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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7)]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 및 작전계획을 숙지토록 유도했던 한탄강 주변의 군자산, 마차산, 감악산 등 산악지역 등반은 필자에게 또다른 추가 임무를 부여했다. 산 정상에 올라 간부들에게 작전계획과 지명 유래를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간이 전술토의도 병행했다. 이를 위해 필자는 늘 한 장짜리 지명 유래 및 지역 전사 설명서를 만들어 즐건 산행이지만 간부들이 지형 숙지를 통해 작전에 보다 효율적으로 기여하는 도랑치고 가재잡는 성과를 올려야 했다. 무적태풍부대 인접인 마차산은 동두천시의 소요동과 연천군 전곡읍 천파리의 경계에 위치한 588m높이의 산으로 3번 국도와 경원선 철도를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보고 있다. 이제까지 소요산 유명도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마차산인데 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막힘없이 터진다. 마차산은 감악산의 지맥으로 시의 서북쪽을 감싸고 있으며 소요동 서단에 위치하면서 한북정맥과 연결되어 있다. 꼭대기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비가 있었는데 감악산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산 정상엔 축성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산 남쪽에 마고개가 있고 북쪽에는 옥녀봉이 솟아 있다. 산이름은 ‘광여도’ 등에는 마차산(磨嵯山)으로, ‘대동여지도’에는 마차산(摩次山), ‘팔도군현지도’에는 마차산(磨差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조선지형도’에 마차산(磨叉山)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사진의 설명서에 있는 감악산(紺岳山)은 화악산, 송악산, 관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높이는 해발 675m이다. 지명은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보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감박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신라시대부터 무속신앙에서 영산으로 여겨 국가적으로 소사(小祀)의 격으로 제사를 올렸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정상은 평지인데 석단이 있고 그 위에는 감악산비 혹은 비뜰왕비라 불리는 석비(石碑)가 있다. 인근의 전설에 7세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실은 이 지역 사람이고 감악산비는 설인귀의 비석이라고 전해지지만, 이는 지역주민들이 설인귀를 동향인으로 삼은 결과일 뿐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비석은 지역 민간신앙에서 감악산신의 상징과도 같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영산이라 불리는 산에는 사찰들이 많기 마련인데, 감악산은 감악산신 신앙이 너무나 강해서 들어섰던 사찰마저 대부분 폐찰이 되었고, 현재는 범륜사를 비롯해, 수월사, 봉암사, 미타암 등의 절이 남아있다. 하지만 인근의 수량이 풍부한 운계폭포 등으로 절경이다. 정상에서는 북쪽 방면에 있는 임진강 건너편으로 휴전선 일대가 보이며, 날이 맑으면 개성시의 송악산까지도 희미하게나마 보이곤 한다. 정상인 장군봉 바로 아래에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하고자 숨어지냈다는 전설이 있는 ‘임꺽정굴’도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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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6)]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는 종무식날에 작전항공장교(S-3Air)들을 소집하여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하였고, 연초 시무식날에는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여 붐을 조성했던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추진했다. 교육훈련을 부대운영 중점으로 강력히 시행하자 훈련을 통해 숙달된 부대원들의 전투준비 태세는 자연스럽게 강화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장병들의 사기가 고양되면서 안전사고 없는 완벽한 부대관리를 하는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교육훈련 제일주의’ 강력추진 붐 조성에 따라 숙달된 부대원들은 각종 검열 및 평가에서 좋은 성적도 올리게 되었고, 그해 연말에는 전투지휘검열 최우수 및 3년 연속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했다. 한편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은 교육훈련의 일환으로 참모 및 실무자들과 함께 주둔지 및 작전지역 주변의 마차산, 감악산, 군자산 등의 중요 산악지역 등반을 통해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을 숙지토록 유도했다. 그 덕분에 상급 부대에서 주관한 각종 전술토의시에 현 지형을 두발로 확인한 부대원들은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상하급자 사이에 느꼈던 거리감도 같이 땀을 흘리며 해소되어 자연스럽게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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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5)]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자신도 모르게 공중전화 박스에 다가간 필자는 무심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더니 “여보세요..?”하고 반가운 고등학교 미술부 동창인 이상엽 화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필자는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고, 그는 재촉하며 “여보세요”만 반복했다. 잠시 안정이 되자 “상엽아, 희철이야 ...”하고는 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사무실에서 야간 작업을 하던 그는 “무슨 일이냐?”며 울먹이는 필자의 위치를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자정이 넘어갈 즈음에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웅크리고 쭈그려 앉아 아버님 수술 결과를 기다리던 필자 앞에 그 친구는 나타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이렇게 마냥 기다리지 말고 잠깐 나가자...”라며 서울시 충무로에 위치한 자신의 일러스트 회사 사무실에서 광고 디자인 작업중에 물감이 묻은 손을 내게 내밀었다. 그는 밤샘 작업을 하다가 필자의 전화를 받고 평택까지 단숨에 달려와 병원 앞 여관방에 함께 들어가 소주와 오징어포 안주를 서로 나누며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실의 빠져있는 필자를 위로했다. 그는 통이 트자 밤샘의 피곤함도 잊은 채 사업을 위해 다시 서울로 향했다. 친구중에 진정한 벗의 의미는 무엇일까? 초등학교, 중고교, 대학교 및 사회 친구 중에 본인도 모르게 전화 다이얼을 돌릴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에 필자는 행복한 놈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고교시절 미술부 반장을 하며 우정을 나누었고 졸업후 10여년 지난 뒤에 충무로 대로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자 다짜고짜 필자를 두드려 팼던 죽마고우(竹馬故友)인 동창이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26)] ‘충무로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 참조) 그 친구의 배려 덕분에 아버지는 성공적인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겼고, 4주 동안 무의식(코마) 상태에서 계시다가 회복되어 장기간 치료 후에 다행히 건강을 되찾았다. 사전적 정의인 ‘친구(親舊)’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다. 그중에는 도원의 결의처럼 같이 한날에 죽자고 약속하는 경우나 먼저 죽으면 3일장을 꼬박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는 친구도 있지만, 힘들고 외로우며 급할 때 조건없이 연락해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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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4)]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인생에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좋은 일에는 방해(妨害)가 되는 안좋고 나쁜 일도 많이 생긴다. 연말 대통령 후보들의 장병 격려차 부대방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루고,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강조했던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의 지휘의도를 구현하기 위한 시무식 사격측정 등의 이벤트를 통해 장병들의 사기가 높아져 부대 분위기가 활성화될 즈음에 개인적인 악재가 터졌다. 그해 1월 중순경 이른 저녁에 어머니의 울음 섞인 전화를 받았다. 평택 집앞 도로에서 아버님의 승용차와 트럭이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아버님이 병원으로 후송중이며 중태라는 소식이었다. 최전방을 지키는 부대의 사단작전보좌관이라는 직책 때문에 멀리 갈 수 없는 입장이라 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참모에게 보고하니 “바쁜 당면 업무는 작전장교에게 맡기고 빨리 아버님이 입원한 병원으로 가보라”고 배려를 해주었다. 어린 아들이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가족은 집에 대기시키고 우선 필자가 먼저 출발했는데 아버님 걱정에 눈물이 자꾸 흘러 운전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최대한 빨리 달려서 평택 병원에 도착하니 마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아버님이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응급실 침대 위에 웅크리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는 신음만 계속 내뱉으셨고, 어머니는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셨다. 수술 신청 및 동의서를 작성하자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가시는 피투성이의 아버님 모습을 지켜보며 당황하시는 어머니를 우선 진정시켜 집으로 들여보냈다. 담당 의사는 일단 응급처치를 했는데 워낙 상처가 심하고 다친 곳이 많아서 수술 시간과 생존 여부를 예측할 수 없다며, 필자에게는 멀리 가지말고 대기실에서 연락을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수술을 시작했다. 평택 병원의 중환자실 대기실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장기간의 간병을 통해 대부분의 가족들은 지쳐 초췌한 모습에 쪼그려 앉아 있고, 간호사의 호출에 놀라 달려가거나 환자의 상태가 안좋아 통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면서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아버님 수술 경과가 걱정되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혼잡한 대기실에서 잠시 벗어나 병원 밖으로 나갔다. 밤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길거리의 인적도 뜸해진 상태에서 병원 입구의 공중전화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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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3)]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순우리말에 ‘벗’은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이나 늘 가까이하여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달래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며 비슷한 의미로 교우, 동무, 벗님 등으로도 사용한다. 반면에 ‘친구(親舊)’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또는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이르는 말로 유의어로 교우, 동료로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친구 관련 사자성어에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옛날 중국의 관중과 포숙처럼 친구 사이가 다정함을 이르는 말, 매우 다정하고 허물없는 친구사이), 막역지우(莫逆之友, 마음이 맞아 서로 거스르는 일이 없는,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친밀한 벗), 죽마고우(竹馬故友, 대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 불알동무, 불알친구, 소꿉동무)가 있다. 또한 간담상조(肝膽相照, '간과 쓸개를 내놓고 서로에게 내보인다'라는 뜻으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밀히 사귐), 금란지교(金蘭之交, 단단하기가 황금과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 향기와 같은 사귐이라는 뜻으로, 우정이 깊은 사귐) 등으로 친구 관계를 표현한다. 그밖에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는 뜻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절친한 벗의 죽음을 슬퍼함을 이르는 말)이란 흔치 않은 고사성어도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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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2)]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93년 첫날 시무식을 마치고 상황회의 시간에 이영대 사단장은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사단 사령부의 전간부는 앞서 제시한 대로 단독군장을 하고 사격장에 집결하여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면서 ‘교육훈련 제일주의’ 첫날을 시작했다. 헌데 사단장과 김형배 작전참모의 사전 담판이 있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김 작전참모는 사단장의 부대운영 중점을 정하기 전에 사단장실에서 독대하며 “사단장님의 색깔은 어떤 색이십니가?”라고 질문하자, 사단장은 “치밀한 ‘부대관리’를 통해 부대가 안정된 상태에서 강인한 ‘교육훈련’을 하여 완벽한 ‘전투준비’를 한다”라고 포괄적으로 답했다. 참고로 지난번 무적태풍부대 지휘관이었던 이재관 사단장(육사21기)은 사고를 예방하는 ‘부대관리’, 그 앞 김길부 사단장(육사20기)은 ‘전투준비’, 그전인 이상호 사단장은 ‘교육훈련’을 가장 우선하는 부대운용 중점을 선정했었다. 사단장의 의중을 파악한 김 참모는 “모든 것을 취하려 함은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역대 사단장들의 부대운용 중점을 비교하며 우선적으로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부대운용 중점으로 할 것을 재차 건의를 했다. 참모의 건전한 판단에 의한 정확한 건의을 청취한 이영대 사단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을 하여 ‘교육훈련 제일주의’가 탄생되었다. 철저한 교육훈련을 통해 안정된 부대관리도 할 수 있고 그 성과로 전투준비에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사단장은 ‘간부는 견인포가 아닌 자주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기본적으로 전투적인 사고를 견지하고,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준비를 위해 스스로 어떻게 효과적인 교육훈련을 할 것인가 생각하며 모두 창의적·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자”고 덧붙였다. 사단장의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체 부대원들의 참여가 중요했다. 따라서 참모는 ‘교육훈련 제일주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타부대와 달리 유일하게 12월31일 종무식날에는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신년초 시무식날에는 사단 전간부의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도록 조치했다. 지휘관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난제·고충을 해결하는 것이 참모 책무라고 강조했던 김 작전참모는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부대운용 중점으로 선정하는 과정과 붐조성 위한 사격 측정 등을 통해 어떻게 임무를 수행해야 바르고 유능한 참모가 될 수 있는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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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1)]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역대 5사단장은 쟁쟁한 장군들 즉 대통령,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등 역사적인 인물이 많았다. 창설 초기에 원용덕, 백선엽, 이응준과 16대 박정희(육사2기) 장군을 비롯해 채명신(육사5기), 강창성, 윤성민(육사8기), 정병주(육사9기), 김복동(육사11기), 정호근(갑종5기), 신말업(육사16기) 등이 사단장을 역임했고, 사단기동훈련 당시에는 37대 김석재(육사23기) 장군이었다. 역시 5사단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대답게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사단기동훈련에 임했다. 이는 부대운용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단 작전보좌관 김용호 소령(육사37기)을 비롯한 참모들의 정중동(靜中動) 활약 결과물이기도 했다. 특히 김석재 장군의 정확한 상황판단과 지침을 하달하는 작전 지휘력이 돋보였고, 인접 부대 사단장이었지만 선배인 이재관 장군(육사21기)을 존경하며 환대하는 모습이 후배들 보기에도 너무 좋았다. 그러나 부대의 전통과 명성이나 사단장의 유명세와는 달리 사단사령부를 포함한 부대의 전반적인 시설은 6.25남침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 11월18일에 창설된 무적태풍부대보다도 열악했다. 그 이유는 대통령,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등 역사적인 인물인 쟁쟁한 장군들이 사단장을 역임하다보니 열악한 시설들을 중기계획 등의 정상적인 절차와 방법보다는 잘 아는 지인들의 협조로 당시에는 타부대에 없지만 필요한 시설들을 새롭게 만들고 보강했다 허나 군이 발전하고 현대식 건물 등을 정상적으로 중기계획에 반영할 때 미흡하지만 이미 설치된 건물이 있는 부대는 우선순위가 떨어지다보니 무적태풍부대보다도 당시의 열쇠부대 시설들이 오히려 노후되고 열악하게 된 결과가 되었다. 세상살이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이며 아이러니한 것이라고 한다. 타부대에 없는 것을 자력으로 설치할 당시에는 매우 흡족했으나, 결국 명성 높은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타부대보다도 낙후된 시설로 남게 된 결과라는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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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1)]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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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9)]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투위주의 강인한 교육훈련이 강조되었던 당시에는 군사령부 통제로 매년 사단기동훈련을 했다. 그때 다음번 기동훈련이 계획된 인접 타사단에서 사단장을 포함한 참모요원들이 파견 되어 관찰 및 평가 지원을 통해 자신 부대의 기동훈련시 참고하는 바람직하고 좋은 시스템도 있었다. 마침 필자가 소속된 무적태풍부대가 열쇠부대의 기동훈련의 관찰 및 평가지원 임무를 부여 받았다. 무적태풍부대 이재관 사단장의 2년 후배인 열쇠부대 사단장 김석재 장군(육사23기)은 1944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안의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제23기로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김 장군은 육사 화랑대의 훈육관.연대장.생도대장을 거친 독특한 생도배출 업무경력 때문인지 온화한 성품에 상하간 격의없는 대화를 중시하는 지휘철학을 갖고 있어 부하들 신망이 두터웠다. 또한 육척장신에 외모도 서글서글했다. 허나 일선부대 요직을 두루 거친 야전통으로 서글서글한 외모와 달리 일처리가 빈틈이 없다는 평을 받으며 너무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려 해 주변에 부담을 준다는 얘기도 있었다.. 참고로 김석재 장군은 5사단장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탁월한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아 육본인사참모부장, 3군단장, 1군사령관직을 끝으로 전역한 후 2002년 7월11일 개각시 비상기획위원장을 역임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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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9)]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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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8)]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별 방문한 신말업 군사령관을 영접할 때 사단에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차원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군대는 전투집단이기 때문에 강해야 한다. 군대는 훈련이다”라는 지휘 철학으로 일관했던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인 신말업 장군은 1972년 즈음 무적태풍부대 대대장 근무시에 필승교 부근에서 수류탄 사고로 부하를 잃었다. 백마부대 수색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13개월 동안 참전했을 때에도 한명의 인원 손실없이 부대원 전원이 무사히 귀국하는 등 부하 사랑이 남달랐던 신말업 장군은 대대장 시절의 불의 사고가 항상 가슴속에 아픔으로 남아있었다. 통상 타부대는 사령부에서 사단 참모 및 연대장들과 만나는 정도의 고별방문이었으나 사단은 업무보고를 간단히 마친 후 곧장 필승교로 신 사령관을 안내했다. 필승교 부근 임진강가에 조그마하게 준비한 추모 제사상 앞에 선 신말업 군사령관은 35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는 화려한 영광 뒤에 숨겨진 우여곡절(迂餘曲折)과 부하를 잃어 가슴 속에 깊은 아픔을 간직한 회한에 잠시 고개를 숙이며 숙연해졌다. 고별방문을 마치고 복귀하는 신 사령관은 치밀하고 세심하게 배려해 준비한 사단에 감탄하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사령관 고별방문 준비는 대성공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정보참모 김형배 중령이 건의했다고 전해지며 준비지침을 하달한 사단장 이재관 장군의 혜안이 돋보였다. 이를 통해 상급자이던 하급자이던 심지어 적이라도 상대방 입장에서 고려하고 대비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고사성어가 가슴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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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8)]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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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7)]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필자가 무적태풍부대로 부임한지 얼마되자 않아 당시 군사령관 신말업 대장이 이취임 및 전역식을 앞두고 부대에 고별방문을 했다. 신말업 장군은 1934년 경상남도 울산광역시 언양읍에서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 언양초등학교(34회)와 부산고등학교(8회), 육군사관학교(16기)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1968년 백마부대(9사단) 수색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1972년 28사단 무적태풍부대 대대장(중령), 1979년 연대장(대령)을 역임한 뒤 1981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특히 전투위주의 강한 교육훈련을 중점으로 부대를 지휘한 그는 전형적인 야전형 리더십을 발휘하며 1984년에는 소장 진급과 함께 5사단장을, 1987년에는 중장 진급과 함께 2군단장을 역임했다. 1989년에는 육군참모차장으로 보직을 잠시 거친 뒤 같은 해에 군의 최고 계급인 대장으로 진급하며 3야전군사령관직을 성공적으로 화려하게 마치고 1991년 전역하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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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7)]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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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6)]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②
- 당시 무적태풍부대장 이재관 장군 모습[사진=연합뉴스/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연구소장] ‘6.6 무장간첩 소동’사건이 한바탕 벌어져 “통합적이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전개한 작전수행이다”라고 칭찬받았던 ‘윤길영 무장탈영병 사건’처럼 즉각 대응하는 조치단계를 통해 작전처의 존재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무적태풍부대 전입시부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존경했던 이재관(육사21기) 장군의 사단장 임기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사단장 이취임식을 열흘 정도 앞두고 개최한 전반기 지휘관 회의는 이재관 사단장의 마지막 환송 회의가 되었다. 전반기 동안의 업무평가를 통해 선정된 우수부대 표창을 하고 후반기 부대운용에 대해 토의 및 발표를 했으나 모두들 성공적으로 사단장 임기를 마치는 이재관 장군에게 덕담을 보내는 훈훈한 분위기였다. 전반기 지휘관 회의가 끝나고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자신의 부대로 출발할 때 무서울 정도로 엄격하고 정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던 사단장이었으나 이취임식을 앞두고 모두들 이별을 아쉬워 했다. 저녁에는 사단장 임기동안 함께 고생한 사령부 참모들과 직할대장 및 연대장들의 부부동반 회식이 사단장 공관에서 열렸다. 처음으로 들어가보는 사단장 공관의 앞 마당에 차려진 뷔페 음식과 영전에 대한 축하와 이별의 아쉬움에 건배하는 술자리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고, 석양이 기울자 군악대 밴드의 반주 속에 일부 참모 및 기무부대장의 흥겨운 노래로 절정에 다달았다. 어느덧 회식의 막바지에 이르러 진행을 하던 사회자 인사참모가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치는 사단장의 내조를 훌륭하게 해낸 사단장 가족에게 인사말을 하라고 기습적으로 마이크를 건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다가 받아든 마이크를 잡고 수줍어하면서 "부족한 사단장을 위해 헌신한 예하 지휘관 및 참모들에게 감사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단장을 군생활 중 지휘관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재관 사단장님은 지는 꽃이 아니라 피어나는 꽃으로 알아주시고 많은 성원을 부탁합니다”라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며 의미있는 여운을 남겼다. 사단장 가족의 멋있는 마무리 맨트는 얼마 뒤에 곧 실현되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이재관 소장은 부하들의 기대와 바램에 따라 사단장을 마친지 10개월 만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군단장으로 다시 금의환향(錦衣還鄕)하였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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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6)]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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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5)]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경근 군단장(갑종151기)이 “이번 무장탈영병을 잡기 위한 대침투작전은 시범을 보인 것과 같은 매우 표준이 되는 사례입니다”라며 칭찬을 했던 윤길영 무장탈영병 사건 발생 3개월이 지났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 (151~152)]‘무장탈영병 위기가 전화위복의 기회’ 참조) 16시간 동안의 무장탈영병 사건은 위기였지만 “훌륭한 대침투작전 훈련이었습니다. 수고했어요!”라는 군단장의 마지막 격려처럼 전 부대원들이 능동적인 행동으로 작전에 성공하여 부대가 단결되며 사기충천하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되었지만 또 사건이 터졌다. 현충일인 6월6일 새벽에 비무장지대(DMZ)에서 무장공비 3~4명을 관측했다는 GP보고가 접수되자, 3개월전 무장탈영병 생포작전을 통해 숙달된 각 부대원들은 절차에 따라 신속한 행동으로 대응했다. 만약을 대비해 전방 및 후방지역에는 5분대기조를 출동시켜 배치하고 검문소의 검문을 강화했으며, 비무장지대(DMZ)의 무장공비라고 추정 관측된 지역에는 수색대대 병력이 투입해 수색작전을 전개했으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해 관측병의 오인 보고로 작전을 종결하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다. 헌데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사진처럼 조선일보에 ‘무장간첩 수색소동’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다행히도 국방부에서 “녹음기에 대비한 침투방지훈련이 잘못 전달된 것으로 사실과 무관하다”고 공식 발표를 했고, 군단장·군사령관도 즉각 대응을 잘했다는 치하로 무마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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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5)] 화려한 고별행사 속에 숨겨진 우여곡절과 가슴 아픈 상처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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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4)]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아버지가 언급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Betty)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던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7월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 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 붓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결국 베티고지는 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2소대원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에 의해 10배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여 기적의 36대800 승리신화를 만들며 격퇴시키고 사수하여 역사에 남았다.([김희철의 전쟁사(71~72)] ‘36대800 기적의 승리 만든 베티고지 전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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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4)]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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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3)]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무적태풍부대로 부임 당시에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했다. 이는 필자의 임무중에 군사보호시설 관리가 포함되어 수시로 현장을 확인할 필요에 따른 전임자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행정관서의 건축 심의를 준비하기 위해 비포장 도로와 험한 산길까지도 승용차를 이용해 정찰을 한 덕택에 고장이 많이 발생해 구입한 지 5년도 못되어 처음 마련한 승용차를 폐차 처리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휴일에 아들집을 방문하셔서 첫 구입한 승용차로 무적태풍부대의 안보관광지로 모실 때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효도를 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태풍전망대는 GOP철책에 건설되어 북한지역을 충분히 관측할 수 있다. 또한 동양 최대의 성모상과 십자가, 종각 및 절이 설치되어 각 종파에서 수시로 방문하여 행사를 한다. 김수환 추기경도 성모상 준공식에 참석해 헌당미사를 집도하기도 했다. 특히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 베티고지가 현재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직접 방문은 어렵지만 태풍전망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GOP철책 이북지역에 위치한 베티·노리고지와 임진강을 바라보시던 아버지도 김만술 소위를 언급하시며 감회에 젖었다. 태풍전망대 앞에 흐르는 임진강변 도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안변 및 원산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아버지의 고향인 함흥시이다. 해방된 이후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시다가 자유민주주의를 찾아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가족 전체가 흥남 철수시에 월남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언급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Betty)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던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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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3)]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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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2)]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는 임진강 주변에 위치한 문화유적지와 한탄강 유원지 및 태풍전망대 등으로 안보관광지로도 유명한 부대이다. 태풍전망대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군사분계선(MDL) 북쪽 42.3㎞ 지점의 임진강 본류에 북한이 발전과 용수공급 등의 목적으로 2002년 착공하여 2007년 10월쯤에 완공시킨 높이 34m, 길이 880m에 저수량은 3억5000만 톤인 황강댐이 있다. 저수량만 보면 군남댐의 5배에 이르고 한강 수계의 팔당댐(저수량 2억4400만 톤)의 1.5배에 이르는 중형 댐이다. 헌데 임진강 유역 주민들은 황강댐 방류 여부에 가장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009년 9월 호우가 없는 화창한 날이었지만 북한이 황강댐 물을 예고 없이 방류해 경기도 연천군에서 6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였던 2009년 10월, 정부는 임진강 수해 방지 관련 남북 실무회담에서 북한으로부터 '황강댐 방류 시 사전 통보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북한은 황강댐 방류와 관련해 이 합의를 딱 3차례 지켰다. 합의가 이뤄진 이듬해인 2010년에 두 차례, 2013년에 한 차례 황강댐 방류를 예고했다. 그러나 2011년과 2012년, 2015년, 2016년, 2017년 등, 북한은 사전 통보 없이 거의 해마다 황강댐 무단 방류를 해왔고 합의 이행을 대체로 하지 않았다. 물론 올해 여름에도 사전 통보없이 무단 방류를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북한의 선의에만 기댈 수 없다는 판단에, 정부는 황강댐 방류 대비를 위해 임진강 수계에 48시간 동안 388㎜의 폭우가 쏟아져도 대비할 수 있도록 홍수조절 전용 군남댐을 2010년 7월에 건설했다. 당시 댐 규모를 더 크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만수위 때 북한지역까지 수몰될 것을 우려해 규모를 늘리지 않았다. 한국수자원공사 임진강 건설단 군남댐 관계자는 "군남댐이 건설된 이후 북한의 댐 방류로 인한 우리 측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자가 무적태풍부대에 근무할 때인 1992년에는 황강댐이 건설되지 않았고, 마침 평택에 계시던 부모님이 전방에 근무하던 아들집을 방문했는데, 임진강 주변에 위치한 문화유적지와 한탄강 유원지 및 태풍전망대 등 안보관광지를 좀더 편안하게 안내할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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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2)]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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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1)]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앞서 언급한 대로 인맥은 처음부터 혈연 및 지연이나 학연보다도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훗날 연대장을 성공적으로 마친 양 대령이 육군본부의 중요보직인 무기체계과장 근무시에 대대장을 끝낸 황종수 중령도 발탁되어 함께 근무하게 됐다. 이후 철학적 혜안에 따른 논리성에 야전성을 겸비한 황 중령은 본인의 주특기 기획직능에 부합된 적재 적소의 무기체계 및 전력분야에서 견고한 자리를 구축하며 맹활약을 하였다. 그는 대령도 필자보다 먼저 진급했고 양치규 장군의 뒤를 이어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육군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한 필자도 역대 작전보좌관 전임자들이자 같은 시기에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김봉환(육사34기), 신현돈(육사35기) 선배의 후배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필자의 후임자였던 김왕경(육사38기), 장혁(육사39기)들까지도 좋은 인맥으로 남았고 덕분에 모두 장군의 반열에 오르는 희열도 맛보았다. 무능과 유능 그리고 탁월하다는 평가 차이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좋은 인맥이고, 이렇게 형성된 인연은 앞길의 안내자이자 스승이며 멘토역할도 하게 된다. 따라서 혈연이나 지연 및 학연보다도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매사에 최선을 다해 인정받아야 함을 또한번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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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1)]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