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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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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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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이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방문한 국가중에 네덜란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우선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는데, 해군은 1950년 7월19일, 육군은 11월23일에 도착했으며, 지상군이 한반도 전투에 최초 투입된 날짜는 12월3일이다. 네덜란드는 6.25남침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했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우선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호는 일본에서 운용되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되어 있었고 1950년 7월19일부터 서해안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해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북한군들이 계속 남하해 6.25남침전쟁이 악화됨에 따라 1950년 7월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950년 9월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를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11월23일 부산 도착해 현지 적응훈련 거친 후 그해 12월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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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네덜란드 반호이츠 부대내 한국전 참전비 참배를 한 박 장관은 “이번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방문은 6·25전쟁으로 맺어진 소중한 인연을 국제보훈으로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또한, 국내 상이군경 재활체계를 비롯한 기반 시설과 관련한 정책을 점검하고 구상하는데 있어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특히, 해리왕자를 만나 세계상이군인 체육대회인 인빅터스게임의 대한민국 유치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고, 우크라이나 보훈부 장관과 향후 긴밀한 업무 협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보훈정책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소중한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박 장관은 “국가보훈부는 기존 22개 유엔참전국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진영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유엔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을 알리는 다양한 국제보훈 정책과 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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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또한 네덜란드군과 삼일공고와의 특별한 인연도 새롭게 소개됐다. 삼일공고는 6·25남침전쟁 당시인 1950년 말 강추위 속에 수원에 도착한 네덜란드 부대에 학교 안 아담스기념관을 숙소로 제공한 것을 계기로 현재까지도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1982년부터 삼일공고 졸업식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가 참석,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용사 협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삼일공고 교사와 학생들은 매년 횡성전투 기념비 앞에서 열리는 참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이어 박 장관은 네덜란드 참전용사와 참전협회장, 네덜란드 국방부 감찰부국장, 반호이츠 부대원과 삼일공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감사 오찬 간담회를 갖고 ‘평화의 사도’ 메달을 전달했다. 간담회에서는 삼일공고 학생대표가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참전용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낭독했으며,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협회는 삼일공고에 아담스기념관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전달했다. 한편, 반호이츠 부대는 네덜란드에서 한국전 참전을 위해 창설된 보병부대로 강원도 일대의 횡성지구·원주·인제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네덜란드는 미국, 영국, 호주에 이어 4번째로 병력을 파견했으며, 전투 중 120명이 산화하고 부상 645명, 3명이 포로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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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6·25남침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반호이츠 부대도 방문해 타르 드 부르(T. De Boer) 부대장(중령)을 만나 참전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자리에는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용사 3명과 유엔참전국 국제 교육과정(글로벌 아카데미) 일환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한 수원 삼일공고 학생들도 함께 했다. 참고로 국제 교육과정(글로벌 아카데미)은 국가보훈부가 정전 70주년을 맞아 처음 추진, 국내 및 참전국 학교의 상호 방문과 6‧25전쟁 전적지 탐방 등 교류 활동을 통해 6·25전쟁의 역사와 의미를 알고, 미래 세대로 계승하기 위한 것으로, 국내 22개 학교와 유엔참전국 학교 31개교가 참여하고 있다. 이날 네덜란드군 관계자로부터 부대내 군사박물관을 소개받으면서 6·25남침전쟁 당시 폴란드인 100명이 네덜란드군에 배속돼 참전한 사실이 새롭게 알려졌다. 그동안 6·25전쟁 당시 네덜란드군에 배속돼 싸운 나라는 수리남 정도로 알고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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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우크라이나 사태와 제20대 대통령 선거(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언연구소장]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오전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미사일 공격을 하며 침공을 시작했다. 그러자 이재명 후보는 "코미디언 출신의 초보 정치인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돼서 나토(NATO)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러시아가 침략한 것“이라고 발언했고, 윤석열 후보는 “이렇게 발언한 이재명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비난하고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한편 제20대 대통령 선거 1주일을 앞두고 이재명 후보는 김동연 후보와 윤석열 대선 후보는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하며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외교·안보 분야의 공약을 비교할 때,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는 뚜렷한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재명 후보는 4차산업혁명 첨단기술로 ‘스마트 강군’ 육성과 선택적 모병제로 정예강군을 건설하겠다며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강조했다. 반면 윤석열 후보는 당당한 진짜 평화, 진짜 안보인 ‘국방혁신 4.0’으로 국민을 최우선으로 지키겠다며 ‘완전한 비핵화와 한미동맹 재건’을 내세우고 있다. ■ 이재명, 첨단기술 도입 통한 ‘스마트 강군 육성’과 ‘선택적 모병제’가 국방정책 공약의 핵심 이재명 후보의 국방정책 공약 발표문에 따르면 첨단기술 도입을 통한 ‘스마트 강군 육성’과 ‘선택적 모병제’를 핵심으로 주장하고 있다. ‘스마트 강군’은 핵심전력 강화, 인공지능(AI), 첨단 기술 투자 등을 통해 미래전을 대비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예비 전력 내실화를 위해 군 역할 일부를 민간에 분배하고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 한국형 조기경보 위성 체계 구축, 국방우주네트워크 구축 등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사드배치 반대와 전작권 조기 환수를 분명히 밝혔다. 두 번째로 선택적 모병제는 현행 국민개병제를 유지하면서 병역 대상자가 ‘징집병’과 ‘전투부사관 모병’ 가운데 선택할 수 있는 제도다. 이 후보는 “우리 군은 여전히 30만 명에 달하는 징집병에 의존하고 있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미래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병역 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며 “임기 내에 징집병 규모를 15만 명으로 축소하겠다”고 약속했다. 세번째로 병사의 월급을 최저임금제에 맞춰 급여를 단계적으로 인상해서 2027년에는 병사 월급 200만 원 이상을 보장하고, 네번째는 국가경제력 수준과 청년의 눈높이에 맞춰서 현재의 다인실 병영생활관을 2~4인의 소인실로 바꾸는 등 장병 복무 여건의 획기적 개선이다. 이를 위해 다섯 번째로 대통령 직속의 ‘국방혁신기구’를 설치하겠다고 공약을 제시했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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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우크라이나 사태와 제20대 대통령 선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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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우리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가 종전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티그라이 및 오로모 지역 반군세력과 정부군의 무력충돌 등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잘알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한 뒤 정부는 집요하게 종전선언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에 따라 우려했던 것처럼 종전선언에 대한 한미 간 논의가 시작되자 북한은 호기를 만난 듯 연일 유엔군사령부(유엔사) 해체라는 해묵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김성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지난달 유엔총회 4위원회에서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평화 유지를 구실로 유엔의 이름을 악용해 유엔사를 불법으로 설립했고, 유엔사를 유지해 한국에 대한 미군 점령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지난 23일 관련당국 등에 따르면 한미간 종전선언 문안 작성 협의가 굉장히 많이 조율되어 '군사적 긴장 해소 및 한반도 평화를 위해 종전을 선언한다'는 내용이 적시될 것이라고 전해졌다. 향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전을 위한 발판으로 종전에 나선다는 목적이 기록된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미국의 한 언론매체는 유엔군사령부 해체 등 종전선언이 현 정전협정 체제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는 방향으로 조율 중이라고도 보도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여당의 핵심 인사들이 ‘남북 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은 유엔사’ 또는 ‘족보 없는 유엔사’ 등으로 노골적으로 북한을 옹호하는 것이다. 유엔사의 법적 근거를 부정하는 것은 안보 자해 행위다. 유엔사는 우리나라 안보를 담보한 대북 억제력의 근간이다. 6·25남침전쟁 발발 직후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해 설치된 조직으로,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감독위원회 운영, 비무장지대(DMZ) 내 경계초소 운영, 북한과의 장성급 회담 등 정전체제를 유지·관리하고 있다. 유엔사는 한미 연합군과 일본 자마·요코스카·후텐마 등 주일 미군의 핵심 시설 7곳의 유엔사 후방 기지를 이어주는 법적·제도적 기반이다. 이들 유엔사 후방 기지들은 일본 정부의 사전 양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지원 시설로, 한반도 유사시 유용한 군사 자산들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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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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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주류인 에리트레아는 2002년 대부분의 교회를 폐쇄한 후 수십 년 동안 기독교인들을 체포와 구금을 하여 고문하는 등 박해했다. 따라서 일부 에리트레아 기독교인들은 국경을 넘어 에티오피아로 도망쳐 난민 캠프에서 안전한 장소를 찾았지만 티그레이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또다시 테러가 계속되는 위험에 빠졌다고 영국 CT(크리스천투데이)는 전했다. 인권 운동가이자 릴리즈 파트너인 아스멜라시 박사는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이 나라에서 계속해서 성장해 왔다”라며 “기독교인들은 에리트레아에서 가장 박해를 받아온 집단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집결을 멈추지 않고 예배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의 통제 밖”이라고 말했다. 아스멜라시 박사는 에리트레아 감옥에 적어도 기독교인 180여명이 구금됐고 일부는 지난해 풀려났는데, 아마도 과밀한 교도소에서 코로나바이러스를 억제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여름에 수십 명이 다시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아스멜라시 박사가 “정부의 정책에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라며 “정부는 이 기독교인들을 체포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라고 말했듯이 종전선언 후에도 바드메 마을 문제와 티그라이, 오로모 지역 반군세력과 정부군의 무력충돌 및 종교박해 등의 분쟁은 지속되고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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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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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에티오피아 종전선언을 이끌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아비 아머드 알리 총리는 2019년 12월 1일부로 인민혁명 민주전선(TPLF)의 31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번영당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20년 11월에 다민족 국가인 에티오피아는 북부 티그라이 지역에서 군 캠프가 피습을 당하자 6개월 비상상태 선포와 함께 군 병력을 투입하며 전쟁이 또 시작되었다. 티그라이 분쟁에 투입한 에티오피아군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항이 알려져 분쟁은 더 가열되었다. 이로 인해 악숨 공항이 파괴되는 등 추가적인 타격을 입었고 티그라이 분쟁이 인접한 에리트레아까지 번지는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영국의 릴리즈 인터내셔널은 성직자들이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레이에서 전투에 합류한 에리트레아 군부의 표적이 되어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정교회 소식통은 신성한 도시 악숨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는 과정에서 최소 78명의 성직자들이 에리트레아 군에 의해 사망했다고 전했다. 전 에리트레아 기독교인 수감자였지만 현재는 종교자유 옹호자가 된 헬렌 베르헤인은 릴리즈 인터내셔널에 “에리트레아 군이 많은 성직자를 죽이고 아내를 강간하고 있다”라며 “군인들은 어떤 성직자들은 십자가를 잡고 있으면 그들의 손을 베거나 성직자들에게 모자를 벗으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총살한다”고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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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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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후 1944년 영국과 에티오피아의 협정 체결로 이탈리아로부터 완전 해방된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를 자국 연방영토로 편입하고 급기야 1962년에는 1개 주로 강제 합병하였으나, 이에 대한 에리트레아의 분리 항쟁이 지속되었다. 결국 셀라시에 황제 시절, 에티오피아에 무력으로 합병되었던 에리트레아가 끈질긴 분쟁을 통해 1993년에 분리 ‧ 독립하였다. 하지만 에리트레아는 분리 ‧ 독립 과정에서 바드메 마을을 에리트레아에 귀속시키고자 하였으나 에티오피아는 이에 반발하였다. 결국 바드메 마을 소유권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못한 채 에리트레아 분리가 완료되었으며,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이후 1997년, 양국 간 관계가 악화되었던 해당 지역의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전쟁 수준으로 갈등이 확대되었다. 게다가 2000년에 두 국가는 평화협정을 잠시 체결하였지만 바드메 마을의 에리트레아 귀속 문제를 둘러싼 의견 대립은 해소되지 않아 양국의 외교관계는 수년간 단절되어 있었다. 2018년은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머드 알리 신임 총리가 에리트레아를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하는 등 대화 프로세스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해이다. 이에 따라 양 국가는 “평화우호공동선언”을 골자로 한 종전협정인 평화협정 체결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2000년의 실패와는 달리 2018년 평화협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국내정치적 지지와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되기도 하였으나, 아비 총리의 의지와 결단력이 부재했더라면 협정 체결 및 후속조치가 신속히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미완의 종전선언 후에도 양국의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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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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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에티오피아는 전설 속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후예들이 3000년을 이어온 나라이고 아프리카에서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이지만 1882년 이탈리아가 현재 에리트레아 지역에 현지관리청을 설치하며 식민지 진출을 개시한 후, 에티오피아 요하네스 황제를 전사시키고 에리트레아 지역을 사실상 식민지화시켰다. 결국 에티오피아 메넬릭 2세는 1889년에 이탈리아와 ‘우치알리 조약’을 체결하여 에리트레아를 이탈리아에 양도하는 대신 에티오피아 영토에 대한 황제의 주권 인정,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차관 공여 및 군사지원 등을 확보하고 수도를 아디스아바바로 천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암하라어와 이탈리아어 조약 문서에 각기 다른 조항을 넣어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메넬릭 2세가 에티오피아를 사실상 이탈리아의 보호령으로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유인했다. 이를 확인한 메넬릭 2세가 1895년에 ‘우치알리 조약’ 철회를 결정하자, 이탈리아는 이를 구실삼아 에티오피아 침공을 했다. 침략을 당한 메넬릭 2세는 1896.3월에 아디스아바바 북쪽에 소재한 아드와(Adwa)에서 이탈리아를 격퇴함으로써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유지하였으나,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로부터 분리되어 이탈리아의 식민지화로 굳어졌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35년 10월에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다시 침공하여 강제 점령했고 이 과정에서 겨자 독가스 사용 등으로 에티오피아인 27만 명이 희생도 당했다. 그러나 실제로 강점 기간 내내 이탈리아 군대는 에티오피아 전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저항 세력의 게릴라전에 시달렸으며, 일부 지역은 영국군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격할 때까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지지하는 에티오피아 저항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1년 영국은 이탈리아를 공격하여 에리트레아를 접수하였으며, 그해 5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함에 따라 6년간의 이탈리아의 강제 점령이 종식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를 포함한 연합국 진영 간의 '평화 협정'에서 이탈리아의 강점은 법률적으로 그 합법성이 부정되었고, 오히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 전쟁 배상금을 지급해야만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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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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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90년 독일의 통일, 예멘의 통합,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및 중국과 대만의 분쟁 등 지구상의 분단된 국가는 통일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2018년 종전선언을 했던 에티오피아는 87개 종족에 290개 언어, 군병력 12만명(10만은 육군)으로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민주공화국이다. 북쪽에 에리트레아, 동북쪽에 지부티, 동쪽에 소말리아, 남쪽에 케냐, 서남쪽에 남수단, 서북쪽에 수단과 국경을 접하였다. 또한 2018년에는 인구 1억 명을 돌파해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내륙국이다. 국가별 인구 순위에 따르면 나이지리아(약 2억)에 이은 아프리카 2위의 대국이다. 이집트(약 1억)나 콩고민주공화국(약 8400만), 탄자니아(약 5900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약 5700만)보다 인구가 많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은 국가로도 유명하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중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이탈리아에게 패배하여 5년 정도 강점된 적이 있다. 이후 영국군 주도 연합군에 의해 이탈리아가 패배하면서 1941년 해방되었다. 그래도 강점되던 기간이 짧아 완전히 식민화됐다고 보기도 어렵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크게 비교되기 때문에 에티오피아는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은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다. 반면에 에리트리아는 현재 인구 350만, 9개 종족, 2개 언어, 군병력 4만6000명으로 1889년 에티오피아로부터 양도받은 이탈리아가 식민지로 지배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44년 영국과 에티오피아 협정 체결로 에티오피아와 함께 이탈리아로부터 완전 해방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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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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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어ㅂ연구소장] 에티오피아에 7년간의 극심한 가뭄이 들자 1974년 쿠테타가 일어나 공산독재정권이 들어섰다. 공산주의 쿠데타 주동자 ‘멩기스투’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를 폐위시켰고, 이 고마운 ‘강뉴부대’ 용사들은 공산주의와 싸웠다는 이유로 사회의 최빈곤층으로 전락하여 지금까지도 어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반면에 6.25남침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혈맹의 황제와 용사들이 17년간 지속된 멩기스투 공산독재정권에 의하여 허망하게 사라지는 동안 우리는 부끄럽게도 너무나도 긴 세월을 그들에 대해서 잊고 살아왔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의 에티오피아 방문과 함께 최정예 황실근위대였던 ‘강뉴부대’의 6.25남침전쟁에 참전에 대한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많은 NGO 및 보훈단체들이 모금활동을 통해 지원을 했으며, 최근에는 코로나의 위기 속에 마스크를 보내주기도 했다 한편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던 1990년 소련의 지원이 중단되자 사회주의 멩기스투 공산독재정권은 붕괴의 위기에 처했다. 이에 시장경제제도를 도입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단행함과 동시에 1990년3월 에티오피아노동당을 에티오피아민주통일당(EDUP)으로 고치고, 비(非)마르크스주의자도 당원이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허나 1991년 2월 정부군과 반군세력 사이의 평화협상이 결렬되고 무력충돌이 격화되어 4월에는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이 주요도시를 장악하였으며, 5월 멩기스투가 국외로 탈출한 가운데 반군 세력이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1974년 군사쿠데타 이후 17년간 지속된 사회주의 공산독재정권이 붕괴되고 다당제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신정권이 수립되었다. 1991년 7월 반군세력은 국민평의회를 구성하고, EPRDF의 지도자 멜레스 제나위(MelesZenawi)를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각 지역에 할거하고 있는 반군세력들간의 갈등과 인종간의 대립으로 신정권의 권력기반은 취약한 편이다. 특히 미완의 종전선언에 따른 에리트레아의 잔존한 항쟁 및 오로모 지역 반군세력과 정부군의 무력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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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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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미 종전선언을 했던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한 빈국(貧國)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6.25남침전쟁 당시 에티오피아는 오늘날과 달리 1950년대에 우리의 국민소득이 100달러 미만일 때 이미 3000달러 수준의 부국(富國)이었다. 한창 전쟁 중이었던 1951년, 우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지상군 6000명의 최정예 용사들을’ 파병해준 나라이기도 했다. 에티오피아는 전설 속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후예들이 삼천 년을 이어온 나라였지만 1935년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국민 27만명이 희생되고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영국으로 망명했었다. 그 후에도 투쟁은 계속됐고, 1941년 영국군의 도움으로 이탈리아군을 몰아냈다. 다시 집권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을 겪는 나라가 없도록 집단안보를 주창하는 평화주의자였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여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에티오피아 제국 최정예 용사인 황실근위대로 ‘강뉴부대’를 편성해 파병하였다. 대한민국으로 파병온 그들의 이름인 ‘강뉴(Kagnew)’는 암하라어로 ‘평정(平定)’과 ‘초전박살(初戰撲殺)’이라는 뜻이다. 1951년 7월 한국으로 온 ‘강뉴부대’는 미군 7사단에 배치되어 그해 9월에 벌어진 ‘적근산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이후 한국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던 ‘철의 삼각지 전투’에 투입되어 ‘강뉴’ 이름의 의미처럼 단 한 번도 고지를 적에게 넘겨준 적이 없을 정도의 실력을 뽐내며 파병 동안 무려 253전 253승이라는 무패의 신화를 이루었다. ‘강뉴부대’ 용사의 활약은 전쟁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53년 이후 그들은 우리의 재건을 위하여 월급을 모아서 서울 동두천에 ‘보화 고아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들을 1956년까지 보살피며 그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상(像)을 보여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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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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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과 미국 정부의 한국전쟁 종전선언 문안 작성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허나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종전선언이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3일 관련당국 등에 따르면 한미간 종전선언 문안 작성 협의가 굉장히 많이 조율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문안에는 '군사적 긴장 해소 및 한반도 평화를 위해 종전을 선언한다'는 내용이 적시될 것이라고 했다. 향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전을 위한 발판으로 종전에 나선다는 목적이 기록된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미국의 한 언론매체는 유엔군사령부 해체 등 종전선언이 현 정전협정 체제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는 방향으로 조율 중이라고도 보도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함께 선언하자”고 제안했다. 따라서 종전선언의 주체가 남북과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포함해 4자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최근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 종전선언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미국과 영국이 ‘외교적 보이콧’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에리트레아와 국경분쟁을 지속하던 에티오피아의 아비(AbiyAhmedAli) 총리는 2000년에 체결하였던 평화협정을 전적으로 수용하겠다고 2018년 7월에 발표하면서 지속되었던 분쟁상황이 전환되었다. 이후 7월9일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는 정상회담을 개최하였고, 전쟁상태 종식의 내용을 담은 “평화우호공동선언(Joint Declarationof Peaceand Friendship)”에 서명함으로써 오랜 국경 분쟁을 매듭지었다. 또 7월14일에 후속 정상회담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9월18일에는 외교 및 무역관계가 재개되는 등 양국 간 평화 프로세스가 단계적으로, 하지만 신속히 진전되었다. 2019년 10월11일, 종전선언으로 에리트레아와의 분쟁 종식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에티오피아의 아비 총리는 201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2018년 아비 총리가 보인 노력이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결정적이고 진취적인 결단”이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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