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5-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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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1)]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한 '88올림픽경비단'은 86 서울아시안게임 경비경찰조직 '88경비단'을 모체로 개편했다. 위의 사진과 같이 경비대원은 근무복, 신변보호대원은 정장형 제복 및 목걸이형 신분증을 착용하였고, 공통적으로 가슴에 훈장형 기장을 달았다. 이들은 경기장 주변 경비와 선수, 임원 등 관계자 신변보호 및 대테러 작전수행 등을 위해 시설주와 긴밀히 협조하며 안전활동을 수행하되 군/경 전담지역 책임한계를 구분했다. 예를 들면 공항 및 항만 경비도 군 주관 하에 군경합동으로 진행해 공항 내 청사, 화물청사, 자유지역 등은 경찰이, 기타 2~3선 지역은 군이 각각 맡았다. 또한 올림픽 개/폐회식 동안 철저한 안전을 위해 개최 12시간 전부터 경찰, 소방, 통신, 대테러 등 합동검측반을 동원해 안전검측을 실시했고, 경기장 주변 도로에는 단계별 교통통제, 입/퇴장 승하차선 지정, 입/퇴장 시차제, 지정주차장제 등을 실시했다. 각종 우발적 사고에 대비해 대테러 특공대, 폭발물처리팀, 한전팀, 구급차, 진압부대 등을 근접 배치했고 출입문과 관람석에 관중 안전감시요원을 투입했다. 이와 같이 직업군인과 경찰 및 자원봉사자들은 음지에서 성공적인 국가 행사를 위해 헌신한 반면에 외출나온 군인들에게는 서울 시내 등 경기장 주변에서 군복을 착용하지 말라는 지시가 하달되어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한편 올림픽이 끝나자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파견된 공무원, 기업체 직원들은 돌아갈 곳이 없어져 실업자가 될 뻔했다. 이미 그들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서 새로운 공공기관인 ‘국민체육진흥공단’을 설립하여 그들을 채용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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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0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0)]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소련의 사주에 의해 발발한 6·25 남침전쟁과 KAL기 격추 만행에도 불구하고 88서울올림픽 당시 모든 경기에서 소련 대표팀은 놀랍게도 관중들의 엄청난 응원을 받았는데 특히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았다. 물론 당시의 미국 NBC 취재진들이 한국의 집창촌이나 PX 유출 같은 것 등 사실상 한국을 폄하하는 식의 편파보도를 했고, 권투경기에서 변정일 사건이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편파중계를 했던 것의 영향이었다. 게다가 주한미군들에 의해 벌어진 임산부 및 택시운전사를 폭행하는 사건사고, 미국 일부선수들의 태극기 모욕과 수영선수의 절도사건 그리고 미국정부의 한국 노태우 정부에 대한 정경유착 및 내정간섭 등이 겹쳐서 상대적으로 소련에 대한 호의적 감정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 관중들이 올림픽 경기장에서 충격적으로 소련 대표팀을 엄청나게 응원 또한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소련 대표팀이 관객의 응원을 받았다는 주장이 사실은 당시 운동권에 의한 조작이었다는 설도 있다. 황순원의 손자이자 당시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황성준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과 소련의 농구경기가 치러질 때 자신이 운동권 인원을 대거 투입해서 현장에서 소련팀을 응원하도록 조치했으며, 그것이 성공하여 일방적인 소련 응원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고 했다. 이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실제로 황성준은 그후 소련팀 응원이라는 사건을 자기 성과로 상부에 보고한 소련측 요원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되고 그 것이 계기가 되어 소련에 몇년간 체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소련이 북한을 버리고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남북한의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운동권 학생들도 많았다. 특히 정통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PD계열이 그러했는데, 사실상 이 때와 이후 진행된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PD계열이 약화되었고 PD 출신 일부 정치인들이 보수 우파로 전향하기도 했다. 아무튼 관객들의 소련팀 응원이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것은 미국 선수들의 추태와 미NBC의 한국을 폄하하는 편파보도 및 주한미군들에 의해 벌어진 사건사고, 그리고 미국정부의 내정간섭 등이 겹쳐진 영향이었다. 육군대학 학생장교 시절에 모처럼의 휴일을 만끽하며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던 필자도 축구종목에서 5승1무(예선전에서 한국과 무승부)전적을 거두며 우승한 소련이 4대2로 이기는 미국과의 경기에서 관중들의 일방적으로 소련팀을 응원하는 분위기를 느껴 의아해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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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0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9)]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8서울올림픽은 역대 최대규모인 159개국 8,397명이 참가해 9월17일 토요일 오전 10시30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올림픽은 통상 오후 3시에 시작되었는데 국가 이미지 모토인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맞췄 오전에 개최했다고 설명했으나, 미국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마침 토요일이 반공일이었는데 그 덕분에 개회식 당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성화대도 올림픽 사상 최초로 계단식이 아닌 엘리베이터(보이지 않게 피아노 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서 두레박처럼 끌어올림)방식을 도입했다. 이후 새로운 점화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되는 전통이 생겼다. 반면에 외국 언론들이 한국인의 개고기 식용문화를 앞다퉈 보도하며 엄청나게 지탄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림픽 기간 전부터 개고기 음식점을 강력하게 단속했는데 이때부터 ‘사철탕’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판매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88서울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양대 진영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격전지'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88서울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열차에 태워 한국에 보내려 했으나,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은 북한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증언이 얼마전에 공개된 1988년 외교문서에 나왔다. 당시 주 파키스탄 한국대사대리는 1988년 8월 7일 외무부 등에 보낸 전문에서 사흘 전 주 파키스탄 중국대사관 참사관에게 들었다며 "중국이 철도편으로 북한과 판문점을 경유하여 올림픽 선수단을 서울에 보내려고 북한과 교섭했으나 북측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88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선수단은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특히 4년 전인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의 안전'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의 불참으로 반쪽 올림픽이 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88서울올림픽 개최 5년전에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 등으로 냉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88서울 올림픽을 최대의 축전으로 만들기 위해 소련 등 동구권도 참가 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여하라고 설득하기로 결정한 이후 언론은 KAL기 격추사건을 더 이상 보도하지 못했다. 소련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고 국내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노력으로 결국 소련이 참가를 결정하면서 소련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됐고 동구권들의 참가로 역대 최대규모의 올림픽 제전이 되었다. 반면에 88서울올림픽에 불참한 북한은 한국에 뒤지는 것을 만회하고자 이듬해인 1989년에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했으나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면서 경제난으로 이어져 훗날 3대 실정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전해진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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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0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8)]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①
    ▲ 88서울올림픽 포스터와 육군대학 시절 모습 [사진=연합뉴스/육군대학 45기 졸업앨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급 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의 GOP 부대에서는 불시의 적 도발 및 부대내의 불미스런 사고 발생의 우려 때문에 휴일에도 항상 비상 소집하는 전화 벨소리에 대기하며 긴장을 하고 지내야 했다. 실제로 1987년 7월, 필자가 사단작전장교의 폭주하는 업무 속에 지쳐 깊은 꿈속에 빠져있던 심야에 아파트 숙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가족이 놀라 필자를 흔들어 깨웠을 때, GOP 철책에서 경계근무 후 복귀하던 병사가 막사 앞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이와 같이 일반 직장인들과는 다르게 직업군인들은 전후방 각지에서 휴일보장 없이 근무하다가 육군대학 교육과정에 입교해서는 비록 교육 성적에 신경은 쓰이지만 휴일에 찾는 사람 없이 완전한 휴무 시간을 보장 받는다. 덕분에 필자는 육군대학 입교 초기 소양시험이 끝나고 모처럼의 휴일에 서울 처가집에 들렸다가 88서울올림픽 미국과 러시아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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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3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7)] 육군대학,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리부대 전출시에 사단장으로부터 승리부대 동문 장교들의 애대심(愛隊心) 고취 위한 격려회식 임무를 부여받은 필자는 본인의 미래 발전을 위한 성적 관리도 중요했지만 바빠졌다. 인접 동료들에게 물어 물어 승리부대로 부임하는 장교들을 파악했다. 그리고 승리부대 출신장교들의 시간 계획을 확인하여 모임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위의 사진과 같이 알림장과 동문 주소록도 만들었다. ■ 출신 학교와 고향 및 조별, 줄・오・대각선별 등의 모임으로 인향만리(人香萬里)를 풍겨… 육군대학 정규과정은 3개 반으로 편성되어 수료시 까지 계속되었다. 한 개 반은 약 50~60명씩으로 구성되었고 또 각반은 4개 조로 세부 편성되어 주로 조별 토의와 발표 등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교실내의 각자 자리를 기준으로 조별, 줄·오·대각선별로 모임도 있었다. 물론 출신학교, 고향, 기타 연관된 사람 간의 별도 모임은 필수였다. 마치 새로운 인연을 쌓기 위해 육군대학에 들어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드디어 ‘승리부대 동문 모임’이 개최되었다. 새로운 인연을 쌓기 위해 모임을 많이 한다는 육군대학의 특성을 이미 경험했던 사단장의 의도대로 시행된 ‘승리부대 동문 모임’은 100% 성공이었다. 사단장의 배려로 모임이 주선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대상자는 거의 참석했고 타부대로 부임해가는 동료들 마저도 승리부대만 사단 모임을 한다고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특히 승리부대에서 근무했던 선후배들은 한잔 술을 나누면서 해우의 정을 만끽했고, 승리부대로 새로이 부임하는 장교들은 사전에 부대의 근무여건을 확인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유익했다. 특히 필자를 통해 ‘승리부대 동문 모임’을 하라고 지시한 사단장에게 감사함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육군대학 교육기간 동안 교실내의 분임조·줄·오·대각선 등 각종 모임을 통해 좋은 인연을 만들며 만난 학생장교들은 교육수료 후 다시 전후방 각 부대로 배치된다. 육군대학 교육과정에는 보병·포병·기갑·공병·통신등을 비롯한 전투병과 뿐만 아니라 병참·헌병·의무·법무 등 기타 병과 장교들도 함께 입교하며 이들은 각 반과 분임조에 고루 분포되어 수업을 진행했다. 이들이 전후방 각 부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인접부대 간의 업무 협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보병인 필자 같은 경우에도 부대에 리스크가 발생해 상급 및 인접부대를 방문했을 대 그 부대에 육군대학 동기가 있으면 일단 그 리스크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육군대학에서 같이 보낸 인연이 모든 문제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원할하게 소통하며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보병병과로서 제한되는 업무에 문제가 있을 때에 헌병이나 법무 및 병참, 의무 병과의 육군대학 동기들은 엄청난 힘이 되어 주었다. 전술 지식을 포함한 군사적 식견을 배양함은 물론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 부대끼면서 좋은 인연이 쌓여 군생활하는 동안 시너지 효과가 있었고, 제대 후인 지금도 좋은 인연으로 만난 육대 동기 모임을 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육군대학 과정을 통해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화향백리(花香百里)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사자성어가 진리임이 증명되었다. 또한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자산이고 능력이며, 끈끈한 인간관계가 직업인들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육군대학 수료 후 기나긴 군생활을 하면서 체험을 통해 깨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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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2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6)] 육군대학,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전후방 각지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 중에 평정, 지휘추천, 시험 등을 종합한 성적순으로 정규, 단기, 통신과정으로 구분되어 입교한다. 또한 중령 진급자는 대대장반, 대령 진급자는 연대장반 교육을 받는 등 모든 영관장교들의 보수교육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당시 ‘정규 45기과정’으로 입교한 동료들은 세련되며 매너도 좋아 도무지 흠 잡을 곳이 없는 우수한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군생활 동안에 시간 및 장소를 불문하고 가장 소중하며 또 오래간다. “화향백리(花香百里)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주향천리(酒香千里) 술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라며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옛 시가 절실하게 공감되는 이유이다. 필자가 초급 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의 승리부대에서 7번(36년 9개월의 군생활 동안에 총 24번 이사)째 이사를 하며 육군대학으로 내려올 때 전출신고를 받은 사단장 최권영 소장(육사19기)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격려금을 주었다. 그러나 이 격려금은 필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위 사진의 ‘승리부대 동문 주소록’에서와 같이 육군대학 교육을 마치고 승리부대로 부임하는 학생장교들을 포함한 승리부대 동문 장교들에게 애대심(愛隊心)을 고취시키기 위한 격려회식을 하라는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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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5)] 최전방 격오지였던 동토의 왕국에서 따뜻한 남쪽나라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진해로 내려와서는 비교되는 사관학교 졸업성적 때문에 비좁고 낡으면서도 제일 높은 층의 육군대학 아파트를 배당받게 되자 아내는 연예 및 신혼시절에 느꼈던 필자에 대한 화려한 기대감이 허상이 되는 것 같은 생각에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쉬운 감정을 숨기며 때마침 태어난 큰아들을 업은 채 불편한 몸으로 묵묵히 짐정리를 함께했다. 필자가 1년동안 교육받은 육군대학 정규45기는 약 160명의 학생장교들로 구성됐고 그중에 사관학교 동기생은 88명이었다. 정규과정에 입교한 자들이라도 다시 성적과 투쟁을 해야 했다. 최종 수료시 교육인원 중 1/3수준의 상층 성적을 얻지 못하면 차기 진급 심사에서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실정에 따라 160명중에 적어도 53명 안에 포함되는 성적을 얻어야 향후 진로에 유리해진다. 이것을 알고 있는 장인이 현 진급에 안주하지 말고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주마가편(走馬加鞭)식의 독려도 했었다. 하지만 사관학교 성적이 필자보다 우수한 동기들이 80여명이나 되었다. 또한 우수한 선배 및 동료인 학생장교들이 즐비하고 사관학교 졸업 성적만 고려할 때 상층 성적을 얻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한편 당해년도 봄에 입교한 앞의 기수에는 주로 1년 선배들이 많았고 마침 사관학교의 같은 중대 출신별로 후배들을 위한 후견인이 정해져 있었다. 필자 담당 후견인은 생도시절에 같은 중대에서 함께 생활했던1년 선배인 이문보 소령(육사36기)이었다. 그는 앞서 공부하면서 꼭 필요했던 참고 자료와 공부 요령 등을 전수해 주었다. 마치 4년전에 고등군사반(OAC) 과정에서 선배들이 시험 준비했던 자료(일명 '고추가루')들을 확보하는 전쟁을 치루었던 상황이 재현되는 것 같았다. 육군대학 총장에게 입교 신고를 할 때 동기생들 뿐만 아니라 타출신 장교들의 눈빛도 보통이 아니었다. 정규과정에 선발된 우수한 장교들 답게 모두들 필자보다 똑똑하고 탁월해 보였다. 학급 조편성이 끝난 뒤에 그동안 준비했던 소양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준비 자료인 고추가루를 전해준 선배들의 조언은 소양시험 성적이 과정 끝까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주일 즈음 지난 뒤에 소양시험 성적표를 받았는데 실망이었다. 전체 평균보다는 높았지만 1/3선에는 미달되는 것 같았다. 육군대학 정규과정에 입교한 기쁨보다 소양시험 성적에 실망한 필자는 끝없는 '경쟁사회'에 대한 비애와 회의감까지 들기도 하였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2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4)] 최전방 격오지였던 동토의 왕국에서 따뜻한 남쪽나라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전방 험지이자 전국 최저 기온을 기록하던 동토의 왕국에서 장장 7시간 넘는 이동을 하여 당시 따뜻한 남쪽나라 진해에 있던 육군대학에 도착했다.(현재는 육군대학이 대전시에 위치) 그곳에는 먼저 도착한 육사 동기 및 선배들이 환영을 해주었다. 그들의 설명을 듣고 아파트 관리실에 들려 필자의 숙소 열쇠를 받아 배정된 아파트를 확인했다. 위의 사진 속에 아파트는 선배들과 군번이 빠른 동기들이 입주하는 비교적 양호한 18평형 아파트였다. 필자에게 배정된 곳은 사진속의 비교적 양호한 아파트 뒤쪽에 위치했고 1960년대에 연탄 보일러식으로 건축한 매우 낡은 9평짜리 구형 아파트 였다. 그것도 제일 높은 4층이었다. 육군대학에서는 매년 4~6백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켜 학생장교들의 숙소 관리도 중요한 업무였다. 당시 육군대학의 아파트와 관사는 구형과 신형으로 구분되어 있고 크기도 상이하여 입주자 선정시 공평하게 군번순으로 좋은 아파트부터 배정했다. 사관학교 졸업시 부여된 군번은 최종 졸업성적 순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군번이 빠른 사람들이 사관학교 공부도 잘했다는 것이고 학생장교들이 배정받은 아파트의 위치로 최종 졸업성적도 식별이 가능했다. ■ 흙먼지 없는 아스팔트 도로와 네온싸인 불빛으로 대낮 같은 도심의 첫날 밤이 좋아 ‘밤을 낮같이, 산악을 평지같이’라는 구호에 익숙해 있던 필자 부부는 전방 격오지의 동토에서의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도로가 아닌 아스팔트 도로와 야간에는 네온싸인 불빛으로 대낮 같은 따뜻한 도심의 첫날이 너무도 좋았다. 하지만 군번순으로 아파트를 배정함에 따라 들통난 사관학교 졸업성적에 필자는 가족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배정받은 숙소가 제일 오래됐고 좁은 아파트인데 그것도 제일 높은 층이었다. 반면에 졸업성적이 월등하여 넓고 좋은 아파트의 로얄층에 입주한 사관학교 동기생의 가족과는 너무도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4년전인 1983년 대위급을 대상으로 하는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위해 전라남도 광주의 상무대로 첫 이사를 했을 때, 교육생 부부들을 위해 준비된 ‘백일아파트’로 입주하게 되었다. 그때에도 9평밖에 안되는 연탄 아궁이 아파트였지만 쥐가 왔다갔다했던 산간벽지의 낡은 관사 보다는 너무도 좋았고 아내는 “시집 잘 왔네”하며 너스레도 떨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교되는 사관학교 졸업성적 때문에 비좁고 낡으면서도 제일 높은 층의 육군대학 아파트를 배당받게 되자 아내는 연예 및 신혼시절에 느꼈던 필자에 대한 화려한 기대감이 허상이 되는 것 같은 생각에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하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2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3)] 최전방 격오지였던 동토의 왕국에서 따뜻한 남쪽나라로(상)
    ▲ 필자가 1988년 입주했던 창원시 진해구 옛 육군대학부지의 노후된 군인아파트 모습 [사진=동영상캡쳐]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는 36년 9개월의 군생활 동안에 총 24번의 이사를 했다. 초급 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 부대는 GOP 부대 임무 교대가 통상 1년 단위로 시행됐다. 따라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2년마다 이사를 했다. 현재는 군대의 복지제도가 발전하여 이사를 할 때면 이동 거리를 고려하여 지원되는 이사 비용 덕택에 이사짐 센터에 요청하여 편리하게 이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사 비용 지원도 없어 가족과 함께 직접 이사짐을 꾸렸고 위의 사진처럼 군용트럭을 이용하여 이사를 했다. 이러한 몇번의 이사를 통해 신혼시에 장만했던 장롱을 비롯한 가구들과 거울, 유리그릇 등은 거의 깨지고 망가져 폐품 상태가 되었다. 필자가 육군대학 입교를 위해 전방 생활을 마치고 전출갈 당시에 살던 약 18평형 군인아파트는 연탄 보일러였지만 그나마 보온이 잘되어 가족들이 덜 고생하며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 초에 살던 구형 관사는 집안에 쥐들이 자유롭게 오가고 장작을 땠지만 보온도 잘 안되어 한겨울이면 방안에 입김이 서릴 정도로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이사짐 꾸리고 정리하는 것은 이동 거리와 관계 없이 집안 전체가 전쟁터를 방불케 해 전방 GOP 부대에서 근무하는 덕택에 결혼하여 첫 신혼집인 구형 군인관사에 입주한 것을 시작으로 6번씩이나 관사와 아파트를 번갈아 가며 이사했다. 그때마다 필자는 뜻하지 않게 당직 근무를 했고, 짐을 꾸리어 군용트럭에 싣고 이사하는 것은 가족의 몫이었다. 당시의 이사는 부대 임무 교대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비록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이사짐을 꾸리고 풀어 정리하는 것은 이동 거리와는 관계 없이 힘든 일이었다. 헌데 이번에는 전국 최저 기온을 기록하던 최전방 동토의 왕국에서 따뜻한 남쪽나라인 진해로 7시간 넘도록 이동하는 장거리 이사였다. 마침 가족이 큰 아들을 출산하여 꼼짝 못하고 회복하고 있는 까닭에 육군대학 입교를 위해 이사짐을 꾸리고 정리하는 것은 필자가 홀로 전담하는 차례가 되었다. 출산에 따라 몸을 풀고 있는 가족의 전화로 코치를 받은 필자는 이번 이사가 장거리이기 때문에 민간 이사짐센터에서 전문 이사차량을 요청했다. 또한 출발하기 일주일 전부터 군 복지회관(PX)에서 종이박스를 구해와 그 속에 유리 및 사기 그릇은 신문지로 둘둘 말아 깨지지 않도록 넣었다. 장농이나 밥상 및 책상의 모서리도 흠이 생기지 않도록 보조대를 붙이는 등 이사 준비하는 동안 집안 전체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게다가 사단장에게 전출 신고를 하는 전날에 상급자 및 동료들과 진한 회식을 하여 그때 마신 술이 깨지도 않은 채였다. 아파트 밖에는 이사짐 센터 차량이 도착해 있었고 시간에 쫓기며 분주해진 필자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면서 “그동안에 가족이 혼자 이렇게 고생하며 이사를 했구나”하는 생각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슴을 메웠다.(중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2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2)] 부여된 임무 완수를 위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고민과 두려움 느끼며 유종지미(有終之美)를 ....((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의 육군대학 전출신고가 드디어 사단장 시간계획에 반영되었다. 소위로 임관해 첫 부대인 중부전선 격오지 부대에서 약 8년간의 근무를 끝내는 순간이었다. ‘유종지미(有終之美)’는 중국 전국시대에 진나라 무왕의 세력이 커지자 점점 자만해져서 처음 품었던 마음을 잃어버림으로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신하가 무왕에게 다음과 같이 직언한 것에 유래한다. 그 신하는 “시경에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처음이 있지 않은 것은 없고, 능히 끝이 있는 것이 적다’는 뜻으로, 처음 시작한 것을 끝까지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대왕께서 천하통일의 대업을 착실히 추진하시어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거두신다면 온 백성이 우러러볼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된 고사성어이다. ■ 직업인의 발전은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거두며 같이 근무한 동료와 10년 이내의 선배들이 큰 역할한 덕택 필자는 88을지연습을 마치고 복귀한 뒤 2주 동안 부대 야전예규를 수정하여 책자로 만들었고, 이것을 육군대학 전출 신고 전날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사단장(최권영 소장, 육사19기)은 사단의 워게임 실시반을 이끌고 한미연합사에 파견돼 88을지연습을 성공적으로 마친 데다가 타 부대로 전출가기 전에 부대 야전예규까지 수정해 재발간한 것을 높이 치하했다. 필자는 중국 진나라의 신하가 무왕에게 직언한 ‘유종지미(有終之美)’를 잘 이루기 위해 약간의 노력을 한 것을 칭찬해준 사단장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더욱 고마운 것은 사단작전장교로 근무하던 중 지난해 운 좋게도 소령 진급자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타 부대로 떠나는 그해 가을에 정상적으로 계급장을 달면 족보에도 등재되는 영광도 얻는 당상관의 직급이 된다. 또한 다음달이면 영관장교 보수교육인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1년간 안정된 후방 생활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육군대학 졸업 후에는 차기 보직이 수방사로 결정되었음을 통보 받았다. 드디어 야전 근무를 지칭하는 비포장 도로 군인이 아닌, 도심권 지역에서의 근무를 의미하는 아스팔트 군인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필자는 최전방 격오지에서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근무한 것이 인사 측면에서 공평하게 수도권 근무로 조정을 해준 요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필자의 차기 보직이 수방사로 발령된 것은 최전방 격오지 부대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인연을 맺었던 선배가 이미 수방사에서 근무하며 그곳 인사관련자에게 강력히 추천한 결과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속칭 장교 유배지라는 별명이 붙은 중부전선 격오지 부대의 소대장으로 최초 부임해 최전방 야전 생활을 시작했고, 같이 전입했던 동기들은 모두 타 부대로 발탁돼 떠나고 필자만이 남아 장기간 근무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직업인의 자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남들이 회피하는 곳이라도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곳이라도 그 곳에는 인재가 있고 그와 좋은 관계를 맺으면 훗날 꼭 보상이 있다는 진리이다. “썩어도 준치이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이 꼭 맞았다. 특히 학벌이나 출신 구분없이 같이 근무한 동료들과 10년 이내의 선배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인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수방사로 차기 보직을 받은 것도 계급이 높은 10년 이상의 선배 보다는 같이 근무한 그 이내의 선배와 동료들이 큰 역할을 한 덕택이었다. ■ 현 진급에 안주하지 말고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주마가편(走馬加鞭)식 독려 사단장에게 육군대학 전출 신고를 마치고 관사에서 결혼 후 7번째 이사짐을 꾸리고 있을 때 장인의 전화가 왔다. 장인인 고(故) 강철 예비역 대령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해방후 인접 옥천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공산당의 학대를 피해 홀홀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학업을 준비하던 중 간부호보생 3기로 합격하였으나 6·25 남침전쟁 발발로 병으로 입대하여 국군 6사단 7연대에서 춘천지구 전투를 치루었고, 그해 육군 종합학교 1기생으로 임관하여 전쟁기간 동안 소・중대장과 참모직을 수행했다. 이후 보병학교 교관, 미국 고등군사반 유학, 대대장, 12사단 및 주월 비둘기부대 작전참모, 28사단 연대장 및 육본 교육과장 등을 역임 후에 예편하여 방산업체에서 15년을 근무했다. 그는 치열한 격전 속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 충무・화랑 등 무공훈장을 5개씩이나 받은 전쟁 영웅이었다. 과거 육군대학을 1등으로 졸업했지만 장군의 반열에 못 올랐던 장인은 필자에게 육군대학 졸업 성적은 앞으로 진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며, “내 원한을 갚아 줘야 되지…, 김 장군 …?”이라고 육군대학 입교를 앞둔 사위에게 격려의 전화를 건넸다. 육군대학 교육은 학교의 수용인원을 고려하여 1년의 정규과정과 3~6개월의 단기과정 그리고 통신과정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정규과정은 시험과 근무 성적을 고려하여 일부 인원만 선발하고 나머지는 단기 및 통신과정에 입교하는 제도였다. 정규과정에 입교한 자들이라도 다시 성적과 투쟁을 해야 했다. 최종 수료시 교육인원 중 1/3수준의 상층 성적을 얻지 못하면 진급 심사에서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장인이 현 진급에 안주하지 말고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주마가편(走馬加鞭)식의 독려였다. 그런데 필자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육군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앞서 입교한 선배기수 중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료들이 꼭 필요한 참고 자료와 공부 요령 등을 전수해 주었다. 덕택에 장인처럼 1등은 못했지만 무사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학벌이나 출신 구분없이 같이 근무한 동료들과 10년 이내의 선배들이 중요하다”라는 진리는 직장(부대) 생활 뿐만 아니라 육군대학에서 조차 또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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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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