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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1)] 통합메트릭스 신화를 만든 정형진 장군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60년대와 70년에는 수많은 간첩사건과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북한의 대남적화통일노선에 따라 남한의 혼란을 유도하고 지하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시도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1968년 1.21사태와 10월~11월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침투사건, 1969년 3월16일에 주문진에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6월에는 흑산도에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있었다. 이렇게 연달아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미국에 보복공격을 요청하는 한편 국민의 반공체제 강화에 주력하여 1968년 4월에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때를 맞춰 1969년 GOP 경계를 담당했던 무적태풍부대에서도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고 사단예하 80연대의 작전지역에서 논두렁에서 비트를 파고 숨어있던 무장공비를 연대지원 포병부대 병사들이 발견하여 사살하는 전과도 올렸다. 필자가 근무하던 1993년에 80연대장은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의 정형진 대령(육사30기)이었다. 그는 필자가 처음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던 중동부 전선의 승리부대에서 성공적인 중대장 근무를 했는데 7년 뒤에 우연하게도 필자가 그 중대장으로 보직되는 등 유독 인연이 많았던 선배였다. 게다가 정 대령이 지휘한 80연대는 수많은 간첩사건과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던 1969년도에 필자의 장인이 연대장으로 재직했던 부대이기도 했다. 필자의 장인 故강철 대령은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해방후에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서북청년회 활동을 했는데 공산당의 폭정이 너무도 가혹해 결국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이후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정경학부에서 공부하다가 6사단 7연대에서 병사로 입대했을 때 6.25남침전쟁이 발발했다. 헌데 입대후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응시했던 보병학교 간부후보생 3기생에 합격 통지서를 받아 종합학교(전시사관학교)1기로 교육받고 소위로 임관하여 11사단에서 일선 소대장, 대대참모, 소총중대장으로 생사의 갈림길인 치열한 전투에 참전하다가 휴전을 맞이했다. 이후 비둘기부대 작전참모로 2년 동안 월남전을 참전하여 대령으로 진급한 장인은 80연대장을 마치고 특전사 작전참모, 육군본부 교육과장직을 수행했다. 마지막 보직인 1사단 부사단장으로 땅굴탐지 작전을 지휘하다가 25년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는데, 2년 뒤에 시추했던 그곳에서 제3땅굴이 발견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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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0)]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의 국방개혁 시행을 위해 기동군단이 2개로 증가함에 따라 무적태풍부대는 소속이 바뀌어 인접 군단 예하부대로 전환되었다. 이에 소속 변경에 따른 미흡한 분야를 보완하고 개선 발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소속 부대의 지휘관이 임석하여 각 지역별로 전술토의를 했다. 그날도 변경된 상급부대의 지휘관인 조성태 군단장(육사20기)이 임진강과 한탄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감제고지에서 예하 사단장들과 전술토의를 했다. 필자는 이영대 사단장을 수행하여 참가했다. 무적태풍부대는 책임지역이 광적면에 사선형 방어를 하고 있어 사진속의 그림과 같이 계단형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전술토의에서 사단장의 지침을 받은 필자는 가용병력을 고려시에 임진강 이남의 거점까지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조 군단장은 사단의 개념을 수용하며 인접 부대에 해당 거점 방어책임을 넘겨 주었다. 성공적인 토의를 마치고 복귀하는 짚차안에서 사단장은 필자에게 발표를 잘했다고 격려했다. 새로운 군단장이 우리의 건의를 수용함에 따라 사단이 후방거점의 방어 및 관리책임에서 벗어나 보다 효율적으로 작전하게 되었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기에 맞춰 지속된 각종 전술토의에서 우리 부대원들이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교육훈련 제일주의 추진에 따라 주요 산악을 등반해 작전계획과 지형을 숙지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술토의와 인접 및 상급부대 역사자료를 정리해 만든 ‘작계변천사’는 전투지휘검열시에 장려사항이 되어 우수부대 표창 수여에 기여했고, 사단장의 신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 또한 합동참모본부의 중요 작전부서 과장인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이 요구했던 합참 차출을 보류함에 따라 결국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후 함께 근무한 경우가 전혀 없었다. 허나 그는 감사하게도 군생활을 마칠 때까지 멘토이자 스승으로 필자를 이끌어 주었다. 아마도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이었던 그는 모두가 선호하는 합참의 좋은 보직임에도 불구하고 현 직책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보류시키다 합류 못한 필자를 오히려 좋게 평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군인은 현재 모시는 직속상관에게 충성을 다하며 복종하는 것이 바로 국가에 대한 충성이고 애국이다. 이런 군인정신으로 전장병이 무장해야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터의 기로에서나 최악의 조건과 상황에 부딪히는 전쟁에서도 임무를 완수하며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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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9)]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④
전투지휘검열 평가를 받기 위해 작전지역으로 행군하는 모습과 예하 연대 훈련 평가를 위해 사단에서 지원된 화기가 장착된 짚차 [사진=국방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투적 사고는 대단히 중요하다. 대부분의 부대가 전투준비태세를 군장결속과 물자분류에 만 우선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중요한 중요한 ‘목’지역을 적 부대가 선점하기 전에 우리 병력으로 먼저 점령해 전투준비를 하는 등의 전투적 사고가 매우 중요하다. 군인은 이런 전투적 사고로 항상 전투준비를 염두에 두고 생활해야만 하고, 그 일환으로 전술토의도 하게 된다. 이러한 전술토의를 하는 목적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현재 계획의 미흡한 분야를 보완하고 개선 발전시키기 위한 토의이다. 두 번째는 참가 대상자들이 그 내용을 잘모르기 때문에 교육 목적상 참가자들이 발표와 토의를 하는 경우이다. 마침 당해년도 가을에는 사단장 재임기간 중에 가장 중요한 평가 및 검열인 군사령부 전투지휘검열이 계획되어 있어 수검 준비를 위한 자체 전술토의도 계속 되었다. 필자는 보다 성공적인 전투지휘검열 수검준비를 위해 전술토의를 진행하면서 지휘관이 교체 될 때마다 작전계획이 바뀌는 현실을 보고 ‘작전계획 변천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이를 위해 문서 보관소를 뒤지고 역대 참모 및 지휘관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바쁘게 전술토의 및 전투지휘검열 수검준비를 하던 어느날 사무실의 전화벨이 힘차게 울려 수화기를 들어보니 합동참모본부에 근무하는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의 목소리였다. 그는 합참의 중요 작전 및 전략부서 과장으로 활약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금 주요업무가 많아 필자가 필요하니 당장 그곳으로 와서 함께 근무하도록 차출하겠다”는 통보였다. 필자는 너무 아쉬웠다. 작전 직능의 장교라면 누구라도 먼저 선점하고 싶은 좋은 보직이었으나 현재 부대의 상황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전술토의가 지속되고 곧 사단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인 전투지휘검열이 있어 존경하는 사단장의 얼굴이 순간 스쳐갔다. 필자는 “참모님, 우선 가겠습니다. 헌데 곧 있을 전투지휘검열이 끝나고 가겠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야, 사단이 중요해? 모든 사단을 관장하는 합참이 중요해? 우선순위를 알아야지..., 또 니가 없어도 사단의 전투지휘검열은 받을 수 있어... 우선 선조치할터이니 기다려...”라고 강요했다. 필자는 작전 직능이면 누구나 먼저 보직을 받고 싶어하는 합참의 주요 부서에서 발탁해 준 전 참모가 너무도 감사했다. 하지만, 현재의 직속상관인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이 신뢰하며 아끼는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부하의 도리를 다해야 했고, 전술토의 등의 산적한 중요한 업무들과 특히 사단장의 중요한 평가인 전투지휘검열 수검을 위해 모든 것을 총괄하여 준비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당장 갈 수가 없어 양해를 구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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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8)]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사령부의 간부들이 오른 산 정상에 있는 ‘감악산비’의 글자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거의 닳아 없어져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감악산비가 삼국시대에 세운 비석임은 거의 확실하다. 북한산 순수비와 형태가 비슷하여 진흥왕 순수비, 진평왕의 순수비 또는 설인귀비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2019년 9월 이 비석의 몇 글자가 해독되었는데, 광(光), 벌(伐), 인(人) 등 글자들이 있었으므로 영토정벌 후 세운 순수비일 가능성에 더 무게가 쏠렸다. '이벌찬'의 벌처럼 신라의 관등명을 뜻하는 낱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근에 칠중성이 있어 고구려와 신라 간에 칠중성 전투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새로 글자가 확인되면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 논문도 나왔다. 삼국시대에도 임진강 중류를 낀 군사적 요충지였듯 6.25남침전쟁 중에 치열하게 벌어진 설마리 전투(글로스터 고지 전투 또는 임진강 전투)의 무대이기도 하다. 설마계곡 입구에는 이를 기리는 영국군 참전 기념비가 있다. ([김희철의 전쟁사](22)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 제 5차 공세 저지시킨 영국군의 설마리 전투’, 2020.02.03. 참조) 또한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감악산은 현재에도 파평산과 더불어 주요 감제고지라는 군사적 요충지라 주변에 많은 군부대도 주둔하고 수시로 전술토의가 이루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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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7)]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 및 작전계획을 숙지토록 유도했던 한탄강 주변의 군자산, 마차산, 감악산 등 산악지역 등반은 필자에게 또다른 추가 임무를 부여했다. 산 정상에 올라 간부들에게 작전계획과 지명 유래를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간이 전술토의도 병행했다. 이를 위해 필자는 늘 한 장짜리 지명 유래 및 지역 전사 설명서를 만들어 즐건 산행이지만 간부들이 지형 숙지를 통해 작전에 보다 효율적으로 기여하는 도랑치고 가재잡는 성과를 올려야 했다. 무적태풍부대 인접인 마차산은 동두천시의 소요동과 연천군 전곡읍 천파리의 경계에 위치한 588m높이의 산으로 3번 국도와 경원선 철도를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보고 있다. 이제까지 소요산 유명도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마차산인데 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막힘없이 터진다. 마차산은 감악산의 지맥으로 시의 서북쪽을 감싸고 있으며 소요동 서단에 위치하면서 한북정맥과 연결되어 있다. 꼭대기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비가 있었는데 감악산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산 정상엔 축성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산 남쪽에 마고개가 있고 북쪽에는 옥녀봉이 솟아 있다. 산이름은 ‘광여도’ 등에는 마차산(磨嵯山)으로, ‘대동여지도’에는 마차산(摩次山), ‘팔도군현지도’에는 마차산(磨差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조선지형도’에 마차산(磨叉山)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사진의 설명서에 있는 감악산(紺岳山)은 화악산, 송악산, 관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높이는 해발 675m이다. 지명은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보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감박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신라시대부터 무속신앙에서 영산으로 여겨 국가적으로 소사(小祀)의 격으로 제사를 올렸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정상은 평지인데 석단이 있고 그 위에는 감악산비 혹은 비뜰왕비라 불리는 석비(石碑)가 있다. 인근의 전설에 7세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실은 이 지역 사람이고 감악산비는 설인귀의 비석이라고 전해지지만, 이는 지역주민들이 설인귀를 동향인으로 삼은 결과일 뿐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비석은 지역 민간신앙에서 감악산신의 상징과도 같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영산이라 불리는 산에는 사찰들이 많기 마련인데, 감악산은 감악산신 신앙이 너무나 강해서 들어섰던 사찰마저 대부분 폐찰이 되었고, 현재는 범륜사를 비롯해, 수월사, 봉암사, 미타암 등의 절이 남아있다. 하지만 인근의 수량이 풍부한 운계폭포 등으로 절경이다. 정상에서는 북쪽 방면에 있는 임진강 건너편으로 휴전선 일대가 보이며, 날이 맑으면 개성시의 송악산까지도 희미하게나마 보이곤 한다. 정상인 장군봉 바로 아래에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하고자 숨어지냈다는 전설이 있는 ‘임꺽정굴’도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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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6)]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는 종무식날에 작전항공장교(S-3Air)들을 소집하여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하였고, 연초 시무식날에는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여 붐을 조성했던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추진했다. 교육훈련을 부대운영 중점으로 강력히 시행하자 훈련을 통해 숙달된 부대원들의 전투준비 태세는 자연스럽게 강화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장병들의 사기가 고양되면서 안전사고 없는 완벽한 부대관리를 하는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교육훈련 제일주의’ 강력추진 붐 조성에 따라 숙달된 부대원들은 각종 검열 및 평가에서 좋은 성적도 올리게 되었고, 그해 연말에는 전투지휘검열 최우수 및 3년 연속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했다. 한편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은 교육훈련의 일환으로 참모 및 실무자들과 함께 주둔지 및 작전지역 주변의 마차산, 감악산, 군자산 등의 중요 산악지역 등반을 통해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을 숙지토록 유도했다. 그 덕분에 상급 부대에서 주관한 각종 전술토의시에 현 지형을 두발로 확인한 부대원들은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상하급자 사이에 느꼈던 거리감도 같이 땀을 흘리며 해소되어 자연스럽게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다음편 계속)
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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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5)]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통제부에서 하달된 메시지에 의해 휴전선으로 책임 지역내에 적의 미사일 등 화력이 집중되고 적 지상군들이 불법적으로 남침하면서 사단기동훈련 상황은 조성되었다. 그 와중에 전선 일부가 돌파되고 정상적인 방어가 어려워진 상태에서 적의 미사일이 사단 사령부에 집중되어 지휘소 기능이 마비되며 침투해있던 특수작전부대들의 기습이 지속되자 사단 지휘소를 이동하며 다음 단계작전으로 전환시킬 상황이 되었다. 당시까지의 상황을 식별한 참모들의 체계적이고 협조된 상황분석과 참모판단절차에 따라 사단장에게 지휘소 이동을 건의했고 사단장은 신속 정확한 지휘결심을 통해 이동 및 다음 단계작전 지침을 하달했다. 그동안 사전 반복된 숙달훈련을 했던 덕분인지 전 부대원들은 사단장 지침에 따라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행동하며 지휘소 이동 준비를 했다. 먼저 임시로 편성된 수색조가 정찰을 완료하고 경계를 강화한 예비지휘소로 선발대가 이동했다. 잠시후 선발대가 도착하여 지휘소 편성을 완료했다는 보고를 접수하자 곧 본대도 이동을 개시했다. 이때 공중에서는 헬기가 공중 엄호를 하면서 통로상 주요 감제고지 및 건물에는 선점조가 경계를 강화했고, 이동간에도 지휘통신망을 유지하며 예하부대 작전을 지휘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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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5)]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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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4)]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재적소 상황에 부합된 훈련을 강인하게 반복 숙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코앞으로 닥친 사단기동훈련을 위해 본부대 및 직할대들을 예비지휘소 운영 지역에 사전 투입하여 지휘소 텐트 설치 훈련을 했고, 이동로 상의 중요 감제고지 및 건물지역에는 수색조에게 점령 훈련도 시켰다. 행정적 훈련을 최소화 시키기 위해 물동량도 통제하여 사전에 꼭 필요한 물자로 경량화 시키며 실제 전투시를 대비하도록 강구했다. 또한 타부대 기동훈련의 평가관으로 참관하며 벤치마킹한 장점들뿐만 아니라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많은 것들까지도 참고하여 참모들의 체계적이고 협조된 상황분석과 참모판단절차에 따른 정확한 지휘결심을 통해 지침을 하달할 수 있도록 숙달도 했다. 드디어 그해 9월25일 새벽에 군사령부 통제관들과 인접 사단 평가관들이 사단에 도착하면서 사단기동훈련은 시작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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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4)]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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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3)]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 휴전 이후 전쟁 없는 평화가 반세기 넘도록 지속되자 각 부대는 오랫동안 한 지역에 고착되어 주둔하여 무거워질 때로 무거워진 상태였고, 부대를 이동하거나 각종 훈련시에도 실제 행동보다는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각부대는 행정적 처리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모든 장비와 물자를 이동시키는 실제 사단기동훈련을 강조하며 실전적인 전투에 대비하여 부대를 경량화시키려는 노력을 추구했다. 또한 적의 미사일 공격이나 침투한 특작부대의 습격으로 지휘소가 무력화될 때에도 신속히 복구하여 전투 지휘력을 유지하는 태세를 갖추는 것도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위치가 노출되고 피해를 입어 무력화된 현 지휘소에서 신속히 예비 지휘소로 이동하여 전투지휘를 계속하는 것이 사단기동훈련의 평가 중점이었다. 따라서 지휘소를 이동할 때 사전에 예비지휘소와 이동로를 수색정찰하여 침투한 적 특수작전부대로부터 보호된 상태를 유지하는 조치가 우선되어야 했다. 이때 동기생 정보보좌관과 사전 토의 및 협조하는 과정에서 지상 수색정찰에 추가하여 헬기로 항공정찰을 병행하며 지휘소 이동간에 공중 엄호하는 방법을 계획하고 훈련시기에 맞추어 항공기를 사전에 요청했다. 물론 인접 열쇠부대 기동훈련의 평가관으로 참관하며 그부대의 장점들뿐만 아니라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많은 것들까지도 벤치마킹해 새롭게 발전시킨 결과이기도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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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3)]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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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2)]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바로 코앞으로 닥친 합참전투준비태세 검열과 작전참모 강수명(육사31기)중령의 대령 진급심사를 앞두고 있었기에 사단기동훈련의 성공적 평가가 더욱 중요해진 상태에서 천군만마를 얻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때마침 기동훈련을 앞두고 육사 동기생 김종완 소령이 사단 정보보좌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야전 전후방 각지에서 정보분야 전문가로 명성을 날리다가 이탈리아의 한국대사관 육군무관으로 발탁되어 성공적인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상태였다. 참모들의 체계적이고 협조된 상황분석과 참모판단이 절실한 시점에 정보분야에 대한 풍부한 야전 경험과 출중하고 원만한 성격의 인덕과 포용력을 갖춘 동기생이 인접 보좌관으로 부임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훈련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동기생과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것은 두 번째이다. 첫 부임지인 승리부대의 최전방 대대에서 통신장교인 안철주는 대대 통신참모로 필자는 소대장으로 함께 근무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43) “국제신사를 '철면피'로 만든 최전방 오지” 참조) 그때에도 대대참모인 동기생의 보이지 않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번에 전입온 김 소령도 승리부대 근무 당시, 상급 군단 전투력 측정시에 검열관으로 필자를 도와준 추억도 있었기에 반가운 동기생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큰 힘도 되었다. 특히 문무를 겸비한 정보보좌관 김 동기는 유머감각이 뛰어나며 주변을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게다가 이탈리아군의 전술지식까지도 겸비함에 따라 더욱 창의적인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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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2)]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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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1)]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후방의 사단급 부대는 사단장 재임기간 중에 상급부대로부터 전투지휘검열을 받으며 부대를 평가하고 우수부대는 대통령부대표창을 받기도 한다. 헌데 통상 전투지휘검열 전에 사단 자체 기동훈련을 한다. 이때 인접부대의 지휘관 및 참모들이 평가관으로 파견되어 상호 벤치마킹할 기회를 갖는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58)] ‘유명세에 가려진 그늘은 과유불급 탓’ 참조) 필자가 근무했던 무적태풍부대도 사단기동훈련을 했다. 그런데 무적태풍부대는 전투지휘검열보다도 합참전투준비태세 검열이 바로 코앞으로 닥쳐 사단기동훈련의 중요도가 더욱 높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사단의 부대운영 및 훈련을 총괄하는 주무참모인 작전참모 강수명(육사31기)중령은 당해연도 대령 진급심사를 앞두고 있었기에 작전참모를 보좌하는 필자는 더욱 긴장하며 전력을 다하여 타부대보다도 더좋은 성과를 올려야 했다. 물론 그전에 인접 열쇠부대 기동훈련의 평가관으로 참관하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대답게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훈련에 임하던 장점들뿐만 아니라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많은 것들까지도 참고했다. 특히 열쇠부대 사단장 김석재 장군의 정확한 상황판단과 지침을 하달하는 작전 지휘력을 보좌하는 참모들의 체계적이고 협조된 상황분석과 참모판단절차의 돋보인 모습을 벤치마킹하여 사전 훈련 및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공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무언가 타부대보다 더 잘하는 창의적인 것이 필요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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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1)]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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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0)]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안다는 뜻으로 과거 전통과 역사가 바탕이 된 후에 새로운 지식이 습득되어야 제대로 된 앎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나온 사자성어로 공자는 스승의 자격에 대해 “옛 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고 말했다. 공자가 말한 옛 것은 태평성대였던 주(周)나라 때의 여러 문물과 제도를 가리킨다. 당시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는데 훌륭한 이전 시대의 문물과 정신을 배우고 본받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이처럼 온고지신은 과거의 전통과 역사, 학문을 먼저 충분히 익히고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함을 말한다. 특히 공자는 지식을 전수하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참다운 스승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이자 태도로써 언급하였다. 유의어로는 옛 법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의 사자성어 법고창신(法古創新)도 있다. 헌데 옛 것이라는 개념이 바뀌고 있다. 일전에 삼성전자를 방문했을 때 직원들의 근무 수명주기(Life cycle)가 약 7년 정도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업무가 너무 힘들어 자진 퇴직하며 경력을 인정받아 타회사에 취직한다. 그래서 필자는 “그럼 회사의 노하우가 타회사로 노출될 가능성이 많겠네요?”하고 질문하자, 설명한 그 간부는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때문에 6개월만 지나면 또 더 발전된 제품이 나오게 되어 괜찮다고 말했다. 헌데 그는 “그래서 졸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순간순간을 긴장하며 신제품 개발에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의 사례처럼 모든 것이 신속하게 변화하며 발전한다. 그래서 오래전 과거가 아니라 바로 어제 일도 옛것이 되는 실상이다. 따라서 요즈음 신세대 및 각종 단체 및 조직에서는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란 단어가 더 익숙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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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60)] 온고지신(溫故知新)보다는 벤치마킹(Benchmarking)이 성공의 첩경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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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9)] 자주포 장군임을 증명한 신현돈 군사령관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신 장군은 중장 지휘관 보직인 특전사령관을 마치고 참모 보직중 최요직인 합참 작전본부장직을 수행했으며 이때 박선우 중장 등 동기들은 군단장 등 1차 보직을 수행중이었다. 동기들보다 그동안의 직책 자력이 더 좋았고 그것도 최요직에만 발탁되었다. 대장으로 진급한 신현돈 장군은 2013년에 전역한 박성규(3사10기) 대장의 뒤를 이어 1군사령관에 취임해 성공적인 지휘를 하고 있었다. 헌데 이듬해 대비태세 기간 중이었으나 육본 지침에 의해 모교 방문 행사에 참석했다가 음주 및 민간인과의 실랑이 사건이 터졌다. 사실은 그 민간인이 복장 규정을 모르는 오해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나중에 신 장군을 만난 그는 자신의 실수에 어쩔줄 몰라하며 사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 장군은 보이지않는 압박도 있었지만 2014년 9월2일, 군 전체에 영향을 끼칠까 걱정하며 과감하게 책임을 지고 미련없이 스스로 전역하여 견인포가 아닌 자주포임을 증명했다. 헌데 얼마뒤 국회에서 군의 최고 계급인 대장을 정확히 확인도 안하고 무리하게 전역 조치했다는 이의도 제기된 바 있다. 또한 2014년 11월경 여러 언론에서 그의 경질이 조금은 억울한 처사라는 보도가 게재됐다. 연합TV뉴스에 따르면 당시에 신 장군은 인사불성으로 취한 것도 아니었고, 모교 행사에 방문하는 것도 사전에 육군본부에 보고하여 허가를 받은 일이며, 휴게소 화장실에서 민간인과 신체를 접촉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니고 화장실에서 사람(사령관)이 쓰고 있으니 다른 곳 이용하라는 부관의 말이 왜곡된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복장이 해이했다는 신고 또한 상의를 바지에 넣지 않는 신형 전투복의 특성을 모르는 사람이 신고한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시기에 좋든 싫든 술을 마신 것이 잘한 행동은 아니어도, 국방부에서 사실관계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일단 잘라버리며 사건을 성급히 종결했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게다가 국방부 감찰관실에서도 음주 추태는 없었다며 다시 말을 바꾸었다. 이 때문에 신현돈 대장의 전역에 관해선 사실관계도 제대로 확정짓지 않고 무작정 군 최고 계급의 장성을 전역시켰다는 국방부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허나 전역한 후에도 자주포 신현돈 장군은 청주의 모 대학에서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물들 양성을 위해 자신의 열정과 노하우를 전수하여 가장 인기 높은 명교수로 존경을 받으며 참군인의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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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9)] 자주포 장군임을 증명한 신현돈 군사령관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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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8)] 자주포 장군임을 증명한 신현돈 군사령관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도 업무보고시에 사단장의 극찬을 받았던 쭈구리 신현돈 대대장은 1955년 충북 괴산군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목도 초등 및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시로 유학해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육사 35기로 입교하여 1979년 소위로 임관했다. 위관급 장교 시절에는 국군기무사령부(당시 보안사)에서 근무하다가 소령 진급하자 본인의 강력한 의사 표현을 통해 다시 야전으로 복귀했을 때 필자의 전임 작전보좌관이었다. 이후 승승 장구하여 대령시절에는 육본 기획홍보과장, 합참 합동작전과장 등을 지냈다. 준장으로 진급한 뒤 3군 작전처장과 합참 등 작전직능 보직에서 주로 근무했고, 국방부 대변인 임무 수행시에는 모언론의 ’돌발영상‘에 제일 많이 등장한 군인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소장 시절에 1사단장, 합참 작전본부 작전기획부장, 중장 시절에 특전사령관과 합참 작전본부장, 군사지원본부장을 역임했다. 육사 35기 중 선두주자로 대장 진급에 가장 유력했던 커리어를 갖췄다. 동기생 중 신현돈, 박선우 2명만이 중장 1차 진급을 했으며 결국 이 두명이 대장진급을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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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8)] 자주포 장군임을 증명한 신현돈 군사령관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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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7)] 자주포 장군임을 증명한 신현돈 군사령관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장이 대대장실 앞에 도착하자, 대대장직을 수행하던 신현돈 중령은 도열한 참모들과 함께 경례하며 영접을 했다. 헌데 짚차에서 내린 사단장 이영대 소장은 첫마디로 “어이, 쭈구리 그동안 잘 있었나..?”하며 신 대대장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사단장 초도방문에 긴장해 있던 신 중령 본인은 어리둥절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신 중령의 별명은 생도시절에는 ‘아가리’였다. 입이 유난히 크며 말을 잘하는 달변가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굴에 주름이 많은 그에게 언제부터인가 얼굴이 주름으로 쭈글쭈글하다고 ‘쭈그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단사령부에서 예하부대까지 이동하는 동안에 필자는 사단장에게 방문할 부대의 작전 임무와 환경 및 대대장의 특징 등에 대해 보고했다. 수방사 작전장교 시절에 직속상관인 참모장으로 남태령으로 부대를 이전하는 사업에 함께 고생했던 탓인지 수행하는 필자에게 허물없이 이것저것 물어보던 사단장에게 우스갯소리로 신 대대장의 별명 ‘쭈구리’를 이야기했다. 별명을 듣던 사단장은 달리는 차가 흔들릴 정도로 호탕하게 껄껄 웃으시며 “맞어, 신현돈 중령 별명을 누가 지었는지... 잘 만들었어...ㅋ”하면서 “대대장 부임전에 사단 작전보좌관 근무했으니 업무에 빈틈이 없겠군... 잘하고 있지?”라며 신뢰 의미의 반문을 던졌다. 첫 만남의 대화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된 대대 초도 방문 업무보고는 신 중령 얼굴의 주름처럼 경험의 노하우와 의기에 가득차서 자신감 넘치는 그의 목소리부터 사단장을 매료시켰다. 특히 사단 지침이 내려오기도 전에 전투준비와 교육훈련에 관련해서 본인이 착안하여 시행하며 제시한 내용들은 사단장을 흡족하게 만들었고, 사단장은 ‘부대의 임무도 중요하지만 오늘 보고를 받으니 상급 및 인접부대에 사단을 대표할 수 있는 대대이다’라며 극찬했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사단장은 필자에게 군생활에 가르침을 주는 명언을 남겼고 얼마후 지휘관회의에서도 언급했다. “신 중령은 본인이 대대장으로서 스스로 착안해서 전투준비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바로 이것이 軍간부의 자세이다”라면서 “軍간부는 견인포가 아닌 자주포가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훗날, 신현돈 중령은 다음 사단장이 부임한 후에도 자신의 능력과 지휘통솔력을 인정받으며 대대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사단사령부의 작전참모로 영전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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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7)] 자주포 장군임을 증명한 신현돈 군사령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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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6)] 자주포 장군임을 증명한 신현돈 군사령관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상급부대 지휘관이 새롭게 부임하면 업무 파악을 위해 예하 부대를 방문하여 업무보고를 받으며 현장을 확인한다. 무적태풍부대 사단장 이영대(학군4기) 소장도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예하 부대 확인 방문을 시작했다. 빨리 부대를 파악하고 분석하여 임기동안 부대를 어떻게 지휘할 것인가를 차상급부대 지휘관에게 업무보고를 해야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비서실장과 협조하여 중요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부터 우선 방문하도록 사단장 시간 계획에 반영했고 참모들이 번갈아 수행하도록 조치했다. 한편 군단장 및 군사령관 초도 업무보고 일정이 하달되어 사단장은 더 급해졌다. 특히 작전 계획이나 업무보고를 참모가 아닌 사단장이 직접 보고하도록 강조가 되어 연습도 필요했고, 임기동안 부대를 어떻게 지휘할 것인가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헌데 사단장의 예하부대 초도방문시 수행할 참모들이 업무로 바쁘다보니 필자가 수행하여 예하부대를 방문해야될 상황이 있었는데, 우연히도 그 부대를 작전보좌관 전임자 신현돈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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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6)] 자주포 장군임을 증명한 신현돈 군사령관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