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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3)] 힘 솟게 만드는 소나무숲의 기분 좋은 만남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매일 아침 출근하면 사단장 및 주요 참모들이 상황실 벙커에 모여 상급 및 예하 부대의 야간 활동과 예정 사항을 당직사령으로부터 브리핑을 받고 그날의 일정에 대해 사단장은 상황보고를 참고로 주요지침을 하달하며 하루가 시작된다. 사단작전보좌관직을 수행했던 필자는 상황보고 내용을 검토하고 변동사항을 체크하기 위해 새벽 6시경이 되면 어김없이 상황실이 운용되던 지하벙커안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왜냐면 필자는 항상 전체 부대의 운용을 총괄하는 직책이라 변동 내용이나 중요사항들을 숙지할 수 있으나, 당직근무자들은 오랜만에 근무하여 상황보고시에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 확인하고 수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필자의 검토가 끝나고 이어 작전참모와 참모장에게 사전 보고를 한 후에 최종 수정된 정확한 내용으로 사단장에게 상황보고를 하기에 필자는 새벽부터 서둘러 출근해야 했다. 헌데 필자는 동틀 무렵에 아파트를 나와 상황실로 가는 길옆 소나무숲에서 두꺼운 아름드리 소나무 줄기에 몸을 부딪히며 아침 운동을 하는 이영대 사단장을 가끔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쿵...쿵..” 부딪히는 소나무의 기를 받으며 “어이 작전보좌관, 왜 이렇게 일찍 출근해... 좀 쉬면서 건강 주의해야지...수고해...”라며 격려를 해주었다. 수방사 참모장을 하면서 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사단장으로 부임하는 첫날 필자를 보더니 “야, 김희철, 수방사에서 고생했는데 여기서 다시보네...”하며 매우 반가워했다. 필자는 자정이 다되어 퇴근하고 새벽에 출근하는 일이 반복되는 과중한 업무였지만 부대 지휘관의 격려와 각별한 애정을 받고 있다는 은근한 자긍심과 보람에 더욱 부대일에 열중했고 쌓인 피로를 날려보낼 수가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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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9-1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2)] 힘 솟게 만드는 소나무숲의 기분 좋은 만남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재관 장군(육사21기)이 사단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영전하고 후임으로 이영대 소장(학군 4기)이 사단장으로 취임했다. 무적태풍부대 사단장을 그동안 육사출신 장군이 계속 수행하다가 오랜만에 학군출신 사단장이 부임하자 부대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이하는 분위기였다. 이영대 사단장은 고려대학교 출신 학군 4기로 1988년에 장군으로 진급했고 수방사 참모장 재직시에 부대를 필동에서 남태령으로 이전하는 사업을 주도했다. 그때 수도방위사령부 작전장교로 근무했던 필자의 직속상관이었다. 수도경비사령부는 1961년 창설되었으나 1984년 11대 사령관 이종구 장군 때부터 수도방위사령부로 개칭되었다. 일제시절 헌병대가 위치했던 곳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권력의 숨겨진 중심지인 부대를 필동에서 남태령으로 이전하는 사업은 만만하지 않았다. 사령관 구창회 중장(육사18기)이 대통령에게 수방사 이전 계획을 별도로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유명한 지관이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본청 위치를 확정한 후, 후임 김진선(육사 19기) 사령관이 부임한지 얼마 안돼 직할대 건물까지도 거의 완성되었다. 故이영대 준장은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소탈하게 모든 현장을 뛰어다녔고, 일일이 확인하며 지도했던 그의 근면과 철저함 덕분에 남태령 수방사는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는 수방사 부대이전 당시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영전하여 무적태풍부대 사단장을 역임한 뒤 육본 감찰실장 근무시에 과로와 지병으로 순직하여 동작동 현충원에 묻혀 지금은 이웃 남태령 수방사의 발전을 지켜보고 있음을 기억하며 추모해야 한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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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9-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1)]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역대 5사단장은 쟁쟁한 장군들 즉 대통령,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등 역사적인 인물이 많았다. 창설 초기에 원용덕, 백선엽, 이응준과 16대 박정희(육사2기) 장군을 비롯해 채명신(육사5기), 강창성, 윤성민(육사8기), 정병주(육사9기), 김복동(육사11기), 정호근(갑종5기), 신말업(육사16기) 등이 사단장을 역임했고, 사단기동훈련 당시에는 37대 김석재(육사23기) 장군이었다. 역시 5사단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대답게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사단기동훈련에 임했다. 이는 부대운용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단 작전보좌관 김용호 소령(육사37기)을 비롯한 참모들의 정중동(靜中動) 활약 결과물이기도 했다. 특히 김석재 장군의 정확한 상황판단과 지침을 하달하는 작전 지휘력이 돋보였고, 인접 부대 사단장이었지만 선배인 이재관 장군(육사21기)을 존경하며 환대하는 모습이 후배들 보기에도 너무 좋았다. 그러나 부대의 전통과 명성이나 사단장의 유명세와는 달리 사단사령부를 포함한 부대의 전반적인 시설은 6.25남침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 11월18일에 창설된 무적태풍부대보다도 열악했다. 그 이유는 대통령,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등 역사적인 인물인 쟁쟁한 장군들이 사단장을 역임하다보니 열악한 시설들을 중기계획 등의 정상적인 절차와 방법보다는 잘 아는 지인들의 협조로 당시에는 타부대에 없지만 필요한 시설들을 새롭게 만들고 보강했다 허나 군이 발전하고 현대식 건물 등을 정상적으로 중기계획에 반영할 때 미흡하지만 이미 설치된 건물이 있는 부대는 우선순위가 떨어지다보니 무적태풍부대보다도 당시의 열쇠부대 시설들이 오히려 노후되고 열악하게 된 결과가 되었다. 세상살이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이며 아이러니한 것이라고 한다. 타부대에 없는 것을 자력으로 설치할 당시에는 매우 흡족했으나, 결국 명성 높은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타부대보다도 낙후된 시설로 남게 된 결과라는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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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9-0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9)]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투위주의 강인한 교육훈련이 강조되었던 당시에는 군사령부 통제로 매년 사단기동훈련을 했다. 그때 다음번 기동훈련이 계획된 인접 타사단에서 사단장을 포함한 참모요원들이 파견 되어 관찰 및 평가 지원을 통해 자신 부대의 기동훈련시 참고하는 바람직하고 좋은 시스템도 있었다. 마침 필자가 소속된 무적태풍부대가 열쇠부대의 기동훈련의 관찰 및 평가지원 임무를 부여 받았다. 무적태풍부대 이재관 사단장의 2년 후배인 열쇠부대 사단장 김석재 장군(육사23기)은 1944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안의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제23기로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김 장군은 육사 화랑대의 훈육관.연대장.생도대장을 거친 독특한 생도배출 업무경력 때문인지 온화한 성품에 상하간 격의없는 대화를 중시하는 지휘철학을 갖고 있어 부하들 신망이 두터웠다. 또한 육척장신에 외모도 서글서글했다. 허나 일선부대 요직을 두루 거친 야전통으로 서글서글한 외모와 달리 일처리가 빈틈이 없다는 평을 받으며 너무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려 해 주변에 부담을 준다는 얘기도 있었다.. 참고로 김석재 장군은 5사단장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탁월한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아 육본인사참모부장, 3군단장, 1군사령관직을 끝으로 전역한 후 2002년 7월11일 개각시 비상기획위원장을 역임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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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9-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8)]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별 방문한 신말업 군사령관을 영접할 때 사단에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차원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군대는 전투집단이기 때문에 강해야 한다. 군대는 훈련이다”라는 지휘 철학으로 일관했던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인 신말업 장군은 1972년 즈음 무적태풍부대 대대장 근무시에 필승교 부근에서 수류탄 사고로 부하를 잃었다. 백마부대 수색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13개월 동안 참전했을 때에도 한명의 인원 손실없이 부대원 전원이 무사히 귀국하는 등 부하 사랑이 남달랐던 신말업 장군은 대대장 시절의 불의 사고가 항상 가슴속에 아픔으로 남아있었다. 통상 타부대는 사령부에서 사단 참모 및 연대장들과 만나는 정도의 고별방문이었으나 사단은 업무보고를 간단히 마친 후 곧장 필승교로 신 사령관을 안내했다. 필승교 부근 임진강가에 조그마하게 준비한 추모 제사상 앞에 선 신말업 군사령관은 35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는 화려한 영광 뒤에 숨겨진 우여곡절(迂餘曲折)과 부하를 잃어 가슴 속에 깊은 아픔을 간직한 회한에 잠시 고개를 숙이며 숙연해졌다. 고별방문을 마치고 복귀하는 신 사령관은 치밀하고 세심하게 배려해 준비한 사단에 감탄하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사령관 고별방문 준비는 대성공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정보참모 김형배 중령이 건의했다고 전해지며 준비지침을 하달한 사단장 이재관 장군의 혜안이 돋보였다. 이를 통해 상급자이던 하급자이던 심지어 적이라도 상대방 입장에서 고려하고 대비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고사성어가 가슴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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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3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7)]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필자가 무적태풍부대로 부임한지 얼마되자 않아 당시 군사령관 신말업 대장이 이취임 및 전역식을 앞두고 부대에 고별방문을 했다. 신말업 장군은 1934년 경상남도 울산광역시 언양읍에서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 언양초등학교(34회)와 부산고등학교(8회), 육군사관학교(16기)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1968년 백마부대(9사단) 수색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1972년 28사단 무적태풍부대 대대장(중령), 1979년 연대장(대령)을 역임한 뒤 1981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특히 전투위주의 강한 교육훈련을 중점으로 부대를 지휘한 그는 전형적인 야전형 리더십을 발휘하며 1984년에는 소장 진급과 함께 5사단장을, 1987년에는 중장 진급과 함께 2군단장을 역임했다. 1989년에는 육군참모차장으로 보직을 잠시 거친 뒤 같은 해에 군의 최고 계급인 대장으로 진급하며 3야전군사령관직을 성공적으로 화려하게 마치고 1991년 전역하였다.(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2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6)]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②
    당시 무적태풍부대장 이재관 장군 모습[사진=연합뉴스/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연구소장] ‘6.6 무장간첩 소동’사건이 한바탕 벌어져 “통합적이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전개한 작전수행이다”라고 칭찬받았던 ‘윤길영 무장탈영병 사건’처럼 즉각 대응하는 조치단계를 통해 작전처의 존재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무적태풍부대 전입시부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존경했던 이재관(육사21기) 장군의 사단장 임기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사단장 이취임식을 열흘 정도 앞두고 개최한 전반기 지휘관 회의는 이재관 사단장의 마지막 환송 회의가 되었다. 전반기 동안의 업무평가를 통해 선정된 우수부대 표창을 하고 후반기 부대운용에 대해 토의 및 발표를 했으나 모두들 성공적으로 사단장 임기를 마치는 이재관 장군에게 덕담을 보내는 훈훈한 분위기였다. 전반기 지휘관 회의가 끝나고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자신의 부대로 출발할 때 무서울 정도로 엄격하고 정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던 사단장이었으나 이취임식을 앞두고 모두들 이별을 아쉬워 했다. 저녁에는 사단장 임기동안 함께 고생한 사령부 참모들과 직할대장 및 연대장들의 부부동반 회식이 사단장 공관에서 열렸다. 처음으로 들어가보는 사단장 공관의 앞 마당에 차려진 뷔페 음식과 영전에 대한 축하와 이별의 아쉬움에 건배하는 술자리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고, 석양이 기울자 군악대 밴드의 반주 속에 일부 참모 및 기무부대장의 흥겨운 노래로 절정에 다달았다. 어느덧 회식의 막바지에 이르러 진행을 하던 사회자 인사참모가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치는 사단장의 내조를 훌륭하게 해낸 사단장 가족에게 인사말을 하라고 기습적으로 마이크를 건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다가 받아든 마이크를 잡고 수줍어하면서 "부족한 사단장을 위해 헌신한 예하 지휘관 및 참모들에게 감사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단장을 군생활 중 지휘관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재관 사단장님은 지는 꽃이 아니라 피어나는 꽃으로 알아주시고 많은 성원을 부탁합니다”라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며 의미있는 여운을 남겼다. 사단장 가족의 멋있는 마무리 맨트는 얼마 뒤에 곧 실현되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이재관 소장은 부하들의 기대와 바램에 따라 사단장을 마친지 10개월 만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군단장으로 다시 금의환향(錦衣還鄕)하였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2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5)]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경근 군단장(갑종151기)이 “이번 무장탈영병을 잡기 위한 대침투작전은 시범을 보인 것과 같은 매우 표준이 되는 사례입니다”라며 칭찬을 했던 윤길영 무장탈영병 사건 발생 3개월이 지났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 (151~152)]‘무장탈영병 위기가 전화위복의 기회’ 참조) 16시간 동안의 무장탈영병 사건은 위기였지만 “훌륭한 대침투작전 훈련이었습니다. 수고했어요!”라는 군단장의 마지막 격려처럼 전 부대원들이 능동적인 행동으로 작전에 성공하여 부대가 단결되며 사기충천하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되었지만 또 사건이 터졌다. 현충일인 6월6일 새벽에 비무장지대(DMZ)에서 무장공비 3~4명을 관측했다는 GP보고가 접수되자, 3개월전 무장탈영병 생포작전을 통해 숙달된 각 부대원들은 절차에 따라 신속한 행동으로 대응했다. 만약을 대비해 전방 및 후방지역에는 5분대기조를 출동시켜 배치하고 검문소의 검문을 강화했으며, 비무장지대(DMZ)의 무장공비라고 추정 관측된 지역에는 수색대대 병력이 투입해 수색작전을 전개했으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관측병의 오인 보고로 작전을 종결하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다. 헌데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사진처럼 조선일보에 ‘무장간첩 수색소동’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다행히도 국방부에서 “녹음기에 대비한 침투방지훈련이 잘못 전달된 것으로 사실과 무관하다”고 공식 발표를 했고, 군단장·군사령관도 즉각 대응을 잘했다는 치하로 무마되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2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4)]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아버지가 언급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Betty)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던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7월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 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 붓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결국 베티고지는 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2소대원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에 의해 10배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여 기적의 36대800 승리신화를 만들며 격퇴시키고 사수하여 역사에 남았다.([김희철의 전쟁사(71~72)] ‘36대800 기적의 승리 만든 베티고지 전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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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3)]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무적태풍부대로 부임 당시에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했다. 이는 필자의 임무중에 군사보호시설 관리가 포함되어 수시로 현장을 확인할 필요에 따른 전임자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행정관서의 건축 심의를 준비하기 위해 비포장 도로와 험한 산길까지도 승용차를 이용해 정찰을 한 덕택에 고장이 많이 발생해 구입한 지 5년도 못되어 처음 마련한 승용차를 폐차 처리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휴일에 아들집을 방문하셔서 첫 구입한 승용차로 무적태풍부대의 안보관광지로 모실 때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효도를 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태풍전망대는 GOP철책에 건설되어 북한지역을 충분히 관측할 수 있다. 또한 동양 최대의 성모상과 십자가, 종각 및 절이 설치되어 각 종파에서 수시로 방문하여 행사를 한다. 김수환 추기경도 성모상 준공식에 참석해 헌당미사를 집도하기도 했다. 특히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 베티고지가 현재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직접 방문은 어렵지만 태풍전망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GOP철책 이북지역에 위치한 베티·노리고지와 임진강을 바라보시던 아버지도 김만술 소위를 언급하시며 감회에 젖었다. 태풍전망대 앞에 흐르는 임진강변 도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안변 및 원산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아버지의 고향인 함흥시이다. 해방된 이후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시다가 자유민주주의를 찾아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가족 전체가 흥남 철수시에 월남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언급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Betty)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던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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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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