 제천 -단양 사이에는 국군이 전혀 배치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급히 일부 병력을 단양으로 진출 시켰다. 그러나 단양에는 낙오된 6사단 9중대의 병력들이 이미 단양철교 좌우측에 배치되어 있고 증강된 수색 분대가 남한강 북쪽 연안에서 활동하고 있자, 국군의 규모를 예측할 수 없는 인민군들은 섣불리 단양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가 급편 방어하여 북한군 8사단 공격을 24시간 지연시킨 단양철교와 전쟁기념관 조형물 모습 [사진출처=동영상 캡처/김희철] 인민군의 눈을 속이고 대규모 병력이 방어 전선을 구축하고 있음으로 오판하게 만든 낙오된 9중대는 자신들이 한국군 전체 작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모른 채 남한강을 넘어올 적들을 막아내려는 전투의지를 불태우며 골든타임의 밤을 견디어 냈다. 다음날 9중대는 단양으로 진출한 8사단 21연대와 임무 교대 후, 안동-대구-괴산-충주를 거쳐 7월 10일 수안보에서 6사단 2연대 본대와 합류했다. 그 후 8사단은 인민군 8사단의 지휘소 습격 등 효과적인 지연전으로 적의 전투력을 탕진시키며 단양-죽령 지역에서 7월 12일까지 적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비록 초전부터 낙오된 2연대 9중대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고립된 상황에서 건제를 잃지않고 탈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한 북한 인민군이 무혈 입성할 뻔 했던 단양을 기만 작전으로 확보함으로써 8사단의 중앙선 축선 지연작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이는 손자병법 제1 시계(始計)편의 “용병(用兵)에는 꾀와 속임수를 써서 아군의 의도를 속여 적들이 대처 못하도록 한다”는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상급부대와 지휘 및 통신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해당 지휘관의 자율적, 창의적 판단과 독단적 결정으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성공적인 임무형지휘의 모범이 되는 사례였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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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31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8)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된 ‘형제의 상’
    ▲ 북한 미사일 발사장면과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형제의 상’조형물로 6.25 남침전쟁때 국군장교로 참전한 형과 인민군 병사인 아우가 전장에서 극적으로 상봉 포옹하는 가슴 아픈 사연을 담은 모습 [사진제공=연합뉴스/김희철] 6.25전쟁 아직도 끝나지 않아, 북한은 6일 새벽 미사일 2발 또 발사 6.25 전쟁때 국군장교 형과 인민군 병사 아우가 죽령 전투현장에서 극적으로 상봉 앞으로 불법도발을 하지말고 ‘9.19 군사합의서’ 준수해 평화 정착 희망 '형제의 상'처럼 남북이 서로를 안아주며 사이좋게 지내기를 기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북한이 6일 새벽, 황해도 과일에서 내륙을 가로질러 동해상 450km거리로 미상의 발사체를 2발 또 발사했다. 이번 발사는 그동안 북한이 거세게 비난해온 이 한·미 연합연습이 시작되자 호된 비난방송과 함께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 발사는 지난달 25일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보이는 발사체를 쏜 이후 13일 동안 4번째다. 군 당국은 “이들 발사체를 새로운 종류의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보고 있고 북한이 한·미 연합연습 기간에 추가 발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대북 감시태세를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문 대통령이 평양 가서 합의했던 ‘9.19 군사합의서’의 맨 앞부분 1조에 나와 있는 “해상, 지상, 공중에서 어떤 행위의 일체 상대방에 대한 적대 행위를 전면 중단한다”는 것을 심각하게 위반한 사항이다. 게다가 지금 북한이 최근에 ‘SLBM발사가 가능한 신형 잠수함건조’도 공개했다. 이것들은 누가 봐도 남쪽을 겨냥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과의 북핵 협상에서 시간을 벌고 어떤 압박 전술로 쓰기 위해서 남쪽을 괜한 핑갯거리로 끄집어내는 우회 전술이다. 통일부는 6일 "최근 북한의 연이은 군사 행동은 내부 결속 및 향후 정세 국면에서 주도권 및 협상력 제고 차원"이라고 평가했다. 청와대는 이날 오전 “금일(6일) 오전 7시30분 국가안보실장, 국방부 장관, 국가정보원장은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긴급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개최하여 북한의 연이은 단거리 발사체 발사의 배경과 의도를 분석하고,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전반적인 군사안보 상황을 점검했다”고 밝혔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관계장관들은 현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앞으로 한미 간 긴밀한 공조 하에 관련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철저한 감시 및 대비 태세를 유지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나마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북한 미사일도발 규탄 결의안’을 본회에 상정하기로 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마치 형이 동생을 돌보듯, 북한 도발에 대한 비난과 앞으로의 재도발 방지보다는 김정은 위원장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정부 발표에서 읽을 수 있었다. 서울 삼각지 전쟁기념관에 가면 ‘형제의 상’이라는 동상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제목 그대로 국군과 인민군 군복을 각각 입은 두 형제가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도 이 형제의 상이 담고 있는 사연과 유사한 내용으로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는 진태, 진석 형제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조형물의 형제는 실제로 6.25 남침전쟁 당시 서로에게 총을 겨누다 마주치게 된다. 이 실화의 주인공은 당시 국군소위였던 형 박규철과 북한군 하전사인 동생 박용철 형제이다.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이 고향인 박규철 소위는 해주공업학교 광산과 3학년 여름방학 중에 8.15 해방을 맞았다. 그는 남북분단 직후 공산당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부모님과 여동생을 동생 박용철씨에게 당부하고 홀로 월남한 후, 보병 16연대에 신병으로 입대하였다. 그리고 16연대가 8사단으로 편입된 후 태백산지구 공비토벌에 참가, 전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6.25가 발발하자 일등상사의 신분으로 의정부 지역 전선으로 투입되었고, 소대장이 부상으로 후송되자 소대장 대리가 되어 경북 영천 지구방어전에서 공을 세우는 등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한 결과 현지에서 소위로 진급, 임관했다. 한편 박규철 소위의 고향인 황해도에서 북한군으로 징병된 동생 박용철씨는 북한군 제8사단 83연대 하전사(이등병 격)로 배치되었다. 동생이 소속된 북한군 8사단은 기이하게도 국군 8사단과 6.25 남침전쟁 초기 1개월하고 4일 동안을 제천-단양-죽령-영천을 연하는 축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직전인 9월초, 북한군 8사단은 영천지구 전투에서부터 패주, 북상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패주하는 북한군 8사단에 대한 추격을 맡은 부대가 기이하게도 또 형인 박 소위가 근무하는 국군 8사단 16연대였다. 따라서 이들 형제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상대편에 형과 동생이 있는 줄을 모른 채 총을 쏘고 있었다. 이들 형제는 추격중에 안동전투에서 바로 형이 공격을 맡은 그 진지에 동생이 있어 서로 총을 쏘기까지 했지만 양쪽 모두 무사한 채로 북한군이 퇴각했다. 국군8사단과 북한군 8사단이 마지막으로 크게 격돌한 것은 단양군 죽령 전투에서 였다. 북한군은 죽령의 험한 산세를 이용, 국군의 반격전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진지를 구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형제간의 살육전을 피하기 힘든 격전의 시간이 본인들은 모른 채 다가온 것이었다. 바로 이 같은 와중에서 형인 박 소위는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만난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불효자식놈’이라고 호통을 쳤고 그는 엉엉 울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맹렬한 추격 공격중에 박소위는 5-6m전방에서 도망치던 적병이 재빠르게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그 적병을 반드시 생포하겠다고 마음먹고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 절대 죽이지 않을테니까 도망치지 말고 그대로 있어. 만일 내 말을 듣지 않고 도망치다간 너희 독전대에게 사살당한다” 그 때 홀끔 돌아보는 상대방의 얼굴을 본 박 소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어젯밤 꿈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야! 너 용철이 아냐. 야 임마! 나야 니 형이야”하고 그는 북한군 독전대가 퍼붓는 총탄속을 뚫고 달려가 동생을 안고 내리 굴렀다. “여기서 너를 만나다니.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셨구나”하자 동생은 “형 나도 여기서 이렇게 총을 맞대고 싸우다가 형을 만나리라 곤 정말 생각도 못했어”하고 눈물을 쏟으며 형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형제의 상’ 조형물의 모습) 영문도 모르고 바라보던 소대원들은 그제서야 일제히 박수를 치며 축하했다. 동생은 이후 박 소위의 소속 지휘관의 배려로 국군으로 현지 입대하여 박 소위의 소대에서 함께 근무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은 필자가 8사단 16연대장 재임시 ‘연대 전투사’를 제작하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 번개부대 (8사단 16연대) 전투사 [사진제공=김희철] 형제끼리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극적으로 서로를 알아본 형제의 모습은 바로 6.25 남침전쟁에서 우리 겨레의 모습이었다. 앞으로는 불법도발을 하지말고 ‘9.19 군사합의서’를 진심으로 잘 준수하여 평화가 정착되길 바란다. 이번 사연과 같이 형제끼리 총을 겨누는 6.25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남북이 총 대신 서로를 안아주고 진정으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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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1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 (7) 대한국민이면 반드시 기억해야할 8월 1일
    ▲ 의병들을 학살하는 일본군(왼쪽) 과 일제시대 미국 주간지 '’더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에 실린 ‘1919년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제목의 한국인들이 십자가에 양팔을 묶인 채로 처형을 기다리는 모습 [사진제공 = 김희철/연합뉴스] 1907년 8월 1일 오전 11시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황실근위 시위대 제 1대대장 ‘박승환’ 참령,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며 자결 전국적인 연합의병으로 ‘13도창의군’ 1만여명 결성, 서울탈환 작전을 전개 국가와 군대 없는 국민은 노예, 국가와 군은 공동운명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지금부터 112년 전인 1907년 8월 1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날은 과거 우리가 대한(大韓)의 이름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상실한, 한마디로 거세를 당한 날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꼭 기억해야만 하는 날이기도 하다. 1907년 7~8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었다. 1907년 8월 1일 오전 11시 동대문 밖 훈련원에서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그날 아침 맨손 훈련을 한다고 소집해 놓고 군부협판 ‘한진창’이 새로 왕위에 오른 순종황제의 군대해산 소칙을 낭독했다. 그 자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계급장이 떼어지고 이들에게는 약간의 돈 몇 푼만 쥐어졌다. 해산당한 군인들은 지금의 종로와 을지로로 걸어 나와 돈을 땅바닥에 내던지면서 백성들과 함께 대성통곡 했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기 2년 전엔 ‘이근택’군부대신 등 을사 5적에 의해 우리의 외교권은 박탈됐고, 그 이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을 거치며 우리도 몰랐고 대비도 못했던 사이에 500년 조선의 역사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일 황실근위 시위대 제 1대대장으로 국가보위와 황실보호 업무를 수행하던 ‘박승환’ 참령은 이 소식을 듣고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은 들 무엇이 아깝겠는가”라며 자결했다. 격분한 우리 군인들이 무기고를 털어 당시 숭례문 밖에 있던 일본군대 진영으로 쳐들어 갔다. 일본군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격을 시작했고 그 자리에서 마지막 대한제국 군대 78명이 전사했으며 치열한 시가전은 계속됐다. 일본군은 막강한 화력을 동원해 공격했고 탄약이 떨어진 마지막 우리 군인들은 백병전을 감행하면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군대가 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하였다. 이에 의병의 전투력은 강화되었으며 봉기 지역 역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민긍호는 원주에서, 지홍윤과 연기우는 강화에서 군인들을 이끌고 의거를 일으켰다. 이들은 유격전에 능숙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경북 문경의 이강년, 강원도 원주의 이은찬, 호남의 기삼연·심남일·전해산·안규홍, 황해도의 이진룡·조맹선, 함경도의 홍범도, 경북 영천의 정환직 등이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투쟁하였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이인영과 이은찬과 허위 등은 1907년 말 연합의병으로 ‘13도창의군’을 결성하였다. ‘13도창의군’은 경기도 양주에 약 1만 여 명의 병력을 집결한 후 1908년 1월 서울탈환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패배하여 해산되고 말았다. 결국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었고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으나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3년 뒤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 그 후 우리 민족은 의병, 독립군, 광복군으로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일제에 항쟁해 나갔지만, 광복 이후 1948년 창군될 때까지 41년 동안 이 땅에 우리나라 군대는 없었다. 조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던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이 최후를 맞던 날(1598.11.18),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 동안 수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에서 한 달 이상 체임되어 있다가 파직된다. 그 후 1607년 선대의 과오를 철저히 징계하고 후대의 후환을 경계하고자 ‘징비록’을 집필했는데 그 핵심은 “자강(自强)”이었다. 그러나 꼭 300년 지난 뒤, 서애의 경고를 망각한 조선은 불과 일본의 2개 사단의 무력 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나라 없는 국민은 노예이며, 군대 없는 나라 또한 나라가 아니다. 국가와 군은 공동운명체다. 다행히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은 위풍당당한 국군을 보유하고 있다. 1948년 건국과 더불어 국군이 창설됐으며, 6.25남침전쟁을 맞아 우방의 군대와 힘을 합쳐 훌륭하게 싸워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지금은 국토방위의 책임을 넘어 15여개 국가에 세계평화질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 국위를 높이고 있다. 또한 “군대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말이 있듯이 국민교육의 도장으로도 우리 군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동해 삼척항 인근 목선 입항 귀순 축소 은폐, 서해 거동수상자 신고 조작 등으로 우리 군이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게다가 지난 17일 장관 주관 32사단 잠망경 해프닝 화상회의시 청와대 통제와 간섭 등 군의 위상이 계속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 112주년을 맞이하는 8월1일, 치욕스런 역사가 주는 쓰디쓴 교훈을 꼽씹어야 한다. 철저한 정치적 중립으로 “싸우면 이기는 전투형 군대”로 재도약하는 대한민국 국군이 되야 한다. 한국인은 우리 국군이 참군인으로 보다 더 노력하기를 독려해야 한다. 우리 국군이 국민의 깊은 신뢰와 절대적 지지를 다시 회복하길 기대해 본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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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31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6)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킨 ‘빨간마후라’의 전설 김영환 장군
    ▲ 6.25남침전쟁시 우리 공군 주력기였던 무스탕(왼쪽)과 금년에 도입한 최신예 F-35A 스텔스 전투기. [사진=동영상 캡쳐]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형, 최신예 F-35A 스텔스 전투기 도입 고(故)김영환 장군이 전장에서 착용했던 ‘빨간마후라’, 공군의 상징 돼 1951년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 지휘 미군의 폭격 명령 거부하고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역사의식' ‘54년 3월 5일 F-51기를 타고 사천-강릉기지 이동 중 기상 악화로 실종/순직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형이다. 비록 지난 6월말 판문점에서역사적인 남북미 정상이 만나 비핵화를 논의하며 화해무드는 조성되는 것 같았지만 지금도 북한 언론 매체에서는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난하는 방송이 지속되고 북쪽과 남쪽은 각자의 군사훈련도 계속하고 있다. 진정한 평화와 통일은 현 155마일 휴전선에서 남북이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남북 군인들이 함께 국경을 지키고 남북이 서로 자유왕래를 할 때 완전하게 달성된다. 반면에 GOP지역의 철새들은 주요한 관광자원이기도 하지만 남북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미국과 일본의 최신예 F-35A 전투기는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는 스텔스 기능 때문에 적 미사일을 탐지, 추적, 파괴하는 일련의 작전개념인 전략표적 타격의 핵심 전력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스텔스 전투기는 마음만 먹으면 남북하늘을 철새처럼 날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대한민국 공군이 운용하게 될 최신예 F-35A 스텔스 전투기 2대가 지난 3월29일 청주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청주 공군기지에 도착한 F-35A 전투기는 작년 말까지 미국에서 인수한 6대의 전투기 중 2대로 추후 매달 F-35A 전투기가 국내에 도착해 금년에는 총 10여대에 달하는 F-35A 전투기가 전력화 될 것으로 알려졌다. F-35A 스텔스 전투기는 최대 속력 마하 1.8, 전투행동반경 1093㎞로 공대공미사일과 합동직격탄(JDAM), 소구경 정밀유도폭탄(SDB) 등으로 무장한다. 대한민국 공군이 북한과 주변국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최강 F-35A 전투기는 트럼프와 문대통령의 미국정상회담시 협조하여 단계적으로 총 40대가 도입될 예정이다. ▲ [사진=동영상 캡쳐] F-35A 전투기 등 우리 공군 조종사들이 착용하는 ‘빨간마후라’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뜨거운 조국애를 상징한다. 공군의 상징인 이 ‘빨간마후라’는 고(故)김영환 장군이 처음 시도한 인물이다. 평소에 김영환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붉은 머플러를 착용하고 전장에 나선 것으로 유명한 전설의 독일 조종사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을 흠모했었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김영환 장군은 어느 날 그의 형 김정렬(당시 공군참모총장) 장군의 집을 방문했었다. 형수 이희재 여사가 입은 붉은 치마를 보고 형수에게 붉은색 천으로 머플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목에 두르기 시작한 것이 ‘빨간 마후라’가 된 것이다. 故 김영환 장군은 경기고등학교와 일본 관서대학 법과에 재학 중 징집되어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수료, 1948년 공군에 입대했다. 6·25 전쟁 당시 T-6 훈련기를 조종하며 폭탄과 수류탄을 직접 던져 적의 남하를 저지했다. 1951년 9월 28일에는 강릉전진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출격작전을 지휘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뛰어난 활약으로 한국전쟁 때 을지훈장·금성충무훈장·금성을지무공훈장·미비행훈장(美飛行勳章) 등을 받았다. ▲ [사진=동영상 캡쳐] 故 김영환 장군의 숭고한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또 있다. 1951년 8월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무장공비가 잠입한 경남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의 김영환 공군 대령은 휘하 조종사들에게 해인사 주변의 능선을 공격함에 있어 폭탄과 로켓포 대신 기총소사로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당시 우리 공군은 정찰기를 타고 다니면서 맨손으로 폭탄과 수류탄을 투하했는데,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키기 위해 기총소사로만 공격을 한 것이다. 미군 장교가 그에게 “왜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았나?”라고 묻자, 김영환 장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영국 사람들이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한 것 처럼, 한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준다 해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과는 바꿀 수가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그래서 폭격을 하지 못하고 우회했다.” ▲ 생전 故 김영환 장군의 조종모습과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 수호공적비 [사진= 동영상캡쳐] 세계대전 패전을 앞두고 히틀러가 파리를 초토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를 거부하고 ‘파리가 불타고 있다.’고 허위보고를 했던 독일의 콜티츠 사령관이 그랬던 것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팔만대장경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을 맘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1954년 3월 5일 제10전투비행단 창설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F-51기를 타고 사천기지를 이륙하여 강릉기지로 가던 중 기상 악화로 동해안 묵호상공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2010년 8월 21일 해인사에서 고(故) 김영환 장군 추모제가 열렸는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뜻을 기리고자 문화재청에서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하기도 했다. 우리는 동해의 목선 귀순 사건과 서해의 거동수상자 허위 자수 사건 등 일련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최초의 빨간 마후라 거(故) 김영환 장군의 숭고한 애국심과 군인으로써의 희생정신 그리고 전 세계를 감동시킨 역사관에 한없는 존경을 보낸다. 이번 하계휴가 때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합천 해인사의 소중한 팔만대장경을 찾아 맘껏 즐기고, 고(故) 김영환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싶어진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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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2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5) 국군 17연대, '화령장 전투' 승리로 낙동강 방어선 구축
    ▲ 상주시 상현리에 위치한 ‘화령장지구전적비’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던 국군17연대 부대기 [사진 =동영상 캡쳐]북한군 15사단, 7월 10일 음성을 점령 후 계속 남진 국군 17연대, 상주 화령장에서 북한군 2개연대 괴멸시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 니스트] 김일성의 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불법남침을 시작했다. 9월 인천상륙작전까지 7~8월 무더위 속에 남한 전역은 피바다가 되었다. 한편, 북한군이 6월 28일 서울마저 점령하자 미국은 일본에 주둔하던 미 제8군에 소속된 제24보병사단을 우선 한국으로 파병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평택-충주-울진’을 잇는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는데, ‘안성-평택’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미군은 금강 남쪽 지역으로 후퇴했다. 국군도 소백산맥의 ‘이화령-조령-죽령’ 지역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육군본부는 ‘문경-함창-상주’로 이어지는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7월 12일 함창에서 제6사단과 제8사단 병력을 중심으로 제2군단을 창설했다. 제1군단에 소속되어 청주에서 북한군과 싸우고 있던 국군 제17연대(인천상륙작전 참가)도 제2군단으로 소속이 바뀌었으며, 제6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기 위해 함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교통의 중심지인 화령장에서 유엔군 방어의 성패를 결정하는 기습결전 시도 후송된 백인엽 대령을 대신해 김희준 중령이 지휘 맡아 '대승' 거둬 부지휘관의 중요성 재인식 계기 돼 화령장은 경상북도 상주 북부인 화서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보은과 괴산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임진왜란시에는 정기룡 장군이 의병을 조직하여 용화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상주성도 탈환했던 국난극복의 현장이자 충절의 고향이기도 하다. 북한군 제2군단은 음성∼괴산 방면으로 남하한 제15사단을 상주 점령 목표로 화령장에 투입하였다. 북한군 제15사단은 동락리 전투에서 국군 6사단의 기습으로 괴멸된 예하 48연대를 재편성하여 7월 10일 음성을 점령한 후 보은 및 괴산∼상주 방면으로 계속 남하하였다. 부상을 당해 후송된 백인엽 대령 대신 부대를 지휘하여 함창으로 향하던 국군 제17연대의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7월 17일 북한군이 괴산에서 상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갈령을 넘어 화령장 방면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곧 선두로 화령장 지역에 도착해 있던 1개 대대 병력으로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갈령 아래 하송리와 상곡리 일대에 주둔지를 편성하고 있던 북한군 제15사단 제48연대 병력을 기습공격하여 250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 ‘화령장지구전투 상황도’와 17연대가 북한군 포로를 심문하는 모습 [사진 =동영상 캡쳐] 다음날인 7월 19일 제17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북한군 제45연대가 후속하여 화령장으로 접근하는 것을 포로의 노획문서를 통해 알았다. 이에 제17연대장은 화령초등학교에 대기 중이던 제2대대를 봉황산으로 진출시켜 봉황산(741m) 너머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갈령과 장자동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매복시켰다. 예비인 제3대대는 제2대대 좌측인 장자동으로 이동하였다. 7월 20일 갈령을 넘어오는 북한군 제45연대 병력에게 오전부터 시작된 공격은 오후 2시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어 제2대대는 북한군 350여 명을 사살하고 2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북한군 제15사단은 예하인 제45연대가 동관리의 갈령 일대에서 기습을 받고 큰 타격을 입자, 동관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7연대장은 북한군이 전면공세를 취할 경우 이를 막아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군단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북한군 전면공세를 17연대가 긴급 투입된 1사단과 함께 격퇴 군단에서는 제1사단을 화령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7월 22일 오전 화령장으로 이동한 제1사단은 예하 11, 12, 13연대 3개 연대를 화령장 부근에 전개한 후 갈령 고개 북방으로 북한군을 격퇴하기로 하였다. 7월 23일과 24일 제11연대는 갈령 부근에서 북한군을 공격했고, 23∼25일 제12연대는 장자동 부근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치뤄 결국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국군 제1사단과 제17연대가 화령장 부근에서 북한군 제15사단과 일주일 넘도록 교전을 벌이고 있던 7월 24일, 작전지역을 미군에 인계하고 안동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음으로써 화령장 전투는 끝났다. 북한군 전선사령부의 '대구 조기진출 계획' 좌절시키고 인천상륙작전 참가 북한군은 상주 화령장 전투에서 예하 제15사단의 2개 연대가 괴멸되는 참패를 당했고, 병력과 장비의 대부분을 상실하였으며 북한군의 진격이 1주일 이상 지연되었다. 이 패전으로 북한군 15사단은 해체됐고 사단장 박성철은 인책, 해임당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소백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뚫고 상주를 점령한 후 일거에 대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전선사령부의 계획을 좌절 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군과 유엔군이 방어 체계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준 의미 있는 전투이다. 특히 국군 제17연대(김희준 중령)는 이 전투에서 600여명 이상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1천여 점의 북한군 병기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공으로 연대 장병 모두가 1계급 특진의 포상을 받았다. 또한 국군17연대(수도사단장을 하던 백인엽 대령이 연대장으로 재임명 됨)는 2개월 뒤인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서울 수복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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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2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4) '조종사의 날'을 만든 한국판 가미가제, 고(故) 이근석 장군
    ▲ 공군 11전투비행단소속으로 6·25 전쟁당시 장렬히 산화한 고(故) 이근석 장군 동상에 헌화한 뒤 거수경례를 하는 前 공군군수사령관 윤우(공사28기) 장군 모습 [사진 제공=공군군수사령부] 추모해야 할 전쟁 영웅인 '한국판 가미가제' 고(故) 이근석 장군 1950년 7월 3일 F-51 무스탕 전투기 첫 출격에서 산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 니스트]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판문점 회동이 트럼프 대통령의 제의에 따라 전격적으로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이어 "1953년 정전협정 이후 66년 만에 조·미 두 나라 최고 수뇌분들께서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에서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역사적인 악수를 하는 놀라운 현실이 펼쳐졌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앞으로도 긴밀히 연계해나가며 조선반도 비핵화와 조미관계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나가기 위한 생산적인 대화들을 재개하고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합의하셨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북미 정상회담으로 인한 긍정적인 남북 대화와 화해 협력도 좋지만 69년 전 동족상잔의 비극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7월이 되면 꼭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전쟁 영웅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6·25 남침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3일 경기도 수원부근 상공, 왼쪽 날개에 불이 붙은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F-51 무스탕 한 대가 연기를 내뿜으며 북한군 탱크 20여대가 있는 무리로 돌진하는 한국판 가미가제가 있었다. “3번기 도로 좌방 탄약차량 공격, 건투를 빈다! ...” 대공포 맞자 북한 전차 부대 한 복판으로 뛰어들어 공군은 11년 전 7월 3일을 '조종사의 날'로 정해 고(故) 이근석 장군(공군준장 1917. 1.17 ~ 1950. 7.3)은 평양보고를 졸업하고 17세에 일본 구마가아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웠다. 담당 교관이 ‘비행술의 천재’라고 할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광복 후에는 한국 공군 창설에 힘을 쏟았다. 1948년 조선경비 사관학교 1기 간부후보생으로 졸업한 뒤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육군 항공기지 사령부에서 비행단장으로 근무한 뒤 육군대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한국군에는 연락기와 정찰기 30여 대만 보유하고 전투기는 없었다. 군 당국은 이 항공기로는 남하하는 북한군의 T-34 전차를 막을 수 없다 판단하고 6월 26일 이근석 대령을 포함한 10여 명의 조종사를 일본 이다쓰케 기지에 급파해 미공군으로부터 F-51 무스탕 전투기를 인수받게 했다. 체계적인 교육 훈련도 받지 못한 10여 명의 조종사들은 10대의 F-51 무스탕 전투기를 직접 조종해 현해탄을 건너오게 됐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첫 공군 전투기 조종의 시작이었다. 남침해 온 북한군에 맞서 싸울 전투기가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 조종사들은 경비행기 22대를 총동원해 초저고도로 비행하며 포탄을 손으로 투하해 전투를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의 서울진입을 24시간 동안이나 지연시키는 성과도 거뒀다. 급박한 전쟁 상황 때문에 이근석대령을 포함한 이들은 도착 다음 날인 7월 3일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 도입한 F-51 무스탕 전투기의 첫 출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첫 비행에서 이근석 대령은 안타깝게도 적의 대공포를 맞았다. 순간적인 대공포에 엔진이 명중되자 탈출하기는커녕 적군 전차부대 한 복판으로 돌진해서 비행기와 함께 산화했다. 이근석은 “3번기 왼쪽 탄약차량 공격, 건투를 빈다”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뒤 이같은 희생적 공격을 함으로써 첫 전투기 조종사 전사자로 기록되게 됐다. 이 대령에겐 후에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이 내려지게 됐으며 공군은 2008년 7월 3일 전투기 첫 출격을 기념해 이날을 ‘조종사의 날’로 선포했다. 지금도 고 이근석 준장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용기를 기리기 위해 정기적으로 대구에 있는 이장군 동상에서 7월 기일을 전후해 추모식을 열고 있다. 공군의장대원 군악대 50여명이 군악을 울리고 한국항공 소년단 30여명도 동상 앞에서 경례를 한다. 공군군수사령관 등 현역 공군장군들도 매년 참가한다. 대구 비행장은 이장군이 생전 마지막으로 출격한 곳이기도 하다. 우리 군의 후배와 일부 국민들은 고 이근식 준장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있지만, 정치권에서 부패 척결의 마지막 표적으로 군이 활용되고, 과거 군사정권에 대한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군의 소중함을 잊고 지내고 있다. 미국 시민들이 군을 아끼는 마음에 비하면 고 이근석 장군에 대한 추모행사는 아무것도 아니다. 음지에서 묵묵히 충성하는 많은 군인들에게 배려와 격려 필요 그래서 몇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숨겨져 있는 전쟁 영웅들을 찾아 추모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참군인으로 존경 받던 고 한신·채명신장군, 월남전의 영웅 고 강재구·이인호 소령, DMZ에서 솔선수범하다 순직한 고 강병식 대령, 연평해전의 고 윤영하 소령을 포함한 6용사 등 숨겨져 있는 많은 영웅들을 찾아내고 추모해야 한다. 또한 현재 복무하는 군인들과 국민들에게 홍보하고 그 뜻을 이어 받도록 행사를 확대하고 고위급 정치인부터 솔선해야 한다. 둘째, 현역들 중 무기체계사업 등 많은 예산을 다루는 자들은 소탐대실(小貪大失) 명언을 명심해 정직하게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과거 린다김 사건으로 이미 망쳐놓은 백두금강 사업을 당시 현역 중령(現예비역 준장 서용석)이 도맡아 미 록키드사와 긴밀히 협조해가장 저렴한 예산으로 현재에 정보획득 시스템으로 발전시킨 좋은 사례도 있다. 아무튼 중용(中庸)에 있는 ‘계신호기소불도(戒愼乎其所不睹), 공구호기소불문(恐懼乎其所不聞)’라는 말처럼 보이지 않는 바에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바에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로 모든 사업에 임해야 한다. 셋째, 우리 국민들은 일부 그릇된 정치군인들이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음지에서 묵묵히 충성하는 많은 군인들에게 배려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필자가 2011년 육본정책실장 근무 시 업무차 미국에 갔다가 일반 식당을 들렸는데 그곳에 있던 시민들이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보고 모두 일어서서 격려의 박수를 치는 모습을 목격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정치권에서 적폐 척결의 표적으로 군이 매도되고, 과거 군사정권에 대한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군의 소중함을 잊고 지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많은 국민들이 이국 만리 생활여건이 안좋은 곳에서 해외파병부대로, 전후방 각지 격오지에서 책무를 다하는 우리 아들과 딸들에게 격려와 배려를 보내고 있다. 군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현재 이처럼 침묵하고 있는 많은 현명한 시민들도 있다는 것에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에 희망을 걸어 본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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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05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3) 유엔군의 '자유전사'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과 미국 프리만, 크롬베즈 대령
    ▲ 중장 계급장을 달았던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왼쪽)의 모습, 그리고 6.25전쟁에 참전한 몽클레어 중령(오른쪽 사진의 맨 왼쪽)이 한국전선을 방문한 맥아더 연합사령관(오른쪽 사진의 맨 오른쪽)과 만나는 모습[사진출처=보훈처] 지평리 전투의 영웅 ‘몽클레어’장군, 참전하기 위해 중장에서 중령으로 '강등' 선택 '미끼'로 던져진 미 23연대 ‘프리만’대령은 "나는 반드시 부하들을 데리고 나갈 것"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에서 1.4후퇴 후,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 내고 중공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푸른 눈을 가진 ‘자유의 전사부대’가 있었다. 이 ‘자유의 전사부대’ 가 승리한 ‘지평리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중공군은 공격을 중단하게 되었고, 몰리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을 만들어 연합군은 북을 향해 전진하게 된다.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 중 한명은 바로 프랑스의 랄프 몽클레어 (Ralph Monclar·1892~1964) 장군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남한을 기습공격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연합군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는 유엔군 파병을 결정했지만 한국에 파병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알제리 등에서의 식민지 전쟁으로 병력 보충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프랑스는 1950년 7월 12명의 시찰단만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반기를 든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몽클레어 중장이다. 그는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모병(募兵)을 실시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 13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모였다. 몽끌레어 장군은 직접 이들을 이끌고 한국전쟁에 참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스 르젠 국방차관이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데 중장인 당신이 대대장을 맡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대했다. 이에 몽끌레어 장군은 중장 계급장을 떼고 국방차관에게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다면 육군 중령이라도 좋다. 계급을 낮춰도 좋으니 나를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몽클레어는 결국 중령 계급장을 달고 대대장으로 이국만리의 전쟁에 참전했다. 공산군의 침략으로 백척간두에 놓인 한국을 돕는 일이라면 몽클레어 장군에게 강등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몽클레어 장군이 한국에 왔을 때 나이는 58세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중요했던 ‘지평리전투’는 1.4후퇴 이후,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산악 전투이다.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내며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지평리까지 무너지면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유명한 명장 ‘맥아더’장군이 지휘하는 연합상륙부대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함으로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하지만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북진을 거듭하여 그 선두 부대가 압록강에 도달했을 무렵 중공군이 이미 10월 15부터 압록강을 건너 은밀하게 투입되어 그 역공격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 첫 교전이 10월 25일 개시되었고 이때부터 중공군은 인간을 무기로한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유엔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규모는 최초 18만명, 이후 40만에 이르는 중공군이 한반도 투입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중공군의 기습적인 역공격을 받은 유엔군은 혼란에 빠졌고 더욱이 중공군의 규모와 무기체계, 전술등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터라 피리불고 괭과리 치면서 인해전술로 몰려드는 중공군에 심리적 공황까지 발생,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겪었다. 급기야는 1951년 그 유명한 ‘1.4후퇴’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유엔군은 한반도를 통일하고 고향에서 크리스마스휴가를 보낸다던 계획이, 우리 국군에게는 한 맻힌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려던 꿈이 무참히 깨어지면서 엄동설한에 다시금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자 전쟁수행에 대한 서구제국들의 관심이 급변하고 급기야 한반도에서의 철수와 휴전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은 중공의 유엔 가입과 대만에서의 미군철수 등을 조건으로 내세우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유엔군과 국군은 중공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유엔군의 재편성을 위하여 평택-원주-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금 역공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양상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즉, 반격작전으로 중공군을 38도선 이북까지 격퇴하면서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인 ‘제한전쟁’을 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여 전쟁의 무제한적 폭력성을 특정한 목표로 제한하고 이를 통하여 정치적 목적인 휴전협상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중공군과 단절된 전선을 회복하고 철저하게 잔적을 소탕하면서 동해와 서해를 잇는 띠를 만들어 일제히 제한된 거리를 진격하는 여러 개의 작전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 지난 2016년 7월경 방한했던 몽클레어 장군의 손자(오른쪽)가 53사단 군종 참모인 김재학 소령(목사)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김재학 소령] 유엔군의 '라운드 업' 전략 속에서 중공군 섬멸을 위한 '미끼'로 던져진 미 23연대 인해전술로 덥쳐온 중공군을 3차례 전투에서 격파 지평리 전투가 있기 전에 유엔군은 작전명령 월프하운드(Wolfhound)작전, 썬더볼트(Thuderbolt)작전으로 한강선을 확보하고, 라운드엎(Round-up) 작전에 재차 돌입하였으나 중공군의 대규모 ‘2월 공세’로 홍천 남쪽에서 작전이 저지되고 중공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중공군은 이때 수원-이천-원주-강릉을 연하는 선까지 일부 진출해 있었고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횡성과 홍천 중간지인 삼마치 고개와 지평리 일대로 병력을 집결하여 대규모의 공세를 준비 중에 있었다. 드디어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이 ‘2월공세’로 명명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따라서 유엔군과 중공군이 횡성-원주일대와 지평리 일대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 한국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운 UN(프랑스)군의 지평리전투 충혼비와 상황도[사진출처=보훈처] 지평리(砥平里)는 중앙선 열차가 통과하며 원주, 이천, 장호원, 양평등으로 진출할 수 있는 주요 교통요충지로서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분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중공군은 지평리를 점령하고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의 남쪽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이때 지평리에는 라운드 업작전에 투입되었던 미2사단 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군 대대와 미37포병대대, 82방공포대대 B포대, 503포병대대 B포대등으로 편성된 연대전투단이 지형의 잇점을 이용하여 전면방어를 편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중공군 39군 예하의 3개 사단이 지평리를 그 특유의 나팔과 괭과리를 동반한 인해전술로써 포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은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즉각 미 2사단 38연대로 지평리를 증원토록 하는 한편 부대를 재배치하는 등의 대책을 강구하고 미9 군단이 지평리에 추가적인 증원부대를 급파하도록 조치 하였다. “승리는 승리를 믿는 자, 전투는 끝까지 버티는 자에게만 승리의 영광을 안겨준다”고 한다. 지평리의 병사들은 그동안의 전투에 지쳐 제각기 호를 파고 그 속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대장 프리만 대령과 그 부대원들은 철저한 준비를 이미 완료한 뒤였다. 몽클레어가 이끄는 프랑스 대대, 1일차 전투에서 대승리 드디어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이 횡성의 삼마치고개 일대에서 일제히 공격을 재개 하여 3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한국군 3군단이 패하면서 지평리까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에 프리만 대령은 퇴로가 차단되어 중공군에게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철수를 건의 하였으나 철수허가 대신 지평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접수 하였다. 사실 미23연대는 ‘라운드업 작전’ 속에서 '미끼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중공군을 찾아내어 소화기와 인력에 의존하는 중공군을 연합군의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으로 섬멸코자 계획된 작전이었던 것이다. 미 23연대는 미끼로서 중공군에 던져 졌고 중공군은 그 미끼를 물 게 되었으며 프리만 대령의 미23연대는 그 속에서 미끼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1951년 2월 13일 드디어 중공군이 지평리 전방에서 대규모로 집결 중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제보로 확인되었고 어둠이 깔리면서 중공군의 신호탄이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지평리는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한겨울 지평리의 추위는 살을 에이는 듯하였고 장병들은 긴장속에서 전투준비를 갖추고 중공군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 갈 무렵, 중공군의 박격포탄이 여기 저기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중공군의 그 나팔, 호각, 괭과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다. 중공군은 떼를 지어 몰려들었고 장병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중공군의 1제파, 2제파, 3제파를 차례로 격퇴하였다. 중공군의 시체가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한편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레어 중령은 58세의 노병으로 1, 2차 대전을 모두 경험하고 무공훈장을 17차례나 받은 백전노장이며 진정한 군인 이었다. 원래 프랑스 육군 중장 이었던 대대장의 본명은 ‘마그랭 버르너리(Magrin Vernery)’이었고 개명한 새이름 ‘몽클레어’로 또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이 프랑스군 대대의 장병들도 대부분 이와 같이 전쟁을 위하여 자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용맹성과 전투능력을 어느 군대보다도 강하고 철두철미하였다. 프랑스군 대대전방에서도 중공군의 피리와 괭과리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물밀 듯이 중공군이 몰려들어왔다. 이때 프랑스군 진지에서 난데없이 사이렌(신호 및 조기경보 용으로 중대급에 보급된 휴대용 수동식 사이렌 임)소리가 요란하게 나면서 중공군의 피리소리와 괭과리 소리를 삼켜 버렸고 중공군은 신호 및 연락이 끊기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일제히 화력을 집중하면서 진지를 박차고 나가 중공군을 닥치는 대로 쏘고 찌르는 육박전이 벌어졌고 중공군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5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날밤 중공군은 감히 재공격을 하지 못하였다. 한 병사의 기지가 대대전체를 구하며 참으로 값진 승리를 쟁취한 순간이었다. 밤이 지나갔다. 중공군은 3개 사단 병력으로 1개 연대전투단이 방어중인 지평리를 밤새워 포위공격을 하고서도 함락하지 못한 채 시체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퇴각한 것이다. 미 프리만 대령, 절름발이 상태에서 중공군 9만명을 상대로 한 2일차 전투 승리 중공군은 낮에는 유엔 공군의 폭격이 무서워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재편성을 한 다음 밤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한편 이날밤 전투에서 연대장 프리만 대령이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며 헬기로 탈출 치료받도록 조치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붕대를 감은 절름발이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프리만 대령은 "내가 부하들을 이끌고 여기 왔다. 반드시 이들을 데리고 나갈 것이다"라고 전의를 북돋으며 진두지휘, 장병들의 사기를 올렸다.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던 유엔군은 정오경에 수송기 편대를 이용 수십톤의 탄약과 식량 등 보급품을 공수 하였다. 이때 연대 지휘소 부근 헬기장에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날아 들어왔다. 오는 도중 중공군의 저격으로 헬기가 명중되었으나 다행이 치명적이지 않았다. 지평리의 장병들은 가슴에 매단 수류탄 두발을 보고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이란 것을 알았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당시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은 가슴에 수류탄 2발을 매다는 코디로 자신을 야전군 지휘관임을 자랑스럽게 외부로 드러내고 있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장병들과 프리만 연대장에게 오늘밤 하루만 더 버텨줄 것을 당부하고 격려 하였으나 장병들은 오히려 사령관의 귀로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필자는 비록 보지 못하였지만 이글을 쓰면서 상상만 해도 정말 흥분되고 용솟음치는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다. 2월 14일 어둠이 채 깔리기도 전 지평리에는 기분 나쁜 피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전날 2개사단이 동시에 공격하여 실패한 중공군은 그날 밤 새로이 3개사단과 3개연대규모를 추가하여 2일차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중공군이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지평리를 반드시 확보하여야 만 했기 때문에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병력 수 9만여명의 중공군이 3천여명의 유엔군과 혈전을 전개하였다. 중공군이 보유한 화력은 미약했지만 인간이란 무기는 넘쳐나는 듯 했다, 유엔군의 포병과 박격포세례에 살아남은 자는 지뢰지대에서 죽고 지뢰지대를 벗어난 자는 철조망 앞에서 기관총에 죽었다. 그러나 끝이 없이 밀려드는 중공군은 마침내 유엔군의 진지 전방까지 도달하였고, 유엔군은 실탄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날이 밝으면서 중공군은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또 하룻밤이 지나갔고 지평리 외곽의 유엔군 진지 전방에는 전날에 이어 이날밤 사살된 중공군 시체가 산에 산을 이루었다. 이제 지평리에서 2일간 전투를 치룬 미 23연대전투단은 더 이상 버틸 힘도 탄약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금 진지를 보수하고 오늘밤의 결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 6·25 당시 미 23연대장 프리만 대령(왼쪽. 미육군 대장 전역)과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사진출처=보훈처] 미 5기병연대장 크롬베즈 대령, 3일차 전투에서 중공군 괴멸시켜 전투 3일차인 이때 리지웨이 사령관은 미 9군단에 ‘지평리 연결작전’을 명령하였고 9군단장은 미1기병사단 5기병연대장 크롬베즈 대령의 이름은 딴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전차 23대를 앞세우고 지평리로 진격을 하게 되었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대신방향에서 북쪽으로 길 게 뻗은 좁은 도로를 따라 지평리로 전속돌진 하였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은 양쪽이 높은 고지군으로 둘러 쌓여있고 이곳은 중공군이 미23연대 전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곳이어서 중대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폭약을 들고 전차를 저지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2대의 전차가 중공군의 로켓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전차의 승무원이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전차를 도로밖으로 밀어내고 후속전차가 멈추지 않도록 공격템포를 유지하면서 돌진 하였다. 한편 지평리에서는 프리만 대령의 부상이 악화되어 후송되고 2대대장 에드워드 중령이 임무를 대신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중령은 우선 야간에 피탈된 전선에 대하여 주간 역습을 실시 회복하도록 명령하고 야간작전 준비에 돌입하는 한편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의 연결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중령은 보유하고 있던 전차 4대로 중공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설치한 지뢰를 제거하고 중공군의 배후로 우회하여 중공군에게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돌진 해 들어갔다. 더불어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중공군의 지휘소와 탄약고등 전투근무지원시설을 잇따라 유린하면서 파죽지세로 돌진 드디어 양군의 전차가 마주치면서 연결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의 충격적인 돌진은 중공군들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중공군들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이 광경은 군대가 아닌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으로 사라져 갔다. 미군과 프랑스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마치 풀을 베는 농부처럼 메뚜기를 사냥하듯 중공군을 쓰러뜨렸다. 소총사거리를 벗어난 중공군은 박격포와 야포의 세례를 받으면서 무수히 쓰러져갔고 ‘중공군의 2월 공세’는 그들이 자랑하는 무기 인간을 무수히 소모한채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도 큰 피해를 입었다. 최초 이 특수임무부대는 전차위에 보병 1개중대 165명을 탑승시켰으나 이중 살아남은 사람은 23명이고 나머지 142명의 장병이 전사하거나 부상 후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크롬베즈 대령과 에드워드 중령을 감격의 포옹으로 전우애를 확인하였다.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거둔 최초의 완벽한 승리…! 이 전투는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이후, 후퇴와 패배를 거듭하던 유엔군이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전투로서 그동안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유엔군이 거둔 최초의 완벽한 승리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장에서 지휘관이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 하는 지휘관의 자세에 대한 수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미 23연대 전투단의 프리만 연대장은 부상 중에도 후송을 거부하고 장병들과 생사를 함께 하였으며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중공군의 포화를 뚫고 헬기로 포위된 전장을 방문했을 때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바로 손자병법 모공편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의 진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레어 중령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진정한 군인으로서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 장병들이 엄동설한의 꽁꽁 얼은 야지에서 구축한 진지는 그들이 흘린 땀만큼 피와 목숨으로 보답한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다. 그렇다 방어작전시 승패는 누가 더 깊이 견고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가용한 화력과 장애물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전투결과로서 보여주었다. 한편 중공군이 대규모의 병력으로 완전히 포위하고 3일간 치열한 전투를 치루면서도 패배하였던 원인은 중공군에게는 인간이 무기인 인해전술만 있었지 곡사화기를 이용한 화력지원체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공군의 신호 및 연락 수단이었던 피리, 괭과리. 북, 호각 등 의 소음은 야간전투에서 심리적인 효과까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 대대 어느 병사의 수동식 사이렌 작동으로 완전히 차단함으로서 예상치 못한 커다란 성과를 달성한 것은 전장에서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25남침전쟁’의 국가적 절명 위기에서 보이지 않는 희생을 통해 나라를 지켜낸 숨겨졌던 국내의 영웅들과 애국자분들에게 감사와 보은도 중요하다. 그런데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장군과 ‘프리만’, ‘크롬베즈’대령,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레어’장군 등 연합군의 알려지지 않은 유엔군 영웅들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 다시한번 더 ‘지평리 전투’에서 장열히 산화한 미군과 프랑스군의 전몰 장병들의 명복을 기원한다. 또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인 67개국이 단일 연합군으로 우리나라를 구해준 해외지원국에 대한 감사하고 기억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명확히 부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렇게 선양해야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19-06-28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2)'구월산 여장군' 이정숙과 '동락리 전투'의 김재옥
    ▲ ‘군번 없는 여(女)전사’들과 이정숙(오른쪽) 여장군 [사진출처=국가보훈처] '구월산 유격대 女將軍’으로 불린 고(故) 이정숙, 남편 김종벽 대위와 함께 반공 유격전 구월산 유격대 생존자, 정부에게 16만원 보조받아 ‘김원봉 복권/서훈’ 보다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들 선양사업을 우선해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서해무장대를 조직, ‘구월산 유격대 여장군(女將軍)’으로 불린 고(故) 이정숙도 있었다. 6·25 당시 구월산 유격대를 창설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은 남편 고(故) 김종벽 대위에 이어 부부가 동시에 일반적인 공로훈장이 아닌 무공훈장 수훈자로 건국 이래 처음이고 부부무공훈장 수훈은 전 세계적으로 극히 드문 사례이다. 이정숙은 1922년 2월 함흥태생으로 6·25남침전쟁 직전 공산군 손에 부모와 남편을 잃었다. 본인도 복역하다가 탈출에 성공하여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서해무장대'를 조직, 무장대원 70여명과 농민군을 진두지휘하여 북한군과 싸웠다. 이후 서해무장대는 김종벽 대위가 이끄는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하였다. 일명 동키 제2부대로 불린 구월산 유격대는 동년10월 중순,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과 이도면 등의 반공청년들로 조직된 '연풍부대'를 모태로 하여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의 김종벽 대위가 후퇴 중 반공청년들의 자생적 무장조직을 규합한 최초 150여명으로 1950년 12월7일 창설한 유격대이다.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한 뒤 이정숙은 김종벽 대위의 보좌관 직책을 맡아 다양한 특수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1951년1월18일 고립된 재령유격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촌부로 가장한 채, 밤새 100리를 걸어 적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였고, 이외에도 월사리 반도 상류작전, 어양리 지역 상륙작전 등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전쟁중에 육군참모총장 표창도 받았고 “구월산의 여장군”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여성 유격대의 상징으로 꼽히는 이정숙 구월산 여장군의 활약상은 1960년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바 있으며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서도 생생하게 그려져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았으나, 최근 보수와 진보의 정치논쟁 속에서 전쟁영웅들의 활약상이 국민들의 뇌리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구월산 유격대와 더불어 백령도를 근거로 반공유격전을 펼쳤던 일명 “8240동키부대”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윤보선 대통령이 1961년 8월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의 협조를 받아 백령도에 “반공유격전적비”를 세웠던 것이다. 제 8240 동키부대는 황해도 일대의 마을 청년들이 스스로 조직한 결사대가 모체이다. 이름도 계급도 없는 유격대가 되어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중공군, 인민군들과 거의 맨손으로 싸워온 구월산 유격대에 감동한 미군이 이들이 지낼 수 있는 막사와 싸울 수 있는 무기를 공급하면서 조직한 부대이다. 따라서 구월산 유격대는 그때부터 무소속, 무계급의 유격대가 아닌 ‘제 8240부대 동키부대’ 소속이 되었고, 1951년 초에는 2500명으로 늘어났고 휴전 직후 해체될 때까지 800명 규모를 유지했다. 그들은 각종 유격전투를 하는 동안 적 사살 4000여명 생포 57명의 놀라운 전과를 올렸으며, 1954년 백령도로 철수하기 전까지 아군과 연합군들의 사기를 올리고 작전수행에 큰 시너지를 제공했다. 하지만 지금의 옹진군 백석면 형제 바위가 있는 비산곶 전투에서 이들이 탄 배가 적 포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175명 중 171명이 전사하고, 백령도를 사수하기 위해 싸우다 결국 516명이 목숨을 바친 것은 너무도 안타깝다. 그런데 정말 더 가슴 아픈 것은 이러한 분명한 역사가 존재하지만 구월산 유격대의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보상 또한 미흡하다는 점이다. 구월산 유격대 박부서 회장은 “구월산 유격대 생존자들에게는 정부에서 1인당 16만원을 지원하고 있다”면서 “과연 이것이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 혹은 생존자들에게 주는 합당한 보상이냐?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의 희생덕택에 오늘의 평안을 누리는 우리들은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여기서 정부와 국회 그리고 언론들은 이러한 현실을 널리 알리고 적정한 보상이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 충주 여교사 협의회에서 고(故) 김재옥 여교사의 추모를 기리기 위해 설립한 비문 [사진=김희철] 민간인 최초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고(故) 김재옥 여교사와 '동락리 전투' 김재옥이 제공한 북한군 정보를 활용해 기습한 국군, '화려한' 첫 승리 거둬 1966년 임권택 감독이 영화 '전쟁과 여교사' 만들어 빅히트 동락리 전투는 6·25 남침전쟁 초기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 국군에게 희망을 심어준 첫 번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전투경과를 보면, 7월 4일 9시 충주중학교를 출발한 제6사단 7연대 2대대(대대장 소령 김종수)는 저녁에 충주 신덕 저수지에 이르러 진지를 점령했다. 제7연대장(중령 임부택)은 음성 방어가 긴급하다는 판단 하에 제1, 2대대를 무주리와 음성으로 이동 배치하고, 제3대대는 생극으로 전진시켰다. 7월 6일 북한군 제48연대는 “국군이 차를 타고 도망쳤다”라는 동락초교 ‘김재옥’ 여선생과 주민들의 말을 듣고 신양리까지 수색한 결과 국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후 안심한 듯 동락리에 진출한 야포의 엄호 아래 신양리를 경유하고 음성으로 진출하기 위해 야음을 이용, 주력부대가 차량으로 7월 7일 새벽 5시경 동락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국군 제7연대 3대대장은 공격 명령을 내렸고 적은 크게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한편 가섭산 북쪽 644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2대대는 7일 새벽 5시 고지 아래로 신속히 내려가 6시에 공격을 개시하자 기습을 받은 북한군은 당황하며 동락초등학교 교정에서 국군 제 3대대 방향으로 사격을 하던 적의 야포가 2대대 방향으로 포구를 돌리고 있었다. 이때 제2대대 8중대장 신용관 대위는 81mm 박격포 1문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이에 북한군의 포진지를 파괴했고 후속탄에 의해 야적된 포탄 상자도 연쇄 폭발됐다. 이후 제 2대대는 북한군의 저항이 거의 없이 잔적을 소탕할 수 있었다. 동락리전투에서 국군은 ▲적 사살 2186명 ▲포로 132명 ▲122mm 곡사포 6문 ▲76mm 박격포 18문 ▲기관총 32정 ▲소총 1956정 ▲장갑차 4대 ▲1/2톤 트럭 60대 ▲1/4톤 짚차 15대 ▲사이드카 7대 ▲무전기/전화기 16대 ▲말 24필과 상당량의 탄약 등을 노획하며 6·25 남침전쟁 발발 이후 최초 승리이자 최고의 전과를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비해 국군의 손실은 전사 9명, 부상 53명뿐이었다. 노획장비는 대전에서 국민에게 전시함으로써 국군의 승리를 국민에게 널리 알렸다. 노획품은 소련 제품이라는 표시가 있어, 소련이 6·25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로 유엔에 보내졌다. 승전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제 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주었다. 이 동락리 전투의 승리는 북한군의 통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북한군 실태를 국군에게 알린 동락초등학교 여교사였던 ‘김재옥’ 선생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민간인으로서 '태극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 전투는 ‘포화속으로’, ‘피어린 구월산’과 마찬가지로 1966년에 임권택 감독이 당대의 최고 스타배우 김진규와 엄앵란을 기용해 ‘전쟁과 여교사’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해 대히트도 했다. 학도의용군, 불암산 호랑이, 구월산 유격대 등 잊혀진 이름들을 다시 기억해야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참여한 것을 강조하면서 "통합된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김원봉 복권 및 서훈’을 한 때 진행했었다. 한반도를 침공하여 ‘흥남철수’, ‘1.4후퇴’ 등 동족상잔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킨 중공군의 최고지도자인 시진핑이 이번 20일 북한을 국빈 방문했다. 정부는 이번 방북으로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이후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태인 상황에서 이뤄져 북미대화 재개의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부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들은 잊은 채 남침의 책임자 중 한 명인 김원봉 서훈과 시진핑 방북 결과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김원봉 복권 및 서훈’ 보다 오히려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들의 고귀한 영혼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거국적이고 최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조선시대의 의병과 6·25 남침전쟁시 학도의용군, 불암산호랑이, 구월산유격대 등 처럼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난 '숨은 영웅들'에 대한 선양사업은 국가의 가치를 재확인시켜주는 의미가 크다. 매년 치러지는 구월산 유격대 추모행사시 제단 앞의 액자(박정희 대통령 휘호)에 적혀있는 명언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처럼 “세상이 아무리 평안해도 전쟁을 잊고 있으면 국가에 위기가 닥친다”는 뜻의 사마법의 명언을 6·25남침전쟁 70주년을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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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5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1) '불암산 호랑이'와 '물쥐 대장' 김동석
    ▲ 탑 주연의 “포화속으로”라는 영화포스터와 6.25 남침전쟁 당시 불암산에 은거하며 유격전을 펼쳤던 육사생도들과 사병들의 ‘불암산 호랑이 은거 제1동굴’ 사진 [사진제공=김희철] 20일 시진핑이 평양 방문했지만, 69년전인 ‘50년 겨울엔 중공군이 한반도 침범 ‘6·25남침전쟁’시 유격전 펼친 '불암산호랑이', 최후의 한 명까지 목숨던져 가수 진미령의 친부 고(故) 김동석 대령은 '물쥐대장', 북한군 후방 교란 대한민국 지킨 '숨은 영웅들' 기려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9년전인 1950년 겨울, 중공군이 한반도를 침공하여 ‘흥남철수’, ‘1.4후퇴’ 등 동족상잔의 비극은 더욱 심화되었다. 20일에는 미·중 무역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의 최고지도자로는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 이후 14년 만에 북한 국빈 방문했다. 이번 시진핑 주석의 방북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이후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태인 상황에서 이뤄져, 북미대화 재개의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됐다. 중공군이 추가 침공까지 한 ‘6·25 남침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었던 대한민국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절약과 근면으로 오늘날의 경제 10대 강국으로 발전을 이뤄냈다. (사)월드피스 자유연합 이사장 안재철은 오랜 시간 연구하여 6·25남침전쟁 때 대한민국을 도운 나라가 67개국임을 밝혀내고 2010년 9월 3일 영국 기네스북 본사로부터 기네스북 등재 인증서를 받았다. “이기록은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일연합군으로 지원한 세계기록”이고 앞으로도 이 기록은 깨질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국가적 절명 위기에서 구해준 해외지원국에 대한 감사와 보은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보이지 않는 희생을 통해 나라를 지켜낸 숨겨졌던 애국자분들에게도 감사하고 기억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명확히 부여되어 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된 지 하루 뒤인 ‘50년 6월 29일 수원에 모인 200여명의 학생들은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소총1정과 실탄만을 지급받아 국군혼성부대에 수십명씩 편입시켜 한강 방어선에 투입됐다. 7월말에는 대구에서 87명의 학생들이 자진입대하여 김석원 장군 휘하의 부대로 편성되어 포항에서 북한군의 4차례 파상공격을 막아내는 전과를 올렸고 이 전투는 60년 뒤에 가수 겸 배우인 탑 주연의 “포화속으로”라는 영화로 재연되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이 최소 2만여명이며 전사자도 7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육군본부가 2004년 펴낸 “학도의용군” 책자에 따르면 전쟁 중 전투참전과 치안활동, 가두선전에 참가한 학생들을 27만5200명으로 집계됐지만, 중앙학도호국단은 전투참가 학생 2만7700여명 중 전사자 1394명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문교부 통계에는 학도의용군 5만여명중 7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기록 부실로 학도병들은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다되어도 전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학도의용군도 군인이라고도 할 수 없었던 “불암산 호랑이”라는 전설같은 역사도 있었다. 6월25일 새벽 북한의 불법남침이 개시되었을 때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는 생도1기(10기)와 2기(종합1·2기)가 13대1의 경쟁을 거쳐 1949년7월15일 생도 제 1기 338명으로 입교했었고, 생도 2기는 4년제 정규과정을 목표로 28대1의 경쟁을 거쳐 1950년 6월 1일 334명이 정식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있었다. 전쟁발발 당일 제1기생 262명은 임관을 20일 남겨놓고 있었다. 북한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육사와 보병학교 교도대대가 문산 축선에 투입됐다. 뒤이어 오후1시 쯤 사관생도들을 포천축선으로 투입하라는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이 하달됐다. 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생도대대를 편성하고 오후 8시쯤 징발된 차량을 이용해 포천시 내촌면의 303고지(부평리)에 배치했다. 생도대대의 우측에는 전투경찰대대가 배치됐다. 생도대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물리쳤지만 전황 악화에 따라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생도대대는 태릉으로 철수해 포천에서 철수해온 제9연대의 잔여병력과 함께 불암산 일대에 배치됐다. 27일 밤이 깊어지면서 전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학교장은 생도들이 적진에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고 철수를 명령했다. 대부분의 생도는 28일 아침 망우리고개를 거쳐 광나루 방향으로 철수해 한강을 건넜다. 그 시기에 철수명령을 받지 못했거나 받았다 하더라도 서울을 쉽사리 적에게 내줄 수 없다는 사명 의식에 불타는 사관생도들이 있었다. 제1기생 김동원 생도는 후방으로 철수하여 몸을 숨겨 살아나가는 방법 대신 목숨을 걸고 불암산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감행하기로 하고 동료 생도들의 뜻을 모았다. 강원기·김봉교·박금천·박인기·이장관·조영달·전희택·홍명집·한효준 등 제1기생 10명과 제9연대 김만석 중사 등 부사관 2명, 병사 5명 등 총 20명의 대원이 모였다. 전 대원의 투표로 최초 유격활동을 제안했던 김동원 생도를 유격대장으로 선출했다. 조영달 생도를 제1조장, 박인기 생도를 제2조장, 김만석 중사를 제3조장으로 각각 선출했다. 암호명은 ‘불암산호랑이’로 했다. 불암산 석천암의 김한구 주지스님의 안내로 인근에 산재한 3개의 자연동굴을 은거지로 활용하기로 했다. 준비를 갖춘 유격대의 정보책으로 임명된 홍명집 생도는 믿을 만한 주민과 접촉해 북한군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공격할 목표를 선정했다. 불암산호랑이의 첫 번째 공격은 7월 11일 새벽 퇴계원에 있는 북한군 보급소 기습이었다. 이 작전에서 유격대는 보급품을 불태우고 3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김봉교·박인기 생도와 제2기생 1명 등 3명이 희생되고, 한효준 생도가 부상했다. 두 번째 공격은 7월 31일 새벽 창동역 부근에 있는 북한군 수송부대와 보안소 기습이었다. 대원들은 수류탄과 화염병을 사용해 보급차량과 사무실 등을 습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퇴각 도중 김만석 중사가 전사했다. 8월 15일 밤에 이뤄진 세 번째 공격의 대상은 생도들의 모교였던 육사였다. 당시 북한군은 육사를 의용군 훈련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유격대는 의용군으로 끌려온 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대담한 공격을 시행해 북한군 50여 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유격대장 김동원 생도 등 6명이 희생되었다. 유격대의 마지막 전투는 북으로 끌려가는 마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9월 21일 밤 진접읍 내곡리에서 적의 수송대를 기습한 것이었다. 그때 1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주민을 구출했으나, 6월 29일부터 9월 21일까지 불암산을 중심으로 80일 동안 활약했던 유격대원 전원이 계급과 군번도 없이 9.28수복을 앞두고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쓰러진 유격대원 중에서 강원기 생도가 다음날 구사일생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구출돼 군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부상 후유증으로 ‘51년 7월 10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강원기 생도의 생존 시 증언으로 ‘불암산호랑이 유격대’의 활약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석천암 김한구 주지 스님의 손자 김만홍 씨도 당시 유격대에 식사와 물을 제공했다는 사실 등을 증언했다. 그러나 불암산 유격대에 대한 정부차원의 선양사업과 무공훈장수여는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 기회에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학도병 2만7700여명과 고립무원(孤立無援) 구천에 떠돌고 계신 ‘불암산호랑이’를 포함한 7000여명의 고귀한 영혼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거국적이고 최우선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 지난 2009년 사망한 김동석 대령이 생전에 친딸인 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는 모습과 그 무수한 공적으로 한국군 사상 가장 많이 받았다는 훈장과 기념패들. [사진제공=진미령, 김희철] 휴전선 동쪽이 고성까지 올라간 이유, 김동석의 ‘HID36지구대’ 활약 덕분 가수 진미령의 부친인 김동석은 한국군 사상 최다 훈장 수여자 미국에서 출판된 “My Father's War"의 저자 황성씨는 6·25남침전쟁 당시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tachment)36지구대원이었던 황하용씨의 아들이다. 이 책에서 작가의 아버지가 활동했던 동해 영흥만은 남북첩보전의 최대 격전 지역이었고 북한인민군은 영흥만 도서에 있는 첩보부대를 타격하기 위해 하루에 300여발씩 밤낮으로 포격을 가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지휘소가 있는 여도에 포격이 집중되었다고 말했다. 황하용씨는 “당시에는 전쟁이 끝나면 영웅이 된다. 부대에 들어가면 입을 것, 먹을 것, 잘 곳을 제공해준다. 고향에 돌려보내준다, 가족을 찾아주겠다”는 말에 HID의 부대원이 된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 부대의 지휘관인 김동석 대령은 전쟁을 전후해서 160번이나 낙하산을 타고 북에 침투했었다. 그는 북한지역 첩보활동을 위해 인민군 경력이 있거나 영흥만을 거쳐 내려오는 피난민 중에 판단이 빠른 자 등 똑똑해 보이는 북한 출신들을 HID로 차출하여 편성하였다. 황하용씨도 이들 중 한명이었다. HID36지구대 첩보부대원들은 야간에 은밀히 북한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게릴라, 기습, 암살, 첩보, 납치, 주요시설 폭파 등 각종 임무를 수행했다. 밤이면 물에서 올라와 첩보활동을 펼치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36지구대 첩보원들의 활동방식 때문에 북한 인민군들은 이들을 ‘물쥐’라고 불렀고 김동석 대령은 ‘물쥐 대장’이 되었다. 백범 김구선생의 경호원을 역임했던 김동석 대령은 육사 8기로 ‘6·25남침전쟁’이 터졌을 때 중위로 중대장이었으나 전쟁기간 중 박성철이 지휘한 북한군 15사단을 낙동강전선 안강-기계전투에서 궤멸시켜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명예를 안기는 등 두 차례나 특진해 소령을 달고 육군첩보부대 HID36지구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앞서 조선 애국의용대 대장을 지내던 1945년 해방직후에는 일본 관동군 소속이었던 박정희 중위가 소련군에게 체포됐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밖에 무수한 공적으로 한국군사상 가장 많은 37개 훈장을 받았고 주한 미군으로부터 전쟁영웅 칭호를 받은 김동석 대령은 정전 직후인 1954년 2월 적진에 잠입하여 강원도 통천부근에서 매복 중, 인민군 17사단장 이영희를 납치해 귀순시킨 뒤, 일본의 미군기지로 보내 정보를 캐내도록 하는 전과도 올렸던 참군인 이었다. 목숨을 걸고 국가를 지킨 전쟁영웅을 대하는 미국과 한국정부의 태도는 극과 극이다. 미국은 끝까지 찾아내 업적을 기리지만 한국은 그 평가와 업적발굴에 인색하다. 양양의 호국사찰 '영혈사'의 HID호국영령 천도제가 유일한 위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설악산 기슭인 양양에 위치한 호국사찰 ‘영혈사’에서 조국을 위해 산화한 HID36지구대의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호국영령 천도제를 봉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국군정보사령부내의 박물관에 김동석 대령의 유품을 모아 전시하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는 소식에 약간의 위안을 갖기도 한다. 그동안 북파공작활동에 얽힌 비밀들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어왔던 김동석 대령은 작고 전인 2005년에 자신의 회고록을 발간했는데, “적진에 들어가지도 적 지휘관을 암살하지도 않았던 가짜 HID들이 설쳐, 진짜 HID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회고록 “This man"의 출판 동기를 밝히기도 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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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4
  • [군대를 말한다] ② 병역 면제 노리면 ‘가짜 국가대표’
    ▲ 아시안 게임에서 일부 국가대표 선수들이 병역 면제를 받으면서 병역특례 제도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 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전문기자)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와 BTS 군 면제 논란은 국가 근간 흔들어 최근에 끝난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국가대표의 병역 면제로 인해 빌보드 차트 1위를 석권한 BTS에게도 병역면제 혜택을 부여하라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급기야 국무총리까지 국무회의 석상에서 병역 특례제도를 검토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국가 위상을 높인 스포츠 및 예술 분야의 국가대표나 스타들이 병역 면제를 받으면 군대는 국가에 기여한 것이 없는 사람들만 가는 곳으로 전락한다. 즉 병역이 신성한 국민의 의무라는 헌법 정신이 파괴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징병제 국가라고 하는데 이 말이 과연 타당한 말일까? 사전적 의미를 보면 징병제(徵兵制, conscription)는 국가가 국민을 대상으로, 해당 국가를 방위할 병역 의무를 강제로 부여하는 제도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병역의무는 근대국가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안보의 위협이 존재하는 나라에서의 병역은 국가가 강제로 부여하는 징병의 의미보다 주권을 가진 국민이 스스로 이행해야 하는 의무로 정의해야 옳다. 서양 역사에서 근대사회의 중요한 기점으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꼽는다. 귀족과 종교인들의 권위로 지배되던 구질서를 시민 혁명으로 무너뜨리고 모든 국민이 평등한 근대국가를 만든 역사적 사건에 의해 현대 민주사회가 형성됐다. 프랑스 혁명의 큰 의미 중 하나는 군대의 성격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군대는 왕실의 군대였고 왕실의 영광을 위해 전투에 참전했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지금도 국왕이 존재하는 영국, 태국 등의 군대에는 로열이란 용어가 붙는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근대국가에서는 왕실의 군대가 아닌 국가의 군대, 국민의 군대로 탈바꿈했다. 징병제하 병역은 주권자인 국민이 스스로 이행하는 신성한 의무 군대에 관한 서양의 전통은 그리스 민주주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특징은 국가의 모든 중요한 결정에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아테네 시민의 자격을 얻으려면 외적이 침입할 때 자발적으로 무장을 하고 뛰어 나가는 사람이어야 했다. 당시에는 무기, 갑옷 등 무장(武裝)도 자신의 비용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사람, 여성, 노예 등에게는 시민의 기본권인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 이후 로마제국도 군 복무에 기반을 둔 시민권 제도를 토대로 성장했다.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은 로마 군대에서 업적을 쌓고, 참전 경력이 있어야 출세할 수 있었다. 로마제국을 위해 전쟁에 참전한 사람만이 시민의 권리와 공직자,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부여 받는 것이다. 흔히 귀족의 의무라고 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오히려 오블리스 노블리제(oblige noblesse) 즉 “의무를 다한 자가 진정한 귀족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더 정확한 개념일 것이다. 한 국가의 성인 남성이 감당해야할 병역은 주권자인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만 하는 가장 명예로운 의무였다. 우리나라의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병역의무는 바로 헌법 1조의 주권재민 사상에서 시작된다. 결국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고 주인의 가장 큰 의무는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국가의 군대는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나라를 지키겠다는 굳은 주권의식과 사명감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병역의무는 국가의 주권자로서 국민이 당연히 감당해야할 가장 기본적인 책무이다. 자기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자만이 주권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위상 높였다고 병역 면제? 병역 의무 다해야 '진짜 국가대표' 이런저런 편법을 이용해 병역을 기피하는 사람은 주권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당연히 국가 고위 공직에 스스로가 나서지 말아야 하며,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한다. 최소한 지도급 인사의 자리에 나가 일하려면 당당히 군 복무를 마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물론 정당한 사유로 병역이 면제되는 것까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운동선수가 올림픽 메달에 의해 병역이 면제되고, 월드컵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면제 받으며,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면제되는 일도 깊이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국가가 병역특례를 부여하기 이전에 운동선수 스스로 당당히 병역을 이행하겠다고 해야 옳다. 자신도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이고 주권자라면 말이다. 병역특례를 국가의 명예를 드높인 자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혜택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제 갈수록 병역 자원 감소에 대한 우려가 많다. 이런 저런 이유로 병역을 면제 받는 일이 없어지고, 국민들의 병역 이행이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 우선이다. 특례를 확대 하는 것이 아니라 논란이 되는 병역특례 제도 자체가 필요한지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청년들은 군 복무가 주권자로서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국민은 군복 입은 군인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그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해야 한다. 또한 국가는 그 헌신에 합당한 혜택을 부여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스포츠, 예술 등 분야에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데 뭔가 기여를 했다고 국가에 대해 특별한 혜택을 요구하기 전에 헌법에 명시된 주권자로서 가장 기본적인 병역의무를 다 하겠다는 것이 우선이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가슴에 붙여진 국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국가가 없으면 국가대표도 없기 때문이다. 경동대 초빙교수 (예비역 해군소장) 前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부장 前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前 駐미국 한국대사관 해군무관 ‘대한민국 군대를 말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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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18-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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