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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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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㉗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율성이 6·25남침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군가도 작곡했지만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점령군으로서 자유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1·4 후퇴 때는 중공군과 함께 재차 서울에 내려와 조선궁정악보를 약탈해간 매국노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광주 출신이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공산당원으로 변절한 자를 추모하며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추진했던 정율성 공원 조성사업은 동족상잔의 비국을 겪은 자유대한민국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현재도 핵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으려면 견고한 한미동맹이 절실한 실정이다. 필자가 다녔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북한의 재 남침에 대비해 합동참모본부의 주요부서에 근무하며 군사전략을 담당했던 용삼남(육사33기) 선배로부터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용 선배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발을 짚고 재활치료에 전념했던 필자에게 용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는 생도시절 럭비부 선수 생활을 했는데 운동중에 부상을 입어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이 판단할 때에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으나 강한 의지로 철저하게 운동을 하여 척추 주변 근육을 강화시킴으로써 전혀 불편함 없이 더 건강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합참 근무시에 매일 새벽에 가장 일찍 출근하여 책상 및 의자 정리 및 청소를 한 뒤에 책상위에 올라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300개씩 하여 근육을 강화시켰다. 그가 원주에 있는 부대에 근무할 때에는 고속도로에서 시비를 걸던 조폭을 한방의 주먹으로 넉아웃시킬 정도로 강해졌다는 여담도 남겼다. 건강한 체력은 건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며 업무에 질도 고양시킬 수 있다. 건강의 이상을 극복하며 지칠줄 모르는 용 선배의 체력에 상관들은 힘든 업무도 쉽게 맡길 수 있었고 업무상 만나는 미군들과도 쉽게 친해져 한미 연합작전과 군사전략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일과후에는 독신자 숙소에서 우리의 전통악기인 대금을 연주하며 하루를 마감하여 건강상 어려운 위기를 적극 극복하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예술감까지 가진 문무를 겸비한 군인으로 끝없는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앞으로의 군생활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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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㉖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10월2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세워져 있던 중국 음악가 ‘정율성 동상’이 기단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 귀화한 음악가로, 북한·중공군 군가를 작곡한 인물인데, 광주시가 기념사업을 추진해 논란을 불렀다. 정율성 동상은 중국 청년단체가 제작해 광주 지역 청년단체에 기증한 것으로 2008년 광주 남구 양림동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 입구에 세워졌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이날 재물손괴 혐의로 보수단체 회원 윤모(5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전날(1일) 오후 정율성 흉상 목 부분에 밧줄을 묶고 2.5톤 승합차에 이를 연결한 뒤 쓰러뜨리는 모습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정율성 흉상은 위의 사진처럼 약 1m 높이의 기단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기단 옆 땅바닥에 누운 모습으로 발견됐다. 윤씨는 범행 직후 한 유튜브 채널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중단하라고 광주시에 요구했는데 이를 이를 수용하지 않아 강제로 (흉상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윤씨는 경찰에서 “내가 그랬다. 3일 오전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겠다”며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유족 대표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전 광주대성여고 교장은 2일 “공산주의자 정율성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광주시가 혈세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공원을 짓는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고 무조치로 일관하고 있다”며 “공원 철폐를 위한 릴레이 피켓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김오복 전 교장은 “북·중공의 군가를 짓는 등 한국 침략세력의 나팔수 역할을 한 정율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아무 중단 조치도 없이 정율성 공원조치를 강행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율성 공원 문제 제기에 대해 철지난 이념몰이, 색깔론, 민간외교라는 억지 논리만 되뇌고 있다”면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보훈단체들의 집회를 관제 데모로 깎아내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과 보훈가족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자 정율성 공원을 철폐하거나 대안을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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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국방부장관으로 지명된 신원식 의원(육사 37기)은 레닌에게 선물받은 권총으로 독립군을 직접 사살한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의 동상 이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영관영어반’ 과정에 다닐 즈음에는 홍범도의 존재 조차도 몰랐다. 청산리 대첩 이후인 1921년,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와 그 일당들에 의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몰살당하며 해체됐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소련군 복장의 공산주의자를 추모한다는 것은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인민군과 중국인민군 군가와 마오쩌뚱 찬양가 등을 수십 곡 만들며 뼈속까지 어용 공산주의자인 정율성 작곡가의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관생도를 포함한 건전한 국민들의 정체성과 대적관을 현혹시키는 잘못된 처사이다. 필자가 다니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확고한 대적관을 바탕으로 견고한 한미동맹을 위한 교육이 계속되었다. 이 교육을 통해 숙달한 영어회화 능력으로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 및 훈련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을 마치면 다음 보직은 연합사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필자는 이미 다음 보직이 충북 충용부대로 정해져 있었고, 다른 교육생들은 연합사령부 또는 예하 부대 및 연합작전/훈련을 주로 시행하는 합동참모본부로 분류되었다. 마침 합참의 중요부서에서 근무했던 선배도 함께 교육을 받고 있어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한명은 육사 33기 용삼남 중령이었다. 과거 승리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양태수, 나대일, 김형배 선배 등을 포함하여 많은 선배 동료들을 다시 만나는 해후의 시간도 만끽했으나 용 선배는 6개월 교육기간 중에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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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5주년을 맞은 국군의 날은 6·25남침전쟁 당시 우리 육군의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날이다. 추석 연휴 때문에 닷새 앞당겨 지난 26일 열린 올해 국군의 날 기념행사는 그동안 소홀히 했다가 10년 만에 대대적인 도심 시가행진으로 주목받았다. 유사시 북한 지휘부의 지하 벙커를 파괴할 고위력 현무 미사일과 한국형 사드로 불리는 장거리 지대공유도미사일, 엘샘(L-SAM) 같은 첨단무기가 대거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날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핵 위협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며, 우리 군의 태동 시점은 1945년 광복 이후라고 언급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광복 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 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역사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군의 뿌리를 독립군에서 찾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식을 사실상 반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국군의 날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동부전선의 우리 육군 3사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10월1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1956년 제정됐다. 하지만 체제 경쟁이 끝나고 남북정상회담 등이 열린 2000년대 이후론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자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우리나라가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헌법에 따라 군의 뿌리도 임시정부 군대인 광복군으로 정립하는 게 맞다고 민주당 등 일부는 주장하지만 확고한 대적관을 강조해온 현 정부는 선을 긋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웠던 광복군도 의미는 있지만, 지금 우리 군은 북한과 싸우는 군대라며 국군의 확고한 정체성을 강조했고, 여야의 인식 차는 국군의 날 메시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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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㉓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개월 기간의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간정도 지나갈 즈음에 필자는 그동안에 미루어 왔던 석사학위 논문의 마무리에 쉴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영관영어반’ 과정에 입교시킨 것은 능력이 부족한 필자가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주신 신의 배려와 인도라 생각되어 감사할 뿐이었다. 최종 논문심사에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라는 필자의 논문을 검토하던 동국대학교 3명의 지도교수들은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제공해준 귀국보고서가 큰 바탕이 되었고, 다른 학생들은 논문들은 기존의 타 논문에서 인용하여 만들다 보니 필자의 논문보다 교수들이 참고할 사항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사중에 지도교수들은 논문 내용보다 내 신상에 더욱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목발을 짚고 있지만 육사37기로 박지만과 동기라고 하자 그들은 ”아마도 그 동기들은 똑똑한 사람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기생 전체를 칭찬해주어 동기회 품격이 격상되는 이미지에 일조한 기분이 들어 보람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교한 영관영어반 과정은 주말부부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됨과 동시에 이미 취임해 맹활약하는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도 풀었지만 대대장 근무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계기가 되었고, 영관영어반 수료증과 동국대학교 석사학위기를 받아 내실을 기하는 일거다득(一擧多得)의 결실을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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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1)]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손자병법 “허실” 편에는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라는 말이 있다. 이는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것은 아무것도 준비하지않는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쟁 중에서 공격과 방어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우선순위를 두고 작전을 계획하는 것이 실패를 방지하며 승리하는 길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일상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장에서 모든 곳을 공격하거나 방어를 하면 예상치 못하는 곳에 적이 집중하여 작전함으로서 상대적 열세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따라서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미리 판단하고 작전을 준비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의 사자성어이다. 그 이유는 자원과 인력은 한정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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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1)]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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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0]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연말 장병 격려차 부대를 방문한 대통령 후보들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던 12월이 가면서 연말연시가 되자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강조했던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의 지휘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이벤트가 있었다. 지난 봄에 ‘지휘관의 구상을 실현하는 난제·고충 해결이 참모 책무’라는 제목으로 참모들의 임무 수행 과정을 주제로 글을 게재했지만 이번은 상황이 조금 특이하게 달랐다.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3~207)]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 비화’ 참조) 새롭게 작전참모로 보직을 받은 김형배 중령(육사34기)이 앞선 사단장들의 지휘 중점을 보고하고 충성스런 본인의 직언을 통해 사단장을 설득하여 지휘관의 부대운영 중점을 정했기 때문이다. 작전참모는 사단장과 의견을 조율하여 ‘지휘관의 구상’을 만들었고, 그것을 지휘관과 참모가 실현하기 위한 난제와 고충을 해결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는데 때마침 이영대 사단장과 참모의 생각이 일치하여 ‘교육훈련 제일주의’라는 부대운영의 중점이 선정되었다. 따라서 12월31일 종무식날에 예하 대대 및 연대 작전항공장교(S-3Air)들을 소집하여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하였고, 신년초 시무식날에는 사단 전간부를 대상으로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여 붐을 조성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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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0]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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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9]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㉓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YS(김영삼)는 ‘양김시대’의 역사에서 보듯이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고 약속을 지키는 지도자였다. 그는 1961년 5·16 이후 기나긴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며, 1993년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해 자신의 정부를 최초의 '문민정부'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검찰 사정과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등 정치개혁을 필두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에 앞장섰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수 폭로 및 구속, 조선총독부 철거, 금융실명제와 지방자치제 실시 등 핵심적인 개혁을 통해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특히 금융실명제 실시는 금융거래의 투명성과 형평 과세를 통해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침 대통령 당선자 YS의 부대방문에 맞춰 당선을 축하하며 행운을 알리는 하얀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또한 행동으로 보여주던 YS가 남기고 간 것은 놀라울 정도였다. 위문내용이 VTR 5대, 신형TV 40대, 격려금 1000만원으로 대통령 당선자의 위력은 대단했다. 각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방문 준비를 총괄하여 지휘한 작전참모 김형배 중령이 뒤풀이하던 회식 자리에서 “조직을 단결시키고 리더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은 ‘돈’과 ‘인사’이다”라고 던진 한마디가 명언이 되어 귓가를 맴돌며 가슴에 와 닿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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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9]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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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8]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㉒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드디어 12월30일 마지막 방문자인 YS(김영삼)가 부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다른 대통령후보 및 주요 인사들의 격려 방문과는 확연히 달랐다. 특이하게도 YS 비서실은 방문 일정을 30일로 고집했는데 그날 숫자를 거꾸로 읽으면 03이 되기 때문이라고 부대원들은 추측했다.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된 것은 이미 노태우·김종필(JP)과 손잡고 3당 합당을 결행하며 집권 민자당 후보였던 YS가 1992년 12월18일 실시된 제14대 대선에서 영원한 맞수이던 김대중 후보(민주당)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을 대동하고 등장한 대통령 당선자 YS는 66세의 나이답지 않게 훨씬 젊어 보였고, 얼굴에는 기름이 잘잘 흐르며 빛이 났다. 꽉 아문듯한 입술에서는 그의 특유한 고집과 의지를 느낄 수 있었으나 격려사를 할 때에는 약간 실망했다. 그는 격려사를 하면서 가끔씩 힘을 주어 강한 소리로 강조했는데 무슨 내용의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방문했던 달변가 DJ(김대중), JP(김종필)와 너무도 비교가 되었다. 순간 이틀전에 방문한 대한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장군의 모습이 스쳐갔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통해 겪게된 고난의 시간을 학문으로 극복한 강영훈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용장(勇將)이자 덕장(德將)이었다. 또한 군후배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덕담을 던지며, 벽창호처럼 올곧은 참군인의 길을 걷고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저력을 지닌 적십자사 총재로서 자랑스런 군선배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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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8]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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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7]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 무렵 평화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자격으로 무적태풍부대를 방문한 69세의 DJ(김대중)는 역경의 정치활동 중 모진 고문을 받아 다친 다리를 절면서 그 유명한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의 세월에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마치 고향마을 어르신이 손자들을 만나기 위해 부대를 방문한 것 같은 온화한 표정이었다. 회의실에서의 업무보고를 받던 그는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해서인 건강함을 과시하듯 여유를 보여주며 특유의 달변을 쏟아냈다. 참석한 부대장들과 참모들은 전라도 사투리가 약간 가미된 특유 억양의 DJ 언변에 모두 빨려들어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거를 코앞에 둔 터라 급하게 마무리하고 부대를 떠났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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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7]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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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6]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⑳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DJ(김대중)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같은 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1985년 다시 귀국하여 김영삼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김영삼에게 지면서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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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6]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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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5]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⑲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들이 무적태풍부대를 방문하며 치러진 1992년 대선에서 YS는 노태우·김종필(JP)과 손잡고 3당 합당을 결행하며 집권 민자당 후보로, DJ는 제1야당(평화민주당)의 후보로 나섰는데, YS가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3당 합당은 영호남 지역구도 고착으로 이어지면서 현재까지도 지역주의라는 그림자를 만들게 된 시초가 됐다. 이 여파로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1995년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여 1997년 말 DJ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이후에도 남북관계와 통일 등 이념 문제에 있어서 YS는 보수, DJ는 진보의 목소리를 대표하면서 대립했다. 그러다 YS가 2009년 8월 폐렴으로 입원해 죽음을 앞둔 DJ를 전격 문병, 두 사람의 화해가 DJ 서거 직전 극적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김대중의 타계에 이어 김영삼도 2015년 11월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이로서 인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묘사되었던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로, YS(김영삼)ㆍDJ(김대중)로 불리며 한국 현대 정치를 양분해 이끌어 왔던 ‘양김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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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5]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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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4]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⑱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배우 송중기가 주연으로 인기리에 방영되는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실존 인물인 YS(김영삼)ㆍDJ(김대중) 전 대통령이 등장해 관심을 끌고 있다. 1924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을 지낸 뒤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되며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1927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김영삼은 1951년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최연소(만 26세) 의원이 되었다. YSㆍDJ 이 두사람은 1970~80년대 유신체제와 5공 신군부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민주화 투쟁을 위해 손을 잡았던 동지였지만, 두 사람은 결국 갈라서며 대립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 후보 단일화 협상에 실패하면서부터 각각 상도동계(YS)와 동교동계(DJ)라는 야당 2대 파벌 수장으로서 일생을 라이벌 관계로 살았다. 이들은 목표로 했던 대통령직선제를 실현해 놓고도, 후보 단일화 실패(YS는 통일민주당, DJ는 평민당 후보로 출마)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대권을 빼앗겼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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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4]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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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3]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⑰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회의실에서의 업무보고를 받고 전시된 화기, 장비 및 피복 등을 둘러본 후 장병 식당에서 자율배식으로 점심을 받아 어린 병사들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첫 수저를 들기 전에 함께한 장병들에게 진심어린 한마디로 군의 대선배이면서도 제대로 역할을 못한 심정을 표현했다. 당시 67세의 노장이자 모진 풍파를 겪으며 풍운아 인생을 살아온 김종필의 첫 마디는 “미안합니다......!”였다. 이어 그는 감회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사단장으로부터 훌륭한 보고를 받고..., 진열된 장비들과 이곳 식당에 들어와 장병들을 보니까...,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국토방위를 위해 말없이 굳굳하게 책임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고맙고 든든합니다”라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천천히 진심을 전하는 김종필의 첫마디가 멈추자, 식당안의 전장병들은 마치 노쇠한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위하는 마음처럼 느끼며 감동이 가슴 깊히 파고들어 순간 우렁찬 박수를 터뜨렸다. 김종필은 일본인들과 맞섰던 풍운아 청년 시절을 보내고 장교로 임관하여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른바 '정군 운동'으로 강제 전역되었다가 5.16군사정변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준장으로 전역한 군선배였다. 또한 지난 40여년을 정권의 핵심에서 국가발전을 위해 매진했지만 초라한 당시 군의 현실을 확인하고 그동안 군발전의 역할에 소홀했던 것을 자책하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의 방문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어 흐뭇했지만, 그의 진심어린 언행은 긴 여운을 남기었다. 그는 이후에도 킹메이커이자 풍운아의 삶을 지속하다가 ‘제2의 한명회’로 불리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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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3]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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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2]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⑯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종필 전 총리가 무적태풍부대를 방문할 당시인 1992년 말에 그는 ‘신민주공화당’ 총재 신분의 킹메이커로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지지했던 시기였다.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고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하여 국방력 강화와 방위산업 발전에 노력했다. 그러나 사실 국방은 미군에 의존했고 국민들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새마을 운동 및 경제발전에 우선해서 더 많이 전력투구했다. 김종필은 자신이 제3공화국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군림했으며 이후에도 정권 핵심의 위치에서 업적도 많았고 영향력도 대단했지만 군발전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있었다. 제14대 대선에서도 킹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당대표의 자격으로 연말 전방부대 위문을 온 김종필은 부대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했지만 열악한 환경을 직시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장병 복지 등 군의 발전을 위해 소홀했던 것에 대한 회한이 남아있는 표정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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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2]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⑯