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시대Home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㉗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율성이 6·25남침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군가도 작곡했지만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점령군으로서 자유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1·4 후퇴 때는 중공군과 함께 재차 서울에 내려와 조선궁정악보를 약탈해간 매국노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광주 출신이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공산당원으로 변절한 자를 추모하며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추진했던 정율성 공원 조성사업은 동족상잔의 비국을 겪은 자유대한민국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현재도 핵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으려면 견고한 한미동맹이 절실한 실정이다. 필자가 다녔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북한의 재 남침에 대비해 합동참모본부의 주요부서에 근무하며 군사전략을 담당했던 용삼남(육사33기) 선배로부터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용 선배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발을 짚고 재활치료에 전념했던 필자에게 용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는 생도시절 럭비부 선수 생활을 했는데 운동중에 부상을 입어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이 판단할 때에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으나 강한 의지로 철저하게 운동을 하여 척추 주변 근육을 강화시킴으로써 전혀 불편함 없이 더 건강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합참 근무시에 매일 새벽에 가장 일찍 출근하여 책상 및 의자 정리 및 청소를 한 뒤에 책상위에 올라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300개씩 하여 근육을 강화시켰다. 그가 원주에 있는 부대에 근무할 때에는 고속도로에서 시비를 걸던 조폭을 한방의 주먹으로 넉아웃시킬 정도로 강해졌다는 여담도 남겼다. 건강한 체력은 건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며 업무에 질도 고양시킬 수 있다. 건강의 이상을 극복하며 지칠줄 모르는 용 선배의 체력에 상관들은 힘든 업무도 쉽게 맡길 수 있었고 업무상 만나는 미군들과도 쉽게 친해져 한미 연합작전과 군사전략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일과후에는 독신자 숙소에서 우리의 전통악기인 대금을 연주하며 하루를 마감하여 건강상 어려운 위기를 적극 극복하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예술감까지 가진 문무를 겸비한 군인으로 끝없는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앞으로의 군생활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다음편 계속)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㉖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10월2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세워져 있던 중국 음악가 ‘정율성 동상’이 기단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 귀화한 음악가로, 북한·중공군 군가를 작곡한 인물인데, 광주시가 기념사업을 추진해 논란을 불렀다. 정율성 동상은 중국 청년단체가 제작해 광주 지역 청년단체에 기증한 것으로 2008년 광주 남구 양림동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 입구에 세워졌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이날 재물손괴 혐의로 보수단체 회원 윤모(5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전날(1일) 오후 정율성 흉상 목 부분에 밧줄을 묶고 2.5톤 승합차에 이를 연결한 뒤 쓰러뜨리는 모습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정율성 흉상은 위의 사진처럼 약 1m 높이의 기단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기단 옆 땅바닥에 누운 모습으로 발견됐다. 윤씨는 범행 직후 한 유튜브 채널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중단하라고 광주시에 요구했는데 이를 이를 수용하지 않아 강제로 (흉상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윤씨는 경찰에서 “내가 그랬다. 3일 오전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겠다”며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유족 대표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전 광주대성여고 교장은 2일 “공산주의자 정율성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광주시가 혈세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공원을 짓는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고 무조치로 일관하고 있다”며 “공원 철폐를 위한 릴레이 피켓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김오복 전 교장은 “북·중공의 군가를 짓는 등 한국 침략세력의 나팔수 역할을 한 정율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아무 중단 조치도 없이 정율성 공원조치를 강행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율성 공원 문제 제기에 대해 철지난 이념몰이, 색깔론, 민간외교라는 억지 논리만 되뇌고 있다”면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보훈단체들의 집회를 관제 데모로 깎아내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과 보훈가족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자 정율성 공원을 철폐하거나 대안을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편 계속)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국방부장관으로 지명된 신원식 의원(육사 37기)은 레닌에게 선물받은 권총으로 독립군을 직접 사살한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의 동상 이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영관영어반’ 과정에 다닐 즈음에는 홍범도의 존재 조차도 몰랐다. 청산리 대첩 이후인 1921년,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와 그 일당들에 의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몰살당하며 해체됐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소련군 복장의 공산주의자를 추모한다는 것은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인민군과 중국인민군 군가와 마오쩌뚱 찬양가 등을 수십 곡 만들며 뼈속까지 어용 공산주의자인 정율성 작곡가의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관생도를 포함한 건전한 국민들의 정체성과 대적관을 현혹시키는 잘못된 처사이다. 필자가 다니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확고한 대적관을 바탕으로 견고한 한미동맹을 위한 교육이 계속되었다. 이 교육을 통해 숙달한 영어회화 능력으로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 및 훈련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을 마치면 다음 보직은 연합사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필자는 이미 다음 보직이 충북 충용부대로 정해져 있었고, 다른 교육생들은 연합사령부 또는 예하 부대 및 연합작전/훈련을 주로 시행하는 합동참모본부로 분류되었다. 마침 합참의 중요부서에서 근무했던 선배도 함께 교육을 받고 있어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한명은 육사 33기 용삼남 중령이었다. 과거 승리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양태수, 나대일, 김형배 선배 등을 포함하여 많은 선배 동료들을 다시 만나는 해후의 시간도 만끽했으나 용 선배는 6개월 교육기간 중에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다음편 계속)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5주년을 맞은 국군의 날은 6·25남침전쟁 당시 우리 육군의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날이다. 추석 연휴 때문에 닷새 앞당겨 지난 26일 열린 올해 국군의 날 기념행사는 그동안 소홀히 했다가 10년 만에 대대적인 도심 시가행진으로 주목받았다. 유사시 북한 지휘부의 지하 벙커를 파괴할 고위력 현무 미사일과 한국형 사드로 불리는 장거리 지대공유도미사일, 엘샘(L-SAM) 같은 첨단무기가 대거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날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핵 위협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며, 우리 군의 태동 시점은 1945년 광복 이후라고 언급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광복 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 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역사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군의 뿌리를 독립군에서 찾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식을 사실상 반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국군의 날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동부전선의 우리 육군 3사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10월1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1956년 제정됐다. 하지만 체제 경쟁이 끝나고 남북정상회담 등이 열린 2000년대 이후론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자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우리나라가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헌법에 따라 군의 뿌리도 임시정부 군대인 광복군으로 정립하는 게 맞다고 민주당 등 일부는 주장하지만 확고한 대적관을 강조해온 현 정부는 선을 긋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웠던 광복군도 의미는 있지만, 지금 우리 군은 북한과 싸우는 군대라며 국군의 확고한 정체성을 강조했고, 여야의 인식 차는 국군의 날 메시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다음편 계속)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㉓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개월 기간의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간정도 지나갈 즈음에 필자는 그동안에 미루어 왔던 석사학위 논문의 마무리에 쉴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영관영어반’ 과정에 입교시킨 것은 능력이 부족한 필자가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주신 신의 배려와 인도라 생각되어 감사할 뿐이었다. 최종 논문심사에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라는 필자의 논문을 검토하던 동국대학교 3명의 지도교수들은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제공해준 귀국보고서가 큰 바탕이 되었고, 다른 학생들은 논문들은 기존의 타 논문에서 인용하여 만들다 보니 필자의 논문보다 교수들이 참고할 사항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사중에 지도교수들은 논문 내용보다 내 신상에 더욱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목발을 짚고 있지만 육사37기로 박지만과 동기라고 하자 그들은 ”아마도 그 동기들은 똑똑한 사람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기생 전체를 칭찬해주어 동기회 품격이 격상되는 이미지에 일조한 기분이 들어 보람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교한 영관영어반 과정은 주말부부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됨과 동시에 이미 취임해 맹활약하는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도 풀었지만 대대장 근무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계기가 되었고, 영관영어반 수료증과 동국대학교 석사학위기를 받아 내실을 기하는 일거다득(一擧多得)의 결실을 얻었다. (다음편 계속)
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8)]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이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로 논어(論語)의 선진편(先進篇)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중국의 춘추시대에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에, 누가 현명합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달라는 자공의 말에 공자는 “자장은 지나쳤고, 자하는 미치지 못했다”라고 답변했다. 자공은 “그러면 자장(子張)이 나은 것입니까?”라고 다시 질문했고, 공자는 “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으니라”라고 대답하여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유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육군 장병들의 근무지를 말할 때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로 비교한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한강 이북의 많은 부대들의 주둔지 주변은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다. 이동이나 행군 및 훈련 시에는 비포장도로를 이용해야만 했고 바람이 불거나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를 마시며 온몸이 뽀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했다. 반면에 수방사 등 도시 주변과 한강 이남의 부대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은 그나마도 아스팔트 도로를 활용하다 보니 비교적 깨끗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다. 따라서 전방 야전부대에 근무하는 장병들은 수방사나 주요 도시에 근무하는 장병들을 ‘아스팔트 군인’이라고 호칭했고, 은근히 그곳에서 근무하기를 선호했다. 그런데 당시에 아스팔트 군인이라고 대표할 수 있던 수방사 장병들은 대부분 친위부대로 근무하는 자긍심과 철저한 충성심을 견지하면서도 야전성을 간직했었다. 또한 특색있고 멋있는 복장에 엄격하고 절도있는 언행으로 그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장병들의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지나치고 과시적 언행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다.(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8)] 선배의 지나친 후배 사랑은 역효과①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7)]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합참에 특공대대의 여성팀 추가 편성 건의 보고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사령부로 복귀하자, 과장(차철이 중령, 육사 32기)과 처장(편정휘 대령, 육사 24기)은 앓던 이가 빠져 시원해진 듯 몹시 좋아하며 필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수방사로 전입와서 2년 가까이 근무하며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라 매우 보람있었으나 필자는 이 업무를 끝으로 전후방 교류하는 계획 인사로 전방으로 떠나야 했다. 물론 타부대로 전출가기 전에 “여군 특공팀의 타용도 활용을 철저히 배제하고 최초 목적대로 작전시에 만 운용한다”는 선영제 대간첩대책과장의 주장이 꼭 지켜지도록 과장과 처장에게 재차 건의하였다. 하지만 초기에 특공무술 등으로 훈련하던 여군팀 중에 한명이 사령관 비서실로 보직을 옮기자 각 처장들도 한두명씩 비서로 활용하면서 결국에는 선영제 대간첩대책과장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음을 전출후 전방부대에 근무시에 전달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던 모 선배의 전언에 따르면 여군특공팀이 행정요원으로 전환되자 남녀간의 부적절한 사건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지금은 이러한 여군특공팀을 행정요원으로 전환해서 운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현재 수방사령부 특공대대 여군팀은 남성 못지않게 강한 훈련을 받으며 위의 격파 사진처럼 정규전 및 대비정규전시에 특공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완비되어 있다. 마치 원칙과 공정 및 상식 등 기본이 바로 서야 길 또한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본립도생(本立道生)의 의미처럼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특공대대의 여성팀 창설시에 합참 대간첩대책과장으로 시의적절한 조언을 해주었고, 육군참모차장과 전쟁기념사업회 회장을 성공적으로 역임한 선영제 장군의 ‘내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간다’라는 그의 저서 제목이 다시 한번 가슴에 스며든다.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7)]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⑤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6)]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합참 지하벙커에 대간첩대책과가 있었다. 국방부 정문을 통과할 때 출입증을 교환했지만 합참 입구에서 또 교환하고 안내자가 나와 인솔했다. 벙커 입구에서 한번 더 출입증을 교환하는 복잡한 출입절차를 밟았다. 벙커 지하의 좁은 길을 어렵게 굽이굽이 돌고 돌아 선영제 대령의 사무실에 들어가자 수방사의 널찍한 사무실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비좁으며 책상 위에는 각종 보고서가 쌓여 있었고 공기도 몹시 탁했다. 선영제 대령은 며칠밤을 지새웠는지 매우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필자를 바라보고는 입가에 미소 띄우며 반겨주었다. “충성! 훈육관님, 00사단을 떠난지 오랬만에 뵙습니다”하고 인사를 하자 선 대령은 책상 옆에 달랑 한 개밖에 없는 의자를 권하며 앉으라고 했다. 잠시 생도시절과 00사단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며 즐거운 시간에 잠시 빠졌다. 사실 선대령의 동기생이 00사단에서 같이 연대장 직을 수행할 때, 그 둘이 선의경쟁(善意競爭)을 치열하게 하여 중간에서 필자가 난처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그때를 회상하며 한껏 웃었다. 기분이 좋아졌을 때 준비한 보고서를 꺼냈다. 적의 오열들이 침투하여 주요 인사를 납치하거나 중요시설을 타격할 때 서울 시민 중에 여성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데 그때를 대비하여 특공대 임무로 단련된 여군이 필요하고 특히 편의대를 운용시에도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미 수방사령부 주요 상급자의 전화를 받아 이미 알고 있으나 누가 봐도 설득력이 약하다며 더욱이 우려되는 것은 여군팀을 편성해놓고 혹시 행정요원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어, 확실하게 특공요원으로 훈련시켜 최초 목적대로 운용한다는 확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선과장의 최초 목적대로 운용하라는 주장은 당연했다. 하지만 필자는 책무를 완수해야 했기에 “이렇게 찾아와 설명하는 것은 정규전 및 대비정규전시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니 생도시절 제자인 필자의 얼굴을 봐서라도 훈육관께서 긍적적으로 검토해달라”고 애원하다싶히 매달렸다. 결국 타용도 활용을 철저히 배제하여 작전시에 만 운용하도록 준비한다는 약속을 다짐하며 간신히 승인을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수방사령부로 복귀할 수 있었다. 훗날 선영제 대령은 대간첩대책과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여 사단장, 군단장을 거쳐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했다. 중장으로 전역한 후에도 그의 저서 ‘내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간다’처럼 전쟁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또한번 능력을 발휘한다.(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6)]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④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5)]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본부의 상급부대인 합참에서 불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자 사령부 작전처는 발칵 뒤집혔다. 노태우 대통령 정부의 실세이기에 재임시절 매사를 자신있게 꺼리김 없이 처리했던 김진선 사령관의 특공대대에 추가로 여성팀을 창설지시가 합참 예하의 일개과이자 대령이 지휘하는 대간첩대책과에서 막혀버린 것이다. 당시 수방사의 분위기는 묘했다. 친위부대라는 자긍심 때문일지 몰라도, 대령 처장들은 이미 장군급의 대우를 받아 가죽벨트에 38구경(리블버)권총을 차고 있었으며 중령 과장들은 이미 대령이 된 듯 직접 펜을 잡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모든 일은 소령급 실무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과장급 이상은 입으로만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육본이나 합참도 처·과장급들의 전화 한통으로 해결되었으며 세부 문서처리는 모두 소령급 실무자의 업무였다. 이번에도 불호령은 소령들에게 떨어졌다. 천하의 실세인 사령관의 지시를 구현도 못하는 오명을 씌우는 무능력을 보여주었다며 무조건 해결하라는 독촉이 떨어졌다. 다급해진 필자는 대간첩대책과의 실무자에게 전화로 건의하고 직접 찾아가 설명도 했으나 윗분의 뜻이라며 막무가내로 거절했다. 결국 대간첩대책과장을 직접 설득하기로 작정을 하고 알아보니, 담당 과장은 필자의 생도시절 훈육관이었고 사단 작전장교(대위) 근무시에 예하 연대장직을 수행한 선영제 대령(육사25기, 예비역 중장)이었다. 실무자를 통해 과장을 접촉하려 했으나 쉽게 만나주지 않던 선영제 대령은 ‘훈육관님’하며 안부 전화를 걸자 반갑게 받으시며 한번 합참으로 들리라고 여지를 남겼다. 기회였다. 필자는 김진선 사령관 결재가 되어있는 보고서와 여군특공팀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추가로 작성한 설명서를 들고 합참 대간첩대책과로 찾아갔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5)]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③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4)]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②
-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진선 사령관의 의지에 따른 수방사 작전처의 요청을 받고 검토한 육군본부 편제과는 자체 토의를 거쳐 상급 부대에 건의했다. 그러나, 육본의 상급부대인 합참에서 결국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편제에 반영이 어렵고 여군특공팀 창설은 불가하다고 최종 통보를 하였다. 당시에는 합참 대간첩대책과에서 매년 ‘대간첩대책 중앙회의’개최를 준비하여 시행했다. 합참의장이 겸직한 대간첩대책본부장을 비롯한 정부 관련부처, 각 군 및 치안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비정규전 대비책과 민·관·군 총력방위태세 확립방안 등이 논의했다. 지금은 합참의 통합방위과에서 과거의 ‘대간첩대책 중앙회의’인 ‘통합방위 중앙회의’개최 업무를 주관한다. 그런데 특공대대에 여성팀을 편성하라는 특명을 수행할 당시에 수방사 특공대대를 창설하는 업무를 후방지역작전 및 대비정규전을 담당한 합참 대간첩대책과에서 검토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4)]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②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3)]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동에 있던 수방사가 남태령으로 이전하자 88올림픽에서 김포공항 및 경기장 경계지원 등으로 맹활약을 했던 수방사 예하 35경비여단이 해체되며 특공대대로 축소되어 수방사령부 영내에 창설되었다. 그때 특전사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김진선 수방사령관은 필자가 근무하던 작전처에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사자성어처럼 특공대대에 추가로 여성팀을 편성하라는 특명을 하달했다. 지시를 받은 필자부터가 고개를 까우뚱하며 “수방사 특공대대에 여군이 왜 필요한가?”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작전처장 주관에 열린 특공대대 창설 준비 회의에서도 여군특공팀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이 서로 상충되어 사령관 지시를 수행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허나 작전처장과 과장은 자체토의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사령관의 의지와 구상을 구현하기 위해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어 특전사에도 여군팀이 있는 것처럼 수도권의 작전을 수행하는 수방사 특공대대에도 여군특공팀이 필요하다며 편제에 반영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3)] 수방사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의 비화(祕話)①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2)] 호탕한 영웅 수방사령관도 풍수지리를...(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의 김진선 수방사령관은 12.12 사건시 수경사 상황실장(중령)으로 애매한 태도를 보여 9사단의 출동을 지원했으며, 노태우 직계 9.9 인맥으로 노태우 정권에서 승승장구하여 대장으로 진급해 제2야전군사령관을 역임했으나 김영삼 정권에서 숙청당했다. 그의 동기인 육사 19기의 면모를 살펴보면 생도시절 가장 우수한 졸업생도로 인정하는 대표화랑으로 선정됐던 이준 국방부장관과 유용남 합참의장 등이 떠오른다. 이준 대장은 하나회의 견제를 받아 한직을 멤돌았으나 김영삼이 하나회를 싸그리 숙청하자 전격 발탁되어 제1군야전군사령관을 했고 김대중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도 역임했다. 기동전의 전문가로 알려진 윤용남 대장은 제3군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역임했다. 따라서 육사 19기 대장 3명이 각군 사령관을 모두 맡았다. 특전사령관에 이어 기무사령관을 역임한 서완수 중장은 경력에서 보이듯 19기 하나회 대표 주자로 김영삼의 전격적인 하나회 대숙청 작업 시작시 김진영 참모총장과 함께 경질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한 이병호 대령도 육사 19기로 1988년 안기부 국제국장을 거쳐 국정원 제2차장으로 퇴직 후 울산대 교수를 지냈다. 특히 그의 친형이자 필자의 생도시절 은사이며 육사 및 영남대 교수였던 이병주(육사 15기, 대령)와 함께 형제가 육사동문에 대학교수를 함께 지낸 특이한 경력을 공유했다. 이밖에 양상태 소장은 미8군 한국군지원단장을 서정화 중령은 4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이처럼 육사 19기는 역사의 파동 속에서 각자의 맡은 바 역할을 다하며 특별한 기수로 대표된다. 특히 김진선 수방사령관에 대해서는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히 양분된다.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시 특전복 차림으로 운동장에 뛰어들어 편파 판정을 한 심판을 이단 옆차기로 차버릴 정도로 승부 근성이 강한 군인으로 남자다운 호탕한 성격과 영웅적인 기질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게다가 재임시절 꺼리김 없이 매사를 자신있게 처리했는데, 부대가 남태령으로 이전하자 필자가 근무하던 작전처에 수방사 여성특공대를 편성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마치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사자성어처럼....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2)] 호탕한 영웅 수방사령관도 풍수지리를...(하)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1)] 호탕한 영웅 수방사령관도 풍수지리를...(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이전 초기에 갖은 시련과 애환 속에 완성되었고 30년이 지난 오늘도 작은 보람으로 다가온 고가초소, 담벽, 화단 및 가각진지 등의 각 경계진지는 전투측면에도 효율적이었지만 미관상 시각적으로도 잘 어울렸다. 그러나 각 진지의 경계 속에 보호되던 사령부 본청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부대 이전후 얼마되지 않아 사령관이 불명열과 통증으로 출근을 못할 정도로 아프다는 소식이었다. 참모장과 부속실 요원들은 의무대 군의관까지 동원해 치료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결국 부대 이전 설계시에 사령부의 본청 및 직할대 위치까지 선정했던 풍수지리에 유명한 지관을 다시 불렀다. 수맥측정 도구인 엘로이드를 활용해 사령관실을 탐지한 그 지관은 “사령관 좌석 밑으로 수맥이 흐르고 있어 사령관이 아픈 것이다”라며 집무실 책상 위치를 옮기고 사령관 자리에 동판을 깔라고 말했다. 참모장과 공병부장이 앞장서서 사령관 집무실 책상 위치를 바꾸고 그 밑에 두꺼운 동판을 부리나케 깔았다. 그후 요상하게도 사령관의 통증은 없어지고 정상적인 근무를 하게 되어 부대 이전 후 요란한 첫 소동이 막을 내렸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1)] 호탕한 영웅 수방사령관도 풍수지리를...(중)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0)] 호탕한 영웅 수방사령관도 풍수지리를...(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90년 3월 즈음에 수방사는 숨겨진 권력의 핵심 중심지로 오랜 전통은 있었으나 낡고 왜소해 보였던 남산골 필동 시대를 마감하고, 현대식 건물에 넓은 운동장과 훈련장을 갖춘 남태령 시대를 시작했다. 전임 사령관 구창회 장군이 풍수지리로 유명한 지관을 모셔와 사령부 및 직할대 위치까지 선정한 탓인지 남태령 시대가 열리자 모든 장병들이 ‘자·즐·보(자랑, 즐거움, 보람)’이라는 구호처럼 활기차게 움직이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임무를 다했다. 특히 종전의 좁은 아파트에서 20평이 넘는 실용 면적의 숙소를 제공받았고 좋은 시설의 복지회관까지 신축 운용되어 간부들의 사기는 충천했으며 관악산 및 사당동의 생활환경은 군인가족들 조차도 대만족이었다. 게다가 카키색의 수방사 근무복장을 얼룩무늬 전투복으로 변경하며 ‘아스팔트 군인물 빼기’로 수방사의 야전부대화를 강조했던 김진선 수방사령관은 출퇴근시 참모들의 도열을 없애고 승용차와 사무실문도 본인이 열고 닫으며 불필요한 의식과 행정을 간소화시키는 데 노력했다. 특히 일과 후에는 운전병을 숙소로 보내고 본인이 직접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 야전부대화 된 전투 위주의 생활을 몸소 실천했다. 훗날 이러한 사령관의 모습은 자신의 부적절한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장된 행동이었다는 일부의 이야기도 있었지만, 당시 수방사 장병들에게는 현역 장군이 권위보다는 전투 위주의 야전화 생활을 솔선수범한다는 차원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0)] 호탕한 영웅 수방사령관도 풍수지리를...(상)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99)] 남태령에서 이어진 수방사령부의 희비(喜悲)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가각, 화단진지 등 경계진지 공사를 직접 점검하면서 보여준 상황실장의 신경질적인 돌발 행동은 재공사하는 불필요한 예산과 시간을 낭비했다. 사전 검토시에 심사숙고 후 정확한 지침을 내리는 것이 낭비를 줄일 수 있다. 또한 부연하지 않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적시적인 지시가 가장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업무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출 행동적이고 가혹하리만큼 호된 상황실장이자 전 00과장이지만, 많은 것이 부족한 필자에게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업무를 보장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깨달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아무튼 현재의 남태령 수방사에 설치된 고가초소, 담벽, 화단 및 가각진지 등의 각 경계진지는 이전 초기에 이러한 시련과 애환 속에 완성되었고 30년이 지난 오늘도 작은 보람으로 다가온다.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99)] 남태령에서 이어진 수방사령부의 희비(喜悲)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