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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9)]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투위주의 강인한 교육훈련이 강조되었던 당시에는 군사령부 통제로 매년 사단기동훈련을 했다. 그때 다음번 기동훈련이 계획된 인접 타사단에서 사단장을 포함한 참모요원들이 파견 되어 관찰 및 평가 지원을 통해 자신 부대의 기동훈련시 참고하는 바람직하고 좋은 시스템도 있었다. 마침 필자가 소속된 무적태풍부대가 열쇠부대의 기동훈련의 관찰 및 평가지원 임무를 부여 받았다. 무적태풍부대 이재관 사단장의 2년 후배인 열쇠부대 사단장 김석재 장군(육사23기)은 1944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안의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제23기로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김 장군은 육사 화랑대의 훈육관.연대장.생도대장을 거친 독특한 생도배출 업무경력 때문인지 온화한 성품에 상하간 격의없는 대화를 중시하는 지휘철학을 갖고 있어 부하들 신망이 두터웠다. 또한 육척장신에 외모도 서글서글했다. 허나 일선부대 요직을 두루 거친 야전통으로 서글서글한 외모와 달리 일처리가 빈틈이 없다는 평을 받으며 너무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려 해 주변에 부담을 준다는 얘기도 있었다.. 참고로 김석재 장군은 5사단장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탁월한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아 육본인사참모부장, 3군단장, 1군사령관직을 끝으로 전역한 후 2002년 7월11일 개각시 비상기획위원장을 역임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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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9-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8)]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별 방문한 신말업 군사령관을 영접할 때 사단에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차원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군대는 전투집단이기 때문에 강해야 한다. 군대는 훈련이다”라는 지휘 철학으로 일관했던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인 신말업 장군은 1972년 즈음 무적태풍부대 대대장 근무시에 필승교 부근에서 수류탄 사고로 부하를 잃었다. 백마부대 수색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13개월 동안 참전했을 때에도 한명의 인원 손실없이 부대원 전원이 무사히 귀국하는 등 부하 사랑이 남달랐던 신말업 장군은 대대장 시절의 불의 사고가 항상 가슴속에 아픔으로 남아있었다. 통상 타부대는 사령부에서 사단 참모 및 연대장들과 만나는 정도의 고별방문이었으나 사단은 업무보고를 간단히 마친 후 곧장 필승교로 신 사령관을 안내했다. 필승교 부근 임진강가에 조그마하게 준비한 추모 제사상 앞에 선 신말업 군사령관은 35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는 화려한 영광 뒤에 숨겨진 우여곡절(迂餘曲折)과 부하를 잃어 가슴 속에 깊은 아픔을 간직한 회한에 잠시 고개를 숙이며 숙연해졌다. 고별방문을 마치고 복귀하는 신 사령관은 치밀하고 세심하게 배려해 준비한 사단에 감탄하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사령관 고별방문 준비는 대성공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정보참모 김형배 중령이 건의했다고 전해지며 준비지침을 하달한 사단장 이재관 장군의 혜안이 돋보였다. 이를 통해 상급자이던 하급자이던 심지어 적이라도 상대방 입장에서 고려하고 대비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고사성어가 가슴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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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3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7)]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필자가 무적태풍부대로 부임한지 얼마되자 않아 당시 군사령관 신말업 대장이 이취임 및 전역식을 앞두고 부대에 고별방문을 했다. 신말업 장군은 1934년 경상남도 울산광역시 언양읍에서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 언양초등학교(34회)와 부산고등학교(8회), 육군사관학교(16기)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1968년 백마부대(9사단) 수색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1972년 28사단 무적태풍부대 대대장(중령), 1979년 연대장(대령)을 역임한 뒤 1981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특히 전투위주의 강한 교육훈련을 중점으로 부대를 지휘한 그는 전형적인 야전형 리더십을 발휘하며 1984년에는 소장 진급과 함께 5사단장을, 1987년에는 중장 진급과 함께 2군단장을 역임했다. 1989년에는 육군참모차장으로 보직을 잠시 거친 뒤 같은 해에 군의 최고 계급인 대장으로 진급하며 3야전군사령관직을 성공적으로 화려하게 마치고 1991년 전역하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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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2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6)]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②
    당시 무적태풍부대장 이재관 장군 모습[사진=연합뉴스/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연구소장] ‘6.6 무장간첩 소동’사건이 한바탕 벌어져 “통합적이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전개한 작전수행이다”라고 칭찬받았던 ‘윤길영 무장탈영병 사건’처럼 즉각 대응하는 조치단계를 통해 작전처의 존재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무적태풍부대 전입시부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존경했던 이재관(육사21기) 장군의 사단장 임기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사단장 이취임식을 열흘 정도 앞두고 개최한 전반기 지휘관 회의는 이재관 사단장의 마지막 환송 회의가 되었다. 전반기 동안의 업무평가를 통해 선정된 우수부대 표창을 하고 후반기 부대운용에 대해 토의 및 발표를 했으나 모두들 성공적으로 사단장 임기를 마치는 이재관 장군에게 덕담을 보내는 훈훈한 분위기였다. 전반기 지휘관 회의가 끝나고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자신의 부대로 출발할 때 무서울 정도로 엄격하고 정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던 사단장이었으나 이취임식을 앞두고 모두들 이별을 아쉬워 했다. 저녁에는 사단장 임기동안 함께 고생한 사령부 참모들과 직할대장 및 연대장들의 부부동반 회식이 사단장 공관에서 열렸다. 처음으로 들어가보는 사단장 공관의 앞 마당에 차려진 뷔페 음식과 영전에 대한 축하와 이별의 아쉬움에 건배하는 술자리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고, 석양이 기울자 군악대 밴드의 반주 속에 일부 참모 및 기무부대장의 흥겨운 노래로 절정에 다달았다. 어느덧 회식의 막바지에 이르러 진행을 하던 사회자 인사참모가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치는 사단장의 내조를 훌륭하게 해낸 사단장 가족에게 인사말을 하라고 기습적으로 마이크를 건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다가 받아든 마이크를 잡고 수줍어하면서 "부족한 사단장을 위해 헌신한 예하 지휘관 및 참모들에게 감사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단장을 군생활 중 지휘관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재관 사단장님은 지는 꽃이 아니라 피어나는 꽃으로 알아주시고 많은 성원을 부탁합니다”라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며 의미있는 여운을 남겼다. 사단장 가족의 멋있는 마무리 맨트는 얼마 뒤에 곧 실현되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이재관 소장은 부하들의 기대와 바램에 따라 사단장을 마친지 10개월 만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군단장으로 다시 금의환향(錦衣還鄕)하였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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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2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5)]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경근 군단장(갑종151기)이 “이번 무장탈영병을 잡기 위한 대침투작전은 시범을 보인 것과 같은 매우 표준이 되는 사례입니다”라며 칭찬을 했던 윤길영 무장탈영병 사건 발생 3개월이 지났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 (151~152)]‘무장탈영병 위기가 전화위복의 기회’ 참조) 16시간 동안의 무장탈영병 사건은 위기였지만 “훌륭한 대침투작전 훈련이었습니다. 수고했어요!”라는 군단장의 마지막 격려처럼 전 부대원들이 능동적인 행동으로 작전에 성공하여 부대가 단결되며 사기충천하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되었지만 또 사건이 터졌다. 현충일인 6월6일 새벽에 비무장지대(DMZ)에서 무장공비 3~4명을 관측했다는 GP보고가 접수되자, 3개월전 무장탈영병 생포작전을 통해 숙달된 각 부대원들은 절차에 따라 신속한 행동으로 대응했다. 만약을 대비해 전방 및 후방지역에는 5분대기조를 출동시켜 배치하고 검문소의 검문을 강화했으며, 비무장지대(DMZ)의 무장공비라고 추정 관측된 지역에는 수색대대 병력이 투입해 수색작전을 전개했으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관측병의 오인 보고로 작전을 종결하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다. 헌데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사진처럼 조선일보에 ‘무장간첩 수색소동’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다행히도 국방부에서 “녹음기에 대비한 침투방지훈련이 잘못 전달된 것으로 사실과 무관하다”고 공식 발표를 했고, 군단장·군사령관도 즉각 대응을 잘했다는 치하로 무마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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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2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4)]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아버지가 언급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Betty)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던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7월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 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 붓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결국 베티고지는 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2소대원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에 의해 10배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여 기적의 36대800 승리신화를 만들며 격퇴시키고 사수하여 역사에 남았다.([김희철의 전쟁사(71~72)] ‘36대800 기적의 승리 만든 베티고지 전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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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3)]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무적태풍부대로 부임 당시에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했다. 이는 필자의 임무중에 군사보호시설 관리가 포함되어 수시로 현장을 확인할 필요에 따른 전임자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행정관서의 건축 심의를 준비하기 위해 비포장 도로와 험한 산길까지도 승용차를 이용해 정찰을 한 덕택에 고장이 많이 발생해 구입한 지 5년도 못되어 처음 마련한 승용차를 폐차 처리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휴일에 아들집을 방문하셔서 첫 구입한 승용차로 무적태풍부대의 안보관광지로 모실 때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효도를 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태풍전망대는 GOP철책에 건설되어 북한지역을 충분히 관측할 수 있다. 또한 동양 최대의 성모상과 십자가, 종각 및 절이 설치되어 각 종파에서 수시로 방문하여 행사를 한다. 김수환 추기경도 성모상 준공식에 참석해 헌당미사를 집도하기도 했다. 특히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 베티고지가 현재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직접 방문은 어렵지만 태풍전망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GOP철책 이북지역에 위치한 베티·노리고지와 임진강을 바라보시던 아버지도 김만술 소위를 언급하시며 감회에 젖었다. 태풍전망대 앞에 흐르는 임진강변 도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안변 및 원산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아버지의 고향인 함흥시이다. 해방된 이후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시다가 자유민주주의를 찾아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가족 전체가 흥남 철수시에 월남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언급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Betty)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던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하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1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2)]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는 임진강 주변에 위치한 문화유적지와 한탄강 유원지 및 태풍전망대 등으로 안보관광지로도 유명한 부대이다. 태풍전망대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군사분계선(MDL) 북쪽 42.3㎞ 지점의 임진강 본류에 북한이 발전과 용수공급 등의 목적으로 2002년 착공하여 2007년 10월쯤에 완공시킨 높이 34m, 길이 880m에 저수량은 3억5000만 톤인 황강댐이 있다. 저수량만 보면 군남댐의 5배에 이르고 한강 수계의 팔당댐(저수량 2억4400만 톤)의 1.5배에 이르는 중형 댐이다. 헌데 임진강 유역 주민들은 황강댐 방류 여부에 가장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009년 9월 호우가 없는 화창한 날이었지만 북한이 황강댐 물을 예고 없이 방류해 경기도 연천군에서 6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였던 2009년 10월, 정부는 임진강 수해 방지 관련 남북 실무회담에서 북한으로부터 '황강댐 방류 시 사전 통보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북한은 황강댐 방류와 관련해 이 합의를 딱 3차례 지켰다. 합의가 이뤄진 이듬해인 2010년에 두 차례, 2013년에 한 차례 황강댐 방류를 예고했다. 그러나 2011년과 2012년, 2015년, 2016년, 2017년 등, 북한은 사전 통보 없이 거의 해마다 황강댐 무단 방류를 해왔고 합의 이행을 대체로 하지 않았다. 물론 올해 여름에도 사전 통보없이 무단 방류를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북한의 선의에만 기댈 수 없다는 판단에, 정부는 황강댐 방류 대비를 위해 임진강 수계에 48시간 동안 388㎜의 폭우가 쏟아져도 대비할 수 있도록 홍수조절 전용 군남댐을 2010년 7월에 건설했다. 당시 댐 규모를 더 크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만수위 때 북한지역까지 수몰될 것을 우려해 규모를 늘리지 않았다. 한국수자원공사 임진강 건설단 군남댐 관계자는 "군남댐이 건설된 이후 북한의 댐 방류로 인한 우리 측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자가 무적태풍부대에 근무할 때인 1992년에는 황강댐이 건설되지 않았고, 마침 평택에 계시던 부모님이 전방에 근무하던 아들집을 방문했는데, 임진강 주변에 위치한 문화유적지와 한탄강 유원지 및 태풍전망대 등 안보관광지를 좀더 편안하게 안내할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1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1)]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앞서 언급한 대로 인맥은 처음부터 혈연 및 지연이나 학연보다도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훗날 연대장을 성공적으로 마친 양 대령이 육군본부의 중요보직인 무기체계과장 근무시에 대대장을 끝낸 황종수 중령도 발탁되어 함께 근무하게 됐다. 이후 철학적 혜안에 따른 논리성에 야전성을 겸비한 황 중령은 본인의 주특기 기획직능에 부합된 적재 적소의 무기체계 및 전력분야에서 견고한 자리를 구축하며 맹활약을 하였다. 그는 대령도 필자보다 먼저 진급했고 양치규 장군의 뒤를 이어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육군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한 필자도 역대 작전보좌관 전임자들이자 같은 시기에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김봉환(육사34기), 신현돈(육사35기) 선배의 후배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필자의 후임자였던 김왕경(육사38기), 장혁(육사39기)들까지도 좋은 인맥으로 남았고 덕분에 모두 장군의 반열에 오르는 희열도 맛보았다. 무능과 유능 그리고 탁월하다는 평가 차이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좋은 인맥이고, 이렇게 형성된 인연은 앞길의 안내자이자 스승이며 멘토역할도 하게 된다. 따라서 혈연이나 지연 및 학연보다도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매사에 최선을 다해 인정받아야 함을 또한번 느끼게 한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0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0)]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결국 양 대령은 황종수 소령을 연대 작전과장으로 받았고 황 소령은 보직 걱정을 하다가 오히려 좋은 기회를 포착하고 그의 잠재능력을 충분하게 발휘하며 탁월함을 인정받게 된다. 육군사관학교 교관 경험이 말해주듯 철학적 혜안에 따른 논리성에 야전성을 겸비한 황 소령은 각종 지휘관 회의나 전술토의에서 해당 연대안을 발표할 때마다 타 부대와 비교될 정도로 돋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연대장 근무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시하는 연대전술훈련 평가에 임해서 황 소령은 대박을 터뜨렸다. 사전 철저한 지형 정찰을 통해 판단한 지역을 이용, 전차를 동반한 특수임무부대가 기습적으로 임진강을 도섭하여 상대방의 지휘소를 급습하며 포위 격멸시키는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는 성과를 올렸다. 처음에 연대 작전과장 후임자를 선발할 때 경력이 문제이고 게다가 야전 경험도 부족하며 특히 주특기가 작전직능이 아닌 기획직능이기 때문에 더 더욱 고민이라던 양 대령의 우려는 기우(杞憂)로 끝났다. 반면에 황 소령은 양 대령과 좋은 인맥을 쌓게 되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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