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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4)]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아버지가 언급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Betty)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던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7월15일은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이 벌인 막바지 공세인 이른바 7·13공세의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7·13공세는 중공군이 휴전을 앞두고 중부전선의 금성 돌출부의 만곡부를 없애기 위해 퍼 붓은 최후의 공세였으나, 이러한 불길은 서부전선 임진강 대안의 고양대 일대와 노리고지를 감제하는 중심부인 베티고지까지 불어 닥쳤다. 결국 베티고지는 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2소대원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에 의해 10배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여 기적의 36대800 승리신화를 만들며 격퇴시키고 사수하여 역사에 남았다.([김희철의 전쟁사(71~72)] ‘36대800 기적의 승리 만든 베티고지 전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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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3)]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무적태풍부대로 부임 당시에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했다. 이는 필자의 임무중에 군사보호시설 관리가 포함되어 수시로 현장을 확인할 필요에 따른 전임자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행정관서의 건축 심의를 준비하기 위해 비포장 도로와 험한 산길까지도 승용차를 이용해 정찰을 한 덕택에 고장이 많이 발생해 구입한 지 5년도 못되어 처음 마련한 승용차를 폐차 처리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휴일에 아들집을 방문하셔서 첫 구입한 승용차로 무적태풍부대의 안보관광지로 모실 때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효도를 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태풍전망대는 GOP철책에 건설되어 북한지역을 충분히 관측할 수 있다. 또한 동양 최대의 성모상과 십자가, 종각 및 절이 설치되어 각 종파에서 수시로 방문하여 행사를 한다. 김수환 추기경도 성모상 준공식에 참석해 헌당미사를 집도하기도 했다. 특히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 베티고지가 현재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직접 방문은 어렵지만 태풍전망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GOP철책 이북지역에 위치한 베티·노리고지와 임진강을 바라보시던 아버지도 김만술 소위를 언급하시며 감회에 젖었다. 태풍전망대 앞에 흐르는 임진강변 도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안변 및 원산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아버지의 고향인 함흥시이다. 해방된 이후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시다가 자유민주주의를 찾아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가족 전체가 흥남 철수시에 월남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언급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Betty)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던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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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1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2)] 태풍전망대와 베티고지 등 유명한 안보관광지에서의 사연(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는 임진강 주변에 위치한 문화유적지와 한탄강 유원지 및 태풍전망대 등으로 안보관광지로도 유명한 부대이다. 태풍전망대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군사분계선(MDL) 북쪽 42.3㎞ 지점의 임진강 본류에 북한이 발전과 용수공급 등의 목적으로 2002년 착공하여 2007년 10월쯤에 완공시킨 높이 34m, 길이 880m에 저수량은 3억5000만 톤인 황강댐이 있다. 저수량만 보면 군남댐의 5배에 이르고 한강 수계의 팔당댐(저수량 2억4400만 톤)의 1.5배에 이르는 중형 댐이다. 헌데 임진강 유역 주민들은 황강댐 방류 여부에 가장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009년 9월 호우가 없는 화창한 날이었지만 북한이 황강댐 물을 예고 없이 방류해 경기도 연천군에서 6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였던 2009년 10월, 정부는 임진강 수해 방지 관련 남북 실무회담에서 북한으로부터 '황강댐 방류 시 사전 통보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북한은 황강댐 방류와 관련해 이 합의를 딱 3차례 지켰다. 합의가 이뤄진 이듬해인 2010년에 두 차례, 2013년에 한 차례 황강댐 방류를 예고했다. 그러나 2011년과 2012년, 2015년, 2016년, 2017년 등, 북한은 사전 통보 없이 거의 해마다 황강댐 무단 방류를 해왔고 합의 이행을 대체로 하지 않았다. 물론 올해 여름에도 사전 통보없이 무단 방류를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북한의 선의에만 기댈 수 없다는 판단에, 정부는 황강댐 방류 대비를 위해 임진강 수계에 48시간 동안 388㎜의 폭우가 쏟아져도 대비할 수 있도록 홍수조절 전용 군남댐을 2010년 7월에 건설했다. 당시 댐 규모를 더 크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만수위 때 북한지역까지 수몰될 것을 우려해 규모를 늘리지 않았다. 한국수자원공사 임진강 건설단 군남댐 관계자는 "군남댐이 건설된 이후 북한의 댐 방류로 인한 우리 측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자가 무적태풍부대에 근무할 때인 1992년에는 황강댐이 건설되지 않았고, 마침 평택에 계시던 부모님이 전방에 근무하던 아들집을 방문했는데, 임진강 주변에 위치한 문화유적지와 한탄강 유원지 및 태풍전망대 등 안보관광지를 좀더 편안하게 안내할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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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1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1)]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앞서 언급한 대로 인맥은 처음부터 혈연 및 지연이나 학연보다도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훗날 연대장을 성공적으로 마친 양 대령이 육군본부의 중요보직인 무기체계과장 근무시에 대대장을 끝낸 황종수 중령도 발탁되어 함께 근무하게 됐다. 이후 철학적 혜안에 따른 논리성에 야전성을 겸비한 황 중령은 본인의 주특기 기획직능에 부합된 적재 적소의 무기체계 및 전력분야에서 견고한 자리를 구축하며 맹활약을 하였다. 그는 대령도 필자보다 먼저 진급했고 양치규 장군의 뒤를 이어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육군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한 필자도 역대 작전보좌관 전임자들이자 같은 시기에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김봉환(육사34기), 신현돈(육사35기) 선배의 후배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필자의 후임자였던 김왕경(육사38기), 장혁(육사39기)들까지도 좋은 인맥으로 남았고 덕분에 모두 장군의 반열에 오르는 희열도 맛보았다. 무능과 유능 그리고 탁월하다는 평가 차이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좋은 인맥이고, 이렇게 형성된 인연은 앞길의 안내자이자 스승이며 멘토역할도 하게 된다. 따라서 혈연이나 지연 및 학연보다도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매사에 최선을 다해 인정받아야 함을 또한번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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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0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40)]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결국 양 대령은 황종수 소령을 연대 작전과장으로 받았고 황 소령은 보직 걱정을 하다가 오히려 좋은 기회를 포착하고 그의 잠재능력을 충분하게 발휘하며 탁월함을 인정받게 된다. 육군사관학교 교관 경험이 말해주듯 철학적 혜안에 따른 논리성에 야전성을 겸비한 황 소령은 각종 지휘관 회의나 전술토의에서 해당 연대안을 발표할 때마다 타 부대와 비교될 정도로 돋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연대장 근무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시하는 연대전술훈련 평가에 임해서 황 소령은 대박을 터뜨렸다. 사전 철저한 지형 정찰을 통해 판단한 지역을 이용, 전차를 동반한 특수임무부대가 기습적으로 임진강을 도섭하여 상대방의 지휘소를 급습하며 포위 격멸시키는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는 성과를 올렸다. 처음에 연대 작전과장 후임자를 선발할 때 경력이 문제이고 게다가 야전 경험도 부족하며 특히 주특기가 작전직능이 아닌 기획직능이기 때문에 더 더욱 고민이라던 양 대령의 우려는 기우(杞憂)로 끝났다. 반면에 황 소령은 양 대령과 좋은 인맥을 쌓게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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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0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8)]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그해 가을 무렵에 접어들자 양 대령 연대의 중요하고 핵심적 역할을 할 참모인 작전과장이 보직을 마치고 떠나게 되어 후임자를 찾고 있었다. 연대 작전과장은 작전 업무뿐만 아니라 부대운용의 모든 분야를 총괄하기 때문에 부대의 성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해당 지휘관이 작전분야의 경험이 있는 장교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이유이다. 그래서 통상 작전과장을 보직 받기 전에 정보과장 등의 타 참모 임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으면 작전과장으로 영전하면서 그해의 중령 진급 선발에도 유력한 대상이 된다. 당시 사단으로 전입 예정자 중 소령급 장교에는 동기생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양 대령도 출신을 떠나 작전분야에서 근무 경력이 있는 유능하고 탁월한 장교가 작전과장으로 보직되길 원했다. 허나 주변을 아무리 물색하고 사단으로 전입 예정인 대상자 중에 양 대령이 원하는 조건에 해당되는 자원이 없다고 판단하여 선택을 고민하고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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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8-0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7)]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로 전입온 지 5개월 정도 지날 즈음에 반갑고도 존경하는 선배가 예하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사단사령부의 작전보좌관직을 수행하던 필자는 새롭게 취임한 양치규 대령(육사29기)을 승리부대 중대장 근무시에 직속상관인 대대장으로 모셨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며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60)] 실전 같은 부대 검열 및 훈련평가는 승리의 첩경:‘경쟁자가 깨닫게 해준 교훈과 대대장의 리더십이 이끌어 낸 승리’ 참조) 일반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학력과 경력도 중요하지만 숨길 수 없는 사실은 당사자의 인맥이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군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헌데 그 인맥은 처음부터 혈연이나 지연 및 학연에 의해 형성되는 것보다도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같이 근무하여 쌓인 좋은 인연은 그 당시에 상급자로부터 무능하다고 평가받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와 함께 인맥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맺어진 인맥으로 상급자는 진로를 안내해주거나 멘토 역할도 하지만 평가 및 진급시에도 측면에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또한 경험 즉 경력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사단사령부의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던 필자도 수방사령부 작전장교로 근무했다는 경력이 무능과 유능 그리고 탁월하다고 평가하는 측면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7-2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6)]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연대가 형성한 1봉쇄선 안의 원점 부근에서 무장탈영했던 윤길영 일병을 생포했다는 보고였다. 탈영한 윤 일병은 멀리 도주하려 했으나 각 부대의 신속한 배치와 야간에 라이트를 켜고 계속 이동하는 군차량, 선무심리전 방송, 군견 짖는 소리 등으로 꼼짝 못하고 숨어있다가 지쳐서 그대로 생포되었다. 비록 밤을 꼬박 새워 피곤했지만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보람을 느꼈다. 바로 그때 사단장 탁자위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군단에서도 무장탈영병 사건 때문에 밤을 지새웠던 군단장의 전화였는데 일순간 무장탈영병 사고 발생에 대한 질책을 예상하며 긴장된 상황실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최경근 군단장(갑종151기)은 ”사단장, 이번 무장탈영병을 잡기 위한 대침투작전은 시범을 보인 것과 같은 매우 표준이 되는 사례입니다”라며 말을 시작했다. “최초 상황보고 및 조치부터 신속하게 하달된 3개의 봉쇄선을 형성하는 작전명령과 전파체계 그리고 선무심리전, 항공정찰, 전제대 동시수색, 군견운용 등 통합적이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전개한 작전수행에서 칭찬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라며 핀잔보다는 칭찬을 하였다. 이어 “훌륭한 대침투작전 훈련이었습니다. 수고했어요...ㅋ”라는 군단장의 마지막 격려 훈시 한마디에 비록 사고를 미연에 방지 못한 책임은 있었으나, 상황실에서 밤을 지새운 참모 및 실무자들의 보람찬 환성이 터져 나오며 모든 피곤함을 날려버렸다. 무장탈영병 사건 발생은 위기였지만 지휘관의 명확한 지침과 전 부대원들이 능동적이고 효율적인 절차와 행동으로 임하여 작전에 성공함으로 부대가 단결되며 사기충천하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되었다. 무장탈영병 발생에 따른 대침투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이재관(육사21기) 소장은 사단장을 마친지 10개월 만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군단장으로 다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이후 군단장에서 영전하여 육군참모차장직을 수행하던 이 중장은 1996년 9월16일 ‘강릉 무장공비 잠수함 침투’사건이 발생하자 작전이 한창 진행중인 10월에 대장으로 진급하여 1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달 뒤인 11월 1군사령관 이재관 대장은 ‘연화동계곡 전투’에서 무장공비의 잔적을 소탕한 것을 끝으로 강릉 안인진리 지역으로 잠수함을 통해 침투한 북한군 무장공비를 토벌하기 위한 45일간의 대규모 작전을 마무리하여 대침투작전의 전문가로 이름을 남겼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7-2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5)]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일련의 상황조치를 완료하고 사단장과 참모들은 상황실(TOC)에서 예하 각부대의 배치 및 활동을 보고 받으며 밤을 지새웠다. 허나 필자는 더 바빠졌다. 무장탈영병이 원점 지역을 포위한 1봉쇄선 안에 있으면 생포가 용이할 터인데, 혹시 더 원거리를 도주하여 2,3봉쇄선 밖으로 빠져나갔다면 상황은 사단이 아니라 군단 또는 군사령부급으로 확대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전참모와 함께 고민하다가 날이 밝으면 봉쇄선 주요 목에는 그대로 소수 병력을 배치하며 필요한 지역엔 임시 검문소를 추가운용하고, 나머지 주병력과 군견으로 ‘전제대 동시 수색정찰’을 계획했다. 이때 항공정찰도 병행하기 위해 상급부대에 헬기도 추가 요청했다. 사단장의 승인을 받고 일출과 동시에 작전이 개시되도록 사전에 작전명령을 하달하며 군단에도 보고했다. 각 부대는 아침해가 밝아오기 전에 조식을 모두 마치고 각 수색 책임지역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무장탈영병이 발생한 부대 연대장의 긴급한 지휘보고가 올라왔다.(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7-2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4)]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 전지역으로 ‘진도개 하나’를 확대 발령에 따라 각 부대가 출동준비를 하는 동안 사단 상황실(TOC)에서 작전토의를 거쳐 사단장이 승인한 무장탈영병 생포 작전명령은 신속하게 각 부대로 하달되고 상급부대에도 보고됐다. 출동 준비를 마친 부대들은 때마침 하달된 작전명령에 따라 사건 발생 원점을 겹겹이 포위하는 2,3봉쇄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절묘한 시점에 명령이 하달되어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며 바로 투입하여 일단 도주하려는 탈영병과 시간 싸움에서 우위를 점령했다. 동시에 탈영병이 발생한 해당 연대는 1봉쇄선 점령을 완료하고 포위된 봉쇄선 안의 은거 가능지역을 사단 수색대대원들과 함께 군견까지 투입하여 정밀 수색했다. 이때 2,3봉쇄선에 근접한 부대들은 도보로 투입했지만, 원거리 부대원들은 사단 수송대의 차량에 포병부대의 포차까지 동원된 수송차량을 지원받아 보다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었다. 날이 저물어 야간이 되자 봉쇄선 도로를 따라 라이트를 켜고 차량을 계속 왕복 이동시켜 은거한 무장탈영병이 꼼짝 못하고 지치도록 만드는 기만작전도 시행하였다. 더불어 주민신고망을 최대로 가동시켰고, 선무심리전으로 방송차량을 활용하여 원점부근과 주변에서 무장탈영병의 안전과 복귀 방송을 계속하며 심리적 동요를 유도했고, 또한 탈영병의 부모를 현장에 도착시켜 방송차량에 탑승하여 안전한 귀가 설득 방송도 추가했다. 이 모든 조치는 이미 5년전 승리부대 근무할 때에 ‘GOP 경계근무자의 총기난동 및 무장탈영 소동’에서 경험했던 교훈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었다. 한편 상급부대인 군단에서도 무적태풍부대의 무장탈영병 발생에 따른 대침투작전 진행을 관망하면서 혹시 우려되는 탈영병의 도주를 막기 위해 인접 사단에 지시하여 주요 통로 및 목 지점을 차단하도록 조치했다.(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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