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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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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㉗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율성이 6·25남침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군가도 작곡했지만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점령군으로서 자유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1·4 후퇴 때는 중공군과 함께 재차 서울에 내려와 조선궁정악보를 약탈해간 매국노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광주 출신이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공산당원으로 변절한 자를 추모하며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추진했던 정율성 공원 조성사업은 동족상잔의 비국을 겪은 자유대한민국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현재도 핵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으려면 견고한 한미동맹이 절실한 실정이다. 필자가 다녔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북한의 재 남침에 대비해 합동참모본부의 주요부서에 근무하며 군사전략을 담당했던 용삼남(육사33기) 선배로부터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용 선배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발을 짚고 재활치료에 전념했던 필자에게 용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는 생도시절 럭비부 선수 생활을 했는데 운동중에 부상을 입어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이 판단할 때에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으나 강한 의지로 철저하게 운동을 하여 척추 주변 근육을 강화시킴으로써 전혀 불편함 없이 더 건강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합참 근무시에 매일 새벽에 가장 일찍 출근하여 책상 및 의자 정리 및 청소를 한 뒤에 책상위에 올라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300개씩 하여 근육을 강화시켰다. 그가 원주에 있는 부대에 근무할 때에는 고속도로에서 시비를 걸던 조폭을 한방의 주먹으로 넉아웃시킬 정도로 강해졌다는 여담도 남겼다. 건강한 체력은 건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며 업무에 질도 고양시킬 수 있다. 건강의 이상을 극복하며 지칠줄 모르는 용 선배의 체력에 상관들은 힘든 업무도 쉽게 맡길 수 있었고 업무상 만나는 미군들과도 쉽게 친해져 한미 연합작전과 군사전략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일과후에는 독신자 숙소에서 우리의 전통악기인 대금을 연주하며 하루를 마감하여 건강상 어려운 위기를 적극 극복하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예술감까지 가진 문무를 겸비한 군인으로 끝없는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앞으로의 군생활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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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㉖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10월2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세워져 있던 중국 음악가 ‘정율성 동상’이 기단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 귀화한 음악가로, 북한·중공군 군가를 작곡한 인물인데, 광주시가 기념사업을 추진해 논란을 불렀다. 정율성 동상은 중국 청년단체가 제작해 광주 지역 청년단체에 기증한 것으로 2008년 광주 남구 양림동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 입구에 세워졌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이날 재물손괴 혐의로 보수단체 회원 윤모(5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전날(1일) 오후 정율성 흉상 목 부분에 밧줄을 묶고 2.5톤 승합차에 이를 연결한 뒤 쓰러뜨리는 모습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정율성 흉상은 위의 사진처럼 약 1m 높이의 기단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기단 옆 땅바닥에 누운 모습으로 발견됐다. 윤씨는 범행 직후 한 유튜브 채널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중단하라고 광주시에 요구했는데 이를 이를 수용하지 않아 강제로 (흉상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윤씨는 경찰에서 “내가 그랬다. 3일 오전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겠다”며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유족 대표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전 광주대성여고 교장은 2일 “공산주의자 정율성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광주시가 혈세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공원을 짓는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고 무조치로 일관하고 있다”며 “공원 철폐를 위한 릴레이 피켓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김오복 전 교장은 “북·중공의 군가를 짓는 등 한국 침략세력의 나팔수 역할을 한 정율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아무 중단 조치도 없이 정율성 공원조치를 강행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율성 공원 문제 제기에 대해 철지난 이념몰이, 색깔론, 민간외교라는 억지 논리만 되뇌고 있다”면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보훈단체들의 집회를 관제 데모로 깎아내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과 보훈가족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자 정율성 공원을 철폐하거나 대안을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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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국방부장관으로 지명된 신원식 의원(육사 37기)은 레닌에게 선물받은 권총으로 독립군을 직접 사살한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의 동상 이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영관영어반’ 과정에 다닐 즈음에는 홍범도의 존재 조차도 몰랐다. 청산리 대첩 이후인 1921년,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와 그 일당들에 의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몰살당하며 해체됐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소련군 복장의 공산주의자를 추모한다는 것은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인민군과 중국인민군 군가와 마오쩌뚱 찬양가 등을 수십 곡 만들며 뼈속까지 어용 공산주의자인 정율성 작곡가의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관생도를 포함한 건전한 국민들의 정체성과 대적관을 현혹시키는 잘못된 처사이다. 필자가 다니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확고한 대적관을 바탕으로 견고한 한미동맹을 위한 교육이 계속되었다. 이 교육을 통해 숙달한 영어회화 능력으로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 및 훈련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을 마치면 다음 보직은 연합사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필자는 이미 다음 보직이 충북 충용부대로 정해져 있었고, 다른 교육생들은 연합사령부 또는 예하 부대 및 연합작전/훈련을 주로 시행하는 합동참모본부로 분류되었다. 마침 합참의 중요부서에서 근무했던 선배도 함께 교육을 받고 있어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한명은 육사 33기 용삼남 중령이었다. 과거 승리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양태수, 나대일, 김형배 선배 등을 포함하여 많은 선배 동료들을 다시 만나는 해후의 시간도 만끽했으나 용 선배는 6개월 교육기간 중에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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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5주년을 맞은 국군의 날은 6·25남침전쟁 당시 우리 육군의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날이다. 추석 연휴 때문에 닷새 앞당겨 지난 26일 열린 올해 국군의 날 기념행사는 그동안 소홀히 했다가 10년 만에 대대적인 도심 시가행진으로 주목받았다. 유사시 북한 지휘부의 지하 벙커를 파괴할 고위력 현무 미사일과 한국형 사드로 불리는 장거리 지대공유도미사일, 엘샘(L-SAM) 같은 첨단무기가 대거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날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핵 위협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며, 우리 군의 태동 시점은 1945년 광복 이후라고 언급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광복 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 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역사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군의 뿌리를 독립군에서 찾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식을 사실상 반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국군의 날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동부전선의 우리 육군 3사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10월1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1956년 제정됐다. 하지만 체제 경쟁이 끝나고 남북정상회담 등이 열린 2000년대 이후론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자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우리나라가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헌법에 따라 군의 뿌리도 임시정부 군대인 광복군으로 정립하는 게 맞다고 민주당 등 일부는 주장하지만 확고한 대적관을 강조해온 현 정부는 선을 긋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웠던 광복군도 의미는 있지만, 지금 우리 군은 북한과 싸우는 군대라며 국군의 확고한 정체성을 강조했고, 여야의 인식 차는 국군의 날 메시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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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㉓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개월 기간의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간정도 지나갈 즈음에 필자는 그동안에 미루어 왔던 석사학위 논문의 마무리에 쉴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영관영어반’ 과정에 입교시킨 것은 능력이 부족한 필자가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주신 신의 배려와 인도라 생각되어 감사할 뿐이었다. 최종 논문심사에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라는 필자의 논문을 검토하던 동국대학교 3명의 지도교수들은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제공해준 귀국보고서가 큰 바탕이 되었고, 다른 학생들은 논문들은 기존의 타 논문에서 인용하여 만들다 보니 필자의 논문보다 교수들이 참고할 사항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사중에 지도교수들은 논문 내용보다 내 신상에 더욱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목발을 짚고 있지만 육사37기로 박지만과 동기라고 하자 그들은 ”아마도 그 동기들은 똑똑한 사람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기생 전체를 칭찬해주어 동기회 품격이 격상되는 이미지에 일조한 기분이 들어 보람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교한 영관영어반 과정은 주말부부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됨과 동시에 이미 취임해 맹활약하는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도 풀었지만 대대장 근무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계기가 되었고, 영관영어반 수료증과 동국대학교 석사학위기를 받아 내실을 기하는 일거다득(一擧多得)의 결실을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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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8)]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떨어진 체력 보충을 위해 고민하던중 당시 동기생중에 랭킹 1위 수준을 지닌 이제경 동기가 기꺼이 새벽에 테니스 지도를 해주겠다고 배려해줘 우선 테니스부터 시작했다. 필자가 운동신경이 부족하다보니 부대에서 테니스 수준이 매우 저조했는데 이 동기의 도움으로 기초부터 익히게 되었다. 덕분에 약해졌던 체력은 조금씩 보강되어가고 있음을 느꼈고 특전사에서 멋있게 근무했던 이제경 동기와의 우정은 점점 쌓여갔다. 소령급 실무장교로 꽉 짜여진 일정에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7년 동안의 습관이 몸에 베어버린 탓인지 진해 고급과정(대대장반)의 여유로운 삶은 필자를 맨붕에 빠지게 했었는데 새벽운동을 하면서부터는 하루 하루가 또 바쁘게 달려갔다. 특히 7년전에 소령 진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에서는 전술학 위주로 공부했었는데 당시의 고급과정에서는 전략과 작전술을 배우며 대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는 리더십 교육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입소 직전에 군단 ‘교육훈련TF’ 임무 수행시에 함께 연구했던 요원들을 포함함해서 진해에서 다시 만난 동기생들의 무서운 성장에 ‘괄목상대(刮目相對)’를 느꼈다. 그들은 예리한 분석력과 통찰력을 견지하며 국제화 시대에 부응하는 간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고 학과 시간에도 뛰어난 언변으로 자신있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받은 충격으로 필자의 능력의 한계를 느꼈고,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더 열심히 재충전하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마음만 급했다. 그동안 바빠서 포기했던 대학원 석사 논문도 준비하고 컴퓨터와 테니스도 배워야 하며 고급장교로 성장하기 위한 교육과정 중의 핵심인 전략이론 등도 익혀야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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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8)]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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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7)]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년전에 소령 진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에 입소했었다. 이번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대대장 취임으로 앞두고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인 12주간의 보수교육을 위해 동두천에서 진해 육군대학(현재는 육군대학이 대전시에 위치)으로 다시 내려갔다. 교육기간이 짧다보니 모두들 혼자 내려와 아파트 대신 독신자 숙소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고급과정에 입소하니 마침 사단 정보보좌관으로 근무하던 김종완 동기와 인근 부대의 이재준 동기를 포함한 더 많은 동기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육기간중에 휴일에는 동두천으로 복귀했다가 월요일 수업 시작전에 다시 진해에 내려가기 때문에 동두천에 거주하던 동기 세명이 돌아가며 카풀제로 다니기로 결정했다. 소령으로 진급하여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을 마치고 실무장교로서 2년간의 수방사 작전장교와 4년 동안의 무적태풍부대 작전보좌관 근무를 했는데, 그동안 거의 매일 야근하며 업무에 쫒기다보니 마음의 여유도 잊었고 체력도 많이 고갈되었다. 그래서 다시 남쪽 진해만에 내려가는 따뜻하고 여유로운 시간이 기다려졌고 대대장반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소령급 실무장교로 정신없이 시달리며 약해진 체력을 보다 강화시키겠다는 작은 목표도 선정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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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7)]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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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6)]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단 ‘교육훈련TF’ 임무를 완수하자 군단장은 수고했다며 표창장을 수여했고 복귀한 뒤에 사단장도 격려금까지 주며 노고를 치하했다. 공석이 된 교육보좌관직 땜방으로 인한 짜증이 환희와 보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보다 더 큰 성과는 필자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예리한 분석력과 통찰력을 견지하며 국제화 시대에 부응하는 간부의 자질을 갖추고 무섭게 성장한 동기에게 받은 충격은 필자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이제 중령 계급장을 달면 사단 예하의 대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군의 중견 간부의 위치에 오르는 필자는 군사학적 지식이나 인문학적 학식도 모두 부족하다는 것을 군단 ‘교육훈련TF’ 임무를 수행하면서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러한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달이 바뀌고 그해 2월이 되자 육군대학에서의 대대장반 교육이 시작되었고 사단에서는 교육보좌관 대리 근무를 하던 필자에게 가장 먼저 입소하라는 통보를 하였다. 마침 사단 정보보좌관으로 근무하던 김종완 동기와 인근 부대의 이재준 동기도 함께 교육을 받게 되어 진해까지 주말마다 카풀제로 다니기로 결정했다. 소령으로 진급하여 육군대학에 다녔는데 7년만에 다시 남쪽 진해만에 내려가는 따뜻하고 여유로운 시간이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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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6)]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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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5)]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공석이 된 교육보좌관직을 후임자가 정식으로 보직되기 전까지 수행하라고 했지만 필자는 중령 진급예정자로서 대대장반 입소전까지 또 새로운 업무에 또다시 시달리게 되었다. 계속되는 업무로 짜증도 있었지만 괄목상대(刮目相對)할 동기도 다시 만나고 훌륭한 친구를 사귀는 계기도 되었다. 인접 사단의 교육보좌관 정찬권 소령은 충청북도에서 태어나 3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전후방 각지에서 초급장교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소령 진급하여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전역후에도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비교정치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교수로 후학을 양성도 했으며, 현재는 한국위기관리연구소 소장으로 국가위기관리학회 회장, 정부업무평가위원회 국정과제 평가전문위원, 대통령실 국가위기관리실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정 박사가 저술한 ‘국가위기관리론’은 위기관리의 바이블로 많은 안보전문가들이 인용하는 등 국가위기관리 분야에 아성을 쌓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군단 ‘교육훈련TF’ 연구요원으로 소령때 첫 만남을 가진 뒤에 필자가 청와대 위기관리비서관 시절에도 대통령실 국가위기관리실 정책자문위원으로 긴밀하게 협조했고 지금도 가끔씩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국가위기관리 발전을 위해 정담을 나누는 벗이 되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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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5)]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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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4)]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단 사령부 ‘교육훈련TF’에 소집된 요원들은 대부분이 육사 동기생들이었다. 김영식(제40대 1군사령관), 권혁도 소령은 필자의 동기생으로 중령 진급 예정자로 소집되었고 또 한명인 정찬권 소령은 3사관학교 출신으로 육군대학에서 우수 교관으로 선발되었던 능력이 출중한 인접사단 교육보좌관이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한지 10년이 넘어 다시 만난 동기생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급하게 소집된 군단 ‘교육훈련TF’로 전장정보분석(IPB) 및 ‘통합메트릭스’를 활용한 전투지휘에 따른 교육훈련 방안 및 과제 도출에 대해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그들에게 감탄했다. 그들의 그동안 경험을 통해 축적된 예리한 분석력과 군사학 지식에서 작전분야에서 나름대로 자신감에 차있었던 필자는 아직도 능력이 부족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특히 김척 군단장이 주간에는 기본 업무를 하고 밤이 되면 TF사무실로 직접 찾아와 그동안의 진행 사항을 체크하며 토론할 때에 논리적으로 대답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한번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란 깜짝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는 뜻으로 안 본 사이에 부쩍 재주가 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 삼국시대에 오나라 손권의 부하였던 여몽(呂蒙)은 병졸에서 장군까지 발탁되었으나 무식했다. 그러자 손권은 그가 이론적인 병법까지 알기를 원해서 학문을 깨우치도록 충고했다. 이때부터 그는 전장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공부했다. 얼마 후 여몽과 막역한 친구였고 뛰어난 학식을 가진 노숙이 여몽과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갔다.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그의 박식함에 깜짝 놀라면서 “이 사람 언제 그렇게 공부했나? 이제 오나라에 있을 때 여몽이 아닐세”라고 말하자 여몽 “선비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해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하는 법이라네”라고 대답한 것이 ‘괄목상대(刮目相對)’의 유래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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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4)]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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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3)]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교육업무는 연초 및 연말이 제일 바쁘다. 연말에는 그해 교육훈련 결과를 비교 평가하여 우수부대를 선발하는 성과분석을 하고 신년도 교육훈련 지침도 작성하여 예하대에 하달하는 업무 때문에 제일 피곤한 시기인데 그것의 땜빵을 도맡아야 했다. 어느 정도 교육훈련 관련 연말 업무를 완료할 즈음 군단에서 당시에 강조됐던 전장정보분석(IPB) 및 ‘통합메트릭스’를 활용한 전투지휘에 따라 교육훈련도 혁신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각 사단 교육보좌관들을 군단 사령부 ‘교육훈련TF’로 편성하여 소집했다. 광개토부대장인 1군단장 김척 중장(육사21기)은 타군단에서 시행하기 전에 미리 착안해서 지시했고, 이를 위해 편성된 ‘교육훈련TF’는 퇴근도 하지말고 방안이 완료될 때까지 군단 사령부에서 숙식하며 연구하라는 엄명을 내려 TF요원들은 꼼짝없이 한달 동안 잡혀있었다. 유별나게 업무 지향적인 군단장은 주간에는 기본 업무를 하고 밤이 되면 TF사무실로 직접 찾아와 그동안의 진행 사항을 체크하며 통합베트릭스를 활용한 교육훈련 방안을 함께 연구했다. 헌데 각 사단의 교육보좌관은 연초가 되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년도 교육훈련 준비로 몹시 바빴다. 그래서인 특이하게도 소집된 연구요원들은 교육보좌관이 아닌 작전 및 정보 보좌관으로 중령 진급예정자들로 구성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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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3)]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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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2)]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작전장교 백창진 대위(육사40기)는 그동안 합동근무하는 두명의 작전보좌관 밑에서 전투지휘검열 및 육군참모총장 초도 방문행사 등 바쁜 업무를 잘 수행해왔었고 그해 소령으로 진급하여 교육보좌관으로 발탁되어 근무했으나 참모가 교체되고 연말이 되자 갑자기 전역지원서를 제출했다. 백소령은 전년도 12월 신임 작전참모인 김형배 중령에게 업무보고를 준비하여 능력을 인정받으며 작전처 총괄 선임장교로 활발하게 임무를 수행했는데, 김 참모로부터 무서운 후배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탁월을 넘어 출중하게 업무를 수행했던 인재였다. 군에서 아까운 인물을 놓치는 안타까운 순간이었으나 그는 사조직에 관련되어 고민하다가 동기들보다 좀더 일찍 전역하여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용단을 내려 전역을 결심했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전역후에 삼성그룹에 공체로 입사하여 이사까지 승승장구하며 승진하여 조기에 전역한 사관학교 출신 선배들의 모범사례가 되어 훗날 육군사관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초빙강연을 할 정도로 성공한 육사 동문이 되었다. 하지만 사단장은 공석이 된 교육보좌관직을 후임자가 정식으로 보직되기 전까지 필자에게 수행하라고 지시하여 중령 진급예정자로서 대대장반 입소전까지 교육분야라는 새로운 업무에 또다시 시달리게 되었으나 계속되는 업무로 짜증도 없지는 않았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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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2)]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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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1)]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작전보좌관으로 3년째 근무하다보니 마음도 체력도 고갈상태가 되어갈 즈음에 후임자가 김왕경 소령(육사38기)으로 내정되었다. 마침 필자는 중령으로 진급되어 그동안 고생한 보람도 느꼈다. 게다가 때를 마추어 육군참모총장 김동진 대장(육사17기)이 부대를 초도 방문했는데 김왕경 소령과 업무를 나누어 행사준비를 하니 한층 수월했다. 김 참모총장은 무적태풍부대에서 소대장, 수색중대장, 대대장을 역임했다. 김형배(육사34기) 작전참모는 당시 모습과 현재의 발전된 모습을 비교한 ‘총장님의 발자취’ 사진첩을 착안해 준비했고, 수행했던 군단장은 마음에 꼭 든다며 “그 사진첩이 핵심을 찔렀다”라고 칭찬을 해주어 흐뭇했다. 허나 기발한 착상과 아이디어로 사단 운영의 핵심 참모였던 김 작전참모는 보병학교 방어과장으로 보직을 옮기게 됐다.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그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던 기간이었기에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모아 바인더로 전달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표했다. 법화경(法華經)에 있는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라는 말처럼 다시 만날을 기약하며 잠시 타부대로 전출가는 참모에 대한 섭섭하고 아쉬움을 달랠 틈도 없이 또 다른 이별을 하게 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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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1)] 공석 대리근무 스트레스가 보약이 되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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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9)] 통합메트릭스 신화를 만든 정형진 장군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대는 지옥과 천당도 인솔해 간다는 말이 있다. 보병학교에서 초등군사반(OBC)교육 수료직전에 벌어진 웃지못할 ‘시트사건’은 군과 국가의 간성인 사관생도 출신들은 누구 하나의 실수로 인해 전체가 매도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생도생활 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귀 따갑게 들어 왔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서로를 아끼고 격려하며 군생활을 해야된다는 결집의 기회이자 동기애의 인연을 다지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 사단 참모장 근무도 성공적으로 끝낸 정형진 대령은 이어 장군으로 진급하여 정보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보직인 합참정보융합실장으로 맹활약을 하게 된다, 정 장군이 합참정보융합실장으로 재직 중에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다. 그후 국정감사가 열리자 기무사의 표적수사와 국방장관인 김동신이 북의 도발징후를 묵살했다고 주장한 5679부대장 사건으로 잠시 곤욕을 치루었으나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잘 해결되었다. 이후 국방정보본부 해외정보차장의 중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육군소장으로 진급하여 제 39대 육군 정보학교장으로 취임해 정보요원들에 대한 직무교육과 영어를 비롯한 7개 외국어에 대한 어학교육 등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고 전역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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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9)] 통합메트릭스 신화를 만든 정형진 장군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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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8)] 통합메트릭스 신화를 만든 정형진 장군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연대전투단(RCT) 평가 최우수부대로 선정되는 통합메트릭스 신화를 만들며 성공적으로 연대장을 마친 정형진 대령은 바로 사단장에게 발탁되어 참모장으로 취임했다. 그때 필자는 정 대령의 후배를 사랑하고 아끼는 따뜻한 배려로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에서 구제되는 혜택과 함께 더욱 진한 인연을 맺게 된다, 필자가 중령으로 진급하여 대대장반 교육을 위해 진해에 위치한 육군대학으로 이동중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장기간 병원에 입원했던 필자의 보직을 챙겨주었고 그 덕분에 무사히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할 수 있어 너무도 감사한 은혜를 입었다. 게다가 정형진 장군과의 첫인연은 필자가 임관 초기 보병학교에서 초등군사반(OBC)교육 종료를 앞둔 어느 날 새벽에 동기생 전원이 전투복으로 훈련장 숙소앞 연병장에서 얼차려를 받았었을 때부터였다. 그날 연병장 단상에는 정형진 소령(30기, 예비역 소장)을 비롯한 보병학교에 근무하는 영.위관급 육사 선배들이 모두 있었고 분위기는 매우 살벌했었다. 그 이유는 몇명의 동기생들이 심야에 바바리맨처럼 하얀 시트로 몸만을 가린 채 숙소 울타리 밖의 작은 주점에 들어가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며 술을 마시다 지역주민의 신고로 난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정형진 소령 등 선배들은 사관학교 출신의 망신을 시킨다며 일장 연설을 한 뒤 동기생 전체를 대상으로 호되게 기합을 주었다. 후배들을 바르게 선도하려는 선배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으나 일부 동기의 파행이 불러온 웃지못할 한밤중에 홍두께 격이었던 사건이자 유달리 많았던 정 장군과의 인연중에 하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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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8)] 통합메트릭스 신화를 만든 정형진 장군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