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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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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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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이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방문한 국가중에 네덜란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우선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는데, 해군은 1950년 7월19일, 육군은 11월23일에 도착했으며, 지상군이 한반도 전투에 최초 투입된 날짜는 12월3일이다. 네덜란드는 6.25남침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했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우선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호는 일본에서 운용되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되어 있었고 1950년 7월19일부터 서해안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해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북한군들이 계속 남하해 6.25남침전쟁이 악화됨에 따라 1950년 7월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950년 9월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를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11월23일 부산 도착해 현지 적응훈련 거친 후 그해 12월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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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네덜란드 반호이츠 부대내 한국전 참전비 참배를 한 박 장관은 “이번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방문은 6·25전쟁으로 맺어진 소중한 인연을 국제보훈으로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또한, 국내 상이군경 재활체계를 비롯한 기반 시설과 관련한 정책을 점검하고 구상하는데 있어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특히, 해리왕자를 만나 세계상이군인 체육대회인 인빅터스게임의 대한민국 유치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고, 우크라이나 보훈부 장관과 향후 긴밀한 업무 협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보훈정책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소중한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박 장관은 “국가보훈부는 기존 22개 유엔참전국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진영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유엔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을 알리는 다양한 국제보훈 정책과 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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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또한 네덜란드군과 삼일공고와의 특별한 인연도 새롭게 소개됐다. 삼일공고는 6·25남침전쟁 당시인 1950년 말 강추위 속에 수원에 도착한 네덜란드 부대에 학교 안 아담스기념관을 숙소로 제공한 것을 계기로 현재까지도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1982년부터 삼일공고 졸업식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가 참석,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용사 협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삼일공고 교사와 학생들은 매년 횡성전투 기념비 앞에서 열리는 참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이어 박 장관은 네덜란드 참전용사와 참전협회장, 네덜란드 국방부 감찰부국장, 반호이츠 부대원과 삼일공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감사 오찬 간담회를 갖고 ‘평화의 사도’ 메달을 전달했다. 간담회에서는 삼일공고 학생대표가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참전용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낭독했으며,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협회는 삼일공고에 아담스기념관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전달했다. 한편, 반호이츠 부대는 네덜란드에서 한국전 참전을 위해 창설된 보병부대로 강원도 일대의 횡성지구·원주·인제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네덜란드는 미국, 영국, 호주에 이어 4번째로 병력을 파견했으며, 전투 중 120명이 산화하고 부상 645명, 3명이 포로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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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6·25남침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반호이츠 부대도 방문해 타르 드 부르(T. De Boer) 부대장(중령)을 만나 참전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자리에는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용사 3명과 유엔참전국 국제 교육과정(글로벌 아카데미) 일환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한 수원 삼일공고 학생들도 함께 했다. 참고로 국제 교육과정(글로벌 아카데미)은 국가보훈부가 정전 70주년을 맞아 처음 추진, 국내 및 참전국 학교의 상호 방문과 6‧25전쟁 전적지 탐방 등 교류 활동을 통해 6·25전쟁의 역사와 의미를 알고, 미래 세대로 계승하기 위한 것으로, 국내 22개 학교와 유엔참전국 학교 31개교가 참여하고 있다. 이날 네덜란드군 관계자로부터 부대내 군사박물관을 소개받으면서 6·25남침전쟁 당시 폴란드인 100명이 네덜란드군에 배속돼 참전한 사실이 새롭게 알려졌다. 그동안 6·25전쟁 당시 네덜란드군에 배속돼 싸운 나라는 수리남 정도로 알고 있었다. (다음편 계속)
실시간 CRISIS M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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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근 군인공제회이사장, 회한의 사직 메일(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김유근 이사장은 셋번째 사임 이유로 “최근 민감한 정치적 이슈에 이사장으로서 회사업무에 전념하지 못하는 모습이 임직원 여러분에게 떳떳하지 못하며, 이런 상황이 오래가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사임 이유에 앞서 그는 “그동안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합니다. 경제가 어려워 모두가 더 합심해야 하는 준엄한 시기에 이사장이 예고 없이 사임하게 되어 죄송한 마음입니다”라며 회한을 표현했다. 그리고 “1년 반, 짧은 기간에 공제회가 놀라울 정도로 변화했습니다.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여러분 스스로 극복한 지혜와 능력이며 결단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고민과 열정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사장이 중도에 그만두는 상황에도 공제회가 동요 없이 차분하게 업무에 전념하는 분위기가 유지되기를 희망합니다”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김유근 이사장은 재직기간에 군인공제회가 그동안의 당기순이익이 년 평균 800여억에서 작년에 예년 평균 4배, 3,500억원 달성 신화를 시스템으로 탄탄하게 구축한 것은 누가 뭐라해도 직원들의 사업능력이 대내외적으로 검증된 것으로 여기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사람은 바뀌어도 공제회는 시스템적으로 흔들림 없이 전진해야 냉혹한 경쟁현실 속에서 살아 남아 100년 기업으로 나갈 수 있다며, 임직원 모두가 지금처럼 언제나 파이팅하되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이니 '여러분의 건강과 체력이 회사의 힘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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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역군인
-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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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근 군인공제회이사장, 회한의 사직 메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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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피의 숙청과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점철로 이어진 마오 왕국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2021년 11월 개최된 중국 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서 ‘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중공 중앙의 결의(역사결의)’를 채택했다. 1945년 마오쩌둥, 1981년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역사상 세 번째 역사결의다. 시진핑 주석은 ‘중화민족 부흥의 핵심’, 시진핑 사상은 ‘중국 정신의 시대적 정화(精華)’라고 한껏 띄우며 3연임을 통한 장기집권 채비를 마쳤다. 시진핑 주석의 역사결의는 1921년 공산당 창당 후 100년간 투쟁으로 이룬 주요 업적과 역사적 경험을 종합적으로 다뤘다. 허나 ‘문화대혁명’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당의 역사적 사명과 행동가치' 문건에서 톈안먼 항쟁을 ’1989년의 정치풍파‘로 묘사했다. 또한 과거를 부정하며 유일통치체제를 확립한 마오쩌둥에 대해 “중국 발전의 신기원”, “굴욕외교 종식” 등 온갖 후한 평가를 했다. 반면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개혁·개방의 역사적 결정”이라고 존중하긴 했지만 눈에 띄는 인상적인 표현이 없었다. 마오쩌둥이나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부각시켜 개혁·개방의 정당성을 강조한 덩샤오핑과 차별화한 부분이다. 발표 분량도 덩샤오핑의 후임인 장쩌민, 후진타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치 ‘대국굴기로 중화패권주의’를 주장하는 시진핑 주석이 신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의 계승자라는 뉘앙스로 읽히는 대목이다. 한편 상단 사진같이 최근 빈부의 격차가 극에 달하는 현실속에서 희망을 상실한 MZ세대(1990년대생 밀레니얼세대와 2000년대생 Z세대)의 ‘탕핑(躺平)운동’이 관심을 끌며 조용하게 번져가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모두 못살던 마오쩌뚱 시대를 그리워한다. 중국의 지호논단은 탕핑운동을 “집도 차도 사지 말고, 결혼하지 말고, 아이 낳지 않고, 소비도 하지 않는 그저 최저 생존 기준만 유지해 타인의 돈벌이를 위한 기계나 착취당하는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안보연구회(COKUSS)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홍위병’에 대해 ‘권력자의 광기가 희생시킨 마오의 아이들’이란 주제로 개최한 포럼에서 강연한 권성욱 작가는 중국에 대한 두가지 대책을 언급했다. 첫째, 1991년 한중수교시에 대만과 단교한 것과 UN에 남북이 동시에 가입함으로써 우리 헌법에 명기된 내용에 반하며 북한을 국가로 인정했던 실수를 바로 잡아야 남북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둘째, 중국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경계해야 한다며 과거 노무현 전대통령이 “존경하는 인물이 마오와 덩샤오핑이다”라는 발언은 실체는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냉전시대의 소련과는 달리 중국은 약소국에 식량 지원을 포함한 돈으로 포섭하며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어 러시아보다 무서운 적이라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해양 및 항공 등 무력도발시에는 한미 동맹하에 강력히 응징하되 경제를 고려하여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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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피의 숙청과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점철로 이어진 마오 왕국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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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3차례 실제전투 영웅 김승겸 대장, 기다리던 참군인이 드디어 왔다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승겸 합참의장이 연대장시절에 그를 가장 신뢰했던 당시 직속상관인 1사단장 신현돈 장군(육사35기, 전 1군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김승겸 합참의장은 외유내강형으로 유연하고 부하를 한없이 사랑하며 착해보이지만, 훈련 및 부대관리에는 원칙(FM)적이고 강단있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오직 부하와 부대에만 불철주야로 모든 것을 집중하는 지휘관이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사례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민통선 내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에게 월드컵 경기 시청을 금지시킨 적이 있었는데 이는 2002년 때처럼 북이 축제 분위기를 틈타 도발을 시도해 올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헌데 연대장 본인은 실내에 있으면 자기도 축구를 볼 것 같아서 경기일에는 직접 소초 순찰을 나갔고, 축구가 끝날 때까지 본부로 복귀하지 않으며 솔선수범했다. GOP후방 FEBA에 있던 장병들이 신나게 월드컵을 보고 있을 동안 GOP와 GP에서 근무하는 도라대대 장병들과 수색대원들은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도 있었다. 또한 김승겸 연대장은 수색대대원들의 수색과 매복작전도 직접 모니터링하여 DMZ진입 할 때 병사들의 간격, 진형, 위치, 수색대 투입 당시의 주변 부대의 경계작전 상태 및 보안사항 등을 직접 확인하는 등의 신뢰할 수밖에 없는 예하 지휘관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신현돈 예비역 대장이 합참근무시에도 김승겸 대령은 합작과장으로 보좌했다. 신 대장은 “상급 지휘관(본인)의 작전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등 원칙과 강단이 있으며 탁월한 기획력과 논리적사고로 초지일관하는 장교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또한 “김승겸 장군은 열정과 헌신의 전투작전 전문가로 당연히 ‘은하계곡 5.22 완전작전’과 2차례의 대북 응징작전 등 실제 대침투작전 상황에서도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참군인이다”라며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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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3차례 실제전투 영웅 김승겸 대장, 기다리던 참군인이 드디어 왔다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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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3차례 실제전투 영웅 김승겸 대장, 기다리던 참군인이 드디어 왔다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연합사 부사령관 임명 이후 소식이 뜸하다가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한미연합사를 방문한데다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던지라 정부 출범 이후 첫 합동참모의장으로 내정될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김승겸 장군의 고향 서천군은 국민의힘 충청남도지사 후보였던 김태흠 국회의원의 지역구였던지라 윤석열 대통령이 김태흠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합참의장으로 임명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설도 있었다. 결국 윤석열 정부 출범 15일 만인 2022년 5월25일 첫 장군인사에서 결국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대장이 전부 전역하는 와중에도 김승겸 대장은 유일하게 전역을 하지 않고 합동참모의장에 지명되었으며 최초로 국회 청문회 없이 7월5일 취임했다. 육사 42기 내 다른 선두주자였던 안영호 합참 작전본부장, 김정수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과 경쟁하였는데, 당시에 본인과 함께 김정수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도 대장으로 진급하여 2작전사령관을 역임했다. 이는 권오성 대장(육사 34기) 이후 9년만에 연합사 부사령관을 마지막으로 전역하지 않고 영전한 케이스가 되었다. 또한 정승조 대장(육사 32기) 이후 9년만에 육사 출신 합참의장이 배출되는 사례를 남겼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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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3차례 실제전투 영웅 김승겸 대장, 기다리던 참군인이 드디어 왔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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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3차례 실제전투 영웅 김승겸 대장, 기다리던 참군인이 드디어 왔다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승겸 합참의장은 거의 전역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받은 한직인 국군의 날 행사단장을 마치고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으로 취임했다. 부임할 당시 직속상관인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공교롭게도 알자회 출신이었다. 허나 부사령관은 오히려 출중한 김 장군을 무척이나 아꼈다고 했다. 이후 정권이 바뀌고 구사일생으로 2017년 9월 장성급 장교 인사에서 중장으로 진급하여 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참모차장으로 보임되었다. 직무를 수행 중 2020년 9월18일, 서욱 육군참모총장이 국방부장관으로 취임과 동시에 전역하자 육군총장 직무대리가 되었는데, 3일 만인 9월21일 예상대로 1차에 대장으로 진급하여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의 대장 진급 배경에는 넘사벽 아이템인 을지무공훈장 수상, 중위부터 중장까지의 진급을 모두 1차에 한 것, 중장급 인사들 가운데 비육사 출신 임관동기인 3사 21기나 학군 24기에 해당하는 인물이 없었다는 요인들이 고려되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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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3차례 실제전투 영웅 김승겸 대장, 기다리던 참군인이 드디어 왔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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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피의 숙청과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점철로 이어진 마오 왕국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 네륭전 부주석은 ‘문화대혁명’으로 2000만 명이 사망했고 1억 명이 박해를 받았으며 재산 손실도 8천억 위안이라고 증언했다. 이렇듯 중국은 충견을 활용한 피의 숙청과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점철로 이어진 마오 왕국이다. 아무튼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견고해진 마오 왕국은 10년간만 지속되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마오쩌뚱이 파킨슨병에 시달리다가 1976년 9월에 운명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뚱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나 문화대혁명의 잘못을 부각시키며 개혁·개방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3년뒤인 1981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 선언’의 역사결의를 채택하며 경제발전에 치중했다 덩샤오핑 집권기간 중인 1989년 6월 ‘텐안먼 항쟁’이 발생했다. 이는 소외된 홍위병 세대와 젊은 지식인들이 민주화운동으로 체제 자체의 타도보다는 문화대혁명에서 얻지 못한 정치개혁 및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비폭력 시민혁명이었다. 허나 덩샤오핑과 원로들은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텐안먼에서 총칼과 탱크로 무력 진압했다. 그런데 ‘텐안먼 항쟁’은 실패했지만 이를 통해 시진핑 등 상류층 자제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보황파 홍위병 세대가 중앙에 접근하며 다시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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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피의 숙청과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점철로 이어진 마오 왕국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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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3차례 실제전투 영웅 김승겸 대장, 기다리던 참군인이 드디어 왔다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승겸 중령(육사42기)은 대대장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동 사단 작전참모를 거쳐 대령으로 진급해 1보병사단 12연대장과 35사단 참모장, 합참합동작전과장을 지냈다. 특히 육사 42기의 선두주자로서 소위 임관 후부터 대장까지 모든 계급으로의 진급을 1차에 했다. 준장으로 진급해서는 21사단 부사단장, 6군단 참모장, 합동군사대학교 육군대학장을 지냈는데, 소장으로 진급하였을 때 28보병사단에서 이찬희 살인사건(윤일병 사건)으로 전임자가 경질되자, 후임 사단장으로 취임하여 어수선하게 침체된 사단의 분위기를 쇄신시켰다. 헌데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생한 ‘14년도 연천 대북전단 발원지에 대한 북한 고사총 사격도발과 ‘15년도 북한군의 서부전선 포격도발에 따른 대북응징을 과감하고 철저한 완전작전으로 수행함으로써 군내에서 명성을 쌓았다. 이로써 김승겸 장군은 병영문화도 쇄신하고, 완전작전까지 해낸 야전군인으로서의 엄청난 능력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현역 국군장성 중 유일하게 ‘은하계곡 5.22완전작전’과 두차례의 응징보복 작전 등 실제 전투경험이 3번이나 있는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모 언론매체의 자료에 따르면 성공적인 완전작전 유공에도 불구하고 군복무 기간 중 군내 사조직인 알자회를 비판했던 김 장군은 그들에게 표적이 되는 바람에 거의 전역 직전까지 갔었는데, 이때 받은 보직이 한직인 2016년 국군의 날 행사단장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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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3차례 실제전투 영웅 김승겸 대장, 기다리던 참군인이 드디어 왔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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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3차례 실제전투 영웅 김승겸 대장, 기다리던 참군인이 드디어 왔다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회 원 구성이 장기간 지연되어 인사청문회를 못하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일, 군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김승겸(육사42기) 대장을 임명했다. 김 장군은 1963년 충남 서천군 출신으로 김영옥 예비역 중령의 아들이자 김영 예비역 대령의 조카다. 1982년 서울 오산고등학교(72회)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86년 졸업과 함께 육군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대위시절인 1992년 5월22일 야음을 틈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한 무장공비4명을 차단 및 수색, 교전을 통해 전원 사살한 대침투작전인 ‘은하계곡 5.22완전작전’에서 전초 13중대장으로서 결정적인 큰 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을 수훈했다. 당시 김승겸 대위의 을지무공훈장 수훈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6.25남침전쟁과 베트남전 이후 전시가 아닌 평시에 수여된 최초의 을지무공훈장이기 때문이다. 현역 군인 중 유이하게 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이다.(아덴만 여명 작전에 참여한 검문검색대 공격 1팀장 김규환 해군대위가 을지무공훈장을 두 번째 수훈) 게다가 김승겸은 미 국방부가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Legion Of Merit’도 수훈받은 바 있다. 이후 소령으로 진급해 3보병사단 대대작전장교와 육군사관학교 생도대 훈육관을 역임한 후 중령 때에는 2보병사단 31연대 2대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는데 부임과 동시에 "싸움터에서 이기는 영웅이 되자"라는 구호와 함께 부대를 180도 바꾸어놨다. 행보관들 및 주임원사와 호형호제하던 전임 대대장과 다르게 무능한 간부를 경멸하고 병사들 보는 앞에서 연병장에서 부사관들을 완전무장 포복시키고 대강대강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일벌백계했다. 미숙하다고 이등병을 배려하거나 상사나 소령을 대접하는 관행은 모조리 뿌리 뽑았으며, 훈련에 매진하는 부대로 탈바꿈시켰다. 매주 수요일 오전에는 즉각조치사격을 실시하여 실전위주의 사격능력을 향상시켰다. 당시 실제로 사단 교탄 소모량이 가장 많은 부대가 김승겸 대대였으며, 그야말로 훈련 위주의 원칙적인 교범(FM)을 따르는 부대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부식창고를 개방하여 부식, 보급품을 한꺼번에 불출함으로써 그동안 병사들에게 보급하지 않고 암암리에 빼돌리던 것을 없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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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피의 숙청과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점철로 이어진 마오 왕국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계일선에서 비록 퇴진했지만 마오쩌뚱은 당권과 군권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재적으로 소련 유학파 등 지식인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1965년 11월 ‘해서파관 사건’을 계기로 ‘문화대혁명’을 주도한다. 우선 베이징 상류층 자제들을 중심으로 보황파 홍위병을 결성한 뒤, 중하층 출신을 참여시키며 조반파도 결성해 확대했고 문혁이전 농촌으로 하방된 모든 사람들도 대혁명에 가담시켜 홍위병들은 무려 1200만명이나 되었다. 주로 청년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은 불평등한 현실에 그동안 쌓였던 분노와 욕구 불만이 폭발하여 당서열 1위였던 마오의 후임자인 류사오치 등 고위간부와 교사 및 지식인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때 일부 극렬 홍위병은 마오를 비판한 자신의 어머니를 반혁명분자로 고발해 총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마오쩌뚱은 류사오치의 경쟁 상대였던 린뱌오(林彪)를 국방상으로 임명해 충견으로 만들어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을 개조하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을 몰살했다. 반혁명분자로 몰려 구속된 지 2년만에 굶어 죽은 류사오치는 정계 일선에서 퇴진했지만 상대방을 분열시키는 모사(謀士)로 차도살인(借刀殺人)을 통해 토사구팽(兔死狗烹)시키는 마오의 의도를 전혀 몰랐다. 마오쩌뚱은 자신을 퇴진시켰던 당을 제압한 홍위병에게 ‘세상을 흔드는 손오공’이라고 극찬하며 ‘문화대혁명’은 성공했으니 이제는 청년인 홍위병들이 농촌으로 내려가(하방) 농민들을 도우라고 독려했다. 헌데 하방한 홍위병들이 대부분 하급청년인 조반파로 그들의 불만이 쌓여 갔다. 결국 1967년 홍위병 보황파와 조반파간의 상호 충돌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홍위병들이 마오쩌뚱에게 도전하자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강시성에서만 10만명이 사살되는 등 대학살이 재연됐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을 개조하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 몰살에 앞장섰던 홍위병까지도 토사구팽(兔死狗烹)시킨 마오쩌뚱은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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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피의 숙청과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점철로 이어진 마오 왕국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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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피의 숙청과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점철로 이어진 마오 왕국④
- [시큐리티팩트=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6.25남침전쟁에서 중국군의 위상을 높힌 팽더화이는 현장 확인을 통해 ‘대약진운동’이 이미 실패해서 인민들의 실상이 처참해진 것을 마오쩌뚱에게 보고하며 완화시키도록 건의했다. 이에 본인에게 화살이 집중될 것을 우려한 마오쩌뚱은 팽더화이를 포함해 약 17000명을 또다시 숙청했다. 하지만 마오 자신도 결국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정계 일선 퇴진을 선언했고, ‘대기근은 70%가 인재이고 30%가 천재지변이다’라고 언급했던 소련 유학파 류사오치를 후임자로 추대했다. 그렇지만 군과 당권을 유지하며 상왕으로 군림한 마오쩌뚱이 ‘해서파관 사건’을 구실 삼아 후임자인 류사오치를 토사구팽시켜 또 처형했다. 이때 류사오치는 마지막 처형 순간까지 마오의 진면목을 몰랐다고 전해진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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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피의 숙청과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점철로 이어진 마오 왕국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