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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5)]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어느덧 짧은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이 절반을 넘어 한달정도 남겨둘 때인 3월말이 되었다. 교육기간 두달동안 각별하게 가까워진 룸메이트 정수완 동기는 교육종료 후에 다시 만나기가 힘드니 포항과 영덕 사이에 위치한 청하의 자기 집에 초대했다. 그곳 인접에는 청송 주왕산이 있고 마침 수도방위사령부에서 상관으로 근무했던 차철이 선배가 대대장을 하고 있어 함께 찾아가기로 했다. 해발 721m인 청송 주왕산은 바위, 폭포, 계곡 등의 산세가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아름다운 절경이어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었다. 중생대의 마지막 지질 시대인 백악기에 주왕산 일대는 거대한 호수였다. 약 7천만년전 이 호수의 퇴적암층을 뚫고 엄청난 규모의 화산폭발이 최소 9차례 이상 있었는데,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응집하면서 거대한 암벽이 형성됐고 이후 침식과 풍화를 거쳐 오늘날의 수려한 모습이 되었다. '주왕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중국 당나라 때의 주도(周鍍)는 스스로를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멀리 한반도의 석병(주왕)산으로 피신했다. 나중에 주왕이 신라 땅에 숨어 들어간 것을 안 당나라에서는 그를 잡아달라고 신라에 요청했다. 신라는 마일성 장군의 형제들을 필두로 진압군을 이곳 석병산으로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했다. 신라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폭포수가 입구를 가리고 있는 주왕굴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몰래 세수를 하러 나왔던 주왕은 그만 마장군의 낚시에 걸려 생포되어 당나라 장안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주왕이 마장군의 화살과 철퇴를 맞고 최후를 맞이했다고도 하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외에 신라 시대의 원성왕(김경신)과 왕위 계승을 다투었던 김주원이 당시 이 산에서 군사를 이끌고 농성하여 그 이름을 따 주왕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제1폭포에 있는 급수대의 안내판에 김주원(金周元)이 김경신(金敬信)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이곳 주왕산에 대궐을 건립하였다고 적혀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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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4)]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대범함이 돋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큰 바다는 맑고 흐린 물을 버리지 않고 모두 받아드린다는 명언 ‘대해불기청탁(大海不棄淸濁)’이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마져 들었다. 김종업 선배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마산고, 육사를 거쳐 멋있게 군생활을 마무리하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군 생활 내내 ‘선도수련’으로 일관하여 예편과 동시에 기를 실천과 학문으로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골프, 도를 만나다’를 필두로 ‘보통사람, 나를 찾다’ 등 많은 ‘기(氣)’관련 책을 저술했으며, 가천대, 명지대 등에서 ‘명상’과 ‘단전호흡’이라는 과목으로 10여 년간 강의했다. 현재는 사단법인 ‘도나누리’의 이사장으로 개량한복 껍데기를 즐겨 걸치며 많은 제자들이 찾아와 수련하는 ‘기’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대대장반 교육을 받으며 남해 대대와 거창 대대를 방문했을 선배 대대장들은 후방인 2군지역에 근무하면서 느낀 지휘 및 상하급 관계에서 지저분한 비합리성에 대해 똑같이 언급했다. 헌데 사관학교에서 ‘안일한 불의 길보다 험란한 정의의 길을 걷는다’라는 사관생도 신조를 외치며 각인됐던 두 선배들이 대처하는 방법은 상이했다. 남해의 장 선배는 정면으로 도전하며 그것을 맞부딪혀 극복하려 했고, 거창의 김 선배는 그 것 마져도 포옹해 버렸다. 당시 후방지역의 흐트러진 분위기 속에서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관료로서 썩어 문드러지는 군의 한 측면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꿋꿋이 나름대로 바르며 특색있게 추진해나가는 두 선배의 모습에서 고독과 강한 투쟁의식을 감지했다. 특히 지역 주민, 기관장들과 원활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김 선배의 능력과 배포는 정말로 높이 살만 했고, 후배들이 찾아왔을 때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더 가르쳐줄려는 지혜와 여유를 가져야 함을 다시 한번 더 느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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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3)]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거창 대대장인 김종업(육사36기) 선배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탁월한 리더십으로 선후배간에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으며 동기회장 등 요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었고, 필자와는 육사에서 같은 생활관의 선배로서 지도를 받았고 현재까지도 각별하게 지내고 있다. 대대장 근무 2년차에 접어든 김 선배는 당시의 사조직 관련 소동과 총기오발 사건 등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마침 정수완과 김종완 동기가 함께 동행하여 위로도 해드리고 회포도 풀겸 거창골짜기를 찾았는데 우리는 그의 의연한 모습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공적인 대대장을 어떻게 해야되냐?는 우리들의 질문에 그는 “지휘는 기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품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심부리지 말고, 더 잘보일려고도 말고, 건강하게 즐기면서 자기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해라”라며 찾아간 우리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조언을 해주었다. 게다가 “사향은 아무리 보자기로 싸도 냄새가 나며, 송곳은 호주머니 속에 넣어도 튀어나오는 법(囊中之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신은 선택한 자에게 시련을 주신다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위기가 호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정면돌파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추진력을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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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2)]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짧은 3개월의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이지만 룸메이트인 정수완 동기와 각별하게 친해지는 12주간의 시간이었다. 정 동기가 대대장반 교육 수료후 부임할 남해대대 방문은 적지않은 교훈을 주었고 우리는 진해 인접의 다른 선배의 대대도 찾아가 장단점을 분석하고 밴치마킹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이번에는 거창대대를 찾았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63~165)] ‘벤치마킹은 창조적 성공의 지름길’참조) 거창은 신라 때는 거열군(居烈郡)이라 불렀고, 거타, 거열 등의 이름이 음운상 유사성이 있어 자타국이라는 나라가 여기 있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현재 사용하는 이름인 거창군은 통일신라 경덕왕이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할 때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경남 서북부의 백두대간 자락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산에 둘러싸인 산간분지 지역이며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 3대 국립 공원 사이에 자리잡아 자연 경관이 수려하다. 덕유산 국립공원과 가야산 국립공원이 이 군에 걸쳐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 백제, 가야 세 나라의 접경지역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뺏고 뺏기는 전투가 삼국 통일 전까지 계속해서 있었다. 이후에도 김천, 대구, 함양 및 전라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함양으로 그러한 이점이 많이 넘어간 상태이다. 6.25남침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인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일어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거창군에는 ‘거창사건추모공원’이 존재한다. 이외에 수승대, 월성계곡, 금원산 등의 관광지가 있다. 수승대에서 월성계곡 쪽으로 가는 도로 옆으로 보이는 계곡 풍경이 정말로 장관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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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1)]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다음날 오전에 함께 찾아간 곳은 남해섬의 유명한 금산과 보리암이었다.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 짖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 했다. 이후 청년시절의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할 때 성공하면 비단으로 보광산을 감싸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조선왕조를 창업했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이름을 비단 ‘금(錦)’자를 사용한 금산(錦山), 절 이름을 보리암(菩提庵)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갓 기이한 형상을 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눈에 볼수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은 금산 38경중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 경기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주로 군인, 경찰들을 포함한 공무원 등 많은 신도들이 이성계처럼 꿈을 이루기 위해 연일 줄지어 찾고 있다. 쪽빛바다와 초록빛 들녘의 조화를 내려다 볼수있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빼어난 경치와 남해의 금강, 동물형상의 바위가 많아 바위 동물원으로도 불린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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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0)]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매주 일주일간의 수업이 끝나면 토요일 동두천으로 귀가하는 것을 포기하고 룸메이트인 정 동기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남해 지역을 정찰하고 전임자에게 부대 특징을 파악하며 지휘기법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장연석(육사35기) 선배 부대를 찾아갔다. 4년전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경비과장으로 근무하던 장 선배는 자신이 필자를 추천했던 무적태풍부대에서 비교적 잘 근무했다는 소문에 대해 대견해 했고, 필자는 비록 수방사 못지 않은 고생은 했지만 대과 없이 업무를 하고 진급하여 대대장반에 올 수 있게 여건을 만든 장 선배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표시를 했다. 정수완 동기는 자신이 취임할 대대의 전임자를 자연스럽게 만나 사전에 부대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에 고마워하며 이 것 저것 많이 질문했고 장 선배는 친절하게 답을 해주며 본인이 느꼈던 병력관리의 애로점 및 착안사항과 지역 주민, 경찰들과의 합동작전이 성패의 지름길이라는 해안 대대장 근무의 기법을 알려주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부대와 지역 특성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층 더 가깝게 소통하는 기회도 되었다. 밤이 깊어 갈 무렵 장 선배는 “남해에 오면 반드시 들려야 할 명소가 있고, 얼마전에도 모 선배가 이곳을 찾았다며 다음 날인 일요일에 직접 안내하겠다”며 숙소로 돌아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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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7)]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휴대용 수첩 분실 사건은 보안의식을 더욱 굳건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항상 작전계획 등의 비문을 다루는 업무를 수행하는 필자에게는 원활한 비문 관리에 매우 제한이 많았다. 평소에 참고하는 자료 및 현황이거나 새롭게 작성하는 공문이나 보고서가 대부분 비밀문서이거나 비문에 준하는 서류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대의 보안업무를 감독하는 기무부대원들은 불시에 사무실의 보안태세 확인 점검을 계속하였다. 실무자들이 업무를 하다가 잠시 자리를 이탈하거나 퇴근 후에도 업무를 하던 책상 위에 서류, 작전계획 및 비문의 방치 또는 무단 반출 등을 확인하는 기무부대원들이 사무실에 들락거렸다. 한편 사단사령부 상황실 벙커 사무실에는 비문관리 등의 보안업무를 전담하는 정보처 간부들도 작전처와 같이 사용했다. 당시의 정보보좌관은 대위 시절에 기무부대에서 근무했던 장교였는데 필자의 부서원들과 차별화된 점검을 받았다. 그는 책상 위에 ‘정보보좌관 책상’이라고 크게 써놓고 퇴근하면 기무부대원들은 전관예우 차원에서 점검을 생략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뜨여 기무부대의 텃세가 심함을 느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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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7)]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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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6)]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작전보좌관 보직에 부임하자마자 ‘통일‘92-2워게임 훈련’에 참가한 것은 새로운 임지에서의 적응을 더 빠르게 만든 동시에 군사보안에 대한 경각심을 재차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워게임 훈련장에는 각 부대의 작전계획에 의한 상황판과 자료들이 차고 넘쳐났다. 24시간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워게임 요원들은 임무를 교대했고, 퇴근시에 혹시 작전계획 등의 비문이 무단 반출되는지 확인하는 기무부대원들의 번쩍이는 안광은 눈부실 정도였다. ‘통일‘92-2워게임 훈련’이 끝나자 필자는 지형을 숙지를 위한 정찰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부대 주변 봉암저수지 근처의 독립가옥 및 주요 고지 등을 살펴보다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복귀했는데 휴대용 수첩이 없어진 것을 확인했다. 그동안 정찰 및 워게임을 하며 기록한 사항 등은 비문 등재를 안했지만 중요 내용이 많아 만약 그 수첩이 불순분자 손에 들어가면 큰 보안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휴대용 수첩 분실이 추정되는 정찰지역으로 급하게 차를 몰고 갔다. 아마도 정찰시에 잠시 수첩을 차량 본넷트에 올려놓았다가 깜박하고 그대로 출발하여 분실한 것 같았다. 따라서 그 주변 민가의 문을 두드렸다. 한집 두집... 계속 확인했지만 모두 못 봤다는 대답이었다. 낙담하며 점심 식사했던 식당에 들어갔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동네 아저씨가 발견하고 기무부대에 신고하려고 한다”는 고마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만약 동네 아저씨가 이미 기무부대에 신고했다면 불명예스런 사건이 될 수도 있어 급하게 그 아저씨 집을 찾았다. 다행히도 그는 아직 신고를 안했고, 자신도 청년 시절에 군생활 경험이 있어서 수첩을 보고 중요한 것 같아 보관하고 있었다며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뿜은 필자는 폴더 인사를 하며 감사함을 표했다. 그후 작전보좌관 근무를 하면서 군생활 경험에 따른 보안의식으로 불명예스런 사건 발생을 막아준 동네 아저씨를 수시로 찾아뵈었고, 덕분에 그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민원도 해결하며 친해질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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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6)]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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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5]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필자가 대위 계급으로 사단작전장교 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을지연습 기간에 워게임 요원으로 연합사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작전장교 임기 말기라 후임자가 이미 사단에 보직되어 있어 워게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소령 계급으로 무적태풍부대의 작전보좌관으로 보직되자 전임자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곧 대대장 보직을 받고 대기하며 임무를 필자에게 인계 중이었고, 원래 사단작전보좌관이 통일‘92-2워게임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대신하여 후임자인 필자가 파견됐다. 이번의 워게임 훈련에 필자는 대위 시절과 정반대로 임기 말기가 아닌 부임 초에 전임자를 대신하여 파견되는 야릇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이번에도 역시 훈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87)] ’‘88을지연습 워게임 실시단 파견서 깨달은 미군의 힘’ 참조) 전임자의 배려(?) 덕분에 워게임 파견 기간 훈련에 임하면서 부대 작전계획을 예하 부대까지 속속들이 숙지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또한 군에서 새롭게 도입한 워게임에 의한 전쟁연습이 점차적으로 체계를 잡아가던 당시, 필자에게 워게임과 전투지휘체계 관련 일가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훗날 필자가 연대장 및 군단작전참모 시절에 지상전술C4I체계(ATCIS : Army Tactical Command Information System) 전력화 완성에 따른 전군 최초 디지털 군단으로 발전시킬 때에도 큰 힘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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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5]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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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4]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사령부의 전투지휘검열시에도 군자산 대대장 김형배 중령은 수세적으로 검열 수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공세적인 자세로 임했다. 그는 검열관 전원에게 ‘전투지휘 검열관 초청 편지’를 사전에 보냈고 검열관들은 검열전에 상쾌한 기습을 당한 기분이었다. 당시에 대부분의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검열관들의 지적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부대로 검열나오는 것을 회피하는데, 김 중령은 오히려 자신의 부대를 검열해 달라는 적극적인 구애의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전투지휘검열을 받기 직전에 발생했던 예하 부대에서의 월북사고와 맞물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군자산 대대를 방문했던 전투지휘 검열관들은 하나같이 군자산 대대를 칭찬했고, 대대장 김 중령의 노력과 우수성 및 지휘능력을 높이 치켜 세웠다. 초청편지 사건은 이후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면서 신화처럼 남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단의 각 참모부는 연말 우수부대 선정시 전 년도에 이어 군자산 대대를 ‘선봉대대’로 선정했다. 하지만 선봉대대 2연패로 인해 예상되는 타 대대장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ATT(전술훈련 평가) 우수부대로 조정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필자에게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얼마나 오랬동안 모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가가 중요하다. 허심탄회하게 심중을 드러낼 수 있어야 인정받는 부하가 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가?’라는 핵심을 찌르는 말을 했던 김 중령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이듬해인 1992년 3월에 대대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사단 정보참모로 영전한 뒤에 작전참모까지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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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4]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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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3]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야전 숙영지의 비좁은 텐트 안에서 신임 작전보좌관인 필자에게 귀중한 조언을 해주던 김형배 중령은 어떠한 임무가 부여될 때,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능력을 평가받는다며 진지공사 사례를 예로 들었다. 그는 비록 자신 부대의 별도 임무 수행 때문에 진지공사를 늦게 시작했더라도 김 중령 대대는 타부대 보다도 일정을 앞당겨 일찍 끝낼 수가 있었다. 그 이유는 쉬는 병력 없도록 간단없이 진지공사가 지속될 수 있게 철저한 계획과 사전 준비를 한 효율적인 ‘공정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틀을 짜는 병사들은 대부분 병사가 잠이 들었을 때 작업을 했고, 대다수의 주력은 일과 개시와 동시에 분주하게 일했다. 이렇게 조직적인 업무 분담과 통합이 매우 중요했다. 또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높은 곳에는 간이 도르레를 이용해 시멘트와 물들을 운반시켜 병사들의 노력을 최소화 시킨 것도 유효했다고 성공담을 들려주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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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3]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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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2]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형배 중령은 추계진지공사를 위해 적암삼거리 옆 공터에 설치된 야전 숙영지 텐트에 있었다. 필자는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마음에 대대장 김 중령의 텐트로 들어서자, 그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의아해하며 던진 첫 마디에 움찔해질 수밖에 없었다. “희철아, 니가 왜 여기에 왔니?” 수방사 작전장교로 근무했으면 선호하는 기계화 사단 등의 부대로 갈 수도 있었는데, GOP를 담당한 가장 평범한 부대로 배치를 받았냐하는 핀잔이었다. 그의 핀잔 속에 숨어있는 필자에 대한 진정한 아낌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가 현 부대와 수방사에서 근무했던 선배의 요청과 추천 때문이라고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상황이야 어떻든 필자의 부대 배치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 허나 오히려 필자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선배임을 재확인하면서도 그를 가까이에서 벤치마킹하여 야전에서 성공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였다. 왜냐면 그는 수방사 경비과장을 마치고 무적태풍부대 예하 대대장으로 부임하여 창의적이고 효율적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로 선봉대대와 대대전술훈련 우수부대 등 많은 부대 표창을 수상하며 성공적인 대대장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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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2]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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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1]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단장 이재관 장군에 대한 존경심이 모락모락 피어났던 전입신고 다음날, 사단 책임지역 지형 정찰을 위해 사령부에서 출발했다. 필자는 지형 숙지를 위한 목적으로 책임지역 정찰을 출발했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선배가 있어 군자산으로 바로 향했다. 10년 전에 중동부 전선 대성산 기슭의 승리부대에서 인접 중대장직을 수행하던 그는 소대장 근무하던 필자를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충고를 했던 선배였다. 당시 그는 필자에게 “김소위, 방금 대대장님은 이임 전날 그동안 지휘했던 부대에 애착이 있어 돌아보시는 것인데 자네는 상급자의 의도를 모르고 계속 점호를 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하면서 “상급자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만은 아니다. 오히려 삼촌이나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상급자를 모셔야 한다네...”라고 말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26) “군 생활의 딜레마, 상급자는 우리의 또 다른 적인가?” 참조) 그 충고를 듣고 필자는 상급자가 하급자 지적을 통해 혼을 내며 가르치지만, 하급자는 그 지적에 오히려 감사하며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서는 자세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군생활 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의 험한 파도 속을 헤쳐나갈 수 있는 중요한 강점이 되었다. 또한 그의 가르침 덕분에 상하가 일치되어 '上下同欲者勝(상하동욕자승)'의 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 군생활 기간의 실천 노력으로 이렇게 ‘직업군인 이야기’ 칼럼을 쓸 수 있게도 되어 너무도 감사했다. 그 선배는 김형배(육사34기) 중령이었고 당시에 군자산 대대장으로 추계진지공사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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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1]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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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0]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장실로 들어서자 난로도 켜지않은 싸늘한 사무실에서 두꺼운 장군용 잠바를 걸치고 책상에 앉아 사무를 보던 사단장은 함께 들어온 인사참모를 쬐려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짝 긴장하던 인사참모가 ‘사단장님께 신고’라는 구령을 붙였고, 이어 필자는 경례를 하며 “태풍, 소령 김희철은 1991년 10월28일부로 사단 작전보좌관으로 전입 및 보직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라고 우렁하게 외쳤다. 신고를 받은 사단장은 자리에 앉으며 ‘차한잔 가져와’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필자가 사단장 앞 테이블에 앉자 문밖으로 나가려는 인사참모를 다시 불러 세웠다. “인사참모, 넌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야? 지난번 소원수리 내용에 대해 후속조치를 빨리 하라고 지시했는데 깜깜 무소식이야 .. 멍청하게는 ...”라며 다시 쏘아 보았다. 나가려던 인사참모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칫하다가 지금 보고서가 준비되어 있으니 곧 보고드리겠다면서 절절매며 더듬거렸고, 부동자세를 버텨주던 무릅까지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살벌한 분위기의 신고 자리에서 필자는 사단장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도 안나고 잔뜩 긴장한 상태로 앉아 있다보니 어느새 뜨거운 커피는 방안의 차가운 온도와 분위기 때문에 아이스 커피가 되어 버렸다. 지휘관들은 자신만의 색(色)을 가지고 있다. 전전 사단장 이상호 장군은 ‘교육훈련’을 강조 했고, 직전 사단장 김길부(육사20기) 장군은 ‘전투준비’위주로 부대를 지휘했다. 당시의 사단장 이재관(육사21기) 장군은 ‘부대관리’를 중점으로 안전 사고 예방에 치중하여 지휘했다. 아마도 이재관 사단장은 ‘부대관리’를 강조하며 필자에게 사단 전체를 총괄하는 차원의 업무를 하는 사단 작전보좌관으로 무리한 부대운용에 의해 사고를 유발시키지 않도록 전입 신고 면담에서 지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허나 엄격하고 단호하며 거칠어 보이지만 에너지 절약을 강조할 때에는 사단장 본인이 가장 먼저 사무실에서 난로를 피우지 않고 두꺼운 옷을 껴입고는 추위를 견디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볼 때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웠다. 이 장군은 사단장을 마치고 승승장구하여 4성 장군으로 진급했고 제1군사령관을 마치고 전역하여 재향군인회 부회장까지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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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0]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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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9]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쌀쌀한 가을 바람이 엄동설한의 겨울을 재촉하던 1991년 10월말 무적태풍부대 사단장실 앞에 필자는 사단 전입신고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최전방 부대의 가을은 청명하고 기분 좋게 만드는 상쾌한 가을이 아니라는 것을 군생활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왜냐면 시원하고 상쾌한 날씨라기 보다는 이미 겨울이 성큼 다가와 옷깃을 여미며 삭풍이 몰아치는 추위와 싸워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에너지 절약 운동으로 사무실에서는 난로도 못켜게 하여 내복까지 속에 껴입고 잠바까지 걸치며 난로를 피우는 한겨울보다도 더 추위에 떨면서 근무하는 실정이었다. 육사 3년 선배인 사단 인사참모는 사단장이 매우 까다로운 분이니 각별히 실수 없도록 잘하라고 몇 번이고 다짐하며 오히려 필자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다. 사단 전입 신고를 위해 따뜻한 남쪽나라였던 수방사에서 출발한 필자는 내복도 안입고 야전상의만 걸치고 도착한 탓인지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에 적응이 힘들었고 인사참모가 긴장하며 던진 조언에 더 위축되었다. 긴장한 인사참모의 구령에 맞춰 몇 번의 신고 연습을 반복하고는 사단장에게 전입신고를 위해 굳게 닫혀있던 사단장실 문을 노크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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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9]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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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8]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상징명칭이 ‘무적태풍부대’인 28보병사단은 6.25남침전쟁 직후인 1953년 11월18일 충남 논산에서 창설되었으며, 경례구호는 '태풍'이다. 부대마크는 태풍의 눈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폭풍우를 휘몰아치며 북진하는 태풍의 위용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투에 임할때에는 북진의 교두보로서 적의 심장부를 일격에 무너뜨리겠다는 부대원의 결의를 담고 있다. 부대마크의 좌회전은 "영원불멸"을 상징하며, 바깥원은 "견적필살" "천하무적"의 총구를, 청색 바탕은 "정의"와 "평화"를, 백색은 "자유"와 "백의민족"을 의미한다. 창설 이후 강원도 사창리, 포천, 양평 등 4차례의 이동있었고 1966년 현 지역에 배치되어 중서부 전선의 최전방 GOP경계를 담당하고 있다. 부대가 위치한 연천군은 대표적인 안보관광지이다. 6·25남침전쟁 후 대부분이 수복지역으로 북쪽에서 흘러오는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한탄강 유원지와 전곡 선사시대 유적지, 재인폭포, 감악산 비룡폭포 및 GOP지역 필승교 옆의 태풍전망대가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또한 고려 태조와 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경왕)·충렬왕·공민왕과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 외 15인에게 제사를 지냈던 숭의전이 있고, 태풍전망대에서 보이는 비무무장지대에는 6·25남침전쟁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도 있어 역사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헌데 부대창설 후 지난 69년 동안 44회에 걸친 대간첩작전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적 사살 63명, 생포 8명, 장비 노획 1,308점이라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던 28보병사단은 국방개혁 2.0으로 2025년에 해체될 예정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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