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시대Home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 ‘9·19 군사합의’ (하)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이 군사합의에 따르면 금번 무인기의 도발은 명백한 합의사항 위반이다. 특히 이번 무인기 도발은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도 “정찰, 감시를 넘어 언제라도 폭탄과 화학무기 등을 이용한 기습 공격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예상을 가능케 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북한의 군사합의를 무시한 북한의 군사적 행동들이 여럿 있었다. 지난 10월 북한은 야음을 틈타 군사합의가 설정한 비행금지구역 코앞까지 군용기를 내려보낸 데 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인 탄도미사일 발사에 나선 다음 9·19 군사합의를 명시적으로 위반하는 완충구역 내 방사포 등 포병 사격까지 감행했다. 이제 더이상 북한의 선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지난 정부에서 그토록 자랑하던 9·19 군사합의는 북측의 계속되는 위반으로 무실화를 넘어 폐기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번은 실수로 볼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합의사항 이행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명백한 의도로 보아야 한다. ◀김진형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 ‘9·19 군사합의’(상)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 전문기자] 합동참모본부는 26일 오전 10시 25분경부터 미상 항적 수 대가 인천 강화군, 경기 김포시, 경기 파주시 인근 MDL을 넘어 우리 영공에 침입한 사실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합참은 일부 무인기가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민간인 지역까지 비행했고, 일부는 육안으로 식별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북한 무인기 5대가 2014년 이후 처음으로 우리 영공을 침범해 서울 상공까지 침투한 것이다. 우리 군의 대응 작전으로 인천국제공항과 김포공항의 민항기가 한때 이륙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이 일체의 군사적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합의했다. 바로 ‘9·19 군사합의’이다. 핵심 내용은 △일체의 적대행위 중지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 △서해 해상 평화수역화 △교류협력과 접촉 왕래 활성화를 위한 군사적 보장대책 강구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강구 등 5개 분야에 걸친 합의사항을 합의문에 담았다. 합의서 1조 3항을 상기해 보면, 쌍방은 2018년 11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상공에서 모든 기종의 비행금지구역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기로 했다. “고정익항공기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동부지역은 40km, 서부지역은 20km를 적용하여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다. 회전익항공기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10km로, 무인기는 동부지역에서 15km, 서부지역에서 10km로, 기구는 25km로 적용한다”라고 명기됐다.(하편 계속)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
북한 핵·미사일 대비해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절실(하)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둘째, 한반도 안보 문제에 한국이 직접적 당사자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은 미·일 동맹을 기반으로 한 안보공동체다. 그러나 한반도 안보 문제에 미·일 두 나라가 따로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 문제,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이 제외된 협력체계가 가동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이 중심에 서서 한반도 문제를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우리 문제가 다른 나라에 의해 간섭받고 심지어 배제된 뼈아픈 경험이 있다. 현재 우리의 군사력·경제력·외교력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일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 있게 한반도 문제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한·미·일 및 한·일 군사 협력은 한국이 먼저 적극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2016년 체결됐지만, 문재인 정부 시절 논란이 됐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정상적 복원을 통한 한·일 및 한·미·일의 원활한 정보 소통체계를 구축하고 군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한·미·일 군사협력 체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확고한 한·미 동맹에 기반을 둔 한·미·일 군사협력, 군사 동맹이 아닌 한·일 군사협력이 담대하게 추진된다면 북한의 도발 억제는 물론 안정적인 한반도 상황 관리가 가능해진다. 글로벌 중추 국가를 위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노력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
북한 핵·미사일 대비해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 절실(상)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한국과 미국·일본 국방부 장관은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미사일 경보 훈련과 탄도미사일 탐지·추적 훈련 정례화 등 대북 공조 방안에 합의했다. 3국 장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 정착을 달성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자는 약속도 했다. 이를 놓고 일각에서는 일본의 군사 대국화와 연계하며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한·미·일 3국의 무기 시스템과 국제정치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이제는 한·미·일 군사 협력에 대한 담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9, 10월 북한의 계속된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한국 해군과 미국 핵 추진 항공모함,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참가한 3국 연합훈련이 동해에서 두 차례 진행됐다. 북한은 지난 10월 이후 항공기·탄도미사일과 포병 사격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발했다. 특히 지난달 14일에는 화성-17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북한은 핵 탑재가 가능한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뿐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도달 가능한 ICBM을 발사함으로써 미사일 능력을 과시했다. (중편 계속)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
캠프리딩코리아, 책 읽는 군인으로 강한 군인 만들기,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전문기자] 사단법인 캠프리딩코리아와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는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는 신병들에게 배부할 1,850여 개의 ‘책꾸러미 전달식’을 실시했다. 책꾸러미 전달식에는 캠프리딩코리아 정병국 대표와 유성욱이사,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민승현 본부장 그리고 박원호 육군훈련소장이 참석하였으며, 코로나19 확산방지 차원에서 최소인원으로 진행되었다. ‘책꾸러미’는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에서 제작한 독서가이드북 및 독서노트와 양서 1권 등 총 3권으로 구성된다. 양서는 신병들이 서로 돌려볼 수 있도록 젊은 세대가 좋아하고 시중에서 도서판매 순위가 높은 70여 종의 신간 서적이 전달됐다. 책꾸러미 전달은 '책 읽는 군인'으로서의 힘찬 출발을 지원하는 독서진작 프로그램이다. 입대와 함께 독서를 경험하게 하고 책 읽은 습관을 갖도록 하여 병영독서문화로 발전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입대 장병과 가족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캠프리딩코리아 정병국 대표는 “입시 위주의 교육과 취업 준비 등으로 바빴던 청년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독서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은 병영문화를 선진화하여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미래의 리더를 육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책꾸러미는 매년 12만 명의 청춘이 정예 용사로 다시 태어나는 정병(精兵) 육성의 요람 육군훈련소에서 병영독서문화를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또한 장병들이 군 복무 기간을 사회 진출을 대비하는 유용한 자기계발의 기회로 만들 뿐만 아니라 독서를 통해 열린 병영, 소통하는 선진 군대문화 조성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0)]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상징 명칭이 ‘열쇠부대’로 불리는 5사단은 1948년 4월29일 경기도 수색에서 3, 4, 9연대를 기반으로 5여단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후 여단 주둔지가 전라남도 광주로 변경되었고, 1949년 5월12일, 5보병사단으로 승격했다. 이때 15, 20연대가 사단으로 배속되었다. 초대 사단장은 송호성 준장. 이후 1949년 7월에는 백선엽 대령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사단은 15연대를 전주에, 20연대를 광주에 주둔시켜 빨치산 토벌을 주 임무로 하며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였고,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후 1950년 6.25남침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의 소환으로 서울 용산에 올라와 북한군 남하 지연작전에 참여하였다. 이 시점에는 백선엽이 1사단으로 옮겨가고 이응준(군영1기) 준장이 사단장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말이 지연전이지, 닥치는 대로 투입하라는 채병덕 총장의 삽질 작전지시로 말미암아 예하 부대들은 사단장조차 모르는 사이 많은 병력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와중에 2개 대대로 부대 건제를 유지했던 15연대는 1개 대대만 남은 1사단 13연대 재건을 위해 해체되고, 20연대 역시 창동 - 미아리 축선 방어전을 위해 한강 이북에 투입되었다가 전멸하여 지휘 가능한 연대들이 사실상 없어졌다. 그래도 남은 병력들을 긁어모아 7월1일부터 시흥전투지구사령부 예하부대로서 지연전을 전개하며 철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나마 있던 병력들까지 분산되어 17일에는 기어이 사단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후 1950년 10월8일 대구에 주둔 중이던 27연대, 마산에 주둔 중인 35연대, 부산에 주둔 중인 36연대를 근간으로 대구에서 5보병사단을 재창설하였고, 이 연대들이 지금까지 이르게 됐다. 다시 재창설된 5사단은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루었는데, 그 중 36연대가 미 2사단 예속으로 치룬 ‘피의 능선 전투’와 ‘가칠봉 전투’가 유명하다. (하편 계속)
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⑮ 독일이 불침함(不沈艦)이라고 자랑했던 비스마르크(Bismarck)호의 침몰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지휘관 또는 장교간의 불화나 분쟁은 부대 군기에 커다한 악영향을 끼친다. 지휘부나 장교단에 대한 갈등과 마찰은 부대 전반에 대한 자신감을 약화시키며 군기를 저해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의 한 예를 독일이 불침함(不沈艦)이라고 자랑했던 비스마르크호의 침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의 유명한 전함 비스마르크호가 북대서양을 단독으로 순항하고 있을 동안 그 전함 내의 승무원 사이에 군기가 이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생존자들을 통해서 밝혀졌다. 처음 승무원들은 그들의 함이 불침함이라는 신념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출항하였다. 또한 첫 해전에서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호를 격퇴시키고 후드(Hood)호를 격침함으로써 사기충천하여 승리감이 최고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 후 루에트엔스(Luetjens) 제독과 비스마르크호 함장 린데만(Lindeman)대령 사이에 있었던 의견충돌은 장병들 사기를 급작스럽게 저하시키고 불안한 정신 상태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투 중 포수가 자기 위치를 떠나 살길을 찾으려고 도망치고, 장교들은 포탑 위에서 포수들이 지정된 정 위치에 붙어 있도록 위협사격을 하는 등 함 내의 전투군기가 엉망이 되었다.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서, 또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구박했던 사람을 위해서는 죽을 각오로 싸우고 싶지 않다”는 사고가 장병들 사이에 퍼졌다고 한다. 그 결과 비스마르크 호는 전력이 훨씬 약한 로드니(Rodney)호와 킹 조지(King Geroge)5세 호의 공격을 받고 완전히 침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비스마르크 호의 침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군대 병영 내에 군기가 이완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⑮ 독일이 불침함(不沈艦)이라고 자랑했던 비스마르크(Bismarck)호의 침몰
-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⑭표트르(Pyotr)대제의 공정한 처벌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러시아 표트르(Pyotr) 대제의 황태자 알렉세이(Aleksei) 대공이 해군사관학교 생도로서 군함을 타고 있었을 때 그의 군함이 덴마크 근해를 항해하다 암초에 걸렸다. 이 때 함장은 우선 대공을 구하려고 먼저 내린 보트에 타도록 권했으나 대공이 듣지 않으므로 함장은 “대공이라 할지라도 본관의 지휘하에 있는 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알렉세이 후보생! 보트에 타십시오!”라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대공은 “귀관은 상관이다. 다른 일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복종하겠지만 이것은 제왕의 의무로서 복종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군함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수병과 사관들 모두가 군함에서 내린 후 대공은 마지막까지 남은 함장과 함께 보트를 탔다. 상륙하자마자 함장은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죄로 대공에게 일주일간의 금고를 명했다. 표트르 대제는 이 사실을 듣고 “나는 불복종의 죄인인 대공에게 금고를 명한 함장의 공정한 처벌을 기뻐하고, 또 내 아들이 불복종한 행위를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두 사람에게 상을 내렸다. 여기에서 만약 함장이 알렉세이 대공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처벌을 하지 않았다면 후에도 함장은 다른 사람을 처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벌은 언제나 공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강이 확립되고 규율이 선다. 규정과 법률은 누가 먼저 지켜야 한다고 봅니까?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때 어떠한 조치를 취합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⑭표트르(Pyotr)대제의 공정한 처벌
-
-
[김희철의 전쟁사(133)]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99년 7월, 33년전 아버지가 지휘했던 중동부 최전선 보병연대에 아들이 다시 연대장으로 지휘봉을 잡게 돼 화제가 되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화제의 주인공은 육군산악부대 예하 연대의 37대 연대장으로 7월20일 취임했던 김봉환(육사34기) 대령이었다. 김대령은 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 축구 골키퍼로 지금은 없어진 ’3군사관학교체전‘에서 맹활약하여 선후배에게 신화로 각인된 만능 스포츠맨으로 경호실 등 전후방 각지에서 작전전문가로 근무했다. 지난 1966년 아버지 김촌성(육사8기.예비역준장)씨가 14대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초등학교 5년생으로 장병들과 함께 생활하던 바로 그 부대에 다시 연대장이 되어 33년만에 돌아왔다. 또한 김대령이 1997년 2월 육군대학 공격학처 교관으로 부임할 당시에도 사상 첫 육군대학 2대 교관 탄생 기록을 남겼던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 및 본인 3대가 육군 장교로 근무한 전형적인 무관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김촌성장군은 1948년 육사에 입학해 ’49년 1월 육군 기병소위로 임관, 다음해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 등 많은 훈.표창을 받았으며 전후방 주요 직책을 거쳐 아들이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79년에 준장으로 예편했다. 지난 1944년 조선 신궁체육대회 중장애물 승마경기에서 일본선수를 물리치고 우승하기도 한 김장군은 예편후 LA올림픽 한국승마선수단 감독, 서울올림픽 승마경기 국제심판으로 활동했으며 국제승마협회 공인국제심판도 역임했다. 조부인 故 김인영 예비역 헌병중령(헌병3기)은 아들보다 늦게 1950년 1월, 47세의 나이에 헌병대위로 임관, 치안경비와 포로 후송을 위해 창설된 헌병사령부 예하 2대대 9중대장으로 6·25남침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당해년도 10월21일 강원도 철원군 금화읍 읍내리에서 치안경비와 포로후송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김봉환 장군은 37연대장 취임시 "어릴 적 뛰놀던, 아버지의 땀과 열정이 배어있는 부대를 지휘하게 돼 기쁘다"면서 "최강의 전투부대를 만들기 위해 힘쓰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김 장군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매년 ’금화지구 희생 헌우(군사경찰 전우) 추도식‘이 매년 지속되어 잊혀지기 쉬운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후배 장병들에게 군인으로써 호국정신과 애국심 및 희생정신을 일깨워주고 있으며 3대를 잇는 육군장교 가문으로 작금의 청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133)]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하)
-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⑬이스라엘 다얀 국방장관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이스라엘이 아랍권의 13개국과 전쟁을 할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이었던 다얀 장관은 전 세계를 향해 성명을 발표했다. “지금 이스라엘 군대는 막강한 최신무기로 무장하였다. 우리는 이 무기로 아랍연합군을 수 시간 내에 물리칠 것이다.” 이소식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퍼지자 미국과 구소련 등 강대국까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핵무기 또는 그보다 더 강력한 신무기를 개발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무기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이스라엘이 개발한 신무기를 알아내려고 노력을 했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전쟁은 6일 만에 끝났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신무기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후 다얀 장군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단 세 시간 만에 승리를 굳힐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최신무기 덕분이다. 이스라엘 전군의 가슴 속에 비장되어 있던 그 무기는 바로 불타는 애국심이었다.” 결국 불타는 이스라엘 민족의 애국심은 몇 십 배나 되는 적군을 단 시일 내에 무찌를 수 있었던 가장 강한 무기였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⑬이스라엘 다얀 국방장관
-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⑫한신장군의 해의퇴식(解衣堆食)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해의퇴식이란 “자기의 옷을 벗어서 남에게 입혀주고 자신이 먹을 음식을 먹여 준다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 성어이다. 상급자가 아랫사람과 동고동락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진(晉)나라 말년 각국의 제후들이 다투어 일어나 진에 반항하였다. 한 왕의 후손인 한신도 한 자루의 칼을 들고 종군하여, 처음엔 한 왕의 부하로 몸을 의탁하고 있다가 한 왕이 죽은 후 항우의 밑에서 작은 벼슬을 하였다. 그러나 항우가 한신을 중용하지 않자, 한신은 자신의 포부를 펼 수 없어 후에 다시 한 왕 유방의 부하로 투신하였다가 한 왕에게 중용되어 초(楚)의 명장 용저를 패사시켰다. 항우는 이 소식을 듣고 겁을 먹어 한신에게 사람을 보내어 유방으로부터 이탈하여 자기와 함께 천하를 삼분해서 각기 왕이 될 것을 종용하였다. 한신이 그 사신에게 “부하를 믿지 않는 한 왕 밑에서는 일할 수 없으며, 자신의 옷과 음식을 나누어 줄 정도로 부하를 아끼고 믿는 유방을 배반할 수 없다.”고 전하라고 일렀다. “사람을 쓰게 되면 의심하지 말 것이며,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 말라(用人不疑, 疑人不用)”는 속담이 있다. 윗사람이 부하를 신임한다면 부하도 역시 충성스럽게 보좌하며 절대로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부리거나 사귀는데 진정과 성실로 대하고 상호 신뢰감을 잃지 않는 것이 정도라 하겠다. 한신장군의 해의퇴식을 통하여 지휘관과 부하 간에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상급자와 하급자 간에 신뢰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⑫한신장군의 해의퇴식(解衣堆食)
-
-
[김희철의 전쟁사(132)]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10월1일, 국군 1군단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했고, 유엔군은 10월9일, 서부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평양이었다. 이후 북한군이 결사적으로 평양을 방어하는 가운데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의 선두 입성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다. 미 1기병사단의 우측에서 공격하는 국군 1사단은 차량 부족으로 11일 아침에야 고랑포 정면의 38선 진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 후 시변리(13일)-신계(14일)-수안(16일)-상원·율리(17일)-평양 동남쪽 지동리(18일)-대동강 동쪽 도달(19일 아침)까지 미 1기병사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10월19일 오전 지동리를 넘어선 1사단은 평양을 향해 총진격을 개시했다. 이때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자신이 어릴 때 수영을 배웠던 이 지역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미군의 도하공격 하루전인 19일 밤에 도착할 도하장비를 기다리고 있던 미군을 제치고 국군 15연대는 대동강 급속도하를 감행을 건너 본평양에 진출할 수 있었다. 드디어 10월19일 오전 10시50분경 제1착으로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목적지인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에 국군 1사단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이로써 국군 1사단은 제11·12연대가 동평양에, 제15연대가 본평양에 최초 입성한 부대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반면에 대동강 남쪽에서 공격하던 미군은 10월20일에 날이 밝자 부교를 가설하고 본격적인 도하를 감행했다. 한편 우리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던 10월21일 6시30분경, 헌병사령부 제2대대 9중대는 철원군 금화읍 읍내리에서 치안경비와 포로후송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 18명, 실종 42명, 부상 9명의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장렬히 산화하신 선배 헌병전우들의 영령을 추모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길은 길고도 어려웠다. 결국 선배 헌병 전우들이 금화지구에서 목숨을 바친 지 46년이 지난 1996년 10월21일에 이르러서야 당시 육군 헌병감실과 생존 전우, 헌병 7학병 동지회를 비롯한 선후배 헌우 및 헌병병과 장병들의 정성을 모아 추모의 위령비를 세울 수 있었다. 전몰 장소는 현 위령비 위치에서 20Km 이격된 민통선 북방이라 출입이 곤란하고 관리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어 유족들의 참배와 관리가 용이한 당시의 3사단 헌병대 위병소 앞에 건립하게 되었다. 최근 백골부대인 3사단의 군사경찰(헌병) 대대가 상부 계획에 의거 타 지역으로 이전했으나 현지 장병들의 변함없는 적극적인 지원으로 위령비 관리와 행사 준비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 다시금 우리 국군장병들이 이렇게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하며 숭고한 희생정신과 그날의 교훈을 되새기면서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고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서 임무를 다하는 모습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132)]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중)
-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⑪미 해군참모총장 제레미 마이클 보더(Jeremy Michael Boorda)대장의 명예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1996년 5월 16일, 미합중국 해군참모총장 제레미 마이클 보더 대장이 자신의 불명예를 자살로 씻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세계가 놀란 것은 해군 참모총장이라는 신분과 계급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미 해군 역사상 가히 전설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데다가, 또 그가 불명예로 여긴 일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도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 해군 역사상 16세에 말단 수병으로 입대하여 대장계급의 참모총장에까지 오른 사람은 그밖에 없다. 수병으로 근무할 당시에도 ‘수병 중의 수병’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우수한 병사였다. 1961년 간부로 선발되어, 장교로 임관한 후에는 대소 전투함대 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역시 훌륭한 지휘관으로 주목받았다. 1994년에는 NATO군 사령관으로서 당시 보스니아 폭격명령을 내리는 등 과단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몇 해 전부터 V마크의 훈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다가 최근에 그것을 뗀바 있다. 뗀 이유를 추궁하기 위해 ‘News Week’지 기자가 인터뷰를 신청했다. V마크 훈장은 적과 직접 교전한 병사에게만 수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베트남전선에서 출전한 적이 2번 있으나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그것을 달 자격이 없는데 어쩐 일인지 달고 다니다가 떼었던 것이고, 매스컴이 이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기자가 인터뷰를 신청한다는 보고를 받은 보더 대장은 공보장에게 잠시 집에 갔다 오겠다고 외출, 집에 도착하자 바로 38구경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 것이다. 그는 2통의 유서를 남겼다. 하나는 ‘가족에게’ 또 하나는 ‘우리 수병들에게’라는 제목이었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가족에게 보낸 유서에는 훈장문제로 매스컴의 추궁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해군에 보낸 유서에는 “여러분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씌어 있었다. V마크를 달았던 것은 악의 없는 과실이었지만, “추문을 좋아하는 매스컴에 거론되면 해군의 명예가 실추 될 것이기 때문에” 거론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터뷰를 거절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가 자격이 없으면서 훈장을 달고 다닌 것은 과오에 틀림없지만 과오야 어떻든 지극히 사소한 실수를 불명예로 알고 죽음으로 보상한 그의 군인정신은 본받을 만 하다. 여러분은 가슴에 수여받지 않은 훈·기장은 부착되지 않았습니까? 명예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⑪미 해군참모총장 제레미 마이클 보더(Jeremy Michael Boorda)대장의 명예
-
-
[김희철의 전쟁사(131)]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겨울 날씨가 쌀쌀했던 지난 10월21일 오전 강원도 철원군 자등고개 북쪽 과거 헌병대대가 주둔하던 곳 위병소 앞자리에서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역전의 용사들과 함께 금화지구 희생 헌우(군사경찰 전우) 추도식이 열렸다. 코로나-19의 위기속에서 개최된 의미있는 추모식은 위난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자 불타는 충성심으로 군사경찰(헌병)의 투혼을 불사르며 장렬히 산화한지 71년이 되는 날이자, 당시 헌병감실과 생존 전우들이 위령비를 건립한지 25년이 되는 날이다. 행사는 대한민국헌병전우회가 주관하여 치열한 전투 당시 생존자인 문기택, 박우제 및 유족 대표 김봉환(육사34기 예비역 준장), 최상배 등 관련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과보고, 헌우회장 홍종설(육사34기, 전 국방부 조사본부장) 예비역 소장의 추모사 등으로 진행됐다. 또한 역대 헌우회장인 권영욱(육사28기)을 비롯하여 각지역 헌병전우회 및 산악회, 삼필회 그리고 3사단장 손식 소장(육사47기)과 국방부 및 육군의 군사경찰 지휘관 등 50여명이 참석하여 호국영령의 넋을 추모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131)]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상)
-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⑩ 나폴레옹의 이집트를 원정시 명연설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하는 사이에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군의 세력 하에 들어가 있을 때 남긴 말이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준비에 만전을 기한 다음 전쟁을 일으켰는데, 천연적으로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알프스를 넘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주력군의 총지휘를 모로(Moreau)에게 맡기고, 자신은 예비군을 지휘하여 이탈리아 방면으로 진격키로 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기 위해 지형정찰대를 파견했다. 그런데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정찰대장의 보고내용은 의외였다. 험난하기로 이름난 천험(天險)의 지형이라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이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부대원들은 소수의 인마(人馬)마저 통과하기 어려운 첩첩산중을 대군이 횡단하도록 한 초 모험적인 행동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장군의 강한 의지력 때문에 오히려 사기가 더욱 앙양되었다고 한다. 또한 1797년 5월 19일 오리엔트 호(號)를 타고 이집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이 상륙 후 찌는 듯이 무더운 사막에서 원주민의 기습을 물리친 후, 부족한 식수와 싸우면서 염열지대(炎熱地帶)를 20일 간이나 진군한 뒤 수도 카이로 성(城) 근처에서 결전을 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천천히 피라미드를 가리키며, “여러분! 우리 프랑스 4,000년의 역사가 저 피라미드의 정상에서 여러분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소!”라는 명언을 토했다. 이와 같은 나폴레옹의 연설은 계속된 강행군과 소규모의 전투로 피로와 갈증에 지친 장병들을 감동시켰고, 이 말을 들은 그들의 사기는 샘물처럼 솟아나서 전승을 획득했다. 이처럼 나폴레옹은 항상 시기적절하게 장병을 고무하는 명연설을 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지휘관으로서 항상 숙고해야 할 요결이라 하겠다. 여러분은 난관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극복하겠습니까? 지휘관의 의지는 불가능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⑩ 나폴레옹의 이집트를 원정시 명연설
-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⑨오기 장군의 뜨거운 부하사랑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중국 위나라에 오기라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병사와 똑 같은 옷을 입고 음식도 같이 먹었다고 한다. 잘 때도 잠자리를 따로 펴지 않으며, 행군할 때도 혼자 수레에 앉아 있지 않았고 자기 식량도 자기가 직접 가지고 다녔다.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해야 한다는 오기 장군의 신념은 철저했다. 오기 장군의 병사들 중에 한 명이 종기로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자 오기는 괴로워하는 병사의 모습을 보다 못해 그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었다. 훗날 이 얘기를 전해들은 병사의 어머니는 아들의 고통을 덜어준 장군의 호의를 고마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목 놓아 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상히 생각해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당신의 아들은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은데 장군이 직접 고름을 빨아준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이요? 그런데 왜 우는 것입니까?” 그 병사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더 한층 슬피 울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지난해 장군께서 그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주셨습니다. 그는 오기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끝까지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앞장서 싸우다 죽었습니다. 이번에는 제 아들의 종기마저 빨아 주셨다니···. 이제 그 아이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물론 오기 장군이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자신의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만약 오기 장군이 자신의 수레 위에서 한 발짝도 내려오지 않았으며, 자신의 짐을 다른 부하들에게 지우고, 전쟁 중에도 혼자서 좋은 음식에 좋은 잠자리에서 잤다면, 부하의 다리에 종기가 났는지 또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알지 못했겠지요. 또 평소에는 전혀 부하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는 상관이 설사 고름을 빨아준다 하더라도 부하들은 그것을 일과성이고 전시적인 것으로 받아드리고, 내심으로는 거부할 것이다. 생사가 달려 있는 전쟁터에서 부하를 모르는 상관의 명령에 목숨 바쳐 복종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아마 대개가 “왜 하필이면 제가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도 많이 있잖습니까?”하며 불평할 것이다. 부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관의 명령에 따를 수 있게 하려면 먼저 상관 자신이 부하들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는 각오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오기 장군은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권위, 편하고자 하는 마음, 존경받고자 하는 마음,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의 수레에서 내려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그곳에서 부하들의 웃음과 눈물을 보게 될 것이고 그들과 함께 웃으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기 장군의 뜨거운 부하사랑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런 좋은 하루입니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⑨오기 장군의 뜨거운 부하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