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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4)]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일 선수의 무료 치료와 마지막 영면시까지 도움을 주었던 을지병원은 1956년 11월1일 박 산부인과의 개원을 모태로 굴지의 교육의료재단으로 성장했다. 70년이 다되도록 끊임없이 성장해 온 을지재단 역사의 중심에는 박영하 설립자의 ‘인간사랑 생명존중’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 가치를 바탕으로 을지재단은 6.25남침전쟁으로 황폐화된 의료시설의 재건과 의료복지 구현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일찌감치 병원을 공익법인으로 전환하여 의료복지 선진화의 길을 개척했다. 고(故) 박영하 박사는 1950년 6.25남침전쟁 당시 자진 입대해 군의관으로서 부상병들을 치료했고, 1953년 7월 속초 제1외과병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고도 3년을 더 복무하다가 1956년 7월 중령으로 예편했다. 아내 전증희 여사도 결혼후 강릉의 59육군병원 간호부장으로 재직하며 휴전을 맞았다. 6.25남침전쟁은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엄청난 상흔을 남겼지만, 의학 자체의 발전도 따랐다. 전쟁은 당시 대부분부상병의 치료와 연관성이 높은 일반외과, 정형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마취과 등 외과계열의 의료기관들에게 더욱 큰 영향력을 끼쳤다. 박 박사 역시 의대를 갓 졸업한 젊은 의사로 전쟁에 뛰어들어 수천건의 수술을 담당하며 군진의학(Military Medicine)의 개척자로 부족함 없는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민족의 비극을 절절히 체험하며 공고화된 조국애를 갖고 실천했고 이후 국민보건의료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더해 그가 별세하자 의사 최초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또 2018년 이달의 현충인물로, 그해 4월에는 이달의 영웅으로 각각 선정되기도 했으며, 부인인 전증희씨도 6.25남침전쟁 당시 간호장교로 참전했고, 박 박사의 아들인 현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과 손자 역시 병역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여 ‘병영명문가’로 선정됐다. 현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은 “나라를 위해 병역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확산하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라며 “앞으로도 병역 명문가의 값진 용기와 헌신을 극진히 예우하기 위해 실질적인 혜택을 확대하겠다”라고 말했다. 박 회장 부자(父子)의 이러한 사명감과 ‘인간사랑 생명존중’의 정신은 국민 영웅인 김일 선수의 장기간 지병 치료와 삶의 마지막까지도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병역 명문가인 박준영 회장의 “제복을 입고 병역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예우하겠다”는 말처럼 비록 전시가 아닌 평시였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군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뻔한 필자와 김종완 동기에게도 직접 을지병원으로 데려와 완벽하게 치료하는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해 진심어린 감사와 함께 깊은 감동을 주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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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일 선수는 1929년 전남 고흥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0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격과 괴력을 갖고 있던 김일의 운명은 어느날 우연히 일본 잡지에 실린 역도산의 기사를 보고 바뀐다. 씨름에서는 천하장사였던 김일은 프로레슬링으로 이름을 떨치겠다고 결심했다. 부모도, 16살 때 결혼한 아내도 모르게 씨름판에서 모은 자금을 복대에 차고 일본행 배를 탔다. 그러나 김일의 일본행은 순탄치 않았다. 불법체류자로 체포돼 1년형을 살았다. 그는 1년간 역도산에게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고, 역도산은 얼굴도 모르는 김일의 신원을 보증하고 그를 감옥에서 구해냈다. 이어 1957년 김일은 역도산체육관에 1기로 입문하면서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오오키 긴타로’라는 일본명은 프로레슬러로서의 첫 이름이었다. 이후 김일은 가난하던 1960년대 서민들의 위안이자 청소년들의 영웅이었다. 온갖 반칙에 코너에 몰리다가 위기의 극단에서 박치기 일격으로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모습, 무엇보다도 일본인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대결에서 선보인 박치기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호랑이 모습의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일본 프로레슬러들을 상대로 싸우는 장면은 TV앞의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 김일이 세계 챔피언에 오른 해는 1963년이었다. 선천적으로 단단한 이마를 앞세워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대회에서 세계태그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러나 같은 해 스승 역도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와 대한프로레슬링협회를 설립했다.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5년 극동 헤비급 챔피언, 1966년 올아시아 챔피언, 1967년 세계헤비급 챔피언 등 무수한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으며 승승장구했다. 1972년 도쿄 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며 1970년 중반까지 세계 프로레슬링을 휘어잡은 김일은 프로레슬링 인기가 몰락하면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 김일에 대한 소식은 이런저런 투병 소식이 대부분이었다. 사업가로 변신은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선수생활에서 얻은 후유증이 김일을 괴롭혔다. 1994년에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에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기도 했다. 최초 은퇴한 것은 1970년대였지만, 은퇴식은 그때 한 번이 아니었다. 일본 신문기자단은 1995년 도쿄돔에서 김일의 은퇴식을 다시 마련해주었고, 한국에서도 대한체육회가 2000년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거행했다. 이후 건강이 호전돼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의욕을 보였지만, 결장 제거수술 이후 운신에도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2006년 10월26일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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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7-2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레슬링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60~70년대에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동네마다 흑백TV나 라디오가 있는 집이나 주변 만화가게로 주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곳에 합류했던 필자를 포함해 흑백TV를 시청하던 국민들은 거구의 외국인 선수를 호쾌하게 링에다 내리꽂는 한국 프로레슬러를 보며 어려운 형편을 잠시나마 잊고 환호성을 질렀다. 특히 일본 선수들과 경기일 경우 그 함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환호성 가운데는 국민 영웅으로 불리던 '박치기왕' 김일이 있었다. 이후 프로레슬링이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기억 속에서 '김일'이라는 이름은 잊혀져갔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김일'은 영원한 영웅으로 남아있다. 헌데 을지병원 복도에서 재활치료를 위해 열심히 걷고 있는 필자의 바로 눈앞에 그 김일 선수가 환자복을 입어 약간은 초췌해 보였지만 아직도 건장해 보이는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어린시절 국민적 영웅이었던 김일 선수를 직접 만났고, 그가 재활치료 중인 필자를 스쳐간 것에 흥분하며 걷는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김일은 평소 당뇨합병증, 고혈압, 심부전 등의 지병을 앓아왔고, 필자가 을지병원에 입원했던 1994년부터 병원 4층에 병실을 무료로 제공받고 치료를 받아왔다. 박치기 하나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는 결국2006년 10월26일 낮 12시17분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향년 77세로 별세했다. 13년 동안 치료를 받아왔던 을지병원에서도 김일은 영웅이었다. 당시 김중봉 을지병원 원무부장은 “다른 환자나 문병객들이 그분을 보려고 병실을 방문해 사인을 받아갔다”고 말했다. 스타의 입원을 미리 알고 있었던 다른 병실의 환자들도 그 분위기에 동참했다. 이들뿐 아니다.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이었던 별이 진 것에 많은 이들이 명복을 빌었다. 그해 10월28일 오후 경기도 벽제에서 화장한 뒤, 유골은 고향인 전남 고흥에 안치됐다. 허나 많은 이들이 김일 선수에게 프로레슬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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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7-2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어느날 고교시절 절친인 이일성 한림대 교수가 찾아왔다. 그는 양손에 매우 무거워 보이는 책들을 들고 위문했는데 그 책들은 소설 ‘영웅문’ 시리즈 였다. 의사인 그는 지금은 거의 없어진 소위 영양탕 수육도 정성스레 펼쳐 놓으며 그 수육의 세포조직이 사람과 거의 유사하여 병상 환자들의 회복 영양식에는 최고라며 강권했다. 필자는 그것이 평소에도 즐겨 찾던 음식이었고 가족의 도움을 받아 누워서 너무도 맛있게 먹으며 고교시절 짝꿍의 배려에 감사했다. 이 교수는 고교 3학년때 육사 입학시험에 응시하는 전날에 수업 휴식 시간에 조용히 필자를 불러내 쟁반만한 크기의 엿을 건네주며 합격을 기원했던 친우로 현재까지 근 50년 동안의 지속적인 우정을 나누고 있다. 특히 병원 침대위에서 재활치료를 하던 필자가 지루하지 않게 소일할 수 있도록 영웅문 시리즈를 선물해 침대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기간을 독서의 재미에 빠져들며 극복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 가족의 도움없이 화장실에서 편하게 용변을 볼 수 있다는 현실에 천하를 모두 얻은 기분이었지만 한 단계 격상된 재활치료는 내 의지와의 싸움이었다. 한때 당시 상황에 따라 군생활 포기까지도 생각했던 필자에게 사관학교 동기들은 이미 대대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소식은 필자에게 치료로 당시는 병원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재활시간을 단축시켜 앞서가는 동기생들을 빨리 쫓아가겠다는 각오와 동기부여가 되어 재활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불을 댕겼다. 근육은 모두 빠지고 앙상한 뼈만 남아 새다리가 된 상태로 머리가 똑바로 서자 현기증으로 시야가 흐려지며 중심을 잡지 못해 침대에 쓰러지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훨체어를 타고 물리치료실을 찾아 보행기에서 첫걸음을 떼었다. 그때 근육이 없는 새다리보다는 팔의 힘에 의지했고, 그나마 팔에 힘이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다는 생각도 했다. 위의 사진에 게시된 재활기구들을 사용해 보행 치료를 받는 모습처럼 보행기에서 처음에는 다리가 끌렸으나 몇일이 지나자 다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점차 좋아지자 우측 사진처럼 이동식 보조기를 사용해 병원 복도를 쉴새 없이 누비고 다녔다. 그때 복도에서 환자복을 입었지만 왠지 카리스마를 느끼며 단단해 보이는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우리나라의 프로레슬링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김일 선수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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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7-2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당시에서 24년이 지난 2018년 8월17일 기상청의 '2018년과 1994년 폭염 비교' 보도자료에 따르면 2018년 여름철(6월 1일∼8월 16일) 전국 평균기온과 최고기온은 각각 25.5도와 30.7도에 달해 1973년 통계작성 이래 가장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입원 당시인 1994년에는 평균기온과 최고기온이 각각 25.4도(2위)와 30.7도(공동 1위)였다. 2018년 같은 기간 일조시간은 611.3시간으로 역시 가장 길었다. 1994년에는 564.6시간으로 3위였지만 그때의 폭염은 위문온 방문객들의 더위에 지쳐있는 모습에서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치료를 위해 시원한 병실에 누워 극심한 더위를 느끼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필자는 어쩔 수 없이 누워만 있었지만 위의 사진처럼 월력에 그날의 주요 일정 및 방문자들을 메모하는 일로 지루함을 해소했다. 그때 필자의 배앞에는 골절된 골반의 고정을 위해 장착한 골반뼈에서 연결된 골반고정핀(Pelvis frame)이 불쑥 튀어 나와있었다. 헌데 로보캅처럼 쇠가 튀어나와 불편한 것보다는 침대에 누워 생리적 현상까지도 가족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욱더 괴롭고 미안했다. 그래서 당시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침대 옆에 있는 화장실을 침대위의 골반고정 그네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나의 다리로 이동하여 직접 용변을 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입원 3개월 정도 지나자 침대에서 일어서도 된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았다. 그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만 있다보니 다리의 근육은 모두 빠지고 앙상한 뼈만 남은 새다리가 되어있었고, 머리가 똑바로 서자 현기증으로 시야가 흐려지며 중심을 잡지 못해 침대에 쓰러지며 다시 누워야만 했다. 하지만 몇일 뒤에 난 당시 최대의 소원이었던 코앞에 있는 화장실을 두다리를 이용해 갈수 있었다. 물론 힘이 빠진 다리보다는 손으로 침대 모서리를 잡고 간신히 이동했지만 3개월만에 가족의 도움없이 화장실에서 편하게 용변을 볼 수 있다는 현실에 천하를 모두 얻은 기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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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7-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구에서 을지병원으로 옮긴지도 두달이 넘어갈 즈음에 침대에 장착된 골반고정 그네에 누워 공중에 엉덩이를 띄우고 꼼짝없이 못 움직였는데 왠지 좌측 새끼발가락이 계속 퉁퉁 부어있으며 통증을 느꼈다. 회진하는 담당 과장에게 통증을 이야기하고 X-ray를 찍어보니 교통사고 당시에 다른 곳이 워낙 심하게 다쳐 좌5족지의 중간마디가 탈골된 채 엇갈려 붙어버린 상태를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엇갈려 붙으며 굳어버린 발가락 마디를 떼어내어 다시 정상적으로 붙이는 수술을 했다. 발가락 부분 마취를 하고 수술에 들어갔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도중에 마취가 풀렸다. 엇갈려 붙은 발가락 마디를 분리하여 다시 정상적으로 연결하고 이를 고정하기 위해 가운데에 핀을 박을 때 마취가 풀린 상태라 통증이 심했고 고통을 참는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수술대 위가 땀으로 질퍽해질 정도였다. 문득 일제 강점기에 왜경들이 잡혀온 독립투사들에게 손발톱을 벌리거나 뽑는 고문을 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의 애국 투사들도 독립을 위해 이런 고통을 참아내며 버티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수술대의 아픔은 잠시 희석되었으나 너무도 힘들었다. 때마침 100년만에 찾아온 폭염으로 출입하는 방문객이나 병원의 의사 및 간호사들도 모두 치쳐있는 모습이었다. 필자는 병원 밖의 폭염보다는 마취풀린 상태로 겪은 고통의 수술 때문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병실로 돌아와 다시 침대위의 골반고정 그네에 엉덩이를 싣고 다시 누웠는데, 그때 TV에서 속보가 떴다.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뉴스를 전하며 패널들의 평가는 곧 지도자를 잃은 북한이 무너져 와해되고 남북통일이 앞당겨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덕택에 관심이 돌려져 수술시 받았던 통증은 반감되었다.(담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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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고 직후 필자의 응급처치를 했던 대구 가야기독병원에서는 복부 수술로 파열된 비장을 제거하고 횡경막과 갈비를 치료하며 파쇄골절된 대퇴부에 골수핀을 삽입했다. 이 상태로 을지병원에 도착하자 전문의들은 필자의 깨진 골반을 고정을 위해 3차 골반수술을 하며 골반고정핀(Pelvis frame)을 박아 필자의 배앞에는 골반 뼈에서 연결된 고정핀이 불쑥 튀어 나왔고, 엉덩이에는 그네를 태워 침대 위에서 몸이 공중에 떠있는 모습이 된 상태로 두달 가까이 지냈다. 불행중 다행이도 같은 병실에 누워 치료받던 김종완 동기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꼼짝 못하는 필자 옆에서 소중한 말동무가 되었다. 반면에 간병하는 필자의 가족은 침대 옆의 쪽침대에서 잠을 청하며 어렵고 힘든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느날 오후 위문온 무적태풍부대 성당의 군종신부가 완쾌 기도를 한 뒤에 성체를 김종완 동기 부부에게 주며 덕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의 침대위에 누워서 골반고정핀(Pelvis frame)을 박고 엉덩이에는 그네받침으로 공중에 떠있는 상태로 이 모습을 지켜본던 필자는 군종신부에게 “육사 생도시절에 세례를 받았던 저에게도 성체를 달라”며 신의 가호를 바라는 마음으로 당연한 듯 말했다. 허나 그 신부는 개신교 세례는 안되고 성당에서 세례받으면 그때 주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부터 필자의 가족은 을지병원 인접에 위치한 명동성당 미사를 매일 참석하기 시작했다. 사실 하루종일 침대에서 꼼짝못하는 필자를 간병하기 위해 애쓰는 가족에겐 성당을 다녀오는 것이 24시간 간병하는 스트레스도 해소하며 가족들의 행복과 필자의 완쾌를 기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다행히도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경상을 입고 사고 당일부터 우리들을 곁에서 도움을 주었던 이재준 동기는 퇴원하여 사고 발생 한달 뒤인 5월26일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이 반가운 소식은 을지병원에서 치료받지만 완전하게 회복될지를 의심하며 군생활 포기까지도 생각했던 필자에게 재활의 희망을 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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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7-1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에 필자는 골반이 골절된 중환자로 침대에서 꼼짝 못하는 신세지만 생리적 현상은 어쩔 수 없었다. 대구에서 출발하여 서울 을지로에 있던 구 을지병원으로 이동하는 앰뷸런스 안에서도 할 수 없이 간병하는 가족의 도움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동안 최전방 전선의 오지에서 혹한과 엄동설한을 겪으며 많은 고생을 시켰는데, 이번 교통사고까지 애쓰는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가슴이 저려왔다. 을지문덕 장군을 기리는 서울 을지로에 도착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상업·업무 지구인 을지로동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진흙으로 된 언덕길이었다.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다고 하여 구리고개, 줄여서 ‘구리개’라고 불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인 1946년에 '을지로'라는 새 이름이 생기는데, 이는 당시 중국 상인들이 구리개 일대를 조선말 무렵부터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중국 수(隋) 나라를 격파했던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을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침대에 실려 을지병원에 들어서자 우선 사고 초기 입원하여 치료했던 대구의 병원보다는 규모가 훨씬 크고 전문화되어 있으며 왠지 친밀감도 느낄 수 있었다.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받던 김종완 동기의 용산고교 시절 절친인 을지병원 박준영 이사장의 따뜻하고 의리있는 배려에 감사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게다가 박 이사장의 특별한 관심이 표현된 강조 지시로 치료를 맡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더욱 신경을 쓰는 모습도 보였다.(다음편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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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6)]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고 발생 일주일이 지나자 함께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 교육을 받던 동기들은 수료후 각자의 임지로 출발하여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중 일부는 취임 일정에 여유가 있어 치료를 받던 병원으로 찾아와 위문과 격려를 하는 동기애도 보여주어 감사했다. 하지만 카풀제 세명의 동기들은 교통사고에 따른 부상으로 집에서 장거리인 대구 가야기독병원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할 운명이었다. 따라서 골반이 골절되어 침대에서 꼼짝못하고 누워있어야만 했던 필자의 머리속에는 만감이 교차됐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하던 동기가 조언했던 것처럼 “바로 전역을 하게 될지? 또는 회복이 되더라도 정상적인 근무보다는 전문분야에서 군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군생활을 할지?”라는 고민에 빠져있을 때, 긴급수술을 집도했던 담당 의사가 병실을 찾았다. 앞으로의 진로 고민에 빠져있던 필자는 담당 의사에게 “선생님, 제 몸이 이런 상태인데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물론입니다. 하지만 재활치료에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힘을 내세요...”라며 희망적인 위로의 대답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입원한지 2주차가 끝나갈 무렵 옆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던 김종완 동기에게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연락이 왔다. 그의 용산고등학교 시절에 절친이었던 을지병원 박준영 이사장이 서울로 올라와서 자기 병원에서 치료를 해주겠다고 제안하며 앰뷸런스를 보내겠다고 했다. 박 이사장의 제안에 대구의 병원에서 치료중인 우리들은 모두 동의하며 너무도 감사했다. 아무 인척도 없는 대구보다는 근무하던 부대와 가깝고 친척들과 지인들이 있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훨씬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재준 동기는 보행이 가능한 상태이라 이동시에 가족들을 많이 도와줄 수 있었다. 우리는 대구에서 출발하여 서울 을지로에 있던 구 을지병원으로 이동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다시 태어나 덤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준 신과 물심양면으로 전우애를 보여준 동기들께 감사드렸고 더불어 또하나의 생일을 정했다. 교통사고를 당했던 1994년 4월24일을 세명의 재탄생일로 정하고, 잔인한 4월도 우리에게는 축복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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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7-0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5)]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를 포함한 세명의 부상 동기들은 뜻하지않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며 군생활에도 먹구름이 끼였으나 기대 이상의 관심과 배려 덕택에 군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너무도 감사한 상관 및 지인들도 있었다. 사고발생 당일인 4월25일은 무적태풍부대 사단장 이취임식이었는데, 이임하는 이영대 사단장(학군 4기)은 아침에 출근해서 필자의 사고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고 한다. 故 이영대 사단장은 3년간의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필자를 아껴주고 믿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직전에 근무했던 부대인 수방사령부에서도 참모장과 작전장교로 수방사가 필동에서 남태령으로 이전시에 현장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뜻이 서로 통했었다. 그는 청천벽력같은 교통사고 소식을 접하고 후임 사단장 박기준 장군(학군 5기)에게 뒤처리를 잘해줄 것은 신신당부했다. 그 덕분에 같은 부대에서 사단참모부 보좌관을 했던 김종완 동기와 필자는 그 두 사단장의 따뜻한 배려로 많은 혜택을 받으며 군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필자와 김종완 동기의 부상 정도가 너무 심해서 군병원에 입원하지 못하고 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자 무사히 건강하게 회복되어 돌아오면 바로 대대장으로 취임할 수 있도록 입원 기간을 예하부대의 부대대장으로 보직을 조정하여 휴가처리가 되도록 조치를 해주었고, 해당 연대장이었던 정형진 장군도 흔쾌히 동의하여 안심하고 치료와 재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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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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