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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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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㉗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율성이 6·25남침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군가도 작곡했지만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점령군으로서 자유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1·4 후퇴 때는 중공군과 함께 재차 서울에 내려와 조선궁정악보를 약탈해간 매국노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광주 출신이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공산당원으로 변절한 자를 추모하며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추진했던 정율성 공원 조성사업은 동족상잔의 비국을 겪은 자유대한민국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현재도 핵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으려면 견고한 한미동맹이 절실한 실정이다. 필자가 다녔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북한의 재 남침에 대비해 합동참모본부의 주요부서에 근무하며 군사전략을 담당했던 용삼남(육사33기) 선배로부터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용 선배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발을 짚고 재활치료에 전념했던 필자에게 용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는 생도시절 럭비부 선수 생활을 했는데 운동중에 부상을 입어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이 판단할 때에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으나 강한 의지로 철저하게 운동을 하여 척추 주변 근육을 강화시킴으로써 전혀 불편함 없이 더 건강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합참 근무시에 매일 새벽에 가장 일찍 출근하여 책상 및 의자 정리 및 청소를 한 뒤에 책상위에 올라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300개씩 하여 근육을 강화시켰다. 그가 원주에 있는 부대에 근무할 때에는 고속도로에서 시비를 걸던 조폭을 한방의 주먹으로 넉아웃시킬 정도로 강해졌다는 여담도 남겼다. 건강한 체력은 건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며 업무에 질도 고양시킬 수 있다. 건강의 이상을 극복하며 지칠줄 모르는 용 선배의 체력에 상관들은 힘든 업무도 쉽게 맡길 수 있었고 업무상 만나는 미군들과도 쉽게 친해져 한미 연합작전과 군사전략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일과후에는 독신자 숙소에서 우리의 전통악기인 대금을 연주하며 하루를 마감하여 건강상 어려운 위기를 적극 극복하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예술감까지 가진 문무를 겸비한 군인으로 끝없는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앞으로의 군생활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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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㉖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10월2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세워져 있던 중국 음악가 ‘정율성 동상’이 기단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 귀화한 음악가로, 북한·중공군 군가를 작곡한 인물인데, 광주시가 기념사업을 추진해 논란을 불렀다. 정율성 동상은 중국 청년단체가 제작해 광주 지역 청년단체에 기증한 것으로 2008년 광주 남구 양림동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 입구에 세워졌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이날 재물손괴 혐의로 보수단체 회원 윤모(5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전날(1일) 오후 정율성 흉상 목 부분에 밧줄을 묶고 2.5톤 승합차에 이를 연결한 뒤 쓰러뜨리는 모습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정율성 흉상은 위의 사진처럼 약 1m 높이의 기단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기단 옆 땅바닥에 누운 모습으로 발견됐다. 윤씨는 범행 직후 한 유튜브 채널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중단하라고 광주시에 요구했는데 이를 이를 수용하지 않아 강제로 (흉상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윤씨는 경찰에서 “내가 그랬다. 3일 오전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겠다”며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유족 대표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전 광주대성여고 교장은 2일 “공산주의자 정율성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광주시가 혈세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공원을 짓는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고 무조치로 일관하고 있다”며 “공원 철폐를 위한 릴레이 피켓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김오복 전 교장은 “북·중공의 군가를 짓는 등 한국 침략세력의 나팔수 역할을 한 정율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아무 중단 조치도 없이 정율성 공원조치를 강행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율성 공원 문제 제기에 대해 철지난 이념몰이, 색깔론, 민간외교라는 억지 논리만 되뇌고 있다”면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보훈단체들의 집회를 관제 데모로 깎아내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과 보훈가족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자 정율성 공원을 철폐하거나 대안을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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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국방부장관으로 지명된 신원식 의원(육사 37기)은 레닌에게 선물받은 권총으로 독립군을 직접 사살한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의 동상 이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영관영어반’ 과정에 다닐 즈음에는 홍범도의 존재 조차도 몰랐다. 청산리 대첩 이후인 1921년,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와 그 일당들에 의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몰살당하며 해체됐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소련군 복장의 공산주의자를 추모한다는 것은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인민군과 중국인민군 군가와 마오쩌뚱 찬양가 등을 수십 곡 만들며 뼈속까지 어용 공산주의자인 정율성 작곡가의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관생도를 포함한 건전한 국민들의 정체성과 대적관을 현혹시키는 잘못된 처사이다. 필자가 다니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확고한 대적관을 바탕으로 견고한 한미동맹을 위한 교육이 계속되었다. 이 교육을 통해 숙달한 영어회화 능력으로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 및 훈련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을 마치면 다음 보직은 연합사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필자는 이미 다음 보직이 충북 충용부대로 정해져 있었고, 다른 교육생들은 연합사령부 또는 예하 부대 및 연합작전/훈련을 주로 시행하는 합동참모본부로 분류되었다. 마침 합참의 중요부서에서 근무했던 선배도 함께 교육을 받고 있어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한명은 육사 33기 용삼남 중령이었다. 과거 승리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양태수, 나대일, 김형배 선배 등을 포함하여 많은 선배 동료들을 다시 만나는 해후의 시간도 만끽했으나 용 선배는 6개월 교육기간 중에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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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5주년을 맞은 국군의 날은 6·25남침전쟁 당시 우리 육군의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날이다. 추석 연휴 때문에 닷새 앞당겨 지난 26일 열린 올해 국군의 날 기념행사는 그동안 소홀히 했다가 10년 만에 대대적인 도심 시가행진으로 주목받았다. 유사시 북한 지휘부의 지하 벙커를 파괴할 고위력 현무 미사일과 한국형 사드로 불리는 장거리 지대공유도미사일, 엘샘(L-SAM) 같은 첨단무기가 대거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날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핵 위협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며, 우리 군의 태동 시점은 1945년 광복 이후라고 언급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광복 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 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역사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군의 뿌리를 독립군에서 찾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식을 사실상 반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국군의 날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동부전선의 우리 육군 3사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10월1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1956년 제정됐다. 하지만 체제 경쟁이 끝나고 남북정상회담 등이 열린 2000년대 이후론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자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우리나라가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헌법에 따라 군의 뿌리도 임시정부 군대인 광복군으로 정립하는 게 맞다고 민주당 등 일부는 주장하지만 확고한 대적관을 강조해온 현 정부는 선을 긋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웠던 광복군도 의미는 있지만, 지금 우리 군은 북한과 싸우는 군대라며 국군의 확고한 정체성을 강조했고, 여야의 인식 차는 국군의 날 메시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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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㉓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개월 기간의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간정도 지나갈 즈음에 필자는 그동안에 미루어 왔던 석사학위 논문의 마무리에 쉴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영관영어반’ 과정에 입교시킨 것은 능력이 부족한 필자가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주신 신의 배려와 인도라 생각되어 감사할 뿐이었다. 최종 논문심사에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라는 필자의 논문을 검토하던 동국대학교 3명의 지도교수들은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제공해준 귀국보고서가 큰 바탕이 되었고, 다른 학생들은 논문들은 기존의 타 논문에서 인용하여 만들다 보니 필자의 논문보다 교수들이 참고할 사항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사중에 지도교수들은 논문 내용보다 내 신상에 더욱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목발을 짚고 있지만 육사37기로 박지만과 동기라고 하자 그들은 ”아마도 그 동기들은 똑똑한 사람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기생 전체를 칭찬해주어 동기회 품격이 격상되는 이미지에 일조한 기분이 들어 보람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교한 영관영어반 과정은 주말부부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됨과 동시에 이미 취임해 맹활약하는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도 풀었지만 대대장 근무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계기가 되었고, 영관영어반 수료증과 동국대학교 석사학위기를 받아 내실을 기하는 일거다득(一擧多得)의 결실을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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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70)] 정답이 없는 면접 시험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관과 인생관에 대한 건전한 사고와 심성을 갖고 있는지 성격에 결함은 없는지와 같은 질문이었고 별로 어려움도 없었다.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은 미리 준비하고 있어서 이순신과 나폴레옹이라고 거침없이 이야기 했다.훗날 육사에 합격한 동기생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웃기도 했다.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그 동기생은 “제가 존경하는 사람은 현재 육사에 재학 중인 김봉환 생도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는데 면접 채점관들이 폭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그 친구는 축구를 너무도 좋아했는데 삼사체육대회 시 육사 축구부의 골키퍼로서 육사우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김봉환 생도를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친구도 육사에 거뜬하게 합격했다. 면접시험관들은 지원자의 사상적 결함이나 성격에 문제가 있는지를 확인하지만 소신과 자신감으로 똑바로 대답하는 자에게 신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면접시험을 대비해 학원을 다니는 것보다 자기생각을 정리해놓는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면접에는 정답이 없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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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70)] 정답이 없는 면접 시험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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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9)] 정답이 없는 면접 시험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는 육사입학시험에서 체력이 가장 걱정이었다. 여름방학 때 종로의 육사전담학원에서 공부한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해 10월 서울 청량리공고에서 필기시험을 볼 때 한 교실에 40명 씩 시험을 봤으나 최종합격자는 2명 뿐이었다. 필기시험 하루 전날, 학교수업 휴식시간에 짝꿍이었던 이일성(현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교수)이 교실 밖으로 불러냈다. 나보고 뒤로 돌라고 했는데 부시럭 소리가 나더니 접시만한 엿을 주면서 비어먹으라고 했다. 소중한 짝꿍의 합격기원이었다. 1차 필기시험을 치루고 필자는 체력보강을 위해 매일 새벽에 남산을 올랐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가려면 체력이 우선이다"라는 생각을 되씹으며 남산계단을 뛰어올랐다. 충정로 미동초교 옆에서 셋방살이를 했으니 남산까지의 왕복은 2시간이 족히 걸렸으나 육사합격이란 목표는 악과 깡을 배양시켜주었다. 체력측정 시 월등한 체력은 아니었지만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고 드디어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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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9)] 정답이 없는 면접 시험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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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8)] 정답이 없는 면접 시험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가장 중요한 것은 “절실한 사람”이었다. 보통 다섯 번 이상 채용시험에 응시했던 지원자들이라 자기소개시간에 발표는 흠잡을 때가 없었다.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SKY 출신들의 자세에서는 우월의식과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으나, 여기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자신을 채용할 것이라는 교만감은 패착이었다. 모든 기업은 애사심(愛社心)을 갖고 회사를 위해 평생을 함께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공채 1~3기는 주로 명문대 출신위주로 선발했으나, 결국 2~3년 경력을 쌓고는 다른 업체로 옮겨갔다. 그래서 “절실한 사람”이 훌륭한 스펙을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다. 2.5배수로 압축된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2차 면접이 시작되었다. 회사의 이사들과 기조실장이 심사위원이었다. 2차에서 놀라운 것은 1차 면접 시 우수한 지원자가 의외의 실망스런 성적이 된다는 것이다. 요즈음 면접요령을 교육시키는 학원과정이 많이 생기다보니 1차 면접 시에는 연습한대로 능숙하게 하다가 2차 면접에는 교육받은 내용이 아닌 다른 것을 질문하니 당황하여 실수하는 지원자가 생겼다. 반면 오히려 2차 면접 시 소신있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지원자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면접시험에는 정답이 없다.그동안 공부하고 평소 가진 소견을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성이 있고 신뢰를 받을 수가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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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8)] 정답이 없는 면접 시험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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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7)] 정답이 없는 면접 시험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현재의 모든 기업은 우수한 인재를 발굴 채용하는 것이 회사 미래와 성패를 결정짓는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 대학생들은 '인재의 객관적 조건'으로 생각되는 스펙을 쌓기 위해 졸업을 늦추어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해외연수를 택한다. 필자가 근무했던 군인공제회는 2011년부터 매년 공채로 신입사원을 뽑기 시작했다. ‘15년 신입사원 공채 시에는 5명 선발에 523명이 지원하여 104.8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16년에도 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채5기가 선발되었다. 많은 지원자를 모두 면접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각 대학별로 1~5명씩 학교 성적 등을 참고로 컴퓨터로 돌려서 뽑았다. 이렇게 뽑힌 사람들을 다시 서류로 심사하여 5배수 정도로 압축시켰다. 이때까지는 스펙이 필요했다.졸업성적도 B+ 이상이 되는지원자들로 추렸다. 1차 면접은 본부장·팀장급이 심사위원이었다. 면접에 나온 서류전형 합격자들은 공인회계사, 건축 및 토목 기사에 토익은 850점 이상 등과 같은탁월한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각 학교에서 1명씩 뽑았으니 지방대 출신이라도 그 능력은 탁월했다. 허나 면접을 하면서 우열이 가려졌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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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7)] 정답이 없는 면접 시험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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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6)]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다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삶이란 소(牛)가 외나무다리(一)를 건너가는 생(生)이라고 했다. 언제나 누구에게도 아슬아슬하게 외나무다리 고비를 넘어가며 죽음의 문으로 다가간다. 지옥의 세계 속에서 희망의 빛을 쫓아 시간을 쪼개며 살아가는 고3 시기는 더 많은 리스크(Risk)와 유혹 그리고 장애가 버티고 있는 과정이고 인생을 선택(Choice)할 시간이다. 육사를 지원하겠다는 말을 들은 담임선생님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면서 단호하게 반대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가면 얼마나 너의 인생이 멋지겠느냐? 예술가로서 명성도 얻으면 삶의 희망이 실현되는 것이다"라고 오히려 필자를 설득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육사지원서 작성은 불가하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간신히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선생님 승인은 학업성적 평가 차원에서 육사시험에는 응시하되 합격여부를 떠나서 서울대 미술학과는 반드시 응시한다는 조건을 지키는 것이었다. 아무튼 조건부라도 육사시험 원서를 작성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 당시 필자의 가정 형편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강원도 원주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아버지에게 학비가 많이 들어가는 미술대학 뒷바라지를 부탁하는 것도 사실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평택에, 필자는 서울 충정로 셋방에서 세집 살림하기에도 아버님 봉급 가지고는 빠듯한 생활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육사로 목표를 정했다. 여름방학 때 종로의 사관학교 입시 전담학원에 등록했다. 마침 그 학원에는 고교 동창생 3명이 사관학교를 목표로 함께 수업을 받고 있었다. 드디어 그해 10월 육사시험에 응시했다.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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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6)]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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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5)]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다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자네는 공부 좀 하나?”라는 선배의 예상하지 않은 돌발 질문에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의 길을 강조했던 조정 선배(육사35기) 입에서 의외의 말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 예~, 성적은 조금 괜찮아서 지금 학교 특수반에 포함되어 대입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우선은 공부를 잘해서 연·고대 수준이 돼야 1차 합격할 수 있고, 그 다음은 체력이 좋아야 한다. 의지만 있으면 자네도 가능해…” 기대하지도 않고 있다는 듯 대답을 하고 떠났다. 그러나 당시 담임인 이경은 선생님이 특수반(성적 우수학생들만 따로 모아 일과 후에도 보충수업을 시키는 학급)에다 그림도 잘 그리니 서울대학교 미대를 갈 준비를 하라고 조언을 해주셨고 나도 별다른 뜻 없이 순종하며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육사에 입교한 고교 선배 조정 생도의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는 이 한마디에 선생님의 조언은 점점 희미해졌다. "어차피 한번 살다가는 인생인데 그 선배처럼 직업군인의 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매력적일까?" 이런 상념을 하면서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던 그날 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편안하고 평범한 삶을 택하는 길보다 험난한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몇일 뒤, 담임선생님께 육사시험에 응시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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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5)]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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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4)]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다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소위 SKY대학을 몇 명이나 합격시켰느냐가 고등학교의 수준을 말해주는 척도였던 시대 풍조에 젖은 분위기에서 필자는 고교 3학년 어느 날에 인생을 결정짓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날의 경험은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의 느낌과 열정은 바로 직업으로서의 군인에 대한 글을 쓰고자 했던 원동력이 되었다. 계속 집필하고 있는 필자의 ‘직업군인 사용설명서’가 청소년과 청년들, 나아가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중·장년층에게도 꿈을 주기를 소망한다. 육·해·공군사관학교에서는 매년 생도들을 출신고등학교에 보내 오리엔테이션(설명회)를 가짐으로써 우수한 재원들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필자의 인생과 운명을 결정지은 날, 육사에 갓 입교한 생도 1학년 조정 선배(육사35기)가 학교강당을 빌려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손에 끌려 강당 한 귀퉁이에 앉아 선배의 열띤 설명을 들었었다. 눈동자가 보일 듯 말듯 눌러 쓴 사관생도 모자 밑의 생도 얼굴에서는 힘차고 차분하게 터져나오는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는 입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가슴에 꽉 꽂히는 말이 들렸다. “사관생도 신조...하나, 나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였다. 후배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설명을 끝내고 잠시 쉬고 있는 그 선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군인 그것도 육군사관학교 생도 하면 좀 더 근육질에 우락부락하고 키도 크며, 만능 스포츠맨 같은 전투적인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선배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선배님, 저같은 사람도 사관학교에 갈 수 있어요?” 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자 고교선배인 조정 생도는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며 못마땅한 듯 툭 말을 던졌다. “자네는 공부 좀 하나?”(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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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4)]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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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3)]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다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21년도 어김없이 11월18일에 대학입시 수능시험이 치루어졌다. 수시로 대학입학이 확정되는 것도 수능점수가 결정적이다. 아무리 내신 성적이 좋아도 수능점수가 나쁘면 대학입학은 어려워진다. 필자는 말도 많은 '58년 개띠'로 격동의 세월 현장에 항상 있었다. 1958년에 출생한 개띠부터 전국 최초로 중학교 입시도 시험에서 추첨제로 바뀌었고, 고등학교 입시도 소위 뺑뺑이 추천제로 바뀌었다. 오늘날 대학수학능력평가처럼 그때에도 대학입시 예비고사(연합고사)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장에서는 학생들이 응시할 대학을 선정할 때 전공학과보다 대학교 브랜드를 우선한다. 당시 학생들의 적성과 희망직업에 대한 고려는 고등학교 입시를 담당한 선생님들에게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국의 많은 고등학교 중에서 소위 SKY대학을 몇 명이나 합격시켰느냐가 고등학교의 수준을 말해주는 척도였기 때문이다. 명문대학이라면 비인기 학과 또는 농업·예능계열을 가리지 않았다. 조금만 가능성이 있으면 학교에서 권했다. 지원학과 선택에 있어 특성은 그냥 개인의 참고사항일 뿐이었다. 특히 미술과 음악, 체육 분야에 재주가 있고성적이 조금 높은 학생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당해 연도에 서울대, 연대, 고대 등에 한명이라도 더 합격시키는 것이 고등학교 선생님, 학생, 그리고 부모들의 목표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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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3)]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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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2)] 내리 사랑을 실천하는 멋있는 선배들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금과는 달리 당시 수방사에는 경호실 통제를 받는 30, 33경비단과 55경비대대가 있었다. 작전과에서 선임 장교로 근무했던 김홍식 소령(육사34기)은 33경비단 작전과장으로 차출되어 선임장교 임무를 이윤배 소령(육사35기)에게 인계하고 떠났다. 하지만 그는 비록 33경비단에서 근무하고 있어도 작전과 선배로서 후배들을 배려하는 마음은 남달랐다. 사령부 작전분야 소집회의를 들어오더라도 항상 몇 시간 일찍 들어와 작전과를 들려 후배들을 격려했다. 특히 전입온지 얼마되지 않는 필자에게는 각별하게 작전과의 과중한 업무 수행의 노고를 위로하며 힘을 내라고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그는 필자가 1학년이었던 생도시절에 4학년 지휘관 생도로 임무를 수행하며 소름이 끼칠 정도의 까랑까랑한 쇠소리 구령 통제로도 후배들에게 유명했었다. 게다가 매월 1회씩은 별도로 시간을 마련하여 필동 00 중국집에 작전과 요원 모두를 불러서 점심을 제공했다. 돌이켜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재임 기간 동안 한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통이다. 작전과 선배이기도 했지만 수방사 예하부대의 작전과장으로 상급부대 작전 계통 실무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본인의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매월 정기 점심 모임에서는 본인이 작전과에서 근무시에 쌓았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해주었고 업무시에 야기되는 애로점을 타개할 방안도 제공해 주었다. 그해 연말이 되자 고맙고 존경스럽던 김홍식 소령도 중령으로 진급하여 전방 부대로 전출가서 대대장 근무를 시작했다. 물론 그도 임형빈 선배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현명함과 적극적인 포용성을 지니며 내리사랑을 보여준 선배로 후배 장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또한 김홍식 중령 역시 고군분투(孤軍奮鬪)해야하는 허허벌판의 최전방 새로운 임지에서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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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2)] 내리 사랑을 실천하는 멋있는 선배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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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1)] 내리 사랑을 실천하는 멋있는 선배들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짜장면, 군만두 및 탕수육과 함께 작전과 근무시의 에피소드를 서로 나누며 웃음꽃이 활짝 피어 그동안의 불철주야 업무에 찌들리며 쌓였던 스트레스를 날려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대대장 근무중에 눈에 띄는 성과로 상급자들로부터 엄청난 칭찬을 듣고 있다는 성공담은 작전과 소속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작전과 요원들은 당연한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왜냐면 그가 수방사 근무시에 필력이 뛰어난 것은 물론 얼마나 까다롭고 업무에 철저했는지 작전과 뿐만 아니라 타부서의 후배들도 그를 만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심을 사주며 격려했던 그는 너무도 다정한 선배였다. 또한 부대에서 곧 본인이 책임지고 준비해야할 중요한 시범이 있고 차트를 작성해야 하는데 차트 담당 군무원에게 강원도 격오지까지 올 수 없는지를 부탁했다. 작전과 선임이었던 이윤배 소령(육사35기)는 당면한 주요 사안이 없기 때문에 문제 없다며 과장에게 보고해서 차트 군무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곳에도 차트를 만드는 요원이 있을 것이나 수방사에서 청와대 보고서를 준비하는 군무원이 지원되면 야전부대와는 수준이 다른 차트가 제작되어 시범 결과는 당연하게 성공할 것이 명확해 보였다. 그는 생각의 차원이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원거리를 이동하는 수고는 있겠지만 맡은 바 임무를 최고 수준으로 달성하려는 의지는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주었다. “현명한 사람은 주머니 속 송곳과 같아 실력이 절로 드러나기 마련이다”라는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의미처럼 그는 최전방 격오지에 있어도 주변 사람들이 감탄하게 만드는 뛰어난 적극성과 현명함을 지니며 내리사랑을 보여준 선배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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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1)] 내리 사랑을 실천하는 멋있는 선배들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