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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전자(DNA) 정보를 확보해 국가 관리기록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황기환 지사의 유전자(DNA) 정보는 지난 4월10일 순국 10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파묘하는 과정에서 채취한 시료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 확보하였다. 황기환 지사 유해는 2008년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발견되어 2013년부터 국내봉환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으나 유족이 확인되지 않아 2차례 법원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국가보훈부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지난 1월 31일 묘지 측이 파묘에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은 황기환 지사 유해의 유전자(DNA) 정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파묘 과정에서 시료를 확보해 4월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황기환 지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 유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전자(DNA)정보가 황기환 지사의 유족을 확인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분석기법을 적용해 2개월만에 어렵게 정보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황기환 지사의 소중한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하고, 유족을 찾는데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앞으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협업해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국외 독립유공자의 유해 유전자(DNA) 정보를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고 후손을 찾는 중요 단서로 활용해 이분들의 희생과 공헌이 우리사회에 영원히 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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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시크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 대행 등이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복지증진 업무협약’을 3일 10시에 체결했다. 이날 업무 협약은 대한민국 자유수호에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분위기 조성,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삶 향유를 위한 복지증진, 생활안정을 위한 일자리 지원 확대 등을 목적과 주요 골자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업무협약에 따라 첫 번째 실천사업으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부-전국경제인연합회-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께 협력해 자유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곳곳을 쉼 없이 전진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용사의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헌정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발볼 차이로 기성화가 안맞거나 보행 불편이 있는 6‧25참전유공자 및 재방한 유엔참전용사 등 300명 영웅의 발을 삼면측정(3D스캔)하고 그에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One & Only Heroes Shoes)”를 제작해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직접 전달한다. 또한, 맞춤형 신발 제작을 위해 취형한 발 모양과 참전영웅의 인적사항, 참전기간, 누적 발걸음 수 등이 표기된 동판을 제작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헌신에 감사와 예우를 전하는 의미에서 11월 11일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부산)에 맞추어 유엔평화공원에 ‘영웅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모든 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자 일류보훈으로 가는 기본” 이라며 “국가보훈부 승격에 걸맞게 품격 높은 보훈으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경제계와 함께하는 일류보훈 동행’으로 시작된 양 기관의 상호협력은 이번 협약으로 더욱 공고화되어 향후 주거개선 및 제대군인 일자리 지원 등 국가유공자 생활안정을 위한 복지증진 사업으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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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전문기자] 주모로코 한국대사관(대사 정기용)은 6·25 남침전쟁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북아프리카 모로코 군인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족은 6·25 남침전쟁에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하메드 벤 카두르 라스리(당시 병장·실제 모로코 이름은 무흐 벤카두르 엘 아스리)의 딸인 프테탐 엘 아스리(81)씨와 손녀다. 라스리씨는 1951년 3월5일 1037고지 전투 중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유해는 부산 유엔 공원에 안장돼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9월 프랑스 군사기록원 자료를 통해 라스리씨를 포함한 8명의 모로코 군인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6·25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고, 모로코 보훈처와 함께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나섰다. 6·25 남침전쟁의 숨은 영웅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윤종진 보훈처 차장이 지난해 12월 현지 방문을 계기로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적극 나선 모로코 보훈처는 몇달간의 조사와 확인 끝에 첫 성과를 냈다. 그러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라스리씨의 병적 상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달리 기재된 데다, 유족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소재 파악도 어려웠다. 딸인 프테탐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군복 입은 사진이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단 한 가지 단서였다. 프테탐씨는 "4살 때 입대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6·25 남침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부산 유엔 공원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모로코인 참전용사들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프랑스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된 이유다. 모로코 참전용사 확인 작업은 애초 2012년에 시작됐지만, 당시 모로코 측에서 관련 자료 확인에 난색을 보이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참전용사 확인은 2021년 정 대사가 엘렌 르 갈 당시 주모로코 프랑스 대사에게서 6.25 참전 모로코인 자료가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재개됐다. 이후 부산 유엔공원에서 모로코 출신 참전용사 2명이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 대사관측은 프랑스 참전용사 및 전쟁피해자 사무소(ONACVG)의 협조로 프랑스 군사 기록원에 남아있는 관련 기록을 확보, 지난해 처음으로 참전용사 8명의 존재를 찾아냈다. 정기용 대사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에 모로코 출신 6·25 참전용사 가족을 찾게 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추가로 참전 용사와 가족을 찾는 한편 모로코 내 학교 교재에 이 사실을 수록하고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후속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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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며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인보다도 백선엽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라며 “백 장군님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시어 현재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작금에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이 계속되는 속에서 출범하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참군인 김관진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 이 재단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틸러리 전 연합사령관, 권오성 육군협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국회 회의 때문에 늦게 도착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만든 분, 백선엽 장군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내신 분, 박정희는 오늘의 선진 경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축사를 시작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렇기 때문에 이 세분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라발전에 큰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입니다. 허나 지난 정권에서는 폄하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세분의 역사적인 공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본 장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의 일에도 분골쇄신의 각오로 절대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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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창군(創軍) 원로이자, 6.25남침전쟁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할 때에 다부동전투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만드시고, 평양 선두입성, 중공군의 공세 저지, 남부군 토벌 등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셨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중에 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어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과 제10대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지신 구국영웅이다. 미군은 지금도 백선엽 장군님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있다. 백 장군은 전역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해서 교통부 장관 재임시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내신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에 김관진 이사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公人)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 ‘제복의 영웅’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여러 추모 및 기념단체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초일류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백남희 여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훈부의 도움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창립하여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장군님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공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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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회관에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호텔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민식 보훈부 장관, 권오성 육군협회장, 이중근 부영그룹회장, 고현석 육군참모차장, 벤플리트 장군 손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홍두승 단장)의 식전 공연에 이어 초대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녀이자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2부에서는 김재창 장군의 ‘가까이서 본 선배 백선엽 장군’과 유광종 대표의 ‘백선엽,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주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다부동 대첩 및 평양입성 전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던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의 박형수(94세) 회장과 김주찬(94세) 부회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전장 실상을 이야기할 때와,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가 환영사로 대한민국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며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한 백선엽 장군과 인연을 맺였던 청년 대표와 연평해전 전사자 서정우 하사의 모친의 플로어 맨트도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땐 국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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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4)]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52년 3월17일부터의 해병대 ‘장단·사천강 전투’는 6·25남침전쟁 후반기에 서부 전선의 유일한 한국군 부대인 우리 해병 1연대가 미 해병 1사단의 작전통제를 받으며 치열하게 싸워 장단반도를 확보함과 동시에 수도 서울을 압박하기 위한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시킨 쾌거이다. 1년 전인 1951년 6월, 중동부 전선에서 천연적인 지세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견고한 난공불락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도솔산 일대의 북한 인민군은 약 4200명의 병력으로 무수히 많은 지뢰를 매설하고 수류탄과 자동화기를 퍼부으며 완강히 저항하여 우리 국군은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도솔산 전투의 진짜영웅인 ‘수류탄 돌격 소대장’ 이근식 등이 분전한 국군 해병 1연대는 치열한 육박전과 인민군이 예상치 못한 강력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24개 고지를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진격하였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 다시 빼앗기고, 또 빼앗는 가운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24개 목표 고지를 6월 19일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전투의 발판이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無敵海兵)’ 이라는 휘호와 함께 부대표창도 받았다. 한편 도솔산전투 이듬해인 1952년, 국군 해병 1연대가 사수했던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당시의 전선은 유엔군은 총 5개 군단으로 미1군단이 서부를, 미 9군단과 한국군 2군단이 중부를, 미10군단이 중동부를, 한국군 1군단이 동부 지역을 담당했다. 이에 맞서 중공군 7개 군단이 서부에서 중동부까지 북한군 2개 군단이 중동부 일부 및 동부지역에서 대치하고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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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4)]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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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3)]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해병대사령부는 2014년 11월13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6·25 남침전쟁 당시 중공군에 맞서 서부전선을 지켜낸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62주년 전승 기념행사'와 '전승 기념비 제막식'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영주 해병대사령관을 비롯해 이상로 해병대전우회 중앙회 총재, 이재홍 파주시장, 황진하 국회 국방위원장 등 주요 인사와 시민 500여 명이 참석했다. 1952년 3월 17일부터 이듬해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때까지의 495일간, 임진강 서북쪽 장단반도 지역에서 치루어진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서 우리 해병대는 미 해병 1사단과 함께 4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싸워 서부전선의 수도권 방어에 성공했다. 당시 해병대는 5천여 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중공군 4개 사단 4만2천여 명과 치열한 전투를 하여 지역을 사수했으나 아군은 776명이 전사하고 3천214명이 부상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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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3)]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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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2)] 미 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호리철교 폭파ㆍ차단작전을 지휘했던 김신 공군장군은 공군창설, F-51 무스탕전투기 인수 및 공군의 최초 출격 등의 성공적 신화를 만들며 6·25남침전쟁에 참전했다. 휴전 이후에는 공군 행정참모부장, 참모차장, 6대 공군참모총장(1960∼1962년)을 역임하며 공군 발전에 기여했다. 그가 공군총장 재임시에 발생한 5.16은 육군 및 해병대 주도로 이루어졌고, 해군과 공군은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를 지지해서 계속 공군참모총장 직위를 유지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도 참여하였다. 전역 후에는 중화민국 대사를 거쳐 교통부 장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과 5공화국 말기에는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도 역임하여 힘든 역경의 길을 걸어온 아버지 백범 김구와는 달리 군과 정·관계의 원로로서 비교적 순탄하게 활동했다. 1988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뒤, 2000년부터는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으로 일했다. 덕분에 백범일지 간행 등 아버지와 관련된 각종 사업들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고, 오늘날 김구가 가장 대표적인 민족지도자겸 독립운동가로 기억되는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정부는 그에게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고 향년 94세였던 2016년 5월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또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주인공인 유치곤 공군장군(1927.7.17 ~ 1965.1.1)은 모든 출격조종사의 표상이 되었다. 평양 근교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그의 1,500피트 초저공 비행은 지금도 공군에서 전설이 된 신화로 내려오고 있다. 휴전후에는 공군의 전력증강ㆍ발전에 기여하다가 공군 제107기지 단장으로 재직 중이던 ‘65년 1월, 38세 나이에 안타깝게도 과로로 순직했다. 게다가 유 장군의 아들인 故 유용석 소령(공사 26기)도 ‘82년 제주도에서 훈련도중 순직하여 부자가 대를 이어 ‘빨간 마후라’의 순국영웅이 되었다. 한편 그의 고향인 경북 달성군의 '유치곤장군 호국기념관'에는 지금도 많은 추모객들이 유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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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2)] 미 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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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1)] 미 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개전 초기에 전투가 불가능한 극심한 전력 불균형 상태에도 불구하고 한국공군은 연락 및 정찰용 항공기에서 손으로 일반 폭탄을 투하하는 항공전 사상 유례가 없는 작전형태를 보였으나 공군의 전투작전 능력은 이후 4단계를 거쳐 발전하게 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1950년 6월25일부터 1951년 3월31일까지 미군 조종사의 요기(僚機)로서 전투에 참여한 제1작전기다. 이때 전쟁 발발 약 일주일이 지난 시점인 1951년 7월2일 F-51기 10대를 도입, 보유하게 됨으로써 한국 공군 사상 최초로 공중 전투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F-51 전투기 보유량을 확대했다. 참고로 항공기 보유량 추이를 살펴보면 1950년 12월에F-51기 8대를 추가해 총 19대, 1951년 12월에는 총 44대, 1952년 12월에는 총 75대, 휴전이 성립된 1953년 7월에는 총 118대로 증가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1951년 4월 1일부터 9월 18일까지 제주기지로 이동해 F-51에 대한 본격적인 훈련을 받은 이후 백구부대작전과 1차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통해 단독출격 능력을 배양하고 미 공군에 능력을 검증받아 단독출격 능력을 인정받는 제2작전기에 이른다. 김영환 대령이 강릉전진기지로 부임했던 1951년 9월28일부터 1952년 10월 27일까지 제3작전기에는 단독출격을 위해 강릉기지로 10전투비행전대를 전개해 동부 및 중ㆍ서부지역에 대한 항공차단작전에 치중해 실시했으며, 이때 승호리철교와 송림제철소 폭파와 평양 대폭격 작전 등의 쾌거를 달성했다. 1952년 10월 28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제4작전기에는 한국 공군과 육군 간 공지합동작전에 주력하면서 후방차단작전과 351고지전투 항공지원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이로써 한국 공군은 MIG-15 요격임무와 같은 제공 임무를 제외한 모든 대지공격 작전이 가능한 면모를 갖추게 됐다. 병력면에서 살펴 보면 창군 당시에는 장교 143명, 항공병 1376명, 항공사관학교 사관후보생 97명을 포함 총 1616명이었으며, 개전 시 병력은 장교 242명을 포함 총 1897명이었다. 그러나 1953년 7월 정전 시에는 1만1461명으로 증가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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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1)] 미 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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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0)] 미 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쟁에 대한 아무런 대비 없이 6·25남침전쟁을 맞이한 것은 국군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공군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전투장비, 즉 전투기도 없이 적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이는 한국 육군과 해군이 1948년 8월15일 한국정부 수립과 함께 정식으로 출범했지만 공군의 창설은 지연됐기 때문이었다. 8·15광복때 한국에는 공군이 필요 없다는 인식을 가진 미 군정청과 한국군 내부의 반대로 공군창설은 한국전이 발발하기 약 9개월 전인 1949년 10월1일이 돼서야 공군창설 7인을 포함한 항공인들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초기에 중국공군 상교(육군중장 급) 겸 지휘부 참모장, 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한국 광복군 참모처장이었던 최용덕 장군을 위시한 장덕창, 이영무,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 등 공군창설 7인은 미국식 훈련을 다시 받고 육군 참위로 시작하라는 등 미 군정의 홀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본받자는 최용덕 장군의 설득으로 홀대에도 불구하고 모두 육군 참위로 임관 후 육군 항공대를 창설, 대한민국 공군의 기틀을 닦았다. 당시 장덕창은 일본 민항기 베테랑 파일럿으로 9800시간 비행기록 보유, 이영무는 중국공군 항공대 부대장 소교출신, 박범집은 일본군 육사출신 항공인 중에서 가장 선임자였고, 김정렬은 일본군 항공대 중대장(대위), 이근석은 일본 항공대 소년병 배경의 화려한 독파이터 경력 등의 무시못할 배경이었다. 빨간 마후라의 창시자인 김영환의 경우에는 다른 6명과는 달리 통위부 시절부터 군에 들어가 있었기에 공군창설을 위한 소통의 창구로써 포함되었다. 이전 육군 항공사령부로부터 독립한 공군의 규모는 병력 1616명과 항공기 20대(L-4/5 각 10대)였다. 독립하여 창설된 공군은 북한 공군력 확대에 자극받아 미국에 수차례에 걸친 공군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좌절됐다. 그러나 국민성금으로 구입한 캐나다산 T-6기 10대만을 추가 도입한 상태에서 공군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비극적인 전쟁을 맨몸으로 맞게 됐다. 반면에 북한 공군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전투기 및 폭격기 197대와 지원기 29대 등 총 226대의 항공기와 병력 약 2800여 명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 공군이 전투가 불가능한 극심한 전력 불균형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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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0)] 미 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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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3)롬멜 장군의 솔선수범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었던 롬멜 장군은 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가 열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솔선수범을 통해 부대의 단결과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부하들로 하여금 갖게 함으로써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1941년 롬멜은 새벽 5시면 장갑 지휘차량을 타고 상황보고를 검토한 뒤 하루 종일 최전선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교통수단으로는 비행기, 전차, 장갑차, 자동차 때로는 도보였는데 그 어느 것이든 스스로 조종 또는 운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비행기를 조종하여 전선부대를 돌아볼 경우 부대의 상공을 선회하거나 또는 부대 전방으로까지 날았으며 때로는 지상에 착륙하였다. 이러한 전선방문을 통해 전선부대의 상황을 파악하였고 독려하였다. 포가 제대로 위장되었는지, 지뢰매설 량이 부족하지는 않는가, 탄약 보유량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등을 두루 살펴보았다. 장병들에게는 대단히 온후하였으나 부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지휘관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가혹하였다고 한다. 1942년 10월 물자와 병력 수에서 롬멜군을 압도하는 몽고메리군에 의해 엘 알라마인에서 퇴각하기 시작한 롬멜군은 모든 면에서 절반밖에 안 되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몽고메리군의 약점을 십분 이용하여 퇴각을 함에 있어서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폭풍을 휘어잡으려면 선풍 속에 뛰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외치면서 일상생활에서부터 전투지휘에 이르기 까지 솔선수범을 보이던 롬멜 장군이 건강회복을 위해 아프리카 전선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간 후, 롬멜이 없는 아프리카 군단의 일부가 포위되어 항복했으며 이때 독일군 포로들은 도보로 수에즈 운하 지구의 포로수용소로 연행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패배감이라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졌다. 싸웠더라면 이겼을 것이다.”라고 장교들이 외치면 병사들은 “자 영국 영토 수에즈로 간다. 가자! 영국으로 영국 땅으로.... .”라고 행진하는 광경도 보였다고 한다. 그러면 롬멜 장군은 어떻게 부하들의 사기를 필승의 자신감으로 끌어올렸을까? 롬멜 장군은 “부하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승리하는 기회를 자주 체험시키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투에서 패배하는 가장 확실한 원인은 장병들의 전의 상실이다. 따라서 전투의지를 상실하지 않도록 지휘관이나 지휘자가 부하 이상의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솔선수범이며, 롬멜은 이 점에서 뛰어난 지휘관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급지휘관이 병사들의 조그만 문제까지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챙길 때 비아냥거린 일은 없습니까? 부하들 앞에서 솔선수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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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3)롬멜 장군의 솔선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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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2)마타크 수상과 군종 목사의 용기 있는 죽음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1975년 4월 12일 캄보디아 주재 미국대사가 마타크 수상에게 헬기를 보내 국외로 탈출할 것을 권유했을 때 그는 유언장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유언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하가 나에게 보여 준 관심과 자유세계로 탈출시켜 주겠다는 제의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난 비겁한 방법으로 조국을 떠날 수는 없다. 나는 지금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을 버려야 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귀하는 물론 귀하의 위대한 조국인 미국이 이런 고통을 겪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당신들은 우리를 보호하기를 거부했고, 그래서 우리 어떻게도 할 수 없게 되었다”라며 “사람이 태어나 언젠가 죽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그러나 내가 당신들 미국을 믿은 단 한 가지 과오를 저지른 죄로 내가 사랑하는 이 곳 산하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고 적혀 있다. 이 편지는 프놈펜의 멸망이 있은 지 1년 뒤 미국 대사의 서류뭉치 속에서 발견되며 알려졌다. 6.25남침전쟁 때의 일이다. 전쟁발발 직후 미국의 종군 목사가 수원에서 적에게 포위되었다.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모두 지체 없이 후퇴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후퇴를 거절했다. 장병들은 군종목사에게 후퇴를 간청했다. 그는 완강히 거절하며 덧붙여 말했다. “부상병을 두고는 갈 수가 없다.” 장병들은 후퇴했고, 군종목사와 부상병들만이 벌판에 남게 되었다. 적은 밀물처럼 몰려왔다. 후퇴한 어느 장교가 능선 위에서 쌍안경으로 살펴보았다. 군종목사는 기도하며 숨져 갔다. 목숨을 바쳐 가며 양심의 명령대로 숨져 간 한 군종장교의 최후. 그 사람인들 목숨이 아깝지 않았겠는가. 앞서가는 나라. 앞서가는 민족은 비겁한 삶보다 용기 있는 죽음을 택할 줄 안다. 여러분은 비겁한 삶과 용기 있는 죽음 중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군종장교가 현장에 남아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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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2)마타크 수상과 군종 목사의 용기 있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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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9)]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전쟁중이던 1951년 어느 날, 공군창설 7인 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그의 형 김정렬(당시 공군참모총장) 장군의 집을 방문했었다. 형수 이희재 여사가 입은 붉은 치마를 보고 형수에게 붉은색 천으로 머플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목에 두르기 시작한 것이 ‘빨간 마후라’의 유래가 되었다.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수료했으나 1948년 공군에 입대한 김영환은 전쟁 초기에 T-6 훈련기를 조종하며 폭탄과 수류탄을 직접 던져 적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후 김 대령은 1951년 9월28일에 강릉전진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출격작전을 지휘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했다. 또한 그는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무장공비가 잠입한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기총소사로만 공격하여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일화도 있으며, 이뜻을 기리고자 문화재청에서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휴전후인 1954년 3월5일, 김 공군장군은 10전투비행단 창설행사 참석차 비행기를 몰고 가던 중 악천후로 동해시 인근 상공에서 추락하면서 애석하게 순직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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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1)참군인 미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의 명예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체스터 니미츠 미 해군 제독은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해군의 주역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천 척의 함정과 항공기 그리고 수백만 명의 병력을 지휘했는데 이것은 한 명의 지휘관이 담당한 것 가운데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막강한 군사력이었다. 니미츠는 초급 장교 시절에 함정을 잘못 몰아 진흙 벌에 좌초시킨 일로 인해 군사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진주만에 잠수함기지를 건설하였으며 그 뒤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군에서 디젤기관의 일인자가 되었다. 또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최초로 NROTC(해군 학군단)를 창설했으며, 해군대학에서는 항공모함의 효과적인 호위진형인 원형진을 창안하였다. 그 뒤 아시아 함대의 함장과 제1전함부대 사령관을 역임한 뒤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해군본부에서 인사문제를 담당하는 항해국장의 자리에 있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Frank knox)는 니미츠를 태평양함대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전쟁 도중 원수로 진급한 니미츠는 종전 후에 해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다가 전역했으며, 미국의 유엔 대표로 활동하며 카슈미르 문제를 담당하기도 했다 . 은퇴 이후에도 니미츠에게 대학총장, 산업체나 사업계에서도 높은 급료를 주겠다고 제안해 왔으나 그 제안들을 거절했다. 아들인 체스터 2세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안 하시렵니까?”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세요. 아버지에게 돈이 필요 없다면 자식들에게 주세요.” 나중에 아들은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년 뒤 그는 아버지 니미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버지는 이런 마음을 늘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태평양전쟁에서 가족이나 친지들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군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 만약에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상급자로 모셨던 해군사령관이 해군사령관 이외의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된다면 해군에 대한 감정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하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군인의 명예심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니미츠의 삶은 진정 멋있고 위대한 삶이었다. 군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은 비록 퇴역 후에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그는 행동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군에 있을 때의 지위와 명성을 이용하여 일반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관례들을 상기해 볼 때 체스터 니미츠의 삶은 너무나도 부럽고 멋있는 삶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독자 여러분은 한 번의 실수로 좌절한 적은 없습니까? 전역(퇴역)후에도 군인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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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1)참군인 미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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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8)]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은 훨씬 경험 많고 능력있는 미군조차 실패하여 노심초사(勞心焦思) 하던 상황을 신출내기 한국 공군이 해내면서 그 능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고, 작전 성공 이후 오늘날까지도 평양 대폭격 작전, 351고지 전투 항공지원작전과 더불어 대한민국 공군의 쾌거로 늘 회자(膾炙)되고 있다. 배우 신영균이 주연한 추억의 영화 ‘빨간 마후라’는 김신 공군대령과 유치곤 공군대위의 활약이 돋보인 이 승호리 철교 폭파적전을 각색해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한편 2월21일 미 5공군 각 비행단의 지휘관 회의가 있었는데 이날의 전과를 설명한 김신 대령은 이 자리에서 축하 박수 세례를 받았다. 이때 유엔 공군의 출격에 참가했던 한 미군 장교가 다가와서 “아주 반갑다”며 “우리도 거기 갔지만 끝내 한국 공군이 끊었구먼”하고 축하해 줬다. 유엔 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시키기 위해 연일 부대를 바꿔 가며 약 500회(소티)출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한국 공군에게 넘겼다. 폭파임무 인계 당시에 미군장교 두 명이 한국 공군의 성패 여부에 대해 돈을 걸고 내기를 했었고, 이날 김신 대령에게 반갑게 축하 인사를 던진 장교가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었다고 전해졌다. 승호리 철교 폭파ㆍ차단작전의 성공은 한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상황에서 초저공 침투비행을 두려워하지 않은 조종사들의 높은 전투의지에 기인한 것으로 대내외에 한국 공군의 높은 전투기량과 감투정신을 과시한 사례로 기록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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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8)]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