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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⑯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2018년 8월24일 국민가수 고(故) 최희준씨가 향년 82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벌써 5주기를 맞이하지만 그의 노래는 아직도 널리 애창되고 있고 특히 ’하숙생‘의 가사는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 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 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가 인생의 본질이자 진리임을 모르는 바 아님에도 인간세상에 무의미한 교만과 시기 그리고 탐욕 등 일곱가지 죄악은 인생을 힘들고 슬프게 한다. 또한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노래하지만 특히 군생활은 잦은 부대 이동으로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라는 가사처럼 정붙일 시간없이 떠돌며 흘러가는 진짜 나그네길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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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3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⑮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필자가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받을 때 졸업 후에 수방사로 같이 부임하게 될 박래호 선배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 인접 동국대학교 석사과정을 지원했었다. 수방사 작전장교 근무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포기했는데 통신단으로 명령을 받은 박 선배가 이때 아니면 공부할 기회가 없다며 걱정말고 일단 응시하라고 설득했던 결과였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20)]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징표(하) 참조) 허나 이미 동국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지 5년이 다 되어 이번 학기가 석사 논문을 제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급해졌다. 그때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떠올랐다. 김 장군은 흔쾌히 귀국보고서를 필자에게 제공했다. 그때까지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골반과 다리에 통증은 있었으나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거의 석달 가까이 자료를 정리해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란 제목에 ‘남북한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란 부제목의 논문 초안을 정용길 지도교수에게 보고했다. 목발을 짚고 절뚝거렸지만 절실하게 학구열에 불타는 필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논문을 검토하던 정 교수는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사영어반 교육이 논문준비에 유리한 여건이 되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고마운 김영식 동기가 제공한 귀국보고서를 기초로 국방백서 등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남북한 통일시에 어떤 군사력을 보유할지를 분석한 논문 작성은 육군대학에서 박 선배의 강력한 권유가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 부대 임무를 우선했던 필자는 그때 아니면 석사 학위를 받을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로써 야전만을 전전하며 실무에 찌들렸던 필자는 재활치료 위기로 오히려 군사영어반에 다닐 수 있었고 석사학위도 받았다. 덕분에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던 매미가 지상으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뱀이 묵은 허물을 벗고 크게 성장하는 ‘선태사해(蟬蛻蛇解)’의 호기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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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2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⑭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병원치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주변 선배들이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 짜리 ‘군사영어반(당시 장교영어반으로 호칭)’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때부터 11월 종합행정학교에서 치뤄야할 ‘군사영어반’ 입교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과거 수방사 근무시에 유학반 시험 준비를 하다가 포기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고배를 마시지 않겠다는 각오로 준비를 했고 재활치료를 하다보니 야전에서 근무하던 타장교들보다는 공부할 여유도 더 있었다. 그 와중에 육군대학 대대장반에서 모 장교가 교통사고를 당해 광대뼈가 부서지는 등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필자도 교통사고로 입원하여 진료를 받던 그동안의 많은 일들이 떠오르며 그 장교도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원복하기를 기원했다. 또한 지난 8월3일 오후 성남 서현역에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발생해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처럼 당시에도 지존파의 부녀자 38명 살해 계획 실행, 군에서도 총기난동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는 현대 젊은이와 사회의 무책임한 자유와 방종 그리고 이기주의가 양상시킨 비극이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사건들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재활치료로 부대에 부담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장교영어반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결국 그해 11월초에 종합행정학교에서 시험을 치뤘지만 그 결과는 부족한 내 자신의 재확인이었다. 합격할 자신이 없어지자 눈앞이 깜깜해지며 필자가 서있을 곳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5대1 경쟁율의 시험에 응시한 많은 장교들이 필자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헌데 열흘이 지나서 육군본부 인사처에서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천운이 따른 덕택이었다. 그리고 잠시 잃어버렸던 내 자신과 목표를 다시 찾았다. 합격자가 발표되자 몇 명의 지인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축하에 앞서 어떻게 공부해야 합격할 수 있냐는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교통사고로 대퇴부가 분쇄골절된 경험을 한 필자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필자는 그들에게 “시험 준비도 중요하지만 다리를 뿌러뜨려 막다른 길에 접어들게 만드는 것이 확실하게 합격할 수 있는 비법이다”라며 미소로 답했다. 비록 시험 결과는 자신이 없었지만 다른 응시자들과 비교해 다른 것이 다리골절이었기 때문에 표현했는데, 그들은 재미있다며 바로 본인도 다리를 뿌러뜨리겠다는 우스개 소리를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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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2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선태사해(蟬蛻蛇解)’란 매미가 껍질을 벗고 뱀이 허물을 벗는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이다.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던 매미가 지상으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뱀이 묵은 허물을 벗고 크게 성장하는 것을 뜻하며, 해탈하여 더 높은 경지에 들어서는 것을 비유한다. 또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나타내어 변화와 혁신을 강조할 때 쓰인다. 이와 유사한 의미의 사자성어로는 사람이 보다 발전한 방향으로 변하여 전혀 딴사람처럼 된다는 뜻의 ‘환골탈태(換骨奪胎)’, 군자는 표범처럼 빠르게 잘못을 고쳐 혁신한다는 뜻의 ‘군자표변(君子豹變)’, 날로 진보하는 것을 뜻하는 ‘일취월장(日就月將)’ 등이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암울했던 1994년이지만 정상적인 보행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태는 필자에게 ‘선태사해(蟬蛻蛇解)’와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기회를 부여했다. 재활치료 때문에 차기 보직 발령에 다소 늦은 횡보를 보이면서 그동안 미뤄 왔던 미완의 과제들을 해결할 시간과 여유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던 매미가 지상으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듯이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더 발전된 상태로 변화하기 위한 준비에 매진할 수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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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2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⑫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마침 교통사고 당시에 필자를 부대대장 보직으로 조치해 치료받으며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혜택을 준 80연대장 정형진 대령(육사30기, 소장예편)이 사단 참모장으로 영전했는데 천주교 신자로 매주 성당에서 만나 위로와 격려를 해주어 너무도 감사했다. 그해 성탄절에는 가족 전체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고, 이를 지켜보시던 고향 시골의 부모님도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됐다. 이 모두는 을지병원에서 필자를 간병하던 아내가 매일 명동성당에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 덕이라 여겨졌다. 한편 퇴원한 지 한달이 지난 뒤에 중령 진급 신고를 사단장에게 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대대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근무중이었고 필자만이 목발을 짚고 간신히 서서 행사에 임했는데 이때 사단장은 대대장으로 취임하기에는 아직 재활이 더 필요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도 사단 평가실에 보직을 두고 예하부대 점검을 한 결과 보고서를 검토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정상적으로 걷지 못하는 몸이 불편한 현실에 이미 취임하여 활발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동기생들보다 자꾸 뒤떨어지는 느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에 사단작전장교 시절의 참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 짜리 ‘장교영어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제안했고 그때부터 11월 행정학교에서 치뤄야할 ‘장교영어반’ 입교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장교영어반’ 교육과 필자의 재활치료 때문에 대대장 취임이 연기됨에 따라 전방 근무 기간이 길어져서 계획인사에 적용되어 다음 보직이 후방 2작전사령부 예하 대대장으로 조정되었다. 따라서 2작전사령부 인사처의 보임장교인 동기생이 순찰 등 이동이 많은 해안부대보다는 내륙위주인 37사단으로 검토한다는 전달을 받았다. 게다가 군근무 기간 및 계급정년이 늘어나는 군인력관리계획이 변경됨에 따라 중령근무 기간이 연장되어 재활치료 후에 어떻게 근무를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진로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보여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속담처럼 ‘천붕우출(天崩牛出)’란 고사성어가 뇌리를 때렸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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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2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⑪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가을인 9월초이지만 그해 여름에 괴롭혔던 100년 만의 폭염은 아직도 남아있어 아파트 4층은 뜨거웠다. 하지만 무적태풍부대 정면옆에 위치한 아파트에서는 주변 양계장과 돼지 축사에서 퍼져나오는 냄새와 파리떼들의 습격으로 창문을 열기가 어려워 더위는 더욱 심했다. 그래도 죽음의 끝자락까지 다가갔던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병원 생활을 벗어났고, 그동안 자주 볼 수 없었던 아들을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어 아파트 주변 축사의 불쾌한 냄새마저도 감사했다. 목발을 짚은 필자는 그때까지도 거동이 완전하지 못해 부대로 출근은 못한 채, 아침 저녁에 사단 사령부 연병장과 주변을 열심히 걸으며 재활운동을 계속했다. 간혹 길에서 만나는 간부들과 인사를 할 때에도 걱정해주는 그들이 감사했고 덕분에 사단 참모부에는 필자가 복귀해 재활치료 중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빨리 정상적인 상태로 만들겠다는 것은 필자의 의지뿐이었고, 정상인처럼 빠른 속도로 걷고나면 핀이 박혀있는 다리의 근육과 목발을 이용하기 위해 끼웠던 겨드랑이와 팔까지에도 통증을 느꼈다. 대퇴부 분쇄골절로 인해 아직도 뼈가 완전히 붙지는 않은 탓이었으나 근육이 없는 다리는 변함없이 새다리처럼 가늘었다. 단지 병원생활 동안에 동기의 권고로 개종하여 성당을 찾아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며 , 신자들을 만나는 회동하는 시간만이 유일한 위안의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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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1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⑩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서울 을지병원에서 침대생활 2개월, 재활 2개월 등 4개월 10일만에 드디어 퇴원하는 날을 열흘 앞둔 8월26일 저녁에 같은 병실에 입원해 함께 치료받던 김종완 동기의 고교 절친인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이 그동안 고생을 위로하는 식사을 함께하며 술 한잔도 겸했다. 특히 대퇴부 분쇄골절, 골반 천골·치골 전위골절, 늑골 8·9번 골절, 횡경막·비장 파열, 뇌진탕, 혈흉, 좌5족지 탈골 등 병명만 11가지로 몸속에 쇠붙이를 부착한 로보캅 같은 중환자 필자에게 각별한 정성과 완벽한 진료로 희망의 불을 지펴준 박 이사장이 퇴원 축하 식사까지 마련해 너무도 감사했다. 그해 8월 마지막 날에는 무적태풍부대에서 또하나의 희소식이 전달됐다. 필자의 후임으로 사단작전보좌관에 보직되어 고생을 했던 후배 김완경(38기) 소령이 중령 진급심사에서 선발되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뇌사 상태의 중환자에서 회복되어 목발을 짚고 퇴원하는 필자와 함께 자축행사 이벤트가 되었다. 헌데 9월6일 퇴원할 때에 작은 문제가 있었는데 숙소인 동두천까지 이동하는 승용차 운전이었다. 당시에 가족이 운전이 서툴러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여 비록 다리에 힘은 없지만 그동안 부지런히 재활치료한 덕분에 필자가 과감하게 운전을 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로 차량 운전대를 못 잡을 줄 알았는데 안전하게 복귀하여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에 본인이 없으면 큰 이변이 생길 것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4개월 보름만의 퇴원 후 동두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변은 전혀 변화가 없이 늘상의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세상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교통사고 등의 충격 속에서 변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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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1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5]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죽음의 끝자락까지 다가갔던 교통사고로 병원 생활을 시작한지 4개월즈음 지나갈 무렵 오랜만에 희소식이 전달되었다. 무적태풍부대의 작전참모부에서 몇 년을 함께 고생했던 작전장교 정승범 대위가 소령으로 진급했다. 당시에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100년만의 폭염이 날라가는 시원한 소식이었고, 그동안 필자를 믿고 열심히 근무한 부하 장교의 좋은 결실에 비록 병원이었지만 마치 내가 진급한 것처럼 기쁘고 보람을 느꼈다. 더불어 필자의 회복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마치 쇠로 온몸을 감싼 로보캅처럼 배앞에 불쑥 튀어나와 불편하게 만들던 골반뼈에서 연결된 골반고정핀(Pelvis frame)을 제거했다. 이제는 분쇄골절된 좌측 대퇴부의 골수에 박혀있는 골수정 만이 몸속에 남게 되었다. 가늘어진 다리에 근육을 붙이는 재활치료를 위해 이동식 보조기를 사용해 병원 복도를 쉴새 없이 누비고 다녔고 덕분에 김일 선수를 만나 눈인사를 하는 횟수도 늘어만 갔다. 드디어 이동식 보조기에서 목발로 교체하면서 운동량도 늘었는데 그때의 가장 고충이 목발을 짚기 위해 겨드랑이에 끼우고 계속 걷자 겨드랑이의 통증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록 목발을 짚고 다녀도 이동이 가능하자, 그동안 교통사고로 병실에서 함께 지냈지만 거동이 가능해 외출까지 다녀왔던 김종완 동기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간호사에게 허락을 받고 김 동기와 가족과 함께 입원 후 처음으로 병원 밖의 자그마한 일반 식당에 들어가 칼국수로 식사를 했는데 세계 최고 수준의 맛이었다. 외식을 제안한 동기도 고마웠고 매일 간병과 동시에 틈틈이 성당에서 필자를 위해 기도하며, 교통사고로 군생활 포기까지 생각했던 위기에서 필자를 건져준 가족이 진심으로 고마웠다.(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0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4)]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일 선수의 무료 치료와 마지막 영면시까지 도움을 주었던 을지병원은 1956년 11월1일 박 산부인과의 개원을 모태로 굴지의 교육의료재단으로 성장했다. 70년이 다되도록 끊임없이 성장해 온 을지재단 역사의 중심에는 박영하 설립자의 ‘인간사랑 생명존중’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 가치를 바탕으로 을지재단은 6.25남침전쟁으로 황폐화된 의료시설의 재건과 의료복지 구현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일찌감치 병원을 공익법인으로 전환하여 의료복지 선진화의 길을 개척했다. 고(故) 박영하 박사는 1950년 6.25남침전쟁 당시 자진 입대해 군의관으로서 부상병들을 치료했고, 1953년 7월 속초 제1외과병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고도 3년을 더 복무하다가 1956년 7월 중령으로 예편했다. 아내 전증희 여사도 결혼후 강릉의 59육군병원 간호부장으로 재직하며 휴전을 맞았다. 6.25남침전쟁은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엄청난 상흔을 남겼지만, 의학 자체의 발전도 따랐다. 전쟁은 당시 대부분부상병의 치료와 연관성이 높은 일반외과, 정형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마취과 등 외과계열의 의료기관들에게 더욱 큰 영향력을 끼쳤다. 박 박사 역시 의대를 갓 졸업한 젊은 의사로 전쟁에 뛰어들어 수천건의 수술을 담당하며 군진의학(Military Medicine)의 개척자로 부족함 없는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민족의 비극을 절절히 체험하며 공고화된 조국애를 갖고 실천했고 이후 국민보건의료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더해 그가 별세하자 의사 최초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또 2018년 이달의 현충인물로, 그해 4월에는 이달의 영웅으로 각각 선정되기도 했으며, 부인인 전증희씨도 6.25남침전쟁 당시 간호장교로 참전했고, 박 박사의 아들인 현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과 손자 역시 병역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여 ‘병영명문가’로 선정됐다. 현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은 “나라를 위해 병역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확산하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라며 “앞으로도 병역 명문가의 값진 용기와 헌신을 극진히 예우하기 위해 실질적인 혜택을 확대하겠다”라고 말했다. 박 회장 부자(父子)의 이러한 사명감과 ‘인간사랑 생명존중’의 정신은 국민 영웅인 김일 선수의 장기간 지병 치료와 삶의 마지막까지도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병역 명문가인 박준영 회장의 “제복을 입고 병역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예우하겠다”는 말처럼 비록 전시가 아닌 평시였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군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뻔한 필자와 김종완 동기에게도 직접 을지병원으로 데려와 완벽하게 치료하는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해 진심어린 감사와 함께 깊은 감동을 주었다.(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일 선수는 1929년 전남 고흥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0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격과 괴력을 갖고 있던 김일의 운명은 어느날 우연히 일본 잡지에 실린 역도산의 기사를 보고 바뀐다. 씨름에서는 천하장사였던 김일은 프로레슬링으로 이름을 떨치겠다고 결심했다. 부모도, 16살 때 결혼한 아내도 모르게 씨름판에서 모은 자금을 복대에 차고 일본행 배를 탔다. 그러나 김일의 일본행은 순탄치 않았다. 불법체류자로 체포돼 1년형을 살았다. 그는 1년간 역도산에게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고, 역도산은 얼굴도 모르는 김일의 신원을 보증하고 그를 감옥에서 구해냈다. 이어 1957년 김일은 역도산체육관에 1기로 입문하면서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오오키 긴타로’라는 일본명은 프로레슬러로서의 첫 이름이었다. 이후 김일은 가난하던 1960년대 서민들의 위안이자 청소년들의 영웅이었다. 온갖 반칙에 코너에 몰리다가 위기의 극단에서 박치기 일격으로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모습, 무엇보다도 일본인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대결에서 선보인 박치기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호랑이 모습의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일본 프로레슬러들을 상대로 싸우는 장면은 TV앞의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 김일이 세계 챔피언에 오른 해는 1963년이었다. 선천적으로 단단한 이마를 앞세워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대회에서 세계태그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러나 같은 해 스승 역도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와 대한프로레슬링협회를 설립했다.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5년 극동 헤비급 챔피언, 1966년 올아시아 챔피언, 1967년 세계헤비급 챔피언 등 무수한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으며 승승장구했다. 1972년 도쿄 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며 1970년 중반까지 세계 프로레슬링을 휘어잡은 김일은 프로레슬링 인기가 몰락하면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 김일에 대한 소식은 이런저런 투병 소식이 대부분이었다. 사업가로 변신은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선수생활에서 얻은 후유증이 김일을 괴롭혔다. 1994년에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에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기도 했다. 최초 은퇴한 것은 1970년대였지만, 은퇴식은 그때 한 번이 아니었다. 일본 신문기자단은 1995년 도쿄돔에서 김일의 은퇴식을 다시 마련해주었고, 한국에서도 대한체육회가 2000년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거행했다. 이후 건강이 호전돼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의욕을 보였지만, 결장 제거수술 이후 운신에도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2006년 10월26일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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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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