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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9)] 유사시 싸워 이기는 전투준비는 진지공사부터 / 무성의한 진지 구축은 단호하게 '불합격'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성묘는 추석 같은 명절이나 한식에 조상의 묘를 찾아 손질하고 살피는 일이다. 조선 후기까지 4대 명절에 묘제를 지내는 풍속이 계속되었다. 한식인 음력 3월에는 개사초(改莎草)라고하여 겨울부터 봄 사이에 생긴 구덩이를 비롯하여 조상의 묘에 생긴 손상을 손질하여 바로잡는다. 이때 부족한 떼(잔디)를 다시 입혀준다.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한식 이후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풀과 작은 나무 등을 베거나 깎아주어 겨울을 잘 날 수 있도록 한다. ■ 성묘처럼 삶과 죽음의 교차로 되는 진지공사, 일종의 돈내기식 방식으로 경쟁 붙여 싸워 이기는 전투 준비는 한식이나 추석 성묘(省墓)처럼 봄가을에 진지공사부터 시작된다. 진지는 어떻게 준비하는가에 따라 유사시 삶과 죽음의 교차로가 되어 그곳이 나의 묘자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지공사는 성묘와 같다. 춘계에는 겨울과 봄 사이에 생긴 구덩이를 메우고 무너진 떼(잔디)를 다시 입혀주고, 추계에는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풀과 작은 나무 등을 베거나 깎아주고 동계작전 준비도 같이 한다. 유사시 북한이 보유한 1만5000여문의 방사포 및 야포가 불을 뿜으면서 전쟁이 시작되면 우리 군은 준비된 진지에서 초전 생존성도 보장받으며 남침해오는 적군을 격멸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부대는 약 3~4주 동안 거점에서 야영하면서 진지공사를 한다. 그래서 진지공사는 1년 중 중요한 업무였고, 통상 연말 성과분석 회의시 부대표창에도 진지공사우수부대를 포함하여 선정한다. 매년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상급부대는 당시 적상황을 분석하여 진지공사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하달하고 야전부대는 그 지침에 따라 우선적으로 진지공사를 한다. 그때 강조한 공사지침은 점진적으로 진지를 전환하며 전투를 할 수 있는 오리발식 진지 구축과 야간 전투를 위한 화목단으로 조명목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상급지침과 노후된 상태의 진지를 보강하는 것만으로는 배가 고팠다. 상단의 사진과 같이 미비된 진지도 정비하면서 과거 독도 수비대가 일본의 점유 시도를 거부할 때 사용했던 기만용 위장포처럼 기만 진지도 구축하기로 했다. 당시 중대 진지의 총길이는 약 2~3km로 80년대 초 삼청교육대 인원들이 동원되어 나무를 잘라 이어 진지를 만들어 비교적 견고한 상태였으나 일부 지역이 무너지고 나무가 썩어서 기존 진지를 보수하는 공사만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했다. 부족한 시간과 인원 속에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은 ‘돈내기(할당받은 일을 끝내면 그 일에 대해 무조건 일당을 지급하거나 마친다는 뜻의 경상도식 표현)’ 방법 뿐이었다. 또한 소대내에서도 떼(잔디) 운반조, 진지 구축조 등으로 조편성을 하여 노동 집약적으로 공사하도록 코치를 했다. 주차별로 소대별 목표를 정하고 먼저 자기 소대진지 공사를 하면서 화목단 야간 조명목과 위장 진지에 필요한 나무와 돌들을 채집하도록 했다. 그날 해당 소대가 목표를 달성하면 필자가 상태를 확인하여 합격여부를 판명후 휴식을 보장하는 돈내기식 방법을 적용했다. 산 능선에 구축된 진지에서 호가 너무 깊으면 앞쪽 하단에서 올라오는 적들을 관측할 수 없다. 엄폐와 관측이 가능한 깊이도 중요하지만 진지 앞의 사대 방향도 자신의 몸을 보호 받으면서도 사격이 가능하도록 위치를 잘 선정하는 것도 착안했다. 또한 진지 전방에 설치된 철조망과 기관총 사격방향이 연계된 사계청소와 크레모아 설치대도 적방향에 맞게 구축되도록 확인했다. 돈내기식 방법으로 시간에 쫒기어 생각없이 구축된 진지는 불합격 시키고 다시 공사를 시켰으며, 당일 공사량을 완벽히 끝낸 소대는 소대장 통제하에 쉴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하자 점차 경쟁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자 피로와 권태감에 대원들은 지치고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필자에게는 88오토바이가 있었다. 이동시 소리가 거의 없어 기습적으로 중대장이 불시에 공사 현장에 나타나 독려를 했다. 훗날 중대장의 전령이 하소연 했는데 “현장 지도시 방심해 기습을 당했던 소대장이 중대장 이동을 사전에 알려주지 않아 질책을 했다”고 하여 미소도 지었다. 소대별 담당진지 공사가 끝나자 사전 준비한 나무와 돌들로 진지 전방에 적들이 은거하기 용이한 장소에 조명목도 설치하고 적방향에서 쉽게 관측되는 도로 교차로에 기만용 위장전차도 만들었다. 한편 추계진지 공사시에는 동계 결빙을 고려한 사전 지뢰공 설치(지뢰를 설치할 장소에 땅을 미리 파고 짚과 병으로 메우는 작업)와 동상을 대비한 깔판 그리고 풀이 마르면 노출되는 총안구에 나뭇가지 등으로 위장을 한다. 또한 동계 혹한시 숙영이 가능한 분침호를 구축하고 도로 급경사에 적사장을 설치하는 작업 등을 추가로 준비한다. ■ 사단장의 격려방식, “진짜로 앞에 오는 적을 모두 격멸할 수 있겠나..?” 공사가 어느덧 종반에 접어들자 사단장이 현장 지도를 나왔다. 연대에서는 전방 부대도 있는데 예비 부대인 필자의 중대로 사단장의 현장 지도를 유도했다. 사단장 민찬기 장군(육사16기)은 중대 OP(관측소)인 A고개 헬기장으로 도착했다. 중대 진지였지만 연대장과 대대장이 사단장을 영접했고 작업복 차림의 필자는 진지공사 현황을 설명했다. 마침 그 곳은 필자가 소대장 시절에도 담당했던 지역으로 진지공사를 수차 했던 장소였다. 전방 훼바(FEBA) 지역을 통과한 적들이 책임지역까지 접근하는 정보판단을 먼저 보고하고 그 양상에 따라 오리발식 진지 첨단에서 점진적으로 주 진지까지 전환하며 적전차와 보병을 격멸하기 위한 진지와 조명목 구축 등을 자신있게 설명했다. 추가로 기존 진지공사시 착안했던 사항들과 적 기만을 위한 위장진지 구축까지 일사천리로 설명을 마치자, 사단장은 주변 진지공사 현장을 둘러보고는 “이렇게 준비하면 진짜로 앞에 오는 적을 모두 격멸할 수 있겠나..?”라며 격려가 담긴 질문과 미소를 남기고 복귀했다. 상급 지휘관의 지도 방문이 만족스럽게 끝나자 배석했던 연대장은 격려와 함께 앞으로 군생활을 위한 차후 보직까지 조언을 해주었고, 대대장(소장 양치규 육사29기)도 자신있게 설명한 필자에게 “야, 너는 따발총이다..ㅋㅋ”하며 기분 좋은 농담을 건넸다. 내 묘자리를 설치하는 마음으로 임한 진지공사로 유사시 초전 생존성도 보장받으며 공격해오는 적 전차 등 북한군들을 격멸할 수 있는 전투준비가 완료되어 자신감을 얻었다. 또한 사단장 등 상급지휘관들에게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선승구전(先勝求戰)을 확신시켜주는 자리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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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1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8)] 선승구전(先勝求戰),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 전쟁을 해야
    [시큐리트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춘추시대에 진(晉)나라의 왕 도공(悼公)에게는 사마위강(司馬魏絳)이라는 유능한 신하가 있었다. 사마위강은 "편안할 때에 위기를 생각하십시오(居安思危). 그러면 대비를 하게 되며(思則有備), 대비태세가 되어 있으면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有備則無患)"라고 왕인 도공에게 건의하여 강한 나라로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서경(書經)’과 ‘좌씨전(左氏傳)’을 통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명언으로 회자된다. 또한 손자병법 ‘군형(軍形)’편의 ‘선승이후구전(先勝而後求戰)은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에 전쟁을 한다”는 의미이다. ■ 편안할 때 위기 생각하고(居安思危). 대비태세 되어 있으면 근심 사라진다(有備則無患) 군대에서는 모든 것이 경쟁이다. 항상 승패나 성공 및 실패가 붙어 다닌다. 특히 쌍방 훈련에서는 대부분 판결이 난다. 따라서 승리하기 위해 각 부대는 자체 훈련도 강화하고 장비 손질 정비에도 최선을 다하여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당시 필자의 연대장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교육훈련 중에 행군과 태권도를 매우 강조했다. 연대장 지침에 의해 매주 50km정도씩 주야행군을 계속했다. 그 결과 우리 중대 뿐만 아니라 전 연대원들의 행군 능력은 어느 타부대와 비교해도 월등히 우수했다. 그러나 강한 행군능력을 보유하는 대신 중대행정보급관의 고민과 애로는 반대로 늘어만 갔다. 많은 행군으로 병사들의 전투화(군화)가 빨리 닳아 구멍난 신발을 신고 행군하니 물도 들어오고 또 군화못도 튀어 나와 중대원들의 발은 상처투성이었다. 그래서 각 중대는 군화 정비공을 임명하여 군화의 바닥도 교체하고 헤져 구멍난 곳을 꿰매어 다시 신을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태권도 교육을 강조함에 따라 전 중대원을 유단자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하려면 보급되는 태권도복과 급수에 따른 색깔별의 띠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중대행정보급관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헌데 필자에게는 소위로 임관하여 한 개 연대에서 5년에 걸쳐 오랫동안 근무했다는 잇점이 있었다. 연대에 근무하는 부사관 및 장교들을 거의 알고 있었다. 특히 연대 군수분야를 담당한 간부들과는 각별히 지낸 탓에 연대 보급창고를 수시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원래 정상적인 보급절차는 대대에서 각 중대를 종합하여 연대에 보고하면 연대에서 각 대대를 고려하여 분배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당시에 열악한 환경의 중대원들을 위해서는 필자는 이기적일 수 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는 안면을 이용하여 절차 준수를 잠깐 뒤로하고 연대와 직접 상대하였다. 연대창고에 남아있거나 새롭게 보급되는 태권도복이나 군화를 우리 중대가 우선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물론 보급품 수불에 따른 문서 처리는 나중에 정리하였다. 그리고 중대원들의 사격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사격용 표적(E, F)이 필요했다. 사격연습을 많이 하면 표적에 총탄 구멍이 많아져 다시 종이를 잘라 표적구멍을 메우고 사격을 할 정도로 표적이 부족했다. 이 또한 사단에 오랫동안 근무했다는 잇점을 이용했다. 연대 교보재 창고에 표적이 없으면 대대에 5분의 4톤차를 신청하여 사단본부로 갔다. 마침 사단 교육장교가 잘 알고 있는 후배라 사단 교보재 창고에 들려 사격용 표적(E, F)과 목재, 시멘트 등을 확보하여 대대에 일부 제공하고 중대에서 활용했다. 그래도 중대원들에게 넉넉한 보급품을 제공하기에는 부족했다. 마침 육사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생도들이 사용하고 남은 태권도복도 얻어서 분배도 했다. 고교 축구부에 연락해서 선수들이 사용하다 낡아서 바꿔 신은 축구화도 협조하여 가져와 나눠주니 대원들은 훨훨 날으며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에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필요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구해서 중대원들에게 제공한 정성은 곧 상급부대 검열, 측정 및 평가에서 진가가 발휘되었다. 사단 전투지휘검열시 사격 측정은 중대가 대표선수가 되었고, 각종 행군에서도 보수 정비한 군화를 신고 자신감 있게 임할 수 있었다. 태권도 유단자는 제일 많았고, 체육대회에서도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중대원들이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었다. 평시에 모든 것을 앉아서 기다리면 늦어진다. 쫓아다니면서 중대원들의 보급품과 교보재들이 부족하지 않도록 확보했고, 그것이 안될 때는 군화 정비소 등을 만들어 보수 및 정비를 했다. 즉 ‘유비무환(有備無患)’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준비하여 훈련하면서 대비하고 있으니 각종 검열, 평가 및 측정에서 나가 싸우라고 했다. 손자가 강조한 ‘선승구전(先勝求戰)’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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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7)]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에서의 선택과 집중을 강조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손자병법 ‘허실(虛實)’편의 ‘무소불비 무소불과 (無所不備 無所不寡)’는 “준비가 부족한 곳이 하나도 없게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라고 풀이된다. 즉 “전부를 다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은 전부가 부실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 ‘피실격허 (避實擊虛)’는 “적의 강한 곳을 피하여 약한 곳을 공격한다”라는 뜻으로 선택과 집중, 집중과 절약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시 피아가 치열하게 전투를 할 때 전략 및 전술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허나 평시에는 사단 책임지역내 심심산골에 인적이 드문 지역이 산재되어 있어 그곳에서 침투한 간첩들이 은거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취약지로 분류해 관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집중과 절약을 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의미와 상충되는 전 지역을 커버하는 취약지 관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취약지역에 소대 또는 중대 단위로 상주하면서 주변 수색정찰도 하고 매복 및 전술훈련을 하면서 병사들의 훈련 수준도 배양하고 침투한 간첩 및 불순세력의 은거도 거부하는 ‘취약지 상주훈련’을 시행했다. 통상 ‘취약지 상주훈련’을 시행할 때에는 부대의 지휘권을 벗어난 타지역에서 해당 소·중대장의 독단적 판단에 의한 행동이 요구되어 반드시 차상급 지휘관에게 훈련계획을 사전에 보고했다. 필자도 사전 토의와 현장 확인을 통해 1주일간의 취약지 훈련계획을 준비하여 보고하자 연대장은 해당 지역이 격오지로 도로도 불량하여 이동 및 소통에 제한이 많기 때문에 적 접촉시 작전조치와 폭우 피해 및 환자 발생 등 우발상황에 철저히 대비하며 병력관리를 잘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 장거리 행군에 따른 허기 심해, 설익은 밥도 꿀맛 훈련출발 당일 먼저 선발대를 보냈다. 취사장 설치와 통신선 개설을 위해 중대 행정보급관(인사계)가 취사병, 통신병들을 대동하여 4분의 5톤 통신차를 타고 화천군 백적산(883.5m) 북방 구운리 만산동 계곡으로 출발했다. 군장검사를 마친 중대원들은 취약지역인 만산동 계곡까지 30km행군을 시작했다. 다행히 이규환 연대장님이 평소 행군과 태권도를 강조하여 매주 행군 훈련을 했던 덕분에 병사들은 행군에 익숙해 있었다. 필자는 전방 GOP연대 소속이었으나 이번 ‘취약지 상주훈련’ 장소는 사단 후방 인접사단과 근접한 지역으로 최전방 부대가 사단 책임지역의 최후방으로 이동하여 훈련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행군이 시작되었다. 중대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관불령을 넘어 신월동과 삼거리라고 불리는 봉오리를 통과해 다시 덕고개를 힘차게 넘었다. 필자가 근무한 지역은 첩첩산중(疊疊山中)이라는 단어가 꼭 맞는 산악지역이라 조금만 이동해도 길옆에 절벽과 벼랑 등 아찔하게 만드는 고개들이 산재해 있다. 행군 간에는 통상 50분 걷고 10분 휴식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아찔한 벼랑 옆에서는 휴식을 하는 것이 위험하여 그나마 비교적 평탄한 곳을 정해야 했다. 쉬고 있다가 자칫 계곡 및 벼랑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대 행정보급관과 취사병들이 선발대로 투입된 탓에 점심은 주먹밥으로 대체했다. 행군 간에는 배가 든든해야 잘 걸을 수 있는데 허기가 지면 낙오할 수도 있어 건빵을 추가로 휴대했지만 20대 청년들의 허기를 채울 수는 없었다. 오후 늦게 만산동 골짜기에 도착했다. 군장을 풀고 바로 주변 능선에 소대별로 개인 텐트를 설치하며 숙영준비를 했다. 그때 먼저 도착해 준비한 저녁식사가 분배되었다. 야전에서의 취사에 숙달되지 않은 취사병들이라 설익은 밥이었지만 꿀맛이었다. 미식별 천연동굴서 은거흔적 발견, 불온전단 회수하고 독립가옥 신원확인 박영일 중령의 노마지지(老馬之智), 정확한 취약점을 찾아내 “마음은 언제나 태양..!”, 의기에 차 정열을 불태웠던 시절 중대 상황실 텐트에 당직 소대장을 근무시키고 야간 야외점호를 한 뒤 취침에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조 점호 후에 계획된 주변 취약지역 수색정찰을 시작했다. 모든 일에는 분명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소대장들에게 경쟁을 붙였다. 각자의 수색 책임지역에서 미식별된 은거가능한 천연동굴이나 은거 흔적을 찾으라고 했으며 북에서 뿌려진 불온전단을 가능한 많이 회수하고, 심신 산골에 홀로 있는 독립가옥은 필히 방문해서 신원을 확인하도록 강조했다. 각 소대를 수색정찰에 투입시키고 숙영지 텐트 상태를 재점검하고 있는데 멀리서 짚차 한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사단 작전참모 박영일 중령(육사25기, 소장 예편)이었다. 필자는 취약지 상주훈련 계획과 현재 각 소대가 수색정찰 중임을 설명하면서 숙영지를 안내했다. 그런데 사단 작전참모는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훈련 계획은 잘 수립했으나 취사장 위치가 잘못 되었다며(상단의 만산동계곡 사진을 참고로) “숙영지와 분리하여 계곡 건너에 취사장을 설치하면 만약 집중 호우 발생시에 계곡물이 불어나 식사추진 및 철수시 위험할 수 있으니 조정하라”는 것이었다. 각 텐트는 능선쪽으로 올려 있어 안전하지만 취사를 위해 급수가 용이한 물이 흐르는 계곡 건너에 설치된 취사장의 안전 취약점을 지적하며 추가로 사단에서 만산동으로 이동하는 도로가 부실하니 도로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지시를 하고는 어깨를 두드리며 현장을 떠났다. 작전참모는 그해 가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사단의 참모장을 거친 뒤 훗날 인접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필자보다 선배로서 지내온 많은 군생활 경험이 정확한 취약점을 찾아냈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사자성어처럼 선배는 역시 선배였다. 필자는 유선으로 대대장에게 작전참모의 방문과 지적 및 추가 지시사항을 보고했고 대대장은 즉시 시정 후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오후가 되자 소대별로 복귀를 했다. 역시 결과 위주의 훈련을 강조한 탓에 수개의 은거 가능한 천연동굴을 찾아냈고, 많은 불온전단들을 수거하는 성과도 올렸다. 저녁 식사 준비시간인 자유시간에는 아직 유단증을 못 받은 중대원들을 모아 태권도 교육도 병행했다. 주둔지가 아닌 야외라는 것이 오히려 저조자들에게 개별지도를 할 수 있게 되어 차후 심사를 대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날이 저물자 야간 분·소대 전술훈련도 했다. 다음날부터는 작전참모 지시대로 사단본부까지 도로 보수도 병행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타중대와 함께 대대장의 통제를 받는 것을 벗어나 중대 단독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 상급 및 인접 부대의 눈치를 안보게 되어 더 효과적인 훈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훈련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점호 후 전 중대원이 텐트로 들어가 취침을 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는데 당직 소대장이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해서 상황실 텐트로 나갔다. 소대장들이 모여 있었다. 책상에는 약간의 더덕이 놓여 있었고 잠시 후 행보관이 막걸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잠시 망설였으나 모처럼의 자리라 합석을 하였다. 소대별 수색활동시 전단과 함께 수거한 자연산 더덕 안주에 들이키는 막걸리가 너무도 좋았다. 더불어 그동안 함께 근무하면서 느꼈던 보람과 애로점들을 서로 나누며 한마음으로 단결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칼럼을 쓰는 지금, 중대장시절 그때 고락을 함께했던 소대장 김태정, 우광호, 변상훈, 이동호들의 의기에 찼던 그때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마음은 언제나 태양..!”구호 아래 한마음이 되어 항상 신나고 즐겁게 정열을 불태웠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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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6)] 정호용 육군참모총장 은 '창끝 전투력'의 지휘자인 분대장 정예화에 주력
    전술토의, 지식/지휘능력을 배양 등 간부교육 강화로 창군이래 가장 높은 전투력 보유 [시큐리트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필자가 중대장 근무시 육군참모총장은 정호용 대장(육사11기)이었다. 정총장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창끝 전투력 강화’를 강조했다. 창끝 전투력의 핵심인 소대장과 분대장들의 전투의지가 상실되고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아무리 좋은 장비와 많은 병력이 있더라도 그 부대는 일거에 와해된다. 좋은 사례가 있다. 6.25남침전쟁중인 ‘51년 4월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은 중공군의 포위전술에 겁을 먹고 창끝 부대 분대장, 소대장들의 전선 이탈이 확산되어 결국 치욕스런 패배를 맛보았다. 따라서 정총장은 창끝 전투력의 지휘자인 분대장을 정예화시키는데 주력했다. 신병교육대에서 똑똑하고 체력이 좋은 신병에게 꼬리표를 붙여 자대 배치했다. 그 신병을 받은 중대장은 면밀히 관찰하여 골목대장감이라고 판단되면 조기 진급을 시킨다. 그가 상병이 되면 사단 분대장교육대에 입소시켜 교육 후 하사 계급장을 달아 분대장으로 1년~6개월을 운용하는 제도이다. 지금은 지상군사령부가 용인에 창설되어 단일 지휘체제이나 당시에는 전방을 1,3군사령부가 동서로 나누어 지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험한 산악지역이 많은 동부의 1군 사령부는 신교리와 과학화 된 장비가 서부의 3군 보다는 다소 늦게 전파되는 실정이었다. 필자는 ‘분대장 정예화’지시를 완수하기 위해 골목대장 분대장 시스템을 먼저 운용하는 3군 예하인 인접 8사단으로 자료수집 및 견학을 갔다. 그쪽에서 중대장근무를 하는 동기생을 만나 자료를 수집해서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운용할 준비를 했다. 역시 창조적 일을 할 때에는 벤치마킹 후 좀더 새로운 것을 가미해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8사단 시스템을 참고로 먼저 현재원 중에 후보로 가능한 병사들을 선발해 관리를 시작했고 간단한 운용판을 만들어 각 소대 현재 분대장들의 전역 시기를 고려해 사전에 후보들을 조기 진급시켜 분대장교육대로 보내는 현황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총장이 강조한 시스템은 성공적이었다. 골목대장형 분대장들은 체력, 훈련, 지휘 능력에서 탁월했고 심지어 소대장 보다도 더 많이 알고 숙달되어 병사들 교육도 일부 소대장들 보다 더 잘했다. 따라서 골목대장형 분대장들은 각종 훈련, 검열 및 평가시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대대별로 간부교육이 강화되어 소대장과 참모들은 대대 교육상황실에 모여 전술토의 및 작전을 수행하는 지식과 지휘 능력을 배양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이러한 시스템의 육군은 창군이래 가장 수준 높은 전투력을 보유한 시기였다. 하지만 역작용은 어디에나 있는 법, 기존의 고참 병사 보다도 먼저 진급하고 교육 후 하사로 복귀한 분대장들은 탁월했지만 군대의 고참 서열의 벽이 문제였다. 분대장 보다도 현재 자기 분대원인 병장이 군생활을 더 많이 했고 먼저 전역했기에 고참 병장의 견제가 분대 지휘의 걸림돌이 되어 항상 갈등이 야기되었다. 첨단 과학 시스템과 태고의 원시적 활동이 병행되어야 전장에서 승리 효과적 분대장관리와 태권도 유단자화로 전반기 교육훈련 우수중대표창 받아 각고의 노력 끝에 받은 태권도 유단증은 제대병에게 주는 중대장의 전역 선물 간부교육이 강화되고 골목대장형 분대장들이 정예화 되자 창끝 전투력은 강해졌고 각개병사들도 개인훈련 만 잘하면 군생활에 걱정이 없었다. 헌데 헛고생하는 교육훈련이 일부 발견되었다. 야간 전투를 위해 안면 위장을 하고 정숙보행 연습을 했으나 첨단 과학화된 야간 투시경과 열상 장비가 개발되어 운용하자 그대로 노출되어 그동안의 야간훈련이 무색하게 되었다. 하물며 중대장 당시에 생각도 못했던 드론이 개발되어 적지역의 정보를 쉽게 수집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그래도 전투가 지속되어 악조건이 되면 가장 원시적인 상황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훈련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최악의 육박전에 대비한 체력과 격투기술이 반드시 필요했다. 게다가 기존 훈련으로는 필자가 무엇인가가 부족하고 배가 고픈 느낌이 들었다. 중대원들이 군생활 동안 무언가 얻어 가야하는 데,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중대에 골목대장형 분대장 중에 학창시절 태권도 선수가 있었다. 그를 활용하여 전 중대원들에게 육박전에 대비한 체력과 격투기술도 숙달하고, 제대할 때 태권도 유단증을 선물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전중대원들은 시간만 있으면 태권도 연습을 강화하도록 강요했다. 심지어 비유단자는 훈련 및 작업간 휴식 시간도 쉬지 못하고 발차기 품세 연습을 하도록 독려했다. 개인적 결함이 있는 병사들은 해당 분대장이 개인 지도를 했고 분대장 선발시에도 유단자를 우선했다. 태양분대 선발로 분대원 전원이 유단자가 될 때에는 포상휴가 등 혜택의 우선권을 부여했다. 결국 중대는 연대에서 가장 유단자가 많은 중대로 선정되어 전반기 태권도 우수중대 표창을 받았다. 또한 분대장 관리도 우수로 평가를 받아 전반기 교육훈련 우수표창까지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람 있었던 것은 제대병들이 그렇게 귀찮아 했던 태권도 훈련이었지만 제대 신고할 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태권도 유단증’이었고 그것은 그동안 필자의 피로를 날려버렸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12-0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5) 유격훈련간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과 신부된 정훈장교…
    간부들의 일년 365일 중 퇴근 날은 약 150일, 힘들고 어려운 근무 여건…심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신감을 배양하는 유격훈련의 의미…잔인한 4월에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은 결국 심장마비 훈련병을 데리고 떠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GOP연대였지만 필자가 소속된 예비대대는 후방의 훼바(FEBA)부대와 동일하게 교육훈련 및 근무 일정이 진행된다. 대략 분기별로 3~4주 종합훈련, 독단훈련, 반기별로 4주 진지공사, 연중 통상 1회 정도인 중대 및 대대전술시험, 공지합동훈련, 연대전투단훈련, 전투지휘검열, 유격 및 특공훈련 등의 야외 활동과 당직근무를 포함하면 중대장급 이하의 초급장교가 일년 365일 중 퇴근할 수 있는 날은 약 150일도 안된다. 이런 일상은 간부들이 퇴근도 못하는GOP투입 부대와 별반 차이 없는 마찬가지로 부대원들과 24시간 생활하여 사명감 넘치는 초급장교들의 힘들고 어려운 근무 여건이다. 부대교대 후 꽃피는 4월이되자 어김없이 중대는 첫 3주 종합전술훈련을 하게 됐다. 개인훈련은 평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대전투부터 시작했다. 분대장들의 지휘 능력과 분대원들의 전투기술을 숙달한 뒤 다시 소대와 중대전술훈련으로 종합전술훈련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주에는 5개월전에 중대장 근무를 시작했던 대성산 대대에 있는 유격장으로 이동했다. 통상 전투 및 전술훈련시 중화기 중대는 소대별로 각 소총중대를 직접 지원한다. 그 개념으로 유격조도 12중대의 1개 소대가 필자의 중대에 배속되어 편성됐다. 1일차는 체력단련훈련으로 PT체조는 15개 동작(높이뛰기-굽혀닿기-쪼그려 뻐치기 -엉덩이 올리기-구부리기-발 벌려 뛰기-옆구리운동-온몸 비틀기-뒤로 젖히기-쪼그려 돌기-팔 들어 다리닿기-몸통 비틀기-쪼그려 뛰기-팔동작 몸통 받쳐 -노젖기)으로 이루어져 반복하여 숙달하며 피튀기는 단련을 했다. 2일차부터는 가장 먼저 첫날 숙달한 PT훈련으로 뭉친 근육과 몸을 푼 후, 기초-복합-산악 장애물코스순으로 각 중대별로 조편성하어 훈련에 임했다. 그런데 4일차 되던 날 산악 장애물코스 중 ‘수직드롭코스’가 있었다. 인간이 공포심을 가장 느끼게 한다는 약 10m 높이를 사다리 타고 올라가 위의 좌상단의 사진처럼 폭이 약 4m에 깊이 3m의 물웅덩이로 뛰어내려 대담성과 자신감을 키우는 훈련이었다. 훈련전에 웅덩이의 물을 만져보니 4월의 봄 날씨 이었지만 대성산 북향의 물을 받은 탓으로 몹시 차가웠다. 마침 현장에 연대에서 감독관도 나와 있었고 필자는 고민을 하다가 차갑다는 이유로 코스를 생략하면 심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신감을 배양하는 유격훈련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좀더 강한 PT로 체온을 올린 후 입수하기로 판단했다. 그래도 왠지 걱정이 됐다. 그때 ‘수직드롭코스’코스를 담당한 선임하사관이 몸소 시범을 보이며 뛰어 내려 입수했고 이어서 소대장도 뒤이어 뛰어 내렸다. 그래도 중대원들의 긴장하는 눈초리가 남아있어 필자도 사다리로 올라가 뛰어내리며 시범을 보였는데 역시 수온이 몹시 차가웠다. 중대장까지 시범을 보이자 중대원들은 한 명씩 훈련에 임했다. 훈련이 끝나고 대기하던 중대원들은 물 속에서 허부적대는 일부 요원들을 바라보면서 깔깔대고 웃기까지도 했었다. 필자 중대원들의 훈련이 모두 끝나고 배속된 12중대 지원소대의 차례가 되었다. 마지막 몇 명만 남아있어 그 코스훈련이 끝나가는 무렵 지원소대의 지공열 상병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하강 준비를 끝내고 교관의 ‘뛰어’ 구령소리에 멈짓 하다가 물로 뛰어내렸다. 지상병은 입수 후 바로 물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물 밖으로 나와야 하는 데 그는 다시 물 밑으로 들어갔다. 순간 선임하사 교관이 바로 물로 뛰어 들었으나 못 찾고 나오자 옆의 병사들이 그를 구하러 뛰어들었다. 필자는 폭이 약 4m에 깊이 3m의 물웅덩이지만 마구잡이로 뛰어들어서는 모두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모두 나오라고 하고 수영 잘하는 요원들을 4방면에서 입수하게 했고 곧 그를 건져 내왔다. 옆에서 대기하던 군의관은 바로 심폐소생술을 했다. 군의관은 구토물이 있는 지상병의 입가를 손으로 쓰윽 문질러 딱아내고 바로 입을 맞추어 인공호흡하고 이어 흉부 압박을 번갈아 반복해서 약 40분 정도 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하지만 잔인한 4월에 불쑥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은 결국 심장마비를 일으킨 지공열 상병을 데리고 떠났다. 전출을 앞두고 옆에서 함께했던 대대 정훈장교 김종오 중위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 했다. 순직자의 직속 상관인 12중대장 박성규 대위는 故 지공열 상병의 장례를 치루는 과정에서 부모들에게 엄청 시달렸다고 했다. 비록 필자 중대의 소속은 아니지만 필자의 눈앞에서 훈련중에 운명을 달리한 故 지공열 상병에 대한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평소에 군인답지 않게 소극적이고 무관심하게만 여겼던 군의관의 순간적인 응급조치를 보면서 프로는 프로이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최선을 다한 그의 노력에 감사했다. 하지만 의욕에 찼던 중대종합훈련은 그렇게 막을 내리며 엉망이 되었다. 연대의 감독관이 그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본 덕택에 상급부대에서는 먼저 시범을 보이는 등의 조치를 한 필자를 그 사고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으로 경고조치 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뚜렷한 사명감과 성직자 삶의 각오로 힘들고 어려운 초급장교 생활을 견디어 옆에서 축복과 기원 해주는 분들 때문에 공직에서 찾아오는 불청객들을 이겨내… 어느덧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명동 성당에서 의아하게도 신부님 복장을 하고 있는 김종오 정훈장교를 너무도 반갑게 우연히 만났다. 그는 정훈 장교로 의무 복무를 마치고 신학교로 들어가 교육과 수련을 받고 신부가 되어 예수성심전교수도회 소속으로 해외 봉사 사목을 하다가 귀국해서 성모 병원 등에서 병원 사목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 다시 중대장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엄하기도 했지만 병사들을 지극히 사랑하며 아꼈다. 그 당시 국회의원 부재자 투표시에도 못 마땅한 표정으로 관망했고, 그때 유격장에 불쑥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 사건시에도 옆에서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지금은 남태평양 오지(奧地)인 피지에서 피부색이 다른 착한 이들을 위해 사목 및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인생에는 많은 불청객들이 불쑥 불쑥 찾아온다. 필자가 37년의 군생활과 이후 3년간 준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배신, 직무수행에 대한 오해, 교통사고 등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만나도 이렇게 살아 남은 이유는 필자의 옆에서 축복과 기원을 해주는 좋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종오 신부는 뚜렷한 사명감과 성직자로서 살겠다는 각오로 힘들고 어려운 초급장교 생활을 견디어 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생각을 실천하여 지금은 보람차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덕분에 필자도 故 지공열 순직자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동안의 공직 생활에서도 불쑥 찾아오는 어떤 불청객들과 싸워 이길 수 있었다. 김종오 신부와 지금도 보이지는 않지만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보내주시는 분들 덕택에 지금의 내가 있어 단지 그들께 감사할 뿐이다. 또한 훈련 중 아깝게 순직한 故 지공열 상병의 영전에 다시 한번 더 명복을 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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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01-3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4)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 발견
    ‘생자필멸(生者必滅),거자필반(去者必返),회자정리(會者定離)’는 세상사의 진리 사단 구원투수로 칭찬받았지만 전출간 친구의 빈자리는 허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재자 투표가 끝나고 정상적인 부대운용으로 돌아오자 사단에서는 GOP교대 준비 지시가 하달되었고 연대는 GOP투입전 교육을 시작했다. 필자가 속한 대대는 예비로 지원임무가 하달되었고, 신원조회가 통과된 일부 간부 및 병사들은 GOP투입부대의 인원보충을 위해 전출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접 10중대장으로 근무하던 동기 고(故) 한황진 대위([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35) ‘호국보훈의 길에도 통하는 미스트롯을 키운 힘’ 참조)는 GOP투입 대대로 떠났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산 사람은 반드시 죽고), 거자필반(去者必返, 떠나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며),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정한 이치이다)라는 명언처럼 “모든 것이 무상함을 뜻한다”는 법화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부재자 투표로 늦어진 GOP투입준비 때문에 공식적인 환송회식도 못하고 그를 아쉽게 떠나 보내야 했다. 승리부대 전입동기로 2년전 GP장 시절부터 정도 많이 들었는데…, 적과 대치하는 GOP중대에서 건강하게 근무 잘하고 기회가 되면 침투하는 간첩을 잡아 영웅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가 떠난 지 일주일이 되자 다른 대대는 GOP투입 준비에 바쁘게 보내고 있었지만 필자가 속한 대대도 전투준비 및 부대관리에 대한 사단 감찰검열이 있어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도 새롭게 보강된 대대작전장교 지동수 소령(전 사단교육장교)이 치밀하고 깐깐하게 준비했고, 대대장의 명확한 지도가 있어 수감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찰참모가 검열결과 강평시 구원투수로 부임해 나름의 역할을 한 작전장교와 보직 해임된 중대에서 몸부림을 쳤던 필자를 칭찬해주어서 보람을 느꼈으나, 왠지 GOP투입부대로 전출 가버린 인접 중대장 동기생의 빈자리가 너무도 허전했다. ‘상호 현상태보존' 원칙을 안지킨 막사는 폐허 수준 문제병사 전입 많아 180명으로 늘어난 중대원 관리에 난감 드디어 GOP부대 교대가 이루어졌다. 중대는 대성산 전방에 위치해 유격장을 담당했던 부대에서 예비임무인 적근산 후사면의 좁고 깊은 골짜기 지역으로 이동했다. 부대교대는 많은 에피소드를 낳는다. 상급 부대에서는 부대교대 원칙인 ‘상호 현상태 보존 후 인원만 이동’을 강조했다. 이것은 노후 된 막사 생활을 위해 시설을 보강하고 소소하게 설치했던 편의시설과 부착물들을 그대로 남겨놓아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방지하자는 지침이었다. 그러나 교대전에 지휘관들은 사전 협조회의에서 이 원칙을 준수하기로 상호 약속하지만 부대원들은 새롭게 이전한 부대에서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모두 떼어갔다. 따라서 상호교대 후에 지휘관들은 교대전 좋은 관계에서 교대후에는 서로 불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시에도 부대 이동후 인수한 막사에 들어서니 거의 폐허 수준이었다. 이른 봄의 문턱에서 기온은 약간 올라 낮 양지녁에는 따사하지만 밤이 되면 전방 골짜기의 삭풍은 막사안에서도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중대원들은 1~2년 뒤에 또 이동할 막사이지만 내 집으로 생각하고 정리를 시작했다. 마치 신축 건물에 입주한 것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보강해야 했다. 전방의 봄은 오히려 겨울보다 더 춥다. 그래서 창문에 바람 막는 문풍지도 붙이고 당시 유일한 보온 수단이었던 페치카도 보수하는 등 분주하게 편의시설을 보강했다. 그러던 중 부대원이 하나 둘 씩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GOP투입은 하였지만 추후 신원조회가 불분명하거나 사고뭉치로 판단된 병사들이 GOP에 적응을 못하고 예비인 필자의 중대로 전입오기 때문이었다. 지난 사단의 감찰검열 이후 연대에서는 부적격이나 GOP근무에 회의를 품은 병사들까지 타 중대도 있는데 모두 필자의 중대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소대장과 선임하사관들은 전입 면담부터 이러한 문제사병 관리에 짜증을 내고 있었고, 연대에서 중대장인 필자를 믿고 맡기는 것도 좋지만 이런 전입자를 포함한 중대원이 180명까지 늘어나자 시설도 부족하고 신상 등의 부대관리에도 부담감이 늘어나 난감할 지경이었다. 폭우로 전방 GOP철책 150m가 전도되어 경계에 취약점 발생 GOP근무 '부적격 병사'가 맹활약해 공사기간 단축에 기여 부적격 병사는 '구르는 재주' 가진 굼벵이 어느덧 여름이 되어 폭우가 일주일 동안 쏟아지자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퇴근 후 관사에서 모처럼의 휴일을 즐기던 일요일 밤에 군용 전화벨이 힘차게 울렸다. 중대 막사는 관사에서 약 3분 거리로 인접해 있어 전화가 뜸했는데 그것도 밤에 걸려온 전화라 급박한 위급상황이 발생했는지 걱정이 되었다. “나 연대장인데, 9중대장 지금 쉬고 있지?”하며 연대장이 대대장도 아닌 중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동안의 폭우로 전방 GOP철책이 대규모로 전도되어 다음날 아침에 중대원들을 인솔하여 GOP 철책복구를 위해 투입하라는 지시였다. 필자는 연대장 통화가 끝나고 바로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대장도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소대장들을 비상소집 시키고 중대로 들어갔다. GOP 철책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원이었다. 중대원의 3분의 1이 새로이 전입 온 GOP 근무 부적격자로 실제 투입가능한 인원을 선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보안부대 담당관은 부적격자들을 모두 제외한 인원들만 투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어쩔 수 없이 투입지역에서 근무하다 전입 온 병사와 면담을 했다. 보안부대 담당관의 이야기처럼 그가 변심해서 월북이라도 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하지만 이 병사를 제외하고 투입할 때에는 그는 중대원들에게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도 그 병사는 자신을 꼭 데리고 가달라고 건의했다. 그 지형도 잘 알고 있으며 동기들도 많이 있어 이번 공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간청했다. 소대장들도 그 병사가 중대 전입 후 생활을 잘했다며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했다. 결국 “중대장이 직접 관리하면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면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보안부대 담당관을 강력히 설득하여 투입인원에 포함시켰다. 밤새 공사도구를 점검하여 부족분은 연대에 건의하고 GOP 지역에서는 3인조 행동을 하는 원칙준수를 위해 조편성도 마쳤다. 잠시 눈을 붙인 후 아침에 연대에서 지원 나온 트럭을 타고 출발했다. 공사지역에 도착에서 숙영준비부터 했다. 마침 그 지역은 필자가 DMZ 에서GP 장으로 근무했던 곳으로 작전시 늘 다니던 익숙한 지형이었다. 그곳은 위의 좌측 사진 같이 경사진 곳으로 GOP 철책 150미터 정도가 폭우에 쓸려 내려가 흔적도 없었고, GOP중대에서 경계병을 촘촘히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숙영지 편성 중에 공사용 철책들이 도착했다. 현장지도 나온 연대장은 “최대한 빨리 철책을 설치하는데, 2주내에 완료하라”고 강조했다. 아마도 전도된 GOP철책 지역으로 간첩이 침투하거나 변심한 인원들이 월북하기에 용이하다는 취약점이 있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 같다. 중대원을 2개 팀으로 편성해서 양쪽에서 동시에 시작하기로 했고 철책설치조, 시멘트비빔조, 운반조, 기타 지원조로 편성했다. 물론 GOP중대의 경계병 외에 일단 유사시를 대비하여 실탄을 휴대한 상태로 자체 경계조도 배치했다. 쏜 화살처럼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고 있었다. 소대장은 공사기간 단축을 위해 야간 작업을 건의했다. 보안부대 담당관이 "야간 작업은 병력관리에 특히 위험하다"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주간작업만 하는 것은 연대장의 조기 공사완료 지침을 해소하기에는 안일한 조치 같아 야간 작업을 감행했다. 곳곳에 횃불을 만들어 대낮같이 밝힌 상태에서 중대원들은 참으로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고 필자는 중대원들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처럼 GOP근무 부적격자로 낙인찍혀 중대에 전입왔던 그 병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근무했던 GOP 소대에서 근무용 간식인 라면과 빵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도구 등을 확보해 중대원들에게 나눠주며 그 누구보다도 동분서주 바쁘게 뛰어다녀 중대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처음에 연대장이 2주로 공사 기간을 한정했던 것 보다 4일을 단축시킨 10일 만에 완료되었다. “남아(男兒)는 자신을 믿고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말처럼 굼벵이(?)까지 포함된 중대원들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정확히 129m, 43칸의 철책설치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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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01-2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3) 정치적 중립 고민속에서 체험한 '기쁨', 겨울아이와 선거혁명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배워왔던 필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지시… 부대별로 민정당 지지도 확인해 해당 지휘관의 지휘능력 평가에 반영 민병돈 장군의 정치적 중립, 수년 후 반전되는 재평가 받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2014년 내부 고발자들이 모였던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를 만든 이지문씨는 1992년 백마부대에서 중위로 복무하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의 군대 내 부정 선거를 폭로했다. 당시 부재자투표 때 민주자유당 후보를 찍으라고 상관이 병사들에게 요구한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씨는 이후 군에서 징계를 받고 파면됐으나 소송을 제기해 파면은 취소됐고 중위로 전역했다. 하지만 군입대 전 삼성그룹에 채용되기로 한 일은 취소됐다. 1996년부터는 민주당 소속 서울시의원을 지냈고, 이후에는 공익제보자 모임, 호루라기재단 등에서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요즈음 군부대에서는 이지문 중위가 군생활을 할 때처럼 부정선거를 전혀 생각조차 못하며 철저하게 공정한 선거가 이뤄지고 있다. 몇 년 전 군장성 출신이 모 지역구 선거에 나와 당선했는데 지역별 선거결과를 분석하면서 부대 및 군 관사지역의 지지도가 오히려 낮았다며 안타까워한 것이 그 증거이기도 했다. 필자가 중대장을 시작한지 한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군부대는 동계가 되면 각 제대별로 간부교육을 한다. 1985년 1월 사단 간부교육 중에 교육받던 지휘관들에게 갑자기 자대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선후배를 만나 부대지휘의 정보를 교환하고 회포도 풀 수 있었던 교육이 조기에 종료되어 아쉽지만 자대로 복귀했다. 복귀하자 마자 연대장이 전체 지휘관 회의를 직접 소집했다. 갑자기 간부교육 중 복귀 지시가 하달됐고 또 연대장이 회의를 소집하자 지휘관들은 특별한 사건이 있는가 의아해했다. 당시는 제 5공화국으로 다음달인 2월12일, 제 12대 국회의원 276명을 뽑는 선거가 있어 마을마다 선거운동 분위기에 요란하게 들떠 있었다. 연대장은 평소와 달리 웃는 얼굴로 차를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직 대통령이 나라 사랑하는 지도력을 발휘한 결실로 경제가 급성장하고 ’88 올림픽’도 유치했다며 정부의 시책을 홍보하면서 좌익 및 진보세력들에 의한 정치적 혼란 상황을 언급했다. 이러한 난국에 우리 군인들도 동참하여 나라가 바로 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행동으로 정부를 도와야 한다며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당황했던 것은 연대장이 부대별로 지지도를 확인해서 해당 지휘관의 지휘능력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말이었다. 그의 곁에 있던 보안사령부에서 파견된 보안반장은 부재자 투표용지를 보이며 각개 병사들이 투표한 것을 모두 확인하겠다고 말한 것은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배워왔던 필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회의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해서 대대장실에 중대장들은 다시 모였다. 대대장도 연대장의 지시에 난감한 표정으로 “각 부대별로 평가를 한다니 중대장들은 조심하되 적극적으로 임해…..”라고 말을 더듬으며 대대를 담당하는 보안부대 중사의 표정을 살폈다. 중대 행정반으로 돌아와서 소대장을 집합시켰다. 필자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몰랐지만 연대장과 똑같이 정부시책을 홍보하고 이 부재자 투표 결과가 대대장 평가까지 좌우하게 된다는 언급을 하며 소대장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이후 전 중대원을 집합시켜 정부시책을 홍보하면서 좌익 및 진보세력들에 의한 정치적 혼란 상황을 언급했다. 이러한 난국에 국회의원 선거에서 올바르게 잘 판단해서 투표를 잘하자고 당부했다. 행정반에 투표소가 설치되고 각 개인의 투표용지가 도착했다. 그러면 필자는 중대장실에 해당 병사를 불러 차를 한잔 주면서 어디를 찍을 것인가를 확인 후 투표소로 보냈다. 필자는 지시사항을 시행하면서도 이것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군인의 역할은 아닌데 하는 죄책감을 느꼈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소대 군종병을 맡고 있는 전진호 일병이 중대장실에 들어와 차를 한잔 마시면서 절대 집권당을 찍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고 무소속에 목사님 출신이 있어 그 분을 찍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표출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전일병과 이야기를 하면서 초라해지는 내모습을 느꼈고 소신있게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는 전 일병(현재 서울 성북동 00교회목사)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선임 소대장 김중위가 중대장실로 들어왔다. “중대장님 지금 뭐하세요..? 군인은 명(命)에 살고 명(命)에 죽는 것인데…”하며 “지금부터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중대장님은 나가세요..”라며 필자를 밀어내고 전 중대원 면담을 자처했다. 김중위는 중대에서 1년 넘게 근무하여 필자보다 중대 병사들을 더 많이 알고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내키지 않았던 암울한 수렁에서 나를 건져주었다. 이와 관련해서 특전사령관과 육사교장을 역임하였던 민병돈 장군(육사15기, 하나회)이 당시 인접 제 20사단장으로 근무를 하였는데, 그 부대도 필자가 겪은 상황에 처해있을 때 사단장이 나서서 참군인의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민장군은 상부로부터 선거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당시 예하 여단장들에게 정부시책을 홍보하되 투표과정에서 일체의 선거법 위반행위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를 믿고 따르면 모든 책임은 사단장이 지겠다고 했다. 결국 투표 결과 다른 부대보다 여당 지지율이 떨어졌고 통상 20사단장을 마치면 영전하던 당시의 사례에서 벗어나 준장 보직인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좌천되었고 사단보안부대장도 한직으로 밀려났다. 이후 1987년 6.29선언이 있었고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민장군의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처신은 반전되는 재평가를 받아 오히려 중장으로 진급해 특전사령관으로 임명 되었다. 물론 당시의 사단보안부대장과 사단장 지시를 수명한 여단장들도 한직에서 요직으로 발탁되었다. 그 밖에도 이런 참군인이 여러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훗날 민장군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필자도 그때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중대는 선임 소대장 김중위의 도움으로 절대적인 지지율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타 부대와 비슷한 결과로 평가되어 대대장에게 면은 세웠다. 통신장교가 꺼낸 '아내의 생일선물'은 이종용의 '겨울 아이' 그해 겨울에 태어난 '겨울아이'는 바로 12대 국회의원 선거혁명 잡초는 밟아도 또 밟아도 다시 살아나, 철저한 감시필요 중대 소대장은 학군장교인 김태정 중위, 우광호 소위와 학사장교인 변상훈 소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대장 부임 후 엄동설한 속에서도 치루었던 지휘관 교대 FTX(작계시행훈련)와 애끓는 고민을 하며 난감했던 부재자투표가 끝나고 격려차원에서 육단리 셋방으로 저녁초대를 했다. 1월말 눈 내리는 대성산 기슭 육단리의 조그마하고 비좁은 단칸방 셋집에 소대장들과 통신장교인 현준(김중위 동기)이 들어가니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끼워 앉아야 했다. 그동안 훈련과 임무수행 중의 애피소드 회상으로 한 층 분위기가 고조되었지만 3시간 넘게 올라간 눈 덮힌 대성산 진지에서 혹한을 견디며 사고없이 부대를 지휘했던 것과 이번 투표에 있었던 소대장들의 노고에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내가 저녁상을 내오자 자리는 더 좁아졌다. 소주 한잔을 기우려는 순간 늦게 온 통신장교가 “잠깐..”하며 기다리라고 했다. 부시럭 거리며 벗어 놓은 옷사이에서 케익을 꺼내왔다. 아내와 필자는 당황했다. 촛불을 켜고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당시 유행했던 가수 이종용의 ‘겨울아이’가 흘러 나왔다. 신혼인 아내는 소대장들이 준비한 자신의 생일 케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필자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소대장들이 기억을 하고 기습적으로 우리 부부를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참으로 간단하고 작은 것에 쉽게 감동을 받는다. 그때 군인 가족의 애환 속에서 아내는 작은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그해 겨울에 태어난 겨울아이가 또 있었다. 바로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로 말 그대로 선거혁명 이었다. 그렇게도 치밀하게 정권이 개입했지만 집권당인 민정당은 35.2% 득표로 148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창당한지 200일도 채 안되는 신민당이 29.3%득표에 67석으로 제 1야당이 되었고, 야당 역할을 잘 못했던 기존의 민한당은 35석을 확보했으나 곧 해체되어 통합된 신민당이 103석으로 증가하여 국민들의 민의가 확실하게 반영될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는 집권당의 불신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선거혁명 이었고 이것은 바로 이어진 6.29선언과 제5공화국 종말을 앞당기는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부정선거와 부패 등은 잡초와 같은 존재이다. 이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시에도 이지문 중위의 폭로로 일부이지만 집권당 정부의 선거 개입이 또 드러났다. 현재도 장담할 수 없다. 이제는 과거처럼 군에서의 일방적인 선거개입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고도로 지능화된 일반사회가 더 문제이다. 필자도 경험 했지만 유도식 여론조사와 언론의 편파 방송으로 민의를 호도하고 있는 일부 상황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필자가 중대장 시절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시 그렇게도 집요하게 개입하며 부정한 투표를 유도했던 결과가 오히려 선거혁명을 이뤄낸 것처럼 국민들이 올바르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또한 지금도 맹활약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지문씨의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호루라기재단 등처럼 시민사회에서 공정하고 정확한 두 눈을 크게 뜨고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 잡초는 밟아도 또 밟아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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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01-1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2) 전방오지 산짐승과 눈싸움 그리고 셋방살이 오강의 추억…
    고등군사반(OAC) 과정 수료 후 이사도 못한 채, 한달 가까이 영내 근무 별빛에 반사된 산짐승의 눈빛 보다 사람의 인광이 더 강해 옛날 혼수였던 ‘오강’, 전방 오지에서는 필수 생활용품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유난히도 삭풍이 몰아치며 추웠던 1984년 겨울 날씨 속에 필자는 전임자 해임 덕분에 보병학교 고등군사반(OAC) 과정을 끝내고도 이사를 못한 채, 한달 가까이 퇴근도 못하고 급하게 취임한 중대장실에서 지냈다. 기혼자에게 관사는 제공되지만 비어있는 관사가 없어서 보다 못한 장모님이 최전방 오지 육단리 도로가 셋방을 구해 아내의 이사를 도와 주셨다. 물론 필자는 이사 당일 나가보지도 못했다. 그때 백운계곡을 지나 광덕산 카라멜고개를 넘어 사창리를 거쳐 실내고개와 수피령을 지나왔는데 이사짐 트럭 차장 밖으로 보이는 아슬아슬한 계곡에 가슴을 졸이며 펑펑 우셨다고 했다. 군인 가족의 애환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부대 임무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일과를 끝내고 자정이 다되어 퇴근하려고 하니 당직사령이 2시간 가까이 걷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퇴근차를 내주어 민간인통제초소까지 태워주었다. 민통초소에서도 육단리 셋방까지는 약 5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태워준 운전병에게 조심해서 복귀하라 당부하고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미 자정이 넘어 인적은 끊어진 상태였다. 육단리 셋방은 전에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가게를 하던 집이라 문을 열면 차들이 다녔고 화장실(재래식 변소)을 갈려면 차도로 나와 주인집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야했다. 아내가 그립고도 안타까운 마음에 발길을 재촉했다. 육단리에 갈려면 하오재길 두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등 뒤에 보이던 민통초소 불빛이 사라지고 겨울 삭풍과 함께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고 하늘의 별빛이 비포장도로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첫번째 고개를 올라가는데 갑자기 고개 언덕에서 두줄기 라이트가 비추었다. “이 시간에 차들은 모두 끊어졌는데 무슨 차가 올까?’하며 계속 올라갔다. 순간 갑자기 서치라이트 불빛이 사라졌다. 50미터, 40미터 점점 최초 불빛 장소로 다가가는데 라이트는 없었다. 점점 긴장감에 휩싸이며 등에 식은 땀이 베었다. 그때 또 두줄기 라이트가 필자를 비추었다. 잠깐 멈출려는 순간 라이트가 움찔했다. 산짐승 이었다. 덩치로 보면 송아지 만했고 새까맣게 보이는 것이 사나운 맹수임에는 틀림없었고 도로 한복판에 비스듬이 앉아, 별빛보다 더 밝은 라이트를 내게 보내며 쏘아보고 있었다. 마침 내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 옆에도 제설작업을 해서 깨끗하여 몽둥이로 쓸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멈칫하다가 필자도 눈에 힘을 주었다. 산짐승과 눈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보속을 유지하며 그 산짐승 정면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15미터, 10미터…… 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5미터즈음 다가가자 그 산짐승이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도로 옆으로 내려갔다. 등에는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산짐승이 있던 자리를 통과해 고개를 넘을 때까지 긴장을 늦을 수는 없었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지 귀에 촉각을 세우고 두번째 고개를 넘자 육단리 마을 불빛이 보였다. 마을 불빛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 겨울 모진 바람과 추위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온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고, 눈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아프기 까지 했다. ‘별빛에 반사된 산짐승의 눈빛 보다 사람의 인광이 더 세구나’하는 것을 깨달으며 차도와 붙어있는 셋방의 문을 두드리니 아내가 잠결에 나오며 반가워 했다.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잠깐만 따라와”하며 문을 닫고 나왔다. 주인집 대문을 열고 화장실로 가면서 나보고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용변이 마려웠는데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방에 들어오자 머리맡 베게 옆에 가위가 놓여있었다. “이게 뭐야?”하고 묻자 웃으며 슬그머니 치웠다. 잠을 자는 셋방의 방문을 열면 바로 도로이기 때문에 만약을 위해 가위를 곁에 놓고 자고 있었다. “아무리 퇴근이 늦어 한시간을 자더라도 집에 꼭 들어와야 겠구나”하는 다짐을 하면서도 왠지 가슴이 뭉클하게 저리어 왔다. 다음주 절친이자 인접 중대장인 한황진 대위가 집들이를 오면서 고맙게도 ‘오강’을 사가지고 왔다. 아내는 창피한 것도 잊은 채 너무도 좋아했다. 전방 오지에서 ‘오강’은 필수 생활용품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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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01-0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1) 분노로 떨리는 손끝에서 떨어지는 낙담의 담뱃재…
    해임통지도 못 받았던 전임 중대장은 결혼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84년 12월 18일 유난히도 살을 애는 듯한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 날씨 속에서 전임자 없는 중대장 취임식을 했다. 왠지 출발부터 썩 개운하지 않았다. 마치 소대장 시절에도 갑자기 대대장이 호출하여 명을 받고 지휘문제로 전 소대장이 해임된 GP장으로 급하게 취임했던 기억([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 (30) GOP부대의 ‘노루’ 트라우마와 GP의 '배신자들' 참조)이 떠올랐다. 필자는 문제가 있는 부대, 전 지휘자가 해임된 부대 위주로만 취임하는 전담 지휘관이 된 기분이었다. 취임식 후 며칠이 지났을 때, 부임한지 6개월 밖에 안되었지만 해임통지도 못 받았던 전임 중대장은 결혼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필자보다 임관이 5년 빠른 삼사출신 군선배였다. 그는 휴가전에 자신이 근무하던 자리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중대를 지휘하는 필자를 보면서 얼마나 당황했을까? 필자의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아무런 말도 없이 중대 행정반 난로 옆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상기된 얼굴로 분노에 떨면서 한 모금 빨고는 부들부들 떠는 손이 내려올 때에 맞추어 낙담에 찬 담뱃재도 힘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대대 본부에서 전임자를 호출했다. 그는 타대대 참모장교로 보직이 결정되었고 그렇게 쓸쓸하게 떠났다. ■ 영하 28도의 혹한 속에 지휘관 교대 FTX 실시 필자가 부임한 중대는 대성산 서측 방어진지를 담당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대대에서 새로 부임한 작전장교가 중대장 교체 후 FTX (작전계획 시행훈련) 계획을 수립했다. 하필이면 훈련 일정이 그해 가장 추운 날씨로 기온이 영하28도까지 내려가는 기간 이었다. 전 중대장이 보직 해임된 중대라 간부 및 병사들도 사기는 침체되어 있었지만 혹한을 고려하여 조정해 달라는 말조차도 못할 정도였다. 필자도 갓 취임한 직후이라 부여된 훈련임무를 그대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주둔지에서 비상경보가 발령되고 중대원들은 완전군장을 꾸리며 생활관을 정리한 후 연병장에 집합했다. 그 와중에 동작이 느리고 요령을 피우는 병사들을 소대장은 심하게 혼을 내고있었다. ■ 병사를 친자식처럼 아끼는 행보관, ‘이런 부대에 왜 사고가?’하는 의구심 마침 중대 인사계(행정보급관) 박무열 원사는 그 모습을 보며 병사를 감싸고 있었고 인사계보다 어리지만 상관 장교인 소대장은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소대장님, 때리지 마세요…! 아직 잘 모르고, 서툴러서 그래요….. 이해해 주세요…..”하는 박 행보관의 모습에서 병사들을 자식같이 아끼는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모시던 직속상관인 중대장이 보직 해임되는 안타까움도 있었겠지만 부대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잘 하고 있었고, 사위가 타부대에 근무하는 대위였다고 했다. ‘시졸여애자 고 가여지구사(視卒如愛子 故 可與之俱死)’의 의미인 “장수가 병사들을 사랑하는 아들 돌보듯 한다면 가히 생사를 같이할 수 있다”는 손자병법 지형편을 확인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병사를 친자식 같이 아끼는 행보관의 모습에서 ‘이런 부대가 왜 사고가 많았지..?’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촉각을 다투는 시간이라 동계군장 상태만 확인하고 진지로 출발시켰다. ■ FTX 훈련 중 심야의 대대장 현장 방문, 고생해놓고도 당혹 진지 투입로는 그동안 계속된 제설작업으로 눈은 치워져 있었지만 북향이라 빙판이었다. 3시간 가까이 군장을 맨 상태에서 제설도구를 추가로 휴대하고 대성산 진지로 올라갔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였지만 등과 이마에는 땀이 흘렀고 진지에 도착하니 쌓인 눈이 교통호를 메워 허벅지까지 빠지는 상태라 바로 제설작업을 했다. 필자는 통신병과 함께 각 소대진지를 둘러보았다. 눈이 많이 쌓인 곳은 키를 넘어 터널을 만들어 통과했고 각 소대진지를 다니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대장들의 작전계획 설명을 간단히 보고받고는 중대원들의 야영준비가 걱정되어 분침호와 산병호(콘크리트로 만든 진지) 안의 정리 상태위주로 확인했다. 중대 OP로 돌아오니 행보관이 도착해 있었다. 5/4톤 통차를 타고 빙판 투입로로 저녁을 추진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게도 교통사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었지만 그때는 병사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다. 등에는 순찰로 땀이 흥건했지만 손과 발은 얼어 있었다. 특히 눈속을 헤메이다 보니 젖은 전투화는 완전히 얼어 있었다. 신발은 벗어 발을 말리며 식은 국으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얼어붙은 밥알도 맛은 있었다. 행보관이 복귀하고 야간 전투 준비를 했다. 야간에는 추진조를 운용하기 때문에 소규모 병사들이 분리되어 배치된다. 필자는 다시 통신병을 데리고 야간진지를 확인하기 위해 중대 OP방커를 나왔다. 몇시간이 흘렀다. 야간진지 확인을 위한 산악 이동간 발의 열로 얼었던 젖은 군화는 다시 녹았고 등에는 또 땀이 흘렀다. 하지만 얼굴과 장갑낀 손에 부딪히는 대성산 삭풍은 코밑에 고드름을 만들었고 손은 꽁꽁 얼었다. 순찰 및 확인을 마치고 다시 중대 OP 벙커로 돌아오자 피로가 엄습했다. 그때 통신병이 옆 소대 전화기가 불통이라고 보고했다. 각소대의 인원장비 이상유무를 확인하고 취침에 들려다가 걱정이 앞섰다. 책임감이 강한 통신병은 단선이 난 것 같다며 전선과 전화기를 들고 확인하러 출발했다. 필자는 너무도 피곤하여 침낭속에 몸을 담았다. 그 때 중대 OP 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왔다. 호롱불 속에 비춘 모습을 보니 대대장(예비역 소장 양치규, 육사29기)이었다. 그는 엄동설한 속에 작계시행 FTX중인 중대가 걱정되어 직접 현장확인을 온 것이었다. 침낭 속에 잠시 몸을 담았던 필자와 통신병은 급하게 옷을 추리며 일어났고 대대장은 한심한 듯 바라만 보았다. “9중대장, 인원 장비는 이상 없나..?”라고 질문하며 추위 속에 병력관리 잘하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하지만 대대장은 "지휘관은 마지막 까지 부하들을 확인해야한다..."는 무언의 교훈을 주는 여운을 남겼다. 아찔한 순간이었고 통신병 진희선 병장(현 서울시 부시장)은 “대대장님 화 나신 것은 아닌가요?”하며 걱정을 하였다. 이미 각 소대진지를 모두 확인하고 필자의 위치로 복귀해 쉬는 중이었지만, 제대로 훈련상황 보고도 못 드렸고 이완된 모습을 보였기에 필자도 첫 훈련에 실망을 드린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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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01-0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 중대장 생활의 희비쌍곡선, 시작은 '박격포' 사고난 중대에서
    배치부대 미정으로 가족을 광주 백일아파트에 두고 먼저 사단사령부로 전입 새로운 곳 원했으나, 과거 근무했던 연대의 안전사고가 잦은 중대로 전임 중대장은 병사의 항문 파열 사고로 보직 해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84년 12월 고등군사반(OAC)과정이 끝나자 당시의 방침에 따라 다시 대성산으로 원대복귀하게 되었다. 내려오는 눈썹을 부릅뜨며 야전교범과 치열하게 싸워왔던 24주 기간의 고등군사반(OAC)과정을 수료했다. 비록 우수한 성적으로 흰장갑을 끼고 상장을 받는 등수안에는 못 들었지만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간신히(?) 상층에 포함되는 성적으로 만족해야 했었다. 배치부대가 정해지지 않아 가족을 광주 상무대 백일아파트에 두고 먼저 대성산 사단사령부로 갔다. 사단에 도착하자 인사처 보임장교는 각 연대의 중대장 현황을 분석하여 육사 출신이 가장 적은 인접 연대로 보직을 고려하고 있었다. 필자도 소대장 및 대대교육장교로 같은 연대에서 약 3년을 근무해서 가능하다면 새로운 연대에서 새롭게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6개월간 떠나 있다가 원대복귀하니 지형도 잘알고 사단 실무자들도 안면이 있어 생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통이 되어 좋았다. 이런 것이 아마도 육군본부에서 중대장은 이미 근무한 지역 부대로 원대복귀 하도록 방침을 정한 이유이기도 했었다. 사단본부 각 사무실을 돌며 인접 연대로 보직을 받게 되었다고 복귀 인사를 하며 지인과 담화를 나눌 때 인사처에서 사단장 전입신고 시간이 되었다고 연락을 받았다. 사단장실 앞에 고등군사반(OAC)과정을 마친 동료들과 새롭게 전입오는 장교들이 신고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임장교가 읽어주는 사단장 신고문에 필자가 가야할 연대가 바뀌어 당황했다. 인사참모가 최초 배치부대를 사단장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고등군사반(OAC) 입교전에 근무했던 연대로 조정되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2대대에서 소대장과 GP장, 1대대에서 교육장교로 근무를 했는데, 같은 연대 3대대 9중대장으로 보직이 바뀌어 있었다. 현재 중대장은 현재 결혼휴가 중이었으나 보직해임 되었다. 그 이유는 얼마전에 박격포 훈련탄에 병사가 항문을 맞아 파열되는 등 안전사고가 잦은 중대였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사단교육장교로 근무하다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도 대대작전장교로 같이 보직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당시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랐었지만 대대장은 육사 선배였고 인접 10중대장은 GP장 근무시에 대대장의 치열한 선의경쟁(善意競爭) 유도에 걸려 우정이 더욱 돈독하게 된 동기생 한황진 대위(육사37기.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 호국보훈의 길에도 통하는 미스트롯을 키운 힘’편 참조)였고 이 것은 희비 쌍곡선의 시작이 되었다. 연대에 육사 출신 중대장은 통상 1~3명 있는데, 하필 배치되는 대대에 동기생이 인접 중대장 근무를 하고 있어 평점 등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등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GP장 근무시에 치열한 선의경쟁을 했던 절친이 먼저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우수하게 마치고 근무하고 있는 부대라 더욱 난감했다. 사단장 신고시에도 안전사고에 대해 언급하며 사단장은 부대관리 철저를 당부하였다. 이어 연대장 신고를 위해 다목리에 있는 연대본부로 향했다. 때마침 연대는 연말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1년동안 근무 결과를 평가하여 선봉 및 각분야 우수중대 표창 등 결산을 하고 있었다. 또한 내년 GOP투입을 위해 철저히 준비하여 침투하는 적을 잡자는 것을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직하는 3대대는 GOP가 아닌 후방예비로 정해져 있었다. 회의 후 만찬에서 6개월만에 다시 선배들과 동료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해후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연대의 모참모는 필자에게 “내년 선봉중대는 자네가 될 거야”하며 우스개 소리로 격려도 해주었다. 그러나 GOP연대에서 예비대대의 중대가 선봉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 기대하지는 않았다. 회의 및 만찬이후 당연히 필자와 한황진 대위는 마을로 내려가 한잔을 더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한대위에게 핀잔을 주었다. “똑바로 근무를 잘하지! 인접 중대에서 안전사고 발생으로 타 연대로 가게 될 나를 니가 있는 대대로 배치하게 만드냐..?”며 소주를 주고 받으니 만취가 되었다. 자정이 다가오자 한대위는 비틀거리는 필자를 부축하여 연대내에 있는 독신자 숙소로 이동했다. 횡설수설하며 오솔길을 걸어 숙소에 거의 도달했는데 밤길에 누가 지나가며 “조심해서 다녀라..!”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향해 한대위는 ‘충성..!’하고 구호를 붙였다. 모질게 전투력 강화에 전념하여 ‘아비규환’이라는 별명으로 호칭되었고, 회의와 만찬을 주관했던 연대장(예비역 중장 이규환, 육사21기) 이었다. 우린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며 급하게 숙소로 들어가 원대복귀 첫날을 보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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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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