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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주류인 에리트레아는 2002년 대부분의 교회를 폐쇄한 후 수십 년 동안 기독교인들을 체포와 구금을 하여 고문하는 등 박해했다. 따라서 일부 에리트레아 기독교인들은 국경을 넘어 에티오피아로 도망쳐 난민 캠프에서 안전한 장소를 찾았지만 티그레이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또다시 테러가 계속되는 위험에 빠졌다고 영국 CT(크리스천투데이)는 전했다. 인권 운동가이자 릴리즈 파트너인 아스멜라시 박사는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이 나라에서 계속해서 성장해 왔다”라며 “기독교인들은 에리트레아에서 가장 박해를 받아온 집단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집결을 멈추지 않고 예배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의 통제 밖”이라고 말했다. 아스멜라시 박사는 에리트레아 감옥에 적어도 기독교인 180여명이 구금됐고 일부는 지난해 풀려났는데, 아마도 과밀한 교도소에서 코로나바이러스를 억제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여름에 수십 명이 다시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아스멜라시 박사가 “정부의 정책에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라며 “정부는 이 기독교인들을 체포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라고 말했듯이 종전선언 후에도 바드메 마을 문제와 티그라이, 오로모 지역 반군세력과 정부군의 무력충돌 및 종교박해 등의 분쟁은 지속되고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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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2-02-28
  • [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에티오피아 종전선언을 이끌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아비 아머드 알리 총리는 2019년 12월 1일부로 인민혁명 민주전선(TPLF)의 31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번영당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20년 11월에 다민족 국가인 에티오피아는 북부 티그라이 지역에서 군 캠프가 피습을 당하자 6개월 비상상태 선포와 함께 군 병력을 투입하며 전쟁이 또 시작되었다. 티그라이 분쟁에 투입한 에티오피아군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항이 알려져 분쟁은 더 가열되었다. 이로 인해 악숨 공항이 파괴되는 등 추가적인 타격을 입었고 티그라이 분쟁이 인접한 에리트레아까지 번지는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영국의 릴리즈 인터내셔널은 성직자들이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레이에서 전투에 합류한 에리트레아 군부의 표적이 되어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정교회 소식통은 신성한 도시 악숨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는 과정에서 최소 78명의 성직자들이 에리트레아 군에 의해 사망했다고 전했다. 전 에리트레아 기독교인 수감자였지만 현재는 종교자유 옹호자가 된 헬렌 베르헤인은 릴리즈 인터내셔널에 “에리트레아 군이 많은 성직자를 죽이고 아내를 강간하고 있다”라며 “군인들은 어떤 성직자들은 십자가를 잡고 있으면 그들의 손을 베거나 성직자들에게 모자를 벗으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총살한다”고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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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2-02-24
  • [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후 1944년 영국과 에티오피아의 협정 체결로 이탈리아로부터 완전 해방된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를 자국 연방영토로 편입하고 급기야 1962년에는 1개 주로 강제 합병하였으나, 이에 대한 에리트레아의 분리 항쟁이 지속되었다. 결국 셀라시에 황제 시절, 에티오피아에 무력으로 합병되었던 에리트레아가 끈질긴 분쟁을 통해 1993년에 분리 ‧ 독립하였다. 하지만 에리트레아는 분리 ‧ 독립 과정에서 바드메 마을을 에리트레아에 귀속시키고자 하였으나 에티오피아는 이에 반발하였다. 결국 바드메 마을 소유권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못한 채 에리트레아 분리가 완료되었으며,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이후 1997년, 양국 간 관계가 악화되었던 해당 지역의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전쟁 수준으로 갈등이 확대되었다. 게다가 2000년에 두 국가는 평화협정을 잠시 체결하였지만 바드메 마을의 에리트레아 귀속 문제를 둘러싼 의견 대립은 해소되지 않아 양국의 외교관계는 수년간 단절되어 있었다. 2018년은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머드 알리 신임 총리가 에리트레아를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하는 등 대화 프로세스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해이다. 이에 따라 양 국가는 “평화우호공동선언”을 골자로 한 종전협정인 평화협정 체결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2000년의 실패와는 달리 2018년 평화협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국내정치적 지지와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되기도 하였으나, 아비 총리의 의지와 결단력이 부재했더라면 협정 체결 및 후속조치가 신속히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미완의 종전선언 후에도 양국의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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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2
  • [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다른 위기를 불러와...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에티오피아는 전설 속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후예들이 3000년을 이어온 나라이고 아프리카에서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이지만 1882년 이탈리아가 현재 에리트레아 지역에 현지관리청을 설치하며 식민지 진출을 개시한 후, 에티오피아 요하네스 황제를 전사시키고 에리트레아 지역을 사실상 식민지화시켰다. 결국 에티오피아 메넬릭 2세는 1889년에 이탈리아와 ‘우치알리 조약’을 체결하여 에리트레아를 이탈리아에 양도하는 대신 에티오피아 영토에 대한 황제의 주권 인정,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차관 공여 및 군사지원 등을 확보하고 수도를 아디스아바바로 천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암하라어와 이탈리아어 조약 문서에 각기 다른 조항을 넣어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메넬릭 2세가 에티오피아를 사실상 이탈리아의 보호령으로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유인했다. 이를 확인한 메넬릭 2세가 1895년에 ‘우치알리 조약’ 철회를 결정하자, 이탈리아는 이를 구실삼아 에티오피아 침공을 했다. 침략을 당한 메넬릭 2세는 1896.3월에 아디스아바바 북쪽에 소재한 아드와(Adwa)에서 이탈리아를 격퇴함으로써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유지하였으나,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로부터 분리되어 이탈리아의 식민지화로 굳어졌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35년 10월에는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다시 침공하여 강제 점령했고 이 과정에서 겨자 독가스 사용 등으로 에티오피아인 27만 명이 희생도 당했다. 그러나 실제로 강점 기간 내내 이탈리아 군대는 에티오피아 전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저항 세력의 게릴라전에 시달렸으며, 일부 지역은 영국군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격할 때까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지지하는 에티오피아 저항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1년 영국은 이탈리아를 공격하여 에리트레아를 접수하였으며, 그해 5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함에 따라 6년간의 이탈리아의 강제 점령이 종식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를 포함한 연합국 진영 간의 '평화 협정'에서 이탈리아의 강점은 법률적으로 그 합법성이 부정되었고, 오히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 전쟁 배상금을 지급해야만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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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2-02-18
  • [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90년 독일의 통일, 예멘의 통합,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및 중국과 대만의 분쟁 등 지구상의 분단된 국가는 통일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2018년 종전선언을 했던 에티오피아는 87개 종족에 290개 언어, 군병력 12만명(10만은 육군)으로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민주공화국이다. 북쪽에 에리트레아, 동북쪽에 지부티, 동쪽에 소말리아, 남쪽에 케냐, 서남쪽에 남수단, 서북쪽에 수단과 국경을 접하였다. 또한 2018년에는 인구 1억 명을 돌파해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내륙국이다. 국가별 인구 순위에 따르면 나이지리아(약 2억)에 이은 아프리카 2위의 대국이다. 이집트(약 1억)나 콩고민주공화국(약 8400만), 탄자니아(약 5900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약 5700만)보다 인구가 많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은 국가로도 유명하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중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이탈리아에게 패배하여 5년 정도 강점된 적이 있다. 이후 영국군 주도 연합군에 의해 이탈리아가 패배하면서 1941년 해방되었다. 그래도 강점되던 기간이 짧아 완전히 식민화됐다고 보기도 어렵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과 크게 비교되기 때문에 에티오피아는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은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 많다. 반면에 에리트리아는 현재 인구 350만, 9개 종족, 2개 언어, 군병력 4만6000명으로 1889년 에티오피아로부터 양도받은 이탈리아가 식민지로 지배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44년 영국과 에티오피아 협정 체결로 에티오피아와 함께 이탈리아로부터 완전 해방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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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2-02-15
  • [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어ㅂ연구소장] 에티오피아에 7년간의 극심한 가뭄이 들자 1974년 쿠테타가 일어나 공산독재정권이 들어섰다. 공산주의 쿠데타 주동자 ‘멩기스투’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를 폐위시켰고, 이 고마운 ‘강뉴부대’ 용사들은 공산주의와 싸웠다는 이유로 사회의 최빈곤층으로 전락하여 지금까지도 어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반면에 6.25남침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혈맹의 황제와 용사들이 17년간 지속된 멩기스투 공산독재정권에 의하여 허망하게 사라지는 동안 우리는 부끄럽게도 너무나도 긴 세월을 그들에 대해서 잊고 살아왔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의 에티오피아 방문과 함께 최정예 황실근위대였던 ‘강뉴부대’의 6.25남침전쟁에 참전에 대한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많은 NGO 및 보훈단체들이 모금활동을 통해 지원을 했으며, 최근에는 코로나의 위기 속에 마스크를 보내주기도 했다 한편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던 1990년 소련의 지원이 중단되자 사회주의 멩기스투 공산독재정권은 붕괴의 위기에 처했다. 이에 시장경제제도를 도입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단행함과 동시에 1990년3월 에티오피아노동당을 에티오피아민주통일당(EDUP)으로 고치고, 비(非)마르크스주의자도 당원이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허나 1991년 2월 정부군과 반군세력 사이의 평화협상이 결렬되고 무력충돌이 격화되어 4월에는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이 주요도시를 장악하였으며, 5월 멩기스투가 국외로 탈출한 가운데 반군 세력이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1974년 군사쿠데타 이후 17년간 지속된 사회주의 공산독재정권이 붕괴되고 다당제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신정권이 수립되었다. 1991년 7월 반군세력은 국민평의회를 구성하고, EPRDF의 지도자 멜레스 제나위(MelesZenawi)를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각 지역에 할거하고 있는 반군세력들간의 갈등과 인종간의 대립으로 신정권의 권력기반은 취약한 편이다. 특히 미완의 종전선언에 따른 에리트레아의 잔존한 항쟁 및 오로모 지역 반군세력과 정부군의 무력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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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2-02-11
  • [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미 종전선언을 했던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한 빈국(貧國)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6.25남침전쟁 당시 에티오피아는 오늘날과 달리 1950년대에 우리의 국민소득이 100달러 미만일 때 이미 3000달러 수준의 부국(富國)이었다. 한창 전쟁 중이었던 1951년, 우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지상군 6000명의 최정예 용사들을’ 파병해준 나라이기도 했다. 에티오피아는 전설 속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후예들이 삼천 년을 이어온 나라였지만 1935년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국민 27만명이 희생되고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영국으로 망명했었다. 그 후에도 투쟁은 계속됐고, 1941년 영국군의 도움으로 이탈리아군을 몰아냈다. 다시 집권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을 겪는 나라가 없도록 집단안보를 주창하는 평화주의자였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여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에티오피아 제국 최정예 용사인 황실근위대로 ‘강뉴부대’를 편성해 파병하였다. 대한민국으로 파병온 그들의 이름인 ‘강뉴(Kagnew)’는 암하라어로 ‘평정(平定)’과 ‘초전박살(初戰撲殺)’이라는 뜻이다. 1951년 7월 한국으로 온 ‘강뉴부대’는 미군 7사단에 배치되어 그해 9월에 벌어진 ‘적근산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이후 한국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던 ‘철의 삼각지 전투’에 투입되어 ‘강뉴’ 이름의 의미처럼 단 한 번도 고지를 적에게 넘겨준 적이 없을 정도의 실력을 뽐내며 파병 동안 무려 253전 253승이라는 무패의 신화를 이루었다. ‘강뉴부대’ 용사의 활약은 전쟁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53년 이후 그들은 우리의 재건을 위하여 월급을 모아서 서울 동두천에 ‘보화 고아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들을 1956년까지 보살피며 그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상(像)을 보여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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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2-02-09
  • [김희철의 Crisis M] 섣부른 종전선언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와...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과 미국 정부의 한국전쟁 종전선언 문안 작성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허나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종전선언이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3일 관련당국 등에 따르면 한미간 종전선언 문안 작성 협의가 굉장히 많이 조율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문안에는 '군사적 긴장 해소 및 한반도 평화를 위해 종전을 선언한다'는 내용이 적시될 것이라고 했다. 향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전을 위한 발판으로 종전에 나선다는 목적이 기록된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미국의 한 언론매체는 유엔군사령부 해체 등 종전선언이 현 정전협정 체제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는 방향으로 조율 중이라고도 보도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함께 선언하자”고 제안했다. 따라서 종전선언의 주체가 남북과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포함해 4자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최근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 종전선언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미국과 영국이 ‘외교적 보이콧’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에리트레아와 국경분쟁을 지속하던 에티오피아의 아비(AbiyAhmedAli) 총리는 2000년에 체결하였던 평화협정을 전적으로 수용하겠다고 2018년 7월에 발표하면서 지속되었던 분쟁상황이 전환되었다. 이후 7월9일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는 정상회담을 개최하였고, 전쟁상태 종식의 내용을 담은 “평화우호공동선언(Joint Declarationof Peaceand Friendship)”에 서명함으로써 오랜 국경 분쟁을 매듭지었다. 또 7월14일에 후속 정상회담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9월18일에는 외교 및 무역관계가 재개되는 등 양국 간 평화 프로세스가 단계적으로, 하지만 신속히 진전되었다. 2019년 10월11일, 종전선언으로 에리트레아와의 분쟁 종식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에티오피아의 아비 총리는 201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2018년 아비 총리가 보인 노력이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결정적이고 진취적인 결단”이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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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7
  • [김희철의 Crisis M] AI, 핵개발 등 글로벌 신안보 위협의 대두에 따른 협력적 안보정책 필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14일 조선호텔 2층에서 사단법인 국제안보교류협회가 주관한 ‘신안보위협과 국제평화협력 증진’ 세미나가 열렸다. 특히 이번 '글로벌 신안보 위협'에 대응하여 다자간 안보협력을 도모하고 국제평화협력 증진을 위한 국제학술회의는 한국 뿐 아니라 지구 반대편의 아프리카, 유럽 여러나라의 학자들이 줌(zoom)을 이용한 화상회의로 참석했다. 1993년 북한이 NPT를 탈퇴하면서 시작된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비핵화 노력은 지난 30년 가까이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위협의 핵심 과제였다. 북한 비핵화를 위한 노력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사이버 안보, 드론, AI, 자율살상 무기, 극초음속 무기 등의 증가로 ‘글로벌 신안보 위협’이 대두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지난 9월29일 북한이 처음으로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것은 한반도에도 이러한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 나토에서 플레트홈 역할을 하여 소통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는 노력이 필요 제1패널에서는 세종연구소 소장 이상현 박사의 사회로 진행했는데 ‘신안보 위협의 대두와 유럽의 협력적 안보정책’을 주제로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한국의 전문가들이 열띤 발표와 토의를 했다. 이때 노르웨이 국방대학교의 시거드 히데(Peal Sigurd Hide)박사는 ‘집단적 미래대비 나토와 신흥 군사기술 도전’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는 “현재 IT기술의 발달로 빅 데이터, 어플 등을 통해 개인 정보획득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국민 통제에 활용하여 선거에 개입하는 등의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가짜뉴스의 남발과 이를 적국 등을 포함한 내외부 세력들이 경쟁적으로 활용하면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며 노인들은 알고 있지만 공산 국가의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 현혹되면 자유민주주의가 흔들리는 등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시거드 히데(Peal Sigurd Hide)박사는 AI와 사이버와 이를 이용한 군사기술 등에 따른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나토에서 플레트홈 역할을 하며 소통을 통해 용어와 규범을 제시하여 신뢰를 쌓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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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8
  • ‘여군 창설’ 71주년, 금녀의 벽을 넘어 전분야로 성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일 국군의 여군이 창설 71주년을 맞았다. 군은 1950년 9월6일 부산에서 '여자 의용군교육대'가 창설한 날을 '여군의 날'로 정했다. 당시 교육대 창설 사흘 만에 500명이 지원했고 이 가운데 491명이 교육을 마치고 나라를 위해 총을 들었다. 1989년 여성의 사회적 역할 증대와 국방 환경의 변화 흐름에 맞춰 여군 비중을 확대하기 위해 여군병과를 해체했고, 2001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동신 국방부장관이 한국군 최초의 여군 장군으로 진급시킨 양승숙 육군준장이 2002년 1월23일 간호사관학교장으로 취임했다. 2019년 문재인 정부에서는 당초 계획보다 준장 진급자 규모를 7명 줄이는 등 장군 정원 감축에도 시동을 걸었지만, 창군 이래 최초로 여군 3명을 동시에 장군으로 진급시키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이로서 전체 장군의 숫자는 감소했지만, 성장을 계속하던 여군은 오히려 그해에 강선영 준장(여군사관35기)이 최초로 소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항공작전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등 간호, 정보, 항공, 전투병과에서 5명의 여군 장군을 배출했다. 현재 육·해·공군, 해병대의 여군 인력은 1만4600여 명이다. 국방부는 2022년 말까지 여군 인력을 전체 간부 정원의 8.8%인 1만7천여 명까지 늘릴 계획이다. 사관학교에 여생도 입학 허용은 1997년 공군사관학교를 시작으로 1998년 육군사관학교, 1999년 해군사관학교에도 각각 이루어졌다. 2011년부터 여자대학으로 학군단(ROTC)이 확대 설치되면서 현재 2천210명의 여군 ROTC 장교가 양성됐다. ■ 여군 배치 제한을 전면 없애고 조만간 군의 전분야로 확대될 전망 좀처럼 깨지지 않았던 지상과 공중, 해상의 주요보직에서 '금녀의 벽'을 훌쩍 넘어 여군 최초로 전방사단의 보병대대 지휘관이 탄생했고, 아파치 공격 헬기부대 등을 지휘하는 항공작전사령관도 배출했다. 또한 여군 최초 전투비행대장과 첫 여군 함장도 탄생했다. 다만, 특수부대 대대급 이하 부대의 중·소대장, 폭파담당관, UDT(해군 특수전전단), 공군 항공구조사(SART), 잠수함 승조원 등은 아직 배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방부는 2018년에 이런 곳에도 여군 배치 제한을 없애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바 있어 조만간 GOP·함정·전투기·헬기부대 등을 포함해 군의 전분야로 여군 배치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육군에는 9600여 명의 여군이 장교·부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는 육군 전체 간부의 7.8%에 해당한다. 해군과 해병대에는 각각 2090여 명, 580여 명의 여군이 근무 중이다. 해군과 해병대 전체 간부 정원의 약 7.9%에 이른다. 특수전과 잠수함 분야를 제외한 함정, 항공기, 격오지, 육상 전투부대 등 전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중령급 전투함 함장은 3명, 대위급 고속정 정장은 9명이다. 이들 중 2007년 해사 61기로 임관한 김은지 소령은 해군 6항공전단 613비행대대 3편대장으로 "18년 전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한 이후 하늘에서 바다를 지키는 장교가 꿈이었다"며 "늘 도전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해병대 여군 지휘관으로는 중령급 대대장 1명, 대위급 중대장 19명이 근무한다. 또한 9명의 항공기 조종사가 있고, 23명이 해외 파병부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작년에 처음으로 여군 헬기 조종사가 탄생하기도 했다. 공군에는 간부의 8.5%인 2400여 명의 여군이 근무 중이다. 내년까지 국방부와 연계해 소위·하사 등 초임 간부를 증원하고, 정책부서 참모와 전투부대 지휘관 등 여군 보직을 늘릴 계획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 증대와 국방 환경의 변화 흐름에 맞춰 여군 비중을 확대시켜 여군이 남군과 동등한 경쟁력을 갖추고 제 역량을 발휘하는 근무 여건 보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현역군인
    • 종합
    202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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