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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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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㉗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율성이 6·25남침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군가도 작곡했지만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점령군으로서 자유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1·4 후퇴 때는 중공군과 함께 재차 서울에 내려와 조선궁정악보를 약탈해간 매국노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광주 출신이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공산당원으로 변절한 자를 추모하며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추진했던 정율성 공원 조성사업은 동족상잔의 비국을 겪은 자유대한민국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현재도 핵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으려면 견고한 한미동맹이 절실한 실정이다. 필자가 다녔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북한의 재 남침에 대비해 합동참모본부의 주요부서에 근무하며 군사전략을 담당했던 용삼남(육사33기) 선배로부터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용 선배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발을 짚고 재활치료에 전념했던 필자에게 용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는 생도시절 럭비부 선수 생활을 했는데 운동중에 부상을 입어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이 판단할 때에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으나 강한 의지로 철저하게 운동을 하여 척추 주변 근육을 강화시킴으로써 전혀 불편함 없이 더 건강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합참 근무시에 매일 새벽에 가장 일찍 출근하여 책상 및 의자 정리 및 청소를 한 뒤에 책상위에 올라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300개씩 하여 근육을 강화시켰다. 그가 원주에 있는 부대에 근무할 때에는 고속도로에서 시비를 걸던 조폭을 한방의 주먹으로 넉아웃시킬 정도로 강해졌다는 여담도 남겼다. 건강한 체력은 건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며 업무에 질도 고양시킬 수 있다. 건강의 이상을 극복하며 지칠줄 모르는 용 선배의 체력에 상관들은 힘든 업무도 쉽게 맡길 수 있었고 업무상 만나는 미군들과도 쉽게 친해져 한미 연합작전과 군사전략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일과후에는 독신자 숙소에서 우리의 전통악기인 대금을 연주하며 하루를 마감하여 건강상 어려운 위기를 적극 극복하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예술감까지 가진 문무를 겸비한 군인으로 끝없는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앞으로의 군생활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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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㉖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10월2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세워져 있던 중국 음악가 ‘정율성 동상’이 기단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 귀화한 음악가로, 북한·중공군 군가를 작곡한 인물인데, 광주시가 기념사업을 추진해 논란을 불렀다. 정율성 동상은 중국 청년단체가 제작해 광주 지역 청년단체에 기증한 것으로 2008년 광주 남구 양림동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 입구에 세워졌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이날 재물손괴 혐의로 보수단체 회원 윤모(5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전날(1일) 오후 정율성 흉상 목 부분에 밧줄을 묶고 2.5톤 승합차에 이를 연결한 뒤 쓰러뜨리는 모습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정율성 흉상은 위의 사진처럼 약 1m 높이의 기단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기단 옆 땅바닥에 누운 모습으로 발견됐다. 윤씨는 범행 직후 한 유튜브 채널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중단하라고 광주시에 요구했는데 이를 이를 수용하지 않아 강제로 (흉상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윤씨는 경찰에서 “내가 그랬다. 3일 오전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겠다”며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유족 대표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전 광주대성여고 교장은 2일 “공산주의자 정율성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광주시가 혈세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공원을 짓는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고 무조치로 일관하고 있다”며 “공원 철폐를 위한 릴레이 피켓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김오복 전 교장은 “북·중공의 군가를 짓는 등 한국 침략세력의 나팔수 역할을 한 정율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아무 중단 조치도 없이 정율성 공원조치를 강행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율성 공원 문제 제기에 대해 철지난 이념몰이, 색깔론, 민간외교라는 억지 논리만 되뇌고 있다”면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보훈단체들의 집회를 관제 데모로 깎아내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과 보훈가족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자 정율성 공원을 철폐하거나 대안을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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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국방부장관으로 지명된 신원식 의원(육사 37기)은 레닌에게 선물받은 권총으로 독립군을 직접 사살한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의 동상 이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영관영어반’ 과정에 다닐 즈음에는 홍범도의 존재 조차도 몰랐다. 청산리 대첩 이후인 1921년,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와 그 일당들에 의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몰살당하며 해체됐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소련군 복장의 공산주의자를 추모한다는 것은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인민군과 중국인민군 군가와 마오쩌뚱 찬양가 등을 수십 곡 만들며 뼈속까지 어용 공산주의자인 정율성 작곡가의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관생도를 포함한 건전한 국민들의 정체성과 대적관을 현혹시키는 잘못된 처사이다. 필자가 다니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확고한 대적관을 바탕으로 견고한 한미동맹을 위한 교육이 계속되었다. 이 교육을 통해 숙달한 영어회화 능력으로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 및 훈련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을 마치면 다음 보직은 연합사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필자는 이미 다음 보직이 충북 충용부대로 정해져 있었고, 다른 교육생들은 연합사령부 또는 예하 부대 및 연합작전/훈련을 주로 시행하는 합동참모본부로 분류되었다. 마침 합참의 중요부서에서 근무했던 선배도 함께 교육을 받고 있어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한명은 육사 33기 용삼남 중령이었다. 과거 승리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양태수, 나대일, 김형배 선배 등을 포함하여 많은 선배 동료들을 다시 만나는 해후의 시간도 만끽했으나 용 선배는 6개월 교육기간 중에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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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5주년을 맞은 국군의 날은 6·25남침전쟁 당시 우리 육군의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날이다. 추석 연휴 때문에 닷새 앞당겨 지난 26일 열린 올해 국군의 날 기념행사는 그동안 소홀히 했다가 10년 만에 대대적인 도심 시가행진으로 주목받았다. 유사시 북한 지휘부의 지하 벙커를 파괴할 고위력 현무 미사일과 한국형 사드로 불리는 장거리 지대공유도미사일, 엘샘(L-SAM) 같은 첨단무기가 대거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날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핵 위협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며, 우리 군의 태동 시점은 1945년 광복 이후라고 언급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광복 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 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역사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군의 뿌리를 독립군에서 찾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식을 사실상 반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국군의 날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동부전선의 우리 육군 3사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10월1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1956년 제정됐다. 하지만 체제 경쟁이 끝나고 남북정상회담 등이 열린 2000년대 이후론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자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우리나라가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헌법에 따라 군의 뿌리도 임시정부 군대인 광복군으로 정립하는 게 맞다고 민주당 등 일부는 주장하지만 확고한 대적관을 강조해온 현 정부는 선을 긋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웠던 광복군도 의미는 있지만, 지금 우리 군은 북한과 싸우는 군대라며 국군의 확고한 정체성을 강조했고, 여야의 인식 차는 국군의 날 메시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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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㉓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개월 기간의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간정도 지나갈 즈음에 필자는 그동안에 미루어 왔던 석사학위 논문의 마무리에 쉴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영관영어반’ 과정에 입교시킨 것은 능력이 부족한 필자가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주신 신의 배려와 인도라 생각되어 감사할 뿐이었다. 최종 논문심사에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라는 필자의 논문을 검토하던 동국대학교 3명의 지도교수들은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제공해준 귀국보고서가 큰 바탕이 되었고, 다른 학생들은 논문들은 기존의 타 논문에서 인용하여 만들다 보니 필자의 논문보다 교수들이 참고할 사항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사중에 지도교수들은 논문 내용보다 내 신상에 더욱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목발을 짚고 있지만 육사37기로 박지만과 동기라고 하자 그들은 ”아마도 그 동기들은 똑똑한 사람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기생 전체를 칭찬해주어 동기회 품격이 격상되는 이미지에 일조한 기분이 들어 보람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교한 영관영어반 과정은 주말부부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됨과 동시에 이미 취임해 맹활약하는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도 풀었지만 대대장 근무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계기가 되었고, 영관영어반 수료증과 동국대학교 석사학위기를 받아 내실을 기하는 일거다득(一擧多得)의 결실을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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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1)] 통합메트릭스 신화를 만든 정형진 장군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60년대와 70년에는 수많은 간첩사건과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북한의 대남적화통일노선에 따라 남한의 혼란을 유도하고 지하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시도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1968년 1.21사태와 10월~11월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침투사건, 1969년 3월16일에 주문진에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6월에는 흑산도에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있었다. 이렇게 연달아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미국에 보복공격을 요청하는 한편 국민의 반공체제 강화에 주력하여 1968년 4월에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때를 맞춰 1969년 GOP 경계를 담당했던 무적태풍부대에서도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고 사단예하 80연대의 작전지역에서 논두렁에서 비트를 파고 숨어있던 무장공비를 연대지원 포병부대 병사들이 발견하여 사살하는 전과도 올렸다. 필자가 근무하던 1993년에 80연대장은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의 정형진 대령(육사30기)이었다. 그는 필자가 처음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던 중동부 전선의 승리부대에서 성공적인 중대장 근무를 했는데 7년 뒤에 우연하게도 필자가 그 중대장으로 보직되는 등 유독 인연이 많았던 선배였다. 게다가 정 대령이 지휘한 80연대는 수많은 간첩사건과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던 1969년도에 필자의 장인이 연대장으로 재직했던 부대이기도 했다. 필자의 장인 故강철 대령은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해방후에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서북청년회 활동을 했는데 공산당의 폭정이 너무도 가혹해 결국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이후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정경학부에서 공부하다가 6사단 7연대에서 병사로 입대했을 때 6.25남침전쟁이 발발했다. 헌데 입대후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응시했던 보병학교 간부후보생 3기생에 합격 통지서를 받아 종합학교(전시사관학교)1기로 교육받고 소위로 임관하여 11사단에서 일선 소대장, 대대참모, 소총중대장으로 생사의 갈림길인 치열한 전투에 참전하다가 휴전을 맞이했다. 이후 비둘기부대 작전참모로 2년 동안 월남전을 참전하여 대령으로 진급한 장인은 80연대장을 마치고 특전사 작전참모, 육군본부 교육과장직을 수행했다. 마지막 보직인 1사단 부사단장으로 땅굴탐지 작전을 지휘하다가 25년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는데, 2년 뒤에 시추했던 그곳에서 제3땅굴이 발견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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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1)] 통합메트릭스 신화를 만든 정형진 장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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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0)]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의 국방개혁 시행을 위해 기동군단이 2개로 증가함에 따라 무적태풍부대는 소속이 바뀌어 인접 군단 예하부대로 전환되었다. 이에 소속 변경에 따른 미흡한 분야를 보완하고 개선 발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소속 부대의 지휘관이 임석하여 각 지역별로 전술토의를 했다. 그날도 변경된 상급부대의 지휘관인 조성태 군단장(육사20기)이 임진강과 한탄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감제고지에서 예하 사단장들과 전술토의를 했다. 필자는 이영대 사단장을 수행하여 참가했다. 무적태풍부대는 책임지역이 광적면에 사선형 방어를 하고 있어 사진속의 그림과 같이 계단형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전술토의에서 사단장의 지침을 받은 필자는 가용병력을 고려시에 임진강 이남의 거점까지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조 군단장은 사단의 개념을 수용하며 인접 부대에 해당 거점 방어책임을 넘겨 주었다. 성공적인 토의를 마치고 복귀하는 짚차안에서 사단장은 필자에게 발표를 잘했다고 격려했다. 새로운 군단장이 우리의 건의를 수용함에 따라 사단이 후방거점의 방어 및 관리책임에서 벗어나 보다 효율적으로 작전하게 되었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기에 맞춰 지속된 각종 전술토의에서 우리 부대원들이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교육훈련 제일주의 추진에 따라 주요 산악을 등반해 작전계획과 지형을 숙지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술토의와 인접 및 상급부대 역사자료를 정리해 만든 ‘작계변천사’는 전투지휘검열시에 장려사항이 되어 우수부대 표창 수여에 기여했고, 사단장의 신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 또한 합동참모본부의 중요 작전부서 과장인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이 요구했던 합참 차출을 보류함에 따라 결국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후 함께 근무한 경우가 전혀 없었다. 허나 그는 감사하게도 군생활을 마칠 때까지 멘토이자 스승으로 필자를 이끌어 주었다. 아마도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이었던 그는 모두가 선호하는 합참의 좋은 보직임에도 불구하고 현 직책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보류시키다 합류 못한 필자를 오히려 좋게 평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군인은 현재 모시는 직속상관에게 충성을 다하며 복종하는 것이 바로 국가에 대한 충성이고 애국이다. 이런 군인정신으로 전장병이 무장해야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터의 기로에서나 최악의 조건과 상황에 부딪히는 전쟁에서도 임무를 완수하며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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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0)]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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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9)]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④
- 전투지휘검열 평가를 받기 위해 작전지역으로 행군하는 모습과 예하 연대 훈련 평가를 위해 사단에서 지원된 화기가 장착된 짚차 [사진=국방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투적 사고는 대단히 중요하다. 대부분의 부대가 전투준비태세를 군장결속과 물자분류에 만 우선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중요한 중요한 ‘목’지역을 적 부대가 선점하기 전에 우리 병력으로 먼저 점령해 전투준비를 하는 등의 전투적 사고가 매우 중요하다. 군인은 이런 전투적 사고로 항상 전투준비를 염두에 두고 생활해야만 하고, 그 일환으로 전술토의도 하게 된다. 이러한 전술토의를 하는 목적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현재 계획의 미흡한 분야를 보완하고 개선 발전시키기 위한 토의이다. 두 번째는 참가 대상자들이 그 내용을 잘모르기 때문에 교육 목적상 참가자들이 발표와 토의를 하는 경우이다. 마침 당해년도 가을에는 사단장 재임기간 중에 가장 중요한 평가 및 검열인 군사령부 전투지휘검열이 계획되어 있어 수검 준비를 위한 자체 전술토의도 계속 되었다. 필자는 보다 성공적인 전투지휘검열 수검준비를 위해 전술토의를 진행하면서 지휘관이 교체 될 때마다 작전계획이 바뀌는 현실을 보고 ‘작전계획 변천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이를 위해 문서 보관소를 뒤지고 역대 참모 및 지휘관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바쁘게 전술토의 및 전투지휘검열 수검준비를 하던 어느날 사무실의 전화벨이 힘차게 울려 수화기를 들어보니 합동참모본부에 근무하는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의 목소리였다. 그는 합참의 중요 작전 및 전략부서 과장으로 활약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금 주요업무가 많아 필자가 필요하니 당장 그곳으로 와서 함께 근무하도록 차출하겠다”는 통보였다. 필자는 너무 아쉬웠다. 작전 직능의 장교라면 누구라도 먼저 선점하고 싶은 좋은 보직이었으나 현재 부대의 상황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전술토의가 지속되고 곧 사단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인 전투지휘검열이 있어 존경하는 사단장의 얼굴이 순간 스쳐갔다. 필자는 “참모님, 우선 가겠습니다. 헌데 곧 있을 전투지휘검열이 끝나고 가겠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야, 사단이 중요해? 모든 사단을 관장하는 합참이 중요해? 우선순위를 알아야지..., 또 니가 없어도 사단의 전투지휘검열은 받을 수 있어... 우선 선조치할터이니 기다려...”라고 강요했다. 필자는 작전 직능이면 누구나 먼저 보직을 받고 싶어하는 합참의 주요 부서에서 발탁해 준 전 참모가 너무도 감사했다. 하지만, 현재의 직속상관인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이 신뢰하며 아끼는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부하의 도리를 다해야 했고, 전술토의 등의 산적한 중요한 업무들과 특히 사단장의 중요한 평가인 전투지휘검열 수검을 위해 모든 것을 총괄하여 준비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당장 갈 수가 없어 양해를 구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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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9)]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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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8)]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사령부의 간부들이 오른 산 정상에 있는 ‘감악산비’의 글자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거의 닳아 없어져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감악산비가 삼국시대에 세운 비석임은 거의 확실하다. 북한산 순수비와 형태가 비슷하여 진흥왕 순수비, 진평왕의 순수비 또는 설인귀비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2019년 9월 이 비석의 몇 글자가 해독되었는데, 광(光), 벌(伐), 인(人) 등 글자들이 있었으므로 영토정벌 후 세운 순수비일 가능성에 더 무게가 쏠렸다. '이벌찬'의 벌처럼 신라의 관등명을 뜻하는 낱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근에 칠중성이 있어 고구려와 신라 간에 칠중성 전투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새로 글자가 확인되면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 논문도 나왔다. 삼국시대에도 임진강 중류를 낀 군사적 요충지였듯 6.25남침전쟁 중에 치열하게 벌어진 설마리 전투(글로스터 고지 전투 또는 임진강 전투)의 무대이기도 하다. 설마계곡 입구에는 이를 기리는 영국군 참전 기념비가 있다. ([김희철의 전쟁사](22)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 제 5차 공세 저지시킨 영국군의 설마리 전투’, 2020.02.03. 참조) 또한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감악산은 현재에도 파평산과 더불어 주요 감제고지라는 군사적 요충지라 주변에 많은 군부대도 주둔하고 수시로 전술토의가 이루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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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8)]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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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7)]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 및 작전계획을 숙지토록 유도했던 한탄강 주변의 군자산, 마차산, 감악산 등 산악지역 등반은 필자에게 또다른 추가 임무를 부여했다. 산 정상에 올라 간부들에게 작전계획과 지명 유래를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간이 전술토의도 병행했다. 이를 위해 필자는 늘 한 장짜리 지명 유래 및 지역 전사 설명서를 만들어 즐건 산행이지만 간부들이 지형 숙지를 통해 작전에 보다 효율적으로 기여하는 도랑치고 가재잡는 성과를 올려야 했다. 무적태풍부대 인접인 마차산은 동두천시의 소요동과 연천군 전곡읍 천파리의 경계에 위치한 588m높이의 산으로 3번 국도와 경원선 철도를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보고 있다. 이제까지 소요산 유명도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마차산인데 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막힘없이 터진다. 마차산은 감악산의 지맥으로 시의 서북쪽을 감싸고 있으며 소요동 서단에 위치하면서 한북정맥과 연결되어 있다. 꼭대기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비가 있었는데 감악산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산 정상엔 축성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산 남쪽에 마고개가 있고 북쪽에는 옥녀봉이 솟아 있다. 산이름은 ‘광여도’ 등에는 마차산(磨嵯山)으로, ‘대동여지도’에는 마차산(摩次山), ‘팔도군현지도’에는 마차산(磨差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조선지형도’에 마차산(磨叉山)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사진의 설명서에 있는 감악산(紺岳山)은 화악산, 송악산, 관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높이는 해발 675m이다. 지명은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보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감박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신라시대부터 무속신앙에서 영산으로 여겨 국가적으로 소사(小祀)의 격으로 제사를 올렸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정상은 평지인데 석단이 있고 그 위에는 감악산비 혹은 비뜰왕비라 불리는 석비(石碑)가 있다. 인근의 전설에 7세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실은 이 지역 사람이고 감악산비는 설인귀의 비석이라고 전해지지만, 이는 지역주민들이 설인귀를 동향인으로 삼은 결과일 뿐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비석은 지역 민간신앙에서 감악산신의 상징과도 같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영산이라 불리는 산에는 사찰들이 많기 마련인데, 감악산은 감악산신 신앙이 너무나 강해서 들어섰던 사찰마저 대부분 폐찰이 되었고, 현재는 범륜사를 비롯해, 수월사, 봉암사, 미타암 등의 절이 남아있다. 하지만 인근의 수량이 풍부한 운계폭포 등으로 절경이다. 정상에서는 북쪽 방면에 있는 임진강 건너편으로 휴전선 일대가 보이며, 날이 맑으면 개성시의 송악산까지도 희미하게나마 보이곤 한다. 정상인 장군봉 바로 아래에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하고자 숨어지냈다는 전설이 있는 ‘임꺽정굴’도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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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7)]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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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6)]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는 종무식날에 작전항공장교(S-3Air)들을 소집하여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하였고, 연초 시무식날에는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여 붐을 조성했던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추진했다. 교육훈련을 부대운영 중점으로 강력히 시행하자 훈련을 통해 숙달된 부대원들의 전투준비 태세는 자연스럽게 강화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장병들의 사기가 고양되면서 안전사고 없는 완벽한 부대관리를 하는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교육훈련 제일주의’ 강력추진 붐 조성에 따라 숙달된 부대원들은 각종 검열 및 평가에서 좋은 성적도 올리게 되었고, 그해 연말에는 전투지휘검열 최우수 및 3년 연속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했다. 한편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은 교육훈련의 일환으로 참모 및 실무자들과 함께 주둔지 및 작전지역 주변의 마차산, 감악산, 군자산 등의 중요 산악지역 등반을 통해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을 숙지토록 유도했다. 그 덕분에 상급 부대에서 주관한 각종 전술토의시에 현 지형을 두발로 확인한 부대원들은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상하급자 사이에 느꼈던 거리감도 같이 땀을 흘리며 해소되어 자연스럽게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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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6)]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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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5)]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자신도 모르게 공중전화 박스에 다가간 필자는 무심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더니 “여보세요..?”하고 반가운 고등학교 미술부 동창인 이상엽 화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필자는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고, 그는 재촉하며 “여보세요”만 반복했다. 잠시 안정이 되자 “상엽아, 희철이야 ...”하고는 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사무실에서 야간 작업을 하던 그는 “무슨 일이냐?”며 울먹이는 필자의 위치를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자정이 넘어갈 즈음에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웅크리고 쭈그려 앉아 아버님 수술 결과를 기다리던 필자 앞에 그 친구는 나타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이렇게 마냥 기다리지 말고 잠깐 나가자...”라며 서울시 충무로에 위치한 자신의 일러스트 회사 사무실에서 광고 디자인 작업중에 물감이 묻은 손을 내게 내밀었다. 그는 밤샘 작업을 하다가 필자의 전화를 받고 평택까지 단숨에 달려와 병원 앞 여관방에 함께 들어가 소주와 오징어포 안주를 서로 나누며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실의 빠져있는 필자를 위로했다. 그는 통이 트자 밤샘의 피곤함도 잊은 채 사업을 위해 다시 서울로 향했다. 친구중에 진정한 벗의 의미는 무엇일까? 초등학교, 중고교, 대학교 및 사회 친구 중에 본인도 모르게 전화 다이얼을 돌릴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에 필자는 행복한 놈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고교시절 미술부 반장을 하며 우정을 나누었고 졸업후 10여년 지난 뒤에 충무로 대로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자 다짜고짜 필자를 두드려 팼던 죽마고우(竹馬故友)인 동창이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26)] ‘충무로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 참조) 그 친구의 배려 덕분에 아버지는 성공적인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겼고, 4주 동안 무의식(코마) 상태에서 계시다가 회복되어 장기간 치료 후에 다행히 건강을 되찾았다. 사전적 정의인 ‘친구(親舊)’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다. 그중에는 도원의 결의처럼 같이 한날에 죽자고 약속하는 경우나 먼저 죽으면 3일장을 꼬박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는 친구도 있지만, 힘들고 외로우며 급할 때 조건없이 연락해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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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5)]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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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4)]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인생에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좋은 일에는 방해(妨害)가 되는 안좋고 나쁜 일도 많이 생긴다. 연말 대통령 후보들의 장병 격려차 부대방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루고,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강조했던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의 지휘의도를 구현하기 위한 시무식 사격측정 등의 이벤트를 통해 장병들의 사기가 높아져 부대 분위기가 활성화될 즈음에 개인적인 악재가 터졌다. 그해 1월 중순경 이른 저녁에 어머니의 울음 섞인 전화를 받았다. 평택 집앞 도로에서 아버님의 승용차와 트럭이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아버님이 병원으로 후송중이며 중태라는 소식이었다. 최전방을 지키는 부대의 사단작전보좌관이라는 직책 때문에 멀리 갈 수 없는 입장이라 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참모에게 보고하니 “바쁜 당면 업무는 작전장교에게 맡기고 빨리 아버님이 입원한 병원으로 가보라”고 배려를 해주었다. 어린 아들이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가족은 집에 대기시키고 우선 필자가 먼저 출발했는데 아버님 걱정에 눈물이 자꾸 흘러 운전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최대한 빨리 달려서 평택 병원에 도착하니 마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아버님이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응급실 침대 위에 웅크리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는 신음만 계속 내뱉으셨고, 어머니는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셨다. 수술 신청 및 동의서를 작성하자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가시는 피투성이의 아버님 모습을 지켜보며 당황하시는 어머니를 우선 진정시켜 집으로 들여보냈다. 담당 의사는 일단 응급처치를 했는데 워낙 상처가 심하고 다친 곳이 많아서 수술 시간과 생존 여부를 예측할 수 없다며, 필자에게는 멀리 가지말고 대기실에서 연락을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수술을 시작했다. 평택 병원의 중환자실 대기실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장기간의 간병을 통해 대부분의 가족들은 지쳐 초췌한 모습에 쪼그려 앉아 있고, 간호사의 호출에 놀라 달려가거나 환자의 상태가 안좋아 통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면서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아버님 수술 경과가 걱정되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혼잡한 대기실에서 잠시 벗어나 병원 밖으로 나갔다. 밤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길거리의 인적도 뜸해진 상태에서 병원 입구의 공중전화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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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4)]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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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3)]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순우리말에 ‘벗’은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이나 늘 가까이하여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달래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며 비슷한 의미로 교우, 동무, 벗님 등으로도 사용한다. 반면에 ‘친구(親舊)’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또는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이르는 말로 유의어로 교우, 동료로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친구 관련 사자성어에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옛날 중국의 관중과 포숙처럼 친구 사이가 다정함을 이르는 말, 매우 다정하고 허물없는 친구사이), 막역지우(莫逆之友, 마음이 맞아 서로 거스르는 일이 없는,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친밀한 벗), 죽마고우(竹馬故友, 대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 불알동무, 불알친구, 소꿉동무)가 있다. 또한 간담상조(肝膽相照, '간과 쓸개를 내놓고 서로에게 내보인다'라는 뜻으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밀히 사귐), 금란지교(金蘭之交, 단단하기가 황금과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 향기와 같은 사귐이라는 뜻으로, 우정이 깊은 사귐) 등으로 친구 관계를 표현한다. 그밖에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는 뜻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절친한 벗의 죽음을 슬퍼함을 이르는 말)이란 흔치 않은 고사성어도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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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3)]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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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2)]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93년 첫날 시무식을 마치고 상황회의 시간에 이영대 사단장은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사단 사령부의 전간부는 앞서 제시한 대로 단독군장을 하고 사격장에 집결하여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면서 ‘교육훈련 제일주의’ 첫날을 시작했다. 헌데 사단장과 김형배 작전참모의 사전 담판이 있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김 작전참모는 사단장의 부대운영 중점을 정하기 전에 사단장실에서 독대하며 “사단장님의 색깔은 어떤 색이십니가?”라고 질문하자, 사단장은 “치밀한 ‘부대관리’를 통해 부대가 안정된 상태에서 강인한 ‘교육훈련’을 하여 완벽한 ‘전투준비’를 한다”라고 포괄적으로 답했다. 참고로 지난번 무적태풍부대 지휘관이었던 이재관 사단장(육사21기)은 사고를 예방하는 ‘부대관리’, 그 앞 김길부 사단장(육사20기)은 ‘전투준비’, 그전인 이상호 사단장은 ‘교육훈련’을 가장 우선하는 부대운용 중점을 선정했었다. 사단장의 의중을 파악한 김 참모는 “모든 것을 취하려 함은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역대 사단장들의 부대운용 중점을 비교하며 우선적으로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부대운용 중점으로 할 것을 재차 건의를 했다. 참모의 건전한 판단에 의한 정확한 건의을 청취한 이영대 사단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을 하여 ‘교육훈련 제일주의’가 탄생되었다. 철저한 교육훈련을 통해 안정된 부대관리도 할 수 있고 그 성과로 전투준비에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사단장은 ‘간부는 견인포가 아닌 자주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기본적으로 전투적인 사고를 견지하고,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준비를 위해 스스로 어떻게 효과적인 교육훈련을 할 것인가 생각하며 모두 창의적·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자”고 덧붙였다. 사단장의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체 부대원들의 참여가 중요했다. 따라서 참모는 ‘교육훈련 제일주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타부대와 달리 유일하게 12월31일 종무식날에는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신년초 시무식날에는 사단 전간부의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도록 조치했다. 지휘관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난제·고충을 해결하는 것이 참모 책무라고 강조했던 김 작전참모는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부대운용 중점으로 선정하는 과정과 붐조성 위한 사격 측정 등을 통해 어떻게 임무를 수행해야 바르고 유능한 참모가 될 수 있는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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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2)]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