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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3)]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거창 대대장인 김종업(육사36기) 선배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탁월한 리더십으로 선후배간에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으며 동기회장 등 요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었고, 필자와는 육사에서 같은 생활관의 선배로서 지도를 받았고 현재까지도 각별하게 지내고 있다. 대대장 근무 2년차에 접어든 김 선배는 당시의 사조직 관련 소동과 총기오발 사건 등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마침 정수완과 김종완 동기가 함께 동행하여 위로도 해드리고 회포도 풀겸 거창골짜기를 찾았는데 우리는 그의 의연한 모습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공적인 대대장을 어떻게 해야되냐?는 우리들의 질문에 그는 “지휘는 기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품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심부리지 말고, 더 잘보일려고도 말고, 건강하게 즐기면서 자기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해라”라며 찾아간 우리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조언을 해주었다. 게다가 “사향은 아무리 보자기로 싸도 냄새가 나며, 송곳은 호주머니 속에 넣어도 튀어나오는 법(囊中之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신은 선택한 자에게 시련을 주신다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위기가 호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정면돌파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추진력을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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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2)]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짧은 3개월의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이지만 룸메이트인 정수완 동기와 각별하게 친해지는 12주간의 시간이었다. 정 동기가 대대장반 교육 수료후 부임할 남해대대 방문은 적지않은 교훈을 주었고 우리는 진해 인접의 다른 선배의 대대도 찾아가 장단점을 분석하고 밴치마킹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이번에는 거창대대를 찾았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63~165)] ‘벤치마킹은 창조적 성공의 지름길’참조) 거창은 신라 때는 거열군(居烈郡)이라 불렀고, 거타, 거열 등의 이름이 음운상 유사성이 있어 자타국이라는 나라가 여기 있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현재 사용하는 이름인 거창군은 통일신라 경덕왕이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할 때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경남 서북부의 백두대간 자락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산에 둘러싸인 산간분지 지역이며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 3대 국립 공원 사이에 자리잡아 자연 경관이 수려하다. 덕유산 국립공원과 가야산 국립공원이 이 군에 걸쳐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 백제, 가야 세 나라의 접경지역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뺏고 뺏기는 전투가 삼국 통일 전까지 계속해서 있었다. 이후에도 김천, 대구, 함양 및 전라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함양으로 그러한 이점이 많이 넘어간 상태이다. 6.25남침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인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일어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거창군에는 ‘거창사건추모공원’이 존재한다. 이외에 수승대, 월성계곡, 금원산 등의 관광지가 있다. 수승대에서 월성계곡 쪽으로 가는 도로 옆으로 보이는 계곡 풍경이 정말로 장관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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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1)]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다음날 오전에 함께 찾아간 곳은 남해섬의 유명한 금산과 보리암이었다.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 짖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 했다. 이후 청년시절의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할 때 성공하면 비단으로 보광산을 감싸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조선왕조를 창업했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이름을 비단 ‘금(錦)’자를 사용한 금산(錦山), 절 이름을 보리암(菩提庵)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갓 기이한 형상을 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눈에 볼수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은 금산 38경중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 경기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주로 군인, 경찰들을 포함한 공무원 등 많은 신도들이 이성계처럼 꿈을 이루기 위해 연일 줄지어 찾고 있다. 쪽빛바다와 초록빛 들녘의 조화를 내려다 볼수있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빼어난 경치와 남해의 금강, 동물형상의 바위가 많아 바위 동물원으로도 불린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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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0)]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매주 일주일간의 수업이 끝나면 토요일 동두천으로 귀가하는 것을 포기하고 룸메이트인 정 동기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남해 지역을 정찰하고 전임자에게 부대 특징을 파악하며 지휘기법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장연석(육사35기) 선배 부대를 찾아갔다. 4년전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경비과장으로 근무하던 장 선배는 자신이 필자를 추천했던 무적태풍부대에서 비교적 잘 근무했다는 소문에 대해 대견해 했고, 필자는 비록 수방사 못지 않은 고생은 했지만 대과 없이 업무를 하고 진급하여 대대장반에 올 수 있게 여건을 만든 장 선배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표시를 했다. 정수완 동기는 자신이 취임할 대대의 전임자를 자연스럽게 만나 사전에 부대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에 고마워하며 이 것 저것 많이 질문했고 장 선배는 친절하게 답을 해주며 본인이 느꼈던 병력관리의 애로점 및 착안사항과 지역 주민, 경찰들과의 합동작전이 성패의 지름길이라는 해안 대대장 근무의 기법을 알려주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부대와 지역 특성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층 더 가깝게 소통하는 기회도 되었다. 밤이 깊어 갈 무렵 장 선배는 “남해에 오면 반드시 들려야 할 명소가 있고, 얼마전에도 모 선배가 이곳을 찾았다며 다음 날인 일요일에 직접 안내하겠다”며 숙소로 돌아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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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9)]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2주간의 보수교육인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에서 전략과 작전술 및 리더십 교육 등 학과수업도 중요했지만, 틈틈이 시간을 내어 주변에서 멋있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선배들을 찾아가 현재의 경험에 의한 실시간 지휘기법을 전수받는 일 또한 소중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독신자 숙소의 같은 방을 사용했던 정수완 동기가 남해 대대장으로 차후 근무지가 결정되어있었는데, 그곳에는 필자가 수방사 작전장교를 마치고 무적태풍부대 작전보좌관의 보직으로 가도록 강요(?)했던 장연석 선배가 근무하고 있었다. 정 동기는 자신이 몇 개월 뒤에 근무할 부대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현 남해 대대장 장 선배와 일면식이 없어 서먹서먹했다. 허나 필자는 장선배와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같이 근무했고 필자의 다음 보직을 해당부대에 추천했던 인연으로 망설일 것이 없었다. 룸메이트의 특권이라고 할까? 필자는 궁금해하는 정 동기를 위해 바로 장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궁하면 통하는 법, 반갑게 전화를 받은 장 선배도 환영했는데, 마침 자신의 후임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던 차였기 때문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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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8)]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떨어진 체력 보충을 위해 고민하던중 당시 동기생중에 랭킹 1위 수준을 지닌 이제경 동기가 기꺼이 새벽에 테니스 지도를 해주겠다고 배려해줘 우선 테니스부터 시작했다. 필자가 운동신경이 부족하다보니 부대에서 테니스 수준이 매우 저조했는데 이 동기의 도움으로 기초부터 익히게 되었다. 덕분에 약해졌던 체력은 조금씩 보강되어가고 있음을 느꼈고 특전사에서 멋있게 근무했던 이제경 동기와의 우정은 점점 쌓여갔다. 소령급 실무장교로 꽉 짜여진 일정에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7년 동안의 습관이 몸에 베어버린 탓인지 진해 고급과정(대대장반)의 여유로운 삶은 필자를 맨붕에 빠지게 했었는데 새벽운동을 하면서부터는 하루 하루가 또 바쁘게 달려갔다. 특히 7년전에 소령 진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에서는 전술학 위주로 공부했었는데 당시의 고급과정에서는 전략과 작전술을 배우며 대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는 리더십 교육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입소 직전에 군단 ‘교육훈련TF’ 임무 수행시에 함께 연구했던 요원들을 포함함해서 진해에서 다시 만난 동기생들의 무서운 성장에 ‘괄목상대(刮目相對)’를 느꼈다. 그들은 예리한 분석력과 통찰력을 견지하며 국제화 시대에 부응하는 간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고 학과 시간에도 뛰어난 언변으로 자신있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받은 충격으로 필자의 능력의 한계를 느꼈고,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더 열심히 재충전하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마음만 급했다. 그동안 바빠서 포기했던 대학원 석사 논문도 준비하고 컴퓨터와 테니스도 배워야 하며 고급장교로 성장하기 위한 교육과정 중의 핵심인 전략이론 등도 익혀야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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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5)] 육군대학 현지실습의 기대와 보람 ①
- 직업군인으로서의 삶은 보람과 고난의 길입니다.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들도 직업으로서의 군인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 청춘들을 위해 '직업군인 사용설명서'를 작성합니다. 필자가 지난 1974년부터 썼던 17권의 일기장에 담았던 사적인 기록을 최대한 가감없이 전달합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장으로 전역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필자의 경험을 통해 직업군인의 현실과 이상을 발견하길 기원합니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89년 3월19일 일요일 저녁 진해역에는 군복입은 영관장교들이 어울리지 않게 더블백과 보따리 등을 짊어지고 분주하게 왕래하며 부산한 시골장의 난장판 같은 모습을 만들고 있었다. 최전방 GOP와 해안 및 향토사단 등에서 일주일간 진행되는 현지부대 실습을 위해 각 조별로 편성되어 기차를 타려고 바삐 움직이는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이다. 이들은 지난해 여름에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졸업을 약 4개월 정도 앞두고 있었으며 이미 차후 근무지가 내정된 상태였다. 그동안 참모학과 일반학 수업을 받았고 전술학교육까지 마쳐 이미 영관장교로서의 나름대로 일가견있는 전술 및 군사적 지식이 쌓여 있었다. 그날 오후 학생장교들은 그동안 학교내에서의 평소 교육시 입고있던 근무복을 전투복으로 바꿔입고 있었다. 또한 참고서적과 속옷 등 일주일간의 생필품을 더블백에 넣어 육군대학 연병장에 집합하여 실습조별로 군장검사를 받았다. 특히 3월 봄 날씨이지만 최전방부대로 실습가는 동료들은 현지 기온을 고려하여 동계피복까지 챙겨야 했다. 육대 졸업후 배치될 부대를 고려하여 현지 실습조를 편성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자신이 근무할 부대로 현지실습을 가는 만큼 잠시후 현지에서 만날 선후배에 대한 궁금증도 있어 다소 흥분 및 긴장감도 느낄 수 있었다. 통상 각 부대의 일정을 고려하고 지휘관인 사단장의 승인이 있어야 육군대학 현지실습을 부대로 선정하게 된다. 그리고 선정된 부대의 지휘관은 육군대학 현지실습에 기대를 많이 하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왜냐면 육군대학이 아닌 보병 및 포병학교 등 병과학교에서는 중대 및 대대까지의 소부대 전술 위주로 학습을 하기 때문에 사단급 부대에 적용이 제한된다. 반면에 육군대학에서는 연대·사단급 이상의 전술 및 작전술을 교육하며, 특히 공지전투, 기동전 등 선진국의 전술 개념과 최신 교리를 학습한 육대 현지실습조가 연구 발표한 것을 참고하여 자신들의 현재 시행 중인 작전계획을 새로운 개념과 교리에 맞게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기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하였고, 필자도 포함된 실습조는 육군대학 교육 후 수도방위사령부 및 향토사단으로 보직이 예정된 학생장교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모두 56사단으로 향하는 열차칸에 탑승했다. 어느덧 서쪽으로 해는 기울고 한참 졸다보니 깜깜한 밤이 되어 서울역에 도착했다. 전방부대로 실습가는 동료들과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자는 아쉬운 이별을 하며 기차에서 내려 사단에서 마중 나온 버스에 올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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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5)] 육군대학 현지실습의 기대와 보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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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4)]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⑫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군과 UN군의 피와 죽음, 희생으로 결국 승리한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내며 무력화 시킴에 따라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고, 그 결과 한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의 공격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한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했고, 이는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국군에겐 계속 밀리던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해준 결정적인 전투가 된다. 또한 최초로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작전을 실시한 것도 중요한 점인데, 이 전투에서 승리하게 됨에 따라 연합작전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한미간 상호신뢰감도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선엽 장군의 천하제일 1사단이 용전한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연합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과감히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현재는 고인이 되신 고 백선엽, 김점곤 장군을 비롯한 무명용사 등 전쟁영웅들에게 추모와 존경심을 표하며 의미있는 전적지답사 교육을 끝내고 학교로 복귀했다. 그들은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따사로운 봄볕의 나른함 보다는 깊은 감동에 젖어 있었다. 헌데 작금의 사태를 보면서 요즈음 부각되는 MZ세대를 비롯한 청년 및 국민들도 우리 선열들이 피로써 사수한 대한민국을 사명감과 애국심을 갖고 반드시 지켜내는 전통을 이어 나가길 간절이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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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4)]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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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3)]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⑪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선엽 장군의 체험담이 끝나자 당시 12연대장이었던 김점곤 장군의 강의가 계속되었다. 그는 “장맛비가 내리던 1950년 9월의 어느 날 김일성 군대의 낙동강 전선은 허물어졌다. 내가 지휘하던 12연대가 최초로 북한군의 혈로를 뚫고 대구 북방 팔공산 자락에서 경북 의성까지 12㎞를 북상했기 때문이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1사단이 경북 의성까지 12㎞를 북상하자, 백선엽 장군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뚫었단 말이냐? 정말 대단하다"는 찬사였다.이는 지략을 겸비한 용장 김점곤 장군의 지휘아래 미 8군이 유일하게 보유한 고사포 여단의 화력과 국군 1사단 12연대의 보병 전력이 절묘하게 결합한 연합작전 덕분이었다. 게다가 분명히 연대에 속한 대대는 3개가 기본인데 12연대는 추가로 2개 대대를 더 가지고 있었다. 연대장이 주변의 낙오병들과 학도병 500명 등을 끌어모아서 예비대대를 편성했고 추가로 150명의 여고생들까지도 후방요원으로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김점곤 장군은 옆에 강의를 마친 백선엽 장군을 바라보면서 “만약 사단장님이 아셨으면 병력을 다 내놓으라고 할까봐, 보고도 안했지…”하고 너스레를 떨며 미소를 짓자, 강의를 듣던 학생장교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는 사단장도 모르는 '끝없이 샘솟는' 충분한 예비대를 활용하여 워커장군이 감탄한 적진 돌파로 아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든 주인공이 되었다. 결국 백선엽 장군의 천하제일 1사단은 이 어려운 상황을 잘 버텨내고 최종적으로 미군의 증원을 받아 Y선 탈취에 성공하면서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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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3)]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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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2)]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선엽 장군은 다부동 전지역에서 피아 백병전은 기본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상호간에 수류탄을 주고 받는 수류탄전도 수시로 치루어졌다고 말했다. 나중엔 대인수류탄이 모자라서 대전차용까지 던졌으니 당연히 병력 손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전투가 끝난 후 피해상황 집계결과, 고지전에서만 아군은 2300명, 적군은 5690명의 전사자가 났고,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 전체로 종합하면 유엔군은 1만명, 북한국은 2만4000여명이나 전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백선엽 장군은 강의를 끝내며 “우리는 당시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국군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라 말해 당황했었다”라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또한 백 장군은 다부동 전투 승리에 대한 자긍심에 차 있었지만, 그때 운명을 달리한 우리 전쟁영웅들의 명복을 빌며 체험담 강의를 마무리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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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2)]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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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1)]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선엽 장군의 요청으로 증원된 마이캘리스 대령의 미 27연대는 인민군의 전차 접근로인 진목정 북쪽에 배치되어 18일에는 남하하는 T-34 전차 2대와 SU-76 자주포를 파괴하고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21일에는 야간침투를 시도하는 북한군 105땅크사단의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기타 차량들을 모든 화포와 전차를 총동원한 끝에 격파하여 5시간만에 격퇴시켰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오리라 추정되는 길목에 지뢰를 묻지 않고 보란 듯이 땅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들의 예측대로 이곳으로 온 북한군 전차 행렬 중 선두 전차가 지뢰 제거를 위해 정지한 틈을 타 3.5인치 바주카 및 전차포로 총공격을 가했다. 특히 전날 투항한 북한군 포병대대장 정봉욱 중좌(훗날 논산훈련소장, 초대 3사관학교장, 7사단장 역임, 소장예편)가 적부대의 위치를 알려준 덕에 더욱 효과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미 8포병대대도 약 1600발의 포탄을 사격했고 이외에도 약 2500발의 박격포탄 사격이 실시되었다. 이날 목숨을 걸고 도로 양쪽의 참호에서 치열한 저지전을 펴며 전차전을 볼 수 있었던 참전자들은 북한군 T-34전차 및 SU-76과 미군 27연대를 지원하던 73전차대대 C중대의 M26 퍼싱이 야간에 맞교환한 포탄들이 마치 볼링장 핀을 향해 질주하는 볼링공을 연상시켜 '볼링장 전투'로 불렀는데, 이는 한국전쟁 초반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전차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중요성은 북한 인민군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넘어오려고 하였다. 때문에 자연스레 전선이 피아 혼재되었고, 전투 양상도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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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1)]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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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0)]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다부동으로 몰려오는 북한군의 집중공세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왜관 및 다부동에 융단 폭격을 명령했다. 16일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한 B-29폭격기 98대는 960톤의 폭탄을 목표에 투하하였으나 인민군의 포격이 다소 줄어든 것 이외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 다만 백선엽 장군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포로를 심문한 결과, 이날의 융단폭격을 기점으로 적들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어쨌든 19일 실시 예정이었던 2차 폭격은 취소되었다. 한편 백선엽 1사단장은 중과부적으로 현 진지의 방어가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사단 고문관 메이 중위를 미 8군 사령부에 보내 증원을 건의하게 하였다.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백선엽 장군의 요청에 경산에 있던 미군 27연대, 37포병대대, 8포병대대를 진목정으로, 23연대를 두모동으로 투입하여 종심을 강화하였다. 17일 국군 11,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하여 적 1,500명을 사살했으나 11연대 11중대가 지키고 있던 673고지가 기습을 받아 뚫리는 바람에 유학산 탈환에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15연대는 융단폭격의 영향으로 인민군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공격을 재개하여 적을 낙동강 서안으로 몰아내고 328고지를 탈환하였다. ■ 백선엽, 적 특공대의 사단 사령부 기습 등 위기에 다시 직접 권총을 빼들고 선두 지휘… 그러나 사단 우측에 벌어진 간격으로 북한군이 침투하여 가산성을 점령했고 이로 인해 동쪽이 노출된 틈을 타서 18일 적의 특공대가 사단 사령부를 기습했으나 다행히 백선엽 및 사단 주요인물들을 사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19일 'Y'선을 견고하게 하기 휘해 국군8사단 10연대를 1사단에 배속시켰다. 반면에 다행스럽게도 국군 1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북한군은 유학산을 방어하고 있던 15사단을 20일 영천으로 돌렸다. 21일 백선엽은 증원병력을 받자 'Y'선 완전 회복을 결심하고 12연대와 10연대로 하여금 수암산 및 유학산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11연대로 신주막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번 공격도 수약산과 유학산을 점령하는데 그치고 11연대는 공격 초반부터 북한군의 반격에 부딪혀 점차 후퇴하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백선엽은 다시 직접 권총을 들고 선두지휘하여 힘겹게 원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이 날 북한군 포병대대장 정봉욱 중좌(훗날 논산훈련소장 역임, 소장 예편)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국군에 투항하여 적 포병대 배치를 알려주어 반격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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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0)]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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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9)]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12연대는 13일 공격을 실시해 수암산을 탈취했으나 유학산을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유학산은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 중요한 요충지라 1사단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곳을 탈취해야 했다. 14일 새벽 인민군 3사단 1개 연대가 328고지를 공격하는 시각에도 12연대는 유학산을 계속 공격했다.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겼다가 고전 끝에 탈환에 성공하는 것을 반복하는 혈투를 벌였지만, 결국 12연대는 유학산 점령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어 있었던 대구만이라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광복절에 다부동으로 총공세를 감행하여 사단 좌익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긴 채 고전했고 진목정에서는 진전없이 피만 흘리는 격전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때 좌익 11연대를 공격한 인민군 13사단이 야간을 이용하여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말았다. ■ 백선엽, 권총 들고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쏘아라! 이와 같이 11연대 일부 부대가 북한군에게 밀려 자칫 미27연대 측면이 뚫릴 위험에 처했다. 다급해진 미 연대장이 백 사단장에게 “한국군은 도대체 싸울 생각이 있느냐?”고 힐난했다. 미군의 볼멘소리를 듣자마자 백선엽 장군은 유학산 아래에서 백병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부 도망병이 발생하던 328고지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일장 연설을 했다. “지금까지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쏘아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그리고 백선엽은 허리춤에 찼던 권총을 빼들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11연대 1대대 장병들의 중간을 가르면서 달려 나갔다. 다급한 상황에서 솔선수범하며 몸소 보여주었던 ‘사단장 돌격’이었다. 사단장의 독전과 솔선수범에 감동한 병사들이 되살아난 ‘임전무퇴’의 화랑도 정신에 불타며 용전분투(勇戰奮鬪)하여 뺏고 뺏기기를 열다섯 차례 반복한 끝에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방어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는 백선엽 장군이 진목동 방면으로 나가 혼란속에 후퇴하고 있는 11연대 1대대를 수습하여 328,673고지로 역습하는 한편, 좌측에 있던 12연대 1대대를 인민군 전차가 돌파한 진목정으로 급파하여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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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9)]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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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8)]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선엽 장군은 상황판 지도에서의 설명을 잠시 멈추고 학생장교들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다부동 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50년 8월3일부터 9월22일까지 벌어졌던 대구 북방 다부동 전투는 유례없이 치열했다. 김일성의 북한군은 처음부터 다부동을 노렸다. 불과 22km 떨어진 대구를 바로 찌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김일성은 국군 1사단 정면에 무려 북한군 3개 사단 2만여명의 병력을 몰아넣었다. 당시 백선엽 장군의 지휘 아래 있었던1사단 병력은 모두 7000여명으로 병력은 3대 1, 화력은 10대 1로 북한군에게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북한군 전쟁지도부는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다. ■ 북한군의 수암산, 유학산 선점에 당황, 또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 돌파 위기 8월12일 하달된 군단 작전명령에 명시된 'Y'선이란 1사단의 좌 1선 15연대가 고수하고 있던 왜관 북쪽 6.5km지점부터 각연대를 5~10km 가량 후퇴시켜 좌로부터 369고지-수약산-족계산-신주막을 잇는 작전 지역을 말한다. 이 선은 백선엽 장군이 지형 정찰 후 결정한 최후 방어선이었다. 이 방어선은 전투정면이 20km에 달하여 매우 넓은 방어 정면이었으나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1사단과 인접해 있는 6사단,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방어에 유리했다. 13일 백선엽은 좌익에 15연대, 중앙에 12연대, 우익에 11연대를 각각 배치했다. 이때 1사단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편제상의 병력은 70%가 보충되어 90~100%정도를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T-34전차 격파가 가능한 3.5인치 로켓포까지 지급되어 사기가 더 올라갔다. 이러던 와중에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는데 12연대가 재정비를 하고 있을 동안 북한군 13사단이 12연대의 꼬리를 물고 침투하여 수암산과 유학산을 먼저 점령한 것이다. 이는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쓸데없이 철수경로를 통제했고 백선엽까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두 고지에 배치할 병력이 부족해져 버린 탓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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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8)]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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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7)]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반도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인 다부동을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등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이곳을 지켜냈다. 이로 인해 남한은 북한의 적화통일을 막고 추후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당시 한국군의 사활이 걸린 전투였고 결국 수비에 성공했다. 일명 다부동 볼링장전투는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리고 있다. 1989년 4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의 날씨는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하지만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치열했던 전쟁 역사의 현장에서 강의하는 백선엽 장군의 매서운 목소리는 쩌렁쩌렁하였고, 경청하는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엄동설한의 혹한을 느끼게 했다. 특히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간과 장소, 해당 지휘관 및 장병들의 이름을 정확히 제시할 때에는 소름까지 돋았다. ■ 낙동리 부근에서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으로 북한군의 전차 대부분을 파괴 백발의 백선엽 장군은 꼿꼿하게 서서 상황판의 지도와 전투 현장을 연이어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1사단은 성창에서 적과의 접촉을 끊고 8월 3일 오후 낙동리에서 고전하며 낙동강을 도하하여15연대를 인동에, 11연대를 해평동에, 그리고 사단 도하를 엄호하고 철수한 12연대를 낙동리에 배치했다. 이때 사단은 좌측의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우측으로는 1사단을 추격해온 북한군13사단이 낙동리로, 15사단이 구미시로, 3사단이 왜관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8월 3일 17시에 북한군 1개 연대가 낙동리의 모래밭에 몰려들어 도하하기 시작했는데, 김점곤 중령이 이끄는 12연대로 저지선을 펼쳐 시간을 벌었다. 그러던 중 4일 사단에 좌인접한 6사단과 전투지경선이 조정되면서 12연대는 사단 예비대로 임무가 변경되어 상림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날 북한군 1개 연대가 12연대가 이동하는 틈을 타 낙정리로 도하하여 11연대를 공격하자 백선엽은 12연대 1대대를 증원하여 막아내고, 6일 궁기동 남쪽 225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 13사단은 7일 밤 공격을 재개했다. 이 상황에서도 국군은 힘들게 해평동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백선엽은 여기에 12연대 3대대를 증원하고 같은 연대 2대대를 13연대 지역에 투입하였다. 이날 22시에 강정 나루터로 북한군 15사단 1개 대대가 도하했고, 그 결과 강 건너의 북한군은 급격히 증가했다. 8일 1시에 해평동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과림동으로 후퇴했던 12연대 1대대는 항공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해 전투 2시간만에 해평동을 탈취한 후,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13연대의 정면인 남율동 부근에 4일부터 만든 수중가도로 2개 연대와 T-34전차 15대를 도하시켜 9일에는 낙동강 대안의 고지군(201고지, 369고지, 154고지) 등이 돌파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14시에 해평동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T-34전차 5대가 남하하다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에 걸려 4대가 파괴되고 369고지 밑의 국민학교에 숨어있던 T-34전차 3대가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에 파괴되어 인민군은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전차 전력을 상실한 북한군은 전술을 바꾸어 금곡리를 우회하여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군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12일, 'Y선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려 1사단은 20:00에 이탈하여 전쟁역사에 기록된 혈전의 현장이 될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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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7)]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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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6)]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④
- [시큐리티팩트=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 1기병사단 정면의 적은 강을 건너오는 동안 많은 손실을 입고 접촉을 단절함으로써 소강상태가 유지되었고, 국군 6사단 지역에서도 유엔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함으로써 적의 대구 공격은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축선에 집중되었다.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은 약 2만1500명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다부동 방어전투를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도 큰 기여를 했다. 마침내 8월 20일 정면공격을 시도했던 적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유학산 정면을 공격했던 북한군 15사단은 영천 방면으로 전환했다. 이로써 8월의 다부동 축선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55일간이나 계속되었던 다부동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2만여 명과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 피해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어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장맛비가 내리던 9월이 되자, 드디어 김일성 군대의 낙동강 전선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김점곤 중령의 국군 1사단 12연대가 최초로 다부동 혈로를 뚫고 12㎞를 북상했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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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6)]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