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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1)] 통합메트릭스 신화를 만든 정형진 장군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60년대와 70년에는 수많은 간첩사건과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북한의 대남적화통일노선에 따라 남한의 혼란을 유도하고 지하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시도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1968년 1.21사태와 10월~11월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침투사건, 1969년 3월16일에 주문진에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6월에는 흑산도에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있었다. 이렇게 연달아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미국에 보복공격을 요청하는 한편 국민의 반공체제 강화에 주력하여 1968년 4월에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때를 맞춰 1969년 GOP 경계를 담당했던 무적태풍부대에서도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고 사단예하 80연대의 작전지역에서 논두렁에서 비트를 파고 숨어있던 무장공비를 연대지원 포병부대 병사들이 발견하여 사살하는 전과도 올렸다. 필자가 근무하던 1993년에 80연대장은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의 정형진 대령(육사30기)이었다. 그는 필자가 처음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던 중동부 전선의 승리부대에서 성공적인 중대장 근무를 했는데 7년 뒤에 우연하게도 필자가 그 중대장으로 보직되는 등 유독 인연이 많았던 선배였다. 게다가 정 대령이 지휘한 80연대는 수많은 간첩사건과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던 1969년도에 필자의 장인이 연대장으로 재직했던 부대이기도 했다. 필자의 장인 故강철 대령은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해방후에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서북청년회 활동을 했는데 공산당의 폭정이 너무도 가혹해 결국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이후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정경학부에서 공부하다가 6사단 7연대에서 병사로 입대했을 때 6.25남침전쟁이 발발했다. 헌데 입대후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응시했던 보병학교 간부후보생 3기생에 합격 통지서를 받아 종합학교(전시사관학교)1기로 교육받고 소위로 임관하여 11사단에서 일선 소대장, 대대참모, 소총중대장으로 생사의 갈림길인 치열한 전투에 참전하다가 휴전을 맞이했다. 이후 비둘기부대 작전참모로 2년 동안 월남전을 참전하여 대령으로 진급한 장인은 80연대장을 마치고 특전사 작전참모, 육군본부 교육과장직을 수행했다. 마지막 보직인 1사단 부사단장으로 땅굴탐지 작전을 지휘하다가 25년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는데, 2년 뒤에 시추했던 그곳에서 제3땅굴이 발견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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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0)]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의 국방개혁 시행을 위해 기동군단이 2개로 증가함에 따라 무적태풍부대는 소속이 바뀌어 인접 군단 예하부대로 전환되었다. 이에 소속 변경에 따른 미흡한 분야를 보완하고 개선 발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소속 부대의 지휘관이 임석하여 각 지역별로 전술토의를 했다. 그날도 변경된 상급부대의 지휘관인 조성태 군단장(육사20기)이 임진강과 한탄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감제고지에서 예하 사단장들과 전술토의를 했다. 필자는 이영대 사단장을 수행하여 참가했다. 무적태풍부대는 책임지역이 광적면에 사선형 방어를 하고 있어 사진속의 그림과 같이 계단형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전술토의에서 사단장의 지침을 받은 필자는 가용병력을 고려시에 임진강 이남의 거점까지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조 군단장은 사단의 개념을 수용하며 인접 부대에 해당 거점 방어책임을 넘겨 주었다. 성공적인 토의를 마치고 복귀하는 짚차안에서 사단장은 필자에게 발표를 잘했다고 격려했다. 새로운 군단장이 우리의 건의를 수용함에 따라 사단이 후방거점의 방어 및 관리책임에서 벗어나 보다 효율적으로 작전하게 되었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기에 맞춰 지속된 각종 전술토의에서 우리 부대원들이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교육훈련 제일주의 추진에 따라 주요 산악을 등반해 작전계획과 지형을 숙지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술토의와 인접 및 상급부대 역사자료를 정리해 만든 ‘작계변천사’는 전투지휘검열시에 장려사항이 되어 우수부대 표창 수여에 기여했고, 사단장의 신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 또한 합동참모본부의 중요 작전부서 과장인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이 요구했던 합참 차출을 보류함에 따라 결국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후 함께 근무한 경우가 전혀 없었다. 허나 그는 감사하게도 군생활을 마칠 때까지 멘토이자 스승으로 필자를 이끌어 주었다. 아마도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이었던 그는 모두가 선호하는 합참의 좋은 보직임에도 불구하고 현 직책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보류시키다 합류 못한 필자를 오히려 좋게 평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군인은 현재 모시는 직속상관에게 충성을 다하며 복종하는 것이 바로 국가에 대한 충성이고 애국이다. 이런 군인정신으로 전장병이 무장해야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터의 기로에서나 최악의 조건과 상황에 부딪히는 전쟁에서도 임무를 완수하며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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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9)]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④
전투지휘검열 평가를 받기 위해 작전지역으로 행군하는 모습과 예하 연대 훈련 평가를 위해 사단에서 지원된 화기가 장착된 짚차 [사진=국방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투적 사고는 대단히 중요하다. 대부분의 부대가 전투준비태세를 군장결속과 물자분류에 만 우선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중요한 중요한 ‘목’지역을 적 부대가 선점하기 전에 우리 병력으로 먼저 점령해 전투준비를 하는 등의 전투적 사고가 매우 중요하다. 군인은 이런 전투적 사고로 항상 전투준비를 염두에 두고 생활해야만 하고, 그 일환으로 전술토의도 하게 된다. 이러한 전술토의를 하는 목적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현재 계획의 미흡한 분야를 보완하고 개선 발전시키기 위한 토의이다. 두 번째는 참가 대상자들이 그 내용을 잘모르기 때문에 교육 목적상 참가자들이 발표와 토의를 하는 경우이다. 마침 당해년도 가을에는 사단장 재임기간 중에 가장 중요한 평가 및 검열인 군사령부 전투지휘검열이 계획되어 있어 수검 준비를 위한 자체 전술토의도 계속 되었다. 필자는 보다 성공적인 전투지휘검열 수검준비를 위해 전술토의를 진행하면서 지휘관이 교체 될 때마다 작전계획이 바뀌는 현실을 보고 ‘작전계획 변천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이를 위해 문서 보관소를 뒤지고 역대 참모 및 지휘관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바쁘게 전술토의 및 전투지휘검열 수검준비를 하던 어느날 사무실의 전화벨이 힘차게 울려 수화기를 들어보니 합동참모본부에 근무하는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의 목소리였다. 그는 합참의 중요 작전 및 전략부서 과장으로 활약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금 주요업무가 많아 필자가 필요하니 당장 그곳으로 와서 함께 근무하도록 차출하겠다”는 통보였다. 필자는 너무 아쉬웠다. 작전 직능의 장교라면 누구라도 먼저 선점하고 싶은 좋은 보직이었으나 현재 부대의 상황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전술토의가 지속되고 곧 사단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인 전투지휘검열이 있어 존경하는 사단장의 얼굴이 순간 스쳐갔다. 필자는 “참모님, 우선 가겠습니다. 헌데 곧 있을 전투지휘검열이 끝나고 가겠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야, 사단이 중요해? 모든 사단을 관장하는 합참이 중요해? 우선순위를 알아야지..., 또 니가 없어도 사단의 전투지휘검열은 받을 수 있어... 우선 선조치할터이니 기다려...”라고 강요했다. 필자는 작전 직능이면 누구나 먼저 보직을 받고 싶어하는 합참의 주요 부서에서 발탁해 준 전 참모가 너무도 감사했다. 하지만, 현재의 직속상관인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이 신뢰하며 아끼는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부하의 도리를 다해야 했고, 전술토의 등의 산적한 중요한 업무들과 특히 사단장의 중요한 평가인 전투지휘검열 수검을 위해 모든 것을 총괄하여 준비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당장 갈 수가 없어 양해를 구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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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8)]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사령부의 간부들이 오른 산 정상에 있는 ‘감악산비’의 글자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거의 닳아 없어져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감악산비가 삼국시대에 세운 비석임은 거의 확실하다. 북한산 순수비와 형태가 비슷하여 진흥왕 순수비, 진평왕의 순수비 또는 설인귀비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2019년 9월 이 비석의 몇 글자가 해독되었는데, 광(光), 벌(伐), 인(人) 등 글자들이 있었으므로 영토정벌 후 세운 순수비일 가능성에 더 무게가 쏠렸다. '이벌찬'의 벌처럼 신라의 관등명을 뜻하는 낱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근에 칠중성이 있어 고구려와 신라 간에 칠중성 전투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새로 글자가 확인되면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 논문도 나왔다. 삼국시대에도 임진강 중류를 낀 군사적 요충지였듯 6.25남침전쟁 중에 치열하게 벌어진 설마리 전투(글로스터 고지 전투 또는 임진강 전투)의 무대이기도 하다. 설마계곡 입구에는 이를 기리는 영국군 참전 기념비가 있다. ([김희철의 전쟁사](22)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 제 5차 공세 저지시킨 영국군의 설마리 전투’, 2020.02.03. 참조) 또한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감악산은 현재에도 파평산과 더불어 주요 감제고지라는 군사적 요충지라 주변에 많은 군부대도 주둔하고 수시로 전술토의가 이루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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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7)]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 및 작전계획을 숙지토록 유도했던 한탄강 주변의 군자산, 마차산, 감악산 등 산악지역 등반은 필자에게 또다른 추가 임무를 부여했다. 산 정상에 올라 간부들에게 작전계획과 지명 유래를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간이 전술토의도 병행했다. 이를 위해 필자는 늘 한 장짜리 지명 유래 및 지역 전사 설명서를 만들어 즐건 산행이지만 간부들이 지형 숙지를 통해 작전에 보다 효율적으로 기여하는 도랑치고 가재잡는 성과를 올려야 했다. 무적태풍부대 인접인 마차산은 동두천시의 소요동과 연천군 전곡읍 천파리의 경계에 위치한 588m높이의 산으로 3번 국도와 경원선 철도를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보고 있다. 이제까지 소요산 유명도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마차산인데 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막힘없이 터진다. 마차산은 감악산의 지맥으로 시의 서북쪽을 감싸고 있으며 소요동 서단에 위치하면서 한북정맥과 연결되어 있다. 꼭대기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비가 있었는데 감악산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산 정상엔 축성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산 남쪽에 마고개가 있고 북쪽에는 옥녀봉이 솟아 있다. 산이름은 ‘광여도’ 등에는 마차산(磨嵯山)으로, ‘대동여지도’에는 마차산(摩次山), ‘팔도군현지도’에는 마차산(磨差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조선지형도’에 마차산(磨叉山)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사진의 설명서에 있는 감악산(紺岳山)은 화악산, 송악산, 관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높이는 해발 675m이다. 지명은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보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감박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신라시대부터 무속신앙에서 영산으로 여겨 국가적으로 소사(小祀)의 격으로 제사를 올렸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정상은 평지인데 석단이 있고 그 위에는 감악산비 혹은 비뜰왕비라 불리는 석비(石碑)가 있다. 인근의 전설에 7세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실은 이 지역 사람이고 감악산비는 설인귀의 비석이라고 전해지지만, 이는 지역주민들이 설인귀를 동향인으로 삼은 결과일 뿐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비석은 지역 민간신앙에서 감악산신의 상징과도 같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영산이라 불리는 산에는 사찰들이 많기 마련인데, 감악산은 감악산신 신앙이 너무나 강해서 들어섰던 사찰마저 대부분 폐찰이 되었고, 현재는 범륜사를 비롯해, 수월사, 봉암사, 미타암 등의 절이 남아있다. 하지만 인근의 수량이 풍부한 운계폭포 등으로 절경이다. 정상에서는 북쪽 방면에 있는 임진강 건너편으로 휴전선 일대가 보이며, 날이 맑으면 개성시의 송악산까지도 희미하게나마 보이곤 한다. 정상인 장군봉 바로 아래에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하고자 숨어지냈다는 전설이 있는 ‘임꺽정굴’도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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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6)]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는 종무식날에 작전항공장교(S-3Air)들을 소집하여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하였고, 연초 시무식날에는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여 붐을 조성했던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추진했다. 교육훈련을 부대운영 중점으로 강력히 시행하자 훈련을 통해 숙달된 부대원들의 전투준비 태세는 자연스럽게 강화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장병들의 사기가 고양되면서 안전사고 없는 완벽한 부대관리를 하는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교육훈련 제일주의’ 강력추진 붐 조성에 따라 숙달된 부대원들은 각종 검열 및 평가에서 좋은 성적도 올리게 되었고, 그해 연말에는 전투지휘검열 최우수 및 3년 연속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했다. 한편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은 교육훈련의 일환으로 참모 및 실무자들과 함께 주둔지 및 작전지역 주변의 마차산, 감악산, 군자산 등의 중요 산악지역 등반을 통해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을 숙지토록 유도했다. 그 덕분에 상급 부대에서 주관한 각종 전술토의시에 현 지형을 두발로 확인한 부대원들은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상하급자 사이에 느꼈던 거리감도 같이 땀을 흘리며 해소되어 자연스럽게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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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4] 애환의 수방사를 떠나며 얻은 영원한 친구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통상적으로 군의 간부인 장교들은 일정 기간 지나면 보직을 옮겨야 한다. 일명 계획 인사로 당시에는 전방 생활을 어느 정도 근무하면 후방으로 가야하고, 후방 근무 2년이면 다시 전방으로 가서 근무해야한다. 전방으로 전출가기 몇 개월 전에 필자의 후임자로 이미 육군대학 교관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 신원식 동기가 거론되고 있었다. 하지만 생도시절 신원식 동기의 추억은 ‘잠원식’이었다는 것만 기억되었다. 사관학교는 일반 대학과 달리 군 특성에 부합된 ‘전사(戰史)’, 병기(兵器)‘ 등의 특별한 전공과목이 있었고, 제시된 사진과 같이 신원식 동기는 “백번을 다시 태어나도 ‘육사인’이고 싶고, 백번을 다시 생도생활을 해도 ‘전사과인’이고 싶다”고 육사 졸업앨범에 기록을 남겼다. 헌데 유별나게도 그 전공학과의 수업 시간에는 생도들이 많이 졸아서 ‘전사과’는 ‘몽사과(夢史科)’로 불렸고, 신 동기는 대표적으로 수업시간 중 잠에 쉽게 빠지던 생도로 일명 ‘잠원식’이라고도 호칭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어마무시한 독서량으로 주중에는 밤낮없이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것도 부족해서 휴일에 타생도들이 외출하여 여가를 즐기는 시간에도 도서관에 홀로 남아 계속 독서를 했다는 소문을 전해들었다. 그 덕에 수업시간에는 비록 졸았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육사를 졸업했고, 이후 전후방 각지에서 다이아몬드 이빨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논리적인 브리핑을 잘하는 장교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 덕분에 육군대학 교관중에 최우수교관으로 선발도 되었다. 훗날 수방사령관을 역임했던 육사동기 신소령은 육군대학 교관 보직을 마치고 이동하여 필자의 전방부대 전출을 앞두고 수방사 작전과 사무실에서 한달 동안 합동근무를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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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4] 애환의 수방사를 떠나며 얻은 영원한 친구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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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3] 애환의 수방사를 떠나며 얻은 영원한 친구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괄목상대(刮目相對)란 사자성어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며 상대를 대(對)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학식이나 업적이 크게 진보하고 발전한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촉·위·오나라 삼국이 서로 대립하고 있을 당시 오나라 손권의 부하 중에 병졸에서 전쟁의 공으로 장군까지 된 여몽있었는데 무식했다. 그러나 손권은 그가 이론적인 병법까지 알고 능통해지기를 원해서 학문을 깨우치도록 충고했다. 이때부터 그는 전장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공부했다. 얼마 후 뛰어난 학식을 가진 노숙이 여몽과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갔다. 노숙은 여몽과 막역한 친구였고 무식했지만 전투를 잘하던 여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그의 박식함에 깜짝 놀라면서 “이 사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이제 오나라의 여몽(呂蒙)이 아닐세...” 그러자 여몽은 이렇게 대꾸했다. “선비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해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하는 법이라네...”라고 대답하여 ‘괄목상대(刮目相對)’의 유래가 되었고, 훗날 탁월해진 여몽은 불세출의 영웅인 촉나라 관우와 싸워 승리도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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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3] 애환의 수방사를 떠나며 얻은 영원한 친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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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2]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생뚱맞고 갑작스런 모임 마무리로 00경비대장은 “군생활을 먼저 경험한 선배로 후배들에게 지금부터는 군의 중견 간부로 현직책에서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대통령과 국가에 대해 충성하는 것이다”라며 “혹시 업무 중에 애로점이나 도움이 필요하면 배석한 선배나 본인에게 연락하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당부하며 생뚱맞은 호출에 당황했던 모임을 끝냈다. 하림각 현관에서 그는 안내한 선배와 함께 대기중이던 전용 승용차에 탑승하고 출발하자 얼큰하게 상기된 얼굴의 우리는 “충성!”하고 승용차를 향해 경례를 했다. 그런데 승용차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어떤 동기생이 “부대업무에 바빠 죽겠는데 오늘 우리를 왜 부른 거야?”라며 “밥 사주거나 얻어 먹고도 기분 나쁜 경우가 있는데, 이게 후배를 사랑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위세 과시인지? 의문이네...”라며 불평하는 말을 툭 던졌다. 그 동기가 무심코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필자가 느꼈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인접부대에서 근무하는 후배들을 불러 격려의 자리를 마련해준 것에 대해 매우 감격했고 감사했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충격을 받았다. 옛날 이야기 중에 “사자와 황소가 서로 사랑을 했는데 사자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사슴을, 항소는 즐겨 먹던 부드럽고 맛있는 풀을 서로에게 선물했지만 불편하여 결국 이별했다”는 우화가 있다.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으니라”라고 가르친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의미가 귓가에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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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2]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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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1]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우리를 호출했던 00경비대 인사과장인 선배의 안내를 받으며 방에 들어온 00경비대장은 다부지고 건장하며 부리부리한 눈이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모두들 자리에 앉아 그를 주목했을 때 생뚱맞은 갑작스런 호출에 생소한 생면부지의 얼굴들이 겸연쩍은지 대통령을 근접에서 모시는 선배로서 수도권의 중요부서에서 중책을 수행하는 후배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각부대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려고 자리를 마련했다며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때 하림각의 최고급 요리가 코스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반주도 곁들어 한잔씩하게 됐다. 그는 잔을 들면서 “대통령님을 잘보좌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라는 건배를 제의하고는 음식을 들었다. 필자는 대통령을 측근에서 경호하고 부대관리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인접부대에서 근무하는 후배들을 불러 격려의 자리를 마련해준 것에 대해 매우 감격했고 감사했다. 게다가 한 동기는 00경비대장에게 “바쁘신 가운데에도 우리 동기들을 배려하여 이렇게 고급요리로 직접 격려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너스레도 떨었다. 술이 한순배씩 돌자 생도시절과 야전 부대생활의 에피소드로 함박 웃음도 나누며 대화가 계속되었다. 하림각식당 고급 코스요리의 마지막까지는 약 2시간 정도 걸렸지만 특별한 이슈는 없었다. 단지 선배의 후배 사랑 마음 뿐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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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1]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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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0]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기하던 하림각 특실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 생도시절의 추억과 야전부대 근무 경험담으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초청했던 00경비대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7년 선배로 하나회에 소속이었고 곧 대령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김영삼 정권에 의해 하나회가 숙청되기 전인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하나회가 득세하고 있었다. 특히 수방사령부 및 청와대 경비부대에는 하나회 출신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위세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특히 아스팔트군인으로 대표되었던 수방사 요원들은 무소불위의 위세 때문에 일부 병폐도 잔존했다. 그러나 하나회 요원들은 진급이 보장되고 그 조직간의 활동비지원 등으로 여유롭고 당당하게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여건이 보장되었다. 심지어 비하나회 상관이 잘못된 지시를 할 때에도 오히려 소신과 자신있게 대응하는 등으로 멋있게 보여 부하들의 존경을 받는 장교도 있었다. 또한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숙청 4년전이자 필자가 육군대학에서 교육받을 때에 벌어진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필자의 동기회는 이 소동을 통해 오히려 동기애를 다지는 계기도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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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0]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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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9]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필자는 2년 가까운 수방사 작전과 근무에 어느 정도 숙달이 되었으나, 급변하는 주변 상황은 늘 야근을 불러왔고 스트레스는 점점 쌓여갔다. 교통이 편한 수도 서울에 근무했지만 국방부, 합참 및 인근 부대의 동기들을 만나기는 하늘에 별따기처럼 힘들었다. 그날도 새벽에 출근해 야간 근무자의 상황보고 내용을 점검하고 아침 상황회의에 참석하자, 돌출하듯 갑작스레 추가로 부여된 임무가 생겼다. 회의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추가로 식별된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전화벨이 힘차게 울렸다. 청와대 영내 00경비대에서 인사과장으로 근무하는 선배의 전화였다. “김희철, 오늘 저녁 무조건 시간 비워두어... 이따가 다시 전화할테니, 그때 자세한 이야기 해줄께...”하고는 그도 아침 업무로 매우 바빴는지 필자의 대답도 듣기 전에 바로 끊었다. 오후가 되자 그 전화는 필자만이 아니라 교육과 근무하는 동기도 받았다고 전해왔다. 다시 걸어온 선배의 전화에는 자신의 부대장이 우리 둘을 갑자기 호출하여 저녁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격려하겠다는 것이었다. “사령부에 동기들이 많은 데, 왜? 우리 둘만 호출한 것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며 “서로 뭐 잘못한 것이 있냐?”고 물었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튼 과장에게 보고하고 호출한 장소로 같이 가기로 했다. 생뚱맞고 갑작스런 호출로 출발은 했지만 야근시에 할 업무를 미루고 나와 저녁후에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은 걱정이 되었지만 청와대를 지나 자하문을 통과하여 으리으리한 식당 하림각에 도착했다. 하림각 정문에 나와 있던 전화 연락을 한 선배의 안내를 받아 약속된 방에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연합사 등에 근무하는 동기들이었다. 육군대학에서 같은 기수로 교육받았던 사람을 제외하고는 임관후 10여년만에 처음 만나보는 동기들이라 너무도 반가운 해후의 시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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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9]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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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8)]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이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로 논어(論語)의 선진편(先進篇)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중국의 춘추시대에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에, 누가 현명합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달라는 자공의 말에 공자는 “자장은 지나쳤고, 자하는 미치지 못했다”라고 답변했다. 자공은 “그러면 자장(子張)이 나은 것입니까?”라고 다시 질문했고, 공자는 “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으니라”라고 대답하여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유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육군 장병들의 근무지를 말할 때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로 비교한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한강 이북의 많은 부대들의 주둔지 주변은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다. 이동이나 행군 및 훈련 시에는 비포장도로를 이용해야만 했고 바람이 불거나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를 마시며 온몸이 뽀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반면에 수방사 등 도시 주변과 한강 이남의 부대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은 그나마도 아스팔트 도로를 활용하다 보니 비교적 깨끗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다. 따라서 전방 야전부대에 근무하는 장병들은 수방사나 주요 도시에 근무하는 장병들을 ‘아스팔트 군인’이라고 호칭했고, 은근히 그곳에서 근무하기를 선호했다. 그런데 당시에 아스팔트 군인이라고 대표할 수 있던 수방사 장병들은 대부분 친위부대로 근무하는 자긍심과 철저한 충성심을 견지하면서도 야전성을 간직했었다. 또한 특색있고 멋있는 복장에 엄격하고 절도있는 언행으로 그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장병들의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지나치고 과시적 언행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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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8)]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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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7)]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합참에 특공대대의 여성팀 추가 편성 건의 보고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사령부로 복귀하자, 과장(차철이 중령, 육사 32기)과 처장(편정휘 대령, 육사 24기)은 앓던 이가 빠져 시원해진 듯 몹시 좋아하며 필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방사로 전입와서 2년 가까이 근무하며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라 매우 보람있었으나 필자는 이 업무를 끝으로 전후방 교류하는 계획 인사로 전방으로 떠나야 했다. 물론 타부대로 전출가기 전에 “여군 특공팀의 타용도 활용을 철저히 배제하고 최초 목적대로 작전시에 만 운용한다”는 선영제 대간첩대책과장의 주장이 꼭 지켜지도록 과장과 처장에게 재차 건의하였다. 하지만 초기에 특공무술 등으로 훈련하던 여군팀 중에 한명이 사령관 비서실로 보직을 옮기자 각 처장들도 한두명씩 비서로 활용하면서 결국에는 선영제 대간첩대책과장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음을 전출후 전방부대에 근무시에 전달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던 모 선배의 전언에 따르면 여군특공팀이 행정요원으로 전환되자 남녀간의 부적절한 사건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지금은 이러한 여군특공팀을 행정요원으로 전환해서 운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현재 수방사령부 특공대대 여군팀은 남성 못지않게 강한 훈련을 받으며 위의 격파 사진처럼 정규전 및 대비정규전시에 특공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완비되어 있다. 마치 원칙과 공정 및 상식 등 기본이 바로 서야 길 또한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본립도생(本立道生)의 의미처럼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특공대대의 여성팀 창설시에 합참 대간첩대책과장으로 시의적절한 조언을 해주었고, 육군참모차장과 전쟁기념사업회 회장을 성공적으로 역임한 선영제 장군의 ‘내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간다’라는 그의 저서 제목이 다시 한번 가슴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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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7)]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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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6)]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합참 지하벙커에 대간첩대책과가 있었다. 국방부 정문을 통과할 때 출입증을 교환했지만 합참 입구에서 또 교환하고 안내자가 나와 인솔했다. 벙커 입구에서 한번 더 출입증을 교환하는 복잡한 출입절차를 밟았다. 벙커 지하의 좁은 길을 어렵게 굽이굽이 돌고 돌아 선영제 대령의 사무실에 들어가자 수방사의 널찍한 사무실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비좁으며 책상 위에는 각종 보고서가 쌓여 있었고 공기도 몹시 탁했다. 선영제 대령은 며칠밤을 지새웠는지 매우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필자를 바라보고는 입가에 미소 띄우며 반겨주었다. “충성! 훈육관님, 00사단을 떠난지 오랬만에 뵙습니다”하고 인사를 하자 선 대령은 책상 옆에 달랑 한 개밖에 없는 의자를 권하며 앉으라고 했다. 잠시 생도시절과 00사단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며 즐거운 시간에 잠시 빠졌다. 사실 선대령의 동기생이 00사단에서 같이 연대장 직을 수행할 때, 그 둘이 선의경쟁(善意競爭)을 치열하게 하여 중간에서 필자가 난처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그때를 회상하며 한껏 웃었다. 기분이 좋아졌을 때 준비한 보고서를 꺼냈다. 적의 오열들이 침투하여 주요 인사를 납치하거나 중요시설을 타격할 때 서울 시민 중에 여성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때를 대비하여 특공대 임무로 단련된 여군이 필요하고 특히 편의대를 운용시에도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미 수방사령부 주요 상급자의 전화를 받아 이미 알고 있으나 누가 봐도 설득력이 약하다며 더욱이 우려되는 것은 여군팀을 편성해놓고 혹시 행정요원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어, 확실하게 특공요원으로 훈련시켜 최초 목적대로 운용한다는 확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선과장의 최초 목적대로 운용하라는 주장은 당연했다. 하지만 필자는 책무를 완수해야 했기에 “이렇게 찾아와 설명하는 것은 정규전 및 대비정규전시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니 생도시절 제자인 필자의 얼굴을 봐서라도 훈육관께서 긍적적으로 검토해달라”고 애원하다싶히 매달렸다. 결국 타용도 활용을 철저히 배제하여 작전시에 만 운용하도록 준비한다는 약속을 다짐하며 간신히 승인을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수방사령부로 복귀할 수 있었다. 훗날 선영제 대령은 대간첩대책과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여 사단장, 군단장을 거쳐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했다. 중장으로 전역한 후에도 그의 저서 ‘내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간다’처럼 전쟁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또한번 능력을 발휘한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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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6)]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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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5)]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본부의 상급부대인 합참에서 불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자 사령부 작전처는 발칵 뒤집혔다. 노태우 대통령 정부의 실세이기에 재임시절 매사를 자신있게 꺼리김 없이 처리했던 김진선 사령관의 특공대대에 추가로 여성팀을 창설지시가 합참 예하의 일개과이자 대령이 지휘하는 대간첩대책과에서 막혀버린 것이다. 당시 수방사의 분위기는 묘했다. 친위부대라는 자긍심 때문일지 몰라도, 대령 처장들은 이미 장군급의 대우를 받아 가죽벨트에 38구경(리블버)권총을 차고 있었으며 중령 과장들은 이미 대령이 된 듯 직접 펜을 잡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모든 일은 소령급 실무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과장급 이상은 입으로만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육본이나 합참도 처·과장급들의 전화 한통으로 해결되었으며 세부 문서처리는 모두 소령급 실무자의 업무였다. 이번에도 불호령은 소령들에게 떨어졌다. 천하의 실세인 사령관의 지시를 구현도 못하는 오명을 씌우는 무능력을 보여주었다며 무조건 해결하라는 독촉이 떨어졌다. 다급해진 필자는 대간첩대책과의 실무자에게 전화로 건의하고 직접 찾아가 설명도 했으나 윗분의 뜻이라며 막무가내로 거절했다. 결국 대간첩대책과장을 직접 설득하기로 작정을 하고 알아보니, 담당 과장은 필자의 생도시절 훈육관이었고 사단 작전장교(대위) 근무시에 예하 연대장직을 수행한 선영제 대령(육사25기, 예비역 중장)이었다. 실무자를 통해 과장을 접촉하려 했으나 쉽게 만나주지 않던 선영제 대령은 ‘훈육관님’하며 안부 전화를 걸자 반갑게 받으시며 한번 합참으로 들리라고 여지를 남겼다. 기회였다. 필자는 김진선 사령관 결재가 되어있는 보고서와 여군특공팀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추가로 작성한 설명서를 들고 합참 대간첩대책과로 찾아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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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5)]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